하이데라바드

덤프버전 :


Hyderabad

1. 인도의 도시
1.1. 개요
1.2. 역사
2. 파키스탄의 도시



1. 인도의 도시[편집]





우르두어: حیدرآباد (Haydarābād)
텔루구어: హైదరాబాద్ (Haidarābād)


1.1. 개요[편집]



인도 중남부의 도시로, 텔랑가나주의 주도이자 최대도시이다. 인구는 7백만 명으로 인도에서 4번째로 큰 도시이며, 벵갈루루, 첸나이와 함께 드라비다어권 남인도의 중심 도시이다.


1.2. 역사[편집]


도시 이름의 유래는 사자(حيدر)의 도시(آباد)무함마드의 사촌이자 사위, 4대 칼리파이자 초대 이맘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에서 유래했다.[1] 1591년에 쿠틉 샤히 왕조(골콘다 술탄국)의 수도로 지어졌는데, 17세기 말에 무굴 제국아우랑제브에게 정복되었다. 하지만 아우랑제브 사후 제국이 18세기 초에 혼란에 빠지자 무함마드 샤재상이었던 아사프 자흐 1세개혁을 이끌었으나 개혁이 실패하자 1723년 재상직을 그만두고, 데칸으로 내려갔다. 당시 데칸 총독인 무바리즈 칸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총독을 쫓아냈고, 하이데라바드에 명목상 무굴 제국의 신하국인 하이데라바드 왕국을 세웠지만 사실상 독립국을 선포한 것이나 다름없다. 하이데라바드 왕국은 프랑스와 영국의 군사고문을 초빙해 유럽식 군대를 육성했고, 친영파가 되어 마라타 정복에 동참했다. 하이데라바드 왕국은 18세기 말 영국보호국이 되었으며 인도의 독립 직후인 1948년까지 이어졌는데, 시내 중심부에 그 궁전이 남아있어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하이데라바드 왕국은 전술했듯 무슬림 번왕이 다수 힌두교도들을 다스리는 체제였는데, 1947년 인도 제국인도 자치령파키스탄 자치령으로 분할 독립하면서 인도 제국 소속의 토후국들은 인도나 파키스탄 중 하나로 귀속을 요구받게 된다. 하이데라바드는 인도나 파키스탄, 둘 중 어느 나라로도 귀속되는 것을 거부했는데 하이데라바드를 완전히 둘러싼 인도가 자국으로 귀속되라는 압력을 넣었다.[2] 결국 인도로 귀속되기를 원하는 힌두교도 신민들의 지지를 받은 인도가 1948년 하이데라바드를 침공해 멸망시키고[3] 그 자리에 하이데라바드주를 설치했고 1950년이 되어서는 니잠제까지 완전히 폐지해 토후국 체제가 끝나게 된다.[4]
그리고 1956년에는 주 제구성 법을 통과, 구 토후국들을 언어와 인종구성에 따라 해체 후 재구성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하이데라바드도 단일한 하이데라바드 주를 폐지하고 언어권에 따라 마하라슈트라주, 카르나타카주, 안드라프라데시주 등으로 분할하면서 하이데라바드 토후국의 흔적은 완전히 사라졌다.[5] 하지만 똑같은 텔루구어권임에도 구 하이데라바드 토후국 영토의 주민들은 안드라프라데시주의 일부로 사는걸 반대했고 결국 이들의 요구가 받아들어져 2011년 안드라프라데시주에서 옛 하이데라바드 토후국 영토를 떼어내 텔랑가나주를 신설했다.

하지만 무슬림 번왕이 다수 힌두교도들을 다스리던 국가가 인도로의 병합을 거부하다 침공받던 모습은 카슈미르에서의 모습과 종교만 뒤바뀐 판박이라[6] 파키스탄에서는 카슈미르 관련 논쟁에 하이데라바드의 사례를 끌고 오기도 한다.

하이데라바드는 하술할 동명의 파키스탄 도시도 있어서, 인도 인민당이 집권한 이후 힌두트바를 노골적으로 주장하면서 무굴 제국 및 영국인들이 붙였던 도시 이름을 바꾸면서 하이데라바드 같이 이슬람과 관련된 지명도 같이 힌두식으로 바꾸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

도시 건설 당시에 지어진 차르 미나르[7]은 현재까지도 그 독특한 모습을 자랑하며 랜드마크 기능을 하고 있다. 또한, 시내 서부의 언덕 위에 웅장한 모습으로 남아있는 골콘다 성채(Golkonda Fortress)도 관광객이 주로 방문하는 명소이다. 이슬람 토후국의 지배가 600년 넘게 이어진 역사로 인해 파키스탄의 독립 이후로도 현재까지 200만이 넘는 무슬림이 거주하며, 독특한 문화를 엿볼 수 있다. 전체 인구의 약 30%가 이슬람교도, 64%가 힌두교도이다.[8] 하지만 힌두-이슬람 간의 갈등은 1990년의 폭동으로 비화되어 3백 명이 희생되기도 하였다.

인도 IT 산업의 중심지 중 하나지만 동시에 인구의 13%인 백만 명이 빈민이어서 대규모 슬럼가가 도시 외곽에 자리하고 있기도 하다. 인도의 주요 대도시이지만, 일반적으로 인도에서 살기 좋은 도시라고 평가되는 곳은 아니다. 2020년 기준으로 인도 정부가 조사한 생활 편의 지수(Ease of Living Index)에서 인구 백만 이상의 도시 49개 중 하이데라바드는 24위로 중간 수준의 성적이었다.[9]

인도에서는 중요한 교육 도시이기도 하다. 인도 최초의 국립 법과대학이자 인도 최고의 법과대학으로 평가받는 인도 국립 법과대학(National Academy of Legal Studies and Research)이 위치해 있는 곳이기도 하며, 인도 공과대학교 하이데라바드(IIT Hyderabad)는 2008년에 세워진 상대적으로 역사가 짧은 IIT이지만, 하이데라바드의 역동적인 IT 산업에 기반하여 단숨에 인도에서 가장 중요한 이공계 중심 대학 중 하나가 되었다.[10] 1974년에 설립된 하이데라바드 대학교(University of Hyderabad)는 자와할랄 네루 대학교, 델리 대학교, 캘커타 대학교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인도의 최고 명문 종합대학 중 하나로, 보통 IIT가 있는 도시에서 IIT보다 일반 종합대학이 상대적으로 저평가되는 것과는 달리 IIT 하이데라바드를 능가한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이 외에도 하이데라바드의 인도 상과대학원(Indian School of Business)은 인도 최고의 경영학 대학원 과정을 제공한다.

마이크로소프트인도계 미국인 CEO사티아 나델라가 이 곳 출신이다.

인도에서 요리로 유명한 도시이기도 하다. 인도 어디도시를 가든지 하이데라바드 비리야니(biriyani)를 파는 식당을 볼 수 있고 그 명성에 걸맞게 하이데라바드에서 어딜 가든 평균 이상의 비리야니를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자세한 내용은 남인도 요리안드라프라데시/텔랑가나 지방 항목 참조.


2. 파키스탄의 도시[편집]





우르두어: حيدرآباد‬

파키스탄 동남부 신드 주의 도시. 카라치에서 동북쪽으로 140km 떨어져 있다. 인구는 174만명으로 파키스탄에서 8번째로 큰 도시이다. 1768년에 당시 신드 지방을 지배하던 칼호라 왕조의 수도로 건설되었는데, 4대 정통 칼리파이자 시아파 무슬림의 성인인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를 기념하여 세워졌다. 알리는 그의 용맹함이 사자로 표현되었는데, '하이데르'는 페르시아어로 사자를 뜻한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이란의 잔드 왕조는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의 발자국이 찍힌 돌을 보내주었고, 이는 성물로서 마스지드에 보관되어 현재까지도 순례객들을 모으고 있다.

도시의 웅장한 붉은 성채 (Pacco Qillo), 탈푸르 / 칼호로 영묘, 신드 박물관 등이 볼 만하다. 도시의 인구의 95%는 무슬림이지만 인도와의 인구 교환 이후로도 5%의 힌두교 신자가 남아있다. 본래 철도 교통과 함께 하이데라바드 국제공항이 있었다. 하지만 2013년 이후 민간 가능을 상실하여 카라치진나 국제공항을 이용하게 되었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25 04:22:35에 나무위키 하이데라바드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알리의 별명이 바로 사자(حيدر)였다.[2] 골콘다 광산의 다이아몬드 등으로 막대한 부를 끌어모아 한때 아시아의 제일가는 거부 중 하나로 손꼽혔던 하이데라바드의 마지막 니잠 오스만 알리 칸은 아직 즉위도 안 한 엘리자베스 공주에게 즉위식 때 착용하라며 거대한 다이아몬드 목걸이까지 선물하면서 어떻게든 영국의 지지를 끌어내려 했지만, 이미 인도에서 완전 철수를 결정한지가 오래였던 영국 정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3] 폴로 작전Operation Polo. 전쟁이라 하기 싫었던 인도는 하이데라바드 침공작전을 군사작전이 아닌 경찰행위로 규정했다. 최소 2만7천, 추정치 20만, 혹은 그 이상이 살해당했고 더 많은 무슬림들이 현지 깡패와 군대의 폭력에 노출되었다.[4] 단 니잠 오스만 알리 칸은 1956년까지 하이데라바드 주지사로 임명되었다. 라지프라무크(Rajpramukh)라고 하는데, 마이소르나 라자스탄 등 거대 토후국 출신 주들의 경우에는 순조로운 권력 이양을 위해 이렇게 옛 군주들을 라지프라무크로 임명해 해당 주의 인도 편입을 진행하도록 했다.[5] 이 때 오스만 알리 칸을 포함해 라지프라무크들도 일제히 해임했다.[6] 카슈미르에서는 힌두교도 번왕이 무슬림 다수를 다스리는 체제였고, 인도와 파키스탄 양국 모두로의 귀속을 거부하다가 파키스탄 민병대의 침공으로 인도 정부의 도움을 청하면서 분쟁지역이 되었다.[7] 4개의 탑[8] 광역시 내의 Hyderabad district는 옛 하이데라바드 니잠국 시절의 주요 도심을 중심으로 하기에 2011년 통계 기준으로 무슬림 인구가 43.89%, 힌두교도 인구가 51.45%로 조사되었다. https://en.m.wikipedia.org/wiki/Hyderabad_district,_India 역사적 배경으로 인해 무슬림 인구가 상당한 도시이다.[9] 인도 정부 부처의 2020년 랭킹 페이지(2021년 4월 23일 접속)[10] 단 캠퍼스가 하이데라바드 시내에 있는 것은 아니고, 하이데라바드 광역권에 속한 다른 도시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