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버리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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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경기[1]
2.1. 프리뷰
2.2. 라인업 및 포메이션
2.3. 내용
2.3.1. 전반전
2.3.2. 후반전
3. 뒷이야기



1. 개요[편집]


1934년 11월 14일 아스날 스타디움(통칭 하이버리)[2]에서 펼쳐진 잉글랜드이탈리아와의 축구 A매치.

당시 자타공인 세계 최강팀 잉글랜드와 월드컵 챔피언 이탈리아와의 맞대결이라 두 팀간의 전력상으로도 충분한 화제 거리였지만 거친 경기 양상으로도 더욱 유명한 경기이다.


2. 경기[3][편집]


경기장
아스날 스타디움
런던 - 영국
경기일
1934년 11월 14일
국 가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잉글랜드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
이탈리아
득 점
3
2
득점자
에릭 브룩 (3')
에릭 브룩 (10')
테드 드레이크 (12')
주세페 메아차 (58')
주세페 메아차 (62')


2.1. 프리뷰[편집]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전인 1930년대만 해도 축구를 상징하는 국가대표팀은 누가 뭐래도 종주국 영국의 팀들이었고 그들 중 잉글랜드가 최강의 전력을 자랑했다. 영국은 당시 다른 나라들에 비해 2배 이상의 축구 역사를 갖고 있었고 특히 잉글랜드는 1929년 스페인 원정 이전에는 비영국팀들에게 무패를 기록했다. 스코틀랜드는 1930년대에 들어와서 오스트리아에 호되게 당하며 분더팀의 명성에 밑거름이 되는 신세로 전락했지만 잉글랜드는 그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4-3 승리를 거두는 등 종주국의 자존심을 더 오래 지켰다. 그 외에도 초대 월드컵 당시 4강의 돌풍을 일으켰던 미국 대표팀 멤버들의 상당수가 영국 출신 이민자들이었고 나중에 미국 대표팀의 주전 멤버 중 하나였던 짐 브라운잉글랜드 1부 리그[4]에 진출했지만 1부 리그라 하더라도 리저브 팀, 2부 리그 팀들에서 보내는 시간이 훨씬 길 정도였다.

이런 상황이다보니 1930년대의 세계 국가대표 축구계는 잉글랜드는 다른 세계의 팀이고 그 밑에서 나머지 팀들이 각축을 다투는 모양새였는데 이런 잉글랜드의 비영국팀을 상대로 한 홈 무패 행진[5]에 호기롭게 도전장을 내민 팀이 바로 1934년 월드컵의 챔피언 이탈리아였다. 이탈리아의 월드컵 우승 이후 첫 A매치였고 진짜 세계 챔피언을 가리는 시합으로 많은 축구팬들의 관심을 모았다.


2.2. 라인업 및 포메이션[편집]



잉글랜드 선발명단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GK
프랭크 모스
FB
조지 메일

FB
에디 햅굿
HB
클리프 브리튼

HB
잭 바커

HB
윌프 코핑
FW
스탠리 매튜스

FW
레이 보우덴

FW
테드 드레이크

FW
클리프 배스틴

FW
에릭 브룩
VS
FW
라이문도 오르시

FW
조반니 페라리

FW
주세페 메아차

FW
피에트로 세란토니

FW
엔리코 구아이타
HB
루이지 베르톨리니

HB
루이스 몬티

HB
아틸리오 페라리스
FB
루이지 알레만디

FB
에랄도 몬첼리오
GK
카를로 체레졸리
이탈리아 선발명단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


  • 잉글랜드의 베스트 11 중 7명이 아스날 소속이라 잉글랜드는 더 큰 홈 어드밴티지를 기대할 수 있었다.


2.3. 내용[편집]



2.3.1. 전반전[편집]


파일:Ferraris & Hapgood.jpg
양팀 주장 페라리스와 햅굿의 경기 전 악수 사진.
하지만 화기애애했던 이 분위기는 전반 2분 만에 박살났다.

전반 1분, 잉글랜드페널티 킥을 얻어냈다. 이탈리아 골키퍼 카를로 체레졸리테드 드레이크에게 파울을 범했고 심판은 지체 없이 페널티 킥을 선언했다. 하지만 에릭 브룩의 킥은 체레졸리의 선방에 막혔고 이렇게 경기는 화려하게 시작되었다.

이 상황이 정리되기도 전인 전반 2분 만에 이탈리아에 대형 악재가 터졌다. 이탈리아의 센터 하프백 루이스 몬티가 테드 드레이크의 태클로 인해 오른발이 부러진 것이었다. 당시는 선수 교체가 없었기 때문에 몬티는 쉽게 피치 밖으로 나갈 수 없었고 잉글랜드는 12분 사이에 3골을 넣으며 승부의 추를 순식간에 잉글랜드로 기울였다. 몬티는 15분 동안 피치에서 버텼지만 그 부상은 참고 뛸만한 수준이 아니었고 결국 그는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몬티의 전성기는 그렇게 끝났다. 이탈리아의 1차 방어선은 그렇게 무너졌고 브룩과 클리프 배스틴은 이탈리아 수비수들을 계속 괴롭혔다.

브룩은 경기 극초반에 페널티 킥을 놓친 아쉬움을 털어내려는 듯 프리킥과 헤더[6]로 2골을 기록했다. 몬티가 나가고 난 후 경기가 3골 차로 벌어졌지만 이탈리아 선수들은 포기하지 않고 전략을 수정해 다시 잉글랜드와 맞섰다. 그 이후로 이탈리아는 이 경기에서 잉글랜드에 더 이상 실점을 허용하지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받은 것을 돌려주는 데에도 인색하지 않았다. 에디 햅굿은 코뼈가 부러졌고[7] 보우덴도 발목을 다쳤으며 브룩은 팔이 부러졌다. 몬티를 보내버린 드레이크에게도 주먹이 날아왔다.


2.3.2. 후반전[편집]


전반전의 대부분을 10명이 뛴 이탈리아는 별다른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여기서 새로운 이탈리아의 주장 아틸리오 페라리스가 라커룸에서 선수들을 독려했고 후반전에 이탈리아는 확실히 다른 모습을 보였다.

주세페 메아차가 후반 13분과 17분에 연속골을 기록하면서 이탈리아는 잉글랜드의 턱밑까지 추격했다. 그 이후 이탈리아는 동점골을 넣기 위해 계속 분전했지만 그들의 공격은 잉글랜드의 골키퍼 프랭크 모스와 수비수 윌프 코핑에 가로막혔고 결국 거칠었던 경기는 그렇게 끝났다.

비록 이탈리아는 패했지만 후반전에는 확실히 월드컵 챔피언다운 모습을 보였고 하이버리의 사자라는 명예로운 별명도 얻었다.


3. 뒷이야기[편집]


  • 무솔리니이탈리아잉글랜드를 꺾으면 선수 각각에 알파 로메오 한 대씩과 150파운드[8]의 상금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이탈리아가 패배해서 없던 일이 되었다.
  • 스탠리 매튜스는 33년간 700회 출전[9]이 넘는 그의 긴 커리어에서 이 경기를 가장 격렬했던 경기라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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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처: 위키피디아, 더풋볼히스토리보이즈[2] 에미레이트 스타디움 개장 이전의 아스날 홈구장이었다.[3] 출처: 위키피디아, 더풋볼히스토리보이즈[4] 당시 풋볼 리그 디비전 1[5] 이 무패 행진은 19년이 더 지나 1953년에 유니폼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놈들에게 3대6으로 털리며 처참하게 깨지게 된다. 그 유니폼도 못 갖춘 상놈들은 바로 페렌츠 푸스카스로 대표되는 매직 마자르였다.[6] 브룩은 169cm의 단신이었으나 당시 19살의 어린 아웃사이드 라이트 포워드 스탠리 매튜스의 질 높은 크로스가 헤더에 힘을 보태주었다.[7] 이로 인해 햅굿은 15분간 피치를 비웠다.[8] 현재의 가치로 환산하면 6천파운드(한화로 약 1200만원)쯤 된다고 한다.[9] 제2차 세계 대전으로 7년을 날려먹어 출전 경기 수가 다소 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