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커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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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중국 남부 하이난성의 성도. 섬의 북부에 위치한 항구도시이며 인구는 230만명이다. 본토와 충저우(琼州) 해협을 사이에 두고 12km 떨어져 있다. 또한 휴양지로 유명한 하이난의 입구로서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다. 그 위치에 비해 역사가 깊은데, 고대부터 유배지로 쓰인 것이 이유다. 유배자들 중에는 당나라 대의 이덕유(李德裕)와 송나라 대의 이강(李綱), 조정(趙鼎), 이광(李光), 호전(胡銓) 등 5명이 유명하다. 그들은 간신에 맞서 충언을 하다가 유배되었다는 공통점이 있어 오공(五公)으로 추앙받았으며, 그들을 기리며 모시기 위해 오공사(五公祠)[1] 라는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 청나라 광서제 때에 녹기와를 얹어 증축 및 보수를 하기도 했다.[2] 이래 봬도 오공사는 하이커우의 랜드마크이기도 하다. 그외에 소동파 역시 하이난성에서 유배 생활을 하였으며, 그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소공사(苏公祠)가 남아 있다.[3]
명나라 가정제 시절, 가정제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고 이후 융경제 때 중용되어 일조편법 등의 개혁을 시행한 해서가 이 곳 출신이다. 여담으로, 하이난성 전체에 해당되는 이야기지만 오랫동안 광둥성 소속이었음에도 월어가 아닌 민남어가 주요 언어로 쓰인다.
2. 역사[편집]
1514년 하이커우에서 태어나 고향에 묻힌 해서의 묘
파일:하이커우 중국.jpg
19세기 개항기에 세워진 포르투갈 / 프랑스식 건물들. 묘하게 미국 뉴올리언스 구시가지 느낌이 난다.
본래 하이커우는 송대에 백사진(白沙津)으로 불리다가 명대에 해구위(海口衛)로 개칭되었다. 그리고 해남도의 중심지는 본래 내륙으로 15km 정도 더 들어간 충산(琼山)이었는데, 1858년의 톈진 조약에 의해 하이커우가 개항장이 되며 급속도로 발전하였고 현재 충산은 하이커우시에 소속된 충산구(琼山区)이다. 19세기 말엽에 하이커우는 현지 발음인 Hoihow 로 알려졌다. 이후 중일전쟁이 터졌고 하이커우는 1939년부터 종전인 1945년까지 일본군에 점령되었다. 국공내전 시기에는 중국 국민당의 국민혁명군이 주둔하다가 1950년 4월에야 인민해방군에 점령되었다. 본래 하이난은 광둥성에 속했는데 1989년 하이난성이 따로 생기며 하이커우가 그 성도가 된 것이다. 90년대 들어서는 경제 특구로 선정되어 시멘트, 화학 공업이 발달하였다. 현재도 광저우와의 해상 교류는 활발하며, 시내 동쪽, 난두강(南渡江) 건너에는 하이커우 메이란 국제공항이 있어 휴양객들로 붐빈다.
3. 행정구역[편집]
4개의 시할구(市辖区)로 이뤄져 있으며 시정부청사는 슈잉구에 있다.
4. 교통[편집]
4.1. 철도[편집]
본토와 연결된 교량은 없지만 도시 서쪽에 위치한 하이커우역이 본토와 철도연락선 형태로 연결되어 베이징이나 기타 도시에서 철도를 이용해 기차에 탄채로 입장할 수 있으며, 시내에는 하이난순환고속철도의 중심역인 하이커우둥역이 있어서 남부 싼야 등으로 이동할 수 있다.
4.2. 항공[편집]
하이난순환고속철도 메이란역과 연계되어 있는 하이커우 메이란 국제공항에서 티웨이항공이 인천국제공항에서 직항을 띄우고 있어서 대한민국에서도 직항으로 올 수 있다.
5. 출신인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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