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리히 뤼프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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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독일의 정치인으로, 테오도어 호이스의 뒤를 이어 서독의 2대 대통령을 지냈다.
2. 생애[편집]
독일 제국 프로이센 왕국의 베스트팔렌 주에서 제화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정말 빈곤한 가정환경에서 자란 것으로 알려져있으며, 측량사로 활동하다가 1차대전 시기에 입대하여 중위로 전역한다. 이후 1930년 가톨릭 중앙당에 입당하면서 정계 활동을 시작하였으나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집권한 이후 수권법을 발의함에 따라 중앙당은 해산되었고, 뤼프케는 공금을 횡령한 혐의로 투옥된다.[1] 이후 2차대전 시기에는 알베르트 슈페어와의 친분을 바탕으로 각종 군사시설 공사를 담당하는 일을 맡았으며, 이로 인해 나치의 협력자가 아니냐는 루머[2] 도 오늘날까지 심심찮게 돌고 있다.[3]
종전 후에는 다시 정계에 복귀하여 중앙당을 계승한 기독교민주연합에 가입하였으며 고향이었던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의 농업장관을 담당하다가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에 의해 중앙 정계까지 발탁되어 연방 정부 차원의 농업장관으로 임명된다. 그다지 정치적이지 않았던 그의 성향에 주목한[4] 콘라트 아데나워는 1959년 테오도어 호이스의 후임 대통령을 결정할 선거의 기민당 측 후보로 뤼프케를 지명하였으며, 의회에서 기민당이 다수를 점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뤼프케는 어렵지 않게 대통령직에 오를 수 있었다.
상술했듯이 독일의 대통령직은 명예직이었기 때문에 실권은 그의 임기 중 총리였던 콘라트 아데나워와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쿠르트 키징어에게 있어서 별다른 눈에 띄는 행적은 없었지만 어쨌든 무난히 대통령 임기를 수행하다가
3. 여담[편집]
- 무척이나 말이 느렸던 인물이다. 당연히 정치인으로는 치명적인 단점. 한번은 연설 중에 그가 자꾸 사람의 이름을 더듬자 답답해진 청중들이 친절히 소리쳐서 알려주었다고(...)
캐굴욕
- 실제있었던 일인지 단순한 유머인지 알 수는 없지만 뤼프케식 영어(Lübke-Englisch)라는 에피소드가 유행하기도 했다. 간략히 설명하자면 문맥, 숙어 같은 것은 죄다 무시하고 단어 단어마다 끊어서 번역을 한 문장을 말하는 건데
번역기다음과 같다.
뤼프케가 엘리자베스 2세와의 회담을 가질 때의 일이었다. 접견 과정에서 둘은 경마장을 들리게 되었는데 뤼프케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싶었다.
''이제 곧 (경마가) 시작할 것입니다." 이 문장을 독일어로 번역하자면 다음과 같다. "Gleich geht's los."
영어로 옮기자면 "Soon it will begin" 정도로 옮겨야 됐지만, 영어가 짧았던 뤼프케는 단어 단어마다 끊어서 번역을 했고, 그 결과 다음과 같은 괴랄한 영어 문장이 완성됐다.
"Equal[6] goes[7] it[8] loose.[9] "
- 1967년 3월 2일 박정희 대통령의 서독 방문에 대한 답방 형식으로 대한민국을 방문하였다. 이는 독일 뿐만 아니라 유럽의 국가원수로서는 최초의 방한 이었다.뉴스 박정희의 주장일 뿐이지만, 뤼프케는 학생 데모를 부정적으로 보는 발언을 했다고 한다.
"독일은 1차 대전 이후 그동안에 전쟁을 2번했고 정권이 몇 번 바뀌고 사회에 여러 가지 혼란이 있었지만 1919년에 한번 함부르크항에서 영국배와 독일배가 충돌을 했을 때 한번 학생데모 사건이 있은 연후에 그 뒤에 학생들은 한 번도 거리에 나온 일이 없다.[10] 학생들은 어디까지든지 자기들 이 시기에는 공부를 해야 되고 배우는 시간이고 실력을 양성해야 하는 시간인데 자기들이 직접 이런 일에 참여할 시기가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다. 그런데 왜 한국의 학생들은 거리에 나오기 좋아합니까? 학생들이 거리에 떠든다고 해서 난 절대 그 사람들이 애국주의 학생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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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결국 증거불충분으로 무죄판결을 받긴 했다. 그런데 무려 20개월이나 투옥시킨걸 보면 나치가 어떻게는 뤼프케를 가둬두려고 무진 애를 쓴듯...[2] 동독에 의해 뤼프케가 나치 강제수용소의 책임자라는 루머까지 제기된 상황이다.[3] 2차대전 직후 독일에서 나치 경력 자체는 정말 악질적인 경우만 아니라면 사회생활에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당장 3대 서독 총리였던 쿠르트 키징어도 리벤트로프의 외교부에서 근무했던 경력이 있다. 독일에서 오늘날과 같이 철저한 과거사 반성과 나치 청산 움직임이 벌어진 것은 68 혁명 이후의 일.[4] 독일 현재 헌법상 국가원수는 대통령이다. 그렇지만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워낙 호되게 데였던 탓에 실질적인 권력은 전무한 상황.[5] 사실 건강 악화가 아니더라도 사임 3달 후 있었던 총선에서 사민당이 집권했기 때문에 그리 오래 자리를 유지하지는 못했을 것이다.[6] 독일어로 gleich는 '곧'(soon)이라는 의미와 더불어서 '같다'(equal, same)라는 의미도 있다.[7] 독일어 문장의 geht로 '가다'라는 의미이다.[8] 독일어 문장의 's(es)[9] 독일어 문장의 los. 원래는 독일어에서 geht와 los가 합쳐져서 '시작하다'라는 의미를 가지지만 단어 하나 하나를 끊어서 옮기다보니(...) Soon goes it loose라고만 표현했어도 좀 어투가 고풍스러울 뿐 어느 정도 여왕이 알아들었을 것이다.[10] 그의 주장이 무색하게도, 이후 1968년 서독 역시 68운동의 구심점 중 하나가 되어 곳곳에서 학생 시위가 벌어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