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리히 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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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Nobel_Prize.png 노벨문학상 수상자

20세기 [ 펼치기 · 접기 ]
1901년
1902년
1903년
1904년
1905년
쉴리 프뤼돔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테오도르 몸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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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에른스티에르네 비외른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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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데리크 미스트랄, 호세 에체가라이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파일:스페인 국기(1785–1873, 1875–1931).svg
헨리크 시엔키에비치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20px-Military_ensign_of_Vistula_Flotilla_of_Congress_Poland.svg.png
1906년
1907년
1908년
1909년
1910년
조수에 카르두치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
러디어드 키플링
파일:영국 국기.svg
루돌프 오이켄
파일:독일 제국 국기.svg
셀마 라겔뢰프
파일:스웨덴 국기.svg
파울 폰 하이제
파일:독일 제국 국기.svg
1911년
1912년
1913년
1914년
1915년
모리스 마테를링크
파일:벨기에 국기.svg
게르하르트 하웁트만
파일:독일 제국 국기.svg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파일:인도 제국 국기.svg
수상자 없음
로맹 롤랑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1916년
1917년
1918년
1919년
1920년
베르네르 폰 헤이덴스탐
파일:스웨덴 국기.svg
카를 기엘레루프, 헨리크 폰토피단
파일:덴마크 국기.svg
수상자 없음
카를 슈피텔러
파일:스위스 국기.svg
크누트 함순
파일:노르웨이 국기.svg
1921년
1922년
1923년
1924년
1925년
아나톨 프랑스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하신토 베나벤테
파일:스페인 국기(1785–1873, 1875–1931).svg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파일:아일랜드 국기.svg
브와디스와프 레이몬트
파일:폴란드 국기(1919-1927).svg
조지 버나드 쇼
파일:영국 국기.svg 파일:아일랜드 국기.svg
1926년
1927년
1928년
1929년
1930년
그라치아 델레다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
앙리 베르그송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시그리드 운세트
파일:노르웨이 국기.svg
토마스 만
파일:독일 국기(3:2 비율).svg
싱클레어 루이스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1931년
1932년
1933년
1934년
1935년
에릭 악셀 카를펠트
파일:스웨덴 국기.svg
존 골즈워디
파일:영국 국기.svg
이반 부닌
루이지 피란델로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
수상자 없음
1936년
1937년
1938년
1939년
1940년
유진 오닐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로제 마르탱 뒤 가르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펄 벅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프란스 에밀 실란패
파일:핀란드 국기.svg
수상자 없음
1941년
1942년
1943년
1944년
1945년
수상자 없음
요하네스 빌헬름 옌센
파일:덴마크 국기.svg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파일:칠레 국기.svg
1946년
1947년
1948년
1949년
1950년
헤르만 헤세
파일:독일 국기.svg 파일:스위스 국기.svg
앙드레 지드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토머스 스턴스 엘리엇
파일:영국 국기.svg
윌리엄 포크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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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트런드 러셀
파일:영국 국기.svg
1951년
1952년
1953년
1954년
1955년
페르 라게르크비스트
파일:스웨덴 국기.svg
프랑수아 모리아크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윈스턴 처칠
파일:영국 국기.svg
어니스트 헤밍웨이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할도르 락스네스
파일:아이슬란드 국기.svg
1956년
1957년
1958년
1959년
1960년
후안 라몬 히메네스
파일:스페인국 국기(1945–1977).svg
알베르 카뮈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파일:소련 국기.svg
살바토레 콰시모토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생존 페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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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1962년
1963년
1964년
1965년
이보 안드리치
파일: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국기.svg
존 스타인벡
파일:미국 국기.svg
요르기우스 세페리스
파일:그리스 국기(1822-1978).svg
장폴 사르트르
파일:프랑스 국기.svg
(수상 거부)
미하일 숄로호프
파일:소련 국기.svg
1966년
1967년
1968년
1969년
1970년
슈무엘 요세프 아그논, 넬리 작스
파일:이스라엘 국기.svg 파일:독일 국기.svg 파일:스웨덴 국기.svg
미겔 앙헬 아스투리아스
파일:과테말라 국기.svg
가와바타 야스나리
파일:일본 국기.svg
사뮈엘 베케트
파일:아일랜드 국기.svg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파일:소련 국기.svg
1971년
1972년
1973년
1974년
1975년
파블로 네루다
파일:칠레 국기.svg
하인리히 뵐
파일:독일 국기.svg
패트릭 화이트
파일:호주 국기.svg
에위빈드 욘손, 하뤼 마르틴손
파일:스웨덴 국기.svg
에우제니오 몬탈레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1976년
1977년
1978년
1979년
1980년
솔 벨로
파일:미국 국기.svg
비센테 알레익산드레
파일:스페인국 국기(1945–1977).svg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
파일:폴란드 국기(1928–1980).svg 파일:미국 국기.svg
오디세우스 엘리티스
파일:그리스 국기.svg
체스와프 미워시
파일:폴란드 국기(1928–1980).svg 파일:미국 국기.svg
1981년
1982년
1983년
1984년
1985년
엘리아스 카네티
파일:불가리아 인민 공화국 국기(1971–1990).svg 파일:영국 국기.svg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파일:콜롬비아 국기.svg
윌리엄 골딩
파일:영국 국기.svg
야로슬라프 사이페르트
파일:체코 국기.svg
클로드 시몽
파일:프랑스 국기.svg
1986년
1987년
1988년
1989년
1990년
월레 소잉카
파일:나이지리아 국기.svg
조지프 브로드스키
파일:미국 국기.svg
나기브 마푸즈
파일:이집트 국기.svg
카밀로 호세 셀라
파일:스페인 국기.svg
옥타비오 파스
파일:멕시코 국기.svg
1991년
1992년
1993년
1994년
1995년
나딘 고디머
파일:남아프리카 연방 국기.svg
데릭 월컷
파일:세인트루시아 국기(1979–2002).svg.png
토니 모리슨
파일:미국 국기.svg
오에 겐자부로
파일:일본 국기.svg
셰이머스 히니
파일:아일랜드 국기.svg
1996년
1997년
1998년
1999년
2000년
비스와바 심보르스카
파일:폴란드 국기.svg
다리오 포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주제 사라마구
파일:포르투갈 국기.svg
귄터 그라스
파일:독일 국기.svg
가오싱젠
파일:프랑스 국기.svg




Heinrich Böll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undesarchiv_B_145_Bild-F062164-0004%2C_Bonn%2C_Heinrich_B%C3%B6ll.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Nobel_Prize.png 1972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본명
하인리히 테오도어 뵐(Heinrich Theodor Böll)
국적
서독 파일:독일 국기.svg
출생
1917년 12월 21일, 독일국 쾰른
사망
1985년 7월 16일 (향년 67세), 독일 Kreuzau
직업
소설가
대학
쾰른 대학교
배우자
안네마리 체히
종교
가톨릭[1] #

1. 개요
2. 생애
3. 여담


1. 개요[편집]


독일소설가. 노벨문학상 수상자이며, 소설 '열차는 정확했다 (Der Zug war pünktlich) (1947)', ''여인과 군상 (Gruppenbild mit Dame) (1971)',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Die verlorene Ehre der Katharina Blum) (1974)'으로 유명하다.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는 아서 밀러의 희곡 <세일즈맨의 죽음>을 영화화한 감독인 폴커 슐뢴도르프에 의해 1975년에 영화화되어 큰 인기를 끌었다.


2. 생애[편집]


하인리히 뵐은 1917년 쾰른의 목공예 가문의 여섯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카이저 빌헬름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1939년 쾰른 대학교 독문학과에 입학하나 곧 제2차 세계 대전에 징집되었다. 전쟁 중에는 부상을 당하여 야전병원 생활을 하기도 하고 꾀병과 서류 조작으로 탈영하기도 했다. 이유는 히틀러를 위해서 죽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전후 귀향하여 '전쟁에서 본 것'과 전후의 '폐허'에[2] 대해서 쓰기 시작했다. 1949년 미델하우베 출판사와 전속 계약을 하고 첫소설 <열차는 정확했다>의 출판을 시작으로 참혹한 참전 경험과 전후 독일의 참상을 그린 작품들을 주로 발표했다. 1951년 '47그룹 문학상'을 받으면서 문인으로서의 위치를 다졌고, 1953년에 출간한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로 비평가와 독자들 모두로부터 찬사를 받으며 작가로서의 대성공을 거두었다. 1967년에는 독일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게오르크 뷔흐너 상'을 수상했다. 이후부터 독일 사회의 불균형한 발전과 팽배해진 물질주의로 인한 도덕성 결여에 대해 지적하고 가톨릭교회의 부패에 대해 정면으로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뵐이 보기에 독일 가톨릭교회는 정부의 자본주의 경제 정책에 순응하고 동조함으로써 그 재정 기반을 확보해 갔기 때문이다.

1970년대에는 사회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고 독일 사회와의 갈등도 심화되었다. 특히 1969년과 1972년 뵐은 귄터 그라스와 함께 총선 선거 유세에 직접 참여하며 사민당빌리 브란트를 적극 지지했다. 또한 1971년 독일인으로서는 최초로 국제 펜클럽 회장으로 선출되어 세계 곳곳에서 탄압받고 있는 작가와 지식인들의 석방을 위해 노력하였다.

1971년에는 성취 지향 사회에 대한 저항을 담은 <여인과 군상>을 발표하고 이듬해인 197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1929년의 토마스 만 이후 독일이 이 상을 받은 것은 43년 만이었다. 1974년에는 한 무고한 여성이 언론의 횡포에 의해 사회로부터 매장되어가는 과정을 담은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를 발표했다. 이 소설은 언론 재벌 악셀 슈프링거와 뵐의 개인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했다. 소설은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언론계에 대한 뵐의 '문학적 복수'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 소설은 1975년 폴커 슐뢴도르프에 의해 영화화 되어 크게 흥행하였다.

뵐은 1970년대 말부터는 대안사회를 위한 평화운동과 환경운동을 펼쳤다. 소련이 동유럽에 SS20 핵탄두 미사일을 배치하자 나토(NATO)는 서독에 퍼싱 II 중거리 미사일과 크루즈 미사일을 배치하기로 결의했다. 이때 평화주의자들과 유럽 작가들이 양측의 무장 강화를 반대하는 시위를 펼쳤고, 뵐은 평화운동의 주요 연사가 되었다. 또한 그는 1970년대 중반부터 본격화된 독일 시민들의 반핵운동과 환경운동의 선두에 섰으며 녹색당의 창당에도 적극 참여했다. 1970년에는 환경문제를 다룬 소설인 <신변보호>를 발표하였다. 이 소설은 환경 파괴는 단독적인 문제가 아니라 정치, 경제 문제와 얽혀 있으며 바로 이 사회적 모순 상황에 원인이 있음을 드러낸다.

문학 작품분만 아니라 행동으로도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한 활동에 진력했던 뵐은 1985년 동맥경화로 세상을 떠났다. 사망 이후 그를 기려 '쾰른 문학상'은 '하인리히 뵐 문학상'으로 개칭되었으며, 쾰른 루드비히 박물관의 광장도 그의 이름을 땄고, 독일의 13개 학교에 하인리히 뵐의 이름이 붙여졌다.

3. 여담[편집]


  • 1970년대 후반에 타키투스게르마니아를 읽은 뒤, '우리 게르만 조상님들 좀 짱인듯'이라는 식의 서평을 언론에 개재했다가, 반민족주의적 성향의 지식인들에게 미친듯이 까인 흑역사가 있다.
  • 알렉산드르 솔제니친과 절친한 관계였다. 솔제니친이 소련에서 추방된 이후 한동안 뵐에게 신세를 졌을 정도로 각별한 사이.
  • 한국박정희 대통령에게 김지하 시인의 석방을 청원한 적도 있다.
  • 말년에 자신의 자필 원고나 소장 도서들을 모교인 쾰른 대학교에 기부했다. 쾰른 대학교 측에서도 이를 기려서 하인리히 뵐 문서보관소(Heinrich Böll Archiv)를 건축했는데, 2009년에 이 건물이 무너지면서 대부분의 자료들이 손실을 입었다.
  • 독일 녹색당은 1996년 당의 창당과 발전에 기여한 뵐의 업적을 기려서 자신들의 싱크 탱크하인리히 뵐 재단으로 명명했다.
  • 유로파 유니버셜리스 갤러리에서 평행세계 드립을 칠 때 높은 빈도로 이 사람이 저자로 등장한다. 누군가가 앤서니 비버의 제2차 세계 대전사를 패러디하면서 비버 대신 뵐을 끼워 넣었기 때문. 뵐 얘기가 나오면 ‘프랑스가 6주만에 항복하다니 말이 되냐?’, ‘아돌프 히틀러가 누군데 씹덕새끼야’ 등 장단을 맞춰주는 댓글도 달린다.
  • 대체역사 마이너 갤러리에서는 1945년 광복 이후의 역사에 대해서는 정떡 문제로 언급을 금하고 대신 하인리히 뵐 마이너 갤러리에서 얘기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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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톨릭 교회를 비판했만 스스로를 분명히 가톨릭이 아니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2] 그래서 독일에서는 그의 문학을 폐허 문학(Trümmerliteratu)이라고 부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