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리히 슈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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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슈투름(Heinrich Sturm : 1920. 6. 12~1944. 12. 22)

제2차 세계 대전 전투기 에이스 일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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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30위
순위
이름
국적
격추 수
주 기종
비고
31위
하인리히 슈투름
독일
158대


32위
게르하르트 튀벤
독일
157대


33위
한스 바이스베그너
독일
152대


페터 뒤트만
독일


35위
고르돈 골로프
독일
150대


36위
프리츠 텍트마이어
독일
146대


37위
알빈 볼프
독일
144대


38위
쿠르트 탄처
독일
143대


39위
프리드리히-카를 뮐러
독일
140대


40위
카를 그라츠
독일
138대


하인리히 제츠
독일


루돌프 트렝켈
독일


43위
프란츠 샬
독일
137대


발터 볼프룸
독일


45위
호르스트-귄터 폰 파송
독일
136대


오토 푀네콜트
독일


카를-하인츠 베버
독일


48위
요아힘 뮌헤베르크
독일
135대


49위
한스 발트만
독일
134대


50위
알프레트 그리슬랍스키
독일
133대


요하네스 비제
독일


▼ 52~66위




1. 참전 초기
2. 공습으로 중상
3. 치명적인 이륙 사고
4. 서훈



1. 참전 초기[편집]


1941년 여름에 제52전투항공단(JG 52)의 제6비행중대에 첫 자대로 들어갔을 때, 하인리히 슈투름의 계급은 하사였다.
헤센주의 디에부르크(Dieburg) 출신인 그는 1941년이 저물기 전까지 3대 격추를 헤아리는 평범한 조종사로 보였다. 그 후 잠시 동안 공군사관학교의 비행 교관으로 파견되었다가 1942년 11월에 JG 52 제II비행단에 다시 편입되었다. 1년이 지난 12월 17일까지도 6대의 킬수가 전부였던 그였지만, 1943년 1월 1일자로 전시 진급 대상자가 되어 소위로 승진했다.

장교가 된 덕분이었을까? 그 후부터 순조롭게 전과를 올린 그는 4월 15일에는 20번째 승리를 거두었다. 4월 20일의 출격에서 한꺼번에 5대를 격추한 그는 6월 30일에는 40번째 전과를 거두고 11월 30일까지 75대의 스코어를 올렸다. 1943년 9월 1일에 하인리히 슈투름은 그가 속한 제4비행중대원 중에서 가장 높은 전과를 올린 베테랑으로 성장해 있었다.
1944년 3월 23일에 대망의 100기 격추를 달성한 그는 3월 26일자로 기사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2. 공습으로 중상[편집]


호사다마였는지, 4월 16일에 그가 발진 대기하던 크림 반도의 비행장 상공에 갑자기 공습 경보도 없이 Pe-2 폭격기들이 들이닥쳤고, 하인리히도 이때 떨어진 폭탄 파편에 의해 중상을 입었다. 구호반의 적절하고 재빠른 응급처치로 생명에는 이상이 없었지만 하인리히의 상처는 꽤 커서 15개월 이상이나 입원해 있어야만 했다. 그가 다시 JG 52로 돌아온 것은 기지도, 탑승기도, 지휘관과 전우들까지 모든 것이 바뀌어버린 후인 1944년 8월이었다.

헝가리의 페이르(Csór)에 주둔하고 있던 원대로 복귀한 그는 곧 제5비행중대원을 이끄는 비행중대장 보직이 주어졌다. 그때까지 150기의 적기를 해치운 그는 12월 22일에 또다시 2대를 격추했는데, 그것이 그의 마지막 무공이 된다.

파일:Heinrich Sturm, Gerhsrd Barkhorn, Wilhdlm Batz Otto Fonnekold.jpg
좌에서 우로 : 하인리히 슈투름, 게르하르트 바르크호른, 빌헬름 바츠, 오토 푀네콜트


3. 치명적인 이륙 사고[편집]


오후에 그는 2차 출격을 위해 페이르의 야전 비행장에서 자신의 전용 탑승기인 "흑색 11번"("schwarze 11" Bf 109G-6 Werkenummer 442036)의 시동을 걸고 택싱을 시작했다. 풀밭으로 된 이 야전 활주로는 원래 구배가 있어서 비행장으로는 알맞지 않는 곳이었는데, 하인리히도 이 날 활주로가 곧 끝나는 것으로 착각하고 - 실제로는 그 뒤로도 한참 남아 있었다 - 너무 일찍 조종간을 당겨 버렸다. 충분한 양력을 얻지 못한 그의 Bf 109랜딩기어 끝이 근처에 주차되어 있던 트럭에 걸려 버렸고, 이륙 속도에 가까운 빠른 스피드에서 곧바로 그라운드 루프[1]를 하고 말았다. 부대원들이 달려가 뒤집힌 채 불타는 전투기 콕핏에서 그를 끄집어 내려했지만, 흑색 11번은 방금 전에 출격을 위해 연료와 무장을 가득 실은 상태라 너무 위험했다. 약관 24세의 하인리히 슈투름 대위는 그 사지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채 그대로 죽고 말았다.


4. 서훈[편집]


2급 철십자 훈장
1급 철십자 훈장
공군 명예컵 (1943년 7월 26일)
독일 황금십자장 (1943년 7월 23일)
기사철십자 훈장 (1944년 3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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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쉽게 말하면 시속 200 km 정도로 앞구르기를 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