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리히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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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대관식을 받은 적이 없는 로마왕이지만 사실상 황제였던 인물




신성 로마 제국 오토 왕조 4대 황제
하인리히 2세
Heinrich II

파일:Kronung_Heinrich_II.jpg

제호
하인리히 2세 (Heinrich II)[1]
출생
973년 5월 6일
독일 왕국 안스바흐
사망
1024년 7월 13일 (51세)
독일 왕국
재위
신성 로마 황제
1014년 2월 14일 ~ 1024년 7월 13일
이탈리아 국왕
1004년 5월 15일 ~ 1024년 7월 13일
로마왕
1002년 6월 7일 ~ 1024년 7월 13일
바이에른 공작
995년 ~ 1004년
배우자
룩셈부르크의 쿠니군데 (999년 결혼)
아버지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2세
어머니
부르군트의 기셀라
형제
기셀라, 브루노
1. 개요
2. 유년 시절
3. 계승 분쟁
4. 폴란드 왕국과의 전쟁
5. 황제 즉위와 이탈리아 군사 작전
6. 정치



1. 개요[편집]


독일어: Heinrich II. (하인리히 2세)
이탈리아어: Enrico II (엔리코 2세)
라틴어: Henricus II (헨리쿠스 2세)

신성 로마 제국 오토 왕조 출신의 마지막 황제이며, 아울러 바이에른 공작으로서 하인리히 4세이다. 영민했던 그는 신성 로마 제국의 체제를 정비하고 안정화시키는데 기여한 유능한 황제였다. 그러나 후사를 남기지 않고 사망하여 오토 왕조는 단절되었다.


2. 유년 시절[편집]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2세와 부르고뉴 왕국 출신의 지젤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제위에 오르기 전까지 그는 바이에른의 하인리히 4세로 불리었다. 그의 아버지인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2세는 사촌인 오토 2세오토 3세의 제위계승에 대한 트집을 잡아 반란을 일으켰고 그리하여 한때 바이에른 공국을 몰수당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하인리히 4세는 망명을 가야 했다. 23살 때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바이에른 공국을 물려받았다.


3. 계승 분쟁[편집]


1002년 1월에 사촌인 황제 오토 3세가 사망할 때 로마로 갔다. 자신의 독일 왕위 계승에 대한 반대가 강한 것을 안 하인리히 2세는 빠르게 오토 3세의 동반자로부터 왕의 휘장을 가져왔다. 로타링기아의 에초, 마이센 변경백 에카르트 1세, 슈바벤 공작 헤르만 2세 등의 후보자들이 하인리히와 열렬히 경쟁했지만 마인츠의 대주교 빌리지스의 원조로 하인리히가 안전하게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으며 1002년 6월 7일 마인츠에서 대관식을 치를 수 있었다.

하인리히 2세는 이후 몇 년간을 지역에 대한 그의 정치적인 힘을 굳히기 위해서 썼다. 그는 폴란드 왕국의 왕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와 전쟁을 벌였으며 하인리히에 반대하는 세력에 의해 이탈리아 왕으로 옹립된 이브레아의 아르두윈에 맞서기 위해 이탈리아 왕국으로 갔다. 아르두윈은 이전에 하인리히가 보낸 독일 군대를 패배시켰으며 카린시아의 오토 1세가 아르두윈을 조종하고 있었다. 아르두윈은 아디제 계곡에서 하인리히 2세를 막으려고 했으나 하인리히는 발수가나를 통해 이탈리아로 들어왔다. 아르두윈의 신하들은 하인리히의 전진에 혼란에 빠져 달아났고 아르두윈은 이브레아로 돌아가야 했다. 하인리히는 베로나를 점령하고 1004년 5월 15일 파비아에서 밀라노 대주교 아르눌프 2세에게 롬바르디아 철관을 받아 이탈리아의 왕이 되었다.

4. 폴란드 왕국과의 전쟁[편집]


파비아에서 무참하게 반란을 진압한 다음에, 하인리히 2세는 이탈리아 반도가 안정되었다고 느낀 3월 25일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그는 생고타르 고갯길을 통해 독일로 돌아갔다. 독일에서 그는 기독교도에 대항하는 이교도들과 동맹을 맺고 볼레스와프 1세에 대항하는 2번째 전쟁을 시작했다. 원정은 별로 효과를 보지 못하여 결국 1018년에 바우첸에서 폴란드인과 평화 조약을 맺었다. 볼레스와프는 라우지츠와 마이센을 보유하게 되었으나 보헤미아를 내줘야 했다.


5. 황제 즉위와 이탈리아 군사 작전[편집]


하인리히 2세는 1013년에 성직자들의 요청으로 다시 이탈리아 반도로 가게 되었다. 아르두윈이 또다시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아르두윈은 처음에 이브레아의 궁전에서 하인리히 2세에 대항했으나 수도자가 되는 운명을 겪어야 했다. 그 후 하인리히는 바로 로마로 가 1014년 2월 14일 교황 베네딕토 8세에게 황제의 관을 받았다. 하인리히 2세는 이탈리아에서 의무를 수행했으며 독일을 다스리는 공식 군주로 지명되었다. 그는 5월에 독일로 돌아갔다.

1020년에 교황이 하인리히 2세와 밤베르크에서 만나 그의 대성당을 축성했다. 마인츠와 뷔르츠부르크의 주교 간의 논란을 해결한 다음에 베네딕토 8세는 롬바르디아의 제후들이 그리스인들에게 항복하여 남쪽에서 힘을 키우고 있는 동로마 제국을 막기 위해 3번째 군사원정을 하라고 설득했다. 1022년에 그는 대규모의 군대를 이끌고 남이탈리아로 가기 위해 아드리아 해안으로 출발했다. 하인리히는 카푸아 공국을 지배할 목적으로 우선 쾰른 대주교 필그림을 보냈다. 필그림은 작은 규모의 군대를 이끌고 티레니아 해 연안을 따라갔다. 역시 작은 규모의 3군은 아퀼레이아의 총대주교 포뽀가 이끌고 트로야의 동로마 요새를 포위하고 있는 하인리히와 합류하기 위해 아펜니스 산맥을 통과하여 갔다.

필그림은 카푸아 공작 판둘프 4세를 사로잡았고 카푸아와 살레르노 공국으로부터 충성을 받아냈으나 3군 모두 트로야를 함락시키는 데에 실패했다. 하인리히 2세는 카푸아 공작을 처형하려고 했으나 마지막에 필그림의 만류를 들어 대신 쇠사슬로 묶어서 독일로 보내 다시 테아노의 백작으로 임명했다. 비록 중요한 목표는 실패했지만 하인리히는 남쪽에 자신의 권위를 확고히 하고 지식을 전파했다. 돌아오는 길에 그는 파비아에서 열린 시노드에 참석했다.


6. 정치[편집]


하인리히 2세의 가장 중요한 치적은 주교령과의 관계를 개선했으며 성직자들을 제국 내에서 통제한 것이다. 그는 주교들을 지원해, 그들이 넓은 영지를 소유해 다스릴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성직자들의 재산 세습을 막기 위해 성직자의 독신을 요구했다. 이것은 주교들에 대한 하인리히 2세의 우위를 보장했으며 귀족들과 야심있는 친척들에 대한 강력한 방어막이 되어주었다. 1007년에는 밤베르크 교구를 설정해 그곳이 학문과 예술의 중심지가 되도록 했다. 그는 교황과 함께 기독교와 정치를 통제할 새로운 체계를 확정하기 위해 교회 협의회를 설립하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024년에 갑자기 승하했다.

그는 1147년 교황 클레멘스 2세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으며, 아내인 쿠니군데 역시 1200년에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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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세가 아닌 2세로 칭한 것은 비록 신성로마황제는 아니었으나 작센 공작이자 독일 왕국의 왕이며 오토 1세의 아버지였던 하인리히 1세의 넘버링을 이어받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