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일레 셀라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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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일레 셀라시에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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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오피아 제국 솔로몬 왕조 제64대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 1세
ቀዳማዊ ኀይለ ሥላሴ


출생
1892년 7월 23일
에티오피아 제국 하라르게주 에제르사고르
사망
1975년 8월 27일 (향년 83세)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 국가 궁전
재위기간
에티오피아 황제
1930년 4월 2일 ~ 1974년 9월 12일[1]
재임기간
아프리카 통일기구 초대 총재
1963년 5월 25일 ~ 1964년 7월 17일
아프리카 통일기구 제5대 총재
1966년 11월 5일 ~ 1967년 9월 11일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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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
솔로몬 가문[1]

ራስ ተፈሪ መኮንን
Ras Täfäri Mäkonnǝn
라스 터퍼리 머콘는[2]
아버지
르울 라스 머콘는 월더미카엘
어머니
예시메베트 알리
배우자
메넨 아스파우
자녀
로마네워르크
테나그네워르크
암하 셀라시에
제네베워르크
체하이
머콘는
사흘레 셀라시에
종교
에티오피아 테와히도 정교회

1. 개요
2. 생애
2.1. 에티오피아의 실세
2.2. 황제가 되기까지
2.4. 한국과의 인연
2.5. 폐위와 최후
3. 기타
4. 매체에서



1. 개요[편집]


에티오피아 제국의 마지막 황제.

제호는 유다 지파의 정복하는 사자, 하일레 셀라시에 1세 폐하[2], 하느님이 택한 자, 에티오피아의 느구서 너거스트다.[3]


2. 생애[편집]



2.1. 에티오피아의 실세[편집]


그의 아버지인 '르울 라스 머콘는 월더미카엘(ልዑል ራስ መኮንን ወልደሚካኤል / Lǝʿul Ras Mäkonnǝn Wäldä-Mikaʿel)'은 메넬리크 2세의 사촌이었다. 메넬리크 2세가 아직 쇼와의 왕이던 1887년 하라르 지방의 이슬람 국가 하라르 술탄국을 멸망시키고 그의 아버지를 하라르 지방의 지방관(shum)으로 임명했다. 이후 아버지가 사망하자 터퍼리 머콘는(하일레 셀라시에 1세)은 어린 나이에 하라르주의 지배자가 되었다. 한편 메넬리크 2세(ዳግማዊ ምኒልክ / Dagmäwi Mǝnilǝk)의 뒤를 이은 이야수 5세(እያሱ ፭ኛ / Iyasu Ammǝstäña)[4]이슬람교로 개종하는 등의 독단적인 행보로 인해 지지를 잃어 갔다. 이에 터퍼리 머콘는은 에티오피아 테와히도 정교회의 구심점이 되어 1916년 이야수 5세를 폐위시키고 메넬리크 2세의 딸인 아스칼러마리암(አስካለማርያም / Askalämaryam)을 자우디투 여제(ግርማዊት ንግሥተ ነገሥታት ዘውዲቱ / Gǝrmawit Nǝgǝśtä Nägäśtat Zäwditu)로 즉위시켰다.


2.2. 황제가 되기까지[편집]


6촌 누나 자우디투의 치세에 터퍼리 머콘는은 섭정이자 황태자로서 실권을 행사하여 1920년대 후반 들어 실질적으로 그가 에티오피아를 지배하였다. 터퍼리 머콘는은 근대화를 원하는 젊은 세대의 지지를 받았다. 그의 통치 하에서 에티오피아는 1923년 국제연맹에 가입하였고 다음 해에는 에티오피아 황족으로서는 최초로 세계 각국을 순방했으며 각지에 학교를 세우고 치안을 강화하며 중앙정부의 권한을 강화하는 등 강력한 사회 개혁 정책을 폈다.

1930년 자우디투가 사망하자 터퍼리 머콘는은 하일레 셀라시에(ኃይለ ሥላሴ / Ḫaylä Śǝllase)라는 이름으로 황제로 즉위하였다.[5] 1931년에는 의회의 권한을 제한하는 헌법을 제정했고 선대부터 시도했었던 노예 제도 철폐를 단행하였다.


2.3. 제2차 세계 대전 이후[편집]


"오늘 우리에게 일어난 일이 내일 여러분에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1936년에는 이탈리아 왕국의 침략으로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이 발발했다. 에티오피아군의 필사적인 저항에도 불구하고 강약약강으로 약소국 상대로 독가스까지 뿌린 이탈리아군에 의해 에티오피아는 패전하여 하일레 셀라시에는 결국 대영제국런던으로 망명하였다. 그리하여 이탈리아 왕국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에티오피아 황제를 5년간 겸임하였으나 국제연맹을 포함하여 미국, 소련, 중화민국, 멕시코 등 국제 사회 다수는 이탈리아 왕의 에티오피아 황제 겸임은 물론 에티오피아 합병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더불어 에티오피아 고원 지역의 일부는 여전히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를 지지하는 저항세력이 장악하고 있었다.[6]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에티오피아 저항세력은 영국군을 비롯한 연합군과 협력해 이탈리아 왕국군과 싸웠고 1941년 영국 주도 연합군이 에티오피아 저항세력과 함께 아디스아바바에서 이탈리아군을 축출하자 하일레 셀라시에는 환도(還都)했다. 그리고 에티오피아는 아디스아바바를 되찾은 그 해 12월 영국과 협정을 맺고 정식으로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하게 되었다.[7]

1947년 이탈리아와 연합국 간의 '평화협정(Treaty of Peace)'에서 전승국 측으로 참가하여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강점이 불법이며 무효라는 점을 분명히 했으며 승전국으로서 이탈리아로부터 전쟁 배상금을 지급받았다.

하일레는 권력을 회복하면서 다시금 사회 개혁을 실시했으나 이때부터 에티오피아 황제라는 개인적 권위에 의존하여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1955년에는 새 헌법으로 더 많은 권한을 자신에게 부여하여 본격적인 전제군주로 군림하기 시작했는데 당연히 내부의 반대가 심하였다. 1960년 12월 12일에는 황제가 브라질을 순방하는 동안 황실 경비대가 쿠데타를 일으켜 아디스아바바를 잠시 장악하였으나 왕당파의 반격으로 쫓겨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한편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아프리카 통일 기구[8]의 설립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1963년 아디스아바바에 본부를 설립하고 초대, 5번째 총재를 역임하였다.

"나를 경배하지 말라, 나는 신이 아니다. 나는 단지 사람이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한다."


이런 업적 때문에 엉뚱하게도 자메이카 흑인들 사이에서 하일레 셀라시에를 구세주로 숭배하는 래스터패리교라는 종교가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하일레 셀라시에 본인은 에티오피아의 국교에티오피아 테와히도 정교회 교도로서 정통 정교회 기독교인이었으니 아이러니하다.[9] 셀라시에가 보기엔 래스터패리교라는 괴상하고 불경한 신흥종교를 만들어 자신을 구세주로 떠받든다니 기가 찰 노릇이었을 것이다.


2.4. 한국과의 인연[편집]


"가거라! 살아 돌아올 생각을 하지 말고, 전부 거기에 가서 모두 맹렬하게 싸워서 전사하거라![10]

만약 사지가 멀쩡하게 돌아온다면, 짐의 이름을 걸고 절대로 용서치 않겠다! 너희들의 죽음의 대가로 저들에게 자유라는 것을 저들의 손에 꼭 안겨주거라! 우리 민족이 과거에 이탈리아인들에게 무엇을 당해왔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그 고통은 뼛속까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 짐도, 너희 모두도 잘 알고 있다. 그걸 알면서 모른 척한다면, 침략자들보다 못한 더러운 위선자일 뿐이다."

에티오피아의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유엔의 파병 요청을 받자 당시 미국을 포함한 수많은 나라가 반공주의, 이해득실을 따져 한국전쟁에 참가했을 때 유일하게 '오직 침략으로부터 자유를 지킨다는 명분 하나로' 황실 근위대인 머할 서파리(መሃል ሠፋሪ / Mähal Śäfari, Mehal Sefari)를 중심으로 보병 1개 대대를 편성하고 강뉴 부대(ቃኘው ሻለቃ / Qaññäw Šaläqa, Kagnew Battalion)란 이름을 하사했다.[11] 미군 7사단 32연대에 배속돼 그해 9월 강원도 화천 적근산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으며 이듬해 10월 철의 삼각지 삼각고지 전투에서 진내사격을 불사하면서 위치를 고수해 미 9군단장과 미 7사단장으로부터 감사 서한을 받았다.

강뉴 부대는 본인들이 참전한 253회의 전투에서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아 전설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1953년 7월 종전 때까지 연인원 3,518명[12]이 참전해 121명이 전사하고 536명이 부상했으나 포로는 한 명도 없었다. 전우의 시신도 모두 수습해 돌아가 부산 유엔군 묘역에는 에티오피아군 병사의 무덤이 하나도 없다. 휴전 후에도 강뉴 부대는 1956년까지 대한민국에 주둔하여 UN 연합군으로써 비무장지대 순찰 작전 등 평화를 지키고 전후 복구를 도왔다. 부대원들은 월급을 모아 1953년 경기도 동두천에 '보화원'이란 이름의 보육원을 세운 뒤 전쟁고아들을 보살폈다. 1963년에 에티오피아가 한국과 공식 수교하였고[13] 1968년에는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가 직접 방한하기도 했는데 이때 박정희와 찍은 사진을 바탕으로 기념우표까지 나왔다.



춘천시 근화동에는 에티오피아 6.25 전쟁 참전 기념관과 기념비가 조성돼 있으며 당시 황제가 심었던 상록수도 잘 자라고 있다. 덕분에 춘천아디스아바바자매 결연할 때 이걸 계기로 삼기도 했다.


2.5. 폐위와 최후[편집]


파일:external/ethiopiavoyage.com/haile_selassie_tomb.jpg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의 석관

나는 오랜 세월을 살면서 인간이 안전과 재산상의 이익을 통제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되였을 때 하느님께서 주신 인간의 본질적인 고결함을 지킨 일을 얼마 보지 못했습니다.[14]


많은 업적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경제 개발에는 실패하여 재임 후반기에 에티오피아는 빈부격차가 심각했으며 실업 문제와 기근 등에 시달리게 되었고 1971년에는 UN이 선정한 세계 최빈국 25개국 중 하나로 선정되기도 했다. 주로 북동부 지역에서 발생한 기근으로 인해 1972년에서 1974년 사이에 약 4만 명에서 8만 명 정도의 에티오피아인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하일레는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면서[15] 언론과 정적을 탄압하였고 자국의 기근에 대한 보도를 금지시키고 은폐했다. 권위주의적인 것은 타 아프리카 국가들도 매한가지였지만. 그리하여 에티오피아에서는 황제에 대한 불만이 커져 파업과 시위가 연달아 벌어졌으며 제정(帝政)에 반대하는 세력이 증가하였고 황제를 몰아내기 위한 쿠데타가 수차례 일어났다.[16]

결국 하일레는 1974년 9월 12일 육군 소령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이 일으킨 쿠데타로 폐위되어 궁전에 유폐되었는데[17][18], 멩기스투는 셀라시에 시절의 민간 및 군 관리들과 황족 54명을 재판 없이 구금한 후 동년 11월 23일에 모두 초법적으로 처형했고[19] 그 다음해인 1975년 8월 27일 황제는 향년 82세로 갑자기 사망하였다. 공식 발표된 사인은 전립선 수술 후유증이었으나 제정 지지파들은 멩기스투가 암살한 것으로 여겼는데 황제의 유골이 멩기스투 정권이 붕괴된 후인 1992년에야 궁전 부지의 화장실 근처 콘크리트 바닥 밑에서 발견되었고 1994년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멩기스투의 명령으로 전직 장교들이 침상에서 전직 황제의 목을 졸라 살해했다고 한다. 그리고 군정의 인장과 서명이 기재된 셀라시에의 암살을 지시한 문서도 발견되었고 이는 데르그의 전직 구성원들에 의해 사실로 인정되었다.

그나마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의 유해는 2000년 11월 5일 에티오피아 테와히도 정교회가 황실의 예법에 따라 장례식을 거행하고 아디스아바바 성 삼위일체 대성당에 안치되면서 안식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영상 1962년에 황제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 메넨 아스파우 황후와 자녀들의 무덤도 성 삼위일체 대성당에 있다.


3. 기타[편집]


  • 6.25 전쟁 당시 멀리서 파병하고 이후 한국에도 방한하였으며 공산정권을 세운 멩기스투의 반란군에게 비참하게 살해당한 점을 들어 강한 반공주의까지 더해져 대한민국에서는 매우 좋은 평가를 받으며, 20세기 중반 대표적인 친한파 정치인 중 하나였다. 6.25 전쟁 파병으로 생긴 인연 덕분인지 21세기 들어 한국 NGO의 구호개발사업이나 한국 기업의 경제협력 등에서 어느 정도 에티오피아가 특혜를 보는 점은 있다.

  • 춘천의 이디오피아 카페에 가면 입구에 해당 인물의 초상화가 있다.

  • 오리아나 팔라치는 살아 생전 그를 만나 보고 "독재자, 권력자일 뿐이다." 라고 비난했다.[20] 대한민국에서의 매우 좋은 인식과는 정반대인데, 물론 팔라치의 특성상 인터뷰했던 대부분의 대상에게 비판적, 호전적이었음을 감안하면 그녀의 주장은 어느 정도 걸러들을 필요는 있을 것이나 하일레가 말년에 폭정을 저지르고 사치를 부렸던 터라 팔라치의 평가도 틀린 것만은 아니었다. 특히 하일레가 전제군주제를 신봉하는 황제였다는 점에서 군주제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에겐 마냥 곱게 보이기 힘들긴 하다. 다만 에티오피아에서는 하일레를 몰아낸 멩기스투가 하일레 셀라시에 시절의 폐단을 없애기는커녕 오히려 수십만명을 죽여대고 공산주의 국가로 체제를 바꿨는데도 경제 개발에도 실패하여 수백만이 굶주림에 죽을 정도로 막장스러운 통치를 해 공산주의의 가장 큰 가치인 평등과 빈부격차 해결은커녕 극단적인 빈부격차와 부패로 왕정 국가보다 못 살게 되어서 상대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게 된 면도 있다.[21]

그러나 하일레 본인도 대외적으로 약소국인 에티오피아의 위상을 올렸지만 국내 정책에서 이런 만연한 사회적 문제를 손놓아 버려서 악화시켰기 때문에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이성적으로 셀라시에는 조금 훗날 캄보디아노로돔 시아누크처럼 외치에선 성공적이었지만 내정에선 나라 말아먹은 실패한 군주였다는 평가를 피하기 힘들다. 그러나 셀라시에는 본인의 행적도 있지만 무엇보다 20세기 중반까지 살아남은 아프리카에서 유일한 독립 왕정으로서 특별한 의미는 물론이고 당시에는 세계사적 기준으로도 유서 깊고 근본 넘치는 에티오피아 솔로몬 왕조의 최후의 왕이었다는 본인 능력이 아닌 위치상으로 외부에선 좋게 평가받거나 미화받은 게 사실이다.[22] 단적으로 6.25 전쟁의 인연으로 하일레를 좋게 볼 수밖에 없는 한국이나 아예 대(對) 이탈리아 항전의 역사에 종교적 의미를 부여해 신학적으로 받아들이는 래스터패리교의 영향을 받은 아프로센트리즘 성향의 흑인 민족주의자들에게 굉장히 부풀려진 칭송을 받을 때가 있다.

  • 키가 157cm로 작은 편이었다.[23] 168cm이었던 윈스턴 처칠과 함께 찍은 사진을 봐도 한 뼘 정도가 차이나는 것을 볼 수 있다.[24]


  • 현재 에티오피아에서 그의 손자인 자라 야코브 암하 셀라시에[25]황제위 요구자로 거주 중이다.

  • 에티오피아의 마라톤 영웅 아베베 비킬라가 마라톤 선수가 되기 전 황제의 친위대에서 부사관으로 근무를 했었다. 이후 아베베가 1960 로마 올림픽에서 아프리카 최초의 금메달을 따내자 과거 무솔리니에게 침략당해 치욕적인 과거를 기억하고 있던 황제는 그가 귀국하자 직접 마중을 나와 아베베 비킬라에게 왕관까지 씌워 주고 금반지와 금시계를 하사하는 등 국민 영웅으로 등극했다.

4. 매체에서[편집]



4.1. 게임[편집]



4.1.1. 문명 5[편집]


신과 왕 확장팩에서 에티오피아 문명의 지도자로 등장했으며 그가 6.25 전쟁에 파견한 황실 근위대인 메할 세파리도 침략자의 통곡의 벽 수준의 고유 유닛으로 나온다.


4.1.2. 도미네이션즈[편집]


유니버시티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도미네이션즈/유니버시티/하일레 셀라시에 황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1.3. Hearts of Iron IV[편집]


파일:하일레 셀라시에(Hearts of Iron IV).jpg 파일:하일레 셀라시에.jpg[26]

Hearts of Iron IV에서 에티오피아의 지도자로 나오며, 소속 정당은 솔로몬 가문으로 나온다. By Blood Alone DLC가 나오며 에티오피아에 중점이 생기면서 왕정 루트중 왕중왕 중점을 찍으면 초상화가 화려하게 변한다. 그 후엔 악숨 제국을 만든 뒤 솔로몬 제국, 시온 제국 중 선택해서 형성할 수 있다. 모드인 카이저라이히에서는 대전쟁에서 협상국이 지면서 에리트레아를 뜯어왔지만 소말리아에 의해 오가덴 지역을 빼앗긴 상태다. 엄청난 채무와 노예제, 코어가 없는 에리트레아 지역 등 국내에 산적한 문제점을 해결하고 나서 오가덴 지역을 다시 탈환할 수 있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25 05:27:01에 나무위키 하일레 셀라시에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1936년 5월 5일부터 1941년 5월 5일까지는 망명 상태에서 망명 정부를 이끌었다. 국제연맹을 포함하여 미국, 중국, 소련, 멕시코 등 대부분의 국가가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강제점령을 승인하지 않았다.[2] 암하라어로 '커다마위 아체(ቀዳማዊ ዓፄ / Qädamawi ʿAṣ́e)'는 '첫 번째 황제'를 뜻하기 때문에 서양식으로 하일레 셀라시에 1세(Haile Selassie I)와 같이 표기할 수 있다.[3] 암하라어: ሞዓ ፡ አንበሣ ፡ ዘእምነገደ ፡ ይሁዳ ፡ ግርማዊ ፡ ቀዳማዊ ፡ ዓፄ ፡ ኃይለ ፡ ሥላሴ፡ ሥዩመ ፡ እግዚአብሔር ፡ ንጉሠ ፡ ነገሥት ፡ ዘኢትዮጵያ።
EAE 표기: Moʿa Anbäśa zäʾƎmnägädä Yǝhuda, Gǝrmawi Qädamawi ʿAṣ́e Ḫaylä Śǝllase, Śǝyuma Ǝgziʾabḥer, Nǝguśä Nägäśt zäʾItyop̣p̣ya
[4] 재위 : 1913년 ~ 1916년[5] 암하라어로 '삼위일체의 힘'을 뜻한다. 암하라어 발음은 [ˈhaɪlə sɨlˈlase\](하일러 슬라세)에 가깝다.[6] 이런 상황은 1941년 영국군 주도 연합군의 에티오피아 진공까지 계속되었다.[7] 에티오피아 저항세력은 1940년 동아프리카에서 전투가 발발했을 무렵부터 연합군과 협력하기 시작했다.[8] 아프리카 연합의 전신[9] 에티오피아 정교회는 서양 쪽 기독교와는 달리 합성론 계통의 오리엔트 정교회에 속한다. 물론 서양 쪽 기독교와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오리엔트 정교회 역시 초대 교회에서 이어져 내려온 역사가 오래된 유서 깊은 정통 기독교이다. 사실 그걸 떠나서 서방 교회 입장에서 보든 오리엔트 정교회 입장에서 보든 래스터패리교가 이교도 내지는 이단인 것은 마찬가지다.[10] 당연히 원정군의 결의와 의지를 고취시키기 위한 상징적인 발언이다. 그 정도로 에티오피아가 이 전쟁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남달랐음을 보여주는 말이다.[11] 암하라어강뉴(ቃኘው)는 '혼돈에서 질서를 확립하다' 또는 '초전박살(初戰撲殺)'이란 뜻이다. 한국어권에서는 강뉴 또는 칵뉴가 공식적으로 사용되나 암하라어 발음은 [kʼaɲːəw\](칸녀우)에 가깝다.[12] 1956년까지 주둔 기간을 포함하면 6,037명[13] 유엔군 참전국들은 전후 한국 입장에서 최우선 수교 대상국들이었다.[14] 인간 비판으로도 볼 수 있겠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아이러니 하게도 극한의 상황에서도 고결함을 지킨 경우를 몇몇 본 적이 있단 것이기도 하다. 생각하기에 따라선 의미가 달라지는 명언[15] 특히 하일레가 기근으로 국민들이 굶어죽어가는 와중에도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그의 애완사자한테 고기를 주는 사진이 공개되면서 에티오피아 국민들에게 분노를 사고 말았으며 그의 장남인 암하 셀라시에도 그 중 하나였다. 인권단체와 국제 사회에서도 이에 대해 비난했다. 이게 바로 그 문제의 사진.[16] 특히 황태자인 암하 셀라시에가 쿠데타를 일으켜 아버지를 몰아내려고 했다는 것이 밝혀져 하일레한테 큰 충격을 주었다. 쿠데타의 이유는 바로 위의 북동부 지역 기근과 위의 애완사자 건이었다. 물론 암하는 쿠데타가 실패로 돌아갔고 황태자에서 폐위되면서 해외로 망명하였다.[17] 쿠데타 전날 저녁에 멩기스투는 국영 TV 방송을 통해 대기근을 겪는 백성들의 참상이 담긴 영국의 다큐멘터리에 사이사이 황제의 사치를 몰래 끼워넣어 방송하고 그 다큐멘터리를 황제로 하여금 보게 했으며 1974년 11월 16일에 선포한 특별 형법 선언 27조에 '의도적으로 기근, 전염병 또는 고통을 조장하고 이것이 인명 손실로 이어지는 경우에는 그 사람은 사형에 처한다'는 내용을 집어넣었다.[18] 정작 아이러니하게도 멩기스투 집권기였던 1983~1985년에 북부 지역 중심으로 기근이 일어나 셀라시에 말기 기근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많은 30만~120만 명이 죽고 이것이 BBC에 보도되어 국제적인 지탄을 불러일으켰는데도 멩기스투는 이 기근을 북부 지역의 반군을 없애기 위한 작전으로 이용하며 해외의 구호물자를 횡령하고 농지와 얼마 안 남은 농작물들을 불태우면서 '기근, 전염병 또는 고통'을 조장하며 기근의 피해를 키웠다.[19] 이때 전 수상 2명과 황제의 손자 겸 해군 사령관도 목숨을 잃었다. 그 외에도 임시 군사 행정 평의회(Derg, 데르그)의 수장을 맡았던 아만 안돔(Aman Andom, 1924년 ~ 1974년) 중장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총격전으로 안돔과 그의 부하 6명을 죽여 하루만에 61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이 날은 후에 검은 토요일로 불리게 되었다.[20] 팔라치가 하일레를 인터뷰한 때는 황태자가 연루된 쿠데타가 있던 후였는데, 하일레는 계속 쿠데타를 거론하며 자신의 신경을 건드리는 팔라치에게 빡친 나머지 대체 자신에게 원하는 게 뭐냐며 쫓아냈다고 한다. 이에 이탈리아계 에티오피아인들이 팔라치를 비난했는데 팔라치는 신경쓰지 않고 이들을 향해서도 '무솔리니 시절 버릇 못 버렸다'며 비웃었다고 한다.[21] 허나 이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원래 전 지도자보다 더 악랄한 사람이 정권을 잡으면 일어나는 현상이긴 하다. 예를 들어서 우간다밀턴 오보테는 모든 야당을 금지시키고 정적들을 재판도 없이 무기한 구금했던 독재자였지만 그를 쿠데타로 몰아낸 사람이 사상 최악의 독재자 중 한 명인 이디 아민이었기 때문에 그의 만행이 많이 가려졌으며 루마니아 최악의 독재자인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집권하기 전에 루마니아의 대통령을 역임했던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 역시 잔악한 독재자였으나 사후에 차우셰스쿠가 최악의 독재정치를 펼치는 바람에 게오르기우데지가 생전에 저질렀던 만행들이 루마니아 국민들의 기억에서 잊혔다.[22] 전제군주제로의 회귀, 사치와 내치 부실 등은 19세기 황실에서 태어난 본인의 한계였을 수 있다.[23] 사촌인 메넬리크 2세는 183cm로 굉장히 컸다.[24] 다만 처칠은 그냥 1870년대 영국 남성 평균 키보다 약간 작았다.[25] 암하 셀라시에 황태자의 아들[26] 오른쪽은 BBA DLC 이후 등장한 새 초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