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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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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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Flag_of_South_Azerbaijan.svg.png 남아제르바이잔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40px-Flag_of_the_Bayan-%C3%96lgii.png 바잉울기

언어
튀르크어족
신화
쾨로을루 신화 텡그리 신앙
사상
범튀르크주의 (범투란주의)



하자르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Khazaria750.png
750년경의 하자르.
존속기간
650년경 ~ 969년
히브리어
כוזרים (Kuzarim)
그리스어
Χάζαροι (Házaroi)
라틴어
Gazari
페르시아어
خزر (Khazar)
한자
突厥可薩部 (돌궐가살부)
위치
러시아 남부
수도
발란자르, 사만다르, 아틸
국가원수
카간
주요 군주
부시르(690? ~ 715)
언어
하자르어
종교
텡그리 신앙, 유대교
종족
하자르인
성립 이전
서돌궐
멸망 이후
쿠만
페체네그
키예프 루스
셀주크 제국
1. 개요
2. 성립 및 발전
3. 아랍인들과의 전쟁
4. 유대교 개종
4.1. 멸망
5. 기타
5.1. 관련 항목



1. 개요[편집]


서기 7세기부터 10세기까지 지금의 캅카스 산맥 북부와 러시아 남부인 우크라이나, 볼가 강 하류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튀르크계 주민들이 세운 강대한 유목 제국이다.

하자르는 6세기동로마 제국의 사료에서는 "사비르"라고도 불렸다.

군주의 칭호는 '카간'(또는 하간)인데, 튀르크계 유목민들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2. 성립 및 발전[편집]


하자르의 기원에 대해서는 다소 모호한 점이 많으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하자르를 구성하는 민족들이 투르크 계열 민족들이라는 것에는 대체로 동의한다. 이들은 6세기 말에 카스피해 연안 또는 캅카스 지역에서부터 아조프해 스텝 지역으로 진출하였지만 그 당시에는 서돌궐의 세력이 강력하여 서돌궐의 종주권 아래에 있었다. 626년 동로마의 황제 이라클리오스 1세는 북동 국경을 지키기 위해 하자르와 동맹을 하였다. 동로마는 하자르와 함께 사산 왕조의 지배하에 있던 캅카스 지역을 공격하였다. (로마-페르시아 전쟁)

630년 즈음을 전후하여 서돌궐의 세력이 사라지고 하자르는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들의 지배계층은 주로 서돌궐의 귀족층, 특히 왕족의 경우 서돌궐의 왕족인 아사나(Ashina) 씨족인 것으로 여겨지나 이에 대해 의문을 품는 학자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간에 하자르가 건국 후에도 상당한 기간 동안 서돌궐의 구성원이었음은 여러 증거를 보아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로 보이는데, 이 관계는 돌궐의 계승분쟁을 시작으로 657년, 당나라의 장수 소정방의 공격으로 서돌궐이 소멸해버리며 크게 요동치게 된다.

가장 극적인 상황은 그 직후에 일어났다. 볼가강 서쪽과 크림반도 북쪽에서 불가르 족의 지배가문인 둘로 일족(Dulo clan)의 수장, 쿠브라트(Kubrat)가 대 불가리아 연합(Old great bulgaria)을 선포한 뒤 공격적인 확장을 시작했고, 이슬람 왕조의 북상은 초원을 불안으로 몰아넣었다. 하자르는 당연히 초원의 지배권을 공고히 하고자 불가르족, 그리고 이슬람 세력과 전쟁을 벌였고 그 결과 쿠브라트의 아들들이 각각의 세력을 이끌고 유럽과 초원 각지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면서 끝나게 된다.[1] 이슬람과는 그 후로도 약 백여 년간의 전쟁을 이어갔다. 하자르는 이 과정에서 독립 왕조이자 강국으로서의 면모를 굳힌 것으로 추정된다.

하자르 칸국은 유목만 한 것이 아니라 수수를 경작하였으며, 여러 소도시에서는 다양한 종교를 믿는 상인들이 각기 따로 거주하는 구역이 마련되어 있었다. 하자르 칸국에서는 주민들을 서로 다른 관습법에 따라 분쟁을 해결할 수 있게 끔 종교 별로 법정을 따로 마련해 놓았다. 유대교인, 무슬림, 기독교인, 토착 텡그리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모두 판사의 재판 주재 하에 분쟁을 조정할 수 있었다. 하자르 칸국의 도시에는 유르트를 본뜬 반구형 지붕의 목조 건물들이 들어섰다.


3. 아랍인들과의 전쟁[편집]


서기 7세기 말부터 흥기한 아랍 제국과 1백 년 동안, 격렬한 전쟁을 벌여 그들이 카프카스 산맥 이북으로 세력을 뻗치는 것을 막아냈다. 그로써 러시아 남부와 동유럽이슬람화를 수백 년 이상 늦추었다고 평가되며, 로마 제국의 아나톨리아 전선에 가해지는 부담을 일정 수준 덜어주어 제국의 안정에 기여했다.

미국 컬럼비아 대학의 던롭(Dunlop) 교수는 매우 중요하지만 실제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이러한 사실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하자르국은... 아랍세력의 전방에 위치한 자연적 방어선을 따라 위치하고 있던 국가이다. 무함마드가 죽고 (632년) 얼마 지나지 않아, 아랍 군대는 쇠약해진 동로마 제국사산조 페르시아 두 제국을 통과하여 북쪽으로 전진하여 마침내 코카서스라는 거대한 산악 장애물과 마주쳤다. 일단 이 방어벽을 넘기만 하면, 거기서부터는 동유럽으로 얼마든지 쉽사리 이동할 수가 있었다. 아랍인들이 막 그러한 시도를 했을 때, 그들은 이 지역에서 자신들을 효과적으로 막아내는 세력과 마주쳤다. 비록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아랍인들과 하자르인들간의 전쟁은 한 세기 이상 지속되었으니, 마땅히 이는 역사적 중요성을 인정받을 가치가 있다.

프랑크인들의 카를 마르텔(Carl Martel)은 투르(Tour) 전투에서 아랍인들의 물결을 돌렸다. 거의 같은 시각, 유럽의 동쪽에서 가해진 위협도 다급하기가 결코 그에 뒤지지 않았다. 승승장구하던 무슬림들은 하자르 왕국의 군대와 마주쳐서야 진격을 멈추었다. 코카서스의 북부지역에서 버티었던 하자르와, 동방의 유럽문명의 보루였던 동로마 제국이 없었더라면, 기독교 국가들과 이슬람 국가들의 역사는 현재 우리가 알고있는 것과 크게 달라졌을 것임이 틀림없다.


카스피해 연안의 다르반드(Darband) 협로를 두고 652년에 벌어진 마지막 전투에서 아랍군과 하자르군은 공성기(캐터펄트와 발리스타)까지 동원하며 치열하게 싸웠다. 여기서 아랍인들은 그들의 지휘관이었던 아브달-라만 이븐-라디쉬(Abdal-Rahman ibn-Rabiah)를 포함한 4천 명의 전사들을 잃었으며, 생존자들은 산맥을 넘어 패주했다.

그리고 722년에서 737년 사이에 다시 하자르와 아랍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하자르의 기병대는 다리엘 통로나 다르반드 관문을 돌파하여 남쪽의 칼리프국 영토로 쳐들어갔다. 이에 맞선 아랍측 반격군은 동일한 통로나 우회로를 통해 볼가강으로 진격했으나 다시 후퇴했다. 실제 사실을 자주 과장하곤 했던 아랍인들의 사료이기는 하나 그에 따르자면 양측에서 10만 명에서 30만 명에 이르는 군대가 대치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로마-아랍 전쟁에서 양측이 평균적으로 동원한 전력에 맞먹는 수치이며 적게 잡아도 서유럽에서 같은 시대에 있었던 투르전투의 승패를 가르는 데 필요했던 병사들의 수를 압도하는 것이었음에는 분명하다.

이러한 전쟁의 특징 중 하나는 죽음까지도 불사하는 광신이었다. 일례로 한 하자르 마을은 전체가 항복을 거부하고 스스로 불을 질러 집단자살을 택하거나 밥 알 아브 왕의 식수로에 아랍 장군이 독을 풀도록 명령하기도 했다. 또한 패주하는 아랍 군대가 다시 마지막 일인까지 남아 싸우게 만든 "지옥이 아닌, 천국과 무슬림을 위해 -천국의 기쁨은 성전에서 죽은 모든 무슬림 군인들에게 약속되어 있었다- " 와 같은 전통적인 구호 등에서도 이러한 점은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15년간의 전쟁 속에서 하자르인들은 조지아아르메니아를 초토화시키기도 했으며, 아르다빌 전투(730년)에서도 아랍 군대에게 큰 패배를 안겨주었다. 심지어는 칼리프국의 수도인 다마스쿠스에서 절반도 남지않은 거리에 위치한 모술디야르바크르까지 진격하기도 했다. 하지만 새로이 훈련된 무슬림 군대가 그들을 가로막았고 이에 하자르인들은 결국 산맥을 넘어 고향으로 되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그 다음 해에는 당대에 가장 유명한 아랍 장군으로 콘스탄티노플 공성전을 이끌었던 경력이 있는 마슬라마 이븐-압드-알-말리크(Maslamah ibn-Abd-al-Malik)가 발란자르를 점령하였으며, 그 후에는 더욱 북쪽에 위치한 하자르인들의 대도시인 사만다르(Samandar)까지 점령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침공군은 점령지를 확고히 지켜내지 못했고 또다시 코카서스 이남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아랍인의 마지막 공격은 장차 칼리프가 될 마르완 2세(Marwan II)가 거둔 피로스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마르완은 하자르 카간에게 동맹제의를 하면서 한편으로는 코카서스의 두 통로에 기습을 가했다. 하자르군은 이 첫번째 전투에서 입은 타격을 회복하지 못하고 결국 볼가강 지역까지 후퇴했다. 이에 카간은 동맹 조건에 대해 협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마르완은 자신들이 정복한 다른 나라에게 제시한 조건의 전례에 따라 카간에게 이슬람교로 개종할 것을 제안했다.

카간은 이 조건에 응하기는 했지만 이는 단지 일시적인 시간벌기에 불과했다. 어찌되었든 자신의 조건이 충족된 것에 만족한 마르완은 군대를 이끌고 하자르인의 땅을 떠나 트란스코카시아로 돌아갔는데, 이때 그는 어떠한 수비대나 총독, 혹은 행정기관도 남겨놓지 않고 돌아갔다. 오히려 얼마 후, 그는 하자르에게 남방의 불충한 부족들에 대항한 동맹협정을 제의하기까지 했다. 마르완이 그렇게까지 관대한 조건을 내건 이유는 상대적으로 문명화된 페르시아나 아르메니아, 조지아와는 달리 이 사나운 북방 유목민들을 무력으로 지배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마르완은 시리아와 옴마야드 칼리프 왕국 각지에서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주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해야 하는 상황이었고 결국 750년에 암살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이로써 캅카스 산맥을 넘어 북쪽으로 나아가려던 아랍의 시도는 영원히 중단되었다. 그리하여 서쪽으로는 페레네 산맥을, 동유럽 방향으로는 캅카스 산맥을 넘으려는 무슬림들의 강력한 협공은 거의 동시기에 각각 저지되었다. 카롤루스 마르텔이 이끄는 프랑크인들이 갈리아와 서유럽을 구했다면, 마찬가지로 하자르인들은 볼가 강과 다뉴브 강, 동로마 제국으로 통하는 동방의 진입로들을 지켜냈다고 보아야 한다.


4. 유대교 개종[편집]


특이한 사항은 투르크계 유목민이 세운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9세기 중반을 기점으로 국교로 유대교를 받아들였다는 사실이다.[2] 원래는 유대교 말고도 동로마에서 믿던 동방 정교회이슬람 제국이슬람교도 개종으로서 고려의 대상이었으나, 정교회이슬람교로 개종을 하면 양대 강대국인 동로마 제국이나 이슬람 제국의 영향을 받거나 속국화 되는 현상이 벌어질 것을 우려하여 어쩔 수 없이 유대교로 개종을 했다고는 한다. 아울러 유대교를 믿으면 지중해 세계 각지에 흩어진 유대인 상인들과의 무역을 원활히 할 수 있다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었다.

유대교를 받아들이면서 칸과 귀족들의 이름도 요셉, 아론, 다윗 같은 유대인의 이름을 쓰게 되었다. 10세기의 페르시아 역사가 이븐 알 파키는 "하자르족 전체가 유대교로 개종하긴 했지만, 유대교를 믿은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라는 기록을 남겼으며, 지리학자 이븐 파들란은 "카자르 왕조의 지배계층이 유대교로 개종했다."라는 기록을 남겨 유대교 개종이 어느 정도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아직 해석과 의견이 분분하다.

여하튼 하자르 칸국의 국교가 유대교라는 이유로 유럽에서 박해받고 쫓겨난 유대인들이 많이 이주해와서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의 주 무역 파트너 중 하나가 아바스 왕조의 무슬림이었기 때문에,[3] 무슬림들을 종교적으로 자극하지 않으면서 유대교 정책을 표방하는 종교 정책을 주로 구사하였다. 하자르 칸국에서 발행한 주화에는 이슬람 샤하다를 모방하여 "무사 라술랄라" 즉 "모세는 신의 사자이다.''라는 아랍어 문구가 새겨넣어져 있다. 모세 또한 이슬람에서 예언자이자 신의 사자로 여겨지니 물건을 팔고나서 하자르 주화를 받은 아랍 무슬림 입장에서도 트집잡을 수가 없어지는 셈.


4.1. 멸망[편집]


9세기 초반 산하의 마자르족이 독립하면서 이들의 국력에 타격을 입히고 결정적으로 9세기 말 바이킹족의 일파인 루스들에게 흑해와 북유럽을 잇는 하천 교역로를 빼앗기면서 급속히 몰락했다. 965년에는 키예프 루스의 대공 스뱌토슬라프 1세가 카자르의 여러 도시들을 쓸어버렸고 969년에 수도 아틸이 함락되었다. 하자르 신민들 상당수는 루스인들에 의해 노예로 사로잡혀 압바스 왕조후우마이야 왕조로 팔려나가고, 하자르 칸국은 소국으로 전락한 후 동방에서 온 다른 튀르크 부족들에게 멸망하였다. 이들의 영토는 키예프 루스, 페체네그쿠만에게 흡수되었다. 하자르 지배층의 상당수는 셀주크와 함께 중앙아시아로 도망쳐서 셀주크 튀르크의 지배층이 되었다.

5. 기타[편집]


초기에는 카간의 권위가 절대적이었으나 전쟁을 거듭하면서 군을 지휘하는 베그의 권력이 커져 말기에는 카간은 명목상의 군주이고 베그가 실질적인 군주화되었다. 10세기 무슬림 지리학자 알-이스타흐리에 따르면 하자르인들 중 악 하자르족(White Khazars)은 붉은 머리에 하얀 피부색에 푸른 눈을 가졌으며 카라 하자르족(Black Khazars)은 피부색이 인도인과 비슷하다고 묘사했다. 과거 하자르인들의 유골을 오늘날 조사해본 결과 이들은 유전적으로 튀르크인보다는 슬라브인에 가까웠다고 한다. 오늘날의 볼가 타타르인처럼 슬라브계 피지배층이 튀르크계 지배층의 튀르크화된 케이스였을 수도 있다.

소설 유대인 경찰연합의 작가인 유대계 미국인 작가 마이클 셰이본의 소설 '길 위의 신사들(Gentlemen of the road)'은 10세기 하자르 왕국을 무대로 게르만계 유대인인 의사 젤리크만과 에티오피아계 유대인인 전사 아므람이 하자르 왕국의 왕위(자세히 말하자면 카간 위가 아닌 베크 위) 계승전에 휘말려 겪는 모험을 다루고 있다. 주요 등장 인물들이 모두 유대교를 믿는 유대인이면서 막상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은 아니라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오랫동안 '카자르 사전' 이라고 알려졌던 소설 <하자르 사전>은 이 하자르 칸국이 국교를 결정한 사건를 모티브로 한다.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가 후보군이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1Q84에서는 '선구'라는 이름의 사이비 종교의 교주 노릇을 하는 리더라는 인물이 여주인공인 아오마메에게 옛날 왕들은 일정한 나이가 될 때까지만 왕으로 재위하고, 나이가 차면 신하들이 왕을 잔혹하게 살해하는 것으로 지도자의 권력과 통치 시기를 일정하게 잡고 독재자의 자리를 탐하는 것을 막았는데, 어느 시점에서부턴가 지도자들이 스스로의 지위를 죽을 때까지 차지할 욕심을 품었고, 이로 인해 모든 것이 뒤틀려버렸다고 말하는데, 이 이야기가 바로 하자르 카간국의 카간들에 대한 제임스 프레이저의 황금가지에서의 언급을 모티브를 따온 것으로 여겨진다. 황금가지에 의하면, 하자르 카간국의 카간들은 즉위식 날에 "나는 몇 십 년간 이 나라를 통치하겠다."고 선언하면 신하들이 이를 기억해두었다가, 실제로 통치를 중단하겠다고 한 날이 되면 신하들이 카간을 살해하는 식으로 차기 카간이 될 자식에게 권력을 넘겨주었다고 한다. 위에 나온 ‘길 위의 신사들’에서도 임기가 다 끝나 죽을 날만 기다리던 카간이 변장하고 몰래 도망치는 묘사가 나온다.


5.1. 관련 항목[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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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때 흩어진 아들들 중 2남 코트라그(장남 바트바얀을 축출)가 이끄는 세력은 볼가 강과 카마 강이 만나는 지점까지 북상하여 훗날의 볼가-불가리아를, 3남 아스파루크가 이끈 세력은 다뉴브 강 남쪽으로 도피하여 그곳의 슬라브족들과 연합해 훗날의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의 기틀을 다진다.[2] 힘야르 왕국과 함께 비유대인 국가가 유대교를 국교로 삼은 유이한 사례이다.[3] 하자르 칸국은 무슬림들로부터 수입한 물산을 노르드인에게 되파는 중개무역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