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학원

덤프버전 :

파일:다른 뜻 아이콘.svg
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입시학원인 한양학원에 대한 내용은 한양학원(입시학원) 문서
한양학원(입시학원)번 문단을
한양학원(입시학원)#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학교법인 한양학원
學校法人 漢陽學園
Hanyang Foundation

파일:한양대학교 로고.svg
건학이념
사랑의 실천 愛之實踐[1]
국가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창립
1946년 5월
분류
학교법인
설립자
김연준
이사장
김종량
소재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성동구 왕십리로 222
홈페이지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1. 개요
2. 계열학교
2.1. 대학교
2.2. 고등학교
2.3. 중학교
2.4. 초등학교
3. 계열 병원
4. 법인 산하 영리회사
5. 비영리 법인
6. 법인이사회
7. 교가



1. 개요[편집]


학교법인 한양학원(學校法人漢陽學園)은 한양대학교를 중심으로 하는 대한민국학교법인이다.

검정고시 학원인 한양학원과, 해당 학원을 운영하는 (주)매경아이씨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2. 계열학교[편집]



2.1. 대학교[편집]



2.2. 고등학교[편집]



2.3. 중학교[편집]



2.4. 초등학교[편집]



3. 계열 병원[편집]



4. 법인 산하 영리회사[편집]



파일:한양증권.jpg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한양증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파일:한양산업개발 로고 상하.svg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한양산업개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파일:프레지던트호텔로고.jpg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프레지던트 호텔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 기독교신문 #
파일:external/www.gdknews.kr/20150831165203_2984.jpg
기독교신문은 1965년 12월 12일 창간된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초교파지로서 한양대학교 재단 산하에 있는 신문사이다. 매주 80,000 여부씩 제작하고 있으며 전국의 교회 및 1,200만 크리스천들을 상대로 배포하고 있다. 한자로 쓰여진 '基督敎新聞'은 김연준 박사의 서체이다. 참고로 한양대학교의 학보인 '漢大新聞'도 김연준 박사의 서체이다.

  • 대한일보
4·19혁명 직후인 1960년 9월, 현제명의 중재로 기업인 홍찬(洪燦)[2]이 운영하다 위기에 처한 평화신문을 인수한 것이다. 그 후 1961년 2월1일, 이 신문의 제호를 대한일보로 바꾸고, 본격적으로 언론사업을 시작하였다. 1960년대 대한일보는 동아·조선에는 비할 수 없었으나 중간급 중앙지로서 위상을 굳혀 나갔다. 그러나 1973년 자진 폐간 [3]

  • 한양영화공사
1960년대에 한양영화공사라는 영화사를 설립해서 영화제작을 하기도 하였다. 1960년에 한양대에 연극영화과를 설립하고 1961년 12월에 한양영화공사를 설립하였다. 당시 군부세력에 의해서 영화법이 개정되고, 군소영화사가 통폐합되는 와중에, 영화사가 등록제로 변하면서 설립요건이 까다로워졌는데, 한양영화공사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규모의 투자를 통해 설립을 인가받고, 대규모 예산이 들어가는 대작영화 등을 제작 흥행시키기도 하였다. 이후 60년대 중후반까지 짧은 기간이지만, 전속계약을 맺고 제휴한 아카데미극장[4]과 함께 당시까지 주먹구구 일변도였던 영화사업 부문에서 나름 체계적인 프로듀서 시스템 등을 도입하는 등 족적을 남겼다.[5]#[6]#

  • 대한출판
1975년 1월 회사 설립 후 출판사업을 하다가, 현재는 회사 소유 건물에 대해 자기관리 및 임대를 하고 있다.

1968년 인수 후 민영화했으나, 1977년 서주산업에 매각함.

5. 비영리 법인[편집]


  • 한양대학교 국제재단 #
한양대학교의 발전에 함께하고자하는 동문 및 일반인들을 위한 비영리 법인으로, 해외에 거주하는 동문을 대상으로 발전기금을 모금하여 한양대의 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2018년 9월 설립된 재단이다.

6. 법인이사회[편집]


2016년 8월 현재 법인이사회는 다음과 같이 구성된다.
직위
성명
생년
주요경력
임기
이 사 장
김종량[7]
1950년
한양대학교 총장 역임
한양사이버대학교 총장 역임
2015. 03. 19 ~ 2019. 03. 18
이 사
백경순[8]
1926년
한양대학교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장 역임
2014. 12. 11 ~ 2018. 12. 10

이현섭
1927년
복지법인 한국봉사회 이사
2014. 06. 11 ~ 2018. 06. 10

이학래
1939년
한양대학교 교수 역임
2013. 12. 22 ~ 2017. 12. 21

김용만
1943년
한양대학교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장 역임
2014. 02. 26 ~ 2018. 02. 25

이영무
1954년
한양대학교 총장
2015. 03. 01 ~ 2019. 02. 28

오웅탁
1948년
한양대학교 교수 역임
2016. 05. 31 ~ 2020. 05. 30
개방이사
안경성
1936년
한양대학교 의료원장 역임
2013. 11. 17 ~ 2017. 11. 16

손정식
1943년
한양대학교 교수 역임
2012. 02. 03 ~ 2020. 02. 02

유병태
1948년
한양사이버대학교 부총장 역임
2015. 11. 24 ~ 2019. 11. 23
개방감사
백현기
1952년
법무법인(유) 로고스 상임고문변호사
2013. 11. 17 ~ 2017. 11. 16

7. 교가[편집]


한양학원 소속 학교들은 같은 교가를 부른다.한양대학교 교가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25 13:56:03에 나무위키 한양학원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애지실천[2] 일제강점기 약초극장(수도극장/스카라극장의 전신) 지배인으로 일하다 해방후 불하받아, 약초극장을 수도극장으로 바꾸고, 수도영화사를 설립하기도 하는 등 큰돈을 벌었다. 해방후 우익활동을 통해 이승만과 친분을 다졌으며, 그 뒷배로 1957년 안양에 6만여평의 동양 최대규모의 영화촬영 스튜디오를 만들기도 하는 등 한 때 잘 나가던 미디어/언론 사업가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다수의 친일행위로 해방 후 반민특위에 체포되기도 하고, 친일인명사전에도 수록된 인물이다[3] 윤필용 사건에 엮여서, 박정희 대통령이 수재의연금 횡령을 빌미로 대한일보를 폐간시키려고 했다는 얘기가 있었다. 이에 대해 대법원에서 김연준 사장에게 무죄판결을 내렸고, 김연준 사장은 자진 폐간을 결정했다. 이에 김연준 박사는 멘붕과 빡침. 그런데 중동 건설경기로 많은 기술자가 빠져나가 오히려 국내 기술자가 부족한 상태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한양대가 반월 신공업 도시에 대학을 지어주기를 희망했지만, 김 총장은 “황금을 한 트럭 준다고 해도 박 대통령이 있는 동안은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고 튕겼다. 밀당 처음 23만평을 학교부지로 책정되었던 것을 더 주겠다고 제안했고, 이를 받아들여 1979년 반월분교(現 한양대학교 ERICA캠퍼스, 40만평)가 설립되었다. [4] 1968년까지 조선일보에서 운영하던 극장. 60년대 인근의 국제극장, 충무로의 명보극장, 을지로의 국도극장 등과 방화(한국영화)전용관으로 유명했다.[5] 60년대 국내 영화업계는 10대 개봉관 극장-전속 영화사-전속 감독/작가-전속 배우 체제로 운영되었는데, 국제극장-동아흥행-홍성기 감독-김지미, 명보극장-신필름-신상옥 감독-신영균 등의 형태였다. 아카데미극장은 원래 외화상영관이었으나 방화전성시대가 도래하자 1962년 한양영화공사와 전속을 맺고 방화전용관으로 변모한다. 이후 극동흥업까지 추가되어 주로 신성일, 엄앵란 주연의 청춘영화를 개봉했는데, 63년~68년 사이 아카데미 극장의 한국영화 개봉작 125편 중 70%에 달하는 88편의 작품이 신성일 주연작이라 일명 신성일 극장으로 불렸는데, 그 대다수가 한양영화사 또는 극동흥업의 김기덕 감독 작품이다.[6] 신성일의 자서전 내용에 의하면 아예 한양대의 연영과 설립과 영화사 설립이 당시 아카데미 극장의 사장이던 방우영 조선일보 전 회장(62년 당시는 방우영의 형 방일영이 회장이고 방우영은 극장 사장) 의 요청으로 이루어졌다고 나온다. 나이차가 있기는 하지만, 김연준과 방우영은 같은 연희전문 출신이고, 같은 이북 출신이므로 친분이 두터웠을 가능성이 많기는 하다[7] 김연준 설립자의 장남[8] 김연준 설립자의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