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광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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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무대 비서실장 (1948~1960)

이승만 정부


허정 내각

초대
이기붕
제2대
김양천
제3대
고재봉
제4대
유창준
제5대
장일강
청와대 비서실장 (1960)

장면 내각

제6대
김준하
대통령비서실장 (1960~2008)

장면 내각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 정부

초대
이재항
제2대
이동원
제3대
이후락
제4대
김정렴
제5대
김계원

최규하 정부


전두환 정부

제6대
최광수
제7대
김경원
제8대
이범석
제9대
함병춘
제10대
강경식

전두환 정부


노태우 정부

제11대
이규호
제12대
박영수
제13대
김윤환
제14대
홍성철
제15대
노재봉

노태우 정부


문민정부

제16대
정해창
제17대
박관용
제18대
한승수
제19대
김광일
제20대
김용태

국민의 정부

제21대
김중권
제22대
한광옥
제23대
이상주
제24대
전윤철
제25대
박지원

참여정부


제26대
문희상
제27대
김우식
제28대
이병완
제29대
문재인
대통령실장 (2008~2013)

이명박 정부


박근혜 정부

초대
류우익
제2대
정정길
제3대
임태희
제4대
하금열
제5대
허태열
대통령비서실장 (2013~현재)

박근혜 정부

제30대
허태열
제31대
김기춘
제32대
이병기
제33대
이원종
제34대
한광옥


제35대
임종석
제36대
노영민
제37대
유영민
제38대
김대기
제39대
이관섭



역임한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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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민주당(1991년) 로고.svg 사무총장
초대
김원기

제2대
한광옥


제3대
김덕규

파일:새정치국민회의 흰색 로고.svg 파일:새정치국민회의 흰색 로고타입.svg 사무총장
초대
조순형

제2대
한광옥


제3대
김충조

파일:국회휘장(9대-19대).svg 대한민국 국회 노동위원장
제13대 전반기
김영배

제13대 전·후반기
한광옥


제14대 전반기
장석화

파일:국회휘장(9대-19대).svg 대한민국 국회의원 (서울 제12선거구)
선거구 개편
정희섭[A]
김수한[A]

제11대
임철순
한광옥

선거구 개편
임철순[B]
김수한[B]
파일:국회휘장(9대-19대).svg 대한민국 국회의원 (서울 관악구 갑)
선거구 개편
임철순[B]
김수한[B]

제13-14대
한광옥


제15대
이상현
파일:국회휘장(9대-19대).svg 대한민국 국회의원 (서울 구로구 을)
제15대
이신행
[1]

제15대
한광옥
[2]

제16대
장영신
[3]




대한민국 제22·34대 대통령비서실장
한광옥
韓光玉 | Han Gwang-ok


파일:한광옥 전 비서실장.jpg

출생
1942년 1월 29일[1] (82세)
전라북도 전주부 다가정 37번지[2]
(現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다가동2가)
거주지
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동
본관
청주 한씨[3]

범봉(凡峯)
재임기간
초대 노사정위원회 위원장 (장관급)
1998년 1월 15일 ~ 1998년 5월 12일
초대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상임의장
1998년 9월 11일 ~ 1999년 11월 24일
제22대 대통령비서실장 (국민의 정부 / 장관급)
1999년 11월 24일 ~ 2001년 9월 9일
초대 국민대통합위원회 위원장
2013년 6월 17일 ~ 2016년 11월 2일
제34대 대통령비서실장 (박근혜 정부 / 장관급)
2016년 11월 3일 ~ 2017년 5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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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자매
4남 4녀 중 장남
남동생 한항문[1], 한희덕[2], 한재희[3]
여동생 한영애[4], 한선애[5], 한옥희[6], 한옥선[7]
배우자
정영자[8]
자녀
아들 한정호[9], 딸 한정아[10]
학력
전주사범학교부속국민학교[11] (졸업)
전주북중학교 (졸업)
중동고등학교 (졸업 / 53회)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 (영어영문학 / 제적[12])
병역
대한민국 육군 병장 만기전역
종교
개신교
소속 정당

의원 선수
4
의원 대수
11, 13, 14, 15
약력
신민당 중앙대의원
국회의원 비서관
민주한국당 서울특별시 지부 부위원장
제11대 국회의원 (서울 제12선거구[13] / 민주한국당)
민주한국당 조직국장
민주한국당 통일문제특별위원회 위원장
민주한국당 공명선거추진위원회 부위원장
민주화추진협의회 대변인
평화민주당 총재[14] 비서실장
평화민주당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선거대책본부 정책위원회 위원장
제13대 국회의원 (서울 관악구 갑 / 평화민주당)
제13대 국회 전/후반기 노동위원회 위원장
민주당 사무총장
민주당 최고위원
민주당 부총재
제14대 국회의원 (서울 관악구 갑 / 민주당)
새정치국민회의 지도위원회 부위원장
새정치국민회의 사무총장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
초대 노사정위원회 위원장 (국민의 정부)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대표상임의장 (국민의 정부)
제15대 국회의원 (서울 구로구 을 / 새정치국민회의)
제22대 대통령비서실장 (국민의 정부)
새천년민주당 대표최고위원
통일미래연구원 이사장
민주당 상임고문
민주통합당 상임고문
정통민주당 공동대표
새누리당 전임고문
초대 국민대통합위원회 위원장 (박근혜 정부)
제34대 대통령비서실장 (박근혜 정부)

1. 개요
2. 생애
2.1. 정치 인생
2.2. 새누리당 입당과 박근혜 정부 마지막 비서실장
2.3. 근황
3. 정치 성향 변화에 대해
4. 선거 이력
5. 소속 정당
6.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대한민국정치인. 호는 범봉(凡峯)이다. 한때는 동교동계 중진으로써 활동했던 사람이었으나 19대 총선 이후 친박이 된 대표적 사례이다.

보시다시피 동교동계의 일원으로 국민의 정부 대통령비서실장이었다가, 18대 대선을 계기로 새누리당에 합류해 급기야는 박근혜 정부의 마지막 대통령비서실장까지 오른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 최초로 두 개의 정부, 그리고 유일하게 다른 계열(국민의 정부는 민주당계, 박근혜 정부는 보수계)의 정부에서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냈다는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현재는 당적을 정리하고 사실상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2. 생애[편집]


1942년 1월 29일 전라북도 전주부 다가정 37번지(현 전주시 완산구 다가동)에서 아버지 한상인(韓相仁, 1919. 8. 1 ~ 1980. 12. 3)[4]과 어머니 남원 양씨(1922. 8. 11 ~ 1957. 5. 2)[5] 사이의 4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전주사범학교부속국민학교와 전주북중학교, 중동고등학교(53회)를 졸업하였다.[6] 이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했으나 재학 중에 6.3 항쟁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제적당하였다.


2.1. 정치 인생[편집]


신민당에 속하여 3선 개헌 반대 운동을 하였다.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한국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관악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정의당 임철순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비록 민정당의 2중대로 불리던 구색정당 민주한국당 소속이었지만, 1982년 국회에서 '정치보복 중단, 김대중 석방, 광주사태 진상 규명'을 외치면서 야당 정치인으로 유명세를 탔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신한민주당 김수한 후보와 민주정의당 임철순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같은 해 민주한국당을 탈당하고 신한민주당에 입당하였다. 1985년 고려대학교 앞 시위 선동 사건으로 박찬종, 조순형 등과 기소되어 유치장 신세를 지기도 하였다. 1986년 민주화추진협의회 대변인을 역임하였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평화민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관악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0년부터 1992년까지 대한민국 국회 노동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민주당 사무총장에 임명되었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신한국당 이상현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8년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서울특별시장 후보 경선을 준비했으나, 여론조사에서 밀린다는 당내부의 지적에 따라 포기하였다. [7][8][9]

1999년 3월 30일에 열린 상반기 재보궐선거에서 서울특별시 구로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나 같은 해 11월 24일에 대통령비서실장에 임명되면서 8개월만에 국회의원직을 사퇴했다. 이후 16대 총선에서는 애경그룹 회장출신 장영신[10]에게 구로구 을 지역구가 넘어가게 된다. 2001년 새천년민주당 대표최고위원이 되었다.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고건 서울특별시장이 일찌감치 불출마 선언을 하면서 이해찬, 정동영, 김민석과 함께 차기 새천년민주당 서울특별시장 후보로 거론되었지만 움직임은 없었다.

이후 대통령비서실장 재임 중 나라종금 관련해서 뇌물을 받은 것이 드러나,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2003년 5월에 구속되었고 2005년 7월 대법원에서 징역 2년 6개월, 집행유예 3년, 추징금 3,000만원을 선고받았다. 이후 또 다른 건으로 재판을 받았고, 2008년 8월 15일에 대통령 특사를 받아 사면, 복권이 이뤄졌다.

2.2. 새누리당 입당과 박근혜 정부 마지막 비서실장[편집]


피선거권이 박탈되었기 때문에 당적을 가질 수 없던 처지였으나, 피선거권이 복권되면서 2009년 1월 민주당으로 복당했다. 이후 고향인 전주시 완산구 갑에서 치러지는 재보궐선거에 출마 선언을 했지만 경선에서 탈락했다. 이후 2010년 재보궐선거에서도 은평구 을에서 출마를 타진했지만 결국 불출마 선언을 했다.

그러다 2012년 총선에서 민주통합당 소속으로 자신의 원래 지역구[11]였던 관악구 갑에 공천신청을 했지만 유기홍 전 의원에게 밀려 탈락하였는데, 이에 친노세력이 당을 독단적으로 운영한다면서 탈당 후에 동교동계 일부를 모아서 정통민주당을 창당한다. 이후 호남권에서 구 민주계 인사들이 공천에서 줄줄이 탈락하자 이 들을 끌어들이려고 했으나, 무산되었고 결국 총선에선 대참패한 것은 물론 정통민주당은 야권표 분산으로 새누리당 당선자만 늘려주는 역할을 하게 되면서 사라진다.[12]

이후 제18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같은 동교동계 출신인 한화갑, 김경재와 같이 박근혜 후보 지지를 선언했다. 그리고 김경재와 함께 새누리당에 입당하였다.[13] 대선 이후 박근혜 대통령으로 부터 국민대통합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되었다.

2016년 11월 3일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위기에 빠진 박근혜 정부대통령비서실장으로 발탁되었다. 최초로 두개의 정부에서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냈다는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2016년 11월 2일 출범한 박정희 100주년 기념사업 고문이 되었으며 박근혜 대통령 지지율 5%에 대해서 "한 부분의 통계를 갖고 정책이나 대책을 세운다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주장했다.#

결국 2016년 11월 5일 박근혜 대통령 하야 촉구 촛불집회 보고 "어제 광화문 광장에서 보여준 국민들의 준엄한 뜻을 매우 무겁게 느끼고 있다"라고 말하였다.# 이후 새누리당과 야3당을 찾아 대통령이 국회로 올 수 있으며, 영수회담에서 김병준 국무총리 후보자 문제 등 국정전반에 관하여 논의하자고 했다.# 물론 여론이 워낙에 부정적인 탓에 결국 박근혜 전 대통령은 탄핵되었다.

이후 2017년 3월 10일, 박근혜헌법재판소에 의해 탄핵된 뒤 새 대통령이 취임하기 전까지 빈 집이 된 청와대를 관리하였다. 이 과정에서 대통령 문서들을 파기했다는 의혹이 있다. 대선에서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가 당선되었는데, 정통민주당을 만들어 민주통합당의 19대 총선 패배에 크게 일조한 한광옥 실장이 유임될 일은 당연히 없었고, 문재인 정부가 출범과 동시에 임종석 前 의원으로 즉각 교체되었다.


2.3. 근황[편집]


다른 대통령비서실장과 달리 박근혜 대통령이 이미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식물 대통령으로 전락한 무렵에 '해결사'역할을 맡고 탄핵 이후에 존재감이 없었지만,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을 보좌하여 선거 정국을 이끌었다. 비서실장 퇴임 후 박정희 대통령 38주기 추도식, 김종필국무총리 영결식 참석이나 김대중 대통령 서거 9주기 추도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2020년에는 월간 중앙을 통해 장문의 인터뷰를 하며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인터뷰에서는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 정치 재판이라 주장하고, 문재인 정부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거리낌없이 드러내는 등 3년전과 별반 달라지지 않은 현실 인식을 드러냈다.

동교동계권노갑민주평화당 상임고문은 한광옥 전 비서실장과는 이미 평소에 연락을 안하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으며[14]# 21대 총선에서는 미래통합당 김선교 후보 지지 유세에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3. 정치 성향 변화에 대해[편집]


과거에 DJ 밑에서 일했으며 4.19 혁명, 3선 개헌 반대, 6.3 항쟁 등에 참여해서 반 유신, 반 독재 성향을 가졌던 인사가 불과 10년 사이에 보수 정당으로 넘어간 것을 생각하면 여러모로 충격일 수밖에 없다. 비슷한 행보를 보인 인사는 자유총연맹의 총재가 된 김경재가 있다. 둘 다 2012년 전후로 넘어갔다는 공통점이 있다.[15] 다만 이런 행보가 대한민국 근대사에 한광옥만 있는 것은 아니다. 민주화, 독재타도를 주도했던 학생운동권, 노동개혁을 주도했던 노동운동권에서도 정반대인 보수로 넘어간 선례가 많다. 대표적으로 노동운동권은 김문수[16], 이재오, 학생운동권은 원희룡, 하태경이 있다.[17]

다만, 새누리당으로 넘어간 것은 동교동계의 정치적 몰락 이후 자신을 홀대한[18] 민주당, 특히 현 더불어민주당친노, 민평련 등 주류세력에 대한 반감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 이후로도 문재인에 대한 극렬한 반감 때문에 새누리당에 넘어온 조경태가 잇게 된다.[19]

애초에 과거에는 대한민국 제도권 정당 정치인들이 인물 중심으로 이합집산을 반복하기에 이념은 대북(對北) 문제를 제외하면 친시장에 자유주의 성향으로 오십보백보였기에 한광옥 전 대표가 민주당에 비해 친시장 성향을 지닌 새누리당에 간 것이 크게 이상해 보이지는 않는다. 과거사를 보자면 과거 김영삼 김종필 노태우3당 합당도 그렇고, 김대중-김종필 연립정부, 즉 DJP연합은 대선을 앞두고 40년간 괴롭힘당한 이유인 레드 컴플렉스를 일축하려는 김대중과 충청도 핫바지론을 주장하며 다시 한번 정권을 잡아보려는 김종필의 야심이 맞아 떨어진 것이지 이념적 성향과 전혀 거리가 멀었다.

다시 말해 당시 한국 정치인들은 이념이 아니라 정치 보스에 줄을 섰기에 가능한 일이다. 김종필이 주도한 의원내각제 개헌은 끝내 무산되고, 민주당계 정당의 고질적 아킬레스건인 레드 컴플렉스를 덜어준 자민련이 한나라당의 공격에 무너지며 지지기반을 상실해 DJP연합이 해체된 거지, 민주당과 자민련의 이념이 일치해서 DJP연합이 결성되고 유지된 건 아니다. 결국 17대 총선 이후 자민련은 한나라당으로 흡수되었다.

민주화 운동을 했던 인사들이 보수정당에 있는 것을 보고 충격을 먹는(?) 일이 많은데,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인사들이 모두 진보주의자인 것만은 아니다. 개인의 본래 정치적 신념이나 소속 계파, 여러 이해관계에 따라 보수정당으로 가기도 하고 진보정당으로 가기도 하였다. 정계 입문 이후 이합집산에 의해, 또는 필요에 따라 철새라는 비판을 감수하고 정당을 옮기기도 했다. 이들은 권위주의 정권 시대에는 좌우 구분 없이 합심하여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었으나, 공동 목표인 민주화가 이뤄진 이후에는 정치적 신념 또는 저희들의 계파 수장을 따라 여러 정당으로 흩어진 것이다.

따라서 원래 성향은 보수주의에 가깝지만 권위주의적 독재정권에는 반대하여 민주화 운동을 한 인사들도 많이 있다. 예를 들면 참여정부를 비판한 김영삼 대통령이 있다. 한나라당의 전신 민주자유당도 과거 김광일, 박관용, 서청원, 이인제, 김무성 등의 상도동계들이 상당수 입당했었고[20], 민주당에도 군사정권 시절과 보수정권 인사를 영입한 경우가 많다. 예컨대 새천년민주당에는 민정계 출신인 이종찬, 김부겸 이전에 TK에서 가장 당선에 가까웠던 민정계 민주당 인사인 김중권도 있다.[21] 민주당 비대위원장을 지낸 김종인은 문재인이 영입했지만 전두환 쿠데타로 만든 신군부에 협력하며 국보위에 참가했고, 보수정당에서 국회의원 공천을 3번이나 받은 사람이었다.[22], 자유한국당의 비대위원장을 지냈던 인명진 목사는 보수 성향의 인사이긴 하나 독재정권에 부역하거나 긍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1970~80년대 빈민운동 노동운동을 하다 박정희때 긴급조치로 억울한 옥살이를 했으며, 훗날 경실련 창립멤버였다.

다만 한광옥이나 그의 동지 한화갑, 김경재의 경우 동교동계의 일원이었음에도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를 지지하였기에 여론의 파장이 컸던 것이다. 같은 동교동계 원로인 김옥두 전 의원은 물론이고 #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도 이들을 변절자라고 비난했다. 한광옥은 동교동계에서도 중진이면서 민주당계 정당에서 매우 오래 정치 활동을 하였으며, 김대중 대통령의 최측근 인사로서 김대중 정부대통령비서실장을 역임한 인물이었음을 감안하면 이후의 행보는 개인의 신념이 변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4.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81
제11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12[23]

[[민주한국당|
파일:민주한국당 흰색 로고타입.svg
]]

47,668 (22.36%)
당선 (2위)
초선[24]
1985
제12대 국회의원 선거
64,475 (23.25%)
낙선 (3위)

1988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관악 갑

[[평화민주당|
파일:평화민주당 글자.svg
]]

51,199 (38.99%)
당선 (1위)
재선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파일:민주당(1991) 글자.svg

56,061 (42.51%)
3선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새정치국민회의|
파일:새정치국민회의 흰색 로고타입.svg
]]

43,197 (37.67%)
낙선 (2위)

1999
3월 재보궐선거
(국회의원)
서울 구로 을
27,826 (53.53%)
당선 (1위)
4선[25][26]
2012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관악 갑

파일:정통민주당 초록 로고타입.svg

5,207 (4.10%)
낙선 (3위)



5. 소속 정당[편집]


소속
기간
비고

[[신민당(1967년)|
파일:신민당 벽보글씨.svg
]]

1969
정계 입문

[[무소속|
무소속
]]

1969
자진 정당 해산

[[신민당(1967년)|
파일:신민당 벽보글씨.svg
]]

1969 - 1980
정당 재등록

[[무소속|
무소속
]]

1980 - 1981
정당 해산

[[민주한국당|
파일:민주한국당 흰색 로고타입.svg
]]

1981 - 1985
창당

[[무소속|
무소속
]]

1985
탈당[27]

파일:신한민주당 흰색 로고타입.svg

1985 - 1987
창당

[[무소속|
무소속
]]

1987
탈당[28]

[[통일민주당|
파일:통일민주당 흰색 로고타입.svg
]]

1987
창당

[[무소속|
무소속
]]

1987
탈당[29]

[[평화민주당|
파일:평화민주당 글자.svg
]]

1987 - 1991
창당

[[신민주연합당|
파일:신민주연합당 글자.svg
]]

1991
당명 변경

파일:민주당(1991) 글자.svg

1991 - 1995
합당[30]

[[무소속|
무소속
]]

1995
탈당[31]

1995 - 1999
창당

1999 - 2001
탈당[32]

2001 - 2005
복당

2005 - 2007
당명 변경

2007
합당[33]

2007 - 2008
당명 변경

2008
합당[34]

2008 - 2011
당명 변경

2011 - 2012
합당[35]

2012
탈당[36]

2012
입당

2012
당명 변경

2012
자진 정당 해산

2012 - 2016
입당

2016 - 2017
탈당[37]

2017 - 2020
복당
정계 은퇴

2020
합당[38]

2020
당명 변경

2020 - 현재
탈당


6. 둘러보기[편집]








[1] 음력 1941년 12월 13일.[2] #[3] 청주한씨제7교대동족보 22권 1228쪽에는 정당공파 34세 균(均)자 항렬을 써서 광균(光均)이라는 이름으로 등재되어 있으며, 본명인 광옥(光玉)은 자(字)라고 기재되어 있다. 다음은 출처 사진이다. 파일:한광균 족보.png[4] 족보명은 한사인(韓思仁).[5] 양영무(梁榮茂)의 딸이다.[6] 전주고등학교 입학시험장에서 친구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시험답안지를 보여주다 발각돼 낙방하고 말았고, 당시 서울특별시에 있던 누나 집으로 가서 후기모집 고등학교를 알아보던 중 매형이 추천한 중동고등학교에 지원해 무난히 합격했다. 이후 고등학교 3학년 때 서울대학교에 합격하자 당시만 해도 서울대학교 합격생 숫자가 적었던 중동고등학교 교사들이 놀랐다고 한다.[7] 새정치국민회의는 고건 전 국무총리를 영입해서 경선없이 후보로 추대하였고, 결국 서울시장 선거에서 승리하였다.[8] 물론 여론조사는 명분이었고 실질적으로는 정권초기부터 강력한 대권주자가 나오는 것을 경계했던 정부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다. 이에 대해 한광옥 의원은 반발했다고 알려졌지만 한광옥 의원과 함께 서울특별시장 선거를 준비했던 노무현 대통령도 그런 의도를 알고 서울시장 출마를 일찌감치 포기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김대중 대통령은 "정치는 노무현이처럼 해야 한다"라고 칭찬했다는 후일담도 있다. 그리고 서울시장 불출마가 보궐선거 공천에 긍정적으로 영향을 주었고 결국 한광옥 의원은 구로구 을, 노무현 대통령은 종로로 공천되어 국회로 돌아오게된다. 여기에 한광옥 의원은 나중에 대통령 비서실장에도 임명되는 건 덤.[9] 그리고 서울특별시장이라는 큰 자리에 고건을 영입한 김대중 대통령의 의도는 적중했다. 실제로 고건 총리의 자서전에 따르면 서울특별시장 임기가 종료될 쯤에 대통령 선거 출마 제안을 받았지만 거절했다고 밝혔다.[10] 다만 장영신은 선거법 위반으로 2001년에 의원직이 상실해 해당지역구가 2년만에 또 재보궐선거를 치르게 된다.[11] 물론 1999년 3월 재보선을 계기로 지구당 위원장직을 사퇴해서 지역구를 떠난지도 이미 13년이 흘러간 상태였다.[12] 이 당시 정당법은 선거에서 2% 이상 득표하지 못하는 정당은 해산되도록 되어 있었기에 정당득표율이 0.22%에 그쳤던 정통민주당은 19대 총선과 함께 그대로 해산되었다.[13] 다만 한화갑은 입당을 하지 않았다.[14] 그럴만 한 것이 권노갑은 친노 - 천신정에게 크게 비토받던 과거가 있었음에도 끝까지 민주당 계열을 벗어나지 않았다. 민주평화당 자체도 민주당계에서 천정배계 + 정동영계 + 호남계가 빠져나와서 생긴 정당이고 반면 한광옥은 계속된 공천배재에 반발해서 아예 반대 진영으로 건너간 사람이다.[15] 보수정당으로 넘어간 다른 동교동계 인사들로는 안동선, 이윤수, 김원길이 있는데 이들은 이미 후단협을 계기로 2002년 이후부터 보수정당에 여러 번 소속되었던 적이 있다.[16] 특히 이 중에서 김문수는 진보정당인 민중당 창당을 주도했던 인물임에도 기독교 우파로 완전히 진영이 바뀐 사람이다.[17] 다만 한광옥처럼 민주당계 정당 생활을 오랫동안 하다가 완전히 보수정당계로 넘어간 경우는 결코 흔한 케이스가 아니다. 비슷한 케이스라고 해봐야 2016년 총선을 앞두고 새누리당으로 넘어간 조경태국민의당-바른미래당이라는 제3지대를 거쳐서 미래통합당 창당에 참여한 김영환, 문병호, 김근식 정도. 공교롭게도 이 셋은 21대 총선에 지역구로 출마해서 모두 낙선했다는 공통점이 있다.[18] 일단 정치자금법 문제로 못 나온 17, 18대 총선은 그렇다 쳐도 2009, 2010년 재보궐선거 모두 일찌감치 컷 오프된 것은 물론 19대 총선에서도 컷 오프 되었다.[19] 다만 조경태는 본래 속한 정당인 통합민주당이 1997년 11월에 신한국당과 합당하는 바람에 약 2년 반동안 한나라당 당적을 가진 적이 있다. 이후 16대 총선에서 공천에서 탈락하자 다시 새천년민주당에 입당하며 민주당계로 원대복귀한 것.[20] 이는 앞서 서술하였듯 계파 우두머리 김영삼이 삼당 합당에 뛰어든 점도 감안해야 한다. 이에 반발해서 꼬마 민주당에 합류한 사람이 바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21] 김중권은 16대 총선에서 민주당의 사지인 경북 동해안 선거구에 출마했는데, 불과 19표차로 낙선했다![22] 다만 김종인은 '인간 경제민주화' 비슷한 취급인 것도 있다. 이 인물이 다른 것을 한 것도 아니고, 박근혜 대통령 후보팀에서도 경제민주화 이슈를 대표했던 인물이기도 하기 때문. 김종인/평가 문서에도 나오지만, 정치인 김종인이 아니라 경제학자이자 테크노크라트 김종인을 기준으로 삼으면, 반재벌, 경제민주화가 변한 적이 없다. 심지어 과거(정확하게는 더불어민주당에서 비대위원장 하기 전까지) 정의당의 경우는 노골적으로 김종인을 탐내는 모습을 많이 보였을 정도이다.[23] 관악구[24] 민주정의당 임철순 후보와 동반 당선[25] 전임자 신한국당 이신행 당선무효[26] 1999.11.24. 대통령비서실장 임명으로 의원직 사퇴.[27]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28]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29]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30] 민주당과 신설 합당.[31] 새정치국민회의 창당을 위한 탈당.[32] 대통령비서실장 임명으로 인한 자동 탈당.[33] 중도개혁통합신당과 신설 합당[34] 대통합민주신당과 신설 합당[35] 시민통합당과 신설 합당[36] 총선 공천 탈락 불복으로 인한 탈당.[37] 대통령비서실장 임명으로 인한 자동 탈당.[38] 새로운보수당, 미래를향한전진4.0과 신설 합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