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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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獨立軍 / Korean Independence Army

1. 개요
2. 창설
3. 한중 연합 작전
4. 해체
5. 주요 전투
6. 여담



1. 개요[편집]



지청천이 중심이 되어 지린성, 헤이룽장성 등 북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군을 말한다.

홍범도 장군을 주축으로 하는 대한독립군, 그리고 한국광복군의 전신인 '한국독립당 당군'(1939년)과는 이름이 비슷한 별개의 조직이다. 특히 '한국 독립군'과 '한국 독립당 당군'은 둘 다 한국독립당당군이고, 또 두 군대의 모조직인 한국 독립당이 똑같이 1930년도에 창당하기까지 하여 혼동을 야기한다. 종종 대중 서적 등에서도 둘을 혼동하여 '한국 독립당군' 등으로 섞어 부르거나 행적을 섞어 소개하는 경우까지 있다.

2. 창설[편집]


미쓰야 협정 이후 독립군의 무장 투쟁 운동에 대해 탄압이 이뤄지자 3부 통합 운동을 통해 북만주의 혁신 의회(1928년) 다음에 남만주의 국민부(1929년)가 세워졌다. 한국 독립군은 혁신 의회의 한국 독립당이란 당에서 만든 군대이다.

3. 한중 연합 작전[편집]


한국 독립당은 1931년 9월 만주사변 이후 일본의 괴뢰정부인 만주국이 들어서자 1931년 12월에는 독립군 총사령관 지청천(池靑天)이 지린성 자위군 총지휘관 딩차오(丁超)와 만나 연합 전선을 결성할 것을 합의하였고, 이에 따라 중국 하얼빈의 호로군(護路軍)[1]과 한중 연합군을 결성한다.

이봉창 의사의 의거로 조선의 독립 운동에 대해 호의적으로 변한 덕도 있고, 서로 이해 관계가 일치하니 연합을 결정한 것이다. 합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국 독립군과 중국 호로군의 합의 내용(1931년)

1. 한·중 양군은 최악의 상황이 오는 경우에도 장기간 항전할 것을 맹서한다.

1. 중동 철도를 경계선으로 서부 전선은 중국이 맡고, 동부 전선은 한국이 맡는다.

1. 전시의 후방 전투 훈련은 한국 장교가 맡고, 한국군에 필요한 군수품 등은 중국군이 공급한다.

이후 한 - 중 연합 부대는 1932년 9월 22일, 11월 17일 ~ 22일에는 일본과 쌍성보 전투에서 승리[2]하였고 1933년 6월 30일엔 대전자령 전투를 벌여 승리한다. 그 외 사도하자 전투, 동경성 전투에서도 같이 연합 작전을 펼친다.

4. 해체[편집]


한중 연합 부대는 군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중국공산당과의 갈등으로 인해 해체되고, 이후 한국 독립군은 잠시 독자적으로 활동하는 시기를 갖는다. 중국으로부터의 지원 차단과 일제의 탄압으로, 이 시기의 한국 독립군은 둔전을 하면서 어렵게 조직을 유지하게 된다.

이 시기에 지청천이 김구의 요청으로 뤄양에서 육군 군관 학교 교관으로 재임한 것을 시작으로 한국 독립군의 주요 간부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흡수된다. 지청천을 비롯해 한국 독립군의 지도부 주요 인사들이 이탈하게 되자 한국 독립군은 자연스럽게 사실상 해체 일로를 걸었으며, 이후 한국 독립군 장병들은 각기 한국광복군이나 조선의용대 등에 합류하여 항일 투쟁을 이어가게 된다.[3]


5. 주요 전투[편집]




6. 여담[편집]


한국광복군과는 이름이 비슷한 별개의 조직인데, 이 두 조직은 모두 사령관이 지청천 장군이라는 점, 사용되었던 군복은 중국 국민혁명군 군복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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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봉천군벌 계통의 철도 수호 부대이다.[2] 사실 승리라기에는 애매한 것이 쌍성보 점령에는 결국 실패했다.(아래 문서 참조) 그러나 사상자를 비교한다면 일본군, 만주국 군대가 압도적으로 더 많았다.[3] 한국 독립군의 해체 과정과 후일담에 관해서는 신편 한국사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