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야구위원회/역대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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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3대
이용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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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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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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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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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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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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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호
16-17대
류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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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ite 파일:KBO 심벌마크(화이트).svg
한국야구위원회 사무총장'''
韓國野球委員會 事務總長
Secretary-general Of Korea Baseball Organization

현임
류대환 (16~17대)
취임일
2019년 2월 8일
파일:KBO 심벌마크(화이트).svg역대 한국야구위원회 사무총장
15대

16~17대

현직
장윤호
류대환
재직 중
1. 초대~3대 이용일
2. 4대~5대 안의현
3. 6대 박종환
4. 7대 최영언
5. 8대~10대 이상국
6. 11대 하일성
7. 12대 이상일
8. 13대~14대 양해영
9. 15대 장윤호
10. 16대~17대 류대환



1. 초대~3대 이용일[편집]


초대, 2대, 3대
파일:external/img.yonhapnews.co.kr/2031027p2213000_P2.jpg
재임기간
(3356일)

1981년 12월 15일 ~ 1991년 2월 21일

사실상 KBO 리그를 만든 장본인이다. 1977년 야구협회 전무이사 재직 시 프로야구 창설에 앞장섰으며[1], 1981년 그의 오랜지기인 이호헌(前 MBC 해설위원)과 함께 KBO 창설을 주도했다.[2] 그 공로를 인정받아 초대 사무총장에 임명되었다.

군산시의 야구원로로도 유명한데 군산지역 유소년 야구, 특히 군산상고 야구부를 창단하는데 큰 공헌을 했으며 쌍방울 레이더스 역시 이분께서 창단에 관여했고 쌍방울 레이더스 구단주 대행(1992년~1997년)을 역임했다. 2009년부터 유영구 총재의 고문으로 활동했고, 유영구 총재의 불명예 사임으로 총재대리를 역임했다. 2012년에는 전북 지역 '프로야구 제10구단 범도민유치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2. 4대~5대 안의현[편집]


4대, 5대
재임기간
(?일)

1991년 2월 ~ 1995년 12월

첫 번째 KBO 내부직원 출신. 임선동 선수 계약 문제로 시끄러운 상황에서 건강상의 이유로 자진사퇴 하였다.


3. 6대 박종환[편집]


6대
파일:external/www.kumdo.org/100719.jpg
재임기간
(?일)

1996년 1월 ~ 1998년 3월

경남고등학교와 기업은행 야구단, 육군 야구단에서 야구선수로 활동했던 인물. 1955년 황금사자기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2년간 구단 경영 수업을 듣기도 했으며, 1982년한국으로 돌아와 롯데 자이언츠 전무가 되었다. 구단의 실세로 군림하면서 선수 기용까지 영향을 끼쳤다.[3]

1987 시즌최동원의 연봉협상에서 동결이 확정된 상황에서 기자들 앞에서 5~10% 인하 요인이 있지만, 동결시켜줄 계획이라고 답해 논란을 일으켰다.[4] 그리고 최동원의 부친인 최윤식이 반발해 연봉을 90만 원 인상해서 9000만 원을 요구하자 기자들과에 술자리에서 "병신 육갑"이라 비아냥거렸고[5] 끝까지 물고 늘어지다가 팬들의 항의와 주위의 중재로 인해 겨우 끝을 냈다. 하지만 1년 후 선수협사태를 구실로 최동원을 트레이드했다. 결국 최동원이 삼성에 입단하고 나서 3일 뒤 팀 성적 부진과 관중 소요에 책임지고 전무직에서 사퇴할 수밖에 없었다.[6]

KBO 사무총장 시절 외국인 선수 제도를 도입한 사무총장으로 유명하며, 1997년 부정배트 파동으로 일부 구단주와의 마찰이 발단이 되어 사임했다.사퇴와 관련된 내용은 여기를 참조.

4. 7대 최영언[편집]


7대
파일:external/www.hani.co.kr/18-1.jpg
재임기간
(443일)

1998년 10월 8일 ~ 1999년 12월 24일

MBC 보도본부 스포츠국장 출신이다. 낙하산식 KBO총재 인사를 거부하고 민선총재 시대를 개막(박용오 KBO 총재)했으나, KBO와 선수협 갈등으로 사임한다.

1997년 외환 위기를 맞이해 KBO 구단들의 압력으로 사무국 직원 6명 퇴출, 직원들 임금을 2년 연속 15% 삭감하는 구조조정을 하기도 했으며, 쌍방울 레이더스의 매각은 물론이고 KBO 운영 전반에 각 구단들의 압박에 아무것도 할수 없다는 불만을 수차례 토로하기도 했다.


5. 8대~10대 이상국[편집]


8대, 9대, 10대
파일:200907311937111101_1.jpg
재임기간
(2656일)

1999년 12월 28일 ~ 2006년 4월 5일

인터뷰

특이하게 육상선수 출신이다.[7] 고교시절 한국육상선수권대회 단거리 부분 3연패를 기록하기도 했다. 이후 1975년 해태제과에 입사한 후 1982년 해태 타이거즈 홍보과장으로 발탁되었다. 1991년에는 39세의 나이로 최연소 야구단장을 맡기도 했다. 1996년에 선동열의 일본 진출 당시 일본 최고 명문인 요미우리 자이언츠 행을 거의 성사시켰으나 박건배 해태 회장이 선동열을 주니치 드래곤즈로 보내라고 일방적으로 통보한 뒤 문책 해임되었다.

이후 1998년 정대철 KBO 총재의 특보자격으로 KBO에 입사, 1999년 12월 28일부터 사무총장으로 재임하게 되었다. 그의 재임기간 타이틀스폰서 유치, 중계권 협상 시작, SK 와이번스 창단과 현대-기아 자동차의 해태 타이거즈 인수 주도, KBOP 설립 등의 업적이 있다.

하지만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 펜스에 광고를 설치해준다는 대가로 광고업체로부터 8900만원을 받은 배임수재 혐의와 해당 광고업체가 당시 배기선 국회 문화관광위원장에게 3000만원의 정치자금을 제공한 혐의로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벌금 500만원을 내기도 했다.'비리 경력'이 훈장인가? 희망 없는 프로야구 선수협회와의 갈등, 금품 수수 문제 등이 불거지기도 했다. #

2006년에 퇴임 후, 2009년에 유영구 KBO 총재의 특보자격으로 KBO에 재입사 했으며, 이때 사무총장으로 재선임될 뻔했으나 선수협과 야구계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이후 2011년 유영구 총재가 물러나자 3개월 후인 2011년 8월 21일 KBO 총재 특별보좌역을 사퇴했다.


6. 11대 하일성[편집]


11대
파일:external/www.ksilbo.co.kr/P200605090115021M.jpg
재임기간
(1059일)

2006년 5월 8일 ~ 2009년 3월 31일

야구해설가 출신. 역대 사무총장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이며, 아직도 KBO 사무총장은 하일성인줄 아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2016년 9월 8일부터는 그럴 일이 없을 듯 하다. 자세한 내용은 하일성 문서의 4문단 참조.

재직 당시 고척 스카이돔의 문제의 씨앗을 방관하고 1차 지명제도 폐지[8]로 인해 프로구단의 아마야구 지원을 요원하게 만들어 프로야구 발전을 후퇴시킨 부분에 대해서 비판하는 목소리가 있다.[9] 2009 WBC의 상금을 횡령한 사건도 하일성 사무총장 재임기간에 벌어진 일이다. 일설에는 네오플현대 유니콘스 인수 제안을 했지만 무슨 구단인지 모르고 씹었다는 이야기가 돌았었는데 그만큼 사무총장 시절 하일성은 평이 좋지 못했으나,[10] 고양 원더스 해체 후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현실(정확히는 이전부터 작게나마 알려지기는 했지만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떠오른)이 알려지고 허민에 대한 비판 여론이 강해지며 오히려 선견지명이었다는 평가가 높아졌다.[11]

사무총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모교인 성동고등학교 야구부 재창단을 위해 동분서주했으나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7. 12대 이상일[편집]


12대
파일:external/img.hani.co.kr/1246958130_6000269417_20090708.jpg
재임기간
(987일)

2009년 4월 1일 ~ 2011년 12월 13일

안의현 사무총장에 이어 두 번째 KBO 직원 출신(1983년 기록원으로 입사, 운영부장, 홍보부장 등)이다. 사무총장에서 물러난 후 총재특보로 자리를 옮겼다. 선수협 파문 당시 백분토론에 출연하여 무식한 발언으로 사회자에게 한소리 먹었던 그 사람이다.


8. 13대~14대 양해영[편집]


13대, 14대
파일:external/img.yonhapnews.co.kr/PYH2013092403470001300_P2.jpg
재임기간
(2210일)

2011년 12월 14일 ~ 2017년 12월 31일

1988년 KBO 총무부에 입사해[12] 홍보부장, 총무부장, KBOP 이사 등을 거쳤다. 2011년 1월 사무차장에 올랐고, 동년 12월에 사무총장이 되었다.

한국야구위원회의 주요 수입을 담당하는 자회사 KBOP의 회장직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는 평가와 함께 구본능 총재를 잘 보좌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15년부터 기존에 구단 사장단들만 모여서 진행했던 KBO 윈터미팅을 리그발전을 위한 의견수렴 및 마케팅 전문가의 강연 등으로 개선했다.기사

'28년 외길' 양해영 KBO 총장 "내 사주에 야구가 있다"<1>, '붉은 대추' 양해영 총장 "암 수술 두 번, 야구로 극복"<2>, 양해영 KBO총장 "2020년 1000만 관중 돌파"<3>. 양해영 사무총장 "야구가 왜 좋으냐건 그냥 웃지요"


9. 15대 장윤호[편집]


15대
파일:장윤호.jpg
재임기간
(375일)

2018년 1월 30일 ~ 2019년 2월 8일

1987년 한국일보에 입사해 2004년 일간스포츠 야구부장, 2005년 일간스포츠 편집국장을 지냈고 2010년 대한야구협회 홍보이사직을 역임했고 2011년부터는 스타뉴스 대표직을 맡았다.

2018년 1월 30일 KBO 전문 마케팅 시대를 열 최적임자로서 사무총장에 선임되었다. KBO 전문 마케팅 시대 열었다…장윤호 사무총장 선임, KBOP 분리 장윤호 사무총장 체제가 들어서면서 사무총장이 자회사 KBOP 사장을 겸직하던 체제에서 사무차장이 KBOP 사장을 겸임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사무총장에 임명되자 정 총재를 잘 보좌하겠다는 소감을 밝혔으며 언론에는 국내 기자 중 MLB 전문가 기자, 언론사 대표로 소개되었다. 언론인으로서는 최영언에 이어 두 번째 사무총장이다.

KBO의 개혁과 투명성을 외치며 취임했지만 정작 김영란 법 시행 당시 '장윤호의 체인지업'을 통해 '김영란 법'에 걸릴 MLB 기자실 밥값 관행[13]이라는 "내 돈 내고 물 마시고 밥 먹는 것에 불만이다"식의 기사도 다시 언급 및 재발굴 되면서 "결국은 사무총장 자리도 서로 돌려먹기에다가 깨끗함과 정직을 내세운 총재가 끝내 사무총장 자리에 김영란 법에 대해 징징거린 기자를 앉혀놨다" 라며 벌써 비난을 받고 있다.

사무총장직은 실무 총책임자다 보니 언론에 자주 언급되기에 웬만한 야구팬들이라면 사무총장 이름은 한 번씩 들어봤을 법 하지만, 장윤호가 사무총장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적은편이다. 역대 사무총장 중 임기도 가장 짧았거니와 일을 추진하기에 앞서 사고 수습하느라 바쁘기도 했다. 히어로즈 미신고 현금 트레이드, 아시안게임 후 선동열 감독의 거취 문제, 이태양 문우람 폭로성 기자회견 등이 그의 사무총장 재임기간 동안 있었던 일이다.

해당 건들은 딱히 장윤호 사무총장의 공과로 돌리기 어려운 부분이었지만 사후처리가 개운치 않았다는 평들이 많았다. 특히 히어로즈 뒷돈 거래는 솜방망이 처벌이 아니었냐는 비판이 많았다. 사무총장으로서의 긍정적인 평가는 없었지만 그나마 사무총장보다는 총재가 비판의 핵심에 서 있었다. 무기력 KBO 수뇌부, 히어로즈·선동열 사태 방관

2019년 2월 8일 일신상의 이유로 사무총장직을 사임하고 KBO 총재 특별보좌역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사태를 수습하고 막상 뭔가 의욕적으로 해보려고 할 때 쯤에는 정운찬 총재와 갈등이 생겨 퇴진한 것으로 보여진다.기사 1 기사 2 기사3

기자언론인으로서의 행적은 해당 문서를 참고.

10. 16대~17대 류대환[편집]


16대, 17대
파일:KBO16대사무총장류대환.jpg
재임기간
(1863일)

2019년 2월 8일 ~ 현직


1990년 KBO에 입사해 1998년 운영팀 과장, 2001년 기획팀 부장, 2002년 KBOP 이사, 2012년 홍보지원부 부장, 2013년 기획홍보부 부장, 2014년 사무차장을 지내고 2018년부터는 KBOP 대표이사를 맡았다. 2021년 1월 13일 정지택 신임 KBO 총재가 17대 사무총장으로 류대환 현 사무총장을 제청해 임기가 연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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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75년 재미교포 사업가 홍윤희 씨의 제안으로 프로야구 창설을 시도했으나 당시 높으신 분 때문에 그냥 프로야구 창설은 썰로 그쳤다. 하지만 실업야구의 발전이 필요하다는 것은 야구인들 누구나가 다 공감을 했기에 이후 전후기 리그와 시즌 왕중왕전인 코리안시리즈를 도입하게 된다.[2] 창단과정의 비화는 KBO 리그/역사 문서 참조.[3] 양상문이 롯데 입단 2년 만에 청보로 트레이드된 것도 박종환에게 찍혔기 때문이었다.[4] 최동원의 87년 성적은 14승 12패 2세이브였다. 15승을 기준으로 14승이 되면 5-10%를 깎는다는 조항이 있었던 것. 하지만 당시 전례에 따르면, 통상 2세이브는 1승으로 간주되었던 시대였다. 이럴 경우 최동원의 연봉 조항에서 승수는 15승이 되는 것이고, 연봉 동결이 확실한 상황인데 인하 요인이라고 주장해 최동원의 반발을 불러 일으킨 것.[5] 최윤식 씨는 한국전쟁 당시 다리를 잃어서 의족을 차고 다녀야 했다.[6] 최동원의 트레이드 소식이 언론에 보도되자 롯데 구단은 이를 성토하는 부산 팬들의 항의 전화가 쇄도하여 곤욕을 치러야 했다.[7] 광주 살레시오고등학교 - 성균관대학교[8] 원래 2006년, 하일성은 "오늘날의 한국프로야구가 부진한 것은 스타선수가 없어서다."라며 해외파 특별 드래프트와 함께 1차지명 제도 확대방안을 추진했다. 2007년에는 1차 지명자가 2명으로 확대 되었으며 최종적으로는 1차 지명자를 3명까지 늘릴 계획이었지만....서울특별시 입성만을 노리며 떠돌이 생활을 하다 수원시에 잠시 머물던 현대 유니콘스에게 너무 불리하다는 의견과 함께 2007시즌 중반 터진 현대 유니콘즈 매각과정에서 "기업에 팔려고 하니 이런 불리한 제도가 걸림돌이다." 이야기가 나와 결국 폐지해버리고 지역연고라는 단어대신 도시연고를 해야한다는 주장을 했다.[9] 이런 우려에 대해 KBO는 아무 문제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지만 실제로는 그냥 손을 놔 버렸다.[10] 참고로 이때 네오플의 CEO가 바로 고양 원더스를 창단했었던 허민이었다.[11] 거절했다 하더라도 소위 '급'이 안 돼서 거절했을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kt와의 논의도 진척 중이었고, 이 당시까지만 해도 재벌들의 놀이터라는 크보판에 네오플 정도의 기업이 들어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봤어야 한다. 이장석이 현대를 인수할 수 있었던 것은 kt의 인수가 최종결렬되면서 의사를 타진해볼 기업이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가능했고 그나마도 얼마나 많은 비토가 있었는지 생각해보면 이해할 만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조기에 현대 사태를 처리 하지 못한 점은 실드의 여지가 없지만.[12] KBO 총재를 지낸 김기춘 前 법무장관을 따라 1996년초에 KBO를 떠났고 1996~1998년에 국회의원이 된 김기춘의 보좌관으로 활동하다가 1998년에 돌아왔다.[13] 선진야구인 미국 MLB에서는 기자들을 가족 또는 동업자로 보며 물은 물론이며 뷔페식 같은 식사를 제공해주는데 우리나라는 이걸 돈을 내고 먹고 마셔야 청렴하고 깨끗한 사람으로 본다.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