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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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할
3. 역사
3.1. 폐단
3.2. 서원 정리
4. 유네스코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5. 서원 목록
6. 유사기구
6.1. 한국
6.1.1. 국립
6.1.2. 사립
6.2. 외국
7. 대중 매체에서



1. 개요[편집]


서원()은 조선시대유교의 성현(聖賢)에 대한 제사를 지내고 학자를 키우기 위해 전국 곳곳에 설립한 사설 교육 기관이다. 성현(聖賢)에 대한 제사를 지내는 건물인 사우(祠宇)와 청소년을 교육하는 서재(書齋)로 크게 나뉘어 있다. 오늘날의 지방사립대학교라고 볼 수 있다.

서원의 교육은 원장(院長), 강장(講長), 훈장(訓長) 등 원임(院任)들을 통해 이뤄졌다. 원장은 서원의 대표자로 보통 퇴직 관료나 당대의 유명한 석학이 맡았다. 원장은 서원 기강 확립과 원생들의 행실 규찰을 담당했지만 서원 운영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강장은 서원에 입학한 원생들에게 경학과 예절을 가르치는 원임이었으며 훈장은 면학과 교관의 일종인 훈도를 책임지는 원임이었다.

서원운영은 서원의 모든 일을 주관하며 재장(齋長)이라고도 불린 도유사(都有司) 또는 장의(掌議)[1]가 맡았다. 이밖에도 도유사 다음가는 직책인 부유사(副有司), 여러 사무를 분담해서 맡은 유사(有司), 간사 역할을 하는 직월(直月), 서기 역할을 하는 직일(直日)등이 있었다.

2. 역할[편집]


성균관이나 향교는 번잡한 도시에 있어서 앞으로는 번거로운 학칙에 얽매이고 뒤로는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기 쉬우니, 어찌 서원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

퇴계 이황

서원은 성균관, 향교와 함께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교육 기관으로, 국립으로 전국 각 도시에 분배된 향교와 대비되는 사립학교로서 지역 문화를 대표하는 장소였다. 그래서 서원은 교육 기능과 교화 기능을 그 양축으로 삼고 있었다. 조선 중기 사대 사화를 비롯한 정치적 혼란으로 말미암아 학자들은 지방에 은거하면서 후학을 양성하게 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선배 유학자들을 기리고 제사하는 사당의 기능까지 통합한 서원을 창설하기 시작한 것이다.

먼저 교육 기능에 대해서 살펴보면, 서원에서 교육의 목표는 인품이 훌륭한 성현을 본받고 그러한 관리를 양성하는 데 있었다. 이를 위해 학생들은 다른 교육 기관과 마찬가지로 소학에서부터 시작하여 사서오경을 중심으로 공부에 전념했다. 그리고 사서와 오경을 모두 익힌 다음에는 가례, 근사록과 같은 성리학에 관한 책들을 익히도록 했다.

정치적 혼란으로 중앙 정계에서 물러난 학자들에 의해 대부분의 서원이 설립되었던 까닭에 ‘성현을 본받는다’는 교육 목표는 초기의 서원 교육에서 특히 중요시되었다. 그들에게 있어 학문의 진정한 의미는 인생과 우주의 본질을 추구하고 자신을 도덕적으로 완성시키는 것이었다. 그 뒤 서원에서 공부한 선비들이 정계로 진출하기 시작하면서 과거 준비를 위한 교육도 동시에 강조되었던 것이다.

서원의 또 한 가지 기능인 교화 기능은 주로 선현에 대한 제사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 제사의 대상인물에 있어서는 성균관이나 향교와는 차이가 있었다. 성균관과 향교의 문묘(文廟)에 배향된 인물은 공자를 비롯해 안회, 증자, 자사, 맹자의 사성과 그 밖의 십철, 그리고 우리나라 18현 및 송대의 6현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서원은 사학이라는 특성상 대부분 문중에 의해 건립되었던 까닭에 자신의 문중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인물 가운데 뛰어난 인물을 배향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때문에 배향 인물의 선택 폭이 국정인 성균관과 향교에 비해 훨씬 넓었다.

한편 국립 교육 기관과 마찬가지로 서원에서도 봄과 가을에 걸쳐 일 년에 두 차례의 제사를 지냈다. 제사일은 성균관과 향교에서 봉행하는 석전(釋奠)에 비하여 그 격이 낮았던 관계로 그 날짜를 석전보다 뒤로 하였다. 즉, 석전이 상정일(上丁日)에 봉행되는 데 비하여 서원의 제사는 중정일(中丁日) 또는 하정일(下丁日)로 잡아 거행함으로써 그 격을 구분하였다.

이외에도 서원은 다양한 기능을 담당했다. 지방의 인재들이 모이는 집회소였으며, 학생들의 학문을 위해 다양한 도서를 보관하는 도서관의 기능과 책의 출판 기능도 담당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서원에는 장판각 또는 장판고라는 서고가 있는 것이다. 이외에도 서원은 지방의 풍속을 순화하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하는 곳이었다. 서원에서는 그 지역의 여론을 이끌어 나갔음은 물론, 각 지방별 향약을 기준으로 효자나 열녀 등을 표창하고 윤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 사람을 성토하는 등의 직접적인 교화 활동도 하였다.


3. 역사[편집]


서원의 기원에 대해서 중국에서는 이미 당나라 시기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실질적인 형태는 송나라 때에 와서 완성되었으며, 특히 서원의 위상은 주자에 의해 강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 서원이 처음 설립된 것은 1542년이었다. 당시 풍기군수였던 주세붕은 안향을 추모하기 위해 그가 학문을 하던 곳에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을 설립하였다. 안향은 중국의 주자학이라는 학문을 우리나라에 도입한 최초의 학자였다. 주세붕이 세운 최초의 서원은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라 칭했지만, 후에 풍기 군수로 부임한 이황이 서원에 대한 국가적인 지원을 건의하였고 이에 명종이 서적 등의 물자와 함께 친필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 사액하여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황을 비롯한 성리학자들에 의해 서원의 보급운동이 일어나면서 전국에 서원이 건립되었다. 그리하여 명종대에 건립된 수가 17개소에 불과했던 서원이 선조대에는 100개가 넘었으며, 18세기 중반에는 전국에 700여개소에 이르렀다.

서원은 지금으로 치자면 사립대학 정도의 위치다. 유명한 서원들은 명문 사립대 정도라고 보면 된다. 서원의 부작용도 잘 보면 현재의 사학재단 비리와 비슷한 것들도 많았다. 각 지방에서 사족들이 현재로 치면 학연 지연의 기반이 되는 곳이기도 했다. 물론 처음엔 향교의 과거 입시 교육에 대한 대안학교 성격으로 출발하였지만 후기에 들어와서는 좀 문제점이 많았다. 재밌는 것은 각 서원에 가보면 자식의 입학 기념으로 건물 세워줬다는 것도 가끔 눈에 띈다. 유명한 서원들은 들어가기가 까다로웠는지 가문의 영광이라는 문구도 보이고 부정입학의 증후가 보이는 글귀도 있다.

16세기 후반 사림파가 향리에 은거하면서 향촌 사회에 대한 사림의 기반을 확대하기 위한 측면도 있었다.

서원이 설립되던 초기에는 위에서 언급한 순기능이 컸다. 본래 국가에서 설립한 교육기관인 향교가 있었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서원이 난립하자 관리가 제대로 안 돼서 황폐화가 심했고 제 기능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3.1. 폐단[편집]


17세기 이후 서원이 남설되면서 부작용이 커졌다. 서원에 딸린 토지에는 세금이 부과되지 않았고, 서원의 노비는 국역(國役)을 지지 않았다. 따라서 서원이 증가함에 따라 국가 재정에 문제가 생겼다. 엄청난 숫자의 서원들 때문에 민생에 끼치는 폐단이 엄청났고 심지어 산 사람을 모시거나 성현도 아니지만 자신의 조상이라는 이유로 모시느라 집안마다 서원을 만들고 한 사람을 모시는 서원이 5~6곳에 이르는 등 말이 아니었다.

19세기부터 세도 가문들이 정권을 잡으면서 서원의 정치적 영향력은 사실상 없어졌지만 그래도 지방에선 터줏대감으로 큰소리를 칠 수 있었고 무엇보다 경제적인 폐단이 말이 아니었다. 이들은 선현의 제사를 지낸다는 명목으로 지방 농민들을 사사로이 수탈하였으며 이에 반발하는 지역민들을 향약이나 반상의 도리를 어겼다 하여 처벌하거나 지역 사회에서 매장시키는 전횡을 저지르고 나라에서 막대한 식량과 노비를 제공 받으면서 세금을 내지 않는 면세 특권이 있어 국가 재정을 악화시켰다.

이런 서원의 폐단은 선조 때로 거슬러 올라가도 나올 정도다. 서원이 등장한 게 중종 시기, 사림이 본격적으로 주도권을 잡는 게 선조 시대인데 그때부터 말썽이었으니...

결국 경제적인 문제를 비롯한 다양한 문제점이 발생하면서 조선이 뿌리 뽑으려 했던 고려 말 사찰의 폐단을 답습하는 꼴이 되었다.

특히 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병을 보낸 만력제를 제사 지내기 위한 만동묘송시열을 모신 화양동서원은 워낙 힘이 세서 지역의 백성들에게 서원의 제사 비용을 부담[2]시켰으며 할당된 비용을 내지 못한 백성들을 함부로 붙잡아서 폭행하거나 고문하는 등 그 폐해가 심했다. 당시 이 일대에 "원님 위에 감사, 감사 위에 참판, 참판 위에 판서, 판서 위에 삼상(삼정승), 삼상 위에 승지, 승지 위에 임금, 임금 위에 만동묘지기"라는 노래가 퍼졌을 정도였으니 말 다한 셈이다. 또한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대원군 역시 집권 전에 만동묘에서 수모를 당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3.2. 서원 정리[편집]


서원의 폐단에 맨 처음 손을 댄 것은 숙종이었다. 숙종은 한 사람을 중복되게 모시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그렇게 잘 지켜지지 않았고, 그의 아들 영조대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인 서원 정리가 이뤄진다. 1727년(영조 3년) 12월에는 한 사람 당 하나의 서원만 허가하면서 비교적 나중에 세워졌던 서원들을 정리했으며 1747년 4월(영조 23년)에도 허가없이 사적으로 세운 서원들을 정리했다.

고종대에서는 흥선대원군의 등장으로 서원 정리의 속도가 빨라지는데 당장 1864년 7월(고종 1년)에는 사사로이 세워진 서원과 중첩되는 서원들을 일부 정리하였다.

그리고 1865년 3월에는 만동묘에 있던 신위와 현판을 황단(皇壇)[3]으로 옮기고 제사를 중단시키는데 이에 경악한 좨주 송래희(宋來熙)와 전국의 유생들이 반대소를 올리자 흥선대원군은 편액을 합쳐 일원화했으면 됐지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씹었다. 사실 유학자들도 서원이 대거 정리될 것이라는 분위기를 읽긴 읽었는지 이미 고종 1년에 대원군의 직계 조상인 인평대군을 모시는 서원을 세웠으나, 이 역시 철폐당했다. 그 후 고종 5년에 서원의 원장을 고을 수령이 맡게 하고 허용된 정원 이외의 병역 기피자들을 모조리 군역에 넣는가 하면 면세 혜택을 없애 서원의 특혜를 모두 없애고 관의 통제 하에 둔 다음에 곧 이어 사액서원 47개소만 남기고 대거 철폐했다. 숙종, 영조 대에 줄곧 지적된 중첩된 서원은 사액서원이라 하더라도 예외없이 모두 철거되었다.

야사에는 유생들의 반대가 극렬했다고 하는데 실록을 보면 매우 조용했다. 흥선대원군은 "오늘날 성현의 이름을 팔아서 사람들을 못살게 하는 도적들의 소굴이 된지 오래됐으니 어찌 놔둘 수 있겠는가?" 하면서 서원 철폐를 단행했고, 고종은 당시의 영의정인 김병학에게 이렇게 말했다.

1. 서원이 온통 백성을 괴롭히니 이것이 무슨 행각인가?

2. 집집마다 서원을 만들고 한 사람을 대여섯 곳에서 모시는 이유는 무엇이냐?

3. 제현을 존중한다면서 자기 가문 조상을 모시는 게 서원이더냐? 산 사람을 모시는 사당은 또 무엇이냐?


이 말에 전혀 반박할 수가 없었다. 특히 서원을 완전히 없애버린다는 것도 아니라서 성현을 모욕한다는 말도 궁색했고 서원의 폐단은 안동 김씨들조차도 동의할 수준으로 심각했다. 결국 흥선대원군 집권기에는 가시적인 서원 반대소들이 없었다. 특히 불도저 같은 성격이었던 흥선대원군의 성격상 소를 올린다고 방침을 바꿀 생각도 없었고, 오히려 "나 죽이거나 유배보내줍쇼" 라고 말하는것과 다름이 없었기에 서원철폐를 막아달라는 유생들의 불만이 상소로 올라오기는 힘들었다.

결국, 상소는 대원군이 쫓겨난 후에야 쏟아졌는데 고종은 이 중에서 만동묘 복구만 받아들였고 그나마도 관아의 통제 하에 두었다. 끝없는 상소를 받아든 고종은 "너희들은 서원이 없으면 성현을 모실 수 없단 말이더냐?" 라며 비꼬았다. 사실 서원 복구 주장들만 해도 서원의 폐단이 분명하고 산 사람을 모시고 한 사람을 5~6곳에서 모시는 병크가 너무 분명하여 1000여 개를 다 복구하잔 소리를 하는 인간은 없었고 송시열을 모시던 화양서원을 비롯해서 상징적인 곳에 대한 복구 요구가 대다수였다. 이후 고종8년에 고종은 "정 책을 읽고 싶다면 향교 가서 읽어라. 향교는 왜 있느냐?" 면서 확인사살(?)을 가했다.

1870년 9월에는 사액서원이라 할지라도 현재 문제가 있다면 철폐하라는 명이 내려졌다.


3.3. 서원 철폐[편집]



"진실로 백성에게 해가 되는 것이 있으면 비록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고 해도 나는 용서하지 않겠다."

- 흥선대원군, 유림 세력들이 극도로 반대하던 서원 철폐 정책을 강행하고 절대로 굽히지 않겠다는 발언이다.


1871년 3월 9일에는 한 사람 당 하나의 서원이라는 원칙을 바탕으로 남겨놓을 만한 서원들만 조사해 보고하게 하였고 마침내 3월 20일에는 사액서원 47개만 남기고 전국의 모든 서원을 철폐했다. 이 당시 난립해 있던 서원은 1,000여 곳이 넘었으며[4] 안동 한 곳에만 40여 개의 서원이 있었다고 한다.

이후 서원은 일제강점기 때 지역 유림들이 복원하기도 했으나 동시에 일제가 강제로 철폐한 것도 있었고, 결정적으로 한국전쟁 때 상당수가 파괴되었다. 이 때문에 남은 서원은 남한에 36곳, 북한에 11곳이 전부이다. 한국전쟁 이후 지역 유림들이 일부 복원한 서원들이 있긴 하나 소수에 불과하다.

서원 철폐가 붕당의 온상이라서 없앴단 말이 있는데 이건 고종이 서원을 철폐하면서 형식적으로 서원에서 붕당질을 한다는 말이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이미 순조대 세도가문 독재가 시작되고 마지막으로 정치적 의리를 지니고 있던 당파인 노론 벽파남인이 완전히 실각하면서 붕당은 형해화된 상태였다.

재미있게도, 이는 조선 초기부터 시작된 숭유억불 정책과 일부 비슷하다. 고려 말기 불교의 폐단이 조선 말기 서원의 폐단으로 그대로 답습했고, 이를 척결하고자 하는 의지 또한 반복된 것.

4. 유네스코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편집]







파일:유네스코 세계유산 로고.svg 유네스코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Seowon,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
Seowon, académies néo-confucéennes coréennes

국가·위치

[[대한민국|
등재유형
문화유산
지정번호
1498
등재연도
2019년
등재기준
(iii)[5], (iv)[6]

2019년 7월 6일, 등재가 확정되었다. # 2016년 한국 정부가 세계유산 등재 신청을 자진 철회한 뒤 3년 만의 재도전 끝에 결실을 보게 됐다. 앞서 2019년 5월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가 거의 확실시된 바 있다.# 문화재청은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심사하는 세계유산위원회(WHC) 자문기구 이코모스(ICOMOS·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가 ‘한국의 서원’ 등재를 권고했다고 14일 밝혔다.[7]

이코모스의 등재 권고를 받은 유산은 이변이 없는 한 세계유산으로 등재된다. 2015년과 2016년 예비심사에서는 '한국의 서원'이 반려 판정[8]을 받은 바 있다. 한국의 서원은 앞서 살펴본 것처럼 지역 문화의 거점이자 지역 성현들을 배향하는 곳이라는 점에서 과거시험 준비기관에 그치는 중국의 서원과 다르고, 이 점이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10]


5. 서원 목록[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서원/목록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 유사기구[편집]



6.1. 한국[편집]



6.1.1. 국립[편집]




6.1.2. 사립[편집]




6.2. 외국[편집]




7. 대중 매체에서[편집]


문명 4문명 6에서 한국 문명의 고유 건물/지구로 등장했다. 문명 4에서는 대학을 대체하는 건물로, 대학보다 더 많은 과학 보너스를 제공한다. 지도자인 옹건의 재정적 보너스와 조합되면 최상급 과학력을 보장한다. 문명 6에서는 캠퍼스를 대체하는 특수지구로, 언덕에만 건설할 수 있으며 다른 지구와 인접하면 인접 보너스를 더 받는 게 아니라 깎이는 대신 기본적으로 높은 보너스를 받는다. 더군다나 한국의 문명 특성이 서원과 관련되어 있어, 한국을 플레이할 때 핵심으로 자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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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균관에도 장의가 있었지만 서원과 달리 유생 대표였다. 오늘날로 치면 학생회장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성균관이 국가 기관이었던만큼, 성균관의 장의가 주도해서 동맹 휴학이라도 일으키면 조정에서도 난리가 날 정도로 국가중대사가 벌어진 것으로 여겼다. 사실상, 오늘날의 명문대 학생회장들의 사회적 영향력이 큰 것과 같은 셈이었다.[2] 이것을 화양묵패(華陽墨牌)라고 한다. 아무 것도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백성들에게 제사 지낼 돈을 내라는 청구서. 심지어 워낙 위세가 강력해서 수령들도 어쩌지 못했다.[3] '대보단(大報壇)'이라고도 한다. 만력제를 모신다는 점은 만동묘와 같으나, 관에서 세웠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4] 향교가 부·목·군·현마다 하나씩 있었으니까(300여 개) 그 3배나 되었다는 소리이다.[5]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6]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7] 이코모스는 각국이 등재 신청한 유산을 조사한 뒤 등재 권고, 보류, 반려, 등재 불가 네 가지 권고안 중 하나를 선택해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와 당사국에 전달한다.[8] '한국의 서원'은 "문화유산의 연계성과 대표성'에 대한 보완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9개 서원을 묶어서 등재한 이유가 잘 설명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문화재청은 '한국의 서원'의 세계유산 등재를 재도전한다고 밝혔다.#[9] 그렇게 따지면 중국 내 불교와 사찰은 모두 인도 꺼냐는 댓글이 일품.[10] 등재 당시 중국의 민간상업지 환구시보는 서원이 중국 고대의 독특한 문화교육기구였다는 주장을 운운하며 되도 않는 불만을 표출했다. #[9] 앞서 2005년, 강릉 단오제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될 때도 중국 언론에서 단오를 뺏어간다느니 하며 한국을 비난한 바 있다. 하지만 중국은 이보다 앞서 연변의 조선족 농무를 세계무형유산에 등재시켰고, 마찬가지로 집안의 고구려 유적군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시켰다. 물론 한국과 북한의 공조 덕분에 중국 대륙에 위치한 고구려 유적은 중국 왕조의 문화재로 등록되어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