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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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한국인(Korean)은 인종적으로 동아시아인에 속하고 한반도에 거주하는 민족이다.
2. 설명[편집]
한국인의 범위는 대한민국이나 북한의 국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 넓게는 한국에 귀화한 외국계 한국인 및 한반도 거주민 혈통에서 비롯된 한국계 이주민(재외동포)까지 부르는 말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한반도를 중심으로 거주하는 사람들 중에서 한국어를 주로 사용하는 민족을 가리킨다. 여기에 귀화한 외국인과 그들의 후손들도 국적법에 의하여 한국 국적을 가진 한국인에 포함된다. 한민족과는 미묘하게 의미 차이는 있지만 한국인도 한민족(韓民族)의 범위에 포함된다. 이러한 경우에는 주로 한인(韓人)이라고 표현한다.
대한민국의 실효 지배 영역으로 한정했을 때 그 영역의 인구수는 약 5,200만 명이며, 한반도 전체로 범위를 넓힐 때 도합 7,600만 명이다. 여기에 민족으로서의 한국계 외국인들을 모조리 포함하면 8,300만 명까지 늘어난다.
전후 베이비붐이 일었던 1950년대 중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빠른 인구 증가를 경험했으나 그 이후로 증가세가 떨어졌고, 19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되어[2] 2000년대부터 주목받고 지금까지 가속화되고 있는 저출산에 의해 2020년 이후 대한민국은 자연감소에 들어섰으며[3] , 제3세계 국가들의 인구 증가로 세계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작아지고 있다.
3. 기원[편집]
한국인은 혈통상으로 중앙아시아와 북아시아 사이에 있는 알타이 산맥 일대에서 기원했으며, '알타이-퉁구스(Altaian-Tungusic)'계이다.[4]
즉, 유전적 관점에서 한국인은 원래부터 한반도에 거주하던 민족이 아니라는 것이다. 원시 기원지는 따로 있고 그 기원지에 살던 인류 집단이 한반도로 대이동을 한 뒤 정착한 것일 뿐이다. 알타이-퉁구스계인 만큼 알타이족, 퉁구스족과 깊은 유전적 관계에 있으며, 이들이 한국인의 조상이다.
실제로 이를 뒷받침하듯 언어학적으로 한국어족이 퉁구스어족, 몽골어족 등과 같은 알타이 제어와 높은 상관관계에 있다. 일단 알타이 제어는 어족으로 인정되지 않고 한국어의 조상이라 보기도 힘들지만, 이것은 조상언어, 즉 '조어'의 관점에서나 그렇지 언어학적 유연관계에 있어선 매우 높은 상관관계를 나타내고 있어서 다른 알타이 제어 계열 언어들과 언어동조대를 이룬다. 대표적으로 어순이 있다. 이러한 혈통, 유전적 관계, 어족과의 상관성 등을 밝히는 방법이 바로 하플로그룹을 이용한 것이다.
한일 양국의 정치적/감정적인 이유로 정식 학설로는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있지만 학계에서는 사실상 인정받고 있는 반도 일본어설 역시 한국인이 한반도의 원주민이 아니라 북쪽에서 내려온 이주민이라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본 학설에 따르면 한반도 중부-남부에는 일본어와 근연관계에 있는 원시 한반도어(반도 일본어)가 존재했는데, 요동, 만주부터 한반도 북부에 걸쳐 거주하던 고대 한국인이 점차 남하하며 원시 한반도어 화자들을 정복, 동화시켰고, 이때 피지배층의 언어가 된 원시 한반도어가 사멸하기 전에 기층언어로서 고대 한국어[5] 에 흔적을 남겼다.[6]
그외에도 한국인의 평균 신장이 역사적으로 항상 중원의 한족이나 일본인보다 컸다는 점, 삼국시대 한복의 기본 형태가 고대 퉁구스계 유목민들의 호복과 유사하다는 점[7] , 유전자 역시 만주족과 가깝다는 점 등을 볼 때 한국인이 적어도 한반도보다는 훨씬 척박한 북부 어느 지방에서 남하해 왔다는 사실은 확실해 보인다.
하지만 똑같이 척박한 곳에서 살았음에도 적어도 5세기 이후에 유럽 전체로 퍼져서 게르만 이전의 문화체가 보다 우월해 역으로 게르만 이주민들을 동화시켜버렸던 유럽의 경우와는 달리[8] 한국인은 그보다 훨씬 이전, 아무리 늦어도 고조선이 있었던 시절에 이미 고대 한반도인들의 독자적 정치체는 멸망하고 고대 한국인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9] 원주민인 반도 일본인들의 문화 역시 고대 한국인에 비해 그다지 우월할 게 없었던 탓인지 정복자들에게 큰 저항 없이 동화되었다. 정확한 인구 추정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기층언어로서의 반도 일본어는 남길 수 있었던 것으로 보아 소수의 지배층이 다수의 인민을 다스렸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지만, 이마저도 고조선 멸망으로 한반도 남부에 대규모의 한국인 이주가 이루어지면서 숨통만 겨우 붙어 있던 원시 한반도 문화는 결정타를 맞았다. 그리고 이후 원삼국시대가 시작되었을 때는 반도 일본인이 이미 몇 개의 기초 어휘와 문법만을 남기고 대부분 사라져 한(韓)인이 한반도의 주인이 된 후였다.
3.1. 유전적 특성[편집]
과거에는 한국인과 몽골인의 외모가 비슷하다고 생각해 유전적으로도 가깝다고 생각하거나 심한 경우 몽골인이 한국인 조상이라고 우기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일본 국립유전학연구소와 도쿄대가 공동으로 만든 동아시아 민족 계통수 표와 한국 울산과학기술원(UNIST)과 영국 케임브리지대, 아일랜드 더블린대, 러시아 국립과학원 인류학연구소, 독일 포츠담대 국제공동연구진이 악마문 고대인의 미토콘드리아 DNA 게놈을 분석한 위 표를 보면 한국인은 일본인과 유전적으로 가장 가깝고 그 다음으로 만주족과 매우 가깝다.
몽골족이나 퉁구스족이나 모두 공통적으로 북방 민족인 건 맞으나, 퉁구스족은 고시베리아 민족이라 인류가 아프리카에서 갓 빠져나왔을 때 북유라시아에 도달한 민족이다. 즉, 몽골족은 몽골 고원에서 동호계 민족과 북방 한족의 혼혈로 기원한 반면, 한국인의 유전적 조상격인 퉁구스족은 시베리아의 알타이 산맥 등지에서 기원한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듯 북극 지역에 사는 사모예드족이 몽골인보다 한국인과 유전적으로 더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오히려 몽골인은 내몽고와 동호계 민족 영향으로 북부 중국인과 유전적으로 유사하고 한국인과는 조금 먼 편이다.
두 번째 표에서 오른쪽 막대의 색깔은 종족별 거주 지역을 표시한 것이며 막대에 찍힌 점의 위치가 비슷할수록 가까운 종족이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즉 현대 한국인은 만주족(여진족)과 가장 가까우며 그리고 일본인과도 그에 못지않게 유전적으로 가깝다고 보면 된다.
또한 한국인의 기원을 설명할 때 흔히 북방계와 남방계로 나누어 지역별로 어느 지역에는 북방계가 많고 어느 지역은 남방계가 많다는 식으로 말할 때가 많은데, 어디까지나 유전적 이동 경로를 알기 쉽게 설명하기 위해 그렇게 말하는 것이지, 북방계나 남방계라는 것이 명확한 실체가 있는 집단이 아니다. 북방계라고 하니 몽골인과 시베리아 원주민이, 남방계라고 하니 동남아시아인이 떠올라서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특정 지역을 두고 북방계와 남방계로 구분하는 것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다.
한국인의 조상이 되는 집단이 어디에서 어떤 경로를 거쳐 한반도에 정착했는지는 더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야 알 수 있다. 비교적 최근에 한반도에서 건너간 일본의 도래인과는 달리 한반도에 정착한 집단은 선사 시대로 한참 거슬러 올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인과 동남아시아인은 똑같이 아시아인(Asian)으로 묶이긴 하지만 유전적 거리로만 따지면 아예 다른 인종으로 분류될 수도 있을 만큼 멀다.[11] 북방계와 남방계라는 단어는 일본에서 넘어온 것으로 추정되는데 일본의 남방계는 조몬인(혹은 아이누)을 지칭하는 말이고 북방계는 한반도에서 넘어온 도래인들을 일컫는 말이다. 한국의 남방계는 남중국인이나 동남아인, 북방계는 북중국인, 북방민족이나 몽골을 지칭하는 말로 변형되었다.
다만 최근 들어 천인계획에 포섭된 세력이 있어서인진 몰라도, 한국인을 남방 민족 출신으로 편입 시키는 세력이 있어 논란이 되고 있으니, 이를 더 비판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여담이지만, 일본인 유전자 관련 영어 위키에도 일본인과 한국인은 유전적으로 유사하지만 한국인은 베트남과 유전적으로 유사하기 때문에 이들이 중국 양쯔강 출신이라는 편향적인 서술이 되어있어 수정이 필요해 보인다. #
또한, 한국인 영어 위키에 #만주족이 아닌 북부 한족과 유전적으로 가깝다고 표현 되어 있다. 하지만 한국인은 일본인과 유전적으로 가깝지만 한족이랑은 거리가 멀다는 연구결과도 있기에 이에 관한 내용 서술도 필요해 보인다.
[12]
유전적 거리로 인종을 분류한다면 흑인(니그로이드), 백인(코카소이드), 동아시아인, 이누이트, 아메리카 원주민, 동남아시아인, 태평양 섬 원주민, 오세아니아 원주민 등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 중 한국인은 동아시아인에 속한다.# 해당 유전 거리 지도를 보면 한국인은 만주족과 가장 가까우며, 그 다음으로 일본인과 가깝다. 또한 동아시아인과 가장 가까운 인종은 백인(코카소이드)과 이누이트이고, 동남아시아인은 아메리카 원주민보다도 유전적으로 먼 인종임을 알 수 있다.
2023년 병무청 신체검사 기준[13] 남성 174.3cm, 2019년 문화체육관광부 국민체력측정통계에 따르면 남성 174.4~175.1cm, # 여성 162.7cm~163.3cm #이다. 2020~23년 동안 사이즈 코리아에서 조사된 자료에 따르면, 남성은 20~24세 174.6cm, 25~29세 174.1cm, 30~34세 174.6cm, 35세~39세 175.1cm이며, 여성은 20~24세 161.1cm, 25~29세161.4cm, 30~34세 161.8, 35~39세 162cm이다.# 특히, 2021년 조사에서는 20~29세 평균 키는 남성 175.3cm 여성 162.4, 30~39세 평균 키는 남성 175.8cm 여성 162.7로 측정됐다.[14]
이는 동아시아 국가들 중 최장신에 속하며, 백인 국가들 중 상대적으로 키가 작은 편인 서아시아, 남유럽 국가들의 평균 신장과 비슷하거나 좀 더 작은 수준이다.[15] 이탈리아의 경우 2018년에 조사한 데이터에 따르면 18~21세 기준으로 북부 이탈리아 남성의 평균키가 179.4cm로 나오고 남부 이탈리아 남성의 평균키가 177.4cm로 나왔다. 스페인의 경우 2008년에 조사한 근거치에 따르면 18~23세 남성 평균티가 177.3cm로 나왔고 2013년 자료에 의하면 18~34세 남성 평균키가 175.5cm로 나왔다.[16] 임페리얼 대학교에서 발표한 1985년부터 2019년까지 나라별 평균키 추세를 추정 데이터를 보면 19세 남성 평균 신장에서 이탈리아(174.4cm), 포르투갈(174.4cm), 불가리아(174.2cm) 등이 한국(175.5cm)보다 평균 신장이 작으며 튀르키예(176.4cm), 이스라엘(176.0cm), 이란(175.6cm), 중국(175.7cm), 조지아(176cm), 스페인(176.1cm)이 한국보다 컸다.# 참고로 조사대상인 201개국 중 한국의 순위가 남녀통합으로 봤을땐 61위이고 남자만 따로 나누면 69위로 나온다. 다만 이 조사는 베이즈 정리를 활용하여 추정한 값인데, 한국에 존재하는 기존의 평균 키 자료는 징병제 국가 특성상 신뢰도가 상당히 높지만, 일반적으로 이 조사는 기존의 통계 자료들의 신뢰성 문제로 충분히 오차가 생길 수 있다. 대표적으로, 중국의 경우 평균 신장이 175.7cm로 추정되었는데, 중국의 기존 평균 신장 통계 자료는 출처가 불분명한 게 많아서 신뢰도가 높다고 할 수 없다. 중국 내에서도 중국인의 평균 신장이 169.7cm 로 조사된 자료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출처가 불분명함을 문제로 지적한다.#[17]
한반도는 남한 지역보다 북한 지역이 전통적으로 평균 신장이 더 컸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만약 통일이 돼 북한 지역의 영양 상태가 개선된다면 평균 신장이 더 클 것으로 예상된다. 주의할 것은 북한에서도 한국 정부의 평안북도, 함경도에 해당하는 지역이 키가 크지 평양 일대인 평안남도나 황해도, 북한 강원도에는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지역의 인구는 북한 인구의 절반으로 보이지만 일제강점기에도 이미 중부, 남부 지방과 키가 비슷했다.
서울대학교의 연구[18] 에 의하면 한국인은 일본인과 중국인에 가까운 민족으로 중국인, 일본인과의 Fst값이 각각 0.01155, 0.11127로써 가까운 수치를 보였고 전 대륙을 대상으로 구성된 24개 SNP를 이용하였을 경우에는 한국인은 중국인과 가까운 Fst값을 보여 주었으나 O그룹의 세부 하플로그룹들을 이용하여 분석한 결과는 중국인보다 일본인과 가까운 Fst값-0.01757(중국인0.07269)을 보여 주었다.
Y 염색체 (부계유전) 하플로그룹은 O1b2와 O-M176,O-M134[19] 가 많으며, C2-M217[20] 가 약 11%, N-M231이 4%[21] , D-M174 그룹은 2%[22] 정도.
mt-dna (모계유전) 하플로 그룹은 D4가 32%로 가장 많고 B 그룹이 12%로 그 다음으로 많다. A 그룹은[23] 7%이며 그 외에는 G, N9, Y, F같이 다양한 그룹이 나타나나 그 수는 적다.
한국인의 마늘 섭취량이 압도적으로 많다보니 한식을 자주 먹으면 마늘 냄새가 날 수도 있지만, 그건 마늘 섭취량을 줄이면 해결되는 문제다. 애초에 세계에서 가장 체취가 나지 않는 특성을 가진 민족에게 냄새가 난다고 놀리는 것은 자폭이나 다름없다. 정작 놀리는 본인들은 데오드란트와 향수를 엄청나게 사용해서 그 정도인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마늘 냄새가 나지도 않는데 난다고 거짓말 할 때가 매우 많다.
대부분의 한국인은 유당 분해 능력이 부족하다고 한다. 허나 최근엔 어린 시절부터 유제품류의 섭취하는 인구가 매우 많기 때문에 유당불내증을 호소하는 사람이 갈수록 줄고 있다고 한다. 다른 연구 결과에서는 유당불내증의 빈도가 동아시아 주변국보다는 적다는 자료도 있다.##
참고로, DNA를 통해 민족 특이적인 정보가 어떻게 섞여 있는지 분석해 개인의 계보를 알려주는 기관인 YouWho에 의하면, 한국인은 여러 민족의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다고 한다. 평균적으로 한국인은 '한국인: 49.6%, 일본인: 25.1%, 중국인: 20.7%, 동남아시아인: 2.6%, 몽골인: 1.8%, 시베리아인 0.2%'으로 구성되어 있다. 참고 기사 2.6%인 동남아시아인을 제외하면 전부 동북아시아인 계통 민족의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다.[24]
4. 정신 문화[편집]
4.1. 단일민족 의식[편집]
4.1.1. 실재론[편집]
자세한 내용은 한민족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몇몇 사람들은 외세의 침략을 많이 받아온 역사적 사실에 기초하여 한국인은 단일민족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다. 사실 이러한 인식은 약탈(looting)도 침략(invade)으로 모조리 합산하여 한민족은 역사적으로 1000번이나 침략 당했다는 80년대 모 교수의 주장 때문인데, 그의 주장과 달리 한민족은 유별나게 많은 침략을 당한 민족이 아닐 뿐더러, 무려 200만 명 이상의 독일 여성들이 강간당한 연합군에 의한 독일 점령 기간의 강간을 보더라도 여성들은 침략 또는 전쟁으로 임신을 하면 낙태를 하거나, 태어난 혼혈아를 사회적 또는 가족들의 압박에 의해 죽이거나 버려버리기에 단순히 외세의 침략과 전쟁으로는 물에 물감을 탄듯 타민족과 혈통이 섞이지는 않는다. 특히나 한국은 역사적으로 여성들이 정절을 잃으면 자살을 택하는 경우가 흔했기에 외세의 침략이 잦았다는 이유만으로 한국이 단일민족이 아니라는 주장은 몹시 단편적인 주장이다. 혼혈화는 주로 오랜 기간에 걸친 민족간의 자연스러운 민간교류를 통해 이루어지는데, 이 경우에도 혼혈아의 유전적 다양성은 몇 세대 후에 유전적으로 동질화되어 한민족과 유사한 유전적 구성을 가지게 되고, 결국 기존의 균질한 한민족 유전자풀에 동화된다.
또한 한국인의 기원을 설명할 때 흔히 북방계와 남방계로 이분법처럼 나누어 말할 때가 많은데, 어디까지나 알기 쉽게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용어지, 명확한 실체가 있는 학술적인 집단이 아니다. 특히 특정 지역을 두고 북방계와 남방계로 구분하고, 북방계와 남방계의 외모적 특징들을 구분하는 내용이 인터넷에 많이 떠돌아다니는데, 이는 유사과학이다. 한국인의 조상이 되는 집단이 어디에서 어떤 경로를 거쳐 한반도에 정착했는지는 아직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야 알 수 있다. 또한 북방계니, 남방계니 하면서 외모의 특징을 말하는 것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 이야기이다. 북방이라고 하니 몽골, 남방이라고 하니 동남아시아가 떠올라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한국인과 동남아시아인은 유전적 거리가 아예 다른 인종으로 분류될 수 있을 만큼 매우 멀다.[25]
다른 민족의 예를 들어보자면 유대인들은 사는 지역에 따라서 외부와의 혼혈이 많이 진행되었음에도, 유대교라는 정체성으로 묶였다. 심지어 이들은 서로 인종마저 다른 경우가 있지만[26] 유대인이라는 문화, 언어, 역사, 종교의 동질성으로 묶였다.
한국인의 하플로그룹을 조사한 결과, 한국인은 지역별 유전적 차이가 매우 적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한민족의 주변 민족, 한민족의 조상이 되는 국가들을 연구하면서 한민족의 혈통이 고대부터 지금까지 큰 차이가 없을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고려 이후의 혈통 유입을 생각하더라도 그 혈통이 한국인의 현재 혈통에 큰 흔적을 나타내지 않고 있으며, 그들이 한국에서 정체성을 근래까지 유지하지도 못했다고 본다.[27]
다만 이것은 혈통성을 따지냐 문화성을 따지냐의 문제라서 해석에 따라 다르게 볼 여지는 충분하다. 이와 별개로 일제강점기 이후 한국인 남성과 결혼해 한국에 정착한 일본인 여성들도 많았다. 부용회와 같은 재한 일본인 여성 모임회가 아직까지 존재하며 가장 많았을 때가 4,000~5,000명 정도의 규모였다고 한다. 대부분이 광복쯤에 결혼하신 분들이라 연령대가 90대 이상인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2020년 기준 생존하신 분들은 적은편이다. 다만 이것도 혈통성을 따지냐 문화성을 따지냐의 문제라서 이 역시 해석에 따라 다르게 볼 여지는 충분하다.
한편 여진족은 청의 건국과정에서 동화되지 않았던 집단인 번호가 결국 청에 합류함으로써 소멸하였다고 주장한다. 요동으로부터 도피해온 무리도 있었으나 요동의 거주민은 상당수가 16세기 초까지 종족적으로 조선인과 동일하다는 기록이 남아있다.[28]
단일민족을 긍정하는 또 하나의 주요 근거는 언어와 문화다. 언어는 민족의 형성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언어적 동질성이 낮아도 중세 이후에 중앙집권화를 통해 단일성에 성공한 프랑스처럼 연합의 형성이 가능했다. 그러면 한국은 어떠한가? 여기서도 한국은 제주도를 제외하면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었다는 증거가 발견되지 않는다. 심지어 중국에 간 신라 사신이 중국어 통역이 없었는데 때마침 와있던 백제 사신이 통역을 빌려줬다는 기록과 고대어 연구를 통해 고대 삼국시대부터 서로 동일한 언어계열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제주어의 경우가 예외긴 하지만 본토인 한반도와 비교했을 때, 국력과 인구를 비롯한 총체적인 격차가 워낙 심했기에 민족성을 형성하는데 있어서 걸림돌이 되지는 않았다.(제주어도 근본적인 뿌리는 한국어와 동류인 형제 언어이다. 한국어족 문서 참고) 중국은 정치적인 이유로 인해 '중국어'라는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여있지만 각 지역끼리의 언어 차이가 심해서 이미 언어학적으론 '관화, 민어, 월어, 객가어, 오어 같이 뿌리는 같지만 다른 언어들로 갈라졌다'고 정의내려진지 오래고 심지어 각 지역 언어들의 화자 인구수도 수천만 명에 달할 정도로 상당한 규모인지라 여전히 언어를 통한 통합된 민족성 형성에 있어서 애를 먹고 있다.
문화적으로는 물론 지역성은 나타났으나 그것이 대표적 단일민족국가인 독일이나 일본의 지역차와 비교해도 적은 정도였으며 민족의식의 측면에서도 고려인, 조선인이라는 공통된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여러 면에서 살펴 봤을 때, 민족의 기본적인 정의인 집단 동질성 및 집단 정체성 측면에서 매우 높은 수준의 동질화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언어, 문화, 역사의 동질성으로 묶여 있는 공동체를 민족으로 본다면 한민족은 실재한다고 볼 수 있다.
참고로 대한민국 헌법에서는 민족을 언급하며, 민족문화의 창달을 위해 노력하여야 한다고 적혀 있다. 이는 대통령 선서에도 나와있는 문구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9조: 국가는 전통문화의 계승·발전과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야 한다.)
4.1.2. 해체론[편집]
단일민족 해체론의 가장 큰 근거로는 '혈통적으로 한민족은 단일민족이 아니다'라는 점이 흔히 제시된다.
근현대 이후 활발한 교류로 한국에 들어오게 된 외국인들도 있다. 이것은 혈통적인 의미 뿐만 아니라 문화적인 의미에서도 그러하며 기존의 '내재적 발전에 의한 일직선적인 성장 과정'으로 평가받던 것들이 타자와의 교류에 의한 것은 아닌가 하는 탐구도 활발하다.
더군다나 역사적 동질성이 현실에 존재하는지 의문이다. 당장 민족주의적 시각에서는 역사적으로 고려, 조선이라는 왕조 속에서 동질성을 유지했다고 말하지만, 각 지역, 신분 등 여러 이해관계에 따라 당대인이 자신의 시대와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이 판이하게 달랐다. 예를 들어 동학농민운동 때 집강소는 전라도, 경상도 등 지역마다 운영방식, 주도 신분, 방향 등이 달랐다.
문화적으로 공통점을 가진다는 것도 의문이다. 개개인마다 향유하는 문화는 서로 다르며, 같은 문화를 공유한다고 할지라도 평가, 판단 등 개인마다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서 한국인은 맵게 먹는다고 하자. 과연 한국인이 그렇게 먹는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맵게 먹지 않는 사람은 한국인이라고 부를 수 없을까? 이건 개인의 성향마다 다른 문제인데, 이를 향유하는 문화적인 '경향성'이 있다고 해서 동질성이 있다고 단정할 수 없다.
애초에 동질성으로 민족을 설정하는 것 자체에 문제가 있다. 가령 A라는 사람은 매운 것을 좋아하며 한국 역사를 잘 알고 한국 노래를 좋아하며 한국에 거주하지만 유럽에서 태어나 한국 시민권이 없고, B라는 사람은 어릴 때부터 미국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매운 것을 먹지 못하며 한국의 역사를 잘 알지 못하고 한국 노래를 듣지도 않고 한국에 거주하고 있지 않지만 한국 시민권을 가지고 있을 때 과연 누가 한국인인가? 단일민족의 동질성을 설명하는 혈통적, 역사적, 문화적 동질성이 있는 공동체라는 기준은 지금에 와서 아무 쓸모가 없다. 그 기준대로라면 A도 B도 한국인이 아니게 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동질성을 단순히 '비슷한 정치, 사회, 문화적인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라고 정의해도 문제이다. 왜냐하면 이것 자체가 단일민족을 부정하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일민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단일성을 주장하는 성격이 강한데, 비슷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건 결국 다원성을 인정하는 꼴이 된다. 게다가 이런 식의 설명이라면 세계의 어떤 국가도 단일민족이 아닌 국가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며, 다민족 국가와 구분할 기준 자체가 모호하게 된다. 따라서 어떤 기준을 가지고 구분을 해도 결국 단일민족은 실재한다고 볼 수 없다.
5. 특징[편집]
귀화인들과 정반대로 국적은 외국으로 등록되어 있지만 한국인의 후손 혹은 혼혈인 사람들도 한국인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경우가 있으나, 이들에게는 '해외동포', '한인 X세', '한국계' 라는 표현이 더 자주 사용된다.
일단 국적법상으로 한국은 이중국적을 인정하지 않으므로 이들은 법적으로 한국인이 아니지만, 태어날때부터 한국과 속지주의 미국 등 국가의 국적을 동시에 취득한 선천적 복수국적자는 복수국적(이중국적)이 예외적으로 허용된다.
즉, 한국국적만 있다가 외국국적을 취득하면 이중국적을 불허하지만, 출생과 동시에 복수국적이 있는 경우에는 합법인 것이다
1997년 12월 13일 국적법 개정[30] 이전에는 부계혈통주의[31] 로 어머니가 한국인이어도 아버지가 외국인이면 한국에서 오래 사는데도 외국 국적으로 수용되었다.
그래서 국적법 개정 이전에는 외국어 한 마디도 못하는 외국 국적 한국인이 많았다.
북한의 주민들을 해외에 나가서는 같은 한국인이라고 소개하는 경우도 있으나 분단 상황이 장기화 되어감에 따라 이 경우에도 국내에서는 '북한 사람' 또는 '북한인'으로 구분을 하기도 한다.
CNN에서 소개한 한국인이 잘하는 10가지.
2020년 2월에 발표된 2019년 기준의 최신 국가 이미지 조사 내용#에 따르면, 미국, 멕시코, 브라질, 영국, 프랑스, 독일, 남아프리카 공화국, 러시아, 인도, 중국, 일본, 태국, 인도네시아, 호주 16개국 만 16세~65세의 성인 남녀 8천명을 대상의 조사 결과, 외국인이 느끼는 한국에 대한 전반적 이미지는 5점 만점에 4.01점으로 매우 긍정적인 수준이었다.
한국인에 대한 호감도 평가에서도 긍정이 71.3%, 보통이 22.3%, 부정이 6.3%로 전반적으로 긍정적이었다.[32]
5.1. 공동체, 집단주의 문화[편집]
인류는 공동체주의 문화와 개인주의 문화를 다양한 방식으로 갖고 있었다. 개인의 의지를 존중하는 개인주의조차 서양에서는 마태복음에서 "온 천하보다 한 영혼이 중요하다"라는 언급이 있을 정도로 오래된 사상이다. 그러나 심지어 서양에서도 스웨덴게이트라는 말이 인터넷에서 유행할 정도로 극도로 개인주의적이라고 알려진 스웨덴조차 공익이 결부되는 사회적 제도에 대해서는 집단주의적 성향이 한국 이상으로 강한 부분이 있다. 흔히 집단주의적 문화를 가졌다고 알려진 동양에서도 기독교가 유행하기 이전 전국시대에조차 노자의 제자인 양주가 '내 터럭 하나를 뽑아 천하에 이익이 되더라도 하지 않겠다'라고 언급했을 정도로 개인주의 또한 동양에서도 무척 오래된 사상이다. 고려시대까지 한반도에서 번성한 불교에서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라는 구절이 있듯 개인의 독립성을 강조한 사상이 있기도 했다. 동시에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두레, 품앗이의 원형 같은 공동체주의적인 문화도 삼국시대에도 있기도 했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사회적 폐단을 막기 위해 이전에 유행한 불교를 대체하여 충과 효를 강조하는 유교가 유행하였다. 양주와 같은 학자의 사상은 정도전 등에 의해 매우 이기적인 사상으로 취급되어 이 사상이 한국을 지배하게 되었다. 서구에서 어느 정도 이에 반하는 가치관이 들어오기는 했으나, 현재도 한국에서는 이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고 이런 정신이 근면성과 교육열을 이끌어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경제 성장을 이끄는 식으로 무작정 부작용만 있지는 않았다. 한국에서도 외부의 사상을 조금씩 받아들이려고 하여 기성세대와 그 이후의 세대는 갈등이 있으나, 사실 젊은 세대조차 일본·중국 정도만 해도 다른 문화를 보면 크게 놀라는 경우가 많다.
대한민국의 국토는 반도라는 특성과 그 지정학적 위치의 영향으로[33] 대륙이나 해양세력의 침입을 막장동네인 캅카스나 중동, 발칸 반도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자주 겪었고, 이에 대항하기 위해 국가 혹은 민족 단위의 단합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고려 중기까지 국가 단위로 외세에 맞섰으나 몽골 제국과의 전쟁 때부터 지배층은 정권을 지키기 위해 백성을 버리고 피신하는 일이 많아지자, 백성들은 지배층에 불신과 냉소를 지니며 '나와 내 가족을 지킬 건 스스로에게 달려 있다'고 자각하여 죽창과 낫 같은 날붙이를 들고 거대한 침략 세력에 맞서 싸웠다.
또 조선시대 이후부터 지도층인 사대부가 유교 문화를 국가 통치의 기치로 내세우면서 유교적 가치관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근현대사를 거치면서 일본식 군대문화, 근대 민족주의(Nationalism)의 확산 등이 더해진 결과 한국인들 사이에는 공동체 정신문화가 강하게 퍼져 있다. 이 같은 공동체 문화는 단결을 통해 단체의 역량을 끌어올리는 데 적합하므로 비교적 짧은 시간인 70여 년 사이에 비약적인 경제 성장을 이뤄낸 한국 사회에서 상당히 강조됐다. 그러나 이는 사회생활에서 혈연, 지연 등이 더 강하게 작용하는 연고주의나 조금만 엇나가면 제노포비아가 되어버릴 수도 있는 자민족중심주의, 외국과의 지나친 비교로 인한 필요없는 열등감 혹은 비뚤어진 애국심과 같은 국수주의의 단편 등과 같은 부작용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지나친 공동체주의적인 성향은 농경사회의 특징과도 일맥상통한다. 조선시대 시절 두레와 품앗이 문화는 물론이요, 남아선호사상[34] , 제사문화, 혈연과 지연이 중시되는 풍조 모두 농경사회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 내내 한반도의 농가인구비율은 꾸준히 80%내외를 유지하였으나 해방 이후 이촌향도 현상이 심화되자 1960년 56.9%, 1970년 44.7%, 1980년 28.4%로 대폭 감소하였는데, 이는 지금까지의 한국을 이끌어온 기성세대는 유소년기를 농촌사회에서 보내고 청년기 이후에 도시로 나간 사람들이라는 얘기가 된다. 어린시절 확립된 그러한 사고방식과 행동양상이 당연히 직장문화, 인간관계 등에도 나타났고 그것이 전체적인 사회분위기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사람들끼리 공유 부분이 더욱 클수록 관계가 돈독해져 서로의 영역을 오고가도 개의치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공유 부분이 너무 부담스러워 이를 거부하면 어떤 방식으로든 불이익까지 감수해야 한다.
공동체주의 뿐 아니라 집단주의 성향도 어느정도 가지고 있다. 집단주의는 개인을 집단에 맞춰나가는 주의이다. 공동체주의와 집단주의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공동체주의처럼 집단주의가 가져온 부작용도 존재한다. 개인의 주관을 제대로 피력하지 못하고, 개개인의 개성이 상실하는 등의 부작용을 가져왔다.
그러나 한국인의 세대가 교체되고, 핵가족화가 가속화되고 자유주의, 개인주의와 같은 현대적인[35][36] 가치관이 정착되면서 조금씩 변하기 시작하고 있다.
2020년대에 들어 10대와 20대, 30대에 속하는 젊은 세대들에게는 이전의 기성세대에 비해서 집단주의나 공동체주의 문화가 조금 희석된 모습을 볼 수 있다. 문제나 힘든 일이 닥치면 개인이 혼자 해결하거나 헤쳐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아진 게 예전에 비해서는 약간 보이는 편. 덕분에 공동체주의 문화에 익숙한 노인들이나 중장년층들은 간혹 나타나는 이런 현상에 한탄을 하기도 한다. 물론 어디까지나 시대적인 배경에서 상대적인 측면에 그칠 뿐인 거고, 젊은세대들 또한 기성세대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않기 때문에 집단주의 사고방식은 뿌리가 깊어 없어지지는 않았다. 특히 가족문화의 경우 이런 성향이 짙어 아예 이를 부자유친 성정이라고 부르는 학자가 존재할 정도로 부모와 자식을 하나로 보는 경향이 강하기에 아버지의 깊은 영향을 받은 손흥민 같은 사례에서 보듯 젊은 세대도 일본이나 서구의 나라에 비하면 가족 관계에서 친밀함과 사랑 이상의 관계를 잘 넘어서지 않는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옅다. #
그러나 특유의 공동체 의식은 국가에 대한 주인의식과 결합하면 때때로 국가적 사건에 대처하는 데 있어서 엄청난 결집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쥐잡기 운동, 종이절약 운동, 새마을 운동, 스포츠 응원 문화[37] , 금모으기 운동, 태안 기름 유출 사고 당시 자발적인 방제작업 참여, 평화적인 촛불시위[38] 로 표출되는, 단기간 단합된 단결력에 있어 상상을 초월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2020년 코로나19의 범세계적 확산사태 당시,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반응문서에서 볼수 있듯 외신들은 한국인들이 합심하여 보여준 사회적 거리두기 실천등의 시민의식과, 선별진료소 등에서 행해진 드라이브 스루 검사 등 새로운 검사방식의 개발과 그 폭넓은 시행이 빠르게 이루어진 점을 두고 한국의 공동체주의 문화와 빨리빨리 문화가 긍정적으로 나타난 예라고 호평하기도 하였다.
오지랖 문화도 꽤 강하다. 또한 유행에 민감하며 한번 유행을 타면 엄청난 유행을 타는 민족으로도 유명하다. 이는 더플코트(1990년대), 노스페이스 패딩과 샤기컷(2000년대), 롱패딩 및 남성 투블럭 컷(2010년대)도 마찬가지.
한국의 공교육에서는 사고체계의 다양성과 상대성, 간주관적 틀의 다양한 존재 가능성에 대한 이해를 요구하기 보단 단지 1 더하기 1은 2와 같은 정해져있는 답을 이야기하는 것만을 주로 원한다고 보는 시선이 있다. 이 원인을 위에 나온 집단주의에서 찾는 사람들도 있는데, 마치 공장에서 어느 물건을 대량생산할 때 조금이라도 모양이나 기타 여러 조건이 좀 다르게 나오면 그걸 불량품으로 간주하고 폐기시키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교육 문서 참조.
한국사회의 공동체적 장점은 보존해야 하겠지만 집단성만 강하면 안된다는 것을 자각해야 할 것이다. 공동체주의와 집단주의는 엄연히 다르다. 몰려서 걱정만 해주는 이들보다는 실질적으로 공익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해주는 것이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도 모두에게 이득이다.
이러한 집단성은 본인의 나이로도 나타날 수 있다. 한국은 만 나이가 아닌 세는나이로 따져 전 세계적으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현상이다. 이는 대학교 학번도 마찬가지다. 상대편이 나와 동갑이면 뭔가 동질감이 크게 느껴지고 같이 친구하기가 매우 쉽다. 당장 연예계에서도 XX(년도, 예를 들면 76, 아니면 91)라인이 존재한다. 상대편이 나와 나이가 다르면 동갑인 사람에 비해 살짝 이질감이 느껴진 것도 없지않아 있다. 상대가 나보다 연상이면 "형, 누나" 혹은 "언니, 오빠" 라고 한다. 서구권은 물론이고 한국 이상으로 집단적인 중동권이나 심지어 같은 동아시아 이웃 국가인 중국, 일본에서조차 혈연이 아닌 연상의 상대에게 형, 누나라는 호칭을 쓰는 경우는 없다.
이로 인해 싸움이 별로 없을 것 같지만 그로 인한 부작용 역시 만만치 않은데 그것이 바로 집단간의 갈등이다. 공동체가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속성을 지녀 타 집단에 적대적이거나 무관심한 탓에 소속 정당은 물론이고, 밥그릇 싸움, 지역갈등, 세대 갈등 등등 수도 없이 많다. 심한 경우 집단 이기주의로 번지기도 하는데 대표적으로 장애인 시설 확충 움직임 속에서도 '자기 마을에는 안된다'는 식의 지역이기주의가 대표적인 예이다. 기업 운영에서조차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일환으로 자기 가족이라는 집단만 챙기는, 기업의 이익을 자기 가족의 것만으로 여기는 '오너' 집안의 전횡이 문제로 꼽히는 경우도 있다.
또한 결혼을 하는 시기도 타 국가들에 비해 매우 늦는 편이다. 1950년대 무렵까지는 20대도 되지 않은 시기에 결혼을 하는 케이스가 많았지만, 고령화 사회와 독신에 대한 비중이 높아진 동시에 결정적으로는 집값과 결혼 비용이 굉장히 막대해져서 직장에서도 수입을 쌓기 버거운 마당에 빠른 시기에 결혼을 하는 것이 매우 어려워졌다. 덕분에 30대 중후반에 들어서야 결혼을 하는 것이 정석이 되었고 미혼이나 무자식인 40대 이상의 사람들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게 되었다.
남자같은 경우에도 군문제는 20대 초반 나이에 빠르게 해결하는 반면 빠른 결혼은 대부분 꺼리는 편이다. 그렇지만 한국 정도의 혼인율은 1000명당으로 따지면 현재도 OECD 국가 중 중간 수준이다. # 이런 점에서 한국인들은 결혼, 출산에 있어서 대체로 서구와 비교하면 남유럽과 유사하게 '보수적'인 가치관이 있다고 평가 받는다.
가정을 중시하는 가치관 때문에 아이를 물질적으로 헌신적으로 키우는 습관이 있다보니, 일단 자신이 기반을 잡으려고 해도 집단주의에 의해 대부분 같은 행동을 하기에 남들이 더 물질적으로 앞서게 되기 때문에 필요한 집이나 결혼에 드는 비용이 경쟁적으로 높아지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특히 잘 대해줄 가치가 있는 직업은 '사회적으로' 정해져 있다는 사고 방식에 의해 직업간 차별 대우가 심하다는 점이 과도한 부담의 사교육을 부추기기도 하고, 경제 활력을 낮추기에 이를 타파하려는 노력이 계속 이어지는 중이다.
차별 대우가 왜 심하다는 말이 있냐면, 해외에는 프랑스 그랑제꼴이니 영국 옥스퍼드 등에 다니는 사람도 '우월한'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이고, 이들이 군림하면 격하게 반발하는[39] 식으로 개인주의가 강해 낮은 학력이나 한국에서 '낮게' 여겨지는 직업들도 자신의 선택으로 여겨지는 풍조가 있기 때문이다. 높은 성적은 재능의 일부로 여겨지고, 사회성이나 독창성이나 손재주 등도 중요한 재능으로 간주되기에 직업 차별을 정당화하던 논리가 통하지 못하는 것이다.
정치인에 대해서 풍자의 세기도 강하고, 정치인 자체부터 한국보다 직업적인 출신이 다양하다. 평교사, 기업인 출신 등이 많은 나라가 있고, 농부나 엔지니어 일을 했던 사람도 있다. '사자 직업'이라는 말처럼 직업 이름에서 그 우열이 드러나는 경우가 잘 없고, 어떤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만 가져서 서구 PC주의에서도 성별로 갈리는 문제를 건드리지 이건 잘 건드리지 않는다. 영국에서는 가장 도덕적인 계층으로 꼽히는 계급은 노동계급이 꼽히는 경우가 가장 많다. 일본도 왜 대학 안가냐며 따지지는 않는다. 한국에서 이해를 무척 어려워하는 가치관인데, 개인주의적 가치관에 입각하여 학력과 같은 기준으로 직업을 줄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저 다른 것으로 여기는 가치관을 가진 나라가 많다. 중국과 인도의 문화의 영향이 강한 나라만 한국 같은 풍조[40] 가 있는 것이다.
이런 서구에서 많은 자신의 모습에 만족하고, 자신은 어쨌든 평균 이상이라고 생각하는 풍조를 두고 한국에서는 '계층 이동을 포기했다'라고 오해하는 경우도 많다. 잘못 이해하면 "미국을 보면 흑인이나 히스패닉, 이런 애들은 정치니 뭐니 이런 높은 데 올라가려고 하지도 않는다."[41] 라는 식의 해외에서도 놀라는 엄청난 망언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예를 들면 영국의 경우 옥스퍼드를 졸업하고 투자은행이 힘들다고 자영업으로 전직하는 것도 선택이 될 수 있고, 한국에서 상류층이 영위하는 생활 방식의 권위를 다른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는 경우도 많아 그 권위가 낮다.[42] 서열 문서에 언급되어 있지만 이런 사람들에게 한국식 갑을 관계를 강요하면 상대방은 굉장히 모욕적으로 여기고, 심지어 소송까지 당하기도 한다. 특히 북유럽 국가는 이런 경향이 정말 심하여 돈을 많이 벌어서 사회적 기여를 안하면 심한 비판을 받는다. 저런 나라들은 개인주의로 인해 유교적 기준에서 벗어난 선택을 사람들을 깔보는 경향이 적고, 설령 공부를 못해도 다른 재능이 있으면 그것을 발휘하도록 어느 정도 보장을 해주려고 하기에 저게 가능하다. 정치적 올바름, 코로나19 위기에도 마스크를 안 쓰는 것, 건강을 위해 급식에 채소가 있어야 한다는 주장에 피자도 채소라고 주장하는 식의 부작용이 있지, 직업 서열 상의 문제는 적은 편이다.
국제적으로도 한국인의 결혼 시기는 다소 늦은 편인데 이에 더해서 출산도 긴 세월동안 상당히 저조해지면서 알다시피 현재 대한민국은 세계에서도 당장 손꼽히는 초저출산 국가가 되었다. 그래서 최근에 한국에서 아이를 많이 낳는다하면 대부분 다문화 가정이나 대한민국 국적을 얻은 외국인들이다. 다문화 가정에서는 한국인들이 일본인들이나 미국인 같은 서양인들이 대학을 잘 안 가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듯, 그 마찬가지로 교육열과 사회 경쟁의식 같은 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43] , 한국인들의 자녀에 대한 복합적인 가치관을 모른 채 자신이 살던 곳보다는 지원이 잘 되어있으니 많이 낳는다고 한다. #
2021년에는 다문화 가정 비중이 떨어지기는 했는데, 기사에서 보다시피 다문화 가정 측에서 '차별'이라고 여기는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 그래서 한국과 비슷한 양육 문화의 유교 문화권 출신(베트남[44] , 중국 등)이 다문화 가정 아이의 70% 정도인데, 이런 문화권 출신은 부유한 환경에서 압박을 받아 자식을 잘 가지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 필리핀 출신이 그나마 10% 정도는 되는데 정치 갈등이 심한 중국계 못지 않게 외모와 문화 차이에 적응이 어렵다고 한다. # 애시당초에 한국인 자체가 다문화 가정이 교육시키는 것을 보면 다문화 가정 문서를 들어가보듯 동북아 출신이 아니면 교과서랑 종교 서적 외에는 책이 하나도 없다는 식으로 굉장한 문화 충격을 받는 경우가 많고, 서양인과는 고부 갈등도 심하며, 이런 과정에서 외국 출신 산모가 산후조리 단계부터 '이해'를 할 수 없기 때문에 한국 전통을 지키기 힘들어 우울증까지 걸리는 경우가 있다. # 가족주의가 중국, 대만, 싱가포르 정도를 제외하면 외국 출신 입장에서 너무 엄격하여 적응이 힘들다는 것이다. 심지어 가정이 해야된다는 일의 범위가 타국보다 넓어 가정에게 부담을 짊어지게 하려는 경향이 흔해 기업이 할 일마저 가정이 하는 바람에 선진국에 비하면 유달리 심한 가계부채 문제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 한국은 그동안 스웨덴 등의 이런 나라에서 저출산 관련 제도를 수입하고는 했지만, 기업 등지의 문화적인 저항에 부딪혀 이를 실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실 한국도 남아선호사상을 통해 다산을 한 적은 있고 저출산을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하필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적으로 양육을 힘들게 하는 풍습만 남게 되고 이 방식 말고는 어떻게 아이를 낳고 기를지는 몰라서 이렇게 저출산 현상이 심화되는 경향이 있다. 다산으로 유명한 프랑스, 이스라엘 등도 어쩌다보니 대단히 현명한 방안이 고안되었다기보다는 우연히 현대 자본주의에 적응이 가능한 풍습(가정을 뛰어넘은 육아의 사회적 책임, 개인의 창의성을 존중하는 교육관과 이른 사회성 개발[45] 등)을 가졌기에 자신들이 많이 낳게 된 것이다. 특히 한국에서 정책을 많이 참조한 스웨덴의 경우 한국인의 가족관과는 불필요한 경쟁이 유발되어 1등을 우대하지 말라든지, 경제적 부담이 적도록 '내 아이'라는 것이 없다[46] 는 완전히 반대되는 가치관을 가져 한국 측에서 이해가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
2023년부터는 한국인이 줄고 외국인 및 다문화 가정이 늘어서 어떤 초등학교는 전교생 대부분이 외국인이나 다문화 학생이다. 교육당국도 이런 현상을 파악하고 몇 년 전부터 다문화 학생을 위한 한국어 학습 지원에 적극적으로 나서고는 있으나 애로사항이 많아 의사소통 문제로 수업 진행에 어려움을 겪는 곳이 늘어나는 중이라고 한다.[47] 2023년 국내 외국인체류자 비율이 4.89%를 달성하면서, 2024년부터는 아시아 최초로 OECD 기준[48] 다인종 • 다문화 국가가 될 전망이다. #
5.1.1. 재외동포의 의미[편집]
조선 후기와 일제강점기 이래 외국으로 이주한(혹은 이주당한) 동포가 제법 많다. 재중동포인 조선족, 재일동포, 고려인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 외에도 근대와 현대에 집중적으로 형성된 재미동포, 현대에 집중적으로 형성된 남아메리카 이주 동포 등이 있다. 한때는 이와 관련하여 '아이 수출국'이라는 비판을 들을 정도로 해외 입양 문제도 자주 불거졌었다.
한국인은 고유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생각이 강하다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재외동포 또한 외국으로 이주하거나 귀화하더라도 자신을 한국인이라고 여기거나 본국의 문화를 그대로 유지하려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 때문에 현지 사회에 녹아들어가지 않고 한국인들만 모이는 이들이 있어 반감을 사기도 한다. 하지만 이를 한국인만의 특징으로 볼 수는 없다. 중국인은 차이나타운이 있고 일본인도 리틀 도쿄가 있다. 누구나 낯선 환경으로 가면 가까운 사람끼리 뭉치는 법이다.
다만 이 부분은 개인차가 심한 부분인 게, 일부 교포들의 경우에는 현지인들과 동화하려는 의지를 보이기도 하며 굉장히 폐쇄적인 성향을 띠는 한국인들을 경계하기도 한다.[49] 한국의 세대 갈등과 마찬가지로 이쪽도 새로 온 이민자들하고 오래 전에 정착한 이민자들 사이의 가치관 갈등이 엄연히 존재한다. 단지 이들이 해외에 있고, 대부분 한국처럼 인간관계에 파묻혀 지낼 필요는 없어 서로 무시하고 사는 경우가 많아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특히 교포 2세, 3세와 어렸을 때부터 해외에서 교육을 받고 자란 1.5세의 경우에는 부모가 특별히 한국 문화를 가르치지 않는 이상 거의 외국인이기 때문에 한국에 대해 잘 모르는 경우가 있다. 다만 한국계 미국인 문서에서도 볼 수 있듯 대부분의 경우는 자신이란 존재의 뿌리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는 대한민국이란 국가에 대해 관심을 많이 가지는 편이긴 하다.[50] 2세, 3세는 이중국적, 1.5세는 원래부터 한국인이기 때문에[51] 법적으로 국적이탈 또는 국적포기를 하기 전까지는 한국인이다.
5.2. 인생관[편집]
5.2.1. 한국인과 종교[편집]
5.2.1.1. 주요 종교[편집]
2015년 통계에 따르면 대한민국 인구의 56.1%는 종교가 없다. 특히 한국이 속한 동북아 지역은 무종교인의 비율이 가장 높은 지역들이다.[52] 종교인 중 가장 많은 19.7%가 개신교를 믿고 15.5%가 불교, 7.9%가 가톨릭를 믿으며 그 외 소수 종교는 약 0.8%. 개신교는 세력을 유지하고 있으며 불교는 최근 20여 년 동안 계속 쇠퇴하고 있고, 가톨릭은 성장세가 약화되었다. 무종교인의 비율이 다시 종교인의 비율을 앞지른 것도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다만 무종교 통계를 낼 때마다 깊게 살펴봐야 할 게 있는데, 종교를 가졌다고 해서 종교활동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특히나 유럽의 경우에는 종교가 사회적 전통의 일부거나 한국의 유교처럼 집안내력으로 어릴 때부터 세례를 받으며 자연스레 가지는 문화적인 의미로써 종교를 가지는 것이지 실제 종교활동을 하냐 안 하냐로 물어보면 국민의 대부분은 종교활동을 전혀 하지 않는다. 독일의 경우 가톨릭+개신교 신자 비율이 55%가 넘는데 반해 실제 주기적으로 종교활동을 하는 인구는 350만명 가량 뿐이고, 한국의 경우 신자 중의 80%가량이 매주 종교 활동을 하는 데 반해 스페인, 프랑스, 덴마크, 영국에서는 신자 중의 5%만이 매주 종교 활동에 참여하며, 노르웨이의 경우에는 종교의 신자들이 평균적으로 한 해에 단 1회만 예배를 드린다는 기사를 보면 확실히 문화적으로 가지고 있는 경향이 크다는 것을 볼수 있다. 한국으로 따지면 설날, 추석에 제사나 성묘 정도만 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다만 한국에서 무교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생활방식이 진정한 의미의 비종교인에 가까운지는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앞서 설명했듯이 종교가 있다고 이야기하는 서구에서도 적극적인 종교활동을 하는 사람이 종교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 수의 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처럼 종교 유무에 대한 이해도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서구에서는 부모로부터 특정 종교의 영향을 받고 해당 종교에 의한 의식을 연 1회, 또는 그것보다 작아도 자신의 생활에서 특정하게 믿는 신이 명확하거나 또는 생활철학에 영향을 주는 종교가 있을 때 그 종교의 신자라고 답을 하지만, 한국인들은 적극적인 종교 활동을 가져야만 신자라고 대답하는 경향이 높다. 보통 유럽이나 서아시아에서 한국인에게 "종교가 무엇이냐"고 물어볼 때 무교라고 대답하면 대부분 놀라고, "한국인 50%가 종교가 없다"고 대답하면, "그런 생활이 어떻게 가능하냐?"며 충격을 받는다. 이는 과거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지 않고 종교 자체가 철학인 시절부터 극단적인 종교 탄압 등의 단절 없이 역사가 지속되었던 서구 유럽의 기독교 문화나 서아시아, 아프리카의 이슬람교 문화와 동남아시아의 이슬람, 불교 문화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반응인데, 이들의 관점에서 재구성한다면 사실 "종교가 없다"고 말한 한국인 50%의 대부분이 유교가 종교라고 말해야 옳다. 한국에서 "종교가 없다"고 말한 사람들 대부분은 명절이나, 조상의 기일에 정식으로든 약식으로든 제사를 지내며, 어려운 일이 있을때 막연히 조상이 도와줄 것[53] 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자식들에게는 친구들과 우의있게 지내며, 웃어른을 공경하고 신의를 중요시 하라는 지극히 유교적인 가르침을 주며 유교적인 생활철학을 공유하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앞서도 언급되었듯이 이제는 유교가 종교라기보다는 학문이나 관습에 가까워 종교라고 언급하기 어려운 면이 있고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 산업화 시대를 겪으며 비효율적이고 체면중시의 유교문화에 반감으로 인해 유교적인 삶의 태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유교적인 철학인지를 인식하고 있지 못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유교의 이런 특징들로 인해 타 아시아 국가에 비해 한국에 기독교 등 외래종교의 전파가 용이했던 측면도 있다. 한국인 대부분이 유교적 제사와 생활철학을 가지고 살게 된 데는 당연히 조선왕조 500년의 영향이 크며, 숭유억불 정책으로 인해 불교를 극단적으로 탄압한데도 영향이 있다. 실제 정치 철학으로 유교를 받아 들인 중국 등의 다른 동아시아 국가에서도 조선만큼 불교를 탄압한 예는 거의 없으며, 조선은 정도전이 이상적으로 생각한 이른바 유교원리주의 국가에 가까울 정도로 유학의 이상을 가장 현실화한 국가였기 때문에 불교에 대한 탄압이 유독 강했다.[54] 만일 한반도 역사에 조선왕조 500년이 없었다면, 한국인의 90% 이상이 불교 신자였을 가능성도 있다. 다만 일본의 예를 생각해보면 조선왕조가 없었다고 불교가 국교 수준이 되었을 거라는 건 지나친 해석일 수 있다.[55]
다만 통계마다 개신교와 불교의 순위와 비율이 바뀌는 등 오차가 존재한다. 2012년 경기도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종교 없음이 50.3%, 개신교는 24%, 불교는 15.6%, 천주교는 9.4%, 기타 0.7%로 위 조사와는 차이가 있다.[56] 자료 출처, 통계청.
한국에서 기독교[57] 와 불교 등 메이저 종교들은 기복신앙으로서 기능하고 있는 측면이 있다. 종교의 자유가 제대로 보장되어서인지 이상한 종교와 그로 말미암아 벌어지는 다툼이 있지만 다른 나라처럼 피를 보는 대립은 없어 대체로 종교 문제에서는 얌전한 편이다.
그런데 사실 종교 대립이 적은 까닭은 위에 언급한 국가가 명시해 놓은 종교의 자유 때문이기도 하지만, 법치주의 시스템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고, 대부분 종교에 과몰입하지 않으며 어디까지나 믿는 신의 차이일 뿐이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서아시아,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등 세계에서 종교 대립이 심한 곳을 보면 종교가 국교 수준이라 과몰입하기 좋은 환경이고, 그 중에는 국가에서 자국 헌법상 종교의 자유를 언급하고 명시하더라도 자국 국민들끼리 종교로 편을 갈라 죽이고 종교로 반군과 정부군이 갈라져 싸우거나 등의 유혈사태가 일어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치안이 한국보다 나쁘며 총기 등의 무기를 소지하는 것이 한국보다 쉽다는 면이 커서 그런 것도 있다. 오늘날 서아시아,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등지에서 기독교와 이슬람교(수니파와 시아파), 불교, 힌두교 등 여러 종교끼리 서로 대립하는 나라들을 보면, 국가가 종교의 자유를 명시하지 않아서 그런 것도 있지만 대개 무기 소지가 쉽고 한국보다 국가 공권력과 치안이 약해서 피바다가 되는 경우도 많다. 즉, 국가에서 아무리 종교의 자유를 외쳐도 종교에 과몰입하기 쉬운 환경이고, 치안이 열악하고 개인의 무기 소지가 자유롭고 일일이 제재하기 힘드며 법적 처벌이 약한 나라라면 종교 분쟁은 일어날 가능성이 더욱 커진다.
반면 한국에서 종교분쟁이 발생하지 않는 원인을 한국인에게 전통적으로 큰 영향을 준 유교와 불교의 영향으로 분석하는 주장도 있다. '유일신'을 섬기는 종교들은 자신만이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다른 종교에 대해 배타적이 되기 쉬운 면이 있고, 이에 따라 종교분쟁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에 비해 유교와 불교는 (조상이나 석가모니를 신으로 모시는 샤머니즘적인 기복신앙화 된 측면이 있지만) 원래는 신을 두고 있지 않았으며 종교라기 보다는 삶의 철학에 대한 가르침이 주는 학문적 측면이 강하기 때문에 타 종교에 대한 배타적인 성향이 강하지 않았고[58][59] , 문화적으로 해당 종교의 영향을 받은 한국인들에게 종교로 인한 분쟁은 생소했을 것이란 점이다.[60] 실제 기독교 성경에 등장하는 '이교도'라는 개념은 불교와 유교에는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며, 구약성서에서 여호수아 등이 이교도를 무차별하게 죽이는 내용이 아무렇지도 않게 실리는데 반해, 불교에서는 동물의 살생까지 금하는 등[61] 기본 종교적 철학에 차이가 있다. 이로 인해 한국인들은 타 종교를 배척하는 모습을 안 좋게 보는 성향이 있으며, 특히 일부 개신교인이 행하는 종교테러[62] 에 대하여 민감할 정도로 반감을 가지는 데는 이런 배경이 있다고 분석 할수 있다.[63]
일례로 한국에서는 국민들이 서로 종교 가지고 싸워서 크게 간다 해봐야 어지간해선 모임이나 길거리에서 붙어서 말싸움으로 끝나는 정도고, 좀 심하면 종교 가지고 몇 차례 폭행 시비[64] 이 좀 오가는 정도지만[65] , 이것을 서아시아,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남아시아 등의 제3세계 국가들에게서 일어나는 종교분쟁(사실상 거의 지역구 전쟁급)으로 일어나는 것과 비교해 보면 새발의 피 수준이다.
여기에 인터넷이 발달한 것도 한 몫 한다. 한국의 경우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인터넷 상의 폭력(악플, 온라인상 명예훼손 등)이 발달하여 사회의 폭력 방법이 과거나 다른 나라처럼 과격하게 오프라인에서 때리고 부수는 것을 온라인상의 폭력이 어느 정도 대체하는 면이 크다.[66] 한국에서의 종교 분쟁이나 정치 분쟁이 벌어지는 경우도 현피를 뜨는 경우보다 대체로 편하고 쉽게 상대방에 대한 공격, 싸움, 분노를 표출할 수 있는 일종의 배출구가 되는 인터넷 상에서 오가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걸로도 모자라서 현실에서도 서로 싸우고 심하면 살인을 하는 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제3세계 외국에 비하면 빈도수가 적다.
예컨대 정치의 경우도 보면 같은 사안이라도 4.19 혁명처럼 인터넷이 없던 과거 1950년대~1980년대라면 국가가 국민을 핍박하면 들고일어나 몽둥이 휘두르고 화염병 던지는 식으로 저항했지만 21세기인 지금은 오프라인상으로 행동한다고 해도 과거와 달리 촛불시위나 평화집회행진 등 수준으로 많이 완화되었으며 나머지 저항욕구와 비판여론과 분노표출 등의 사회에서 쌓인 불만을 (반대댓글, 반대 서명 운동 등의 방식으로) 인터넷을 활용하여 저항한다.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까닭 또한 과거와 달리 선택지가 하나 더 늘어 인터넷이라는 또 다른 분노와 저항의 표출 통로가 있기 때문에 오프라인에서 표현하던 방식이 인터넷으로 일부 이전, 분산됐기 때문이다. 또 과거와 달리 요즘엔 길거리마다 있는 CCTV, 블랙박스 등과 같은 형사처벌용 증거 수집도 더 쉬워져 과거에는 잘하면 들키지 않을 수도 있는 폭력이나 절도 등의 형사처벌이 더 쉽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만일 한국도 제3세계 국가들처럼 총기와 로켓포 등의 개인 무기 휴대가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을 정도로 보편화되거나 자율화되고 경찰과 공권력의 형사처벌이 지금보다 많이 약해져서 사람들이 처벌을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면 외국만큼은 아니어도 한국에서도 종교나 정치 등의 민감한 이슈로 유혈사태(서로 총질)가 일어날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개신교[67] 와 달리 한국의 불교와 천주교는 함께 행사를 치르거나 종교계 거물끼리 함께 사회운동을 하는 등 나름 꽤 사이가 좋은 편이다.[68] 다음과 같은 식으로 부처님오신날을 천주교가, 성탄절을 불교가 축하해 주는 사이다.
이 세상이 부처님께서 설파하신 '자비'가 넘치는 사회가 되기를 바라며 특별히 우리의 가정이 모든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운 터전이 되기를 기원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많은 이들에게 진정한 삶의 기쁨과 행복을 줄 수 있기를 희망한다. <염수정 안드레아 추기경, 2014년 부처님 오신 날 축하메시지>
이렇게 종교적으로 분리된 이유를 박정희 정권으로 꼽기도 한다. 옛날만 해도 집집마다 신주단지가 있고, 마을마다 서낭당이 있는 전통적인 기복신앙이 대표 종교였다고 한다. 이것을 미신을 없애고 근대화를 한다는 명목하에 전 국민적으로 배척을 하였고 전두환 정권 시절에 전통문화에서 기복신앙이 축제나 놀이와 연결되어 있음을 알고 다시 살리려 했지만 이미 많이 사라진 상태. 그래도 일제강점기를 버티고, 6.25 전쟁 피난길에도 신주단지를 챙겨가며, 박정희 정권을 넘어 현재는 서낭당 대신 교회에 모여 빌고 노래하고 춤추고 음식을 나눠먹는걸 보면, 여전히 전통기복신앙이 대표 종교라 분석되기도 한다.
한국은 무종교인이 더 높지만, 연예인과 정치인은 종교인이 확실히 높다.
5.2.1.2. 유교[편집]
전근대부터 현재까지 한국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던 것은 유학이다. 가장 강력한 영향이라는 말은 한국인의 종교관을 형성하는 것이 이것 하나라는 말은 아니다. 대체적으로 학계는 종교보다는 유학으로서 학문의 한 분야로 접근한다. 공자는 자신이 종교 지도자라는 생각이 전혀 없었고, 심지어 조선 당대에 유학을 종교라고 생각한 학자는 아무도 없었다. 학자라고는 누구나 생각했다. Religion의 일본의 번역어인 종교라는 개념 자체가 아주 근대적인 개념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때문에 이 항목에 쓰는 것이 부적절할 수도 있으나, 한국인에게 너무나 강력히 영향을 미쳐서 종교 문서에 쓰여있다고 생각하면서 넘어가도록 하자. 혹시나 한국인의 학문관 분야가 자세해지면 이 글은 옮겨가야 할 수도 있다.
유학은 한국인의 사상에 영향을 미쳤다. 유학은 존재를 독아적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유학은 한 존재에게는 반드시 그 존재를 앞선 존재가 있으며, 이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것은 현대에는 강박적이라고 경솔하게 취급되는 조상 중시에서 쉽게 드러난다. 예컨대 유학에서는 웃어른이 작고한 후에, 혼백이 흩어지기까지 걸리는 시간이라고 알려진 일정 기간 동안 조상의 신주를 모시는 의례가 있었다. 이 뿐만이 아니라, 시묘살이 등등이 있으며, 유학에서 예는 후대로 갈수록 정교해진 측면이 크다. 대표적으로는 예송논쟁과 사단칠정논변이 있다. 그 복잡함은 단지 종교적인 숭배가 아니라, 어떤 지적인 사랑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는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유학의 영향으로 한국인은 개체가 자기이익만을 추구하는 독아적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의견도 있다. 전통적인 심성을 간직한 사람은 인간의 무한경쟁이 결국에 만들어낸 균형이 인류사라고 믿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은 파시즘과 비슷한 오류가 있다. 유학에 대한 옹호에 반대 의견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만, 싫든 좋든 지금의 한국인의 많은 부분이 바로 이 유학이 만든 사상관 위에 세워졌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것이 유학이라는 지평을 전복하고자 하는 시도였더라도 그러하다.
현세의 부와 안녕이 중요하다고 가르치는 유교는 조선의 이념으로 있었다. 조상님 모시기 또한 현세의 복을 빌기 위함이었으나 나중엔 주객이 전도되어 조상님을 모시다가 큰일이 나는 경우도 있었다. 몸살이 났는데도 기어이 3년상을 치르다 죽어서 줄초상을 치른다거나 명당을 차지하려고 한밤에 몰래 다른 사람의 묘를 파다 걸려서 뭇매 맞거나 무리한 성묘 또는 벌초를 강행하다 아예 조상님 옆에서 영원히 잠드는 등의 사건이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조상을 모신다는 자체가 주객전도라는 사실이다. 조상을 모시는 것은 서구와는 다른 영혼관의 영향으로 생겼는데, 그들이 조상을 모시는 것은 복을 빌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은 조상들을 가족의 일원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따라서 5대조까지는 집에서 모시는데 이에 따라 집에 돌아오면 산 부모님이 아니라 5대조의 위패에 먼저 문안을 올리러 찾아가게 된다. 그리고 세대가 교체될 때마다 5대조 위패의 순서가 바뀌는데 이는 그 기간 동안 모셨으면 죽은 사람의 넋이 충분히 만족하고 땅으로 돌아갔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조상님께 인사를 드리는 것이 기복신앙과 결합하면서 조상신 숭배로 나타났으니 이는 가족을 신으로 생각한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렇기에 주객이 전도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민족전통 연구가들은 우리의 종교는 여전히 전통 기복신앙이라고 한다. 죽은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건 중국 고대 문서에도 기록되어 있고, 불교를 들여 왔더니 하라는 해탈은 안 하고 천지신명 대신 부처에게 빌고, 삼국지를 알려주니 관운장한테 빌고, 기독교를 들여오니 예수한테 빌었다.
이런 영향을 받았기 때문인지 한국인의 현대 종교 생활을 보면 대개 현세구복적 성격으로 믿는 경우가 많다. 구원을 중시하는 천주교의 추기경이 3명[69] 이나 나기도 했지만 대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특히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雖臥馬糞 此生可願 수와마분 차생가원)" 또는 "죽은 정승이 산 개만 못하다" 라는 한국 속담은 현세를 중시하는 태도를 잘 나타낸다. 단, 2번째 속담은 "아무리 존귀했던 몸이라도 한 번 죽으면 거들떠보지 않는 것이 세상 인심이다"라는 뜻도 있다. 세상 인심이 실리에 따라 움직인다는 뜻도 있다. 호프스테드 같은 학자는 한국인들에게는 해외에서 유일신 같은 단순한 전통을 중시하는 태도보다 '미래'를 위한 태도가 세계에서 가장 강한 특성이 있다고 파악했다. $
이런 속담들이 있음에도 한국이 OECD 자살률 최상위권 국가라는 점은 꽤나 아이러니하다. 하지만 이것은 기관들 혹은 정부 차원의 과한 제도로 인한 시선들 때문이지 '한국인'의 관념에서 바라보아선 안 되며, 실제로 한국의 높은 자살률은 OECD 평균의 3배에 육박하는 독보적인 노인층의 자살률 때문이며 다른 연령층의 자살률은 OECD 평균보다 조금 높은 수준이다. 하지만 2010년대 중반부터 노인 자살율은 줄어들기 시작해서 2020년 이후로는 40명 밑으로 내려갔다. 노인 자살자 수도 비슷하거나 줄어들었는데 고령화를 감안하면 내려가는 것이다. 하지만 10~30대 청년층의 자살률은 2020년대 들어 소폭 상승했다. 다만 노인층의 자살률에서 독거노인의 비중이 높다는 점 또한 조상에 대한 예의를 중시하는 사회 분위기에 비하면 매우 아이러니하다. 30대 이상은 OECD 1위고 20대도 최상위권이며 그나마 10대가 OECD 평균보다 조금 높은 수준이다. 자세한 내용은 자살/통계를 참고.
그러나 이런 자살률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한국인의 현세구복을 비는 태도는 종교 사상의 변질을 낳아 변질된 종교인이 출현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5.2.2. 기초학문을 싫어하는 경향?[편집]
5.2.2.1. 주장[편집]
순수학문과 기초학문은 아니지만 예체능의 경우 교육비도 많이 들고 육체적으로 고생도 많이 하며 정부 지원도 변변찮은데다 성공하지 못하면 살아남기 어렵다. 문제는 이를 천시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당장 공부 좀 하던 자식이 예체능 쪽으로 가겠다고 말하면, 대부분의 부모님들이 "너 그걸로 벌어먹고 살 수는 있겠니?"라며 걱정부터 할 것이다. 거기다 사회적으로 봤을 때 이들은 상황이 힘들어서 지원자가 적고, 지원자가 적으니 후원해 주는 단체도 없고, 후원해 주는 단체가 없어 상황은 더 힘들어지고, 상황이 더 힘들어지니 지원자는 더더욱 적어진다는 악순환의 늪에 빠져 진짜로 못 벌어먹고 사는 상황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한국은 현재 실험분야의 기초과학에 가장 많이 투자하는 나라 중 하나다.
과장을 좀 보태서 거의 모든 학문에서 철저히 돈을 더 잘 벌 수 있는 학문에만 정부 지원이 집중적으로 몰린다. 특히 인문학이나 자연과학 같은 기초학문은 한국에서는 찬밥 신세를 면치 못 한다.(...) 여전히 한국에서는 기초학문이 영 좋지 못한 대접을 받는 실상이며 한국인의 대다수가 수리논리학적 혹은 인문학적 훈련이 매우 결여 돼서, 논리적 사고와 높은 수준의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이 굉장히 많다. 민주주의 사회의 구성에 있어서 개개인이 가진 인문학적 소양은 매우 중요한데, 왜냐하면 말과 글을 통해 타인의 생각과 시사적 맥락을 이해하고 그에 따라 이성적인 판단을 하는 것이 올바른 투표, 성숙한 토론 등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중요 근간이기 때문이다.
밥 못 벌어먹고 사는 과목을 지칭하는 '문사철' 혹은 '국철사' 라는 속칭[70] 까지 돌고 있을 정도다. 기초학문을 이상하고, 안 된다고 여기기 때문에 능력 있는 인재들을 제대로 육성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외국에 나가서라도 한국인이 높은 성과를 낸 건 좋은 일이지만 바꿔 말하자면, 이는 한국의 인재들이 국내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해외로 빠져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이 대한민국의 국익에 안 좋은 현상이라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사실 문사철은 전근대에만 해도 학문의 정수이고 사실상 전부였다. 그러던 것이 겨우 백여 년 만에 가장 인기없는 분야로 바뀌었으니 격세지감을 느낄 만하다. 물론 당대의 지나친 문사철 우대로 인한 관리들의 현실감각 부족, 기술직 천시 등이 결코 긍정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미래의 국가 경쟁력을 생각해서 지금부터라도 기초과학에 막대한 투자를 해도 모자랄 판에 당장 사회적인 통념부터가 찬밥 신세니 정말 큰 문제가 아니라 할 수 없다. 공학은 4년 학부 과정만 마쳐도 엔지니어로서 첫 발걸음을 뗄 수 있겠지만, 기초과학에 해당하는 물리/생물/수학/화학 등은 일단 기본적으로 공부를 체계적으로 해야 하고, 민간 기업들의 투자가 공학에 비해 미약한 것과 더불어 대학생들 또한 이 분야에 적극적이지 않다. 기초과학에 대한 무관심은 국가뿐만 아니라 국민들에게도 책임이 있는 것이다. 당장 거의 모든 대학에 붙는 '취업순위 1위 대학'이라는 꼬리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보자. 일단 한국의 응용과학 관련 공학기술 분야는 세계적인 수준이라는 점이 그나마 다행이지만, 기초과학이 부재한 응용과학의 발전은 결국 '후발주자'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없다.
기초학문 중에서도 기초과학 분야는 강대국으로 발돋움하는데 있어 천시해서는 결코 안되는 필수학문이다. 웬만큼 나라의 틀이 잡혔다면 반드시 대폭 지원해 주고 우대해줘야 하는것이 이런 기초과학 분야인데, 대한민국은 벌써 선진국 반열에 접어든 세계 10위 경제대국인데도 기초학문에 대한 사회적인 통념이 결국 개선되지 못했다. 단순히 다른 국가의 성과를 보고 그것에 급급하여 언발의 오줌누기식으로 뿌려대는 정권 립서비스용 멘트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사회에서 우대받는다는 인식이 들 수 있을 정도의 의미있는 과학계 지원이 시급하다.
솔직히 이것은 과학뿐만이 아니다. 대학을 졸업하면 모든 면에서 공부를 하기 싫어한다. 고시를 보는 경우만 몇년 더한다. 그래서 지금 공부한 것만으로 돈 벌 수 있는 과목을 선호하는 것. 순수과학이든 예체능이든 인문학이든 계속 공부를 해야하는 것들이다. 결국 자기가 공부하기 싫으니까 자기 자식이 하고 싶은 공부는 못하게 하고 하기 싫어하는 공부를 시키는 꼴.
5.2.2.2. 원인[편집]
근본적인 원인은 건국 초기 한국이 가난했고, 빠른 경제 성장을 원했기 때문이다. 특히, KIST 초대 소장인 최형섭 한국이 응용과학에 주로 투자하게끔 유도했다.
최형섭은 당시 "사치스러운 기초과학 연구 보단 정부 및 산업계에 도움이 될 만한 실용 연구를 해야 한다."라며 기초과학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밝힐 정도였다. 좋게 말하면 오늘날의 한국 경제를 단기간에 빨리 성장시킬 수 있게 한 애국자라고 할 수 있고, 나쁘게 말하면 한국의 기초과학 수준과 교육 수준을 이 상태(주입식 교육, 실무 위주 교육 등)로 만들어놓은 장본인이라고도 할 수 있다.[71]
사실 최형섭의 선택이 당시로써는 합리적인 선택이긴 했다. 당시 한국 정서상 당장 먹고 사는 것도 걱정해야 할 정도로 가난한 판국에, 기초과학 투자는 사치에 불과했을 것이다. 서방의 경우 몇 천년 전 부터 충분한 기간 동안 서양 철학을 바탕으로 근대까지 과학의 기반을 자연스럽게 성장하고 발전했는데, 한국이 처음부터 기틀을 다잡고 서방 세력을 따라잡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게다가 공산권의 기초과학 발전은 자본주의 서방 진영과 사실상의 수장인 미국과의 군사, 체제 경쟁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할 수밖에 없었다는 상황도 고려해야 한다. 또 서양보단 늦었지만 빠르게 성장한 일본이 냉전 시기에 고도의 경제성장을 경험하며 풍족한 생활을 누려 기초과학에도 이런저런 투자를 할 정도의 형편이 된 사례도 있기에 당시 한국 입장에선 상당히 위협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즉 국제 정서에 알맞고 빠른 경제 성장도 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은 바로 응용과학에 투자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한국의 투자는 경공업, 중공업 연구 및 개발에 치중되었고, 그 결과 실제로도 한강의 기적 등과 같이 매우 큰 산업 발전을 이루었다. 원래 나라가 주저앉았다가 다시 성장할때 황금만능주의와 같은 근시안적 사고관이 자리잡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매우 흔한 일이다. 전체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에서 맹위를 떨쳤고, 아시아 유일 열강이라던 일본도 패전 이후 다시 경제를 건설하던 20세기 중, 후반에는 '이코노믹 애니멀'이라 불리며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
"한·중·일 세 나라 모두 비슷한 배경을 가지고 있는데, 왜 한국만 기초 학문에서 부족한가?"라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는 것도 아니다. 중국의 체급은 한국와 비교할 수 없고, 일본은 아무리 패전국이라지만 과거 아시아의 패권을 잡았던 열강의 일원이었다. 한국은 세계에서 투자하거나 지원하기에 별로 메리트가 있는 국가도 아니었고, 산업화를 성공할 역량이 있어 보이는 국가도 아니었다. 한국의 산업화가 좌우 막론하고 도박이었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도 그것이다. 중공업, 전자산업, IT산업 등이 한국에서 발전할 거라고 본 나라는 어디에도 없었다.
때문에 한국 자체가 기초학문을 무작정 천대하는 나라라기 보단, 근현대사에서 겪은 여러 경험이나 요인들이 현재의 기초학문 천대로 이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래서 한국인들의 기초학문에 대한 관심이나 수준이 부실하다는 비판은 타당하지만, 한국인들이 기초학문을 배척한다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거쳐가며 우리나라는 미국과 일본의 대규모 경제 지원을 받긴 했지만 결국 그 어떤 기술력도 없이 맨손으로 시작해야만 했다. 한국은 고작 약 50여년만에 산업화, 현대화, 선진화, 민주화를 모두 다 한꺼번에 달성한 국가이며 세계 꼴찌 수준의 경제 규모에서 2019년 기준 GDP 10위의 경제 규모를 가진 경제 대국이 되었다. 과거의 평화로웠던 조선과의 비교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놓고 봐도
또한 대한민국이 응용과학에 비해 기초과학이 떨어지는 건 맞지만, 의외로 대한민국의 기초과학 기술력은 세계에서 8~15위[72] 정도는 된다. 무엇보다도, 여러 산업이나 공업, 소프트파워 등을 자급자족 할수 있는 나라는 정말 적다. 자꾸 한국의 기술이나 산업을 미국이나 일본, 중국, 서유럽 국가들과 비교하는 사람이 많지만, 자체적으로 산업/공업을 굴려 자체적으로 보급하는 나라는 거의 이 국가들이 전부나 마찬가지다.
사회적인 면에서 보면 자신이 하고 싶었던 것을 조기교육, 과외 등을 통해 자식에게 시키는 풍조와, 창의적인 생각 대신 단순 암기를 통한 빠른 답의 도출을 중시하는 교육방침이 이런 사회를 만들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세대가 배웠던 교육과정을 그대로 자식에게 물려주니, 창의적인 교육이 불가능해져 이전의 세대와 비슷한 길을 걸을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한국엄마&미국엄마 비교[73]
기초과학은 연구자의 흥미와 관심, 즉 호기심이 가장 큰 원동력이 되는 학문인데, 한국의 교육환경은 학문에서 오는 흥미를 경혐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성적과 등수를 올리는 데에만 집중하게 해 학생들이 과학을 사유하면서 얻는 즐거움보다는 그 결과물을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우위를 점하는 것에서 오는 즐거움만을 추구하게 한다. 그래서 학생들이 이와는 정 반대로 의미 있는 결과물을 비교적 매우 느리게 얻거나 평생 얻지 못할 수도 있는 기초과학과 같은 학문을 멀리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연구 자체에서 오는 즐거움에 몰입되어 연구를 한다면 수십년 동안 한가지 연구를 해도 행복할 수 있다.[74] 하지만 반드시 업적을 이루기 위해서 현재의 고통을 인내하며 연구를 한다면 인류가 아직 풀지 못한 난제에 도전하기 보다는 풀릴 가능성이 비교적 높은 일을 하려고 할 텐데, 문제점이 있다면 그런 도전은 노벨상을 받기 힘들다는 것.
기초과학 분야 수상자가 나오지 않는 것은 교육 환경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지만, 시기상조라고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해석이다. 기초과학의 발전은 단기간동안 돈을 쏟아붓는다고 순식간에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오랜 세월에 걸친 꾸준한 투자와 인식 개선 이후에야 비로소 꽃을 피우는 게 기초과학이다. 실제로 일본도 19세기 말부터 기초과학을 육성하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중반에 와서 10년에 한 번정도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고, 훨씬 뒤인 21세기에 들어서야 매년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는 수준까지 왔다. 과학자가 연구 결과를 낸 뒤에 그 연구로 노벨상을 수상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평균 32년이였고, 수상자의 평균 연령은 69.1세로 거의 70세에 가까웠다.#
또한 한국은 세계적으로 봐도 상당히 드물 정도의 폐쇄적이고 엄격한 징병제를 유지하고 있는 국가라는 점도 생각해야 한다. 남성들이 학업을 중단하고 전혀 다른 일에 강제적으로 종사해야 한다는 것은 기초과학 인재 육성에 매우 불리한 점이다. 사실 징병제는 기초과학뿐만 아니라 많은 분야에서 잠재력을 희생하는 방식인데, 미디어에 자주 노출되는 운동선수와 연예인의 병역 이슈만 봐도 이런 문제를 쉽게 알 수 있다.
5.3. 평화주의 민족론[편집]
함경도 관찰사 윤승훈(尹承勳)이 치계하였다.
호적(胡賊)을 분탕한 과정을 군관 이희길(李希吉) 등이 싸움터에서 돌아왔기에 신이 상세하게 물어보고 또 들은 것을 참고하니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중략)
장주 부락(張主部落)에서 마을외 부락(亇乙外部落)까지 무려 1천여 집을 한꺼번에 태워버리니 연기는 하늘에 치솟고 사기는 배가되었습니다. 적들은 감히 가까이 오지는 못하고 남녀 노소가 모두 흩어져 산 위로 올라가 바라보고 울부짖을 뿐이었습니다. 심지어 움 속에 묻은 곡물까지 다 파내어 불태웠으며 이미 밭에 심은 곡식은 모조리 짓밟아버렸고 마을외 부락의 성채(城寨)도 다 불태웠습니다.
이 호적(胡賊)은 강성(强盛)하여 장주 부락으로부터 마을외 부락까지 40여 리에 좌우로 높은 산과 절벽이 있고 그 안은 아주 넓습니다. 토지는 비옥하고 그 가운데로 큰 냇물이 흐르며 모든 부락들은 그 물을 끼고 살고 있습니다. 집들이 즐비하고 살림의 넉넉함은 물 아래 있는 다른 호적들과 비교가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 잠깐 사이에 다 쓸어버리고 빈터를 만들고 나니 보기에 장쾌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1600년 5월 8일 기사中
만일 조선 사람들이 꿈을 깨어 가지고 물을 주여 먹어 가면서도 진보 하여 공평 하고 정직 하고 편리 하고 부국 강병하는 학문과 풍속을 힘 쓰거드면 조선 사람도 잉글랜드나 미국 사람만 못 하지 안 할 터이요 조선도 청국을 처 요동과 만주를 차지하고 배상 팔억 만 원을 받을 터이니 원컨대 조선 사람들은 마음을 크게 먹어 십 년 후에 요동 만주를 차지 하고 일본 대마도를 찾아 올 생각들을 하기를 바라노라 하면 될 터이니 결심하여 할 생각들만 하고 못 되려니와는 생각하지 말지어다
1896년 8월 4일 화요일 - 한글 현대문 (독립신문)
옆동네인 중국인이나 만주족, 몽골인 및 일본인과 비교한다면 그나마 낫다고 할 수도 있지만[75] , 이 세상에 절대 평화적이기만한 민족은 없다.
한국사, 특히 조선 건국 이후부터 6.25 전쟁까지의 역사를 주로 들먹이며 '수천 년 동안 침공만 당해온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라면서 이를 또 역으로 해석하여 "한국인은 침략 따윈 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라는 주장을 펼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를 그대로 수용하기엔 어폐가 너무 많다.
의복과 같은 고대 문화나 동위도의 다른 민족들과의 평균적인 체격 차이, 유전적 유사성 등 여러 요소를 종합적으로 고려했을 때 한국인의 조상은 퉁구스 계통의 북방 민족과 기원을 공유하고, 원래부터 풍요로운 한반도 남부에서 살던 민족이 아니라 요동, 만주, 몽골 고원 등 북방 어딘가의 척박한 곳에서 남하해 이주한 민족이라는 것이 거의 확실한데 농경민족(정주민족)을 대상으로 이 과정에서 정복과 전쟁은 당연히 일어났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척박한 곳에서 살았다고 한다면, 민족의 호전성은 생존을 위한 필수 요소가 된다. 적은 자원을 두고 경쟁해야 하기에 살아남아서 자손을 남기려면 무를 숭상할 수밖에 없고, 농사가 잘 되지 않으니 유목을 하게 되는데 사나운 짐승들을 관리하려면 자신들도 짐승만큼 사나워져야 한다.
건국 초기의 고구려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통념과는 달리 고구려가 모든 경제를 전쟁과 약탈에 의존한 것은 아니었지만, 정복을 통해 본격적인 농경지를 얻기 전까지는 바이킹처럼 포악한 민족성을 기반으로 약탈로써 생계를 유지해야 했던 것은 사실이다. 고구려는 중국이 오호십육국으로 분열된 틈을 타 시도때도 없이 한족의 영역으로 침범해 들어갔고, 고구려의 최종적인 목표는 중국을 분할한 이민족들처럼 언젠가 풍요로운 중원을 정복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정사 삼국지 등의 기록에서는 이를 보고 고구려는 짐승 같은 놈들이고 누군가를 죽이거나 재물을 빼앗는 방법 말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기록하기도 했다.
때문에 하도 고구려에게 시달린 중국은 예로부터 한민족이 항상 뒤통수에 칼을 겨누고 있다고 생각했고, 기를 써서 정복하려 들었다. 그러나 언제 어떻게 군대를 데려와도 지칠줄 모르는 저항이 뒤를 이었고, 중국의 한국 정복은 결국 실패로 점철된 역사가 되어버렸다.[76]
결국 한국을 완전히 정복하는 데 성공한 건 정주민족 한족이 아니라, 한민족이 이미 삼국시대를 지나 완전한 농경민족의 기질만 남은 후에 침략해온 이민족 몽골 제국과 만주족뿐이었다. 그마저도 만주족은 자신들에게 내성이 없는 전염병과 한국이 가진 저항의 역사를 무시하지 못하고 직할령 편입은 포기하고 제후국으로 삼는 데에 만족해야 했다.
흔히 삼국의 전쟁은 한국사라는 생각에 서로 간의 전쟁은 단순 내전 수준으로 인식해서 삼국의 전쟁 자체를 축소하는 경향이 많지만 엄연히 서로 다른 나라였고[77] 이들이 정말 내전이 아니라 정복을 목적으로 한세기도 쉬지않고 치고받고 싸웠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고구려는 통치력의 한계로 남부의 특히 신라의 영향력만 확보하고 중국으로의 진출이 중심이였으며, 백제는 자신들의 전쟁에 왜국을 자주 동원했는데, 백제의 침략전쟁 스케일을 보면 최소 이 시절부터 평화주의와는 거리가 멀다는걸 알수있다. 그 대상이 단지 근처의 신라, 고구려 였을 뿐이다. 거기에 일본은 백제가 멸망했음에도 동원되었다.[78] 신라의 경우 삼년산성 이라는 정말 요새 건축의 관습과 양심을 팔아먹은 듯한 요새를 짓기도 했으며, 나당전쟁도 물론 당나라가 빌미를 제공했지만 신라가 선제공격해서 일어났고, 관군은 아니지만 신라 해적 신라구는 쓰시마 섬과 강성할 때는 일본 본토 후쿠오카, 구마모토 지역까지 유린했다.
이러한 한국인의 호전성은 적어도 고려와 조선 초까지 유지되었다. 고려는 요나라가 친하게 지내자고 하자 선물로 보낸 낙타를 굶겨 죽이는 것으로 응수했고[79] , 이후 요나라와 치른 전쟁에서 승리하자 고려 사신들은 요나라에 파견을 갈 때마다 행패를 부리며 승전국 행세를 했다.[80] 고려는 원나라에게 정복당하는 바람에 속령이 되기도 했으나, 일단은 큰 간섭을 받되 왕(고려인과 몽골인의 혼혈이지만)도 세우고 어느 정도 자치를 하면서 힘을 아끼다가 원말명초의 혼란기가 도래하자 공민왕은 조상이 그랬던 것처럼 역시나 또 중국에 칼을 꽂았다.
비록 중국의 혼란기가 너무 빠르게 끝나는 바람에 힘의 균형이 무너지고, 그외에도 여러가지 요소가 겹쳐 요동을 길게 점유하지는 못했지만, 신생국 조선도 초기에는 호시탐탐 요동을 노렸다. 주원장이 이런 조선의 태도에 학을 떼며 요동에서 손을 떼라고 엄포를 놓았지만, 조선이 겁을 먹을 거라 생각했던 주원장의 생각과 달리 이성계와 정도전을 비롯한 많은 조선인들은 당장 쳐들어가 명나라를 처부수고 고구려의 옛 강토를 회복해야 한다는 여론을 형성했다.[81]
조선이 여진족을 상대로 마구 전쟁을 벌여 영토를 빼앗은 건 유명한 일이고, 청나라에게 패배하자 북벌론이 대두하기도 했다. 한국이 완전히 쇠락해 전투력을 상실했을 때에도 전투종족의 의식은 사라지지 않았다. 대한제국은 현실적으로 약소국 위치에 있었음 에도, 다른 아시아의 약소국들이 자국을 지키는 데에만 전념하거나 실패해 식민지가 되는 와중에도 일본처럼 힘을 길러 제국주의 정책을 펼치려고 했고, 실제로 청나라가 쇠락해지자 간도로 군대를 보내면서 외부에 힘을 투사하기도 했으며, 약소국 이라는 주장과 달리 다른 열강국들이 기회를 주기도 했지만, 내부 사정으로 인해 그런 기회들을 잡지 못했다.
대략적인 역사를 종합해 보면, 결과적으로 한국은 자신이 현재 가진 힘과는 관계 없이 일단 수틀리면 싸움부터 걸고 보는 전형적인 전투민족이었다. 자신이 더 강할 때는 더 강하니까 싸움을 걸고, 더 약할 때는 상대가 강하다고 으스대는 게 꼴보기 싫다고 싸움을 걸었다.[82]
한국인이 정말 평화주의 민족이었으면 진작에 한족에게 흡수당한 만주족처럼 됐을테니 살아남아도 단일민족이란 말은 못 꺼낸다. 이미 10세기 무렵에 인구 1억을 찍었던 중국 송나라도 약한 국방력 때문에 요나라, 금나라, 서하 등에 침공만 당하다 무너졌다. 즉, 인구수가 압도적으로 많고 영토도 광대한 나라라도 침공만 당하다가는 끝내 멸망하고 만다. 현대까지 문화적 명맥을 유지하고 있기 위해서는 최소한 자국을 방어하기 위한 국방력이 보장되어야 하며, 전근대 시대에는 자국 방어를 위해서 주변의 약소국을 상대로 예방전쟁이 많았다.
한반도가 지정학상으로 주변 나라의 이민족으로부터의 침입을 당하기에도 적당한 데다가 실제 역사적으로도 그랬던 건 맞긴 하지만 반대의 경우로 주변국과 마찰을 일으키면서 명분과 분쟁 거리를 제공한 것도 맞다. 외교 기록을 보면, 한반도 내 국가들은 물론 한반도 밖의 국가들과도 심각할 정도로 처참한 외교로 마찰을 일으키고 다닌 국가들이 많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비교적 원나라와 청나라, 일본에 굴복당한 역사가 강조되는건 그쪽 기록이 더 상세하기 때문이고, 지속적인 노출효과 때문에 더 큰일처럼 부각되었을 뿐이기도 하다.
참고로 고려/조선 때도 중국 쪽으로 침략할 생각이 있었긴 했으나 그 동네가 워낙에 세력이 큰 탓에 실현시키진 못하고 사대주의로 바뀌어 조용히 지냈을 뿐이다. 물론 초기 조선은 명나라와 사이가 좋았던 게 아니다. 명나라도 그렇게 좋게 보는 편도 아니었고, 이 당시에는 조선이든 명나라든 서로 진짜로 한판 해보려던 시도 역시 존재하고, 시도 수준으로 그친 것도 막상 공격이 시작되면 조선이든 명나라든 둘다 국력이 박살 날 위험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 덕분에 태조 대에 황실 결혼을 하려던 시도가 있기도 했다.[83]
또한 세종 시대, 조선 정부에서는 서역의 무슬림과 어쩌다 흘러들어온 다민족들을 조선인으로 동화 시킬 정도로 강력한 동화정책을 펼쳐 다민족 전체를 흡수하는데 성공 했을 정도로 꽤 잘돌아가는 편이기도 했기에 만일 조선이 근대화를 일찍이 성공시키고 강력한 국가를 갖추었다면, 중국이나 일본으로 쳐들어가서 일제 처럼 동화주의를 시도하지 않을 거라고 전혀 장담을 못 한다. 실제로 약해진 청나라를 보고 만주를 합병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그리고 노력만 한 게 아니라 실제로 군사 행동에 옮기기도 했는데, 그것이 바로 1901년부터 1904년까지 꾸준히 있었던 '대한제국의 만주 침공(Korean invasion of Manchuria)'이다. 이는 1899년부터 1901년에 있었던 의화단 운동으로 청군이 평안도와 함경도를 월경하여 약탈하면서 대한제국의 국방비에 한해 예산의 40%를 투자하는 군비 증강을 하였고 이를 막아낸 뒤 만주로 반격한 것이었다. 이는 1800년대 중반부터 있었던 외교적 성격의 간도분쟁의 무력충돌로 일본이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빼앗은 뒤 1909년 간도조약에서 청에게서 철도 부설권을 얻은 대가로 간도에 대한 권리를 청에게 넘기면서 종료되었다. 당시 신병기로 무장한 대한제국군은 5천여 명의 병력으로 전투력이 떨어졌던 2만여 명의 청군을 간단히 처부수고 간도 일대를 무력으로 점거했다. 이 과정에서 크고작은 학살과 약탈이 일어났고, 포로로 잡힌 청군들도 그다지 좋은 꼴을 보진 못했다는 기록도 다수 남아있다.
제국주의가 만연하던 시대에 동서양 막론하고 어떤 국가든 자기가 힘을 갖췄다고 생각하고, 극단주의자가 정권을 장악하고 나면 주변국을 공격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실제로 조선말-대한제국 시대 자체도 늦은 근대화와 준비가 덜 된 군사력이라는 현실에 눌려 프랑스와 러시아에 줄을 서는 행보를 보였을 뿐, 실상은 제국주의에 관심을 보여서 이곳 저곳에 외교적 행보를 이어가다 보니 프로이센에 꽂히기도 했다. 열강의 개입 당시 러시아가 조선도 청나라에 개입하기를 원하기도 했으며. 비록 군사가 부족하고, 군사 장비의 숫자도 부족했지만, 아시아 국가 치곤 군사 장비의 수준은 상위권에 속한 편 이었다.[84] 청나라의 약체화가 가속되고, 군사적 우위를 달성하자마자 만주로 진출해서 전투를 벌이고 간단하게 승리 했다.[85]
현대로 넘어오면 북한은 경제가 망해가는 와중에도 핵무기를 만들고, 남한은 평소 포방부 소리를 들을만큼 화력에 관심이 많고 처음의 온갖 제약들이 서서히 해제되면서 유사 핵무기를 만든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화력 강화에 몰두하고 있다.
애초에 특히나 서유럽 국가들이 인권 문제를 들어 기술적 우위를 약점 잡아 특정 무기를 특정 국가에 판매하는것을 제한하거나 불허하는 경우가 많은데, 한국은 속된 말로 돈만 입금해 주면, 미국이 민감해하는 것만 아니면, 적성 국가만 아니면 가성비 좋은 무기를 꺼리낌 없이 판매하는 데서 죽음의 상인 이라는 별명이 생긴 만큼 절대 평화주의란 말을 쓸 수가 없다.
반대로 한민족, 한국인의 성향은 호전적 성향 혹은 군국주의 성향이라는 견해가 존재한다. 이는 민족적 근본일 만큼 상당히 오래되었고, 근현대에 수난의 역사가 길었던 탓에 그 성향이 더욱 짙어진 상태라 봐도 이상하진 않다. 외국인의 시각으로 볼 때, 한국인은 군사력 증강을 한다고 하면 찬성하면 했지 비판이나, 반대는 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보인다.[86] 현대 한국인들에겐 "그게 무슨 소리냐"라며 잘 받아들여지지 않으나 제3국의 입장에서는 북한의 존재, 경직된 정치계, 후술할 남한 사회에 있는 극단적 집단주의의 부작용들, 높은 징집률의 가혹한 징병제와 민주주의 국가치고는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문민통제[87] , 과거 교련의 영향을 받은 교육방식[88] , 그리고 예능 프로그램으로서의 리얼입대 프로젝트 진짜 사나이[89] 의 존재 때문에 자주 언급된다.
물론 상당수는 일본 제국의 군국주의에서 배워온 것들이지만, 모든 게 전부 일본 제국의 탓이고 한국인은 아무런 잘못도 없으며 그 이전의 길고 긴 한국사 속에서 한국인들이 보였던 폭력성이 지금의 한국과 아무런 연관도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애초에 일본 제국에 복속되기 이전 대한제국부터가 제국주의에 큰 관심을 보였고[90] 프로이센식 군대를 벤치마킹하기도 했으며, 그로 인한 군국주의 성향을 다분하게 드러냈다. 일본 제국의 개입이 없었더라도 대한제국 역시 군국, 제국화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다분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 입각하여 현재는 무작정 한국인을 두고 평화의 민족이라 주창하는 경우는 많이 줄어들었지만, 일각에서는 여전히 '한국인은 평화적인 민족이며 중국과 일본, 서양 열강들의 폭력성에 유린당한 피해자'라는 국수주의, 자기연민에 찌든 주장을 하기도 하며 이는 사회적으로도 문제가 되고 있다.
5.4. 글로벌믹스형 사고방식[편집]
교양만화가 이원복이 2013년에 개정한 <새로 만든 먼나라 이웃나라> 9권에서 소개한 이론인데, 한국은 서양에게 식민지배를 받은 경험이 없던 터라 서양문화에 거부감이 없었기에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1960년대 이후 기독교의 광속 보급, 빠른 민주주의관 확립 등이 있는데, 이러한 것들은 서구의 것을 받아들여 성공적으로 정착시킨 것이다.
이러한 문화적 결합은 문화와 경제 분야에서 폭발적인 모습을 보이는데, 한국인들은 원본 그대로 들여온 서구적 요소를 적절히 융화/발전시켜 세계적인 운동선수, 성악가, 연주가, 무용가, 프로게이머 등을 수없이 배출해냈고, 한류 열풍도 이러한 가치관을 토대로 탄생한 것이다. 세계적으로 알려진 미국 할리우드 영화와 팝송이 미국 대중문화 고유의 질보다는 미국의 막강한 국력과 풍부한 자금원을 토대로 한 반면, 한국의 경우 가무에 남다른 재능이 있다거나 자국의 문화가 뛰어나서 그랬다고 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걸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이에 이원복 교수는 한류의 성공 비결은 '글로벌믹스'가 한몫을 했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면서도 전통적 가치를 포기하지 않은 면이 있는데, 한국인은 여전히 공동체 정신과 남을 배려하고 자신을 희생하는 것을 중요시하다 보니 자연재해 성금 모금운동이나 1998년 외환위기 당시 금모으기 운동 등에서도 폭발적인 저력을 발휘했다. 글로벌믹스형 의식구조는 일본의 '화혼양재' 정신과 차이점을 보이는데, 글로벌믹스는 서구적 요소를 한국식 그릇에, 한국적 요소를 서구식 그릇에 동시에 담아 적응력이 강한 문화를 창조해낼 수 있는 것이다.[91]
이에 케이팝, 양념치킨처럼 서양에서 유래된 것을 한국 문화라고 생각하지 않는 몇몇 한국인들이 있어서 이원복의 주장이 맞지 않다는 비판이 있다. 그러나 한국인이 알고 있는 한국 전통 문화는 원삼국시대부터 중국, 몽골, 만주에서 유입된 것이라서 케이팝처럼 한반도에서 자생한 고유 문화가 아니다. 한국인의 성명도 신라 중기부터 중국어식으로 바뀌었다. 게다가 북한을 근거로도 글로벌믹스한게 아니라는 비판이 있지만 북한은 조선이라는 국명을 사용하면서도 조선 문화를 탄압하고 오히려 소련 문화를 원형으로 수용하여 한국식으로 변형하여 2020년대까지도 내세우는 경우이다.[92]
5.5. 사회에 만연한 불신주의와 자기연민[편집]
2020년대 한국인들은 자기연민으로 가득차 있다. 자신의 경제적 위치를 상/중/하로 나누었을 때 어디에 속하느냐는 인식조사에서 각각의 비율이 2.4%/48.7%/48.9%라고 한다. 소득이 중위소득의 50% 이하인 빈곤층이 17%인 국가에서 절반에 가까운 이들이 스스로를 경제적 빈곤층으로 정의한다. 자신이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보다 빈곤층이라 생각하는 이들이 더 많다.
한국의 불평등은 분명 개선되었다. 2011년과 비교할 때 19년도에 지니계수는 0.388에서 0.339로, 임금 5분위 배율은 5.45에서 4.50으로, 상대적 빈곤율은 18.6에서 16.3으로 줄었다. 60%가 되지 않던 노동소득 분배율은 65.5%가 되었다. 1인당 국민소득은 2,799만원에서 3,754만원으로 늘었다. 개인의 주관적 체감과는 다르게 수치에 따른 경제적 여건은 더 나아지고 있다.[93]
하지만 한국인들은 여전히 자신이 빈곤하다고 인식하며, 자기 자신의 빈곤을 들어 타인을 돕는 것을 거부하는 경우가 존재한다. 다른 이들을 지원하는 것도 그러하다. 그들은 충분히 평안한 삶을 살고 있고 지원받을 자격이 없다. 지난 1년간 기부를 했냐는 물음에 2011년에는 36.4%가 그렇다고 대답했지만 2019년엔 25.6%로 줄었다. 기부의향이 있다는 이들도 45.8%에서 39.9%로 줄었다. 한국인들은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졌다. 다만, 선진국 중에서 한국보다 기부율이 낮은 국가들도 충분히 많다는 사실은 감안해야 한다.출처 박애주의로 유명한 프랑스의 경우 한국과 기부율이 그렇게 크게 차이 나지 않는다. 기부율과 관련된 부분은 사회 문화적인 부분도 부분이지만 국가 복지의 적용율에 따라서도 충분히 달라지는 부분도 크며, 특히나 사회에 종교인 비율이 높을 경우에는 자신이 믿는 종교에 납부하는 교무금 등도 모두 기부금에 포함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필요가 있다.
2020년대의 한국인들은 자신 이외에 모든 것을 의심하고 불신한다. 중앙정부를 신뢰하는 사람은 2019년 기준으로 39%에 불과하고 이는 OECD 국가 중 22위에 위치해있다. 다수의 사람들은 정부를 불신한다. 그렇다고 민간을 신뢰할까? NGO를 불신한다는 이는 전체 국민의 60%에 달하고 이는 조사대상 140여개국 중 하위 10개 국가에 해당한다. 영국 레가툼 연구소의 조사에서 한국의 사회적 자본-사회적 신뢰-분야의 순윈 167개국 중 142위였다. 하위분류에서 개인간 신뢰는 106위, 사회적 관계는 157위, 법조인에 대한 신뢰는 166위에 불과하다. 언론 신뢰도 역시 조사 막론하고 선진국 최하위권 자리를 놓치지 않고 있다. 한국인에게 불신은 시대정신이다.
이러한 불신의 일부는 분명 객관적 현실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이런 불신으로 일어난 긍정적 현상들도 많다. 예를 들어 부패에 대한 인식은 부패를 막기 위한 움직임을 일으키며, 박근혜 정부에 대항해 일어났던 촛불시위도 공권력에 대한 불신으로 볼 수 있다. 오히려 정부를 무조건적으로 추종하고 무조건 믿는 것이 더 많은 문제를 낳을 수 있다. 그러나 불신이 문제가 되는 것은 부분 상호주관적인, 그저 불신이 더한 불신을 낳는 부정적 피드백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국의 범죄율은 세계 최하위권이다. 반면 검거율은 세계 최상위권이며, 미국 등의 특수한 예외를 제외하면 타국과 비교해도 엄벌주의적인 판결이 내려지고 있다. 한국의 10만명당 수형자 수는 106명으로 프랑스의 104명, 이탈리아의 96명, 독일의 77명, 일본의 39명에 비해 높다. 범죄율을 고려해보면 한국은 범죄자들에게 실형을 더 많이 선고하고, 가석방을 삼가는 기조가 있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범죄자들이 잡히지도 않고 죗값을 제대로 받지 않는다고 말하고 사법체계를 불신한다.
한국의 부패인식지수는 180여개국 중 33위, 공공청렴지수는 117개국 중 19위이지만 우리 사회가 소돔과 고모라처럼 타락한 것처럼 말하며 부패한 이들이 정재계에 가득한 것처럼 인식한다. 민주주의지수는 23위, 세계의 자유 지수도 아시아 상위 10%이지만 자국혐오자들의 눈에는 정부가 강압적으로 독재 중이라 여긴다.
또한 현대의 한국인들은 자신과 비슷한 자들만을 '우리'로 받아들이는 배타적 태도가 팽배하다. 임대아파트는 브랜드 아파트 거주민들에게 접근하면 안된다는 인식이 아직도 존재하며, 국내 체류 외국인이 250만이 넘는 한국에서 옆집에 다른 인종이 살면 싫다는 사람이 34.1%다. 이는 중국과 같은 다른 나라에 비교하여 매우 높은 수치이다.[94] 60만 국군 장병들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말은 하지만 그 장병이란 것은 오로지 병사들만을 가리킨다. 연대와 화합은 내가 생각하는 '우리' 앞에서 멈추고 그 우리의 범위는 점점 세분화되고 좁아진다.
한국 사람들은 주위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높은 위치로 올라가려는 상승 욕구가 매우 강하다. 그러다보니 사회가 전반적으로 누리는 풍요보다는 내가 상대적으로 누리는 풍요에 더 민감하고 중하위 계층의 불평등이 개선되는 것보다는 중위에서 상위로, 상위에서 최상위로 올라가는 것이 얼마나 용이하느냐에 더 민감하다. 위만 바라보느라 아래는 바라보지 않다보니 약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줄 의사가 없다. 옆도 바라보지 않아서 남성과 여성이, 상대가 각자 나름대로 겪고 있는 고충에 주목하기 보다는 우리가 얼마만큼의 피해를 더 보고있으며 상대는 얼마만큼의 수혜를 더 얻어왔는지에만 관심이 있다.
한국인 개개인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할까? 물론 정말로 세상의 불행을 다 받은 듯한 삶을 사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정말 대다수가 그럴까? 분노하는 남성과 여성들은 항상 이 부분을 의식해야할 만큼 상대 성별에 대한 위험에 일상적으로 노출되고 있는 걸까? 사실 이런 논리는 양성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된다. 우리는 실제 피해자가 있으니 마음껏 주장해도 된다. 비록 나는 해당 범죄에 노출된 적이 없지만 해당 범죄에 노출될 아주 작지만 분명한 가능성이 있고 우리 중 일부는 그러한 피해를 받았는데 왜 우리의 편을 들어주지 않느냐. 확증편향에 자가당착. 끊임없이 재생성되는 혐오와 증오. 자가발전으로 생성되는 분노. 한국인들은 거기에 몸과 정신을 맡기는 사람들이 많다. 나는 정당한 사람이고 피해자이니 상대방에게, 세상에게 무슨 말을 하고 행동을 하든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남녀간의 갈등도 이런 맥락이다. 많은 남성들은 모든 여성들이 페미니스트일 것이라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으며, 언제나 자신들이 무고당할 수 있다는 우려에 사로잡혀 있다. 반대로 많은 여성들은 성차별을 예시로 들며 안티 페미니즘을 여성혐오로 받아들이거나 남성 혐오자가 되는 경우가 발생한다. 아예 병역 자체를 폄훼하는 경우도 있다. "너와 나 모두 차별받고 있는 점이 있으며, 너가 더 많이 차별받고 있을 수도, 내가 더 차별받고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차별은 잘못된 것이며 너의 차별과 나의 차별은 모두 함께 없애야 한다"가 아닌, "우리가 너를 싫어하는 것은 당연하다"가 페미니즘 진영과 반페미니즘 진영 모두에서 주류의견이 되어가는 것이다.
이러한 불신과 자기연민, 타인에 대한 무조건적인 혐오와 이기심의 가장 큰 피해자는 사회의 밑바닥을 기는 사회경제적 약자다. 노동자와 장애인, 군인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는 것이 그 예. 서로를 이해할 마음도, 생각도 없고 서로의 입장에 대한 대화도 거부한 채 그저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에고에 가득 차서 말한다.
한국 사회는 민주화 이전까지 극히 권위주의적이었던 사회라 그 속에서 '권위'에 묻혀 드러나지 않았던 일들이 더 많이 드러나 세상이 더 지저분해진 것처럼 안 좋아진 것이고 분명 서로간의 갈등이 끊임없지만, 이것은 더 나은 사회로 가는 과도기고, 혼란이며, 이 혼란의 과정 자체가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간다는 증거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서로의 입장과 이기심에만 가득찬 상황에서 진정으로 변하지 않는데 대화가 성립할 리가 없다. 이러한 갈등이 더 나은 세상으로 우리를 이끌수도 있지만 서로간의 깊은 이해과 타인을 받아들여 연대하기 위한 변화가 없는, 대화없는 갈등은 우리에게 남기는 상흔이 우리의 나이브한 생각보다 훨씬 더 클 수 있다. 한국의 갈등양상은 점차 갈등은 점차 많아지고 소모적으로 변질될 뿐 우리의 삶을 실제로 나아지게 하지 않는다. 2020년대의 한국에 회색지대는 존재하지 않으며 서로에 대한 이해보단 서로를 불신하고, 서로를 구분하고, 그게 다시 거짓말이 되어 서로에 대한 불신만이 가득한 사회가 되었다.
어떻게 보면 고속 성장으로 인한 폐해라고 볼 수 있다. 고속 성장으로 인해 경제력은 급속도로 상승했지만 정신 문화가 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찬호 성공회대 교수의 저서인 "모멸감"에는 "한국이 산업국가로서는 대국이나, 정치/사회 제도와 경제력 간의 불일치가 일어나고 있으며 경제력에 어울리는 정치/사회 제도를 갖추고 두꺼운 중간층을 갖는 구조가 되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 모두가 스트레스를 받는 사회."라고 서술되어 있다. 이런 스트레스가 불신을 부추겼다고 할 수 있다.
코로나 19이 일어나고 팬데믹 이후 한국인들이 이런 분열과 갈등 양상은 점점 더 심해졌다. 만인에 의한 투쟁의 시대라 할 만큼 사회 구성원들의 적대감이 높아졌다. 정치적 진영의 적대, 경제적 계급 간·세대 간·젠더 간 적대 등이 훨씬 심화했다. 한국 사회는 사실상 정치적 내전 상태다. 한국 사회가 사회적 연대와 신뢰, 관용 등 공동체적 가치를 잃어버리자 양극화가 더 심해지고 노골화했다는 것은 비단 개인만이 느끼는 지점이 아니다. 지역별·성별·이념 간 갈등에다 경제적·사회적 격차가 더 확대돼 집단적 편가르기와 적대감이 위험 수위에 도달했다는 것은 대다수가 느끼는 위기감의 실체다.
한국일보가 각계 전문가, 칼럼니스트 등 1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 상당수가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한 단절과 고립이 심화하면서 서로에 대한 관용과 이해, 소통 대신 불신과 적대가 자리 잡았다고 진단했다. 그들은 "지금 한국은 보편적 합의의 영역이 매우 좁은, 사회 구성원들이 정신적·감정적으로 날이 서 있는 '피로 사회'"라고 표현했다. 김은미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도 "집단적으로 모두가 곤두서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이번 조사에서 공감 능력 상실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았으나 김 교수는 "'공감'이라는 것조차 자기 편만을 향하는 것으로 오염됐다"고 우려했다. 김범수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는 "코로나 확산의 책임에 대해서도 진영 논리에 따라 잘잘못을 가리려는 분위기가 퍼져 서로 믿지 못하는 신뢰의 위기가 발생했다"고 돌아봤다.
팬데믹 기간 더욱 높아진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 의존도도 구성원 사이의 단절을 심화시켰다. 특히 SNS는 각자의 편견과 선입견을 더 공고하게 만들었다. 공론장이 무너지고 자신이 옳다고 믿는 정보만 받아들이는 현상이 보편화됐다는 것이다. 이동수 청년정치크루 대표는 "알고리즘은 사용자가 원하는 정보만 제공하고 온라인 커뮤니티는 비슷한 사람끼리만 모여 확증편향을 강화한다"면서 "'나와 다른 타인'과 마주할 기회가 줄어들었다"고 말했다. '내가 믿고 싶은 것'만 보는 환경 속에서 사람들은 '내 편'과 '네 편'을 더욱 노골적으로 나누게 됐다는 얘기다. 남성욱 고려대 행정전문대학원 교수도 "보고 싶은 뉴스만 SNS로 취사선택하는 일상이 흑백 논리를 심화시키고 있다"면서 "진짜와 가짜 뉴스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불행한 문화"라고 우려했다.
확증편향에 편승하는 정치권의 문제도 빼놓을 수 없다. 잘못된 정보를 바로잡으려는 노력 대신 '갈라치기' 화법으로 교묘하게 편 가르기를 조장하기 때문이다. 김영산 한양대 경제금융학부 교수는 "양극화와 함께 모든 것이 진영화되고 있는데 그 수장은 정치인"이라면서 "자기 편의 흠은 눈감고 상대에게는 가혹한 잣대를 들이대며 공동체 의식이 더욱 사라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전문가 가운데어서는 "정치인들부터 상대 진영을 전인적으로 부정하는 '악마화'를 중단하고 극성 유튜버들이 내뱉을 법한 조롱과 비아냥의 언어를 줄여야 한다"고 지적의 목소리가 있었다.
더 큰 문제는 극단적 양극화 그 이후다. '내 편'과 '네 편'이 공고해지면 위기 상황에서 해법을 찾는 대신 위기의 책임을 상대에 떠넘기는 데만 골몰할 수밖에 없다. 김형배 한국공정거래조정원장은 "사회적 결속력이 점점 약화돼 분열과 갈등의 사회 구조가 고착되고 있다"면서 "우리 사회가 위기와 맞닥뜨릴 때 문제를 해결할 수 없게 만드는 아킬레스건이 될까 우려스럽다"고 지적했다.이상의 출처는 한국일보 2023년 1월 16일자 기사
희한한 것은 이러한 사회 불신은 온라인에서 많이 일어나고 오프라인에서는 잘 일어나지 않는다. 이는 대한민국 사회 전반에 유교적 생활철학, 집단주의 등의 영향력이 강하기에 현실에서 일개 개인이 혐오 발언을 해봐야 분탕종자로 눈총만 받을 테니 익명성이 보장되지 않는 오프라인에서는 말과 행동을 조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마음 속 사회 불신이 사라지지는 않기에 망상장애 수준으로 심화되어 증오 범죄나 묻지마 범죄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6. 생활상[편집]
조선 시대의 주요 사상인 유교와 성리학의 영향이 남아 높으신 분, 특히 연장자에 대해 공경하는 예절에 관련된 도덕적 요구도가 매우 높은 편이나 세대가 흐르면서 차츰 흐릿해지고 있다. 당연히 별 상관 없이 단순한 문화의 차이인 부분도 많다. 한국 사회에서 나타나는 예절에 대해서는 식사에 대한 예절은 식사예절, 회식, 존댓말에 대한 예절은 한국어의 존비어 문화, 압존법, 기타 예절은 예절 문서를 참조할 것.
언어적으로 직설적인 표현과 능동형 어휘 사용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이는 수동태가 드물지 않게 사용되는 외국어(영어, 일본어 등[95] )와 차별화되는 점으로, 한국어에서는 어설프게 사용된 피동형이나 수동태는 잘못된 문장으로 생각한다. 조금 극단적인 경우, 한국어식 수동태는 모두 번역체라며 아예 배제대상이라 생각하기도 한다. 같은 맥락에서 욕으로 유명하다. 외국인이 안녕하세요와 빨리빨리 다음으로 배우는 말이 욕이라는 소문이 널리 퍼져있으며, 특히 어감이 강렬한 씨발은 이미 전세계에 뜻이 알려진 욕이라고 한다.
또한 과거부터 풍자 또한 발달해 있다고 하는데, 이는 인터넷의 발달 이후 곳곳에 등장하는 각종 유머들에서 말도 안 되는 코드로 잘 나타나고 있다. 상대적으로 사우스파크식의 욕설 개그나 비난 위주의 유머[96] , 2명이 투덕거리면서 웃기는 일본식 만담은 주류가 아니다.[97] 이렇게 뒤틀어서 풍자하는 형식의 문화가 퍼져있기에, 대통령를 비롯한 정치인들은 주요 술안주거리가 되며, 유명인들의 신상 문제 또한 자주 불거진다.
또 한국인은 친하지 않은 사람은 3음절 이름 특성으로 성과 이름을 합쳐서 부르는데[98] 친하더라도 격식을 갖춰 3인칭으로 전달해야 하는 경우에는 합쳐서도 자주 부른다. (예를 들어 평소에는 철수 선배 - 전달시에 김철수 선배 / 평소에는 이 사장님 - 전달시에 이영희 사장님.) 적당히 친해지면 높임법적으로 자신보다 낮거나 동일한 단계의 사람은 'ㅇㅇ아/야' 식으로 '야' 나 '아' 를 붙여서 부르고 높은 사람은 나이에 따른 칭호(형/오빠/누나/언니 등)나 직책 및 사회 관계에 따른 칭호(선배/사장님) 등을 주로 사용하여 부르는데 전자는 이름, 후자는 성을 주로 앞에 붙여 사용한다.
특히 나이에 따른 칭호가 매우 독특한 편인데, 다른 국가들에선 잘 쓰지 않거나 혹은 가족내에서만 사용되는 형, 누나 등을 혈연관계가 아닌 연장자들에게도 사용한다는 점이다. 같은 문화권의 이웃인 중국, 일본에서는 이런 방식으로 그다지 사용되지 않는다.
별명은 성과 이름의 앞글자를 따서 부른다든가 한두 글자의 발음을 강하게 바꿔 부른다든가 하는 식으로 귀여운 느낌을 많이 주기 때문에 주로 여자들이 더 많이 사용한다. 성인 이후의 남자들은 이러한 별명을 잘 사용하지 않는다.
그것 외에도 반말과 존댓말의 개념이 있어 높으신 분에게는 존댓말을 써야 하고 경직된 단체[99] 에선 다나까체를 쓰는 경우가 많다.
어느 나라나 그렇지만, 지역에 따라 한국인들도 그 도민성(道民性)이 조금씩 다르게 나타난다.[100] 물론 다르다고는 해도 (남북 문제를 제외하면) '한국인' 이라는 공통분모에 비하면 옅은 편이며 교통과 정보 매체의 발달로 더욱 희석되어 가는 추세다. 이렇듯 현 시점에서 도민성을 지나치게 맹신하는 것은 자칫 비하가 될 수 있으니 이러한 지역드립은 자제하는 것이 좋다.
6.1. 식생활[편집]
한국 요리 문서 참조.
한국인은 주변 민족에 비해 예로부터 많이 먹었다고 한다. 이름하야 대식국(大食國).[101]
오죽하면 '한국인이 식사를 조금만 덜 했어도 보릿고개 이야기는 없었다', '옛날 전쟁이 날 때 하도 많이 먹어서 식량보급이 부족했다' 하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다. 조선시대 성인 남성의 한 끼 쌀 섭취량은 420cc, 여성은 300cc, 아이는 약 180cc 정도였다. 420cc는 현대 한국 남성의 하루 쌀 섭취량과 맞먹으며 평민들은 보통 2끼를, 왕족이나 양반들은 삼시세끼 챙겨먹고 야참에 자릿조반까지 5끼를 먹었다. 그런데 여기서 5끼라는 의미는 우리가 생각하는 끼니 개념과는 좀 다르다. 예를 들어 영국의 티타임 같은 것을 끼니에 포함시켰다고 생각하면 된다.
기록사진에 나오는 식사량을 보면 현대의 한국인과 외국인이 다 같이 놀란다. 자세한 것은 한민족의 식사량 문서도 참고하자.
예전 조선시대 남자들은 밥을 무려 5공기+참외 5개 등의 기타 반찬을 한 끼에 먹었다고 한다. 물론 먹은 만큼 열심히 일해야 했기 때문에 뚱뚱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고 한다.[102]
다만, 상대적으로 아침이나 저녁보다 점심을 부실하게 먹은 건 맞다. 예전의 점심은 식사라기보다는 간식에 가까웠다고 한다. 애초에 점심(點心)의 어원이 불교 용어다. 마음에 점을 찍는다는 뜻. 왕도 보통 점심에는 국수 등 간단하게 때우고 밖에 나가는 등 에너지 소모가 클 때만 제대로 된 점심을 먹었다. 게다가, 당시에는 짜게 먹어도 어차피 고된 농사 때문에 땀으로 염분이 죄다 배출되어서 괜찮았다고 한다. 물론 요즘 같은 시대엔 얄짤없이 고혈압 크리(...).
그러나 이에 대해서도 다른 이야기도 있다. 과거의 밥은 잡곡의 비율이 높아 상대적으로 많이 부풀어 올랐다는 것과 또한 과거 한국인은 점심은 죽 정도로 때웠기 때문에 식사량의 총합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또한 잡곡밥을 먹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쌀밥과는 달리 먹어도 배가 금방 꺼지는 속성이 있다. 조선시대 실록의 기록을 보면 "흉년 때조차 백성들은 쌀밥만 찾아 먹고 잡곡 귀한 줄 모른다"고 벼슬아치들이 평민들을 비판하는 부분이 있다. 당시 기준에는 쌀은 고급, 보리 등의 잡곡은 저급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었던 모양이다. 애초에 명칭부터 잡곡이다. 요즘엔 오히려 별미로 잡곡밥이 귀한 취급을 받기도 하니 격세지감이라 할 만하다.
흔히 일반 백성은 쌀밥을 못 먹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조선시대 후기에 와서 벼농사가 활성화된 남쪽 지방의 일반 백성들은 경제력만 뒷받침 된다면 쌀밥을 먹을 수 있었다. 물론 농촌에서 춘궁기부터 추수 전까지는 보리밥이나 잡곡밥을 많이 먹었겠지만 쌀밥이 일부 부유층의 전유물만은 아니었던 것이다.[103] 각종 기록이나 외국인의 목격담을 참고해보면 의외로 일반 백성들이 많이 먹고 잘 먹는다는 내용이 많다.
물론 흉년의 경우는 예외다. 솔잎, 소나무 껍질, 도토리 등의 지금 생각하면 후덜덜한 각종 구황식품을 먹고 견뎌야 했던 이면이 존재한다는 것도 알아두자. 그나마 18세기 이후 감자와 고구마와 같은 훌륭한 구황식품이 전래되면서 사정이 나아졌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한국인의 대식은 이미 조선시대에 유구국(오키나와)까지 알려질 정도였고 구한말에 한반도를 다녀간 여러 외국인들이 공통적으로 '조선 사람들 엄청 많이 먹는다'고 언급하는 바이기도 하다.참고로 위에서 언급된 흉년과 보릿고개를 겪은건 전근대 시기 한국뿐만 아니라 심지어 당대 서구권에서도 겪던 일이니 특이할 만한 사항은 아니다. 자세한 것은 한민족의 식사량 참조.
사실 옛 과거의 역사에서 가난과 굶주림을 무의식적으로 떠올리기도 하는데, 이는 한국전쟁을 거치고 이후 1970~1980년대 이전까지 적지 않는 기간동안 전국 단위에서 절대적 빈곤을 겪었을 때의 고생에서 생긴 잘못된 인식이다. 일제강점기만 하더라도 산미증식계획으로 인해 1인당 쌀 소비량이 좀 줄은거 말고는 전통적인 비대한 식사량이나 식사문화 자체의 틀을 바꾸진 않았다. 일제강점기의 유행가였던 오빠는 풍각쟁이 가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시피 오히려 1930~40년대에 적어도 도시권에서는 길거리 가판 음식이나 화양식을 비롯한 별미같은게 제대로 퍼져서 색다른 식도락을 경험해본 시기이기도 하다.[104]
근데 한국전쟁은 폭격으로 거주지 자체가 완전히 초토화되고 집잃고 터잃은 수 백만명 단위의 피난민[* 할머니 할아버지를 통해서 건너 들은 사람들은 이게 가늠이 안될텐데 당장 1차 피난기에만 150만명, 2차 피난기에는 무려 480만명의 피난민들이 전국을 떠돌았고 그 사이에 군인과 민간인을 포함하여 남한만 해도 1,898,480명(기록되지 않은 걸 포함하면 200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1950년 당시의 한국 인구가 2,000만명 정도였으니 거의 모든 인구의 절반정도가 난민이 되거나 아니면 다치고 죽어버린 셈이다. 지금 한국의 인구로 따지면 현재 5,100만명의 인구 중에서 1,800~2,000만명 이상이 난민이 되거나 죽어버린 것과 똑같다. 한 마디로 일제강점기까지 도시권에 살며 나름 중산층 내지 그럭저럭 먹고 살만한 서민층조차도 죄다 빈민으로 전락한 시기가 한국전쟁이었다. 기록]이 곳곳에서 어마무시하게 생기다보니 기존의 소반을 일일이 챙길 여유마저도 완전히 사라져서 식구들끼리 부엌 근처에서 이리저리 한 자리에 뒤섞인채로 밥에 반찬 몇 가지와 국만 놓고 후딱 식사를 헤치우는 스타일이 주류가 되어버렸다.[105] 구호물품을 받아야 할 정도로 식재료 인프라도 완전히 망가졌으니 상차림의 양과 질도 크게 떨어진 것은 당연지사였다.
이걸 어린 시절에 겪고 반 평생넘게 그렇게 살아온 첫 세대가 바로 조부모 세대이고 그 세대가 자라서 먹이고 키운게 부모 세대이다보니 현 시점에서는 '원래부터 그렇게 못 먹고 살았다'라고 잘못된 전통으로 기억하게 된 것이다.[106] 이처럼 한국전쟁과 그 이후 20~30년 동안은 전통 식사문화나 식재료에 있어서 단절의 시대였다고 볼 수 있다. 요즘 와서는 한민족이 대대로 못 먹고 굶주렸다는 잘못된 인식을 깨기 위한 자료가 많이 나오고 있다.
이러한 밥을 엄청나게 많이 먹는 문화는 늦어도 1950년대생들의 청년기까지 나타나는 문화다. 노인들한테 물어보면 '사발(공기가 아니다!)에 고봉밥으로 드셨다'는 증언을 들을 수 있다. 실제로 씨름선수 이만기가 아는 형님에 출연했을 때 지나가듯이 밝힌바로는 1970년대 당시 한국 정부에서 현대적인 농업 기술이 아직 발달되기 전이라 곡물 생산을 증식 시키기 위한 통일벼, 농기계 보급을 비롯한 식량 증산계획과 동시에 당장 있는 쌀의 과소비를 억제하고자 과도한 식사량(특히 쌀을 비롯한 곡류)을 개선하려고 지금은 흔히 볼 수 있는 스테인리스 밥공기를 식당 등지에 전면으로 보급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197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한국인들은 큰 사발에 밥을 가득 담아 먹는 비대한 식사량을 가지고 있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현대 한국의 식단에 매운 음식이 많은 것과는 달리, 16세기까지만 해도 한국의 식단에는 캡사이신계의 매운 음식이 거의 없었다.
이순신의 식단으로 알려진 16세기 한식1
이순신의 식단으로 알려진 16세기 한식2
전통 한식1
전통 한식2
전통 한식3
전통 한식4
전통 한식5
전통 한식6
전통 한식7
근현대의 한국 음식은 매운 음식이 비교적 많다.[107] 이는 대표적인 현대 한국 음식 중의 하나가 김치라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다만 김치도 원래는 고춧가루가 들어가지 않은 형태였다. 고추는 본래 남미 대륙에서만 자생하던 식물로, 포르투갈과 일본이 무역하던 시절을 거쳐 아시아로 전파되었다. 즉, 그 전까지는 동아시아에서 페퍼 계열의 캡사이신을 요리 재료로 사용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는 이야기다.
많은 외국인들이 한국 요리 하면 자주 떠올리는 것이 매운 음식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한국인들은 매운 음식을 비교적 잘 먹는다고 볼 수 있다. 현대 한국 요리에서 매운 맛이 발달한 이유로 먹을 것이 부족한 과거에 식욕을 자극하기 위해서라는 의견도 있다. 한국에 고추가 전해진 것이 비교적 최근의 일이라는 점[108] , 정통 한식의 경우 맵지 않은 게 주류라는 점, '맵고 짠 한국 요리'의 대부분은 근대 이후에 형성된 점을 볼 때 식욕 자극이 원인일 수도 있고, 그냥 시대가 변하면서 매운 맛을 선호하게 된 게 원인일 수도 있다. 더 최근에 들어서는 '매운맛을 좋아하는 한국인'이 일종의 밈화 되어서, 이런 사회적 트렌드가 역으로 식문화에 영향을 주어 캡사이신의 사용빈도가 크게 늘어나고 엽기떡볶이나 불닭볶음면처럼 고통스러울 정도의 매콤함을 강조하는 등, 매운맛을 강조하는 경향이 급증하기도 했다.[109]
한편 과거에는 고기가 귀한 음식 재료였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그랬지만 한국은 전통적으로 농업 중심의 식량 생산을 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한 기호만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과 직결되었기에 당연한 결과라고 하겠다. 예를 들면 쌀을 재배하여 100명이 먹고 살 수 있는 땅에 목초지를 만들어 고기를 먹는다면 9명이 먹고 살 수 있다고 한다. 조선시대 때 국가에서 농업을 적극 장려하여 백성들의 생활에 안정을 꾀했던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해 고기를 먹는 것은 상대적으로 사정이 안 좋은 편이었다. 고기를 먹을 때 거의 버리는 재료가 없다는 것을 보면, 고기 먹기가 쉽지 않은 환경이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이런 전통적인 식습관은 사정이 훨씬 좋아진 현재에도 영향을 끼쳐서 한국인의 1인당 육류 소비량은 OECD 평균에 미치지 못한다.# 물론 일본과 중국보다는 높은 소비량을 보이기는 하나, 전통적인 식단이 육류보다는 채식 위주다 보니 아직 그 영향이 크게 남아있는 것이다. 당장 한국과 일본에서 고기 먹는 날을 특별하게 생각하고 말하는 것만 봐도 아직 식문화에 육류 소비 비중이 크다고 보기는 힘들다. 이는 한국과 일본이 돈이 없어서 고기를 못 먹는다기보다(물론 목축하기 매우 좋은 환경이라 고깃값이 싸다면 유리하겠지만) 그만큼 전통적인 일상 식단에 고기의 비중이 크지 않아 별미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만 한국인의 1인당 연간 해산물 소비량은 전세계 1위라는 통계도 있어 # 그냥 한국인들의 대다수가 어느 하나에 편중되지 않게 골고루 먹는다고 봐도 무방하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쌓여 어족 자원이풍부한 편이고, 국토가 좁은 편이라 해산물의 유통이 비교적 원활하고 가축과 달리 별도로 키울 필요가 없으니 해산물의 소비가 높은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조선시대에는 백성들이 농사 지을 소를 남기지 않고 먹어 치운다고 정부에서 많이 고민하였고, 결국 소를 잡아먹는 것을 금지한 경우도 있었다. 실제로 실록을 찾아보면 '소를 잡아먹었기 때문에 처벌했다'라는 구절들이 있다. 심지어 당시 일종의 마을 자치규범인 향약에서는 '소를 잡는 것을 금한다'라는 규범이 당당하게 명문화돼서 실려 있을 정도였고, 소를 밀도살하는 것이 큰 중죄인 만큼 소를 잡을 때는 공식적으로 도살장에서 잡아야만 했다. 소를 잡아먹는 것이 금지되기는 했지만, 명절 때이거나 병든 소를 잡아먹는 것은 허용했다. 그래서 주인의 식탐때문에 멀쩡한 소가 병든 소로 둔갑하는 일도 있었다. 사실 소를 잡는 것은 금지한 이유는 그만큼 소가 전근대 농업에 있어 매우 중요한 자원이었기 때문이다. 쟁기질을 할 때 소로 하는 것과 사람이 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속도를 낸다. 또한 무거운 물체를 옮길 때 소가 있다면 훨씬 수월하다.
그만큼 고기가 귀해서인지 한국인은 소의 거의 모든 부분을 버리지 않고 쓴다. 부위를 나누는 것도 자그마치 120가지로 외국에서 들으면 기절할 지경으로 나눈다. 사실 도살해서 이렇게 안 쓰이는 가축이 더 드물지만 한국인은 소를 도축하면 가죽, 뼈, 피, 골수, 뇌(!) 등 쓸 수 있는 건 거의 다 쓴다.
쇠고기는 자주 먹었지만 돼지고기의 경우 고구려 - 발해에서는 주식이었으나 조선 시대에서는 기피되었다. 이슬람교 신자들이 돼지고기의 변질을 우려해 돼지고기를 꺼리던 게 어느새 교리와 문화적 관습으로 자리잡았듯이, 조선시대까지 돼지고기는 변질의 우려로 질이 낮은 고기 취급을 받았다.[110] 돼지고기의 수요가 급증한건 18세기와 19세기 무렵으로 비교적 근대에 들어서이며, 지금은 삼겹살이라는 한국 특유의 육식 문화 탄생으로 돈육의 섭취량이 조선과 비교하면 아주 많아졌다. 소는 귀했기 때문에, 간혹 고기를 먹어야 할 일이 있다면 주변에서 구하기 쉬운 개고기를 먹는 경우가 잦았다. 그래서 여름날 영양보충을 해야 할 복날이 오면 주변에서 구하기 쉬운 개고기를 쓰곤 했는데, 이게 우리가 알고 있는 보신탕이다.
어찌되었든 어느 한 집에서 소나 돼지 등의 가축을 도축하면 마을 집집마다 고기를 돌리는 것은 하나의 관례였다. 이러한 관례는 최근의 시골에서도 종종 보이곤 한다. 그만큼 고기가 귀한 식재료인지라 어느 집에서 고기를 생산했다면, 그 집에서는 들뜬 기분이 충만한 마을 사람들에게 좋든 싫든 고기를 나눠줘야 했다는 이야기이다.
흔히 외국에서 Korean BBQ라 부르는 한국 특유의 고기 구워 먹는 방식은 조선 시대에도 있던 오래된 전통 방식이다. 이 고기 구워 먹는 방식은 2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진출한 몇몇 재일교포들에 의해 일본에서 야키니쿠란 이름과 함께 대중적인 식문화로 자리잡았으며, 이런 이유로 여전히 일본의 고깃집에서는 테이블 구성과 밑반찬에서 한식의 영향을 짙게 찾아볼 수 있다.[111] 현재는 한국 문화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지면서, 이러한 한국식 고기 구워 먹는 방식이 온오프라인을 통해 세계 곳곳에 퍼지고 있다.
과거 고려시대 때는 불교의 영향으로 채식을 즐기기도 하였다.
고려는 정치가 심히 어질어 부처를 좋아하고 살생을 경계하기 때문에, 국왕이나 상신(相臣)이 아니면 양과 돼지의 고기를 먹지 못한다. 또한 도살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다만 사신이 이르면 미리 양과 돼지를 길렀다가 시기에 이르러 사용하는데 이를 잡을 때는 네 발을 묶어 타는 불 속에 던져 그 숨이 끊어지고 털이 없어지면 물로 씻는다. 만약 다시 살아나면 몽둥이로 쳐서 죽인 뒤에 배를 갈라 내장을 베어내고 똥과 더러운 것을 씻어낸다. 비록 국이나 구이를 만들더라도 고약한 냄새가 없어지지 아니하니 그 서투름이 이와 같다.
즉, 도살기술 자체가 쇠퇴하여서 중국 사신이 왔는데도 접대가 이러하다. 하지만 고려가 멸망한 건 600년도 더 된 이야기니, 이것만으로는 한국의 고기 문화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참고로 현대 중국에서 한국인은 "고기가 비싸서 고기를 못 먹는 가난한 사람"으로 오해받는 경우도 있다. 흔히 중국인들이 넷상에서 한국인을 비하할 때 하는 말이 "빵쯔는 고기도 비싸서 못 사먹는다." 인데, 한국인의 고기 소비율을 보면 어불성설. 오해의 유래는 한국 드라마라는 설이 있다. 중국에서 방송되는 한국 드라마에서 등장인물이 한우 같은 고급 고기를 선물받고 좋아하는 장면을, 고작 싸구려 고기에 기뻐하는 걸로 오해해서 그렇다고 한다.[112] 정작 1인당 육류 소비량은 한국이 더 높다.#
한국의 식단 차림의 전형이라 할 만한 반상 차림은 뚜껑이 있는 그릇에 담겨 나오는 반찬 가짓수에 따라 3첩, 5첩, 7첩 등으로 부르는데, 첩수가 올라갈수록 점차 차림이 풍부해진다. 하지만 여기서 딱 3가지 어디에나 빠지지 않으면서 아예 첩수에도 계산되지 않는 것이 있다. 바로 밥, 국, 김치이다. 밥하고 국은 그렇다 치더라도, 최소의 기본 반찬은 고기가 아닌 절인 채소였다는 이야기다. 김치에 대한 자세한 것은 문서 참조. 조선시대 식단을 재현한 좋은 예.
현재 한국은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숟가락을 비중 있게 사용하고 있다. 유독 한국에서만 숟가락의 비중이 높은 이유는 음식에 물기가 많고 또 언제나 밥상에 오르는 국이 있었기 때문인 듯하다. 일본의 국은 한국과 달리 건더기가 적어서 '국물'에 가깝고, 그나마도 개인별로 작은 그릇에 담아 들고 마신다. 이에 반해 한국인이 즐겨 먹는 찌개류나 국밥은 물기가 많고 젓가락으로 일일이 건져먹기가 힘들기에 숟가락이 필요한 음식이다.
고려 후기에는 몽골 요리가 전해져 고기를 물에 넣고 삶아 그 우러난 국물과 고기를 함께 먹는 지금의 설렁탕, 곰탕이 생겨났는데, 여기서 파생된 국밥은 애초에 밥을 국에 말아놓은 것이다. 이러한 식생활 풍습은 전 세계에서 드문 것이라고 한다.[113]
결론적으로 한국인은 젓가락, 숟가락을 모두 사용하여 식사를 하는 특이한 민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한국과 중국, 일본을 비교할 때 자주 인용하는 예시이다. 이러한 음식의 스타일에 대한 표현으로 맛있는 식재료를 얻으면 중국인은 기름에 볶거나 튀기고, 한국인은 국을 끓이고, 일본인은 회를 친다고 한다. 그리고 금속제 식기를 사용한다는 것도 특이한 점이다. 지금이야 도자기 그릇을 더 많이 쓰지만, 1980년대까지도 숟가락, 젓가락 뿐만 아니라 그릇 전반이 다 놋쇠나 스테인레스였다.[114] 동북아시아 3국의 젓가락 중에 한국의 쇠젓가락은 가장 무겁고 사용하는 것이 어려운 편에 속한다.
한국의 차 문화는 잎 녹차 위주로 발달했다. 중국의 경우 차 문화의 본산답게 백차부터 흑차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발달되었고, 일본의 경우 한국과 같이 녹차 위주이지만 말차처럼 보다 가공을 하는 쪽으로 발달된 편이다.
불교와 차 문화는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갖는데, 대승불교가 중국을 통해 한국, 그리고 일본에 이르는 과정에서 기호식품이면서도 불교의 계율에 어긋나지 않는 차가 함께 소개된 것. 서아시아에 이슬람이 퍼지면서 와인 문화가 멸절되고 대신 차, 커피가 기호식품으로 자리잡은 것과 유사하다.
고려시대까지는 차 문화가 융성했으며, 우려낸 차를 상업적으로 파는 시설인 다방[115] 도 존재했다. 조선시대로 넘어간 이후 숭유억불정책으로 인해 '불교적 음료'인 차 또한 탄압받아 쇠퇴하였다. 검약을 강조하는 유교 이념하에서 차를 사치품으로 본 것도 있고, 사농공상의 기준에서 알 수 있듯이 사람을 먹일 수 있는 작물(쌀)을 생산하는 농업을 중시한 조선에서 상업적 작물[116] 을 민간이 자율적으로 키우는 것은 권장되지 못했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개국 이후 조선 초부터 고려를 병들게 한 귀족적[117] , 미신적[118] 행태를 일소하는 과정에서 불교의 상징처럼 된 차 문화 또한 명맥이 끊기다시피 한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조 왕실에서 소모할 차 정도는 억불정책 하에서도 남겨둔 사찰에서 생산했으며[119] , 선비들과 사찰을 위주로 조선조 내내 명맥을 이어왔다. 대중화가 되기 힘들었을 뿐 애초에 정약용의 호(다산)를 생각해보자.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친 후, 현대에 이르러서도 차 문화가 대중적이지는 않은 편. 오히려 커피가 압도적이다. 이는 자국 차 재배농가를 보호하기 위한 관세에서 비롯된 부분도 많은데, 홍차류의 경우 관세가 40%이고 한국에서 차 관련 주 생산품목으로 꼽히는 녹차의 경우 관세가 무려 600%다. 애초에 자국 생산량이 압도적이지 않은 상태에서 영업을 위한 상품(찻잎)을 대량으로 들여올 경우 관세폭탄을 맞아버리니, 다방[120] 의 경쟁성이 거의 사라지는 것.
반대로 커피 원두의 경우 관세가 8%이다. 애초에 세계시장에서 거래되는 가격이 커피가 더 싼데다[121] 관세장벽으로 인해 대중화의 길은 요원하다. 그러나 차 매니아 층(이른바 프리미엄 시장)을 대상으로 한 시장에서는 한국 녹차도 비중이 있는 편. 중일과는 다르게 4계절이 뚜렷하다는 기후적 이유로 중엽종 차를 재배하는데다[122] 늦가을~겨울~초봄으로 이어지는 한대 시즌으로 인해 차 나무에 기생하는 벌레들이 다 죽으므로 우전같은 여름 이전에 수확하는 차들은 농약을 쓰지 않는다.
이렇게 세계 주류에 비해 품종이 달라 풍미에서 강점을 가지고 유기농인 녹차가 소량 생산되는지라, 맛을 위해서는 돈 따위 크게 생각하지 않는 프리미엄 시장을 위주로 녹차 시장이 형성되어 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겪어서인지 음식을 가리는 것을 좋지 않게 보는 문화가 있다. 한국인이라면 뭐든 잘먹어야 된다고 생각하며, 극단적인 경우에는 '입이 짧다', '배때지가 불렀다' 등의 부정적인 표현을 당사자 앞에서 언급하며 음식을 가리는 이를 사회 부적응자와 같이 취급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특정 식재료를 먹지 않는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하며 몰래 먹이는 나쁜 사례들도 가끔 발생한다. 일부 기성세대의 경우 '한국인이라면 밥을 먹어야지'하며 식사로 쌀밥이 들어가지 않은 햄버거 같은 패스트푸드를 먹는 것을 기피하기도 한다.
음식을 섭취할 때 소리를 내는 것은 2000년대까지만 해도 못 배운 사람 취급 받는 일이고 지금도 쩝쩝소리를 내는 것에 대해선 부정적이다. 허나 쩝쩝소리를 복스럽다는 둥 합리화하는 사람도 은근 많다. 자세한 건 쩝쩝충 문서 참조. 다만, 면류를 먹을 때 내는 '후루룩' 소리는 크게 문제삼지 않는데, 이것도 식사 예절을 중요시하는 집에서는 혼난다.[123] 방송이나 광고에서 쩝쩝 소리를 내는 것은 연출의 하나로 취급해 그다지 거부감이 없었지만, 현재는 먹는 소리를 강조하는 방송이 주류인 한국에서 불편함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6.2. 놀이 문화[편집]
노는 것을 좋아하는데, 서양인들이나 일본인들처럼 혼자 노는 것보다 모여서 노는 걸 아주 좋아한다. 허나 노는 것에 대해 좋지 않게 보는 이면적인 시선도 있다. 그 일례로 "그럴 시간에 일을 해라."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놀고 자빠졌네." "밥먹고 할짓이 없어서" 등이다.
물론 이것 때문에 술자리 문화가 다소 기형적으로 형성되어 있는 부분이 생겼으며 이 때문에 여기에 끼기 싫어하는 사람들은 괴로워하거나 아싸로 떨어져 나가기도 하고, 가끔은 대학 술자리에서 사람이 죽는다는 소식도 들린다. 개인차가 당연히 있는 것이니 강요하면 안 된다.
다른 사람에 관심을 자주 보이고, 대인관계와 조직 생활을 우선 중시하다 보니, 대개 혼자 있는 것에 익숙하지 않고 여럿이 몰려다니는 것에 강하다. 유독 한국에서 사람들이 혼자 밥 먹기에 익숙하지 않기도 하고[124] , 혼자 술을 마실 경우 알코올 중독 초기증상을 의심하기도 하며, 대개 혼자 다니는 사람에 반감을 갖는다. 내향적인 사람을 보면 이상하다며 성격을 고치는 걸 권유하거나, 본인이 손발 걷고 나서서 외향적으로 만들어주려 하기도 한다.
요즘 젊은 세대가 다소 개인주의적으로 변해간다고는 하지만 아직 젊은 세대들도 혼자가 되는 것을 재미없어 하는지라 친구들과 모여서 밥 먹고, 술 마시고, 놀러 다니는 것에 더 강하다. 거기다 혼자 다니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대다수인데, 이러한 것은 내향적인 것과 외향적인 것과는 별개로 존재한다.[125]
청년들은 클럽에서 춤을 추면서 노래를 부르고, 장년들은 관광버스나 관광지에서 노년들은 도시내 공원에서 흔들어 제끼고, 심지어 대선 후보를 선출하는 전당대회에서도 춤과 노래판이 벌어지는 것을 보면 한국인의 춤, 노래에 대한 열정은 세대와 지역을 초월한다. 게다가, 2010년대에 들어서 수많은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등장하면서 노래와 춤에서 실력 경쟁을 하는 사람들도 늘어가고 있다.
이것으로 보아, 옛날 한국인들의 조상들도 춤추고 노래하는 것을 좋아했다는 이야기도 많은데 제창이나 사물놀이의 역사를 봐도 알 수 있다. 그 때문인지 "한국인은 정한의 민족이 아니라 흥이 많은 민족이다."라고 평가를 하기도 하지만, "쌓인 게 많으니까 풀려는 게 아닌가?"라는 반론도 있다. 다만, 뭐든지 참고 사는 것이 전근대 한국인들의 문화가 아니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전통적으로 흥이 많은 민족'이라는 말이 틀린 말도 아닐 것이다. 농담이 아니라, "참고 살면 화병난다."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다.
대개 남 눈치를 크게 보지 않고 흥을 즐기는 지중해 유럽 국가나 이들에게 문화적으로 영향을 받은 중남미권과는 다르게 아무래도 근본이 주변 시선과 눈치를 꽤 보는 동아시아권이니까 체면을 차리거나 좀 사리는 정서가 있지만[126] , 술을 마시거나 작정하고 놀때는 남 눈치 안보고 신나게 노는 특성이 있다. 일상 생활에서 그런다면 눈치를 주지만 놀 때는 떼로 들썩이는 성향이 강하다. 이 때문인지 서구권에서는 한국인들의 이런 화끈하게 노는 정서를 일컬어 동양의 남유럽 내지는 라틴이라고 칭하기도 한다.[127] 우연찮게도 지중해권 남유럽 국가들 대부분이 반도국인데 한국인들 역시 반도인들이다.
'너무 과하게 놀아서 문제가 된다'는 주장도 있는데, 솔직히 따져보면 너무 과하게 일을 해서 생기는 문제가 더 많다. 이로 인해 놀이 문화가 '놀 때 놀자' 는 식의 폭주하는 형태로서 기형적으로 발달한 경향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대한민국 문서에서 평균 노동시간 자료와 교육 부분을 보면 알 수 있다. 밖에서 돈 벌어오시는 부모님들이 괜히 애주가가 되는 것이 아니고, 학생이 괜히 게임 중독에 빠지고 비행을 범하는 것이 아니다. 적절히 일하고 건전하게 노는 문화의 정착이 필요하다는 비판도 받는다.
김홍도의 무동. 악기를 연주하고 춤을 추고 있다.
김홍도의 씨름. 씨름 시합하는 것을 구경하며 즐기고 있다.
김홍도의 활쏘기. 당시에는 활쏘기도 놀이의 일종이었다.
김홍도의 고누놀이. 고누는 두 사람이 판에 말을 벌여놓고, 말을 많이 따먹거나 상대의 집을 차지하는 것을 겨루는 놀이다.
신윤복의 쌍육삼매. 남자와 여자가 쌍륙 놀이를 즐기고 있다. 쌍륙은 남녀노소 함께 즐기던 놀이였다. 쌍륙에서 사용하는 말1, 쌍륙에서 사용하는 말2
투호를 즐기는 모습
현대에 아이들이 즐기는 각종 놀이는 그 유래가 생각보다 오래된 것들이 정말 많다. 예를 들어 딱지치기, 구슬치기, 닭싸움, 숨바꼭질, 술래잡기, 말타기(말뚝박기), 팽이치기, 그네타기 등은 모두 조선 시대에도 흔히 즐기던 민속 놀이였다.
한국 전통 놀이 중 도가 지나치게 과격한 것 중 하나는 석전이다. 진영을 나누어 서로 돌을 던지고 맞추며 노는 것인데, 사실 말이 노는 것이지 실제 전투를 방불케 할 정도로 죽일 듯이 던졌다. 실제로도 중상을 입거나 심지어 죽는 경우도 많아서 일제강점기 당시의 일본측에서 이걸 보고 경악하여 적극적으로 금지시켰고 20세기 초중엽부터 빠르게 사라져갔다. 이는 지금 시점에서 돌이켜보면 흑역사 취급받는 놀이 문화이다.
고대부터 만주와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이 놀이를 즐겼다는 기록이 많다.
정월에 지내는 제천행사는 국중대회로 날마다 마시고 먹고 노래하고 춤추는데 그 이름을 영고라 하였다. - 삼국지 위서 동이전 부여조
고구려 백성들은 노래와 춤을 좋아하여, 나라 안의 촌락마다 밤이 되면 남녀가 떼지어 모여서 서로 노래하며 유희를 즐긴다. - 삼국지 위서 동이전 고구려조
마한은 해마다 5월이면 씨뿌리기를 마치고 귀신에게 제사를 지낸다. 떼를 지어 모여서 노래와 춤을 즐기며 술 마시고 노는데 밤낮을 가리지 않는다. 그들의 춤은 수십 명이 모두 일어나서 뒤를 따라가며 땅을 밟고 구부렸다 치켜들었다 하면서 손과 발로 서로 장단을 맞춘다. - 삼국지 위서 동이전 마한조
변한의 풍습은 노래하고 춤추며 술마시기를 좋아한다. - 삼국지 위서 동이전 변한조
호남 무안현(務安縣)의 남녀 18인이 섬에 들어가 고기잡이를 하다가 갑자기 광풍(狂風)을 만나 유구국(琉球國)까지 표류하였다. 그 나라 사람들은 삭발하거나 장발 차림이었는데 언어가 통하지 않아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그들이 북 하나를 가지고 앞에 와서 손으로 가리키며 고무(鼓舞)하는 모양을 지었는데, 우리 나라 사람들이 그 뜻을 알아채고 노래를 부르며 북춤을 추자, 그때에서야 그 사람들이 고려인(高麗人)이라고 부르면서 집을 지어 거처하게 하는가 하면 쌀을 주어 밥을 지어먹게 하는 등 자주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는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왜국(倭國) 살마주(薩摩州)로 이송되었다가 다시 대마도(對馬島)로 보내져 어려움 끝에 간신히 귀환하였다. - 현종실록 5권, 현종 3년 7월 28일
마을마다 북과 나팔, 피리, 몇 개의 솥뚜껑이 있어서, 흔히 여름철의 고달픈 노동 시간 중에 한참 동안 일손을 멈추고 힘껏 합주하여 피로를 푼다. - 프랑스 신부 달레(C.C. Dallet)의 <조선교회사 서설> 중
조선인보다 더 음악에 대하여 열렬한 애호심을 가진 민족은 드물 것이다. 군부의 어느 대신이 손풍금의 연주에 감동하여 평소의 엄숙한 태도를 던져버리고 박자에 맞추어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 에른스트 야코프 오페르트
중국인인 조선족들도 같은 혈통인지라 중국에서도 노래를 잘하는 소수민족으로 꼽힌다고 한다. 중국의 최건 같은 경우는 러시아의 빅토르 최만큼이나 유명하다.
위에 언급된 집단주의적인 놀이 문화가 강해서 비교적 근래까지도 혼자서 놀이공원에 가거나 극장 등에서 하는 공연을 보러 가면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받았었다. 그러나 2010년대부터 극장에서 혼자 영화를 보는 케이스는 자연스럽게 퍼져서 오히려 커플이 아닌 이상 '굳이 영화보려고 같이 보러갈 사람까지 미리 불러야 하나?', '이 영화 개봉하는 날인데 얼른 퇴근/하교하고 바로 보러가야지'라고 생각할 정도로 인식이 빠르게 바뀐 편이다. 코로나19가 퍼진 이후에는 여럿이서 영화를 같이 보러가는 경우가 더 드문 편. 다만 외국에서도 디즈니랜드 같은 놀이공원을 혼자 간다는 건 일반적이지 않다고 받아들여진다. 이는 한국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비슷하게 생각한다고 보면 편하다.
만약에 한국에서 이런 행동을 했다면 희한하다고 평가받거나 거의 좋게 보이지 않았을 것인데, 실제로 2009~2010년 폭설 때 길거리에 스키를 신고 나온 사람의 영상이 화제가 되자 네티즌들의 반응은 대체적으로 부정적이었다. 물론 이는 도심지에서 스키를 타는 행동이 위험하기 때문에 비판받은 것도 있고,[128] 강원도 산골에서 눈 왔을 때 스키 타고 논다고 뭐라 할 사람이 없긴 하겠지만 당시에는 그런 비판보다는 비난이 주를 이루었다.
물론 미국 같은 나라라고 해서 그런 행동을 다른 사람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감정을 비난할 수 없다는 인식이 훨씬 더 자유로운 편이라 그러한 행동에 대해 직접적인 비난은 덜한 편이다.
2010년대부터 개인주의의 확산으로 빠르게 바뀌어가던 국내 놀이 문화에 대한 인식은 2020년대에 접어드는 시점부터는 영화관에서 혼자 영화를 보고 식당 등에서 혼자 밥을 먹고 코인노래방 혹은 오락실 등에서 혼자 노는 한국인들을 아주 흔하게 볼 수 있으며, 사회도 무조건 모여서 하는 것을 그닥 강요하진 않는 분위기가 되어가고 있다. 결국 소득이 오르고 시대가 흐르면 사회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서서히 바뀌기 마련이다.
그리고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대유행하면서 지속되는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이제는 이런 혼자 즐기는 여가를 전혀 이상하게 보지 않는다. 오히려 국가와 정부가 나서서 권장할 정도이다. 특히 직장 상사나 간부측이 주도하여 다소 독단적으로 이뤄지던 대규모 회식문화는 오히려 좀 터부시 되는 경향까지 생기게 되었다. 최근 들어서는 사적으로도 친하게 지내는 한 두명에서 두 세명 정도의 인원이 일을 마치고 술잔을 잠깐 기울이다가 해산하는 서구식 음주 스타일이 조금씩 퍼져가고 있다.
6.2.1. 영화[편집]
MPAA(미국영화협회)의 집계에 따르면, 2019년 한국 영화 시장은 북미 영화, 중국 영화, 일본 영화 시장에 이어 영국 영화, 프랑스 영화, 인도 영화시장과 나란히 하게 되었다.
한국 영화는 전 세계 영화팬들에게 회자되는 명작들을 배출하였으며, 골수 팬덤이 세계적으로 있을 정도로 발달했다. 그런만큼 대한민국은 인구 대비 영화 관람횟수가 가장 높은 비율에 드는 국가 중 하나로, 한국 영화시장은 박스오피스 기준으로 세계 대형 영화 시장 중 하나이며 매출 금액 기준으로 미국을 제외한 국가들 중에 2018년 세계 5위 시장이다. 미국 달러화로 보통 15억~16억 달러 수준을 유지하는 중이다.
한국인들의 1인당 평균 연간 극장 관람 횟수는 약 4회 정도를 유지하고 있으며, 영화관 스크린 개수는 2017년 10월 기준 2,804개. 일본의 3,472개 스크린 대비 600개 정도 적지만 한국보다 두 배가 넘게 인구가 많은 일본의 인구수를 감안하면 오히려 한국이 굉장히 많은 편이다. 계산해 보면 한국은 스크린 1개당 담당 인구가 1만 명대 후반으로 세계 10대 영화 시장 중 최소급이다. 또 1996년이라는 비교적 늦은 시기에 시작한 부산국제영화제가 홍콩국제영화제(HKFF)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아시아 대형 영화제로 거듭난 사실을 생각하면,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영화에 큰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자명해 보인다.
6.3. 눈치 문화[편집]
사회성 중 일부를 묶어서 부르는 말로 주변의 상황을 스스로 파악하고 적절한 행동을 하는 능력이다. 원래 '눈이 있는 곳'을 뜻하는 말이었다는 얘기가 있다.
한국의 눈치 문화는 단순한 상황 판단이나 상대방의 기분 파악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집단의 암묵적인 룰과 서열 의식, 비록 상식선에서 이게 맞는 선택일지라도 분위기 흐름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하거나 개인의 자존심마저도 굴욕감을 참아내면서 수시로 굽혀야 하는 고도의 처세술을 요구하기도 한다. 게다가 여러가지로 비언어적인 영역을 포함하는 개념이기에 해당 문화권에 익숙하지 않은 외부인이나 같은 한국인일지라도 타고난 성격이 이와 맞지 않을 경우, 사회에 적응하기 힘들게 하는 배타적 요소가 되기도 한다.
이와 비슷한 개념은 일본의 와(和) 중시, 혼네와 다테마에가 있다. 개인적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게 맞다고 여겨지거나 실제로 느끼는 감정이 다를지라도(혼네) 주변 분위기나 상대방과의 관계, 혹은 속한 조직의 룰을 최우선시해서 일단 겉으로는 다르게 표현하고 행동하는 모습(다테마에)이 한국인의 눈치와 기본적인 흐름이 흡사하다. 다만 디테일한 차이점이 있다면 일본인은 한국인보다 더 내부로 숨기려는 경향이 있고, 서열 또는 친분 관계에 따라서 눈치 보는 방식이 천지차이로 바뀌는 한국인과 다르게 정말 가까운 사이에서도 어느 정도는 중시한다는 차이가 있다.[129][130]
이렇듯 한국의 눈치, 일본의 혼네와 다테마에의 공통적인 특징은 속한 사회가 고맥락 문화권이라는 점이다. 미국의 문화인류학자 에드워드 홀(Edward Hall)의 저서 '문화를 넘어서(Beyond Culture)'에 나온 '고맥락 문화'와 '저맥락 문화' 중 한국과 일본 등 동아시아권은 고맥락 문화에 속한다. 고맥락 문화는 말의 함축적인 의미를 중요시 하는 반면, 저맥락 문화는 글자 그대로의 의미를 중시한다. 그래서 전형적인 고맥락 문화인 한국에서 눈치는 나쁜 일에 대비하기 위해 필요한 것, 생명과도 같거나 생명 그 자체로 여겨진다. 누가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아도 그 뜻을 스스로 이해하고 대처할 수 있어야 한다.[131]
6.4. 외모지상주의[편집]
외모에 집착이 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름의 평가 기준이 있는데 예를 들면 남녀 공통으로 큰 키, 군살이 없는 몸[132] , 적당히 짙은 눈썹, 조막만한 얼굴, 좋은 비율, 아름다운 눈[133] , 자연스럽고 적당히 높은 콧대[134] 에 백옥같이 하얗고 주근깨나 잡티 하나 없는 완벽한 피부 등이 요구된다.[135] 남녀 할 것 없이 젊은 층일수록 이 기준에 대한 강박관념이 매우 심하다.
외모지상주의가 비단 한국만의 문제겠냐만은, 한국은 성형수술 대국이라는 오명 때문에 국내외적으로 외모지상주의가 심하다는 허위 비난을 많이 받아왔다. 이 오명에 매우 큰 역할을 한 게 국제미용성형학회(ISAPS)의 2011년 자료다.[136] 그 자료를 기준으로 한국이 인구당 비율로 따졌을 때, 가장 많은 성형을 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런데 이 통계는 일반인들이 딱히 성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피부과 시술 같은 것도 성형수술에 포함시킨 것이다. 성형수술이라고 하면 보통 째고 깎는 외과적인 걸 생각하는데 피부, 헤어 등의 비외과적 시술도 성형수술에 포함시킨 결과, 한국이 1위를 차지했다. 그리스나 이탈리아, 브라질 등도 외과적 수술만을 따진다면 한국과 비슷하다.#
또한 이 통계 자체도 논란이 있다. 한국에 피부과, 성형외과를 갈 목적으로 오는 외국인들이 그대로 통계에 포함된다는 점과 피부과, 성형외과는 서울에 병원과 환자가 몰려 있는 게 심해 설문 조사 표본을 잡을 때 유독 지역 격차가 크다는 점, 결정적으로 한국 통계 자료의 내용과 불일치하는 부분이 있다는 점이다.[137]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최근의 2018년 ISAPS 자료에 따르면 한국은 총 수술 건수에서 TOP 10위 안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10위 안에 있는 국가 중 한국보다 인구가 적은 국가들인 오스트레일리아, 아르헨티나, 콜롬비아는 인구당 비율로 따지면 한국보다 성형률이 높다.#
국가별로 성형률을 조사한 자료가 사실상 ISAPS의 것 뿐이고 2011년에 나온 자료를 하필 언론에서 인구당 비율로 표를 작성하여 만들어 보도한 것 때문에 널리 퍼져서 세간의 인식에 한국은 성형대국이 됐다. 심지어 한국인의 99%가 성형 수술을 하며 아기 때부터 성형을 한다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하는 외국인들도 종종 있다.[138] 또는 한국의 길거리에 있는 그냥 평범한 시민들을 촬영한 영상을 보며 "한국인의 외모가 잘생긴 이유는 전부 성형 때문이다." 라고 인신공격성 댓글을 쓰는 외국인들도 있다.#
하지만 과거에도 많은 서양인들이 한국인의 외모를 긍정적으로 묘사했었는데 이때는 한국에 성형수술이 거의 존재하지 않던 조선시대였다.# ##[139]
사실 미용적인 목적이던, 기능적인 목적[140] 이던 성형수술을 받은 사람들 중 외모가 출중한 사람들은 성형을 하기 전 부터 베이스가 좋거나 외모가 평균 이상이었던 경우도 많다.[141] 그리고 서구권에서는 남성들이 성형수술을 통해 큰 코를 깎고 턱을 키우는 수술을 받지만, 한국에서는 코를 높히고 턱을 깎는 수술을 받기에 "한국인의 외모가 잘생긴 이유는 전부 성형 때문이다." 라고 비난하는 외국인들의 말은 각자 문화권이 가지고 있는 미의 기준이 상반되기 때문에 더더욱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또 일부 외국인들은 한국의 미의 기준을 보고 '한국인은 백인이 되려고 한다.' 라는 황당한 주장을 하기도 한다. 한국인이 추구하는 피부는 코카서스 피부 특징인 약하고 잡티 많고 붉은 빛이 도는 노화가 오기 쉬운 피부를 추구하는게 아니고 국내 연예인들처럼 잡티가 없고 하얀 피부를 추구하는 것이기에 이러한 주장은 터무니없는 비난이다.[142]
이런 걸 자극적인 소재로 삼고, 조롱할 생각으로 외국의 언론과 방송에서 별 근거도 없이 한국 여성은 무조건 성형을 한다는 식의 방송은 대중들의 왜곡된 인식을 더욱 가속화했고, 이런 악의적인 헐뜯음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결과, 이제는 한국인들조차 그들이 만든 자료를 보고 우리가 성형을 제일 많이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하지만 윗 문단에서도 언급했듯이 2018년 가장 최근의 ISAPS의 자료에서는 한국보다 성형률이 높은 국가들이 있다.
여담으로, 영문 위키 '한국 미의 기준'에서 불충분한 근거를 제시하며 한국 여성 3분의 1이 성형수술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있기에 수정이 필요해 보인다. #
또한, 한국의 아이돌 연습생 제도 항목에 연습생 모두가 성형 수술을 받았다는 근거 부족한 내용도 기재 되어 있기에 수정이 필요해 보인다.#
자세한 내용은 성형수술/논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5. 패션에 대한 관심[편집]
외국인들에게 한국인은 남녀 모두 패션과 꾸미기에 많은 관심을 두는 민족으로 알려져 있다.[143] 남녀 모두 개성을 추구하는 패션이 아니라 유행을 타는 패션에만 관심이 있다는 지적도 있지만, 아무리 클론이라고 까여도 최소한 깔끔하고 기본은 하려는 인원이 많으므로 평균의 비율이 높다면 그 나라 사람들이 옷을 잘 입는다는 의견 자체는 틀린 말이 아니다. 최근엔 이런 인식에 대한 반발심리로 자기가 옷을 잘 입는다는 한국의 트렌드세터들은 오히려 더 개성있고 자신의 스타일을 추구하는 경향이 생겼고, 특히 한국 여성들의 패션과 뷰티는 중국,일본,대만 등 아시아의 젊은 여성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또한 패션 유튜버의 대중화나 직구의 일반화 등 패션에 대한 정보를 얻기 쉬워지고 소비수준이 높아지면서 하이엔드 브랜드나 다양한 브랜드의 소비가 매우 늘어났다. 이로 인해 남성 패션의 경우 과거 소위 남친룩 위주의 클론 일변도에서(일명 모나미룩) 남친룩, 스트릿, 미니멀, 아메카지 등등 나름 카테고리가 다양화되어가고 있으며 옷 이외에도 헤어스타일, 화장품, 제모 등등 전반적인 패션에 관심이나 소비 수준이 매우 높아졌다.[144]
외국인들은 유독 한국인들의 피부가 엄청나게 좋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한국산 화장품에 대한 관심도 매우 높다. 한국 여성들의 뷰티에 대한 관심 또한 상당하다. 포털 사이트에서는 아예 뷰티 카테고리를 따로 두고 관리할 만큼 관심사가 높은 영역이다.[145]
네일아트 산업 규모가 상당하다. 상기한 포털 사이트의 뷰티 카테고리에서도 한국 여성들의 주요 콘텐츠로 소비되고 있다. 그래서 한국의 길거리 간판에는 교회 십자가, 카페, 네일샵이 가장 많다는 이야기가 있다. 상대적으로 창업하기 쉬운 분야이기도 하고, 여초 커뮤니티를 보면 맨손톱이나 맨발톱 상태를 터부시하는 경향이 있어[146] 해당 산업의 성장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6.6. 성문화[편집]
한국인의 성생활은 젊은층과 노인층의 괴리가 굉장히 크다고 할 수 있다.
쉽게 말해, 노인층은 성문화에 보수적이고 터부시하며, 젊은층들은 그에 반발해 경도되어 나가는 상황이라 볼 수 있다.
유교적, 기독교적 보수주의와 서구적 개방주의가 격렬하게 충돌하고 있는 나라다. 성문화에 대해 숨기고 부끄러워하고 가리는데 급급하는 사람들도 수두룩 하지만 반대로 유흥업소에서 방종한 유흥을 즐기고 섹스와 포르노에 대해서도 수위가 여러 개방적인 국가들에는 못 미치지만 드라마나 예능에서 흔히 농담의 소재가 될 만큼 자유로운 나라이다.
전체적으로 세대차이가 많이 나며 그 세대차이의 문화충격을 극복 못하고 한국 정부의 문화 검열을 보듯이 각종 검열제도로 탄압하기도 한다. 젊은층은 이러한 문화검열과 성문화 억압에 대해 반감이 크며 '성적 억압'과 '성적 자유주의'가 충돌하고 있다. 최근에 들어선 세대간의 갈등을 넘어서 페미니즘의 대두가 사회적으로 심화되어 성적 개방에 대해 성별간의 갈등으로도 번져가고 있는 상황이다.[147]
번외로 성적인 의미와는 거리가 있지만 유독 동성간의 신체적 접촉이 자유로운 문화가 있어 팔짱을 끼거나 손을 잡고 서로 툭툭 치고 만지는 등의 행동이 당연시되어 있다. 특히 한국 여자들의 경우 친구들끼리 팔짱을 끼거나 손을 잡고 길을 걷는 경우가 굉장히 흔한 편인데 미국인이나 유럽인들이 보기에도 되게 특이하다고 여겨진다. 이처럼 성에 더욱 더 개방적인 나라에서도 한국의 동성간의 신체 접촉에 놀라는 경우가 많다. 한국처럼 친한 여자들끼리 손을 붙잡는다거나 친한 남자들끼리 툭툭 치는 장난을 외국에 나가서도 자주 하면 미국이나 유럽권에서는 동성애자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148] 이는 한국 사회의 관계주의적 특성에서 기인하므로 사실 성 문화와는 큰 관련이 없지만.
6.7. 빠른 경제 발전의 그림자[편집]
한국이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속도로 빠른 경제 성장을 겪은 국가이다 보니 그에 따른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무엇보다도 이를 압축할 수 있는 말은 '문화 지체'이다. 어느 나라든 정신 문화의 발전은 물질 문화의 발전을 따라잡지 못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앞서 썼듯이 한국은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발전을 보인 바가 있기에 그만큼의 갭이 큰 편이다. 게다가 서구의 문화 자체도 지금도 한국과 많이 다르기 때문에 과거에 물질적으로 앞선 서구 위주의 국가의 풍토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논란이 많았다.
산업화와 근대화의 시작을 알린 유럽과 바로 그 뒤를 이은 미국을 비롯한 영미권 신대륙 국가들이 오랜 기간동안 변화를 거쳐왔고, 이들에 비해 확연히 빠르게 바뀌었다는 일본도 100년에 조금 못 미치는 기간이 걸린 것에 비해, 한국은 이들의 절반도 안되는 30~40년 간의 고도성장으로 한 순간에 시대상이 바뀌었으니 물리적인 시간만 비교해봐도 지체현상이 두드러질 수 밖에 없는 것.
한국의 경제 성장으로 인한 시민들의 의식적인 부조화가 몇 가지 있는데, 대표적으로 2000년대 초반부터 이미 완전한 선진국의 반열에 올라섰음에도 나오는 한국의 선진국 여부 논란이다. 선진국 또는 개발도상국, 선진국/대한민국 문서 참조. 때문에 일부 한국인들에게는 아직 스스로가 별 것 아니라는 소극적인 의식이 많이 남아 있기도 하다. 다만 의도적으로 깎아내리는 일도 매우 많다. 해외에서 거주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비교적 한국의 장점을 쉽게 구분할수 있다. 하지만 한국에 거주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여전히 불신적 사고를 가진 사람이 많은 편이라 자국을 무지성으로 비난하고 불신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현상은 서구권에서 온 사람들이 보기에도 특이한 한국인의 특징이다.[149]
이런 최근의 개별 사례를 제외하더라도 빠른 발전에 따른 부작용이 많다.
아직도 전근대 농업 국가의 문화와 사고방식을 따르는 세대가 두 눈 뜨고 살아 있으며, 이들의 자식 세대인 산업화·민주화 세대, 그리고 이들의 자식 세대인 정보화 세대, 이제는 이들의 자식들이 세상에 나와 성장하는 자동화 시대이다. 즉, 동시대에 전혀 다른 문화를 따르는 3~4대가 한 나라에 공존하는 양상이다.
즉 토플러의 물결 이론에 나오는 4가지 시대의 사람이 전부 공존하는 극도로 혼란스러운 상황인데 세대갈등이 적으면 그게 더 이상한 것이다. 이 때문에 현대 사회의 규범, 질서 등의 새로운 가치관에 적응하지 못하고 세대 간의 소통이 부족해지며, 서로가 서로를 혐오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애당초 농경 사회에서 산업 사회를 거쳐 정보 사회로 진입하는 과정을 몇 세기에 걸쳐 점진적으로 겪은 서구권도 문화 지체 현상으로 엄청나게 고생했는데 겨우 반세기 만에 그 모든 과정을 겪은 한국에서 극심한 문화 지체 현상이 발생하지 않기란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초월적으로 유연하지 않고서야 불가능하다. 결국 모든 세대 문제가 그렇듯이, 시간만이 해결책일 듯 하다.
6.8. 열정적 혹은 다혈질인 성격[편집]
한국인의 경우 냄비근성[150] 이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로 모든 것에 있어 확 끓어오르는 성격을 가진 민족이라는 인식이 있다. 이것을 좋게 표현하면 열정적이라고 할 수 있고, 나쁘게 말하면 다혈질이라 할 수 있다. 영어에서 이러한 성격을 표현한 말로는 frank라는 단어가 있다.
이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한반도의 지정학적인 특성상 긴 세월을 섬과 대륙 양측으로부터 수시로 외침을 받는 등 중간에 끼어 있는 입장이 오래되어 예민한 상황이라는 점과 한반도의 특성상 계절 간 기온 차가 크고 자연 환경이 혹독한 편이란 점을 들 수 있다.
한반도의 모든 정권들은 고대부터 근현대까지 이웃한 중국 대륙으로부터 크고 작은 수많은 압박을 받아왔고, 조선시대부터는 동 시대의 일본 열도가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급격히 기술력과 군사력이 상승하였고 또한 외부에 눈을 돌리기 시작하여 한반도를 발판 삼아 대륙으로 진출하고자 지속적인 압박을 해왔다. 이는 단순히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대에도 계속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당연히 동아시아의 대륙 세력 - 해양 세력 사이의 정중앙에 낀 반도국가인 한국 입장에선 정치권이든 민간이든 시종일관 정세를 파악해야 하기에 예민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게다가 한반도의 특성상 계절 간의 기온 차가 지나치게 크고 자연 환경이 혹독한 편이라 남의 눈치 보면서 살기도 힘든데 당장 살고있는 지역의 자연 환경마저 되게 까다로운 편이다보니 더더욱 예민할 수 밖에 없다. 이 기사를 보면 실제로 기후가 성격에 영향을 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계절 변화에 따라 호르몬 분비 이상으로 인해 다혈질적인 성향을 띌 가능성이 높다는 내용이다.
그렇다보니 한국인의 경우, 오랫동안 누적되어온 지정학적 및 기후적 요인들에 의해 외부 자극에 좀 더 예민하게 반응하며, 이로 인해 다소 호전적이고 다혈질적인 성향을 공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관습적으로 깊게 자리잡힌 한국만의 독특한 존비어와 나이 체계로 인한 연장자 권위의식[151] , 일제강점기부터 시작되어 현재도 진행중인 전국적인 징병제로 인한 경직 및 수직화된 사회문화 탓에 일상과 사회생활에서 수시로 스트레스 받을 일들이 많거니와[152] 단시간에 폭주하는 듯한 특유의 음주문화 역시 이에 한몫 했을거라 보는 경향도 많다.[153]
한마디로 역사적, 기후적, 사회 시스템과 분위기 등등 총체적으로 개개인들에게 신경쓰이고 짜증날 일들이 많기에 성질이 수시로 건드려지다 보니 열정적 혹은 다혈질적인 모습이 국민성의 큰 일부로 자리잡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혈질적인 모습 못지않게 상당한 사회적 눈치와 처세술을 요구받는 문화가 같이 공존하는터라 이를 어느 정도 제어해 주고 또한 비교적 강한 공권력과 엄벌주의, 전반적인 교육수준 및 시민의식이 높아지면서 서로 이해하거나 참는 것이 현재의 모습이다.
행패를 부리거나 남을 함부로 치거나 둔기를 들면 그 자체로 구속수사까지 갈 수 있음을 누구든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분노 범죄와 묻지마 범죄가 잊을만하면 터지며 이로 인한 피해도 무시못할 수준이다.[154]
실례로 통계를 확인해보면 대한민국의 폭행, 살인 같은 강력범죄 40-50% 정도가 우발적인 동기에서 벌어진다. 특히 살인, 살인미수 건은 그 정도가 심해서 매년 통계를 낼 때마다 우발적인 살인동기가 절반을 넘어간다. 살인은 피의자가 형량의 경감을 노리고 우발적 살인동기를 주장해서 이런 통계가 나올 수도 있으나 1999년부터 집계되는 폭행범죄는 명백하게 우발적 동기가 주요원인임이 통계치로 잡히고 있다.[155]
이러한 성격은 화법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터부를 솔직히 말하기도 하며, 민감한 정치적 사회적 이슈를 거론하거나, 본인의 생각을 거리낌없이 드러내는 편이다. 이 과정에서 대화 상대의 기분보다는, 지적 욕구를 해결함으로 인한 만족감이 우선시된다. 그로 인해 명절때마다 가족싸움이 이슈가 되기도 하며, 일부는 폭력으로 이어진다.
또한 다혈질 적인 성격과 별개로 독특하게 분노 표현을 하는 편인데 단박에 목소리가 커지는 다른 나라 사람들과 다르게 화가 나면 단계적으로 목소리가 커지는 독특한 분노 표현을 한다. 특유의 수직적인 사회구조 때문에 습관적으로 화를 최대한 억누르다가, 분에 못이겨 극단적으로 폭발하는 것이다. 처음 접하는 외국인들 중에 이것이 분노인지 인지하는데 조금 걸리는 경우가 있어 당황해 이에 대해 자주 언급하곤 한다.
이와 일맥상통하는 이유로, 많은 한국인은 장애물이나 답답하게 막힌 느낌, 더디게 진행되는 느낌을 매우 싫어하며, 탁 트이고 훤히 뚫려 무언가가 빠르게 진행하는 느낌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시원하다라는 특유의 표현을 즐겨 사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156] 이러한 성향은 한국어에서 발화의 흐름이 중간에 끊기는 것을 싫어하여 자음동화 및 활음조 현상이 여타 언어에 비해 매우 활발하게 일어나는 것과도 연관이 있다.
6.9. 빨리빨리 문화[편집]
한국인들의 급한 성미를 상징하는 단어. '빠르다'의 부사화 접사 '-이' 결합형 '빨리'가 2번 쓰인 말이다. '빨리빨리 문화' 식으로 말하기도 하고, 일각에서는 한국인 특유의 강박증으로 여기며 한국인을 '빨리빨리 민족'이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자세한 내용은 빨리빨리 문서 참조.
6.9.1. 관련 밈[편집]
이러한 빨리빨리 문화가 최근 들어 인터넷 밈으로 만들어 졌다.
자세한 내용은 한국인이 좋아하는 속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 여담[편집]
7.1. 게임 실력[편집]
자세한 내용은 한국인/게임 실력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2. 외국 미디어의 한국인 묘사[편집]
- 한국인 캐릭터 일람은 해당 문서를 참조.
- 스테레오타입 문서의 한국인 내용 참조.
1972~82년까지 11시즌이나 방영된 <M.A.S.H.>라는 미국 드라마는 당시 미국 내에서 최고 인기를 누렸었는데 그 배경이 한국전쟁 당시 미군 야전병원이다. 이 드라마는 당시 미국인들이 한국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이상한 고정관념이나 상상, 무지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작품이다.[157] 본토에 야자수가 나오고 한국 여자들은 기모노를 입고 남자들은 밀짚모자를 썼다. 가난한 형제가 한 명의 부인을 공유하는 괴상한 풍습까지 나왔으니 말 다했다. 그야말로 일본인과 중국인의 잡탕인 동시에 있지도 않은 풍습을 섞은 괴작인 것. 사실 이 작품은 로버트 올트먼의 영화 <매쉬>를 원작으로 하는 드라마인데, 원작 영화는 미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을 풍자하기 위해 한국 전쟁이라는 소재를 베트남 전쟁에 개입시켜 한국을 베트남처럼 묘사했다.[158]
물론 한국의 소프트 파워적 위상이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한 2010년대 이후 들어서는 위와 같은 현상은 없어지고, 한국만의 독자적인 캐릭터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최근에는 보통 한국인 캐릭터는 특정 분야(특히나 IT 관련)에 미칠 듯한 고수, 아니면 실력파라서 막강하지만 결국 주인공한테 발리는 역할로 많이 나온다. 혹은 발차기를 엄청 잘하거나, 살짝 나사 빠진 놈이 많다. 뛰어날진 몰라도 '완벽'과는 거리가 먼 캐릭터가 태반이다. 남성 캐릭터는 공부 잘하는 까칠한 캐릭터로 나오는 경우가 많으며 여성 캐릭터는 공부 잘하는 보이시한 캐릭터로 나오는 경우가 은근히 많다. 한류의 영향으로 인해 아이돌 연습생으로도 묘사되는 편. 해당 케이스의 경우에는 남자는 잘생긴 미남이지만 다소 기생오라비 같은 스타일, 여자는 똑같이 굉장한 미인이지만 매우 기가 세게 묘사된다.
한동안 한국 혹은 한국인 하면 한국전쟁, 가난한 이미지, 북한 등에서 나오는 스토리가 대부분이었고 캐릭터로는 돈벌레, 일벌레, 소수의 공부만 하는 너드로 묘사되는 게 전부였다. 그러다가 2010년대 들어 큰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삼성그룹, 현대그룹, LG그룹 등의 글로벌 대기업부터 시작해서 K-POP, 온라인 게임, 한국 드라마, 한국 영화, 한식 세계화, 웹툰 등 한국 대중문화의 진출로 인한 이미지 향상, 세계 영화 산업에서 한국 영화 시장의 독보적인 성장, 유튜브를 비롯한 인터넷 매체를 통해 폭넓게 소개되는 한국의 모습들, 2010년대 들어 급증하기 시작한 국내 외국인 관광객들, 그리고 미국 본토 내에 진출한 한국인들[159] 등이 그 변화를 이끌기 시작했다.
덕분에 미국인들이 직접 실제 '한국인'을 접할 기회가 늘어나면서 모호하고 추상적이었던 한국인이라는 특성이 점차 구체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미국 내 한국계 배우 풀 자체도 조금씩 넓어지기 시작한 점도 있다. 일본인과 중국인 일색이던 미드에서 점점 한국인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로스트, Drop Dead Diva, 멘탈리스트, 그레이 아나토미, 워킹 데드 등 주조연급으로 한국계 배우가 한국계임을 밝히면서 나온다. 그 외 CSI, 로앤오더 등 각종 수사물이나 오피스 같은 시트콤에서도 한국 관련 에피소드나 나오거나 지나가는 대화에서라도 꼭 등장하는 편이다.[160]
일본이나 중국과는 달리 기존의 이미지가 희미했던 것이 한국 문화의 세계적인 유행으로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대폭 확장되면서 긍정적인 이미지가 많이 퍼지고 있다. 앞으로 해외 매체에서 한국인 캐릭터의 다양화를 지켜보는 재미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위 내용은 모두 대한민국의 국민이야기고, 미디어나 매체에서 북한인들은 다들 악당, 테러리스트 등으로 나오는 등 북한의 자업자득으로 생긴 이미지 때문에 인식이 별로 좋지 못하다.[161] 탈북자 캐릭터가 냉전 시절 소련인 망명자 캐릭터처럼 소비되기도 한다.
7.3. 세계 최강의 예비역 전력[편집]
- 전세계 어디와 비교해도 최강의 예비역 전력을 보유하고 있다. 인구의 절반인 약 2,600만명의 남성중 300만명 이상이 대한민국 국군 예비역 병력으로 구성되어 있다.(상비군은 대한민국의 저출산 고령화로 50만명대로 감축 예정이지만 예비군은 가장 많다) #
- 전쟁 발발 시 길거리로 나가서 지나가는 20대 이상부터 60세 이하 남자를 아무나 붙잡아도 열에 아홉은 이동사격이나 전술사격은 못 되어도 군용소총을 조작, 정비하고 조준사격할 줄 아는 능력을 겸비하고 있다. 또한 모집된 예비역중 대부분이 기본적으로 명령 체계를 이해하며, 이에 따라 사격, 수류탄투척, 각개전투, 숙영, 경계근무, 진지구축 등을 조건만 된다면 바로 수행할 수 있다. 공익이나 방위 출신이라도 기초적인 훈련은 받았다. 단 해군과 공군은 사격 빼고 위의 것들을 하지 않는다.
- 이게 정말 대단한 건데, 왜냐하면 민병대보다 수 배로 훈련 수준이 높은 정규군 병사로서의 1인분 몫을 충분히 할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현대전에선 주 교전부터가 분대 단위 중장거리[162] 교전이며, 이와 더불어 국군은 육군의 기갑장비와 중화기 등을 집중동원해 더더욱 철저한 집단화력을 구사하기 때문에 개인의 뛰어난 체력/전투력과 사격전술은 근중거리 보병간 시가전 또한 수행할 확률이 굉장히 높은 특수전 부대나 일부 정예군이 아닌 이상은 크게 의미가 없다.
- 당장 번화가에 나가서 30분~2시간만 투자해도 소총수, 의무병, 통신병, 행정병, 전차병, 운전병, 탄약병, 정훈병, 박격포병, 포병, 공병, 군사경찰, 각종 병과출신의 부사관 및 상원사 이상급의 고급 부사관, 중위 및 대위 출신의 위관, 못해도 한두 명의 영관급 장교, 심지어 운이 좋다면 장성급 출신 전역자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는다. 이는 비단 육군 뿐 아니라 해군, 해병과 공군도 이에 해당한다. 함정 승선자 및 비번 중인 민항기 조종사라면 바로 함정/전투기/헬기/수송선 등의 파일럿으로 차출될 수도 있다. 정말로 필요해서 실행한다면 몇 개 연대, 육군의 경우 사단까지도 편제가 가능할 것이다.
- 전쟁 발발 시 화기와 탄약만 보급되면, 거의 누구든지 시가전에서 기본적인 게릴라 활동을 바로 시작할 수 있다. 심지어 특수부대 출신들이 꽤 많은만큼, 유사시에는 길거리에서 불러모은 아저씨들이 알고보니 특수전 부대 출신이라 이들을 정예 특작조로 편성하여 일반적인 보병은 수행하기 어려운 고난도의 특수작전을 수행하게 하는 흠좀무한 일이 가능하다.
- LA 폭동 당시, 한인타운에 거주하던 한국인들이 순식간에 진지를 구축하여 방어선을 만들고 화기로 무장한 후 각자 지휘체계까지 만들어 폭동으로부터 생명과 자산을 효과적으로 방어해내어, 미국에서 이들을 지칭하는 말로 "지붕의 한국인"(Rooftop Koreans)이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진 것은 아주 유명한 일화다. 자세한 것은 루프 코리안 문서를 참고. 이들은 일부 미국인들에게는 절제된 화기의 응용으로 자신과 자산을 수호하여, 진정한 미국인다운 모습을 보였다고 아주 높이 평가되기도 했다.
- 종종 한국군 예비군들이 1년 반~2년이라는 타 모병군에 비해서는 짧은 훈련 기간을 지니기에 전투력이 떨어지고 정예도가 떨어진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이는 징병제라는 특성상 당연한 한계다. [163] 오히려 징병제임에도 불구하고 모병제인 국가들의 병사들과 비교할 수가 있다는 게 굉장한거다. 병사들 대부분이 대학교에 재학 중이고, 고졸이어도 고등학교 당시에 철저한 공교육을 이수한 것부터가 한국 병사의 평균적인 인적풀이 뛰어나다는 증거인데, 당장 미군에선 장교나 부사관으로 임관할 것을 종용받는 수준의 우수자원들이 이병으로 들어가 구르고 있는 것이다. 덕분에 2년 가량의 짧은 훈련기간 + 훈련 커리큘럼 부족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커리큘럼/기간을 극복하는 뛰어난 응용력과 전투력을 지녔다. 현대보다 국군의 수준이 뒤처졌던 베트남전에서 한국인 파병 부대가 통상 미 정규군보다 평균적으로 우수한 활약을 펼쳤던 사례가 이를 뒷받침한다.
- 예비군의 유일한 약점은 징병제 체계 자체의 약점 딱 2개밖에 없다. 첫째는 징병제인만큼 병사들 대부분이 군이나 조국 수호의 목적에는 관심이 없던 민간인 신분에서 징병되었다. 또한 타국에서는 병역 거부 판정을 받을만큼 마르고 허약하거나, 과체중이라 운동능력이 떨어지는 인원들도 꽤 현역으로 들어온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자국의 청년들 중 체력, 체격적으로 상위집단을 엄선해 뽑은 모병제군보다는 아무래도 평균적인 체력이나 체격 등의 부분에서는 좀 떨어질 수 있다.[164] 일반 부대가 이렇다보니 별도의 모병제를 시행하고 있는 특전사나 수색대 등의 정예군에도 도미노 현상으로 꽤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리고 둘째는 역시 강제성이 있는 징병제인만큼 어쩔수 없이 보다 확고한 동기나 직업 의식이 떨어지고, 자원입대하여 장기복무하는 모병제 군인보다 훈련의 수준이 떨어진다는 것이다.[165] 이마저도 병사 대부분이 대학 재학중인 우수자원이라는 장점에 파묻히고도 남을정도다. 소규모 국지전 해외 파병이 주류를 이루는 최근 국제 정세에서야 직업군인으로 이루어진 프로페셔널한 소규모 정예군인 모병제가 좋긴하겠지만, 징병제의 진가는 국가의 남성들 모두가 징집되는 전면전에 드러난다는 걸 잊으면 안 된다.
8. 관련 문서[편집]
8.1. 외국[편집]
- 한국인이 좋아하는 국가
- 외국인
- 중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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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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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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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도인
- 아랍인
- 이집트인
- 유대인
8.2. 특징[편집]
8.3. 기타[편집]
9. 참고/관련 문헌[편집]
- 업그레이드 먼나라 이웃나라 9권: 우리나라 - 이원복 글/그림. 김영사. 2018. p120~145, 242~255.
- 한국인 코드 - 강준만 저. 인물과사상사. 2006.
- 사이즈코리아 - 국가기술표준원에서 한국인 인체표준정보를 제공하는 사이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