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프로야구/1983년/신인드래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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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사실상 KBO 최초의 신인 드래프트[1] 로 이 해부터 본격적으로 1차 지명과 2차 지명이 시작되었다.
2. 1차 지명[편집]
1차 지명은 각 팀에서 팀 별 연고지 내 고교 출신 선수를 뽑았다. 지명 수에 제한은 없었다.
OB는 임시로 대전을 연고지로 쓰고 있었지만 원 연고지는 서울로 MBC와 겹치기에, 대전 및 충청 지역 선수 외에 서울 지역 선수들을 상대로 MBC와 지명을 했다. 양팀 지명 선수들 중 10명의 선수가 겹쳐, 10명을 대상으로 드래프트를 했다. 이후로 두 팀은 1차 지명을 앞두고 동전 던지기나 주사위 굴리기 등으로 지명 순번을 정했다. 10명의 선수는 지명 순번대로고 그외에는 가나다 순이다. ※표시가 붙은 선수는 지명권 포기 등으로 지명팀에 입단하지 않았다.
3. 2차 지명[편집]
2차 지명은 롯데, 삼미, 삼성, 해태 4팀만 했다. ※표시가 붙은 선수는 지명권 포기 등으로 지명팀에 입단하지 않았다.
4. 이모저모[편집]
- 이 해 드래프트에서 가장 큰 수확을 거둔 팀은 롯데 자이언츠와 삼성 라이온즈로, 롯데는 1984년 리그 MVP를 수상한 최동원과 최동원의 전담 포수 한문연, 1984년 한국시리즈 MVP 유두열을 모두 이 해 뽑아 그 다음 해 한국시리즈에서 첫 우승을 차지한다. 삼성은 에이스 김시진과 타격의 달인 장효조를 지명했고, 나머지 선수들도 대부분 나쁘지 않은 성적을 기록하며 드래프트의 승자로 남았다. 그 외에도 장호연과 박종훈을 지명한 OB, 김진우와 임호균을 지명하고 이선웅과 정구선을 얻은 삼미도 쏠쏠한 이득을 얻었다. MBC는 오영일이 좋은 성적을 기록했지만 나머지 선수는 영 시원찮았고, 가능성을 보여주던 차에 요절한 김정수나 기대만큼 성장하지 못한 박철영은 아쉽게 됐다. 반면, 해태는 뽑은 선수 자체가 적어 큰 성과를 얻지 못했다. 그나마 트레이드로 OB에서 영입한 한대화가 주전 3루수 자리에서 활약한 것이 위안거리.
- 박동경과 양승호는 1982년 실업야구에서 각각 최우수 신인투수상과 최우수 신인타격상을 수상했는데, 그런 둘을 해태가 지명하면서 대한야구협회는 프로야구에서 실업야구의 유망주들을 빼간다며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이 둘은 프로 야구에서 기대만큼 활약을 보이지는 못했다.
- 해태에 1차 지명된 조종규는 선수 생활 동안 큰 활약을 보이지 못하고 은퇴한 후 심판위원으로 전향해 심판위원장과 경기감독관을 지냈다.
- 해태에서 1차 지명된 또다른 선수인 장진범 역시 프로에서 크게 이름을 날리지 못하고 은퇴한후 심판위원으로 전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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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82년 드래프트도 있지만, 이 드래프트는 전력 불균형 해소를 위해 시즌 직전에 일부 팀들만 참여하여 진행되었다.[2] 지명된 후 한일은행 야구단에 입단하지만, 이 때 지명 때문에 1985년 신인지명 때 MBC에 그대로 지명됐다.[3] 1년 뒤, 1984년 신인 드래프트 때 OB에 지명되어 프로에 입단했다.[4] 2년 뒤 1985년 신인 드래프트 때 OB 베어스에 지명되어 프로에 입단했다.[삼미] A B C 지명권 양도 계약으로 삼미 슈퍼스타즈에 입단하였다.[5] 지명권 양도 계약으로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하였다.[6] 지명된 후 한국화장품 야구단에 입단하고 2년 뒤 다시 지명받았다.[7] 1년 뒤 롯데에 재지명되어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8] 지명권 양도 계약으로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