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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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 | Han Dynasty


파일:attachment/huhan.jpg

기원전 202년 ~ 220년
성립 이전
멸망 이후


촉한

별칭
유한 (劉漢)
위치
중국 대륙, 베트남
수도
장안(長安) (기원전 202년 ~ 9년)
낙양(雒陽) (25년 ~ 190년)[1]
장안(長安) (190년 ~ 196년)[2]
허도(許都) (196년 ~ 220년)[3]
인구
전한: 59,594,978명 (2년)
후한: 56,486,856명 (157년)
정치 체제
봉건군주제전제군주제
국성
(劉)
국가원수
황제[4]
주요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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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제 유방 ,(기원전 202 ~ 기원전 195),
문제 유항 ,(기원전 180 ~ 기원전 157),
경제 유계 ,(기원전 157 ~ 기원전 141),
무제 유철 ,(기원전 141 ~ 기원전 87) ,
선제 유순 ,(기원전 74 ~ 기원전 48),
원제 유석 ,(기원전 48 ~ 기원전 33),
성제 유오 ,(기원전 33 ~ 기원전 7),
광무제 유수 ,(25~57),
명제 유장 ,(57~75),
장제 유달 ,(75~88),
화제 유조 ,(88~105),
안제 유호 ,(106~125),
순제 유보 ,(125~144),
환제 유지 ,(146~168),
영제 유굉 ,(168~189),
헌제 유협 ,(189~220),

주요 섭정
고황후 여치
곽광
왕망
동탁
조조[5]
언어
상고 중국어[6]
문자
한자
종교
유교[7]
도교(태평도, 오두미도), 불교[8], 중국 토속 종교
종족
한족
통화
오수전
현재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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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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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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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베트남
display: none; display: 베트남"
행정구
]]

[[몽골|

몽골
display: none; display: 몽골"
행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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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3. 역사
4. 후계 왕조들?
5. 영향
6. 행정 제도
7. 대외관계
7.1. 한국사와의 관계
8. 역대 황제
9. 계보
10. 매체
11. 여담
12. 같이 보기




1. 개요[편집]


기원전 206년 유방이 건국한 고대 국가로, 초한대전(楚漢大戰)에서 서초항우를 상대로 승리한 BC 3세기부터 삼국시대(三國時代)에 들어서기 직전 후한이 멸망한 3세기 전반까지 존재한 왕조. 진(秦)의 뒤를 이어 통일된 중국의 기반을 자리잡게 한 제국이다. 그래서 진과 한을 묶어 진한제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비록 중국 최초의 통일은 진나라에서 이뤄졌으나, 역사가 워낙 짧아서 중국의 첫 통일 국가의 온전한 모습을 보인 것은 한나라이다.

초대 황제 고조 유방(劉邦)이 진승·오광의 난으로 시작된 진(秦)나라 말엽 패왕(楚覇王) 항우와의 초한전쟁 중인 BC 206년 한중(漢中) 땅에서 건국했다. 한(漢)이라는 국명은 바로 이 한중의 한수로부터 유래한 것. 이후 서기 220년 위왕 조조의 아들 조비가 제29대이자 마지막 황제인 헌제로부터 강제 선양을 받아 사실상 제위를 찬탈할 때까지 426년간[9] 지속되었다.

2. 상세[편집]


통일국가로서는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랜 통치 기간을 지닌 왕조이다. 중간에 왕망이 건국한 이라는 단명 왕조가 잠깐 들어섰다가 망하고 유씨가 중흥한 현한(중한)의 계통이 광무제에게 갈리면서, 그때를 경계로 전한(서한)과 후한(동한)[10]으로 나뉜다.

426년이라는 긴 통치 기간을 지닌 왕조로서 중국 문화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문화권 전반의 기틀을 이룩한 왕조로 평가받는다.

그래서 중국 토착 민족한족(漢族)이라고 지칭한다. 또한 중국의 전통적 글자를 한자(漢字)라고 부른다. 한자가 진나라 시대의 동글동글한 전서(篆書)의 형태를 벗어나 예서(隸書)로 변해 지금의 형태를 정립한 것이 한대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동아시아 문화권의 핵심인 인의(仁義)를 바탕에 둔 통치 이념인 유교와 그 시행 법령인 율령이 정비된 시점이 바로 한나라 시대이며 다른 제자백가 사상들도 유교와 상호 영향을 주면서 발전하여 오늘날 동양철학의 기반이 되었다. 그 밖에도 한나라의 대표 상품으로 채륜이 발명하였다고 하여 채후지(蔡侯紙)로도 불리는 종이를 들 수 있겠다.

넓은 영토, 막대한 인구, 글자(한자로마자), 종교(유교기독교), 법령, 긴 통치 기간[11]같은 시대 공존했던 서역의 또다른 국가와 비슷한 점이 많다.

양한(兩漢)[12]의 경제는 장안낙양을 중심으로 한 관중중원(관동) 지역이 가장 발달했고 그 다음이 파촉, 회북 - 회남, 한수 유역과 장강 하류 이남의 단양, 오, 회의 순이다. 양한 시기에는 토지 겸병과 더불어 소농민의 노비, 유민으로의 전락이 큰 사회 문제였다.

전한의 위업이라는 게 죄다 한무제 때 이루어졌는데, 이에 따른 엄청난 지출이 있었고 그것은 고스란히 전한에게 막대한 피해로 되돌아왔다. 비록 한무제 이후로 전한이 그 정도의 넘치는 포스를 보여주지 못했지만, 선제라는 명군의 활약으로 어느 정도 후유증을 회복했고, 나라의 인구가 6,000만 명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너무 나이가 어리거나 황제가 되기에는 부적절한 인물이 계속 제위에 오르면서 결국 왕망에게 나라가 멸망했다.[13] 서기 2년에 전한의 인구가 6천만 명에 가까웠다고 조사되었다. 그런데 왕망 시기의 실정과 신나라와 후한 교체기에 벌어진 군웅 할거로 인해 대량의 유랑민이 발생했고, 인구도 줄어가면서 광무제가 죽은 서기 57년에는 인구가 그 반도 되지 않는 2800만 명이었다. 이후 후한은 멸망할 때까지도 전한 시기의 최대 인구에 도달하지 못했다.

파일:qvTDkZn.png

서기 2년의 한나라 인구 지도. 옛부터 화북 평원에 많은 인구가 있었다.
사실 초한 전쟁 시기, 신-한 교체기, 후한 말 군웅할거 시기에 유독 인구가 적은 이유는 설사 사람 자체는 더 늘어났다고 해도, 집계할 능력이 더 떨어졌을 수도 있다. 난세가 되면 유랑민과 호족에 예속된 주민이 누락되기 일쑤였다. 난세에는 국가의 행정 체계의 붕괴로 인해 제대로 된 호구 조사와 합당한 인구 파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14]

저 시기 중국 대륙의 인구 총합은 수백만 명에 불과했고, 여러 가지 크고 작은 난이 일어나 사람들이 계속 죽어나가서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깎이던 시절이며 40살만 넘겨도 오래 산 것으로 인정될 정도로 사람들이 너무 많이 죽어나갔다. 중국 대륙이 전한 시기의 인구 숫자를 회복한 시점은 무려 600년이 지난 수문제 시대였다.

전한과 후한은 수도의 위치 때문에 장안(長安)에 도읍했던 서한(西漢)과 낙양(洛陽)에 도읍했던 동한(東漢)이라고도 한다. 이는 오대십국유지원이 세운 한나라를 후한(後漢)으로 부르기 때문이다.

3. 역사[편집]



3.1. 전한[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전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2. 후한[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후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3. 촉한[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촉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이 외에도 후한 멸망 이후 한나라 유씨 황족으로서 황제에 즉위한 소열제 유비파촉 지방과 한중에서 세운 촉한이 있다. 보통 《삼국지》의 (蜀)이라고 불리는 이 나라는 이게 본래의 국명이 아니며, 한나라의 정통성을 이어 찬탈 왕조 와 맞선다는 뜻으로 엄연히 한(漢)을 국명으로 지었다. 후세에 이를 혼합하여 촉 지방의 한나라라고 해서 촉한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촉한의 정통성을 인정할 경우 마지막 한나라란 뜻에서 "계한(季漢)"이라고도 부른다.


4. 후계 왕조들?[편집]


이렇게 전한-후한-(촉한)으로 이어지는 한나라는 멸망했지만 그래도 5호 16국의 스타트를 끊은 흉노족전조는 초기 국호가 한이었는데 이는 흉노와 한나라가 형제의 관계를 맺었으며 당시 흉노족의 지도자 유연의 성 역시도 한나라의 유씨였기 때문이다.

성한 역시도 국성은 이씨였지만 초기 국호는 이었다가 나중에 한으로 바꾸었는데 이 역시도 촉한을 의식했을 수 있다.

국호가 한나라는 아니었지만 한고제 유방의 이복동생인 유교의 후예 유유가 세운 송나라가 있다.

오대십국시대 후한[15]의 초대 황제 유지원사타족임에도 불구하고 광무제의 8남 유병의 후손임을 자칭하여 국호를 한으로 정했다.


5. 영향[편집]


사실상 하나의 중국을 가능하게 한 나라다. 그 전까지의 중국은 지역에 따라 언어, 문자, 단위가 다 제각각이었으며, 따라서 수많은 여러 국가로 나뉘어져 있었다. 이러한 차이점은 사람들의 생각에도 강하게 뿌리내려 있었으므로, 서로 간에도 민족적 동질 의식보다는 서로 다른 나라 사람들일 뿐이라는 인식이 강했으나[16], 한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후 전한과 후한에 이르며 장장 400여 년간 같은 나라 사람으로 지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우리는 하나라는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

중국을 대표하는 민족인 한족이 사실상 하나의 민족이라고 보기 어려운 외관과 혈연 그리고 문화적으로 차이가 나는 많은 지역의 수많은 민족을 통합하여 이룩한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중국이라는 하나의 테두리 안에 있을 수 있게 한 점은 한나라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중국의 민족을 한나라의 한(漢)자를 따서 한(漢)족이라 부르는지 가만히 생각해보자. 그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중화(中華)가 시작된 뿌리라 봐도 무방하다. 중국에서 탄생한 문자인 한(漢)자의 이름만 봐도 한나라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오늘날 중화주의는 중국인에게나, 세계인에게나, 단순히 '중국의 민족주의'로 해석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근대 이전 동양의 국가 질서를 고찰해보면 여기서 내세우는 중화의 의미는 현대 중국이 내세우는 근대적 민족주의적 사고 방식과 다르다. 이는 서양로마 제국과 비슷한 의미의 '동양의 보편적인 질서'라고 할 수 있다. 주변국에게 책봉과 조공이라는 자신들의 질서를 강요하고 이에 따르지 아니하면 징벌하며 주변국들이 칭신하고 조공을 바치면 막대한 하사품을 내려 이들을 복종시켰다. 그리고 이를 따를 경우, 제국은 조공국들에게 안정과 번영을 제공할 것임을 약속한다. 제국은 이 질서를 유지하는 것 자체에서 이득을 거두며, 질서가 도전받는 경우를 제외하면 별도의 무력 행위나 제재를 통해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기틀의 기반 사상을 형성한 유교를 선택한 것이 바로 한나라이며 이 중화 의식이 동양 각국의 세계 인식에 영향을 주었으며 후대엔 이런 보편적인 질서를 내제적으로 적용시킨 소중화 사상이 나오는 등 동양사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그 때문에 길고 긴 역사를 자랑하는 중국사, 그리고 더 나아가 동아시아사에서도 대단히 중요하게 취급받으며 상당한 입지를 가지고 있다. 단순히 하나의 중국이 시작되었다는 것뿐만 아니라, 일단 동아시아 문화권의 핵심인 유교가 국학의 지위를 가지게 되었고[17], 또 다른 핵심인 율령(律令) 역시 기원전 130년 장탕(張湯)과 조우(趙禹) 등에 의하여 만들어졌다.


6. 행정 제도[편집]


파일:attachment/huhan.jpg
한나라의 행정구역

군현제의 기틀이 잡힌 것도 이 시대. 시작은 이사의 건의에 따라 진나라가 먼저 시행했지만 순식간에 나라가 멸망했다. 이후 진나라를 멸망시킨 항우는 천하를 다시 제후들이 나누어 통치하는 봉건제(封建制)로 부활시켰지만, 실패하고 반대로 유방은 장량의 건의에 따라 천하를 분열케하는 봉건제 대신 봉건제와 군현제를 혼합한 군국제(郡國制)를 실시하였고[18] 이후 오초7국의 난과 무제 시기를 걸쳐 중국 전체에 군현제가 완전히 확립되었다. 이 군현제는 이후 장장 2000년간 중국 통치 시스템의 기본이 되었으며, 이로 인해 광대한 지역에 중앙 집권의 영향력을 완전히 확립할 수 있었다. [19]

또한 한무제 대부터 지방관이 각지의 인재를 천거하여 중앙에 등용하는 향거리선제가 시작되었다. 지방의 인재들을 유교 정신에 따라 천거하면서 지방세력이 중앙의 유교 원리를 받아들이고 또한 지방의 호족들이 중앙에 진출할 기회를 활발히 얻게 되어, 지방 출신 중앙 관료들과 외척환관 중심의 황제 세력이 균형을 이루었다. 이 정책은 후한 말까지 계속되었는데, 한나라 말기에 가서는 환관외척간의 정쟁이 심해지고 호족들이 중앙의 정쟁에 말려드는 식으로 변했으며, 환관 세력이 지방 사대부를 집단으로 감금하는 당고의 금과 같은 사건으로 향거리선제는 무너지고 지방과 중앙 간의 결속이 사라지게 된다.


7. 대외관계[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0px-Western_Han_Chinese_Silk.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00px-CMOC_Treasures_of_Ancient_China_exhibit_-_painted_figure_of_a_cavalryman.jpg

장사 마왕퇴에서 출토된 백화[20]
함양 유방 부장묘에서 출토된 기마 무사용


또한 무제 시기의 군사 작전으로 이후 중국 주변국의 역사에 어마어마한 파장을 미쳐오기도 했다. 한고조 유방을 굴복시키고 미녀 왕소군을 조공으로 받을 정도로 엄청난 힘을 자랑하던 동아시아 최초의 유목제국 흉노에 대한 미칠듯한 공세로 인해 흉노는 큰 타격을 입어 이전 같은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베트남과도 전쟁을 벌였는데 이때 남월은 순식간에 멸망당하고 대신 9군이 세워지게 되면서 베트남이후 수백, 수천 년간 이어지는 중국과의 지리한 대립을 시작하게 되었다.


7.1. 한국사와의 관계[편집]


한국의 역사에도 큰 비중을 가지고 있다. 이는 바로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것이 전한이기 때문이다. 다만 위만조선은 이전의 남월에 비하면 그 한나라도 꽤나 고생을 해서 멸망시켰다. 그리고 그 자리에 한사군을 설치하였으나, 전한의 통치에 반발하는 한인 유민들의 저항과 고구려의 성장과 반격, 한사군 자체의 통제력 문제로 얼마 못 가 전부 통제력을 상실하고, 낙랑은 사실상 현지 예멕계 국가 수준으로 별개의 세력권이 되어버리고 이때 부여와의 관계도 다소 서먹해졌다. 이 한나라와의 관계와 투쟁에서 원삼국시대, 그리고 삼국시대로 이행하는 전기가 된다.


8. 역대 황제[편집]





한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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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 前漢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제5대
고제
혜제
소제
소제
문제
제6대
제7대
제8대
제9대
제10대
경제
무제
소제
폐제
선제
제11대
제12대
제13대
제14대
제15대
원제
성제
애제
평제
정안공
후한 後漢
제16대
제17대
제18대
제19대
제20대
광무제
명제
장제
화제
상제
제21대
제22대
제23대
제24대
제25대
안제
소제
순제
충제
질제
제26대
제27대
제28대
말대

환제
영제
소제
헌제

비정통
동제



대수
묘호
시호
이름
출생
사망
연호
재위 기간
능호
추존
-
-
유청
(劉淸)

?
?
-
-
황조릉
(皇祖陵)
추존
-
태상황
(太上皇)

?[1]
?
BCE 197년
-
BCE 201년 ~ BCE 197년
만년릉
(萬年陵)
01
태조
(太祖)
고황제
(高皇帝)

유방
(劉邦)
BCE 247년 5월 29일
BCE 195년 6월 1일
-
BCE 202년 ~ BCE 195년
장릉
(長陵)
02
-
효혜황제
(孝惠皇帝)

유영
(劉盈)
BCE 211년
BCE 188월 9월 26일
-
BCE 195년 ~ BCE 188년
안릉
(安陵)
03
-
-
?
?
BCE 184년
-
BCE 188년 ~ BCE 184년
-
04
-
-
유홍
(劉弘)

?
BCE 180년
-
BCE 184년 ~ BCE 180년
-
05
태종
(太宗)
효문황제
(孝文皇帝)

유항
(劉恒)
BCE 203년
BCE 157년 7월 6일
전원(前元, BCE 179년 ~ BCE 164년)
후원(後元, BCE 163년 ~ BCE 157년)
BCE 180년 ~ BCE 157년
패릉
(覇陵)
06
-
효경황제
(孝景皇帝)

유계
(劉啓)
BCE 188년
BCE 141년 3월 9일
전원(前元, BCE 179년 ~ BCE 164년)
중원(中元, BCE 149년 ~ BCE 144년)
후원(後元, BCE 143년 ~ BCE 141년)
BCE 157년 ~ BCE 141년
양릉
(陽陵)
07
세종
(世宗)
효무황제
(孝武皇帝)

유철
(劉徹)
BCE 157년 7월 14일
BCE 87년 3월 29일
건원(建元, BCE 140년 ~ BCE 135년)
원광(元光, BCE 134년 ~ BCE 129년)
원삭(元朔, BCE 128년 ~ BCE 123년)
원수(元狩, BCE 122년 ~ BCE 117년)
원정(元鼎, BCE 116년 ~ BCE 111년)
원봉(元封, BCE 110년 ~ 105년)
태초(太初, BCE 104년 ~ BCE 101년)
천한(天漢, BCE 100년 ~ BCE 97년)
태시(太始, BCE 96년 ~ BCE 93년)
정화(征和, BCE 92년 ~ BCE 89년)
후원(後元, BCE 88년 ~ BCE 87년)
BCE 141년 ~ BCE 87년
무릉
(茂陵)
08
-
효소황제
(孝昭皇帝)

유불릉
(劉弗陵)
BCE 94년
BCE 74년 6월 5일
시원(始元, BCE 86년 ~ BCE 80년)
원봉(元鳳, BCE 80년 ~ BCE 75년)
원평(元平, BCE 74년)
BCE 87년 ~ BCE 74년
평릉
(平陵)
09
-

유하
(劉賀)

BCE 92년
BCE 59년
-
BCE 74년
-
추존
-
여황
(戾皇)

유거
(劉據)
BCE 128년
BCE 91년
-
-
-
추존
-
도황
(悼皇)
[2]
유진
(劉進)
BCE 113년
BCE 91년
-
-
-
10
중종
(中宗)
효선황제
(孝宣皇帝)

유순
(劉詢)
BCE 91년
BCE 48년 1월 10일
본시(本始, BCE 73년 ~ BCE 70년)
지절(地節, BCE 69년 ~ BCE 66년)
원강(元康, BCE 65년 ~ BCE 61년)
신작(神爵, BCE 60년 ~ BCE 58년)
오봉(五鳳, BCE 57년 ~ BCE 54년)
감로(甘露, BCE 53년 ~ BCE 50년)
황룡(黃龍, BCE 49년)
BCE 74년 ~ BCE 48년
두릉
(杜陵)
11
고종
(高宗)

효원황제
(孝元皇帝)

유석
(劉奭)
BCE 76년
BCE 33년 5월 9일
초원(初元, BCE 48년 ~ BCE 44년)
영광(永光, BCE 43년 ~ BCE 39년)
건소(建昭, BCE 38년 ~ BCE 34년)
경녕(竟寧, BCE 33년)
BCE 48년 ~ BCE 33년
위릉
(渭陵)
12
통종
(統宗)

효성황제
(孝成皇帝)

유오
(劉驁)
BCE 51년
BCE 7년
건시(建始, BCE 32년 ~ BCE 29년)
하평(河平, BCE 28년 ~ BCE 25년)
양삭(陽朔, BCE 24년 ~ BCE 21년)
홍가(鴻嘉, BCE 20년 ~ BCE 17년)
영시(永始, BCE 16년 ~ BCE 13년)
원연(元延, BCE 12년 ~ BCE 9년)
수화(綬和, BCE 8년 ~ BCE 7년)
BCE 33년 ~ BCE 7년
연릉
(延陵)
추존
-
공황
(恭皇)

유강
(劉康)
BCE 1년?
BCE 23년
-
-
-
13
-
효애황제
(孝哀皇帝)

유흔
(劉欣)
BCE 27년
BCE 1년
건평(建平, BCE 6년 ~ BCE 3년)
원수(元壽, BCE 2년 ~ BCE 1년)
BCE 7년 ~ BCE 1년
의릉
(義陵)
14
원종
(元宗)

효평황제
(孝平皇帝)

유간
(劉衎)
BCE 9년
CE 6년 1월 4일
원시(元始, 1년 ~ 5년)
BCE 1년 ~ CE 6년
강릉
(康陵)
15
-
-
유영
(劉嬰)

5년
24년
거섭(居攝, 6년 ~ 8년)
초시(初始, 8년)
6년 ~ 8년
-
추존
-
거록부군
(鉅鹿府君)

유회
(劉回)
?
?
-
-
장릉
(章陵)
추존
-
남돈군
(南頓君)

유흠
(劉欽)
?
?
-
-
장릉
(章陵)
16
세조
(世祖)
광무황제
(光武皇帝)

유수
(劉秀)
BCE 5년 1월 15일
57년 3월 29일
건무(建武, 25년 ~ 56년)
건무중원(建武中元, 56년 ~ 57년)
25년 ~ 57년
원릉
(原陵)
17
현종
(顯宗)
효명황제
(孝明皇帝)

유장
(劉莊)
28년 6월 15일
75년 9월 5일
영평(永平, 58년 ~ 75년)
57년 ~ 75년
현절릉
(顯節陵)
18
숙종
(肅宗)
효장황제
(孝章皇帝)

유달
(劉炟)
57년
88년 4월 9일
건초(建初, 76년 ~ 84년 8월)
원화(元和, 84년 8월 ~ 87년 7월
장화(章和, 87년 7월 ~ 88년)
75년 ~ 88년
경릉
(敬陵)
19
목종
(穆宗)

효화황제
(孝和皇帝)

유조
(劉肇)
79년
106년 2월 13일
영원(永元, 89년 ~ 105년 3월)
원흥(元興, 105년 3월 ~ 105년 12월)
88년 ~ 105년
순릉
(順陵)
20
-
효상황제
孝殤皇帝)

유융
(劉隆)
105년
106년 9월 21일
연평(延平, 106년)
105년 ~ 106년
강릉
(康陵)
추존
-
효덕황
(孝德皇)

유경
(劉慶)
78년
107년
-
-
감릉
(甘陵)
21
공종
(恭宗)

효안황제
(孝安皇帝)

유호
(劉祜)
94년
125년 4월 30일
영초(永初, 107년 ~ 113년)
원초(元初, 114년 ~ 120년 4월)
영녕(永寧, 120년 4월 ~ 121년 6월)
건광(建光, 121년 7월 ~ 122년 3월)
연광(延光, 122년 3월 ~ 125년)
106년 ~ 125년
공릉
(恭陵)
22
-
-
유의
(劉懿)

?
125년 12월 10일
-
125년
-
23
경종
(敬宗)

효순황제
(孝順皇帝)

유보
(劉保)
115년
144년 9월 20일
영건(永建, 126년 ~ 132년 3월)
양가(陽嘉, 132년 3월 ~ 135년)
영화(永和, 136년 ~ 141년)
한안(漢安, 141년 ~ 144년 4월)
건강(建康, 144년 4월 ~ 144년 12월)
125년 ~ 144년
헌릉
(憲陵)
24
-
효충황제
(孝沖皇帝)

유병
(劉炳)
143년 2월 26일
145년 2월 15일
영희(永憙, 145년)
144년 ~ 145년
회릉
(懷陵)
25
-
효질황제
(孝質皇帝)

유찬
(劉纘)
138년
146년 7월 26일
본초(本初, 146년)
145년 ~ 146년
정릉
(靜陵)
추존
-
효목황
(孝穆皇)

유개
(劉開)
?
131년
-
-
낙성릉
(樂成陵)
추존
-
효숭황
(孝崇皇)

유익
(劉翼)
?
?
-
-
박릉
(博陵)
26
위종
(威宗)

효환황제
(孝桓皇帝)

유지
(劉志)
132년
168년 1월 25일
건화(建和, 147년 ~ 149년)
화평(和平, 150년)
원가(元嘉, 151년 ~ 152년)
영흥(永興, 153년 ~ 154년)
영수(永壽, 155년 ~ 158년)
연희(延熹, 158년 ~ 167년)
영강(永康, 167년)
146년 ~ 167년
선릉
(宣陵)
추존
-
효원황
(孝元皇)

유숙
(劉淑)
?
?
-
-
돈릉
(敦陵)
추존
-
효인황
(孝仁皇)

유장
(劉萇)
?
?
-
-
신릉
(愼陵)
27
-
효령황제
(孝靈皇帝)

유굉
(劉宏)
156년
189년 5월 13일
건녕(建寧, 168년 ~ 172년)
희평(熹平, 172년 ~ 178년)
광화(光和, 178년 ~ 184년)
중평(中平, 184년 ~ 189년)
167년 ~ 189년
문릉
(文陵)
28
-
홍농회왕
(弘農懷王)

유변
(劉辯)
176년 9월 27일
190년 3월 6일
광희(光熹, 189년 4월 13일 ~ 189년 8월 27일)
소녕(昭寧, 189년 8월 28일 ~ 189년 8월 30일)
189년
-
29
-
효헌황제
(孝獻皇帝)
[3]
유협
(劉協)
181년
234년 4월 21일
영한(永漢, 189년 9월 1일 ~ 189년 12월)
중평(中平, 189년 12월)
초평(初平, 190년 ~ 193년)
흥평(興平, 194년 ~ 195년)
건안(建安, 196년 ~ 220년 2월)
연강(延康, 220년 3월 ~ 220년 10월)
189년 ~ 220년
선릉
(禪陵)
[1] 사기한서에는 태공(太公)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건 이름이 아니라 존칭이다.[2] 사실 선제가 올린 시호는 도황고(悼皇考)다. 그런데 황고란 말은 황제의 죽은 아버지를 의미하기 때문에, 그를 제외한 전한과 후한의 추존 황제들의 시호가 '황(皇)'으로 끝난다는 걸 생각해보면 추존 황제로서는 '도황'이라고 불러야 하는 게 맞다.[3] 촉한에서는 효민황제(孝愍皇帝)라는 시호를 올렸다.





9. 계보[편집]


풍공
영공
태상황
1. 고제
2. 혜제
5. 문제
제도혜왕
3. 소제
4. 소제
6. 경제
성양경왕

7. 무제
장사정왕
중산정왕
성양공왕

8. 소제
창읍애왕
여황
용릉절부군
유정
성양경왕

9. 폐제
도황
용릉대후
울림부군

성양경왕

10. 선제
유리
거록부군

성양혜왕

11. 원제
초효왕
유자장
남돈군

성양강왕

12. 성제
공황
중산효왕
광척양후
. 경시제
16. 광무제

식절후

13. 애제
14. 평제
유현

17. 명제

유맹

15. 유영

18. 장제

. 유분자

19. 화제
덕황
제북혜왕
천승정왕
목황



20. 상제
21. 안제
22. 소제
낙안이왕
숭황
원황
유웅


23. 순제

발해효왕
26. 환제
인황
유홍


24. 충제

25. 질제

27. 영제
30. 소열제


28. 소제
29. 헌제
31. 회제


10. 매체[편집]


중국의 역대 대작 문학을 관통하는 배경이기도 한데 전한 초기 초한쟁패기의 상황이 초한지의 배경이고 후한 말기의 상황이 삼국지연의의 초반부 배경이기도 하다. 그야말로 중국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시대.

2004년 MBC TV에서 방영된 드라마 주몽에서는 한나라의 군대가 그야말로 악의 제국으로서 가공할 군세로 묘사되는데, 이 전한 왕조의 군대가 철기병이었다고 묘사했으나, 역사적 사실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 사람과 말이 모두 갑옷을 입은 철기병은 아무리 빨리 잡아도 그 등장 시기가 후한 말기인 삼국지 시대에 의장용으로 약간 존재했던 정도고[21], 본격적으로 쓰이는 시기는 북방 유목민족들이 대거 남하하는 5호 16국 시대에 들어와서야 가능했다. 사실 전한 왕조의 진짜 군사들은 대부분 갑옷을 안 입었거나 입었어도 상체만 가리는 가벼운 정도였고, 정예 기병들도 대부분 가죽 갑옷을 입은 경기병 차림이었지 중무장 기병이 아니었다. 다만 경무장을 했다고 전한 왕조의 군대가 형편없는 전투력을 지녔다고 얕볼 수는 없는데, 경무장을 하게 되면 그만큼 병사 개개인에게 들어가는 비용이 낮아지기 때문에 더 많은 수의 병력을 편성하는 것이 가능해지며, 무엇보다 몸이 가벼워서 중무장을 한 것보다 더 빨리 움직이고 쉽게 지치지 않기 때문에 장기전에 유리하다. 흉노족에게 사로잡힌 한나라 군사들, 한나라 중무장 기병대의 돌격, 전한 왕조의 보병들


11. 여담[편집]


  • 후한의 역사를 다룬 사서인 후한서가 2018년 3월 23일, 국내에서 총 10권으로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 00년대 초반 인터넷 역사 팬덤 문화가 처음 형성되던 시절 널리 퍼졌던 VS 놀이 중 하나로 동양 vs 서양에 속하는 로마 VS 중국이 있는데, 당시에는 지금보다 역덕들이 참고할 수 있는 자료가 빈약한 문제도 있고, 구글이 활성화되기 이전으로 위키피디아도 없었기 때문에 전공자 이외에는 참고 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기도 해서, 한쪽에서 시오노 나나미로마인 이야기를 근거로 로마 우위론을 주장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이문열 삼국지를 근거로 제갈공명의 신묘한 전술로 로마 제국 군대가 박살난다고 주장하는 지금 기준으로 보면 영락없는 병림픽이 벌어졌었던 역사가 있다. 당시에는 언급되지 못하던 부분이지만 세부적으로 파고들면 두 제국은 최전성기가 미묘하게 어긋나 있어서 비교하기 힘들다.[22] 하다 못해 인구라도 차이가 나면 인구가 국력에 매우 중요한 요소라는 점을 참고할 수 있을 텐데 참으로 공교롭게도 한나라와 로마의 인구는 둘 다 5~6000만 정도라는 게 정설이라 이 부분에서도 비교가 힘들다. 문명의 수준 역시 어느 부분은 로마가, 어느 부분은 한나라가 앞서 총체적으로 비등비등, 최소한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보다 확연하게 앞서는 게 아닌지라 여기서도 비교가 힘들다. 게다가 설령 어느 한쪽이 확실하게 국력이 앞섰다고 치더라도 전쟁의 역사를 보면 명장과 졸장, 혹은 방어전이냐 공격전이냐 등의 요소 등 국력 차를 뒤집는 변수 또한 많았기 때문에 현재 역사 커뮤니티에서 이 쉬어터진 떡밥을 꺼냈다간 10명 중 9명은 비아냥과 욕설을 할 것이고 나머지 친절한 1명은 "원정 가는 놈이 진다/명장 튀어나오는 쪽이 이긴다"라고 다소 허무한 대답을 할 것이다. 다만 현재 연구로 밝혀진 1세기경 한나라의 총 GDP는 약 270억, 당시 전유럽 총합은 약 155억이다, 허나 이걸로 두 제국의 경제력을 비교하는게 무의미한게 고대 경제를 현대의 GDP로 측정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인 것은 둘째치고 로마 제국 경제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 중동과 북아프리카가 계산에 포함되지 않았다.

  • 흔히 한나라나 삼국시대의 실질적인 행정력을 나타낸 지도라고 하여 아래와 같이 그려진 지도들이 퍼지고 있으나, 사실 이런 지도는 그 근거가 매우 미약하다.
파일:후한.jpg
춘추시대까지 중원의 나라들은 도시연맹체 단계의 나라였고, 전국시대에 지방행정체계를 도입하면서 영토국가 단계로 발전해나갔다. 다만 실제로 남북조시대까지 시행된 군현제는 명목상 군·현의 경계만 설정해 놓은 것일 뿐, 실제로는 철저히 거점 중심의 통치가 이뤄졌는데,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현보다 아래에 놓인 향(鄕) 단위였고, 향을 중심으로 전지(田地)와 거주구역인 리(里)가 분포하고 그런 공간들을 잇는 도로와 각종 초소들이 설치되었으며, 그 바깥은 군현의 영역 안이라도 당시엔 '공지(空地)'라고 하여 명백하게 통치권 바깥인 공간 개념으로 인식했다. 따라서 '실질적인 행정력'이라는 개념을 갖고 지도를 그린다면 당연히 향의 분포를 기준으로 작도해야 마땅하나, 당시 향의 분포를 파악할 수 있는 객관적인 자료는 없다. 이런 지도들은 주로 서양학자들이 작도하고 있는데, 사실 전근대 동아시아 국가의 통치능력에 대한 편견을 갖고 그린 것이다. 동일한 잣대로 로마 제국의 지도를 그린다면 마찬가지로 로마법이 통용되는 도시들이나 방어 시설을 설치한 국경선 정도만 색칠을 해두고 그 밖은 철저히 '영역'에선 배제하는 것이 옳을 것이나, 그런 잣대로 지도를 그리는 경우는 없다. 비록 남북조시대 이전까지 사실상 거점 중심의 통치가 이뤄졌고 그 거점 밖에는 수많은 이민족들이 존재했지만, 엄밀하게 그 이민족들이 중원 제국과 대적하는 독립적인 세력은 아니었으며 보통은 정치적으로 종속된 상태로 유지되었다. 일부 이민족의 저항사례를 들어 그들을 독립적인 세력으로 간주하고 제국의 통치영역 밖으로 단정하는 것 또한 중국인들이 별 근거없이 마구잡이로 고대의 영역이라 우기는 역사왜곡 행태와 본원적으로 다를 것이 없다.

12. 같이 보기[편집]


[1] 신나라를 멸하고 한나라가 복벽된 후한시대가 되면서 천도했다. 장안이 왕망과 후한 교체기의 전란으로 피폐해져서 전각과 민호가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2] 반(反)동탁 연합에 대항하기 위해 동탁이 강제로 환도하였다.[3] 장안 천도 과정에서 동탁이 낙양을 파괴헸고, 삼보의 난으로 장안 역시 피폐해지면서, 협천자이령제후를 명분으로 내세운 조조가 자신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허(許)로 천도하였다.[4] 기원전 202년부터[5] 그 밖에도 1세기 말부터는 외척과 환관, 권신의 발호로 인해 실권을 가진 황제가 거의 없다.[6] 이 시대의 언어는 중고한어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있었다. 상고한어에 속하는 시대긴 하지만 후한 중국어(Eastern Han Chinese)라는 용어로 따로 분류하기도 한다.[7] 한무제 때 동중서의 "파출백가, 독존유술'로 대표되는 헌책에 따라 세계 최초로 유학을 관학으로 지정했다. 다만 이에 대해서는 많은 논쟁과 연구가 있어서 한무제 때의 일을 상징적인 조치로 보고, 실질적으로 유학이 정치, 사회, 문화, 학술 등 국가 전반에 침윤하여 영향을 발휘하게 된 것은 후한 장제 이후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는 백호통의의 성서(成書)와도 관련이 있다.[8] 후한 초기에 서역을 통해 전래되었고, 후한 후기에 중원에 유입되어 불경의 번역이 이루어졌다.[9] 신나라 15년을 빼면 전후 합해 411년.[10] 오늘날 한국과 일본에서는 전한과 후한이 일반적으로 쓰이지만 중화권에서는 서한과 동한이 일반적으로 쓰인다. 이유는 당연히 전한의 수도였던 장안은 서쪽, 후한의 수도였던 낙양은 동쪽에 있기 때문. 사실 후한(後漢)이라는 표현은 오대십국시대에 존재한 국가를 가리키는 이름이기도 해서 혼란의 여지가 있다. 그럼에도 한국과 일본에서 전•후를 쓰는 이유는 제갈량출사표 때문. 출사표에서는 명확히 전한과 후한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오대십국시대보다 출사표의 인지도가 압도적인 만큼...[11] 사실 1/4이긴 하다.[12] 전한과 후한을 통틀어 이르는 말.[13] 왕망의 신급의 정보 조작 능력이 큰 힘을 발휘했다. 왕망은 자신을 꾸미는 데 엄청난 재주를 지녔는데, 후대에는 별 생각 없이 시행되었던 선양도 왕망의 손으로 만들어졌다.[14] 그래서 난세가 되면 인구 통계의 경우 호적에 모든 인구가 잡히지 않았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이건 사람이 실제로 그만큼 죽어나간 게 아니라, 행정력의 한계에 기인한 인구 누락이다.[15] 당연히 오대십국시대의 후한이지 고대의 후한이 아니다.[16] 그렇기 때문에 한나라 이전의 통일 왕조인 진나라가 그렇게 빨리 멸망했다.[17] 다만 전한은 도가적 사상과 도교가 강세여서, 한무제가 유교를 국교화하면서도 할머니인 효문황후 두씨의 눈치를 보느라 고생을 했고, 국학이 된 다음에도 도가적 사상과 도교는 여전히 강력했다. 후한은 다르다. 광무제 유수는 태학(太學)에서 공부했던 사람으로, 유교의 세는 후한 때 훨씬 강해진다. 그런데 여담으로 광무제는 참위와 도참에 꽤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18] 역이기는 이때 봉건제를 주장하다가, 장량에게 논파당하고 유방에게 욕을 얻어 먹는다.[19] 다만 타 지역보다 일찍 중앙 집권형 제국을 이루었다는 서술은 완전히 틀린 말이다. 중동에서는 이미 아시리아 제국 시절에 막강한 중앙 집권 제도를 확립했고, 이후에도 아케메네스 왕조, 셀레우코스 제국, 우마이야 왕조, 아바스 왕조, 티무르 제국 같이 막강한 중앙 집권을 이룬 제국들이 그 뒤를 이었다. 이들의 국력은 동시대 중국과 동등하거나 강력했다. 오히려 기원전 2세기에 와서야 안정적인 중앙 집권을 이룬 중국은 빠른편이 아니나 이후 중국은 세계적으로 강력한 중앙 집권을 이룰 수 있었다. 한나라의 고도화된 중앙 집권의 예로 전국의 백성들을 상대로 실시한 인구 조사를 들수 있는데 이는 위에서 열거한 중동 제국이나 비슷한 시기의 로마에서도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20] 2000년도 더 된 유물이 이렇게 발굴된 것도 기적이라 할 수 있다. 무덤이 완전 밀봉된 구조에다가 세월이 흐른 뒤에 잊혀져 70년대에야 방공호를 짓다 발견된 것이기에 보존상태가 좋을 수밖에 없었다.[21] 가령 조조원소가 격전을 벌였던 관도대전 당시, 조조군에 중장기병이 약 2명 있었고 원소군에는 10명이 있었는데, 이 정도 숫자라면 아무리 봐도 도저히 전투용은 아니고 그저 고급 지휘관을 경호하는 식의 의장용에 불과하다고 봐야 한다.[22] 원수정 로마 제국의 최전성기인 트라야누스 시절은 한나라의 제21대 황제인 안제 시절이었고, 이미 상당 부분 침체와 쇠퇴가 진행된 상황이었다. 한편 한나라 최전성기인 한무제 시절은 로마에게는 술라의 시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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