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한국 대학생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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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대학생운동단체(NL 계열)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1987년~1993년1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1993년~2011년2
21세기한국대학생연합
2005년~2018년 해산3
한국대학생진보연합
2018년~활동중
1 :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건설 준비위원회’를 발족하기로 결의하며 자진해산
2 : 이적단체 지정
3 : 2017년 11월 17일 '한국대학생진보연합(가) 준비위원회 발족식'에 참가한 뒤 2018년 3월 10일을 기점으로 해당 단체의 성향과 인원 상당 부분이 한국대학생진보연합으로 통합, 계승되었다.#


二十一世紀韓國大學生聯合
1. 개요
2. 구성원과 관련 활동
3. 인식
4. 관련 사건, 사고
4.1. 2009년
4.1.1. 홍익대학교 민폐사건
4.1.2. 서울대 도청사건
4.1.3. 성공회대 조작 사건
4.1.4. 이화여대 재보궐선거
4.1.5. 부산대학교 선거 파투
4.2. 2011년
4.2.1. 고려대 기습 시위 참여
4.2.2. 새내기 콘서트 강행
4.2.3. 등록금 촛불집회 주도
4.3. 2012년
4.3.1. 통합진보당 폭력사태
4.3.2. 새누리당 당사 내 기습 시위
4.4. 2013년
4.4.1. 한미연합 군사훈련 반대시위
4.4.2. 국정원 규탄 시위 논란
4.5. 2014년
4.6. 2015년
4.7. 2016년
4.8. 2017년
4.9. 2018년


1. 개요[편집]


1990년대 한총련이 96년 연세대 사태 이후 분열되었고, 이후 한총련이 몰락하면서 새롭게 구성된 전국 운동권 대학생 연대조직이다. 2002년 당시 동아대 총학이 제기했던 '새 학생운동 연대체'를 필두로 준비조직이 생겼다가, 2005년에 전국적으로 조직이 새롭게 구축되었다.

한대련이 생긴 이유에 대해선 다양한 의견이 있으나, 한총련이 시대에 걸맞는 학생단체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부패하자 새로운 대학생 조직이 필요하다는 요구가 모여서 결집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총련의 후신이라는 오해도 많이 받지만, 정확히는 한총련 해체와 한대련 결정이 시차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되는 듯 하다. 법원의 판단과는 무관하게 한대련 결정으로 인한 간부층의 유출도 단체 붕괴의 원인이다. 한대련 내부에서는 학생운동의 계보로서 한총련을 인정하지, 자신들이 한총련의 후임임을 자처하지 않는다. 사실 근원 등을 살펴보면 조직 자체가 한총련의 후신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사회에서 인식이 그러니 곤란한 상황일 뿐...

학생운동의 계보로 따지면 전대협과 한총련의 후신이다. 그리고 현재 가장 큰 학생운동 단체이다. 하지만 뿌리 자체로 치면 별개의 조직이었다. 한총련 대의원제도와 관료주의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던 일부 학생회를 중심으로 2002년 동아대를 중심으로 발의하여, 2005년 결성하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2008년부터 활동이 본격화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2005년부터 2008년까지 진보정당이 여당이 지지율이 떨어짐에도 반사이익을 얻지못해 오히려 세력이 위축되던 시기로 이 시기 진보정당으로는 민주노동당, 진보신당(민노당에서 분당), 사회당이 있었다.

당시에 비슷한 정치성향으로 알려진 민주노동당도 한대련을 지지하기는 하나, 좌파 진영이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으로 갈려지고 한대련 내부에서도 갈등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약간의 파열음이 있었다. 현재 통합진보당이 합당하면서 다시 통일성을 갖추려고 하고 있다. 지역간에도 마찰이 있는 듯, 일부에서 한대련 자체를 경기동부라고 깎아내리기도 한다.[1][2]

한총련 때에 비해 덕성여대, 숙명여대 등 여대가 주류로 등장하였는데, 이는 한총련 시절의 일종의 반성이기도 하고, 지휘부가 대대적으로 바뀌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내부에서도 학생운동의 계보에 대해서 말하기는 해도, 직접적으로 한총련에 대해서 꺼려야하는 분위기가 있다. 물론 학생운동을 부정하지도 않지만, 한총련에서 이렇게 이렇게 했다는 식의 발언이 등장하면 빈축을 사기 십상이다.

운동권의 영향력이 예전같이 크지도 않고, 정작 대학생의 취업문제조차 해결하지 못한 만큼 설자리를 잃어가는 것이 아니냐는 전망도 있다. 또한 정치적 성향이 너무 강하다는 비판도 있다. 정치적 성향 때문에 정사갤 등 디시갤러리들의 놀이터이기도 한 듯 하다. # 이러한 것에 대해 한대련의 공식입장은 아직 없다.[3]

주장하는 이념이나 사상은 현실적이고 이전보다 이념에 집착하는 모습이 많이 사라지긴 했다만, 정치적 성향은 여전히 좌파 계열이다. 그렇기 때문에 보수적인 대학생 단체와 간간히 대립각을 세우기도 하는데, 연대와 연합이라는 한대련의 기존 취지와는 맞지 않을 때도 있다.[4]

단체의 정치적 성향과는 별개로 대다수의 대학생을 어떻게 학생 문제에 단일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가는 하나의 숙제이다. 사실 보수측 대학생 연합이 성장하고 있으나, 규모에서나 영향력 면에서는 아직 한참 모자라다. 학생들은 한대련의 정치적 성향을 지지하는 게 아니라, 사회적 행동을 지지하는 것이다. 실제로 자신의 정치적 스탠스와 무관하게 등록금 인하와 취업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만큼 보수 측 대학생 연합도 스스로의 방식으로 등록금이나 취업 문제를 해결해 주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스스로 그렇게 비난하던 한총련과 별로 다를 게 없을 뿐이다. 대안 없이 서로 깎아내리니 정작 문제 해결이 아니라 정치적 스탠스를 강요당한다는 것은 좌우를 막론하고 문제점이며[5], 우파 학생운동단체가 분명 학생운동 단체임에도 비정치적이다라고 주장하면서, 정작 사회 현황에 대해 그 입 다물라 식으로 일관하며 정치적 판단으로 사태를 마무리 짓는 무리수를 부리는 것도 문제점. 한대련이 대학생 문제 외에 소속 단위원들에게 다른 문제까지 지나치게 정치적 일관성을 강요하는 것도 문제점인 것이다.


2. 구성원과 관련 활동[편집]


구성원은 크게 두가지형태로 나뉘어져있다.

  • 민주노동당에서 진보신당이 분리되기 전인 2000년대 초기 한총련에는 민주노동당에 참여했던 혁신개혁파.

  • 민주노동당을 지지하지 않았던 비선 계열파.

주류에 속하는 것은 혁신개혁파로 비선계열파벌이 내포한 정치적인 모순으로 한총련이 붕괴된 것에 기인한다.

전국에서 대략 80여개의 대학이 한대련과 연대하고 있으며 2008년의 광우병 파동과 반정권 투쟁, 2011년 대학생 등록금 반값 요구 촛불집회 등에서 연대투쟁을 전개한 바 있다.

한국진보연대와도 관련이 깊은데, 한총련이 차지하던 진보연대 대학생 대표 자리를 한대련에서 자연스럽게 물려받았다. 또한 각종 행사나 시위에서도 쉽게 연대하는 듯.

2012년 각 대학교 총학생회나 단과대학교에 후마니타스라는 연대가 등장하는데, 이 후마니타스가 사실상 한대련 쪽과 연관이 깊은 하위 단체라는 의견도 등장하고 있다. 또한 청춘의 지성, 역동(역사동아리), 쏘셜메이커(진보적사회토론동아리)[6] 등 자체적인 동아리도 만들어 활동하는 듯. 다만 이 경우 한대련 색을 어느 정도 희석시켜 일반 학생들의 유입도 잦은 편이다.


3. 인식[편집]


한대련은 태생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다. 과격했던 한총련 지도부가 무더기로 구속되고 한총련 내부의 관료화된 현실에 반감을 느끼던 PD계열과 NL 혁신계열을 중심으로 재정리된 단체이다. 이 때문에 족보따지기로 유명한 대한민국인 이상 장기적인 이미지 관리가 필요할 것이다.

또한 기존 한총련 세력과 합류하는 과정에서 한총련과 관련된 이적(종북) 단체의 영향이 남아 있을것이라 판단하는 국정원, 경찰, 검찰 등에서 항상 예의주시하고 있다.

2010년 초, 대북관계가 험악해진 시기엔 알게모르게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불구속이나 구속으로 기소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이와 별개로 일반 대학생들의 인식은 그거 먹는 건가요. 2010년대를 지나며 대학생들 사이에 개인주의가 완벽히 자리잡아 이러한 학생운동에는 관심이 사라지고 각자의 관심사에만 몰두하는데다 취업난으로 스펙 쌓기에 열중하다 보니 학생회나 관련활동을 하는 사람이 아니면 모르는 경우가 부지기수. 일부 아는 사람도 별로 한 것도 없으면서, 학생의 이름을 걸고 대학생 전체의 의견인양 정치적 발언을 하는 것이 불쾌하다는 경우가 많다.

4. 관련 사건, 사고[편집]



4.1. 2009년[편집]



4.1.1. 홍익대학교 민폐사건[편집]


2009년 8월, 8.15기념 학생행사를 홍익대학교 서울캠퍼스에서 주최하면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가장 큰 문제는, 한대련에 속한 지방대학교 학생들을 대책없이 버스로 실어날라 홍익대학교 교내에 뿌려(?)놓고는 나몰라라 했던 것. 결국 많은 지방 학생들이 캠퍼스 길바닥에 드러누워 자는 대참사가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재학생들과의 마찰과 학교기물 유실 및 손실이 잇따랐다변기 뚜껑은 왜 떼가십니까

더해서, 밤새워 시위를 하면서 소음발생 및 학교 기물, 교직원 차량을 주차장에서 맨손으로 끌어내어(!) 바리케이트로 쓰는 등 상당히 민폐를 끼쳤다.

이 사건은 '서울 내 운동권의 마지막 메카'라고 불렸던 홍익대학교에서 운동권에 대한 비판적 여론을 높아지게 하였고, 결국 2010년 학생회 선거에서 운동권 실각 및 비운동권이 당선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7]


4.1.2. 서울대 도청사건[편집]


2009년 11월에는 서울대 선관위가 투표함 조작, 투표함 사전개봉 등의 부정선거를 저질러 투표 자체가 무효화 되기도 했는데, 여기서 해당 사실을 공개한 비권 선관위와 라이벌이자 한대련 계열이기도 한 선본이 도청을 했다는 사실이 거론, 누가누가 더 잘못했나 병림픽이 벌어지기도 했다.


4.1.3. 성공회대 조작 사건[편집]


2009년 성공회대학교에 들어선 운동권(경기동부연합) 총학은 한대련에 가입하기 위해 2009년 10월 전교생을 대상으로 총투표를 진행했다. 그러나 투표 결과 투표자 수가 전체 재학생 50%에 약간 못미치자 찬반 각 25표씩 50표를 투표함에 집어넣고, 이에 맞춰 선거인명부를 조작하는 부정선거를 저질렀고[8] 투표라 결과는 당연히 한대련 가입 가결. 그러나 총투표 선거 실무에 참여한 학생었던 당시한 총학 임원이 한대련 가입 총투표를 09년 부총이자 당시 선본장이 조작했다는 양심고백을 해서 제대로 흑역사가 됐다. 링크

학생사회에서는 사죄문과 토론회 등이 이어졌지만 이와 관련된 사람들은 결정된 징계를 제대로 받지 않았다.

이걸 주도했던 부총학이었던 김무곤은 군대를 가고, 총학은 이 사건의 유탄을 맞았다고 봐야 할지 말아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어쨌거나 이 사건 이후 정당하게 지출이 증빙되지 않은 300만 원대의 총학생회비 사용 내역이 문제가 되어 비판을 받았다. 그해 11월 총학생회 선거에 부총학생회장과 함께 특정 선본을 지원하는 등 선거 부정을 저질렀다는 비판을 받았으며, 이듬해 재선거에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해결하겠다'는 명분으로 재출마했으나 총학선거 보이콧 운동이 일어나고, 총학생회장 개인의 소속 학과에서도 학과 표 분산을 목적으로 후보가 출마하는 등 난리가 났으며 보이콧 운동이 성과를 거둬 선거 자체가 30%대 투표율로 무산되었다. 당시 총학생회장은 통합진보당 김재연 의원 보좌관으로 일하게 되었으나 통진당 해산으로 짤렸다.

4.1.4. 이화여대 재보궐선거[편집]


2009년 10월, 이화여대에서는 선관위가 경고 누적을 이유로 한대련에 가입된 선본의 선거 참여를 제한시키면서 선관위 무효 시위를 벌이기도 하였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닥치고 한총련냄새나는 년들은 꺼져"라는 이화여대 선관위의 행동은 여기저기 까인 후, 이화여대 여학생들에게도 버림 받아 선거는 지정 투표율 미달로 무산되고, 한대련 선본은 3개월 후 보궐 선거에서 당선됐다.


4.1.5. 부산대학교 선거 파투[편집]


2009년 부산대학교에서는 선관위장이자 09년 총학생회장이며 09년 한대련 의장소속인 사람이 장기집권을 위해 휴학생을 후보에 올린다.

한달 동안 공들여 선거운동을 하고, 사전 조사 지지율도 꽤 높아 사실상 당선이 확정되었었는데 선거 하루전날 이 소식이 알려져 후보는 사퇴하고 선거는 파투가 나 2010년 3월로 선거가 연기된다.

2010년 3월 새로이 이루어진 선거는 한대련후보와 비운동권후보가 각각 한 팀씩 입후보하였으며 개표결과 한대련 후보가 당선되었다.


4.2. 2011년[편집]



4.2.1. 고려대 기습 시위 참여[편집]


고려대학교의 2011년 후마니타스 총학은 연평도 사태 직후의 한미 합동훈련 때는 청와대에서 기습 1인 반전 시위[9]를 벌였으며 한대련 의장직을 맡겠다는 발언을 하였으나 이는 고려대 임시 전학대회에 의해 부결되었다. 누구 맘대로 고대생 전체 이름을 빌려


4.2.2. 새내기 콘서트 강행[편집]


2011년 3월 한대련이 주최하는 '새내기콘서트'가 고려대학교 중앙광장에서 열리게 되었는데, 이는 단과대 대표자회의에서 분명히 부결된 사항이다. 그러니까 누구맘대로

그러나 후마니타스[10] 총학에서는 일사부재의의 원칙을 씹어먹고 분명히 부결된 사안을 세 번이나 재논의해서 결국 콘서트를 강행하게 되었다.

따라서 일부 단과대 학생회장들이 강하게 반발했다. 참고로 고려대학교 중앙광장은 내부에 지하공간이 넓고 지반이 약한 것으로 조사되어 '새내기 콘서트'와 같은 많은 인원이 모이는 행사, 그것도 심지어 고려대학교가 아닌 다른 단체[11]가 여는 것은 큰 문제임에 틀림없다. 게다가 중앙광장 지하에는 열람실이 있기도 하다. 실제 고려대학교에서 중앙광장을 활용하는 행사는 일반적으로 입학식, 4.18 마라톤, 고연전 정도 뿐이다. 학교에서는 셔틀버스를 동원해서 중앙광장을 밤새 점거, 결국 행사는 민주광장에서 열리게 되었다. 일이 일단락 된 이후에도 공개적인 사과를 단 한마다도 하지 않았고, 오로지 목표(반값 등록금)에만 신경을 썼으니...

또한 이 사건을 이유로 총학생회를 찾아간 학생들에게, 총학생회 간부가 아닌 어느 학교 학생인지조차 불분명한 인물이 욕설을 퍼부어 파문이 일기도 했다.

결국 이 일로 인해 이듬해 새로 당선된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에서는 한대련 탈퇴를 투표로 결정하여 결국 한대련 탈퇴를 이루어내게 된다. 당시 토론 영상 영상의 발언자는 나이스게임TV의 짱세(...)


4.2.3. 등록금 촛불집회 주도[편집]


2011 대학생 등록금 반값 요구 촛불집회 참조


4.3. 2012년[편집]



4.3.1. 통합진보당 폭력사태[편집]


통합진보당 폭력사태에서 앞장 선 사람들이 한대련 소속 대학생들로 밝혀졌다.

2012년 5월 12일에 발생한 통합진보당 폭력사태 당시에 고성을 지르며 단상 난입을 시도한 이들은 수도권과 광주∙전남 지역 청년위원회 소속 당원들과 한대련 소속의 학생 당원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단상 점거에 나선 돌격대원은 대부분 앳된 20대 대학생 당원들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날 회의장엔 경희대 국제캠퍼스 출신의 정용필 한대련 의장과 한대련 집행위원장 출신인 김재연 당선자도 참석한 것이 확인되었다. 전선 지휘??

보도에 따르면 비례대표 부정 경선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이석기 당선자가 운영하는 CNP 전략그룹이 한대련 소속 총학생회의 선거 등을 지휘하면서 인연을 맺은 것이라고 한다.

한대련 대학생·청년委 당원이 난투극 주도
노조조끼 입은 동부연합 ‘난입·폭력’, 한대련 학생들은 ‘구호·욕설’

그리고 이번 폭력사태에는 10대 고등학생들도 있었다고 하는데 이게 사실이라면 한국판 홍위병 진보당 난투극 선봉에 나선 10대 남녀들의 정체는? 이 사태에 대해 한대련 내부에서도 곤혹스러워 하고있는 분위기다. 실제로 경기동부 활동가들의 청소년 자녀들로 구성된 21세기 청소년공동체 희망 소속 활동가들이 통합진보당 폭력사태 당시 다시 현장에 있었다. 이 중 일부는 폭력사태를 '당원항거'로 여기며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4.3.2. 새누리당 당사 내 기습 시위[편집]


2012년 12월 2일 1시에 여의도 새누리당 당사에 36명이 난입해 기자회견실을 점거하고 박근혜 후보 사퇴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은 빨간 넥타이등으로 박근혜 후보 지지자인것처럼,혹은 수습기자로 위장하여 당사에 들어갔다.이들은 전원 연행되었으며 양천경찰서등 5개 경찰서에서 수사를 받았다.


4.4. 2013년[편집]



4.4.1. 한미연합 군사훈련 반대시위[편집]


2013년 3월 10일에 북한을 자극하지 말라는 명분으로 이 시위를 전개하였다. 물론 전쟁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되지만, 한대련의 주장처럼 대책없이 훈련을 중지하고 북한에 명분상으로 끌려가는 것은 향후 더욱 큰 문제를 발생시킬 여지가 있다. 더불어 이런류의 반대는 남한과 미국측의 훈련'만' 반대하고 정작 북한이 대남도발 등으로 먼저 남한과 미국을 자극하고 있다는 사실은 언급하지 않아 형평성에도 어긋난다.


4.4.2. 국정원 규탄 시위 논란[편집]


2013년 6월 21일 낮에 '반값등록금을 외치던 학생을 종북으로 몰고, 선거에 개입한 국정원을 해체하라' 는 기자회견을 열다 광화문 사거리로 나가 기습시위를 벌였다.[12] 이로 인해 한대련 29명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표창원은 불법 폭력을 사용해 시위를 하는 것은 정당성이 없고 시민 참여 의지도 꺾는다" 라고 전하며 "나쁜 권력과 나쁜 정당이 못 배운 것이 바로 절차적 정의이며 불법폭력 시위는 나쁜 권력과 같은 민주적인 방식" 이라고 과감히 쓴소리했다.#

야권 성향의 사이트에서도 한대련이 일부러 관심받으려 미신고집회를 연것이 아닌가 논란이되었다. 한대련은 22일 부터는 사전신고한 합법적인 집회를 개최하였다. 집회에는 시민들도 참여하였으나 22일 저녁집회를 해산하며 행진을 벌이려고 하여 신고되지 않은 사항이라서 경찰이 제지하여 또 말썽을 빚었다.

각 대학들 총학이나 학생회에서는 아직 시국선언 및 규탄성명 발표후 후속행동방식에 대한 결정을 못내리고 의견수렴단계에 있있거나 후속행동을 하지 않고 있는데 만약 촛불집회가 대규모로 이어질 경우 주도권을 잡기 위한 한대련의 기선제압용 선제행동이 아니었는가 하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거나[13] 한대련이 주도해서 촛불집회를 하고 거리행진을 시도하면서 경찰과 충돌을 야기하는것을 두고 경찰의 강경대응을 초창기부터 유도하여[14] 시위의 주도권을 쥠과 동시에 일반인들의 참가를 막기 위한 힘빼기로써 시위가 대규모로 커지는것을 방지하기 위한 역공작이 아니냐는등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

6월 23일 진행된 집회서 또 한번 경찰과의 마찰이 있었다. 집회가 끝난 후 미리 신고되지 않은 행진을 시도하다가 경찰의 최루가스에 의해 제지당한것. 점점 경찰의 진압수위가 높아짐에도 한대련 측에서는 집회신고내용중 야간 거리행진이 포함되어있으면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23일 이후에도 계속 미신고된 거리행진을 강행하여 경찰측과 거칠게 충돌을 했다. 시민단체의 야간 집회의 경우 문화제로 열면 신고 없이 가능하지만, 신고를 하고 집회를 개최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한대련의 행위는 문제가 있다.


4.5. 2014년[편집]


세월호 추모 관련 집회


4.6. 2015년[편집]


민중총궐기
항목참조


4.7. 2016년[편집]


박근혜 게이트/관련집회

이화여자대학교 미래라이프대학 신설 반대 시위 사건 - 한대련이 좋다고 나설 사건같지만 일반 학생들의 지지를 못 얻어내며, 한대련 및 민중연합당 없이 자체적인 시위로 3달만에 최경희 총장의 사퇴를 이끌어냈다.


4.8. 2017년[편집]


박근혜 게이트/관련집회

대선에서는 민주민생평화통일주권연대와 함께 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 비판적 지지를 선언했다.

파일:external/img3.daumcdn.net/20170623133717578ddoi.jpg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뒤인 6월 23일에는 자유한국당 당사 앞에서 규탄 시위를 벌였다.

7월에도 자유한국당 해체 시위를 이어가고 있으며, 이외에도 사드 반대 집회에 참여하거나 국민의당 제보 조작 사건 규탄 집회를 주최하기도 하였다.

11월에는 도널드 트럼프 방한반대 집회를 하였다. 당연히 정치성향 불문하고 실시간으로 큰 비판을 받았다.


4.9. 2018년[편집]


평창 올림픽과 남북 정상회담, 북미정상회담 관련 시위 집회.

전우용 한국학중앙연구원 객원교수는 이들이 끌려가는 사진을 올리며 "옛날에 이런 장면이 흔했는데 현재 이 사진을 보니 아직도 벌어지는 것은 청산되지 않은 과거는 계속 현재이다.며 이승만, 박정희는 아직 현재인물이다." 라는 주장을 펼치며 이들(대학생)을 옹호하였다.
[1] 이 문장이 작성된 후에 변희재와 진중권이 말한 그 경기동부가 맞다. 학생운동권의 주류 역시도 대부분 (구) 경기동부연합에 속한다. 특히나 한총련 당시의 주류였던 서울연합은 한총련 해체 이후 세력이 거의 해체되다시피 하였다. 이 이후 학생운동의 주류로 부상한 것이 경기동부이다. 사실 이때 서울연합이 해체된 이후, 한총련의 주류 세력이었던 SKY세력도 같이 몰락했다.[2] 다만 초창기엔 구 경기동부 계열이 아닌 부산-동아대-홍익대를 중심으로 한 NL 혁신이 한대련의 주류를 이루고있었다. 하지만 2008~09년도부터 세가 점차 축소되어나가더니 2010년대 들면서 구 경기동부계가 주류자리를 넘겨주고 이로써 비주류 NL혁신은 비주류로 전락하고 만다.[3] 정확히 간부마다 대응 방법이 달라, 구체적으로 서술하기 곤란하다. 카더라 통신은 생략[4] 사실 이를 행하려면 웬만한 대인배가 아니고서는 곤란하다.[5] 우파 대학생연합도 분명한 학생운동 단체이다.[6] 정확히는 청춘의 지성이라는 단체 산하에 역동, 쏘셜메이커가 속해 있다. 전국구 연합 동아리 형태.[7] 그러나 2010년 학생회 선거에서도 각종 문제가 잇따랐다. 홍익대학교 항목 참조.[8] 의심을 피하기 위해 투표함을 흔들기까지 했다.[9] 개인의 정치적 의견을 개진하는 것은 물론 자유다. 하지만 민족고대 총학생회의 이름을 빌린 것이 큰 문제.[10] 여담으로 2011년 서울대 총학생회 선거에 출마한 동명의 선본이 있다. (총학생회 선거는 투표율 미달로 무산되었다.) 이 선본의 정후보였던 학생은 급진통일운동 성향으로 서울대 학내에 김정일 분향소를 설치하려고 시도해 물의를 빚기도 했다.[11] 후마니타스 총학 입장에서는 한대련을 '우리 동지'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12] 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0296[13] 실제 시국선언및 규탄성명서발표를 가장 먼저한 서울대 총학생회는 운동권이 아닌 비운동권이고, (한대련은 서울대가 성명서를 발표 한지 몇시간이 되어서 규탄 성명서를 발표했다.) 규탄 성명밑 시국선언을 한 대학 총학도 다수가 한대련 소속은 아니며 상당수가 비운동권이다. 그러니까 시국선언 및 규탄성명서 주도권을 한대련이 쥐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14] 실제 2008년 촛불집회다함께가 이런식의 행동을 하는 바람에 시위에 참여하는 시민들이 줄어들어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 사이에선 다함께의 평판이 크게 나빠진바 있다. 근데 한대련에서 왜인지 반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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