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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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숙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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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국회휘장(9대-19대).svg 대한민국 국회의원 (경기 고양시 일산구 갑)
제16대
정범구

제17대
한명숙


제18대
백성운





대한민국 제37대 국무총리
한명숙
韓明淑 | Han Myeong-sook[1]


파일:한명숙 전 총리.png

출생
1944년 3월 24일 (80세)
평안남도 평양부 (現 평양시)
본관
청주 한씨
재임기간
초대 여성부 장관
2001년 1월 29일 ~ 2003년 2월 26일
제8대 환경부 장관
2003년 2월 27일 ~ 2004년 2월 16일
제37대 국무총리
2006년 4월 20일 ~ 2007년 3월 7일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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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박성준(1940년 ~ 83세)[1]
자녀
아들 박현길(1985년 ~ 38세)
학력
서울영등포국민학교[2]
정신여자중학교 (졸업)
정신여자고등학교 (졸업 / 50회)
이화여자대학교 문리대학 (불어불문학 / 학사)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신학 / 석사)
이화여자대학교 인문사회대학원 (여성학 / 석사)
오차노미즈여자대학 대학원 (여성학 / 중퇴)
종교
기독교 (개신교, 한국기독교장로회)
혈액형
B형
소속 정당

의원 선수
3
의원 대수
16, 17, 19
경력
참여연대 공동대표
제16대 국회의원 (전국구 5번 / 새천년민주당)
제17대 국회의원 (경기 고양시 일산구 갑 / 열린우리당)
제19대 국회의원 (비례대표 15번 / 민주통합당)
초대 여성부 장관 (국민의 정부)
제8대 환경부 장관 (참여정부)
제37대 국무총리 (참여정부)
당혁신위원회 위원장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이사장
민주통합당 대표최고위원

1. 개요
2. 생애
2.1. 페미니즘 운동
2.2. 정계 활동
2.4. 출소 후
3. 여담
4. 소속 정당
5. 선거 이력
6.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제37대 국무총리.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이자 현재까지 유일한 여성 총리다.


2. 생애[편집]


1944년 4월 16일(음력 3월 24일) 평안남도 평양시에서 출생했다. 6.25 전쟁 때 부모를 따라 월남해 서울에서 자랐다. 정신여자중학교, 정신여자고등학교를 거쳐 이화여자대학교 불문과를 졸업했다.

1967년 박성준과 결혼했지만, 남편은 소위 통혁당 사건 때문에 바로 감옥으로 끌려갔다. 10여 년 동안 옥바라지를 하며, 1977년 한신대학교에서 신학석사를 받은 뒤 한신대 강사가 되었다. 민주화 및 재야 여성운동가로도 활동하다 1979년 크리스찬 아카데미 사건으로 광주교도소에 투옥됐다가 2년 6개월여 만에 광복절 특사로 풀려났다. 같은 해 남편도 크리스마스 특사로 출소했고, 두 사람 사이에서 1985년 아들이 태어났다.[2]

엄마가 된 한명숙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여성학 석사학위도 받는 등, 가사와 학업을 병행했다. 이후 남편은 일본 릿쿄대학에서, 한명숙은 오차노미즈여자대학에서 박사 논문을 준비하다 중단하고, 부부가 함께 미국 유니온 신학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한명숙은 유니온 신학대학에서 객원연구원 자격을 받았다.


2.1. 페미니즘 운동[편집]


호주제 폐지, 군가산점 폐지, 여성쿼터제 도입, 출산-육아 휴가제, 성매매특별법 제정, 부모 성 함께 쓰기, 여성부 창설 등에 참여했다. 1989년부터 5년간 한국여성민우회 회장이었다. 한국여성단체연합 공동대표를 역임했다. 2000년 전국여성대회에도 참석하는 등 여성부 신설에 힘을 보탰고 2011년 당개혁특별위원회 때 유승희 전국여성위원장을 통해 당시 여성 공천 15% 의무화 실시에도 큰 역할을 한 것으로 관측되며, 2015년 12월 당적을 스스로 던질 때까지도 새정치민주연합 내 전국여성위원회를 통해 간접적으로 당내 여성 운동을 주도했다.

이미경 전 의원, 유승희 전 의원, 서영교 의원 등과 조현옥 전 청와대 인사수석이 그녀의 인맥이다. 또한 국회의원 시절부터 보좌관으로 국무총리 때도 의전비서관을 역임한 조한기(현재 충남개발공사 감사)도 한명숙 계로 분류된다.[3]


2.2. 정계 활동[편집]


1999년 김대중 당시 대통령의 권유로 정치에 입문했다. 이듬해 새천년민주당의 비례대표 국회의원직을 시작으로, 이듬해 신설된 초대 여성부장관을 역임했다. 국민의 정부의 주요 업적 중 하나인 호주제 폐지 및 여성쿼터제 역시 한명숙의 주도로 이뤄진 것이며, 모성보호법 차원으로 생긴 출산휴가, 최대 5년간 여성들이 사용할 수 있는 육아휴직 등이 이때 생겨난 것이다.

2003년 노무현 정부 출범 후 환경부장관이 됐다.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땐 지역구 도전에 나서 고양시 일산구 갑 선거구에서 당선되어 국회에 재입성했다.[4] 경륜은 물론 여성으로서 갖는 상징성 덕분에 국무총리 물망에 오르내렸고, 이해찬에 이어 총리가 되면서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 여성 국무총리라는 기록을 세웠다.[5]

국무총리 재직 시절 온화한 성품과 합리적인 조정 능력으로 국정을 안정적으로 이끌었다고 평가받았다. 그러나 KTX 승무원 집단 해고 문제와 캠프 험프리스 건설 과정에서 벌어진 대추리 강제 진압 등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지적도 있다. 1년 간의 총리 직을 마치고 퇴임 후, 암울했던 당에 복귀해 2007년 말 대선주자 레이스에 뛰어들었다. 고건 전 총리의 불출마 선언 이후 혼돈에 빠진 경선 레이스에서 이해찬과 후보 단일화를 선언하고 양보했지만, 정작 이해찬은 경선 3위로 떨어졌고 이해찬과 손학규를 꺾고 본선 후보로 나선 정동영이명박에게 압도적으로 패배했다.

2008년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 대통합민주신당은 대선 과정의 당내 잡음 및 패배 후유증으로 친노와 비노로 갈라졌고, 이해찬유시민이 한명숙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탈당하기에 이르렀다. 당에 남은 한명숙은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같은 지역구를 공천받았으나 낙선했다. 초반 여론 조사로는 무명에 가까운 한나라당 백성운 후보[6]에 10% 가량 앞서며 분위기가 좋았다. 그러나 불과 투표 사흘 전 캠프 소속 선거운동원이 지역 대표들에게 밥을 산 것이 드러나 불구속 입건됐고 결과는 3.3%차의 패배. 설상가상으로 2차례의 정치자금수수 혐의로 2009년 기소되면서 수년간 곤혹을 치뤘다. 지리한 법정 공방 끝에 대한통운 건은 무죄를 받았으나, 한신건영 건은 유죄 판결이 확정돼 실형이 선고됐다. 자세한 과정은 후술된 내용 참고

2010년 대한통운 정치자금수수 혐의에서 벗어난 뒤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민주당 경선(100% 여론조사 방식)에서 동작구 을 17대 국회의원 출신인 이계안 후보를 누르고 서울특별시장 후보에 선출됐다. 그렇지만 한나라당 오세훈 후보의 압승이 될 것으로 예측됐고 더구나 3월 천안함 피격사건이 터져 언론 보도와 여론은 야당인 민주당에게 불리했다. 선거 2주 전 여론 조사로도 적게는 11.9%포인트(조선일보), 많게는 22.8%포인트(중앙일보) 오세훈의 리드였다. 그렇지만 서울만은 광우병 논란, 용산 참사 등으로 이명박 정부에 대한 반감이 있었고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동정 및 향수가 있어 한명숙이 해볼 여지가 없지는 않았다. 그런데 투표 당일이 되자 자체 조사상 한명숙의 근소한 역전이 점쳐졌다. 서울시청 앞에서 지지자들과 최초의 여성 광역단체장이 되고 수부도시인 서울을 탈환하는 승리 예감을 만끽할 정도였다. 그러나 강북에서 근소하게 앞서서 부진한데다, 결정적으로 막판 강남 3구의 오세훈 지지표에 덜미를 잡혀 다시금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7]. 불과 0.6%p 차의 석패였다. 그리고 12년 후 더 큰 무대에서 역사는 되풀이되었다.[8] 그리고 그 대선에서 정확히 3개월 뒤 옆 동네인 경기도에서 이보다 더 한 초접전으로 경기도지사가 갈렸다.[9]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 한명숙은 민주통합당 대표최고위원[10]으로서 선거를 지휘했고 본인 역시 비례대표로 출마했다. 그러나 통합진보당에게 질질끌려다닌 야권 단일화, 여성 15% 할당 공천 강행 과정에서 당내 갈등, 임종석 사무총장 내정 문제, 비례대표 공천 문제, 김용민 후보 막말 파문 등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했으며, 이명박 정부에 불리한 여론 결과가 이어졌음에도 민주통합당이 새누리당에게 단독 과반을 내주고 완패하자 모든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정치자금법 위반죄로 실형을 산 것에는 판결이 과하다 정당하다를 놓고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갑론을박이 많이 일어난다. 하지만 이때 당시 총선의 대 참패는 모두가 무능하다고 까고 있다.[11] 오죽하면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인해 실형 판결을 받은 것보다 정권 교체가 가까워진 19대 총선 때 보인 무능함이 더 용서가 안 된다고 할 정도이다.


2.3. 불법정치자금 수수 사건[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한명숙 불법정치자금 수수 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015년 8월 20일 최종 확정 판결로 19대 국회의원직을 상실하였다. 8월 24일 구치소에 수감되었다. 12월 11일,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에게서 당적 정리를 요구 받았고, 본인도 이것을 받아들여 탈당해 무소속 신분이 되었다.


2.4. 출소 후[편집]


2017년 8월 23일, 징역 2년을 마치고 만기출소했다.

출소 후에는 이희호 여사 장례식#, 노무현 전 대통령 10주기 추도식#, 노무현시민센터 기공식# 등의 추도식 등의 행사를 제외하곤 별다른 정치적인 행보라든지, 정당 입당 등의 활동은 보여지지 않는 모습이다.
2020년 5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 11주기 추도식에서는 자신은 결백하다며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입장을 밝히겠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추징금 8억 8천만원이 선고되었는데 7억 정도를 여전히 미납하고 있다. 법무부에서는 추징금 미납자를 사면에서 제외하고 있어 사면 대상에 포함될 수 없다[12]는 법조계의 지적이 있다.#

고양시에서 열린 2021 DMZ 포럼에서 이해찬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 이재명 경기도지사, 문정인 전 통일외교안보특별보좌관,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 등과 함께 참석했다

대법관 전원 유죄 판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결백을 주장하며 자서전 출판을 위한 모금을 시작했다. 모금액이 5일 목표 1000만원의 3배인 3000만원을 넘어섰다. 검찰은 한 전 총리가 불법 정치자금 수수죄 확정판결과 관련한 추징금 7억여원을 미납한 만큼 모금액을 압류할 수 있을지 검토하고 있다. #

그 후, 2021년 12월 24일 박근혜 전 대통령의 사면과 함께 복권되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문재인 대통령이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해 사면복권 조치를 동시에 행한 것에 비해 한명숙 전 총리에 대해서는 사면은 하지 않고 복권만 시켰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이미 기술한 바와 같이 당시 한명숙 전 총리가 추징금을 미납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특별사면을 받아도 추징금은 내야 한다는 대법원 판결도 나와 있는 상태였다.# 한명숙 전 총리는 경제적 어려움으로 추징금을 낼 수 없는 상태로 알려져 있고, 한편으로는 자신의 억울한 재판에 대한 저항의 의미도 있다는 평가가 있다.

한편 박근혜 전 대통령 사면복권 당시 이명박 전 대통령은 58억 상당의 추징금과 82억의 벌금이 있었고 문재인정부 특사 대상에서 아예 제외된 상태였기에 한명숙 총리만 예외적으로 추징금을 면제해 주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는 판단도 있었을 것이다.정권 교체 후 이명박 대통령은 추징금을 완납했지만 거액의 벌금은 윤석열 대통령의 특별사면으로 완전히 면제되었다. 윤석열 대통령의 사면권 남용에 대한 비판#이 있는 가운데, 한명숙 전 총리는 윤석열 정부 특사 명단에서 계속 제외되고 있는데, 어차피 추징금 완납 없이는 '사면' 자체가 불가능하다.


3. 여담[편집]



  • '친노/친문의 대모'로 불리며 문재인대통령, 이해찬더불어민주당 대표, 유시민보건복지부장관과 함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적통을 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13]

  • 첫 여성 총리, 대선 후보 도전, 서울시장 여성 후보 중 최소 표차인 0.6%p차의 석패, 제1야당 대표 등의 굵직한 이력을 남겼다.

  • 21세기에 활동한 여성 정치인 중에서는 박근혜 전 대통령 다음가는 화려한 커리어를 지닌 인물이다.

  • 과거 여러 커뮤니티 등지에선 한명숙과 접촉한 사람마다 정치 행보가 꼬이거나 불행을 겪는다고 해서 '한명숙청'이라는 밈으로 불리기도 했다. 흡사 '독재자 킬러'라 불렸던 미국의 전 대통령 지미 카터와 비슷한 원리의 밈이었다.[14] 그러나 한명숙이 정치 일선에서 퇴출된 이후로는 크게 쓰이진 않는다.


4. 소속 정당[편집]


소속
기간
비고

[[새정치국민회의|
파일:새정치국민회의 흰색 로고타입.svg
]]

1999 - 2000
정계 입문

[[새천년민주당|
파일:새천년민주당 흰색 로고타입.svg
]]

2000 - 2003
합당[15]

[[무소속|
무소속
]]

2003
탈당[16]

[[열린우리당|
파일:열린우리당 로고타입.svg
]]

2003 - 2007
창당

[[대통합민주신당|
파일:대통합민주신당 흰색 로고타입.svg
]]

2007 - 2008
합당[17]

[[통합민주당(2008년)|
파일:통합민주당(2008년) 흰색 로고타입.svg
]]

2008
당명 변경

[[민주당(2008년)|
파일:민주당(2008년) 흰색 로고타입.svg
]]

2008 - 2011
창당

[[민주통합당|
파일:민주통합당 연두 로고타입.svg
]]

2011 - 2013
합당[18]

[[민주당(2013년)|
파일:민주당(2013년) 흰색 로고타입.svg
]]

2013 - 2014
당명 변경

[[새정치민주연합|
파일:새정치민주연합 흰색 로고타입.svg
]]

2014 - 2015
합당[19]

[[무소속|
무소속
]]

2015 - 현재
탈당[20]
정계 은퇴


5.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구
선거 종류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새천년민주당|
파일:새천년민주당 흰색 로고타입.svg
]]

6,780,625 (35.90%)
당선 (5번)
초선[21]
2004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고양 일산 갑

[[열린우리당|
파일:열린우리당 로고타입.svg
]]

48,286 (49.00%)
당선 (1위)
재선
2008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고양 일산동구

[[통합민주당(2008년)|
파일:통합민주당(2008년) 흰색 로고타입.svg
]]

37,902 (43.83%)
낙선 (2위)

2010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서울특별시장

[[민주당(2008년)|
파일:민주당(2008년) 흰색 로고타입.svg
]]

2,059,715 (46.83%)

2012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비례대표

[[민주통합당|
파일:민주통합당 연두 로고타입.svg
]]

7,777,123 (36.45%)
당선 (15번)
3선[22]



6.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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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위
명단
재정경제부장관 →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장관
이규성강봉균이헌재진념전윤철
교육인적자원부장관 →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장관
이해찬김덕중문용린송자이돈희한완상이상주
통일부장관
강인덕임동원박재규임동원홍순영정세현
외교통상부장관
박정수홍순영이정빈한승수최성홍
법무부장관
박상천김태정김정길안동수최경원송정호김정길심상명
국방부장관
천용택조성태김동신이준
행정자치부장관
김정길김기재최인기이근식
과학기술부장관
강창희서정욱김영환채영복
문화관광부장관
신낙균박지원김한길남궁진김성재
농림부장관
김성훈한갑수김동태
산업자원부장관
박태영정덕구김영호신국환장재식신국환
정보통신부장관
배순훈남궁석안병엽양승택이상철
보건복지부장관
주양자김모임차흥봉최선정김원길이태복김성호
환경부장관
최재욱손숙김명자
노동부장관
이기호이상룡최선정김호진유용태방용석
여성부장관
한명숙
건설교통부장관
이정무이건춘김윤기오장섭김용채안정남임인택
해양수산부장관
김선길정상천이항규노무현정우택유삼남김호식
기획예산처장관
진념전윤철장승우










[1] 한때는 부모 성 함께 쓰기 운동을 할 때는 성을 어머니의 성과 아버지의 성을 같이 사용했다. 그리고 성을 부모님 성을 사용했을 때는 이름이 한이명숙이었다. 그러나 친한 지인들과 있을 때를 빼면 공적인 자리에서는 한이명숙이라는 이름을 거의 쓰지 않았다.[2] 결혼 후 18년 만에 얻은 아들이다. 때문에 부모와의 나이차도 40세 이상으로 큰 편이다.[3] 조한기는 고향이 충남 태안군 안면도안희정 충남지사와도 친분이 깊고 안희정 충남지사 후보 선대위 대변인 경력도 있긴 하다. 이후 안희정계로 편입되었다가 친문계로 다시 갈아탄 상태. 범친노 계열 안에서 계파 이동을 했다.[4] 상대는 한나라당 원내총무였던 현직 전국구 의원 홍사덕이었다. 홍사덕은 이후 한나라당을 떠나 4년간 원외 생활을 하다가 친박연대에 입당한 후 대구광역시 서구로 내려가서 6선에 성공한다.[5] 김대중 정부 시절이던 2002년 장상이 서리직을 맡은 적은 있었지만, 끝내 임명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따라서 공식적으로 임명된 최초의 여성 총리는 한명숙이다. 장상은 한명숙보다 5살 위인 1939년생으로, 평안북도 용천군에서 태어나 1947년 월남, 이화여자대학교 수학과를 졸업했다.[6] 이명박 대통령당선자 인수위 행정실장 출신. 일산신도시 건설 무렵에 관선 고양군수를 지낸 이력이 있다.[7] 강북에서 불과 10만여표 격차로 벌렸고, 강남3구에서만 12만여표 격차로 패했다.[8] 다만 실제로 엄청난 차이가 있던 여론조사와는 달리, 대선에서의 여론조사는 차이가 근소했으며 경우에 따라 이재명 후보가 이기는 여론조사 또한 존재했다.[9] 이 선거에서도 서울시장에는 5회 지선 당시 한명숙 본인을 꺾었던 오세훈이 다시 나왔는데, 피말리는 접전 끝에 겨우겨우 당선된 5회 지선과 달리 송영길을 상대로 전 행정동 올킬로 완전히 대승을 거두었다.[10] 당시에는 최고위원 경선과 당대표 경선을 따로 하지 않고 1위 당선자가 당대표가 되는 집단지도체제였어서 대표최고위원이라 불렸다. 박영선, 김부겸 등이 최고위원이었다.[11] 가장 혹독하게 비판하는 측에서는 한명숙이 박근혜 정권 탄생의 1등 공신이라 말할 정도다.[12] 추징금이 사면되지 않은 케이스로,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이 1997년 12월에 특별 사면으로 풀려났지만, 추징금은 사면되지 않아 둘 다 천억대의 추징금이 걸려있었다. 그나마 노태우는 완납했지만, 전두환은 사망 시까지 절반도 안 냈다.[13] 이 4명은 모두 노무현재단의 이사장을 역임했다.[14] 대표적인 경우가 오세훈 서울시장. 2010년 서울시장 선거 당시 한명숙과 맞붙어 힘겹게 재선에 성공했으나 문제는 야당이던 민주당이 시의회를 거의 차지하는 바람에 시의회와 충돌을 일으켰고, 급기야 무상급식 시행여부를 놓고 주민투표를 통해 시장직을 걸었다가 사퇴하는 등 정치 커리어에 큰 오점을 남겼다. 이 여파인지 후에도 나가는 선거마다 줄줄이 낙선하는 등 거의 10년 동안 원외 인사로 떠돌다가, 2021년 재보궐선거를 통해 10년 만에 서울시장 자리에 복귀했다.[15] 새천년민주당에 흡수 합당.[16] 열린우리당 창당을 위한 탈당.[17] 대통합민주신당에 흡수 합당.[18] 시민통합당과 신설 합당.[19] 새정치민주연합에 흡수 합당.[20]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의 탈당 요구로 인해 탈당.[21] 2001.1.29 사퇴 (초대 여성부 장관 입각)[22] 2015.8.20 의원직 상실(뇌물수수로 인한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징역 2년 확정에 따른 피선거권 상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