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복(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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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馥
?~192년 이후
1. 개요
4. 미디어 믹스



1. 개요[편집]


후한 말의 군벌이며 는 문절(文節)로 예주 영천군 사람.


2. 정사[편집]


상서, 어사중승을 지내다 원소동탁과 대립한 끝에 실각해 발해군으로 달아나자 동탁에 의해 기주목으로 임명된다.

당초 동탁이 한복을 기주목에 임명한 것은 원소에 대한 감시역으로 파견한 것이었고, 실제로 한복은 원소를 견제해서 항상 발해군에 속관들을 파견했다. 그런데 그 정도가 규정에서 한참 벗어날 정도로 극심했다고 한다.

이는 물론 원소가 동탁에게 반기를 들고 거병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으나 교모가 삼공부의 이름으로 날조한 격문을 퍼뜨리는 등 관동지역의 분위기가 뒤숭숭해지고 동탁의 인기가 떨어지자 한복은 여론이 동탁을 미워하고 원소의 지지는 압도적이니 여기에 붙는 편이 유리하겠다고 계산하여 원소의 거병을 방조하고 여기에 합류한다.(190년 1월.)

이때 원소 등 연합군에 합류한 하북 지역의 관리들은 하내군에 주둔하며 낙양에 주둔한 동탁과 대치하는 태세를 취했으나 한복만은 에 남아 주둔했다. 유리한 쪽에 붙겠다는 한복의 소극적인 태도나 기주목이라는 위치에서 볼 때, 한복은 후방에서 보급을 담당할 뿐 동탁과 적극적으로 대립할 의지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원소의 영향력이 커지며 자신의 통제를 벗어날 것이라 신중하게 행동하라는 치중종사 유자혜의 진언을 받아들여서 양쪽의 간을 보기 시작했고, 동시에 군량 보급을 끊어 원소의 군대를 와해시키려고 했다. 이런 탓에 원소를 비롯해 하내에 주둔한 연합군들은 간신히 대치하는 형국을 유지하는 것 외에는 한동안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못한다. 하내 주둔군은 물론 조조, 장막, 유대 등 산조의 관리들 또한 이런 한복의 행동을 좋게 볼 리 만무했고, 한복은 동탁 못지않은 역적이라든가, 동탁에게 매수되어 양다리를 걸쳤다든가 하는 악명이 자자했다. 심지어 유대는 동탁 다음은 한복을 쳐야한다는 주장까지 했으므로, 한복은 군량을 끊은 책임을 유자혜에게 돌려서 처형하려고 했는데, 경무 등이 반대하였으므로 추방으로 끝냈다.

191년 1월, 결국 원소는 한복과 타협한 결과인지 유주목 유우를 황제로 추대하지만 이는 유우의 거절로 무산되고 만다. 유우 추대라는 떡밥 자체가 원소보다는 한복에게 유리할 조건이다. 유우가 원소의 추대를 거부하자 한복은 따로 유우에게 사자를 보내 영상서사(녹상서사)를 맡아 (동탁이 장악한 장안 조정 대신) 국정을 총괄하고 관직 임명을 맡아달라고 권했지만 유우는 오히려 한복의 사자를 참수했으며, 결과적으로 이도저도 아니게 된 반동탁 연합군은 사실상 해체된다.

한편, 원소는 한복의 부장 국의가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지원하지만 국의는 한복에게 패한다. 이때 원소가 한복을 증오했기에 국의와 결탁했다는 기록과 실제로 연합군 해체 이후로 상당한 시간이 흘렀음에도 임지인 발해군에 돌아가지도 못한 채 하내 일대에 주둔하고 있던 것을 보면 원소는 줄곧 한복의 견제에 시달리며 고립되어 있던 것으로 보이고, 이에 군세가 흩어지기 이전에 기습적인 무력 봉기를 통해 한복을 도모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복이 국의를 격파하자 원소는 곧바로 공손찬과 밀약을 맺었고, 공손찬이 기주를 침공하자 한복은 이를 요격하여 맞서나 안평에서 크게 패했으며, 여러 군현들이 공손찬에게 투항하며 이탈해 한복은 위기를 맞는다. 원소는 이 틈에 군세를 급격히 늘려 공손찬과 남북으로 한복을 협격하는 태세를 취하며 사신을 보내 공손찬과 자신이 협격한다면 버텨내기 어렵겠지만 자신에게 항복한다면 우대할 것이니 지위를 양도하라며 한복을 협박한다.

이에 경무, 민순, 저수 등 한복의 측근들은 원소에게 항복하는 것을 반대했고, 원소군을 상대하라고 보낸 조부와 정환은 원소의 군대가 급조된 오합지졸이고 군량도 없으며 산개해 있기 때문에 간단히 격파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전력을 집중해 원소를 먼저 격파하고 공손찬과 맞서려 했던 것으로 보이나 한복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원소에게 기주목의 자리를 양도한다.

측근들의 진언대로 원소군 자체는 매우 약체였기에 원소에게 항복한 것이 꽤 의외의 판단일지 모르나 한복이 두려워한 것은 원소가 아니라 이 시기 최강의 군벌이었던 공손찬이었고,[1] 원소는 오히려 자의였든 타의였든 간에 한복과 함께 유우 추대의 중심인물, 즉 공범이었고 기주를 양도하더라도 당장 기반이 없었으므로 원소가 공손찬을 맞아 싸우려면 전임자인 자신과의 협력이 필수적이었던 데다, 원소군의 구성 자체도 당시 급격한 머릿수 늘리기로 엉망진창이었기에 원소가 확고하게 권력을 장악하긴 어려워 보인다는 점에서 원소를 가볍게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한복은 원소에게 항복하더라도 어느 정도 정치적인 영향력을 보장받을 수 있고, 상황에 따라 다시 예전처럼 원소를 꼭두각시로 만들어 원격조종하는 것도 불가능은 아닌 상황이라 여겼던 것으로 보이나, 공손찬원소와 맺은 밀약에 따라 (곧 파기했지만) 잠시 남하를 멈추며 원소에게 약간의 유예 기간을 줬고, 원소는 이 사이에 한복의 측근들을 모조리 숙청하고, 전풍, 심배 등 기존 한복 휘하의 불만세력들을 중용해 자신의 권위를 확고히 했으며 한복 자체는 지위상으론 분위장군이나 실질적으로 거스리는 군사는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여기에 더해 주한 등 원소의 비호를 받던 반 한복파들이 한복의 자택에 테러를 벌이는 사건까지 발생하자 한복은 두려움과 복수심에 휩싸여 진류태수 장막을 찾아가 의탁한다.

그러나 원소가 사신을 파견해 장막과 귓속말로 대화를 하자 한복은 자신을 죽이려는 줄 알고 화장실에서 서도(書刀)로 자살했다.[2] 서도는 죽간에 쓴 글자를 수정하기 위해 글자 부분의 대나무를 깎아내는 칼이다. 즉, 한복은 지우개로 자살한 셈이다. 지우개라고 해도 고무가 아니라 날붙이이긴 하지만.

원소의 측근 봉기는 한복을 용렬하다고 평가했고, 진수는 한복의 담이 작았다고 한다. 대체로 찌질하고 기회주의적인 면모를 보이면서도 앞뒤 상황을 살펴보면 나름대로 교활하고 노회한 측면도 강했으나, 결과적으론 그때까지 손바닥 안에 쥐고 있다고 여기며 얕보던 원소에게 능욕에 가까운 수준으로 철저하게 관광당하고 만다. 단, 이건 어디까지나 원소가 유능한 거지, 한복이 딱히 무능한 것은 아니다.[3] 일단 어사중승이라는 자리는 그 역할의 특징상, 단순히 학식이 높다고 해서 감당할 수 있는게 아니며, 계략 같은 것에도 능해야 한다.[4] 애초에 정말 무능하다면 동탁이 원소의 감시역으로 보내지도 않았다.[5] 게다가 한복이 이래저래 찌질한 행보를 보였어도, 이미 기주에서 몇년 자리잡고 나름 잘 다스리고 있었던 만큼, 충분히 자기 세력을 끌어모아 재기할 수 있었고 그렇기에 원소는 모든 실권을 잃은 그를 어디로 쫓아 보내는 게 아니라 자기 옆에 붙들고 있었다.


3. 연의[편집]


정사에서의 인물상이 완전히 다른 사람 중의 하나인데, 연의에서는 원소를 견제하고 사보타지를 일삼는 게 아니라 오히려 군량이 부족한 원소에게 아낌없이 군량을 퍼주는 등 사심없이 원소를 믿다가 기주를 빼앗기는 어리석지만 사람 좋은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반면 전력은 급락해서 시골영주처럼 보이는데, 이는 원소를 강화해서 조조의 상대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반동탁동맹이 결성되는 시기를 즈음하면, 당대의 중심축 중 하나인 하북에서도 알짜 기주를 다스리고 있었기 때문에 인재나 전력이나 부족함이 없었다. 무장으로 국의와 장합이 있었고, 책사로 전풍, 저수, 심배가 있고, 그외 문관으로 경무와 민순, 유자혜 등이 있었다. 역시 원소 때문에 전력을 무시당한 공손찬을 제외한다면 상대할 만한 세력이 별로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여담으로 반동탁 연합군 중 직위는 2위(1위는 후장군 원술)로 높은 기주목이다.


4. 미디어 믹스[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한복(삼국지)/기타 창작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 공손찬의 군사력은 당시에는 적수를 찾아볼 수 없었을 정도다. 한복은 유우 추대의 중심인물이었고 공손찬이 여기에 가장 격렬히 반대하던 인물이었다는 점을 감안했을 때 공손찬은 한복을 죽여 머리를 효수하면 효수했지, 한복을 배려해줄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2] 그런데 국내에서는 번역이 어떻게 되었는지 화장실에 빠져 죽은 것 또는 과도로 자살했다고 알려져 있다. 사실은 서도로 자살한 것이다.[3] 사실 연의 위주로 보면 한복이 무능해보일 수 밖에 없는데 원소는 여기서 우유부단한 소인배, 공손찬은 군재에 대한 묘사가 거의 없이 유비와 친분만 강조되니까 이런 자들에게 탈탈 털린 한복이 한심해보인다. 그러나 원소는 삼국시대에서 정치력으론 상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교활하고 치밀하며, 공손찬도 당시 군사력으론 상대가 없을 정도의 인간흉기였다. 이런 자들이 먹이감으로 노렸으니 살아남을 리가 없다.[4] 영제가 관직을 돈받고 팔아 먹기는 했어도, 이런 중요 관직은 감당할 능력이 되는 사람한테 주고 돈을 내라고 했다.[5] 초기의 동탁은 인사 문제만큼은 철저하게 능력과 인망을 따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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