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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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중추원 차관
고려 문하시중
한언공

시호
정신공(貞信公)
작위
개국후(開國侯)
본관
단주 한씨[1] / 장단 한씨[2][3]
이름
언공(彦恭)
배우자
미상
자녀
한조
생몰연도
939년~ 1004년 6월 (향년 65세)
1. 개요
2. 상세
2.1. 국자감 출신 차관
2.2. 중추원 설립
2.3. 문하시중이 되다
3. 후손
4. 본관
5. 역임 관작
6. 대중매체



1. 개요[편집]


고려 목종 대의 문신.

장단 한씨 가문 소속으로 고구려계 패서 호족 출신으로, 광종, 경종, 성종, 목종 4대 임금을 섬긴 신료이다.

정종 제1,2비인 용신왕후, 용의왕후의 친조부이기도 하다.


2. 상세[편집]



2.1. 국자감 출신 차관[편집]


장단 한씨는 가문의 어린 자제인 한언공을 개경의 국자감에 보내 공부를 시킬 정도로 나름 명망있는 호족 가문이였다. 광종 재위 중에 국자감 학도로 들어가 관리 양성 기관의 교육을 받았다. 곧이어 관직을 얻어 조정에 진출하였고, 경종 대를 거쳐 성종 때 형부시랑(지금의 법무부 차관) 겸 병부시랑(지금의 국방부 차관)이 된다. 이를 보아 법과 군사에 능통한 것으로 보인다.


2.2. 중추원 설립[편집]


성종의 외교관으로 북송에 갔을 때 그곳에서 꽤 주목을 끌었다고 한다. 이에 송태종은 그에게 정2품 품계, 명예 국방부장관, 감찰기관 장관직을 봉해주었다. 북송에 있으면서 그들의 기관구조를 주의깊게 보고 온 한언공은 고려로 귀환한 후, 성종에게 중추원 설립을 제안한다. 그가 제안해서 만든 중추원은 중서문하성과 함께 고려 양대 최고 정부기관이 된다.


2.3. 문하시중이 되다[편집]


한언공은 성종뿐 아니라 목종 대에도 큰 신임을 받았다. 문관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직위인 문하시중에 임명되었으며, 항상 직언을 하여 목종이 그를 크게 신임했다. 하지만 결국 나이가 들어 65세에 죽으니, 목종은 곡식, 비단, 찻잎을 유가족에게 보내고 대부(大夫)의 예법으로 장사지내게 했다.


3. 후손[편집]


그의 아들 한조도 사후 문하시중에 추증되었고, 한조의 두 딸은 정종과 결혼하여 왕후가 되었다. 한언공 딸 덕분에 가문이 고려의 외척으로 성장한 것이다. 한편, 남평 문씨, 전주 이씨와도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는데, 다름아닌 한언공의 후손인 한안인(韓安仁)[4]문극겸, 나아가 이성계의 여계 조상이기 때문이다.


4. 본관[편집]


장단(長湍)은 지금의 개성시 장풍군[5]이다. 장단현(長湍縣)은 목종 4년인 1001년 한언공의 고향이란 이유로 단주(湍州)로 승격되었기 때문에 장단 한씨나 단주 한씨나 같은 지역을 본관으로 삼았다.


5. 역임 관작[편집]


한언공의 생전 역임 직위
품계
특진(特進)
정 2품 품계
직위
형부시랑(刑部侍郞) - 병부시랑(兵部侍郞)
시랑은 차관직
즉 형부의 차관 및 병부의 차관
중추원(中樞院) 부사(副使)
중추원의 차관
참지정사(叅知政事)
중서문하성의 서열 3위 직위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
중서문하성의 서열 2위 직위
문하시중(門下侍中)
중서문하성의 서열 1위 직위
작위
개국후(開國侯)
특이하게 봉지가 없다
훈위
상주국(上柱國)
최고위 훈위
한언공의 북송 직위
품계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종 2품 품계
검교직
검교병부상서(檢校兵部尙書)
검교는 명예직[6]
병부상서는 지금의 국방부장관
직위
어사대부(御史臺夫)
정부 감찰기관인 어사대의 장관
한언공의 사후 추증 직위
삼사
태보(太保)
천자의 스승. 명예직[7]
시호
정신공(貞信公)
목종 선양대왕 배향공신으로서의 시호


6. 대중매체[편집]


드라마 강감찬에서는 필름이 소실되었기에 배우는 알 수 없으며, 동아일보의 기사에 남은 정보에 따르면 실존인물이 병사한 것과 다르게 김치양에게 맞서다가 형벌을 받아 사망했다고 한다.

드라마 천추태후에서는 배우 임병기가 연기했다.

[1] 湍州 韓氏[2] 長湍 韓氏[3] 장단현(長湍縣)에서 단주(湍州)로 승격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본관 항목 참조[4] 이자겸의 난으로 이자겸이 몰락하기 전까지 이자겸 일파와 정치적으로 대립한 신진관료세력의 거두(巨頭)였다. 그러나 이자겸 일파에게 결국 패배하면서 유배를 가던 중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5] 경기도 북서부에 있었던 곳으로 6.25 전쟁 이후 남쪽 지역 일부가 연천군에 편입되었다.[6] 실권이 없고 직함만 있는 관직[7] 신하가 가질 수 있는 가장 명예로운 칭호 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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