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화 이글스/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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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승: 준우승 | : 포스트시즌 진출





  • 2010년 대비 팀성적 변화
    • 49승 2무 82패, 승률 0.368(8위) → 59승 2무 72패, 승률 0.450(공동 6위)
    • 팀타율 : 0.244(8위) → 0.255(7위)
    • 팀출루율 : 0.331(8위) → 0.338(공동6위)
    • 팀장타율 : 0.359(8위) → 0.362(7위)
    • 팀득점 : 543점(8위) → 568점(7위)
    • 홈런 : 104개(7위) → 93개(6위)
    • 도루 : 121개 → 100개(7위)
    • 팀평균자책점 : 5.43(8위) → 5.11(8위)

한화 이글스 2011 시즌 성적
순위



승률
1위와의 승차
6 / 8
59
2
72
0.450
21.0

1. 2011 비시즌
2. 4월
2.1. 무너진 선발진과 중간계투
2.2. 타선은 더 엉망이에요
3. 5월
3.1. 역습의 야왕
3.2. 야왕 : 예끼 니미 씨x
4. 6월
4.1. 부활한 선발진
4.2. 그런데 그걸로 끝입니다.
5. 7월
6. 8월
7. 9월
7.1. 새로운 투수조합
7.2. 부활하는 타선
7.3. 타자와 투수의 부활이 만들어낸 결과
8. 10월
9. 총평
10. 둘러보기 틀



1. 2011 비시즌[편집]


2011년 한화 이글스의 전망은 상당히 암울했다. 일단 플러스 요인은,

- 그러나 말 그대로 유망주일 뿐, 성공유무는 알 수 없다. 이해를 돕자면 간단히 유원상김혁민을 보면서 매년 희망고문 당했던 한화팬들의 모습을 보면 된다. 게다가 유창식은 어깨 염증때문에 겨울 훈련도 뒤늦게 합류한 상황이었다. 결국 개막 시점에서 2군에 잔류하다 불펜들이 불을 화끈하게 지르면서 간신히 1군에 올라왔다. 그리고 이제는 승부조작을 저지르며 금지어.
- 센스없는 대수비 요원에 불과한 한상훈과 한화팬들에게도 눈뜬 장님 취급인 고동진이다. 오랜만에 다 모인 한고신유 나이나 그간 보여준 자질을 볼때 더 이상의 기량 발전을 기대할 수가 없는 두 사람이기에 땜빵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뿐이다. 그나마 수비는 좀 된다지만 한화의 가장 큰 약점은 연약한 마운드와 기둥 뿌리가 뽑혀나간 타선이지 수비력이 아니다.그래도 수비력이 약점이 아닌 건 아니지만

84년생에서 86년생까지는 일단 군입대를 걱정해야 한다. 여기에 해당하는 선수가 김태완, 이희근, 유원상, 김혁민, 양훈, 윤규진, 정현석, 허유강, 황재규사실상 지금 팀의 주전 선수 또는 주전 후보 전부이다. 일단 윤규진은 2011년에도 시즌을 치루고 2012 시즌부터 공익으로 갈 예정이다. 김태완, 정현석은 2011년 군복무를 시작했고, 황재규는 2010 시즌 끝나고 10월 말에 곧바로 공익으로 복무를 시작하였다.

군대에 가지 않을 것으로 보이면서 1군에서 주전 후보로라도 뛰고 있는 선수는 군필인 최진행전현태, 병역 혜택을 받은 류현진, 아직 나이가 어린 오선진이미 군대 다녀온안승민어린 선수다, 진짜로!, 그리고 올해 한화에 입단한 지라 1~2년 정도는 뛸 것으로 생각되는 이상훈 뿐이다.

결국 한대화 감독 임기내엔 노장선수와 87년생 이후의 신인급 선수로 땜빵을 해야한다. 롯데 자이언츠8888577 시절보다 더 안 좋은 상황에 놓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 한대화 감독의 임기가 끝남과 동시에 해외진출을 모색하는 류현진마저 없는 포스트 한대화한화 이글스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최소한 10년간은 이 상황이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사실상 지금부터라도 막대한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거나 혹은 넥센이 지금보다 더 이상한(…) 방식으로 전력 누수가 되지 않는 한 앞으로 좀 많이 하위권에서 머무를 것으로 예상된다.

2010년 말 메이저리거 박찬호가 한화로 복귀할 수도 있다는 떡밥을 투척했다.오면 뭐해 타선은 그대론데 물론 박찬호가 온다면, 단순히 박찬호라는 단순한 개인 전력이 아닌 투수진 전체의 플러스 요인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는 결국 NPB의 오릭스에 입단했다.

거기에 장성호가 수술로 11시즌 전반기 출장 불가, 5월에 복귀라는 끔찍한 소식이 들려왔다. 결국은 팀이 거의 공중 분해되는 수준까지 온 것이나 다름없지만 여전히 구단에 대한 투자는 미미한 수준이었다. 거기에다가 타 팀들이 광저우 아시안 게임 금메달을 통해 주전급 미필 선수들 상당수가 병역 문제를 해결하는데 성공하여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더 가중될 것으로 예상되고, 내년 한화 이글스의 성적은 오르기가 상당히 어려워 보인다.

그나마 한화 이글스가 탈꼴찌를 한다면 LG나 넥센을 밀어낼 가능성이 크고, 실제로 이 두 팀이 한화와 함께 하위권으로 분류되고 있다. 그러나 LG 트윈스는 순위는 그렇다 쳐도 전력은 투타 모두 상당한 수준이며, 넥센 히어로즈도 전력은 그리 우수하지 않지만 주축선수가 없을 뿐 의외로 쓸만한 인재가 많은 팀이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즉 한화에 비해 두 팀 모두 상당히 앞서는 수준의 팀으로 볼 수 있으며, 그나마 넥센이야 어떻게 전력을 보강해서 추월한다 쳐도 LG와 그 이상의 팀들은 2011년 한화의 선수층으로는 도저히 답이 안 나오는 강팀들이다.

안 그래도 리그 최악의 관중 동원률을 보여주는 한화 이글스인데, 성적을 올릴 수 있는 요인이 없는 내년에는 미래가 더 암담하다. 군대 가는 선수보다 군대에서 복귀하는 선수들의 실력이 대체로 좋지 않다.

2010 군 입대 선수 목록은 다음과 같다.
  • 투수 : 황재규, 김주, 조성우[1]
  • 포수 : 이성호
  • 내야수 : 송광민, 김태완, 한윤섭, 김강석, 김사연, 신석기
  • 외야수 : 정현석, 김동영, 박상규

복귀 선수는 최진호, 정민혁, 정범모, 한상훈, 백승룡, 고동진, 오재필[2]이다.

코치진은 송진우가 1년간의 연수를 마치고 코치로 돌아왔으며, 한용덕 2군 투수 코치가 다시 1군 투수코치로 임명되었다. 이로써 한 팀에 총 통산승수 500승 코치진을 달성했다.[3]

2011년 류현진의 연봉을 1억 안올려줘서 그의 자존심에 금이 갔다고 기사가 나와 한화팬들의 속을 태우고 있다.한화 이글스소인배 같은 구단이…. 다행히 류현진에게 4억 연봉을 주면서 계약을 했고, 2011년 1월 9일 기준 개인 사정상 연봉협상을 미루게 된 이대수마일영을 제외한 모든 선수들과 연봉협상을 마쳤다. 최진행233%인상되어 억대 연봉에 진입했고, 투타연봉고과 2위인 박정진, 정원석도 각각 약 120%, 약 90%에 가깝게 인상됐다.[4]

반면 연봉이 가장 많이 깎인 선수는 장성호로 삭감률은 20%였다. 이에 대해 2009년 구대성이 부상 통증을 참아가며 혹사당했는데도 연봉이 33.3% 삭감당한 것과 비교하여 너무한 것 아니냐는 반응이 있다. 그 다음으로 많이 깎인 선수는 19%가 삭감된 김혁민이며, 전체적으로 보면 한화 이글스는 연봉이 삭감된 선수가 적은 구단에 속하지만 깎을 게 있어야 깎지 몇몇 빼고는 죄다 막장 성적 찍고 애초에 저연봉 선수라 깎아봤자 눈에 띄지도 않는다.

2011년 1월 15일, FA 최종 계약일까지 한화 프런트는 FA 선언을 한 이도형, 최영필과 계약하지 않으면서 사실상 이 둘을 은퇴시켰다. 둘 다 나이가 많아 성적이 하락세를 타며 크게 도움이 되는 선수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전력이 최약체인 한화 입장에서는 선수 하나가 아쉬운 상황인 만큼 이 둘을 갖다 버린 것이 문제였다.[5] 안 그래도 막장인 한화 프런트는 2010년 8월 11일에 이경재에서 김관수로 사장이 바뀌고 나서 더욱 더 막장행보를 보이고 있는 중이다. 영입하라는 FA는 영입하지도 않고, 이범호 영입도 지지부진하며, 감독에게 "우리의 리빌딩은 정신력과 자체 리빌딩, 젊은 선수 위주로 할테니 님이 좀 잘해보삼." 식으로 과도한 부담감과 책임감을 짊어지게 하니, 한대화 감독 입장에서는 그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이러다 정말로 한대화 감독은 맨 손으로 63빌딩을 세워야 할 지도 모른다.

그리고 결국 1월 27일, 이범호KIA 타이거즈에 입단하였다. 9번이나 만났지만 다년 계약을 요구하는 이범호에게 1년 계약을 요구하면서 결국 한화 쪽에서 영입을 포기해버렸다. 일설에는 갈곳 없는 이범호를 상대로 후려쳐보려고 했다고 한다는 이야기도 있었다.[6] 이 사실을 알아챈 기아는 김조호 단장의 지시로 이범호 충동구매영입에 전격 성공하였다.[7]

반면 이범호가 한화에겐 주야장천 다년 계약을 요구해놓고 KIA 타이거즈와 1년 계약을 맺었다는 사실을 두고 의견이 분분하기도 하다.[8] 12억이라는 액수가 이범호를 지나치게 고평가한 액수가 아니지 않느냐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과연 12억에 기타 금액까지 50억에 육박하는 액수를 배팅한 이범호 영입이 KIA 타이거즈에게 대박이 될지 쪽박이 될지는 기다려봐야 알 수 있을 것이므로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다. 기아가 부른 액수가 너무 세다고 생각하는 사람중에는 한화가 그 돈 줘가며 이범호를 데려올 필요는 없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9]

한편, FA제도에서 보호선수는 18인에서 20인으로 개정되었지만 이범호는 그 이전에 FA로 일본으로 간 케이스라 보호선수 18명 제외규정을 받았다. 2011년 신인선수[10]를 보상선수로 지명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를 놓고 KIA와 대립하였으나 2011년 1월 31일 결정난 KBO의 유권해석에 따라 신인선수들은 보상선수에서 제외되었다. 유력한 보상선수로 한대화 감독이 원했던 김주형을 비롯해, 김희걸, 박기남 등이 꼽히고 있으나 2월 12일 안영명을 지명하여 그의 교환학생 생활종료 친정 복귀가 확정되었다.[11]

1월 31일, 최진행의 허리 부상 상태가 심상치 않아 조기귀국을 고려하고 있으며, 한대화 감독이 머리 싸매고 드러누울 지경이란 소식도 함께 들려왔다. 이러다간 한대화 감독이 쓰러졌단 기사가 언제 떠도 그다지 놀랍지 않을 듯 하다. 2월 4일 최진행의 허리부상이 심각해져서 결국 조기귀국을 하고 말았다. 이제 한화는 차포 떼고 거기에다가 마 상까지 다 떼고 시즌을 시작하는 상황이 되었다.왕은 역시 류현진

2월 20일 이여상이 군면제 판정을 받는 실로 오래간만의 호재가 들려왔다. 덕분에 경쟁할 수 있는 2루수가 늘었다.

한화 이글스 선수들에게 제공되는 전훈식단이 일반인들이 보기에도 좋게 말하면 소박하고(?) 나쁘게 말하면 너무 후져서 한화 팬들에게는 거센 비난을 받고 있으며, 타 팀 팬들에게는 비웃음의 대상이 되고 있다. 운동선수들을 위한 식단이라고는 보기 어려울 정도이며, 일반 중소기업의 구내식당 수준으로 보이는 모습이 기사화되었다. 눈으로 직접 보자.

이후 롯데 자이언츠 선수들의 식단도 공개되고 삼성 라이온즈LG 트윈스, SK 와이번스의 식단도 공개되자 한화 이글스의 식단과 너무나도 비교되는 그 모습 때문에 한화 이글스 구단은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특히 메뉴들이 외국인 선수들을 전혀 배려하지 않아서 팬들은 외국인 선수들은 삶은 계란밖에 먹을게 없겠네.라고 비난하고 있다. 어떤 블로그에서 그 토속적인(?) 한화 이글스 메뉴에서 어두운 표정으로 음식을 그릇에 담고 있는 외국인투수 오넬리 페레즈의 모습이 담겨 더더욱 안쓰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파일:external/mlbpark.donga.com/1298332348.jpg

그나마 가뭄에 콩나듯 이기던 오키나와 연습경기에 비해[12], 시범경기에서는 나름대로 나아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비록 시범경기이긴 하지만 5승 7패로 공동 6위.그래도 이기는게 어디야[13]


2. 4월[편집]


시즌이 시작된 4월은 그야말로 끔찍한 시작이었다.

한화 전력의 3할을 차지한다는 평을 듣는 류현진이 개막전에서 롯데 타선에 완전히 털려버리고 슬럼프에 빠져버렸다. 그나마 안승민이 1승을 가져다주었지만 2선발인 훌리오 데폴라도 엉망으로 털리면서 시즌 시작과 동시에 1, 2선발 원투펀치가 동시에 무너졌다.


2.1. 무너진 선발진과 중간계투[편집]


제5선발이자 비상교대 멤버였던 송창식마저 첫 경기 이후 선발자리를 장민재에게 넘겨주고 로테이션에서 이탈했으며, 3선발 양훈은 선발진의 어려운 상황속에서 멘탈이 붕괴되어 결국 데뷔 2년차안승민 혼자서 6이닝씩을 막으며 무너진 선발진을 이끌었다.

불펜으로 이동한 유원상100%의 분식률 기록을 찍어, 이른바 분식집 사장으로 두각을 드러냈고 슬로우 스타터인 박정진은 컨디션 난조를 겪고 있다.

정재원은 여섯경기만에 자신감과 제구력을 잃고 무너졌으며 마무리 투수인 오넬리도 첫 세이브를 아슬아슬하게 해내더니만 한 경기에 2회 블론세이브라는 업적을 달성하기에 이르렀다.


2.2. 타선은 더 엉망이에요[편집]


교타자와 장타자를 철저히 이분화 시킨 장종훈의 혜안이 어느정도 빛을 발하고 있다. 타자의 행동을 알려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이 양분화는 시즌 최초 연타석 홈런, 시즌 최초 10안타, 시즌 최초 출루 5할기록 등을 낳아 극단적인 양분화가 꽤나 먹혀들었다는 평을 듣지만, 이게 약빨이 오래가는 구조가 아니라서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떠안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다.

타선의 중핵이었던 김태완입대하면서 남은 타자들의 타율도 평균타율 2할 초반 타율에 득점권 타율 1할 7푼대에 그친 상황이지만, 장타자로서의 감을 회복한 이대수가 홈런 선두라는 깜짝쇼를 보여주고 있고 시즌 최초 연타석 홈런과 시즌 최초 10안타, 시즌 최초 출루기록 5할등의 기록을 토해내 다이너마이트 타선의 중핵이었던 장종훈에 의해 다이너마이트 타선이 부활하는 듯 하였다. 그러나 쏟아진 시즌 최초 달성업적에 비해 평균 타율은 2할에 채 못 미치는 뜬금포에 불과해 별 영양가는 없는 상황이고 교타자로 정착한 쪽도 영 미덥지 않은 상황을 보이고 있다.

김경언, 강동우정도가 분전하고 있었으며, 4번타자 최진행을 필두로 한 타자들은 별 다른 역할을 못 해주고 있었다. 특히 3루수로 포지션을 이동한 정원석은 팔꿈치부상으로 송구가 안드로메다로 떠나서 더 이상 3루를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주전 1루수로 낙점되었던 2군 최강의 타자 김강은 그보다 더한 수준의 수비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타격을 보여주면서 얼마 못가 2군으로 사라졌다. 그 결과 한화 팬들은 작년 2할 4푼을 치면서 자신들의 손으로 무수한 비난을 했었던, 그리고 수술 후 재활하느라 몸 상태가 정상인지도 의심스러웠던 장성호를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신경현과 이희근은 1할수준의 도루 저지율로 자동문 지옥을 열어서 발 빠른 주자들에게 능욕당하기 일쑤였다. 이때의 타선은 이대형이 한화에 오면 4번이라는 농담까지 나올정도였다.

다른 팀들의 부진을 힘입어 1년만에 아주 잠깐 6위를 밟아보기도 했으나 곧 제자리로 돌아갔으며, 프런트의 몇년간의 삽질과 극도로 부진한 성적에 분노한 팬들이 시위를 벌이자는 계획을 세우고 심지어 경기장 앞에서 고사를 지내기도 했었다. 한대화 감독도 답답했는지 1군과 2군의 코치들을 교체하는 강수를 두었으나, 당시에는 의문스러운 효과에 지나지 않았다.

19이닝 무득점을 기록할 정도로 망가져버린 타선과 류현진과 박정진마저 부진했던 투수진으로 인해 03 롯데나 과거 삼미 슈퍼스타즈, 99년 쌍방울과 맞먹는 약팀이 탄생할것이다, 3할 승률을 기록하지 못할것이라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랬다.


3. 5월[편집]


재활을 마치고 복귀한 장성호를 중심으로 한 야왕 한대화수리 투수진의 활약이 시작된다.


3.1. 역습의 야왕[편집]


2011년 5월 11일, LG의 선발 레다메스 리즈에게 철저하게 막혀서 1:0으로 지고 있던 한화 이글스는 9회말 강동우가 주자로 나간 뒤 드디어 재활을 끝내고 돌아온 장성호의 타석으로 연결되었다.

장성호가 타석에 들어서기 직전 한화 선수들은 수비코치이자 3년전 주장이었던 김민재를 중심으로 9회 시작 시 모여서 기합을 모으는 듯한 장면이 나왔었고, 그리고 장성호는 투런홈런으로 경기를 역전시켰다.

이 경기를 기점으로 한화라는 팀이 변화했다.


3.2. 야왕 : 예끼 니미 씨x[편집]


5월 12일, 악착같이 LG를 몰아붙이던 상황속에서 전현태가 대타 이양기의 적시타로 홈으로 들어 오던 중 조인성에게 태그당해 아웃판정을 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판정 자체가 LG쪽에 유리한 흐름이었고, 경기 내내 판정에 불만을 품었던 한대화 감독이 심판에게 예끼 니미 씨X이라는 명대사(...)를 날렸다. 이 명대사와 함께 선수들은 모두 독기를 품기 시작했다.

그리고 5월 15일, 대표이사와 단장이 2010년의 부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 후 새 이사와 단장이 부임하였다. 새로운 이사와 단장은 그룹차원의 각종 지원[14]을 받아왔다.

지옥의 4월, 홀로 투수진의 중심축을 맡고 있었던 안승민이 결국 오버페이스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졌지만 1년간의 길고 긴 잠수를 타고 있던 김혁민이 2군에서 돌아왔다. 1년 동안 열심히 제구력과 구위를 키웠고 빠른 구속이 살아난데다 어디서 배웠는지[15] 변화구도 익혀와 5선발 에이스 류현진이 슬럼프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동안 안승민의 뒤를 잇는 견인차가 되었다. 양훈도 멘탈을 회복해 조금씩 담당하는 이닝수를 늘려가기 시작했으며 장민재는 이닝은 늘리지 못했지만 만루 상황을 무사히 수습하는 등, 전체적인 안정감을 높이기 시작했다.

한화 이글스는 5월에 스윕을 하거나 당한 일은 없지만 연속해서 위닝 시리즈를 가져가기 시작했고 그 결과 넥센 히어로즈를 제치고 7위 자리에 올라가는데 성공했다.

5월 말 부터 김혁민이 조금씩 페이스가 떨어졌고 안승민의 평균자책점과 소화이닝수가 안드로메다로 떠나버렸지만 양훈이 바톤터치해서 28일 두산을 상대로 완봉승을 거두었다. 그는 늦게나마 부활한 류현진과 함께 선발진에서 중심축으로 자리잡아 원투펀치로 자리를 굳혔으며 장민재도 자기 몫을 했다.

타자들의 경우 낮은 타율은 여전했지만 득점권에서 극도의 집중력을 보여주면서 5월 득점권 타율 1위를 유지했고, 수비문제가 안정되어 에러나 에러성 플레이가 확 줄어들었다.

특히 내야 잉여선수의 대표주자였던 이희근, 한상훈, 이여상등이 주전멤버로 각성에 성공, 구멍이었던 포지션을 메꿔나가기 시작했다.

5월 27일, 두산전을 승리했다. 여기서 오선진낫아웃 3루타를 만들어내고 강동우의 역전타, 김혁민의 세이브 등이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야 유틸리티 자원인 오선진이 부상으로 이탈해 이글스의 내야진은 장종훈의 주도하에 만들어진 양분화 타선의 뒤를 잇는 제2의 시한폭탄이 되었다.


4. 6월[편집]


5월의 여세를 몰아, 6월 9일 한화 이글스는 LG를 꺾고 6위자리에 올라서 감독문제가 터진 롯데, 두산과 순위경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6월 8일 잠실 LG전에서 9회초 임찬규보크를 유도하여 3루주자 정원석이 홈스틸을 시도하였으나 박근영 심판 등이 이를 보지 못하여 정원석은 아웃되고 경기는 5:6으로 종료되었다.


4.1. 부활한 선발진[편집]


6위 탈환에 가장 큰 공신은 선발진이다. 에이스인 류현진이 부활하고 안정감을 찾은 양훈이 꾸역꾸역 이닝을 먹어내며 원투펀치의 부활을 알렸다. 보조요원으로선 장민재가 백업을 충실히 해내며 6위에 안착했다.


4.2. 그런데 그걸로 끝입니다.[편집]


선발진이 호투하는 동안에도 불펜은 여전히 불을 지르고 장종훈이 구축한 양분화 타선의 대처법으로 두산 베어스가 불펜을 자꾸 갈아치우는 전략에 타선이 힘을 못 쓰니 너도나도 "한화 상대론 투수교체가 해법."이란 말을 증명하듯 중간계투진을 바꾸는 전략을 사용하여 타선이 완전히 무너졌다. 그나마 카림 가르시아가 똑딱이 가능한 장타자로 합류해 무턱대로 투수를 갈아 치울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져 타선문제가 어느정도 해결되었지만, 가르시아가 컨디션 난조를 보이면 팀 전력이 반토막 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결국 6월 21일부터 23일까지의 3연전에서 삼성에 스윕당하고 말았다.


5. 7월[편집]


7월에는 팀의 전력에 도움이 안 되는 것으로 판명된 오넬리를 퇴출시키고 데니 바티스타를 영입하기로 했다. 야수들은 장종훈의 조련이 어찌 먹혀 들어가고 2군 선수들을 간간히 1군 경기에 돌려막기로 우겨 넣어서[16] 큰 물 맛을 보여주는 중이라 투수자원의 보강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데니 바티스타 영입 전에 먼저 알아본 선수가 댄 세라피니였다고 한다. 세라피니의 영입무산을 아쉬워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세라피니가 37세의 노장인데다 외국인 용병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구위로 찍어누르는 파워피처가 아닌 탓에 한국에서 고전할 가능성이 많아 댄 세라피니를 포기한 것이 잘한 것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특히 세라피니는 NPB시절 훌리오 줄레타와 빈볼시비에서 줄레타의 무자비한 주먹질에 구타를 당하면서 그만해달라고 빌었을 정도로 멘탈이 약한 선수이다. 그러면서 떼어 놓이니깐 달려들려 했다. 찌질이 이래저래 두들겨 맞는 일이 많은 한화로선 멘탈이 두꺼운 선수가 와야 하니 포기 할 수 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5.1. 우리 프런트가 달라졌어요[편집]


한화 프런트는 2010년 호세 카페얀을 보내고 실력이 영 시원치 않았던 새 용병 부에노를 데려오는데에 2달이 넘게 걸렸는데 반해 오넬리가 퇴출되자마자 바티스타로 용병을 바꾸는 행보를 보여줬다. 또한 2000년대 중반부터 짓겠다 말만 하고 안 짓고 있던 2군 구장을 단장과 사장이 바뀐 지 2달만에 충남 서산시에 짓는 것으로 가닥잡고 행정절차를 마무리짓는 중이라고 한다. 2군 구장의 경우 삽 푸기전에는 못 믿는다지만 확실히 프런트가 변하기는 변했다. 참고로 기존 예정지였던 대전광역시 대덕구는 약속 파기라고 한화 이글스를 비난하다가 허가 내달랄 땐 안 내주고 늑장부리더니 왜 이제 와서 징징대냐면서 한화 팬들한테 신나게 욕을 퍼먹었다.

덤으로 해외출장갔다온 김승연 회장이 신문을 펴봤다가 한화가 잘한다는 기사를 보고 선발 5명에게 전보(...)로 격려글을 보냈으며, 선수들에게 맞춤식 보약을 지어줬다고 한다. 그룹의 회장까지 끼어든 지원에 그간 은퇴식 준비만 하는 프런트, 노인들 명성에 기대는 프런트라고 까이던 이미지를 한방에 떨어내는데 성공했다. 물론 시즌이 끝나봐야 알겠지만, 프런트가 적극적으로 개입을 시작한 것 치고 확실한 결과물은 아직 내지 못한 상황이다.


6. 8월[편집]


8월 들어서 한화는 주전멤버들의 체력과 정신이 한계에 달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5월 이후로 하지 않던 4연패[17] 이상을 하며 투타의 부진이 심했으며, 올라올 선수라고는 보이지 않는 상황에 처했다. 더군다나 류현진양훈의 이탈로 투수진 쪽에 심한 누수가 생기며 더욱 악화일로에 접어들었으나 근 2년만에 선발로 뛰게된 마일영이 의외의 호투를 하면서 빈자리를 잘 메꿔주었다. 타자쪽에서는 신경현이 부활하고 이대수가 맹타를 보여주며 공격을 주도했다.

하지만 장성호-최진행-가르시아로 이어지는 클린업 트리오는 양분화 타선이 완전히 공략당해 끝모르는 삽질을 보여주며 팬들의 뒷목을 부여잡게 했다.

당시 이대수, 강동우, 한상훈정도를 제외하고 모두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강동우, 한상훈 등이 윗 타선에서 찬스를 만들면, 젊은 놈들이 귀신같이 말아먹는 경기 패턴이 이어졌다. 후반기 타율이 4할을 넘어가던 대수옹만이 타선의 희망이었던 잔혹한 8월이었다. 대수옹은 8월 26일 리즈의 159km짜리 공에 머리를 맞고 경기 도중 뇌진탕 증세로 병원행 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음날 대타로 출전하는 등 투지와 걸맞는 실력으로 팬들의 찬양을 받았다. 이로 인해 칰갤과 쥐갤은 더욱더 멀어졌다.

귀국한 김승연 회장이 잠실구장에 직접 와서 선수단을 격려했으며 이 날 한대화 감독에게 금일봉을 줬다! 김태균을 영입해달라는 팬들의 염원에 그는 반드시 영입하겠다는 의지로 화답해주었다.


7. 9월[편집]


8월 신나게 박살난 후에 9월 들어서 첫 스윕 및 오랜만에 4연승을 하는 등 좋은 기세를 보여주고 있다. 정규일정이 끝나고, 2군 선수들의 옥석고르기가 끝나 기본 엔트리가 확장되면서 기존 멤버들이 체력을 회복하고 부상을 치유해 이것 저것 시험하게 되었다.


7.1. 새로운 투수조합[편집]


한대화 감독이 투수진의 새로운 분배를 실험했고 생각보다 괜찮게 먹힌 것인지 투수들의 호투와 이대수의 맹활약으로 평균자책점은 2점대 초반으로 리그내 1위를 찍고 불펜진의 방어율도 수준급이 되었다.


7.2. 부활하는 타선[편집]


8월, 사실상 양분화 타선이 파해당했고 카림 가르시아의 추가 계약이 모호하다는 소문이 돌자 야수들의 취향 존중을 우선시하는 노선으로 타선이 변경 되었다. 그때그때 상황봐서 번트도 대보고, 병살타 걱정말고 휘둘러 보라는 노피어 정책이 시작 되었다.

타선에 합류한 오재필최진행의 홈런포, 이대수의 맹타, 신경현의 부활 등으로 다이나마이트 타선 시절만큼은 아니더라도 기존의 한점내기에 목매다는 쪼잔한 공세에서, 못먹어도 고라는 강공형 야구로 변모했다.


7.3. 타자와 투수의 부활이 만들어낸 결과[편집]


투수들이 감독과 함께 이짓저짓 해보는 동안, 타자들이 맹타로 변경된 9월 13일 기아전을 기점으로 다이너마이트 타선이 부활했다.

2007년부터 한화가 해온 한점에 목숨거는 쪼잔한 야구는, 류현진이 지키는 동안 한점이라도 내서 버티자는 수비식 야구였는데 투수들은 감독따라 볼배합이나 중계연계 실험하고 있고 야수들은 안되는 수비를 포기하고 공격에 몰빵해버리는 노선으로 갈아타버렸다.

9월 첫 주말 넥센과의 3연전[18]에 팀의 479일만이자 올 시즌 첫 스윕을 대전구장에서 했다. 더불어 4연패를 탈출했다.

13일 기아전은 윤석민을 상대로 6:5로 패배했다.[19]

14일 기아전은 KBO 리그 역대 9번째 선발 전원 타점, 역대 6번째 선발 전원 안타+타점 기록을 내며 18:7로 대승을 거두었다.

15일 롯데전은 12:7로 패배하였으며, 16일 롯데전은 10:12로 끝내기 홈런 승을 거두었다. 이날 이대호의 3연타석 홈런에도 불구하고 15일에 이은 나성용의 8회 동점 쓰리런, 9회 가르시아의 끝내기 홈런은 백미.

17일 SK전은 8:2로 승리하였다. 이 시기 한화 이글스의 타선은 경기당 기본 5점은 뽑아주는 다이너마이트 타선으로 급변했다!

이후에도 꾸준히 승률 5할을 찍으며 순항하였으나 문제는 5위, 6위 팀이 질 때 같이 지고 이길 때 같이 이겨서 순위가 올라가지는 않았다.


8. 10월[편집]


10월 1일 넥센과의 경기에서 11대 9의 예능 난타전끝에 승리를 거두고 LG가 두산에게 패해 시즌 개막 20경기 이후 기준으로 878일만에 공동 5위에 올랐다.

10월 2일 LG두산에게 11:1로 패하고 한화가 넥센에 6:4로 승리하면서 단독 5위에 올랐다.

10월 6일 마지막 경기에서 3:5로 패배하였다. 하지만 승률이 같았던 LG도 삼성에 패하면서 공동 6위[20][21]로 시즌을 마감하였다. LG보다 먼저 드래프트 순서를 가져가면서 6위라는 등수도 가져간, 명분과 실리를 함께 챙겼다.


9. 총평[편집]


탈꼴지에 성공한것은 좋지만 시즌의 최대과업이었던 리빌딩에 대해서는 미묘한 상태인 시즌이었다.

리빌딩의 경우 투수진과 야수진으로 나뉘어서 설명이 가능한데, 투수진은 리빌딩에 어느정도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트레이드로 온 마일영김광수, 나이들어서 포텐이 터진 박정진을 제외하면 전원 20대인 선수들로 연령층을 낮추는데 성공했다. 아쉽게도 선발진의 축인 양훈김혁민은 군문제가 코앞에 걸려있지만 윤근영, 신주영, 송창식등의 군필이 부상 후유증을 극복하고 올라오기 시작했으며 정재원, 정민혁등 희망고문이라도(...) 하면서 가능성을 보여준 투수들도 있었다. 그 이외의 선수들은 구본범허유강을 제외하고 모두 나이가 어려서 아직 군 문제에 여유가 남아있는 선수들로, 2군에서 조련이 무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면 오래 걸리지 않아 세대교체가 끝날 것으로 보인다.

다만 부활한 류현진은 부상으로 기대 이하의 성적을 거두었고, 양훈, 김혁민, 안승민, 장민재는 풀 시즌을 소화했다는 점으로 위안을 삼아야 할 성적이다.

야수진은 리빌딩 大실패.
  • 주전 중견수는 김재우도, 이상훈도, 오준혁도 아닌 여전히 37세의 강동우였으며 김경언, 추승우, 고동진이 뒤를 이었다. 이상훈은 시즌 초반에 매우 좋지 않았기에 그나마 이해가 가지만...
  • 장성호가 부상에서 복귀할때까지 주전 1루수로 써먹으려던 김강은 시즌 시작후 괴멸적인 1루수비를 보여주고 2군으로 사라졌으며 중간에 부상까지 입으면서 시즌이 끝날때까지 1군에 얼굴도 보이지 않았다. 김용호는 치질로 인해 시즌 내내 잠적했고, 정범모 또한 군복귀 후 치질로 내내 보이질 않다가 시즌 말 2군에서 얼굴을 보이고 있는 중이다.
  • 포수쪽에서 김기남이 주목을 받고 있으나 수비는 물음표에 일단은 신고선수 신분인지라 별다른 소식은 없다. 신경현이 부진하여 엄청난 욕을 먹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박노민은 좀 잘하다가 여지없이 수비에서 삽질을 하고 심지어 마지막 기회였던 8월에는 꼬리뼈 부상으로 아웃되었으며 이희근도 역시 시즌 내내 부상에 시달리면서 신경현을 밀어내지 못했다. 나성용도 시즌이 끝날때쯤에서야 올라오는데 성공했다.[22]
  • 주전 3루수로 군필인 이여상을 박아서 괜찮게 썼지만 허리 부상으로 인한 재활로 스프링캠프에 참가하지 못한 여파가 나타나는지 시즌이 지나면서 타율이 꾸준히 떨어져 멘도사라인으로 수렴해버렸다. 또 다른 3루 대안인 김회성은 공을 방망이에 제대로 맞추질 못하고 정줄놓는 수비를 보여주기도 하면서 신임을 받지 못했다.
  • 주전 유격수는 이대수가 꾸준히 잘해줘서 다행이었지만, 백업 요원으로 육성중이던 강경학이 2군에서 부상으로 인해 제대로 크지 못했다. 강경학은 오른팔 부상을 입었다가 재활이 끝나자 왼팔을 부상당하는 처절한 과정을 거치고 결국 그냥 군 입대를 준비중이라고 한다.
  • 주전 2루수로 키우려고 했던 전현태는 올해도 희망고문만을 반복했고, 내야 유틸리티로 키우던 오선진도 부상으로 한동안 빠져있다 시즌 말에 복귀하였다.
  • 코너 외야진도 문제가 심각했다. 코너 외야진에서 두각을 보인 선수는 30대(?!)의 이양기오재필이었다. 사실 한화의 리빌딩에 가장 걸맞는 선수들은 최진행, 전현태, 정민혁과 같은 군필이면서 20대 중반의 선수이지만 문제는 프런트가 거의 놓다시피한 선수관리 덕분에 20대 중반의 선수들은 죄다 미필이고 군 제대한 선수들은 거의 나이가 30 부근이라는 것이다. 그 결과 야수진의 세대교체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노장들에게 의지하는 양상을 보였다.

2011년은 전반적으로 두각을 보인 젊은 야수가 한 명도 없었던 우울한 해였다.(...)

야수쪽에서 유망주들이 끝모르는 삽질을 하자 투수쪽 리빌딩으로 선회한 듯한 느낌이 보이며, 이는 야수리빌딩을 늦추고 야수진의 나이가 높아지는 역효과를 불러일으켰다. 어쨌든 그 나이든 선수들 - 강동우, 이대수, 한상훈 - 이라도 없었으면 망했다. 이대수 혼자 3할 넘겼으니 할 말 다했다.

하지만 비교적 젊은 선수들 또한 자업자득인 것이, 기회를 줘도 제대로 못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상적인 리빌딩은 젊은 선수들이 어느 정도 해 주면서 노장들을 자연스럽게 밀어내는 것이지만 이들은 대타에서 한 방해서 선발에 박아주면 말아먹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못했다.[23] 장성호, 정원석, 강동우, 신경현을 대체할 선수가 마땅히 보이지가 않는다. 그나마 외야진은 고동진이양기가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으나 이들은 30대의 나이로 인해 세대교체에 큰 도움은 되지 못하는 실정이다.

그리고 피타고리안 승률(기대 승률)로 보면 승률이 .379이지만 실제 팀 승률은.450 인걸로 보아 올 시즌 한화는 이기고 있을 시 아슬아슬하게 이기고 질 때는 포풍 같이 털렸었다. 이 말은 끝내기가 많고[24][25] 3점 홈런과 만루 홈런이 많이 나와 영양가가 좋았으며, 필승조와 패전조의 차이가 크고 투수들이 널뛰기했다는걸 알 수 있다. 좋게 말하면 지는 경기와 이기는 경기를 확실히 구분함과 동시에 한대화 감독이 대타작전 성공률 .332로 좋은 용병술을 보여 줬다고 할 수 있다. 반대로 나쁘게 말하면 시즌 내내 운이 좋았다고도 볼 수 있다. 야구를 보는 팬들로서는 아주 다이나믹한 시즌을 보낸 것이다. 또한 2011 시즌 한화는 단 한번도 끝내기 패를 당하지 않았다. 결국 2011시즌이 순전히 뽀록이자 운이였다는 걸 2012년에 여실히 증명해버렸다(...)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점은 2011 시즌 페넌트레이스 우승팀 삼성 라이온즈를 상대로 상대 전적이 앞섰다! 겨우 10승 9패로 승패마진 +1밖에 못 벌긴 했지만 이 시즌 이후로 2014년까지 계속 한화가 삼성에 밀렸다는 걸 생각한다면 뭔가 큰 의미가 있는 것은 분명한 시즌이었다. 이 해 류현진규정이닝을 채우는 데도 실패했던 걸 감안한다면 더욱 그렀다.

2012 드래프트에선 야수 최대어인 하주석을 포함 내야수 2명, 투수 4명, 외야수 3명, 포수 1명 등 총 10명을 전부 지명하였다.

한대화 감독은 하주석을 높게 평가하면서도 아직은 당장 주전감은 아니라며 2012년에는 이대수의 백업으로 활용하겠다고 밝혔다.

11월 20일 FA 송신영과 3년 13억, 옵션 비공개로 계약을 체결했다. 이는 2005 시즌 김민재 이후 6년 만의 타팀 FA 영입이다. 무려 이상군 신임 운영팀장이 직접 멀리 있던 송신영을 찾아가서 모셔오듯이 데려왔다고 한다. 그리고 LG 프런트는 이럴거면 왜 데려왔냐고 가열차게 까였다.[26]

11월 22일에 2차 드래프트에서 대박을 터뜨렸다. 포수가 부족한 상황에서 1군에 올릴 수 있는 최승환을 얻어오면서 한화의 2군 팜에서는 달랑 김강 하나(...)만 내줬다. 유망주 5명을 내준 두산 베어스삼성 라이온즈와 매우 비교되는 상황이다. 그러나 이를 좋아할 수 만은 없는 것은 한화의 2군이 괴멸적이라는 것을 인증하는 셈이기 때문이다.[27]


10. 둘러보기 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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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89년생 투수[2] 개명 전 오승택[3] 송진우 210승 + 정민철 161승 + 한용덕 120승 + 이상군 100승[4] 적은 것으로 보이나 박정진의 경우엔 정말 제대로 대우해준 것이 맞다. 08년 마정길박정진보다 더했지만 박정진과 거의 똑같은 인상률이 적용됐었다. 사실 전문 마무리 투수가 아닌 이상 전천후(?) 불펜투수가 아무리 잘해봤자 높은 인상률을 받기란 매우 힘들다.[5] 게다가 이 둘은 A급 선수가 아니어서 연봉도 저렴한 편이었다. 또한 그 동안의 공헌도를 생각하면 계속 데리고 있는 쪽이 모양새도 더 좋았고.[6] 사실상 소프트뱅크에서는 이범호를 2011년 전력외로 놓았고 일본 진출 전 영입에 관심을 보였던 롯데도 거의 포기한 상태였다.[7] 그렇게 기아는 김상현의 부상으로 인해 비어버린 3루수 자리를 이범호를 통해서 대체하게 된다.[8] 일본에서 1년간 감각을 잃었을 이범호가 살아나는데 걸릴 시간을 생각해본다면 1년 계약에 12억은 너무 무리한 투자라 단연 이면 계약이 있지 않겠냐고 조심스럽게 추측하는 사람들도 있다.[9] 실제로 한화 선수단 46명의 연봉이 약 23억이라고 한다. 그 절반에 육박하는 12억을 한화에서도 김태균 다음 자원으로 쳤던 이범호에게 투자했어야 했는지는 생각해봐야 할 문제이다.[10] 이들의 계약 기준일은 2011년 2월 1일로, KIA 타이거즈측의 입장은 '보호선수 명단을 1월 31일까지 제출하면 이 시점에서는 KIA 선수가 아니기 때문에 이들을 지명할 수 없다.'였고, 한화측의 입장은 '보호선수 명단은 어디까지나 데려갈 수 없는 선수를 지정해 놓은 것에 불과하니 2월에 보상선수를 지명한다면 2011년 신인선수를 데려갈 수 있다.'였다.[11] 김주형은 후일 짐짝 취급을 받긴 하지만 그나마 몇 없는 내야 유틸이라는 점에서 선수진이 미미한 한화 입장에서는 나름 의미가 있었고, 김희걸은 군필에 이닝도 제법 먹어주는 불펜투수, 박기남은 한화에 왔으면 주전 경쟁이 가능한 수준이었다. 물론 안영명이 지역 연고 프랜차이즈에, 못 하는 선수는 아니었지만 문제는 군대를 안 다녀왔다는 것.[12] 이것도 기가 차는 것이, 이 막장 프런트에서 연습구장을 구해주지 않아 한대화 감독이 직접 인맥을 섭외(..)해서 연습구장을 빌렸다.[13] 참고로 2010시즌 한화의 시범경기 성적은 3승 7패. 시범경기마저 꼴찌를 했었다.[14] 특별 성과금의 지급부터 노인정 아니랄까봐 80년대부터 한번도 안 바꾸고 쓰고 있던 것이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오래된 물건들을 다 들어내고 프런트의 연봉까지 한화그룹 최고 수준으로 올려주었다. 또한 홍보팀에게 기죽지 말라며 고급세단을 지원하는 등, 추정 15억 정도의 자금 지원이 순식간에 이루어졌다.[15] 송진우가 전수했을 것일한 설이 있으나 송진우는 부정했다.[16] 사실 한화 내야진이 완전히 무너저 2군의 검증 받지 못한 선수들도 끌어 올 수 밖에 없었다.[17] 25일 삼성전 이후, 26일부터 28일까지의 LG전은 1무2패로 사실상 스윕당하고, 30일 두산에게까지 패배했다.[18] 9월 2, 3, 4일[19] 타자들이 공격에 올인한 것 치고는 미약한 결과라 할수 있지만, 투수들의 지원이 없는 상황속에서 멘탈이 무너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큰 진보라고 평가되었다.[20] 시범경기와 동일한 순위이다.[21] 상대전적까지 따지면 7위지만 KBO는 4강 탈락팀의 경우 승률이 동일하면 상대전적을 매기지 않는다. 단 드래프트 순번은 매겨야 되니 이때는 상대전적을 본다.[22] 그나마 포수자리는 셋 다 하나씩 보여준게 있다는것이 약간의 위안거리이다.[23] 사실 야왕 신드롬으로 불리는 이 해의 플루크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지나치게 높은 대타 성공률이었다. 그리고 다음 시즌에 이 용병술이 파해되면서 대타 성공률도 다시 평균 이하로 떨어져버렸다.[24] 11승 역대 최다 타이[25] 2011시즌 끝내기 모음[26] 심지어 LG는 송신영을 데려오면서 같이 승부조작범 김성현을 데려왔고, 그 과정에서 박병호와 심수창, 15억원을 내줬으나 정작 송신영은 FA가 되어 떠나버렸고, 김성현은 승부조작이 걸리며 그대로 감옥에 갔다. 그리고 박병호의 포텐셜이 터지고, 심수창도 롱런하면서.....[27] 한화는 FA로 데려온 송신영에 대한 보상선수로 LG에 쿨하게추승우를 주자고 할 정도로 보호선수 20인 명단이 널널한 편인데 40인이면 더더욱 자리가 남아 돈다. 우스갯소리로 40인 안에 청계산 회장님과 치어리더들을 넣어도 여유롭다카더라라는 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