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풍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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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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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제9대 황제
문종 현황제 | 文宗 顯皇帝


파일:800px-《咸丰皇帝朝服像》.jpg

출생
1831년 7월 17일
청나라 직예성 북경 원명원
사망
1861년 8월 22일 (향년 30세)
청나라 열하성 승덕
능묘
정릉(定陵)
재위기간
제9대 황제
1850년 3월 9일 ~ 1861년 8월 22일 (11년 16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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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
중국식 : 애신각라(愛新覺羅)
만주어 : 아이신기오로(ᠠᡳ᠌ᠰᡳᠨ ᡤᡳᡠ᠋ᡵᠣ)
영문 : Aisin-Gioro

중국식 : 이주(奕詝)
만주어 : 이주(ᡳ ᠵᡠ)
한국식 독음 : 혁저
영문
Xianfeng Emperor[1]
국적

부모
부황 선종 성황제
모후 효전성황후
형제자매
9남 10녀 중 4남
배우자
정후 - 효덕현황후 살극달씨
계후 - 효정현황후 뉴호록씨

후궁
16명 [ 펼치기 · 접기 ]
효흠현황후 예허나라씨, 장정황귀비 타타랍씨
단각황귀비 동가씨, 민귀비 서가씨, 완귀비 소작로씨
부비 예허나라씨, 희비 차하르 하탕춘, 길비 왕가씨
경비 장가씨, 운빈 무가씨, 용빈 이이근각라씨
숙빈 엽협나라씨, 옥빈 엽협나라씨
평상재 이이근각라씨, 춘상재 명암씨, 진상재 대가씨

자녀
2남 1녀
신장
165cm[2]
한호
굽치 얼옝어 한(ᡤᡠᠪᠴᡳ ᡝᠯᡤᡳᠶᡝᠩᡤᡝ ᡥᠠᠨ᠌)
칸호
투게멜 엘베그투 칸(ᠲᠦᠭᠡᠮᠡᠯ ᠡᠯᠪᠡᠭᠲᠦ ᠬᠠᠭᠠᠨ)[3]
묘호
문종(文宗)
시호
중국식 :
협천익운집중수모무덕진무성효연공단인관민장검현황제(協天翊運執中垂謨懋德振武聖孝淵恭端仁寬敏莊儉顯皇帝)

만주어 : 일어투 후왕디(ᡳᠯᡝᡨᡠ ᡥᡡᠸᠠᠩᡩᡳ)
연호
1851년 ~ 1861년
중국식 : 함풍(咸豊)
만주어 : 굽치 얼옝어


1. 개요
2. 즉위 전
3. 즉위 후
3.2. 2차 아편전쟁
3.3. 죽음
4. 평가
5. 대중매체



1. 개요[편집]


청나라의 9대 황제. 강제 퇴위를 당한 종손선통제를 제외하면 실질적으로 가장 재위가 짧은[1] 청 황제이며, 중국 역사상 자기 아들이 황위를 계승한 마지막 황제이기도 하다. 얼마 되지도 않는 재위 11년간도 평안치 못하여 온갖 종류의 재난이라는 재난은 모두 일어나 이때부터 청나라는 본격적인 내리막길을 타게 된다. 뒤에 나온 황제들이 전부 아무 힘도 없는 허수아비[2]라서 권력을 행사한 청의 마지막 황제로 볼 수 있다.


2. 즉위 전[편집]


도광제의 넷째 아들이며, 생모는 효전성황후 뉴호록씨이다. 도광제가 사망할 시점에는 형들이 모두 요절했기 때문에, 그가 실질적인 장남이었다.

그가 즉위하기까지는 어느 정도의 우여곡절이 있었다. 도광제의 정실이었던 효목황후는 자녀가 없었고, 효신황후는 딸 1명을 낳았다. 도광제는 황자 시절 시녀를 범해서[3] 의도치 않게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도광제의 장남인 혁위(奕緯)이다. 도광제는 신분이 낮은 시녀에게서 의도치 않게 아들을 얻은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이것으로 인해 자신의 평판에 흠이 될 것을 두려워하였다. 하지만, 가경제는 처음 얻은 손자를 기뻐하여 혁위를 패륵(貝勒)에 봉했으나, 도광제는 이를 싫어하여 자신이 즉위한 직후, 혁위에게서 패륵 지위를 박탈하고 평범한 황자의 지위로 내려가게 하였다. 도광제는 황후가 낳은 적자를 원하였기 때문에 혁위를 후계자로 삼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무런 잘못없이 작위를 취소하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은 아니었다. 청의 법제에 따르면 공이 있으면 작위를 올려주고, 죄가 있어야 작위를 강등하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도광제가 혁위를 패륵으로 봉하면 제신(諸臣)들이 그를 후계자로 생각할까 염려해서였다.

하지만, 도광제에게는 적자가 태어나지 않았고, 당시 총애하던 정비(靜妃)가 낳은 차남과 3남은 유아기 때 요절하고, 또다른 총비 전귀비(全貴妃)[4]는 공주를 연이어서 낳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도광제의 나이 50세가 가까워지면서 유일한 대안은 자신이 사랑하지 않은 아들인 장남 혁위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비로소, 혁위를 후계자로 생각하고 그에 걸맞는 스승을 붙여주어 제왕학을 가르치는등 신경을 쓰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도광제의 무시와 냉대를 받으며 사는 동안 혁위의 성격은 고집스럽게 변해 아버지와 자주 충돌하였고, 결국 1831년 5월에 혁위가 23세의 나이로 죽었다. <청사고> 등에는 전년부터 아팠다는 기록이 보이지만, 야사에서는 혁위가 공부에 신경쓰지 않고 방탕하게 놀다가 도광제가 분개하여 질책하다가 혁위의 중요부위를 걷어차서 갑작스레 죽었다는 얘기도 있다.

혁위가 1831년 5월에 죽은 직후, 그해 7월에 전귀비(全貴妃)가 도광제의 넷째아들인 혁저를 낳았다. 도광제의 나이 50세에, 그 시점에서는 유일하게 얻은 아들이었다, 1833년 효신황후가 죽자, 전귀비는 황귀비가 되었고. 효신황후의 3년상 이후에 황후로 책봉됨으로서 혁저도 적자로 승격되었다. 1840년 효전황후가 죽었는데, 이 때 혁저의 나이 10세였고. 그의 양육은 동생 혁흔의 친모인 정귀비에게 맡겨졌다.

효전황후의 죽음에는 야사가 전해진다. 함풍제는 이미 황자 시절부터 동생 혁흔에 비해 무능함이 드러나 후계자 자리가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효전황후는 자기 아들이 제위를 잇게하기 위해 혁흔이 먹을 생선요리에 독을 탔으나 고양이가 먹고 거품을 물고 죽자 추궁당하여 전모가 드러나 아들을 지키기 위해 자결했다고 한다. 물론, 야사일 뿐이다. 청 황실에서 자살은 큰 죄이므로 친어머니가 자살을 했다면 오히려 아들의 앞날에 걸림돌이 되었을 터이기 때문.

정귀비에 의해 양육된 혁저는 정귀비를 생모처럼 여기면서 효로써 섬겼고, 정귀비의 아들인 혁흔(도광제의 6남)도 친동생처럼 여겼으며 유년시절을 같이 보냈다. 도광제의 5남 혁종은 숙부인 돈친왕 면개의 양자로 입양되어서 후계경쟁에서 탈락하였고, 7남 혁현 이하는 아직 어려 후계가 될 수 없었다. 자연히 도광제의 말년은 혁저와 혁흔이 후계자 지위를 두고 경쟁하게 되었다.

혁저는 어렸을 때 천연두를 앓아 얼굴에 곰보 자국이 있었으며, 또한 수렵사냥 중 낙마하여 부상을 입은 이후부터 다리가 불편한 점이 있었다. 혁흔은 문무에 능통하고 활달한 기개가 있어서 도광제가 총애하였다. 도광제에게 혁저는 유일한 적자이기도 했기에 혁저를 효전황후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총애하였다면, 혁흔은 문무에 고루 능하고 국제정세에도 관심이 많은 다재다능함으로 인해 사랑하는 바가 컸다.

혁저가 도광제의 유일한 적자이긴 했지만, 사실 청나라는 중국사의 다른 흔한 한족왕조와 달리 무조건 적자에게 제위를 물려주지 않고 오로지 능력(+ 외가를 비롯한 여러 배경)으로 계승이 이뤄진 사례가 많았고 옹정제 때는 태자밀건법(太子密建法)도 도입[5]했기 때문에 적자 함풍제가 너무 소질이 없어보인다면 얼마든지 그것을 뒤집고 다른 서자가 제위에 오를 수 있었다. 당장 도광제도 적장자이긴 하지만 형제들 중 가장 뛰어난 능력과 인품을 자랑했기에 즉위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무능했던 함풍제가 어떻게 즉위할 수 있었는지 설명하는 야사(野史)가 있다. 도광제가 죽기 얼마 되기 전에 혁저와 혁흔을 같이 불렀는데, 형과 마찬가지로 스승에게 코칭을 받긴 했지만 벼락치기가 필요없을 만큼 평소에 열심히 공부하고 생각해오던 여러 국정 현안에 대해 막힘없이 답한 혁흔과 달리 두수전(杜受田) 등 스승들에게 쪽집게 과외를 받은 함풍제는 황제의 병세가 이리도 악화되었으니 이는 다 자식인 자신의 잘못이라면서 펑펑 울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눈물 감성팔이 작전이 먹혀서(…) 후계자는 함풍제가 되었고 혁흔은 공친왕 책봉에 그쳤다. 그래서 '혁흔이 후계자가 되었다면'이란 가정은 지금도 가끔씩 회자된다.

정사에는 도광제와 황친들이 수렵사냥을 나갔을 때, 혁저가 단 한 발의 화살도 쏘지 않았다고 한다. 이를 보고, 도광제는 그가 생명을 중히 여기는 인효한 인품임을 크게 칭찬했다고 하며, 그로서 혁저를 후계자로 정하기로 마음을 굳혔다고 한다. (1846년의 일)

입태자 문제에 대해서는 현대 역사학자들 간에 논쟁이 많다. 함풍제가 즉위 이후 보여준 무능함, 사실 그보다도 서태후를 그나마 견제할 수 있던 유일한 걸물이었다는 점에서 공친왕이 아예 형 대신 황제로 올랐더라면 서태후의 깽판을 볼 일도 없고 하는 가정이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고는 있으나, 근래로 올수록 함풍제도 황자 시절 나름대로 능력을 입증한 바 있었으며, 유교적 가치가 중시되던 사회에서 서양이 추근거리는 국제정세에 밝고 서양 문물의 도입에도 관심이 많았지만 반대로 보수세력과는 껄끄럽던 공친왕과 달리 함풍제의 인품이 도광제와 보수파 중심의 중신들 사이에서 상당한 평가를 받았기에 경쟁에서 앞서가는듯했던 혁흔을 역전하기에 충분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함풍제에 대한 재평가를 둘러싸고 현재 대륙학계에서는 상당한 논쟁이 이루어지고 있는 중이라 할 수 있다.


3. 즉위 후[편집]



3.1. 태평천국의 난[편집]


즉위한 바로 그해인 1850년 12월, 중국 사상 최대 규모의 민란태평천국의 난이 시작되었다. 낙방한 유생 홍수전야훼의 아들임을 자처하며 스스로 천왕이라 부르며 금전촌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이후 청나라에 실망한 사람들이 대거 모여들며 세를 빠르게 불렸다.[6] 이후 태평천국은 멸만흥한(滅滿興漢)[7]를 기치로 내걸고 영안(永安)을 점령하였으며, 우한 등도 손아귀에 넣었다. 1853년 3월에는 마침내 중국 남부의 핵심부인 난징을 점령하였으며, 이후 난징을 천경(天京)으로 개칭하고 수도로 삼았다.

태평천국은 난징을 얻은 후 청나라의 수도인 베이징을 들이치자는 북벌론과, 일단 장강 유역을 따라 영토를 불리며 힘을 키우자는 서정론으로 나뉘었다. 당시의 실권자였던 동왕(東王) 양수청[8]은 이를 동시에 실시하기로 결정했고, 1853년 5월에 북벌군에는 임봉상과 이개방을, 서정군 지휘관에는 익왕 석달개를 임명하여 각각 보냈다. 다만 북벌군은 청나라의 대대적인 공세와 인적 열세를 견디지 못하고 1855년에 고립된채 농성하다가 전멸당했으며, 이개방은 베이징으로 압송되어 능지처참을 당하여 죽는다.

한편 서정군은 상대적으로 더 나은 성과를 올렸다. 함풍제가 북벌군의 진군에 놀라 모든 병력을 베이징에 몰빵하는 사이, 증국번이 이끌던 청나라의 상군은 태평천국 군대에게 연이어 패배하였고, 증국번은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다만 홍수전이 수도 바로 옆에 주둔한 청군을 몰살하기 위하여 익왕 석달개를 다시 불러들이면서 중국 서부의 청나라 군대는 가까스로 살아남을 수 있게 된다. 석달개의 군대는 난징으로 돌아가 난징 바로 곁에 주둔하고 있던 청나라의 강북대영과 강남대영을 몰살시켰고, 이로서 태평천국에는 진정한 전성기가 도래한 듯 보였다.

태평천국은 남녀 평등, 구시대 악습 타파, 사유재산 금지, 아편 금지 등 급진적인 사회 개혁 정책들을 내놓으며 민중의 지지를 얻었으나, 시간이 흐르자 이들의 이상도 변질했고 태평천국 지도층은 오히려 청나라 관리 못지않은 약탈 행위를 저지르며 인심을 잃고 말았다. 게다가 지도층의 내분도 상당히 심각했는데, 특히 동왕 양수청이 점차 홍수전의 지위를 노리자 홍수전은 북왕 위창휘와 연왕(燕王) 진일강(秦日綱)을 은밀히 불러 양수청을 제거할 것을 명령했고, 1856년 9월 2일, 북왕부와 연왕부의 군대가 동왕부를 기습해 양수청을 살해했으며, 이를 천경사변(天京事變)이라고 한다. 게다가 유능한 군지휘관이었던 석달개는 홍수전의 친인척 감싸기를 참다못해 1857년 여름에 정예군 10만을 이끌고 사천 지방으로 도망가기까지 했다.[9] 아무튼 지도층 간의 내분은 갈수록 심해졌고, 한편 함풍제는 증국번지휘관으로 임명하여 본격적인 반격에 들어갔다. 이후 이홍장은 연합군인 상군(湘軍)을 이끌고 서구 열강들의 도움을 받아[10] 태평천국을 멸망시켰다.

태평천국의 난은 13년이나 계속되어 함풍제가 죽은 이후인 1864년 8월에야 태평천국의 수도인 난징이 함락되어 끝났으며, 흡사 강희제 시절의 오삼계의 난처럼, 아니 그보다 더더욱 심할 정도로 중국 남부를 폐허로 만들었다. 이미 백련교도의 난(1796년 ~ 1805년)으로 재정 낭비가 심했던 청나라는 또 없는 살림에 막대한 전비를 소모하여 재정이 완전히 탕진되었고, 가장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강남이 초토화되어 경제, 사회적으로 몹시 피폐해졌다.


3.2. 2차 아편전쟁[편집]


태평천국의 난이 한참 현재 진행 중인 상황인 1856년, 영국은 애로호 사건[11]을 들먹이며 제2차 아편전쟁을 일으켰다. 게다가 프랑스도 자국 선교사가 중국에서 처형당한 것을 빌미로 전쟁을 선포하였고, 결국 청나라는 당대 최강대국인 두 나라와 동시에 전쟁을 벌이는 상황에 놓이고 말았다.[12]

이미 태평천국 때문에 국력을 거의 소진해버린 청나라는 더이상 서구 강대국들을 상대할 힘이 없었다. 이때문에 청나라는 얼마 싸우지 않고 톈진 조약을 맺어 이권을 어느 정도 더 떼주고 배상금을 지불하는 선에서 그치려 했으나, 그 사이에 또 영국, 프랑스 연합군과 마찰이 생기며 조약 파기 수순까지 들어갔다. 영국과 프랑스는 이 기회에 제대로 청나라를 밟아버리기 위해 수도인 베이징을 공략한다는 초강수를 두었고, 끝내 그해 10월에는 베이징에 입성했다. 한편 전쟁을 지지했던 함풍제와 조정대신들은 모두 겁에 질려 열하의 피서산장으로 튀었고, 베이징을 점령한 연합군대는 원명원, 이화원 등을 마음껏 약탈하며 유린하였다.[13]

한편 함풍제가 열하로 몽진했을 때, 조선에서는 문안 겸 정보 수집 겸하여 사신을 보냈던 모양이다. 이에 황제는 적잖이 감동하여 "다른 나라에선 한 놈도 아무도 안 찾아오던데 조선만이 이토록 찾아와 주니, 한결같이 사대하는 정성이 감탄스럽다. 참으로 예의의 나라다."라고 말했다고. 그토록 힘든 상황에 외국에서 사신을 보냈으니 충분히 감동할 만하다. 다만 하술하겠지만 이것저것 다 귀찮고 도피하고 싶었던 모양인지 사신을 인견하여 직접 보지는 않았던 듯. 제후국 보기에 창피했을지도 조선왕조실록 기사에도 반응을 전해 들었다고만 나와 있고, 청나라 쪽 기록인 청사고 기사에도 사신이 행재소(별궁)에 오지 못하게 했다고 되어 있다. 또한 조선 사신으로서는 황제에 대한 문안 의사 전달은 성공했을지 몰라도 정보 수집은 시원찮았던 듯한데, "가 보니 서양 오랑캐들 난리 쳤어도 생각보다 편안하고 괜찮던데요?" 수준으로 보고한지라... 신명호(부경대 사학과 교수)의 근대 동북아 삼국지(1)

각설하고, 그 결과 청나라는 베이징 조약을 또 맺어 추가로 개항장을 지정하고 배상금을 늘렸으며 구룡반도까지 강제 할양해버렸다. 한편 러시아는 중개를 빌미로 아무르강 이북의 광대한 영토를 떼어먹었다. 한편 2010년 건륭제의 80세 생일을 기념해 제작된 옥새가 경매에 올라와서 중국 네티즌들을 격노케 했던 사건이 있었는데, 바로 그 옥새 또한 이 시기에 영국군이 원명원을 분탕질 할 적에 반출된 것으로 추정한다.


3.3. 죽음[편집]


아무튼 이때 함풍제는 앞서 말했듯 수도를 버리고 열하피서산장으로 몽진했다.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가 중재에 나섰고, 북경에 남은 함풍제의 동생인 공친왕의 주도로 1860년 베이징 조약을 맺게 된다. 그리고 러시아는 중개 수수료 명목으로 연해주를 차지했다(…) 참고로 연해주는 만주와 함께 여진-만주족의 성지였다. 조약은 체결되었지만 크게 상심한 그는 외국 공사와의 친견을 거부해 계속 열하에 있었다. 비참한 처지에서 도피하기 위해서인지 열하에 있는 동안 함풍제는 연회와 공연 감상에만 열중했고, 곧 병사하였다.[14]


4. 평가[편집]


시대를 모른 청나라 최악의 암군[15]으로 평가받지만 그래도 시대적 분위기를 파악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기는 했다.

일부에서는 제위에 오른 것 자체가 왕조와 나라 모두에 재앙이라는 극악의 평가를 받고 있으며[16], 하는 짓과 그 결과만 놓고 보면 변명거리가 없어 보인다.

게다가 함풍제는 너무 젊은 31세의 나이에 사망해서 하나뿐인 아들 동치제는 10살도 되지 않은 나이에 황제에 올라야 했고 이는 결국 자신의 후궁 서태후동치제생모 자격으로 권력을 장악하게 되는 원인 중 하나가 된다. 서태후의 실정이 청나라의 쇠퇴를 더욱 가속화시켰음을 감안하면 엄청난 나비효과가 아닐 수 없다.[17] 이괄의 난이 청나라에 유리한 나비효과를 만들어냈다면 함풍제의 즉위는 청나라에 불리한 나비효과를 만들어낸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함풍제가 죽고 딱 50년 뒤인 1911년에 청나라를 멸망시키는 신해혁명이 일어났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한 일이다.

함풍제의 치세는 조선 철종(재위 1849년 ~ 1863년)의 재위 기간과 대략 일치한다. 자연 재해는 빗발쳤고, 민란은 연이어 일어났지만, 정작 왕은 무능하여 그냥 놀고 먹다가 가버렸다는 점에서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18] 반면 일본은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에 의해 강제로 나라의 문을 열면서 일시적으로는 혼란해졌으나, 1867년의 메이지 유신, 이후 동아시아 유일의 제국주의 국가로 거듭나게 된다.[19]


5. 대중매체[편집]


중국사에서 함풍제의 치세는 우울하기 짝이 없는 근대사의 도입부라서 함풍제의 캐릭터는 그리 많이 묘사되지는 않고, 등장해도 딱히 좋은 취급은 못 받는다. 좋게 묘사된들 '착하지만 우유부단한' 캐릭터 정도. 그러나 누구도 빼놓지 않는 공통점이 있는데, 바로 동생에 대한 열등감이다. 또한 낙마 사고로 인해 함풍제의 캐릭터는 한쪽 다리를 저는 것으로 묘사된다. 또한 친어머니 못지않게 지극정성으로 키워준 정귀비(효정성황후)에 대한 효성이 공친왕 못지않게 지극해서, 공친왕과도 여러모로 껄끄러운 관계에 놓인다.

서태후와 공친왕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제국의 눈물(원제 홍장녹와)>에서는 어린 시절부터 이 둘의 관계가 묘사되는데, 어린 시절을 단시간에 묘사하느라 상당히 축약하지만 둘의 차이를 상징적으로 그려낸다. 태후가 여는 만찬에서 혁흔이 전귀비로부터 독을 넣은 생선요리를 권유받는데 정작 아들인 자신은 그걸 못 먹게 하자 귀신같이 독살 음모를 눈치채고는 밥상을 뒤엎어서(!) 혁흔을 구하지만, 어머니가 태후에 의해 자결을 명받고 정귀비가 어미를 잃은 혁저를 혁흔과 함께 키우게 된다. 함께 공부하고 보르지기트 셍게린첸 앞에서 새로운 검법을 선보이는 등 혁저와 혁흔의 우애는 동복형제 못지않지만, 보수적인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하지만 그 옛 학문에서도 동생만 못함을 스스로도 체감하는 혁저와 달리 혁흔은 "진시황이 영국 대포를 보기나 했냐? 공자가 아편을 피워봤냐? 자치통감에 강산중흥의 비결이 있음?" 하는 패기 넘치는 발언으로 신문물 도입과 개혁에의 신념을 드러낸다. 한편 혁저가 다리를 절게 된 원인은 둘 다 코흘리개일 때 시위들한테 승마를 배우던 중 혁흔이 말 빨리 배우고 싶다면서 천방지축으로 겁없이 과속(...)하다가 어설프게 따라가던 혁저가 낙마한 것이라 묘사된다. 주로 1~2화에서 묘사되는데, 찾아보면 형제간 우애가 지극하던 유아기의 모습이 매우 귀요미하다. 하지만 급노화한다. 수양대군 때문에 강제 노화하는 과 비슷한 신세 도광제도 정귀비가 친아들과 양아들 구분하지 않고 지극정성으로 키웠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과감히 정귀비에게 황태자를 누구로 정할까 물어볼 정도였는데, 정귀비가 어미도 잃었는데 동생이랑 놀다 절름발이가 된 착한 아이가 안쓰럽다고 혁흔 대신 혁저에게 제위를 물려주라 한다! 대청강산이 어머니 때문에 망했습니다 태비가 된 후에는 의귀비와 친하게 지내는데, 의귀비가 곁을 지키던 임종 때는 함풍제와 공친왕을 착각해서 공친왕에게 할 말을 황제에게, 황제에게 할 말을 공친왕에게 하느라 껄끄러운 사이였던 형제가 화해하나 했지만 황후가 되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는 황제에게 남길 넋두리를 공친왕에게 하는 바람에 공친왕이 평소엔 잘 찾아오지도 않던 황제에게 울며 달려와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황태후로 책봉을 해달라 졸라대자 자신이 황제가 된 것이 사랑으로 자신을 키워준 태비 덕분임을 알고 눈물을 흘리며 황태후 책봉 조서를 이미 쓰고 있던 황제가 섭섭해하며 공친왕을 타일러 내보내고는 홧김에 조서를 찢어버린다. 물론 실제 역사대로 성질을 누그러뜨리고는 상중의 공친왕을 적당히 훈계하고 다시 정태비를 황태후로 추봉하긴 하지만, 청군이 영불연합군에 참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태묘에 꿇어앉아 선황들에게 죄를 빌면서도 어린 시절 아버지가 같은 자리에서 통곡할 때 자신은 왜 아버지가 서럽게 우는지 모르는데도 동생은 모든 사건을 파악했던 것을 새삼 떠올리며 다시금 속이 쓰리기만 하다. 대체로 유능하다고는 못해도 선량한 황제의 모습인데, 일국의 군주로서 형제를 잠재적 반역자로 경계하는 수준을 아득히 넘어선 무조건적인 열폭은 정말이지 불쌍해보일 정도.

1995년에 개봉한 홍콩 영화인 <외전 혜옥란> [20]에서는 신삼국에서 관우 역을 한 우영광이 함풍제를, 그리고 양가휘가 공친왕을 맡았다.[21] 함풍제는 성 불구자로 묘사되며, 혜옥란은 궁녀로 들어왔다가 승은을 받지 못하자 유곽에서 테크닉을 익혀 황제와 잠자리를 갖고, 또한 공친왕과도 관계를 맺어 동치제를 임신하여 황후로 승진한다. 이후 황제가 승하하자 공친왕을 숙청하고 스스로 수렴청정으로 정권을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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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초대 황제 천명제도 10년밖에 재위하지 못했지만 이 사람은 즉위하기 30년 전부터 이미 만주족 군주였다.[2] 광서제가 정말 잠시 동안 변법자강운동을 계기로 실권을 되찾은 적이 있기는 하지만, 서태후무술정변으로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실권을 도로 빼앗겨 버리고 유폐당한채 살다가 서태후가 죽기 직전 독살당했다.[3] 화비 나라씨이다.[4] 함풍제의 생모 뉴호록씨는 14세때 도광제의 후궁으로 간택되었는데, 명문가 출신에 미인에다 총명하고 성격도 온순해서 전부 뛰어나다 라는 의미로 '전귀비'라 불리었다. (이후 효전성황후로 추존)[5] 황제 생전에 공식적으로 태자를 지정하지 않고 대신 자금성 정전인 건청궁의 판액인 정대광명’(正大光明) 현판과 황실 관청인 내무부에 각각 후계자를 낙점한 황제의 유조를 은밀히 보관한 뒤 황제가 붕어한 뒤 두 유조의 이름이 같다면 그 인물을 차기 황제로 즉위시키는 제도였다. 더 정확히는 청나라 초기 순치제까지는 능력 위주의 황위 계승이 이루어졌으나 강희제 즉위 후 태자(윤잉)를 공식 지정하였다 폐위시키는 사태가 반복되었고 우여곡절 끝에 즉위한 옹정제가 이를 공식적으로 도입한 것이다.[6] 대체적으로 만주족인 청 황실에 대한 뿌리깊은 모멸감, 아편 전쟁 등으로 갈수록 피폐해지는 경제, 자연재해의 연이은 등장 등으로 당시 청나라 국민들의 민심은 크게 흔들리고 있는 상황이었다.[7] 만주족을 멸하고 한족을 부흥시킨다[8] 태평천국은 천왕인 홍수전 아래에 동왕(東王) 양수청(楊秀淸), 서왕(西王) 소조귀(蕭朝貴), 남왕(南王) 풍운산(馮雲山), 북왕(北王) 위창휘(韋昌輝), 익왕(翼王) 석달개(石達開) 등 총 5명의 왕들을 따로 두었다.[9] 이들은 초기에는 승승장구했으나, 나중에는 보급도 받지 못하다가 결국 청군에게 전멸당했다.[10] 서구 열강들은 반외세, 자주를 주장하는 태평천국의 도움을 전혀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만만하고 친숙한 청나라를 훨씬 선호하였기에, 나중에는 청나라를 본격적으로 도와주었다.[11] 청나라가 영국인 소유의 애로호를 단속하는 과정에서 명예로운 유니언 잭을 모욕했다고 주장한 사건이다. 사실 별거 아닌 사건이지만 영국이 청나라에 전쟁을 선포하게 하는 빌미를 만들어주고야 말았다.[12] 당시 이 황당한 개전 사유 때문에 영국 의회 내에서도 말이 많았다. 결국 전쟁 선포는 의회에서 부결되었으나, 당시 총리였던 헨리 존 템플은 의회를 해산하고 전쟁 선포를 통과시켜버렸다. 다만 영국 내부에서는 제1차 아편전쟁을 지나치게 일찍 끝냈다는 불만이 있었으며, 지난 전쟁을 통해 얻은 이익이 상대적으로 너무 작다는 인식이 만연하였기에 제1차 아편전쟁 때와 달리 은연중에 전쟁을 찬성하는 분위기였다.[13] 당시에는 자금성을 불태워버리자는 의견까지 나왔으나, 청나라의 정궁을 아예 태워버리는 것은 심하다는 반대 의견 때문에 실행되지는 않았다. 한편 황제의 여름궁전으로 사용되며 진귀한 보물들이 쌓여있던 원명원은 그딴거 없고 그냥 태워버렸다. 이때 반출된 국가급 문화재들이 요즘에도 간간히 영국, 미국 등지에서 발견되고는 한다.[14] 유언장은 불태워졌다.[15] 천명제~건륭제까지는 명군이었고,(다만, 건륭제는 논란이 다소 있다.) 가경제는 건륭제 말기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열심히 노력했고 (하지만 성과는 별로 없었다), 도광제제1차 아편전쟁이 발생한 시기에 황제였으나 자기 잘못이라고 보기는 힘들며, 동치제광서제서태후의 꼭두각시였으며, 어린 나이에 잠깐 즉위했다 망국으로 인해 퇴위했을 뿐인 선통제는 설명이 필요없다.[16] 물론 이 인간은 한 영제,당 의종, 송 휘종, 명 만력제보다는 나은 편이다. 차라리 제위에 오르지 않고 일반 황족으로 평생을 보내거나 외세가 없었다면 청나라 최악의 암군 타이틀을 갖게 될 일은 없었을 것이다.[17] 다만 함풍제는 도장을 두 개 만들어 어상은 동태후에게, 동도당은 후계자 재순(사실상 서태후에게 준것)에게 주었다. 성지에 두 개의 도장을 모두 찍어야 성지가 효력이 있게 함으로써 서태후에 대한 견제장치는 두었다. 서태후가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고 나라를 쥐락펴락한 것은 견제장치라 할 수 있는 동치제와 동태후가 일찍 죽은 게 컸다. 동치제는 친정을 할 20세가 되기도 전에 병으로 너무 일찍 죽었고 동태후는 광서제가 성년이 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다.[18] 근데 철종 위에 있던 게 세도 가문들이었다. 뭘 해보고 싶어도 할 수 없었고 그럼에도 해보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철종은 오히려 광서제와 비교하는 게 적절할 것이다. 또한 철종이나 함풍제가 이전의 군주들에 비해 정치력이 미달이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이 둘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기에는 어폐가 있다. 조선이나 청나라가 사실상 사망선고를 받게 되는건 이 시기가 아니라 몇십년쯤 지난 이후이며 그것도 당시 재위했던 군주가 아니라 실권을 쥐고있던 서태후공친왕, 명성황후흥선대원군의 삽질이 결정적인 원인이였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 시기까진 두 나라 모두 회생의 기회가 충분히 존재했었다는 것이 현대 역사가들의 중론. 특히 청나라의 경우에는 자그마치 100년도 전인 건륭제 때부터 곪아있던 게 폭발해서 함풍제의 할아버지인 가경제 때부터 반란이 줄지어 일어나는 등 나라꼴이 조선 이상으로 개판인 상황이였다.[19] 다만 동시대에도 막부의 쇼군의 상황은 청나라나 조선보다 더 심했다. 그나마 신체적으로나마 문제가 없었던 함풍제나 철종과 달리 비슷한 시기에 제위했던 도쿠가와 이에사다나 도쿠가와 이에모치는 각각 뇌성마비각기병에 걸렸다는 의혹이 있어서 정상적으로 정무를 보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급변하는 정국의 주도권을 막부는 쥘 수 없었고 결국 이를 극복하지 못해 청나라나 조선보다 먼저 시대에서 물러나고 만다.[20] 원제는 <慈禧秘密生活>(자희비밀생활)[21] 아이러니하게도 양가휘는 10여 년 전, 이한상 감독의 '화소원명원'에서 함풍제역할을 맡았고, 연작 '수렴청정'에서도 함풍제 역할을 연기하여 제3회 금상장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