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럴드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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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Harold2.jpg
왕호
해럴드 고드윈슨
(Harold Godwinson)
부친
고드윈 백작
모친
귀타 토르켈스도티르
생몰년도
1022년경 ~ 1066년 10월 14일(45세)
재위기간
1066년 1월 5일 ~ 1066년 10월 14일
대관식
1066년 1월 6일
종교
기독교

1. 개요
2. 왕위에 오르다
3. 최후의 전투



1. 개요[편집]


고대 영어: Harold Gōdwines sunu
영어: Harold Godwinson
라틴어: Haroldus II

해럴드 2세(Harold II), 즉 해럴드 고드윈슨(Harold Godwinson)은 잉글랜드 왕국 앵글로색슨계 웨식스 왕조의 마지막 왕[1]이었다. 마지막 왕일 뿐 아니라, 엄청 짧은 기간 동안 다스렸던 왕이다. 재임 기간이 불과 9개월..

그는 매우 잘 나가는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당시 권력자였던 웨식스 백작 고드윈(Godwin, Earl of Wessex)이었고[2][3], 어머니는 귀타(Gytha Thorkelsdóttir)였다. 그에게는 남동생인 토스티그 고드윈슨을 비롯하여 많은 형제·자매가 있었고, 그중 여동생인 이디스는 참회왕 에드워드의 왕비가 되었다. 즉, 그는 당시 왕과 처남 매부지간이었다. 여동생이 왕비가 되었을 때, 그는 만 23세의 나이에 동앵글리아백작이 되었다. 아버지 고드윈의 사후인 1053년에는 웨식스의 백작을 물려받아 강력한 권력을 손에 넣었으며, 1058년에는 히어포드의 백작에도 올라 잉글랜드에 영향력을 미치는 노르만족 세력에 저항하였다. 한마디로 잘 나가는 젊은 세력가였다. 이런 과정을 통해 그는 점차 에드워드 왕의 오른팔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왕의 측근으로 올라서는 과정에서 좀 문제가 있었으니.

동생 토스티그는 노섬브리아의 백작이었는데, 이런 저런 이유로 통치에 애를 먹고 있었고, 그나마도 1063년에 들어서는 인기가 아주 폭락해버렸다. 그런 상황에서 그는 웨일스 전쟁에서의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세금마저 올려 버리게 된다. 가뜩이나 불만이었던 민심은 드디어 폭발했다. 1065년, 빡친 요크셔의 데인족들이 반란을 일으켜 도시를 점령하고 토스티그의 관리와 지지자들을 죽여버렸다. 그런데 토스티그로서는 기가 막히게도, 형인 해럴드는 동생에 반대하며 이들 노섬브리아의 반란군을 지원했다! 게다가 해럴드는 결국 토스티그를 쫓아내고, 머시아 백작 에드윈(Edwin)의 동생 모르카르(Morcar)를 대신 임명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행동들은 해럴드가 에드워드 왕의 후계자가 되는 데는 큰 보탬이 되었으나, 덕분에 고드윈 집안은 콩가루가 되었다. 더 중요한 것은, 동생 토스티그가 이 사건으로 인해 형에 대한 복수를 꿈꾸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훗날 엄청난 결과를 가져온다.


2. 왕위에 오르다[편집]


1066년 1월 5일, 당시 왕이었던 에드워드가 자식없이 사망했다. 왕의 오른팔이자 처남이었던 해럴드는 잽싸게 그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4] 명목은 에드워드 왕이 자신에게 왕위를 넘겼다는 것이었다. 에드워드 왕은 죽기 전에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는데, 잠깐 동안 혼수상태에서 깨어나 앞으로는 해럴드의 보호를 받을 것을 지시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긴 한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왕위를 해럴드에게 넘긴다는 것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여간 자문협의회[5]는 해럴드를 왕으로 뽑았고 왕이 죽은 다음 날 해럴드는 잉글랜드 왕 중 최초로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대관식을 가지며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다.

그런데 왕위에 오른 해럴드 2세를 보며 바다 건너에서 깊은 빡침을 느끼는 사람이 있었으니.... 참회왕 에드워드의 사촌인 노르망디 공국공작 윌리엄 1세였다. 죽은 에드워드 왕은 살아 생전 그에게 왕위를 넘길 듯한 언질을 주었다고 한다. 물론 명확한 증거는 없다. 하여간 자기에게 넘어올 줄 알았던 왕위를 뺏긴 것도 억울한데, 그것을 차지한 것이 하필 해럴드였다. 예전부터 해럴드와 윌리엄은 모종의 관계를 맺고 있었다. 에드워드 왕이 죽기 2년 전인 1064년, 해럴드는 항해 중에 난파돼서 프랑스 북부에 있는 퐁티외라는 영지에 상륙한 적이 있었다. 해럴드는 상륙하자마자 포로로 잡혔는데, 이 소식을 들은 윌리엄 1세는 그를 풀어주도록 지시했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해럴드는 윌리엄의 군대를 따라 전투에 참여했다. 윌리엄은 해럴드의 활약을 칭찬하며 선물도 하사하고 봉신으로 삼아 기사 작위까지 내렸다. 해럴드가 윌리엄에게 충성을 맹세했다는 기록도 전해지는데, 그것이 사실이건 아니건 간에 하여간 윌리엄은 해럴드를 자신의 충실한 신하쯤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ayeux_Tapestry_scene23_Harold_sacramentum_fecit_Willelmo_duci.jpg
윌리엄에게 충성을 서약하는 해럴드를 묘사한 인증샷바이외 태피스트리. 오른쪽의 콧수염을 기른 사람이 해럴드.[6]

그런 해럴드가 낼름 자신이 노리던 잉글랜드 왕위를 꿰찬 것이다. 윌리엄은 군사를 모집하고 함선을 건조하며 잉글랜드 침공 준비를 했다.

에드워드 왕의 죽음으로 인해 비게 된 왕위를 탐내던 사람이 또 한 명 있었으니, 그것은 덴마크 왕이며 노르웨이의 왕인 하랄 3세였다. 1066년 9월 8일, 그는 침략군을 이끌어 잉글랜드 북부에 상륙했고, 그곳에서 형을 향한 복수의 칼을 갈고 있던 해럴드의 동생 토스티그와 손을 잡았다. 그들은 동네지역 저항군들을 무찌르며 거침없이 진격했다. 이 소식을 들은 머시아의 에드윈 백작과 노섬브리아의 모카 백작의 군대가 맞서 싸웠으나, 9월 20일 요크 근처에서 벌어진 풀포드 전투에서 쳐발렸고 요크가 함락되었다. 그로부터 5일 후, 이번에는 해럴드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이들과 맞짱을 뜨게 되는데 이것이 스탬퍼드 브리지 전투다. 이 전투에서는 해럴드 2세가 승리했고, 그 와중에 하랄 3세와 토스티그 둘 다 전사했다. 하지만 해럴드 2세의 군대 또한 많은 피해를 입었다.[7]


3. 최후의 전투[편집]


이로부터 불과 이틀 후인 9월 27일, 윌리엄은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 남부에 상륙했다. 공교롭게도 하랄 3세와의 전투 때문에 마침 정예병인 후스카를이 해안가를 떠나있던 타이밍이었다. 당시 해럴드 2세는 많은 수의 병력을 잉글랜드 북부에 남겨 놓은 채 윌리엄과 맞서기 위해 허겁지겁 남쪽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그는 이동 중에 허겁지겁 군대를 모아가며 남쪽으로의 행진을 계속했다. 10월 14일, 런던 동남쪽의 헤이스팅스에서 윌리엄과 해럴드 2세는 잉글랜드 역사를 바꾸는 한판의 전투를 벌였다. 그것이 바로 헤이스팅스 전투였다.

하루 온 종일 치러진 이 전투 말미에 해럴드 2세는 전사했고, 그의 군대는 패배했다. 승리한 윌리엄은 잉글랜드를 정복하는 데 성공했고, 이어서 노르만 왕조가 들어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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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즉위식을 치르지는 못했지만 왕으로 추대되었던 에드거 2세의 왕위를 인정할 경우, 마지막 왕은 아니다.[2] 고드윈 가문은 웨식스 가문의 분가라는 설이 있다.[3] 백작(Earl)인데 매우 잘 나가는 가문인가 의문이 들 수도 있다. Earl은 흔히 백작으로 번역되기는 하나 이 당시 잉글랜드에는 Duke, 즉 공작위가 아직 없었다.(처음으로 공작위가 생기는 것은 흑태자 에드워드콘월 공작의 작위를 받을 때부터였다.) 즉, 백작(Earl)이 최고 귀족이었고, 따라서 웨식스 백작(Earl of Wessex)은 이 당시에는 사실상 웨식스 공작(Duke of Wessex)이었다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사실 영지가 "웨식스"라는 것부터 그 위상을 알 수 있는데, 웨식스는 잉글랜드 칠왕국의 일각이자 앨프레드 대왕의 주도하에 다른 6왕국을 정복한 지역이었다.[4] 정통성으로 따지면 에드먼드 2세의 손자이자 참회왕 에드워드의 형인 망명자 에드워드의 자식이었던 에드거 에설링이 가장 앞서긴 했지만 이때 아직 10살배기 어린아이였다는 점이 발목을 잡았다. 그래서 망명자 에드워드가 살아있었다면 이복이긴 하지만 선왕의 형이라는 강력한 명분이 있었기에 해럴드는 왕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5] Witenagemot.[6] 태피스트리에 적힌 글은 라틴어이다. UBI HAROLD SACRAMENTUM FECIT WILLELMO DUCI(해럴드가 윌리엄 공에게 서약한 곳).[7] 이때 300km를 4일만에 주파하는 미친 행군 속도를 선보였기에 그로 인한 피로 누적이 피해에 영향을 줬을 것으로 보인다. 거기다 이 누적된 피로와 전투 피해를 회복할 새도 없이 윌리엄이 밀고 들어오면서 다시 비슷한 속도로 돌아가 헤이스팅스 전투를 치러야 했으니 해럴드의 패배는 어쩌면 예정된 것이었을지 모른다. 그래도 해럴드가 전사하지 않았다면 잉글랜드가 승리했을 가능성도 있었으니 해럴드의 능력이 상당히 뛰어나다는 반증일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