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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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조선 중기의 관료, 외교관, 학자, 의병장, 문장가, 비평가[5] , 사상가.
호는 교산(蛟山)·성수, 본관은 양천.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났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정치 쪽으로는 뛰어나지 않았지만 허구의 이야기를 꾸며내며 망상하는 것에는 탁월한 재능을 지녔다고 하며 생전 문장, 시, 소설 등 문집으로 이름이 조선과 명나라에서 널리 알려졌으며, 아버지 허엽, 이복 형 허성, 친형 허봉, 친누나 허난설헌과 함께 허씨 5문장으로서 명성을 떨쳤다.
자유분방하고, 사회비판적이고, 다양한 사상들을 믿고, 다양한 출신의 사람들과 거리낌없이 교류했으며, 조선에서 천지간의 한 괴물이라고 비판을 받았다. #
조선시대 광해군 때 광해군과 사돈 관계[6] 까지 갈만큼 잘 나갔으나, 권신 이이첨 막후에서 종사하던 중 인목왕후를 싫어하여 몇 차례에 걸쳐 암살을 기도한 것이 유명하다. 그러나 이 암살 기도 때문에 당시 집권 세력 광해군과 북인에게 반역 혐의를 쓰게 되어 거열형을 당하고 역적이 되었다. 역적이 되면서 가문이 풍비박산나고 조선시대 내내 기피 대상이 되었다. 조선이 망할 때까지 복권받지 못하다가 1999년 4월 23일 양천 허씨 종친회가 가문 차원에서 복권했다.[7] #
허균을 연구한 대한민국 역사학자 이이화는 허균을 "인간을 사랑한 사람... 차별 없는 세상, 약자가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꿨다. 인본주의자이고 자유주의자다."라고 높이 평가하고 대한민국 행정안전부에서 "시대를 앞서간 비운의 천재 허균"이라고 평가하는 등 현대 들어서 한국에서 재평가되었다. # #
2. 가족[편집]
동인의 실세인 허엽의 아들로 형제로는 형인 허성, 허봉과 누나인 허난설헌이 있다. 동서 분당을 일으켰던 김효원이 후처인 김씨의 아버지이고 장인이었다.
아버지 허엽의 호는 '초당'인데 '초당 두부'를 고안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허엽은 널리 알고 박식했지만 정작 학문의 깊이는 얕다는 비웃음을 주변 유학자들로부터 받았다고 한다. 신분을 초월하여 누구에게나 친절하였고 온화한 인물이었던 퇴계 이황마저도 허엽을 가리켜 "만약 그 친구가 학문을 하지 않았다고 실토한다면 참 거짓없는 사람이라 할텐데''라고 비꼰 적이 있을 정도다.[8]
허엽은 율곡 이이와 정치적 성향이 달랐기에 서로 크게 대립했는데 오죽하면 허엽의 별명이 '묘지(卯地)'[9] 였을 정도. 허엽의 영향을 받은 건지 허균의 작은 형 허봉도 이이와 대립했는데 병조판서로 부임한 이이를 탄핵하다가 유배당할 정도였다.
허균의 가족들은 모두 문장에 재능이 있어 당대에 허균 가족을 가리켜 '허씨 5문장'[10] 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집안에 마가 꼈는지 하나같이 최후가 좋지 못하였는데 허봉은 종성군까지 유배를 갔다가[11] 풀려나 방랑하다가 38세가 되던 해에 요절했다. 허엽은 말년에 경상 감사로 나갔다가 지나치게 호색하였고 건강이 좋지 않아지게 되어 약을 복용한 뒤 행정을 괴이하게 하여 결국 관직에서 해임되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상주에서 객사했다.
허난설헌은 널리 알려져있다시피 고생 끝에 요절하였으며 허균은 반역죄로 거열형을 당했다. 그나마 장남인 이복형 허성이 좀 낫지만 임진왜란 직전에 일본도 다녀왔고[12] 전란 중에 고생했는데 훈명(공있는 신하에게 주던 칭호)도 받지 못한 채 죽었다.[13] 다만 허성은 1610년 광해군이 생모 공빈 김씨를 추숭하려 할 때 반대 상소를 올린 것 때문에 대간의 탄핵을 받고 한성부 4대문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서울 근교 선영이 위치한 광주부에서 은거하면서 조정에 상소를 올리는 등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하다가 1612년 음력 8월 6일 임시 거처에서 병사했다.#
허균은 동복 형제 허봉과 허난설헌과 절친한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허균의 저서 성소부부고에서 허균은 허봉을 형님#, 허난설헌을 자씨# 혹은 누님#이라고 불렀다. 이후 허봉과 허난설헌의 사망 이후 형님과 누님을 언급하면서 죽음에 대한 애통함을 여러번 표현한다.
반면 이복 형 허성은 나이차가 있어서인지 거리감을 유지했다. 저서 성소부부고에서 허균은 허성을 형이라 부르는 대신 "사형"이라고 부르는 등 존칭으로 부른다.#
3. 노비[편집]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허균에게 총 8명의 노비가 있었는데 허균이 원래 데리고 있던 노비 4명과 1615년 광해군에게 하사받은 외거 노비 4명이며 허균의 노비들 중 4명은 1623년 시점 "나이가 어리다." #
<양천허씨노비분재기(陽川許氏奴婢分財記)>에 의하면 양천 허씨 문중은 1681년부터 1784년까지 103년간 내려오면서 양천허씨 문중 3남 5녀에게 노비(奴婢)를 출생서열대로 나누어 주었다고 하니 허엽의 가문도 자식들에게 노비를 출생서열대로 나누어 주었고 허균의 노비들도 형제 자매들과 함께 허엽의 노비들을 분급받은 것으로 보인다. 다만 1681년 이전 양천허씨의 노비분재기가 없으므로 확실하진 않다. #
허균의 노비 중 이름이 확인되는 노비는 "돌이"이다. #
3.1. 허균의 노비[편집]
1608년 음력 5월 19일 시점 허균을 따르는 충직한 남성 노비가 한명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허균의 <성소부부고>에 의하면 허균이 명나라 후베이성 황강시에서 사신 일을 하고 있을 때 한성부 집에서 남성 노비가 와서 "관과(館課)에 세 번 일등하여 품계가 올랐다"고 말했다 한다.
1608년 음력 12월 허균이 숙정 민인길에게 남성 노비를 보내서 망언(妄言)한다는 누명을 풀어달라고 부탁했다. #
허균에게 남성 노비 '돌이'가 있었는데 1619년 음력 1월 5일 사복시 개천가에서 잡혀서 전옥서에 넘겨졌다. #
허균에게 품계가 올랐다고 말한 노비와 이후 민인길에게 보내진 노비가 동일인물인지 위 개천가에서 잡힌 '돌이'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위에 언급된 '돌이'가 실록에 언급될 정도로 허균과 매우 밀접한 관계였거나 1618년 허균의 옥사에 직접적으로 연관된 인물인 것으로 보인다.[14]
허균에게 이름 불명의 여성 노비가 있었는데, 1617년 경운궁을 숙위한 금위군 소속 겸사복 김윤황이 여성 노비의 남편이라고 한다. 김윤황은 이후 허균의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서 거열형 당한다.
1619년 음력 5월 3일 허균의 옥사 당시 체포된 허균의 노비들은 광해군의 명에 따라 허균을 심문한 공신들에게 주어졌다. #
1623년 음력 2월 29일 시점 허균의 이복 형 허성의 셋째 딸의 남편 박홍도(朴弘道)[15] 가 허균의 노비 중 어린 노비 4명의 행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옥서는 금부의 아문은 아니지만 역적의 옥사에 관계되어 수금한 죄수일 경우 또한 중대한 것입니다. 지난번에 신이 전옥서를 적간할 때 역적 허균의 노비 8명 중에 나이가 어린 노비 4명이 모두 간 곳이 없기에 신이 이상하게 여겨 물어보았더니 그들이 옥에서 나가 세력가의 근처에 의탁해 있으면서 사환 노릇을 하여 마치 자기들의 노비처럼 부리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본서의 제조도 모르는 것으로서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보통 죄인도 저들이 멋대로 방면시킬 수 없는 것인데, 더구나 허균의 옥사는 아직 끝나지도 않은 것이니 만일 국문할 일이 있을 경우 어느 누구에게 물어볼 수 있겠습니까. 옥관이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죄도 역시 큽니다. 따라서 옥관을 우선 추문하게 하고 허균의 노비 4명을 사환으로 부리고 있는 와주(窩主)도 일일이 조사하여 법에 따라 치죄하게 하소서. 신이 해방의 승지로 있으면서 전옥서의 제조를 겸임하고 있기 때문에 감히 아룁니다.
《조선왕조실록》 광해군 일기 #
3.2. 광해군의 외거 노비[편집]
1614년 허균은 천추사로 중국에 가서 구입해 온 명나라 문인 오원췌(伍員萃)의 저작 <임거만록(林居漫錄)>에서 "종계변무(宗系辨誣)의 결과가 반영되지 않고 예전대로 이성계(李成桂)의 계보가 과거 그대로 수록되어 있는가 하면, 뜻밖에도 광해군이 그의 형 임해군(臨海君)의 자리를 빼앗아 왕위에 올랐다"는 내용이 있다는 것을 알고 광해군에게 보고한 후 관련 책자를 조정에 가지고 오라는 명을 받았으며, 1615년 보고한 상으로 광해군에게 전 20결과 외거 노비 4명을 하사받은 적이 있다. # #
1619년 음력 5월 3일 허균의 옥사 당시 체포된 허균의 기존 노비들과 함께 광해군의 명에 따라 허균을 심문한 공신들에게 주어졌다. #
4. 특징[편집]

5. 생애[편집]

6. 어록[편집]
천하에 두려워해야 할 바는 오직 백성일 뿐이다.
홍수나 화재, 호랑이, 표범보다도 훨씬 더 백성을 두려워해야 하는데,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 항상 업신여기며 모질게 부려먹음은 도대체 어떤 이유인가?
ㅡ 《성소부부고》 제11권 호민론 #
국가를 다스리는 사람과, 함께 하늘이 맡겨 준 직분을 다스릴 사람은 인재(人才)가 아니고서는 되지 않는다. 하늘이 인재를 태어나게 함은 본래 한 시대의 쓰임을 위해서이다.
그래서 인재를 태어나게 함에는 고귀한 집안의 태생이라 하여 그 성품을 풍부하게 해주지 않고, 미천한 집안의 태생이라고 하여 그 품성을 인색하게 주지만은 않는다.
ㅡ 《성소부부고》 제11권 유재론 #
남녀간의 정욕은 하늘이 준 것이고, 윤리와 기강을 분별하는 일은 성인의 가르침이다. 하늘은 성인보다 높으니, 차리리 성인의 가르침을 어길지언정 하늘이 준 본성을 거스를 수는 없다.
ㅡ 《순암집》 순암선생문집 제17권 / 잡저(雜著) 천학문답(天學問答) #
...슬픔이 일면 반드시 곡을 하는 것인데, 슬픔이 일어나는 것도 역시 단서가 여러 가지이지요... 모두 품은 생각이 있어서 운 것이지, 이별에 상심하고 억울한 마음을 품으며 하찮은 일로 해서 아녀자의 통곡을 흉내낸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늘날의 시대는... 더욱 말세요, 국사는 날로 그릇되고, 선비들의 행실도 날로 야박해져서 친구들 사이에 배치되는 것도 갈림길이 나뉜 것보다 더하며, 어진 선비가 고생을 겪는 것도 비단 길이 막힌 것뿐만 아니어서, 모두 인간 세상 밖으로 도망해갈 생각을 하고 있으니 만약... 군자로 하여금 이 시대를 목격하게 한다면 어떤 생각을 품게 될는지 모르겠소. 아마도 통곡할 겨를도 없이, 모두... 돌을 끌어안거나 모래를 품고 투신 자살하고자 할 것이오.
-ㅡ 《성소부부고》 제7권 통곡헌기 #
7. 평가[편집]

8. 사상[편집]

9. 작품[편집]

10. 기타[편집]
- 조의제문에 대해 맹렬히 비난하며 김종직이 ‘조의제문’을 짓고도 노모 때문에 마지못해 세조의 조정에서 벼슬한 것처럼 처신한 것은 위선이었다고 비난한다.
- 정도전을 존경했다 한다. 제자 기준격의 상소에 의하면 허균은 "한평생 정도전(鄭道傳)을 흠모하여 항상 ‘현인(賢人)’이라고 칭찬하였으며, 《동인시문(東人詩文)》을 뽑을 때에도 정도전의 시를 가장 먼저 썼다." # 그러나 성소부부고에서 정도전과 권근에 대한 론을 쓸 때는 정도전이 고려의 신하이면서도 이성계를 왕으로 세웠으므로 고려의 간신이며, 죄가 있어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고 비판하였다.
- 부친 허엽의 친가인 한성부 건천동은 이순신의 생가이며, 스승 류성룡은 이순신의 친구이다. 그러므로 이순신을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이순신을 존경했으며 스승 류성룡이 이순신을 등용했을 때 이순신을 "나라를 중흥시킨 큰 기틀"이라고 불렀다. # 그리고 1605년 음력 7월 실지 이춘영(李春英)을 대신해서 이순신의 공신록권(功臣錄券)을 쓴 적이 있다. #
- 이지의 책 분서를 읽은 적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허균이 1618년 즈음 엮은 <한정록> 제13권에서 언급된 내용이다.
나는 일찍이 바둑은 세상을 피할 수 있고 잠은 세상을 잊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바둑은 짝을 지어 밭을 가는 장저(長沮)ㆍ걸닉(桀溺)과 같아서 한쪽이 없으면 할 수 없지만, 잠은 바람을 타고 다니는 열자(列子)와 같아서 홀로 가고 홀로 올 수 있으니 아, 훌륭하다 희이(希夷 송(宋) 진박(陳搏)의 호)여, 잠의 뜻을 깊이 터득하였구나. 《이씨분서(李氏焚書)》
ㅡ 《한정록》 제13권 현상(玄賞) #
- 평생을 친밀하게 지내며 벗 혹은 누이처럼 지내던 기생이 있었는데 바로 부안의 명기 이매창.[16] 그러나 남녀 관계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매창은 공공연하게 유희경에 대한 연모의 마음을 밝혔기 때문이다.[17] 허균도 이매창에게 보내는 편지에 육체적인 관계를 맺지 않고 지적 교류를 한 소울 메이트로 남은 것을 평생 자랑으로 삼았다.[18]
- 허균의 문학 정신을 기리고 변화와 개혁의 시대인 21세기에 어울리는 문학인을 찾기 위해 강원일보와 허균·허난설헌선양사업회[19] 가 1999년부터 "허균문학작가상"이라는 문학상을 전국의 신인 및 기성 작가를 대상으로 수상했다. 2022년 시점 총 13개의 중편소설 작품들을 수상했다. 실제로 허균이 생전 강조한 것이 재능 발견과 인재 양성이었으니 허균의 사상에 걸맞는 문학상이라 할 수 있다.
11. 대중매체에서[편집]

12. 관련 다큐[편집]
- 1995년 1월 21일 KBS에서 허균에 대한 다큐멘터리 <역사의 라이벌 11회 – 허균과 이이첨, 적인가 동지인가>를 방영했다.
- 2000년 6월 3일 KBS에서 허균에 대한 다큐멘터리 <KBS 역사스페셜 – 조선왕조 기피인물 1호, 허균>을 방영했다.
- 2008년 7월 5일 KBS에서 허균에 대한 다큐멘터리 <한국사전 48회 – 조선의 자유주의자 혁명을 꿈꾸다, 허균>을 방영했다.
- 2020년 8월 15일에서 9월 10일 사이 <토크멘터리 역사>에서 허균의 일생과 작품을 시리즈로 다루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