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베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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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베이성은 중국의 성급 행정구역으로, 성도는 스자좡시다. 한국 한자음으로는 '하북성'인데 황하(黃河)의 북쪽에 있다고 하여 이런 이름이 붙었다. 비슷한 지명인 '허난성'은 황하 남쪽 성이라는 의미이며 '후난성, 후베이성'은 각각 동정호(洞庭湖) 남북의 성이다. 한국 한자음으로 하북성이다.
약칭은 지(冀 )로 옛 지명 기주에서 유래했다. 과거 연나라가 있던 지역이라 옌(燕 )이라고 하기도 한다.[2] 인구는 약 7,100만 명이다. 북쪽으로 내몽골 자치구, 동쪽으로 랴오닝성, 서쪽으로 산시성(山西), 남쪽으로 허난성, 산둥성과 접한다. 화베이 지방의 가장 북쪽에 위치한 성이다. 베이징에 수도를 둔 정부의 직할지였기 때문에 북양정부 시절까지는 즈리성(直隸省; 직례성)이라고 불렀으나[3] 1928년 난징에 수도를 둔 국민정부가 수립되면서 허베이성으로 이름을 고쳤다.
중국의 수도인 베이징시와 그 바로 옆의 또다른 직할시인 톈진시를 둘러싸고 있는 성으로, 한국으로 따지면 경기도와 비슷한 포지션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한국의 경기도와 달리 중국 전국 기준으로 볼 때 도시화가 많이 진행된 성은 아니다. 중국 정치의 핵심부인 베이징에 가까워 남쪽의 상하이 등 경제특구들보다 아직 경제적 개방이 덜 되었고 베이징시와 톈진시의 면적이 거의 강원도만 해서 허베이성까지 베이징, 톈진 도시 지역이 확대되지 않았다.[4] 물론 베이징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허베이성 일대에 정착하는 경우는 있고 베이징과 톈진 사이에 낀 허베이성의 월경지이기도 한 랑팡시 옌자오(燕郊)는 베드타운으로 유명하다. 한국으로 치면 천안이나 아산, 춘천에서 서울로 출퇴근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2017년에 허베이성 중부 일대에 위치한 슝현(雄縣), 룽청(龍城), 안신(安新) 일대를 묶어서 슝안신구(雄安新區)를 경제특구로 지정하고 벤처산업 위주로 개발하겠다고 당국에서 발표하면서 이 지역에서 부동산 투기 열풍이 일었다.[5]
북부는 산지를 이루고 남쪽은 광활한 화북평야가 펼쳐져 있어 대도시는 당연히 남쪽에 집중되어 있다. 대표적인 도시는 성도인 스자좡시를 비롯해 한단시[6] , 다퉁시가 있으며 1976년의 탕산 대지진으로 유명한 탕산도 이곳에 위치한다.
기후는 한랭 건조하여 한반도의 중부지방과 비슷하다. 다만 이 곳이 좀 더 건조하며 북쪽의 내몽골 자치구와 접한 지역은 아예 건조기후가 나타난다.
호타하가 허베이성 스자좡시, 창저우시를 흐른다.
||1. 개요[편집]
허베이성은 중국의 성급 행정구역으로, 성도는 스자좡시다. 한국 한자음으로는 '하북성'인데 황하(黃河)의 북쪽에 있다고 하여 이런 이름이 붙었다. 비슷한 지명인 '허난성'은 황하 남쪽 성이라는 의미이며 '후난성, 후베이성'은 각각 동정호(洞庭湖) 남북의 성이다. 한국 한자음으로 하북성이다.
약칭은 지(
중국의 수도인 베이징시와 그 바로 옆의 또다른 직할시인 톈진시를 둘러싸고 있는 성으로, 한국으로 따지면 경기도와 비슷한 포지션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한국의 경기도와 달리 중국 전국 기준으로 볼 때 도시화가 많이 진행된 성은 아니다. 중국 정치의 핵심부인 베이징에 가까워 남쪽의 상하이 등 경제특구들보다 아직 경제적 개방이 덜 되었고 베이징시와 톈진시의 면적이 거의 강원도만 해서 허베이성까지 베이징, 톈진 도시 지역이 확대되지 않았다.[4] 물론 베이징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허베이성 일대에 정착하는 경우는 있고 베이징과 톈진 사이에 낀 허베이성의 월경지이기도 한 랑팡시 옌자오(燕郊)는 베드타운으로 유명하다. 한국으로 치면 천안이나 아산, 춘천에서 서울로 출퇴근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2017년에 허베이성 중부 일대에 위치한 슝현(雄縣), 룽청(龍城), 안신(安新) 일대를 묶어서 슝안신구(雄安新區)를 경제특구로 지정하고 벤처산업 위주로 개발하겠다고 당국에서 발표하면서 이 지역에서 부동산 투기 열풍이 일었다.[5]
2. 지형과 기후[편집]
북부는 산지를 이루고 남쪽은 광활한 화북평야가 펼쳐져 있어 대도시는 당연히 남쪽에 집중되어 있다. 대표적인 도시는 성도인 스자좡시를 비롯해 한단시[6] , 다퉁시가 있으며 1976년의 탕산 대지진으로 유명한 탕산도 이곳에 위치한다.
기후는 한랭 건조하여 한반도의 중부지방과 비슷하다. 다만 이 곳이 좀 더 건조하며 북쪽의 내몽골 자치구와 접한 지역은 아예 건조기후가 나타난다.
호타하가 허베이성 스자좡시, 창저우시를 흐른다.
3. 행정구역[편집]
4. 산업과 교통[편집]
베이징 주변임에도 불구하고 중국 개방 정책의 특성상 양쯔강 유역의 상하이나 주강 유역의 선전 등 남중국의 다른 여러 해안지역 성보다는 대체적으로 미개발 지역이 많다. 그러나 허베이의 많은 인구를 바탕으로 제조업은 상당히 발달되어 있다. 농업은 거의 전적으로 밀농사를 짓는데 이는 화북 지방의 대체적인 특성이기도 하다.
철강 산업은 상당히 발달했는데 세계 철강 생산량 1위는 중국, 2위는 허베이성, 3위는 탕산시, 그리고 9위는 탕산시에서 숨기고 알리지 않은 생산량(...)이라는 유머가 있을 정도다.
베이징과 가까운 만큼 교통은 굉장히 편리하지만 관내를 벗어난 외곽 북쪽은 거의 듣보잡 취급받는다. 몽골로 통하는 철도가 허베이성의 북쪽을 지나 외곽인 내몽골 자치구로 들어가긴 한다. 만주 지역과 중국 본토를 잇는 중간지대 역할도 하고 있다.
5. 역사[편집]
기주 + 유주.
고대부터 평야지대를 바탕으로 관중(산시성)-중원(허난성) 등과 더불어 가장 풍요로운 동네였기 때문에 하북을 근거지로 삼았던 원소는 군웅할거 초창기에 최강의 세력을 구축했고 원소를 쓰러뜨린 조조 역시 관중-중원과 더불어 이곳에서 나오는 국력을 바탕으로 촉과 오를 압도할 수 있었다. 게다가 금나라, 원나라, 청나라 같은 북방의 수렵, 유목민족이 세운 정복왕조 역시 수도권을 화북지역으로 자리잡으며 정치 중심지가 점차 황하 유역에서 이곳으로 이동하였다.
춘추전국시대부터는 지금의 베이징 지방이 '계'라는 지명으로 불리기 시작해 연나라의 중심지가 되었다는 게 다수설의 견해다. 전한대에는 '유주'라는 행정구역으로 편성되어 그렇게 불렸다. 삼국시대에는 공손찬의 근거지가 되기도 했다. 후한 말에 유비, 관우, 장비가 그 유명한 도원결의를 맺은 곳도 지금의 이 지역이다. 조운의 출생지도 허베이성 쪽인 상산 진정이다. 조운이나 장비가 자신을 소개할 때 '연'인 장비, '상산'의 조자룡이라고 하는 것도 자기 고향을 말하는 것이다.
이후 삼국을 통일한 서진이 북방 민족의 침입을 받아 허베이 지역을 빼앗겼는데 이때 이곳에 전연, 후연 등의 나라들이 들어섰다. 수나라, 당(통일왕조) 시대에는 한족의 문화권에 들어갔지만 변방에 불과한 상황이었다. 북쪽인 점도 있고, 타 민족의 침입이 상당히 잦았던지라(...)
5대 10국 시대의 마지막에 이 지역을 연운 16주라는 이름으로 거란에게 뺏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후 통일 왕조인
그리고 금이 멸망하고 원나라가 들어서자 마침내 이 지역은 제국의 중심지로 거듭난다. 명나라[7] 와 청나라 역시 이 지역을 수도로 삼으면서 정치적으로 중요한 곳으로 떠올라 지금에 이르고 있다.
명나라 때와 청나라 때는 수도 베이징에 직접 예속된다는 의미인 즈리성(直隸省)이라고 불렀고,[8] 중화민국이 된 뒤에도 북양정부의 수도가 북경에 있었기 때문에 계속 직예성으로 불리다가 국민당의 2차 북벌로 북양정부가 무너지고 1928년 6월 국민정부가 베이징까지 점령하면서 베이징은 베이핑으로, 직예성은 하북성으로 개칭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 지역의 군벌은 직예군벌로 불렸다. 1914년에 기존 순천부가 경조지방으로 개편되어 즈리성에서 분리되었고, 이때 기존에 순천부 관할이었던 24개 현 중 바오안(保安), 원안(文安), 다청(大城), 닝허(寧河)의 4개 현을 넘겨받았다. 행정구역 개편으로 내몽골 지역에 차하얼 특별행정구와 러허 특별행정구가 설치되면서 이들 특별행정구[9] 에 북부 지역을 내주어 면적이 축소되었다. 1928년에는 경조지방이 폐지되어 중심 시가지만 베이핑시로 남으면서 경조지방에 속해 있던 현들을 넘겨받았다.
1933년 열하사변으로 일본군의 침공을 받았고 하북 사건을 구실로 1935년 6월 10일 하매 협정이 체결되면서 일본의 영향력이 확대되었으며 1935년 11월 25일, 기동사변으로 기동방공자치위원회가 수립되었고 1936년 지둥방공자치정부로 거듭나면서 500만에 달하는 인구가 일본의 지배에 들어갔다. 1937년 루거우차오 사건이 발생하면서 중일전쟁이 이곳에서 일어났으며 항전 기간 동안 일본군의 점령지로 8년을 점령당했고 신멸작전이 벌어져 대규모 학살이 벌어진 곳이다. 이 학살로 당시 세를 불리며 거대해지던 팔로군의 기세가 꺾였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수도를 다시 베이징에 두었지만 다시 즈리성으로 이름이 바뀌지는 않았다. 중화민국 말기 허베이성 정부는 베이핑시에 있었으나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직전 바오딩시에 허베이성 인민정부를 설치하면서 바오딩시로 성도가 옮겨졌다. 이후 베이징시 주변 상당 지역이 베이징시에 편입되고[10] 차하얼성과 러허성이 1952년과 1955년에 각각 폐지되면서 그 남부 지역을 다시 편입했으며 1958년에는 톈진시를 재편입하여 톈진시로 성정부를 이전하였다. 톈진시가 1967년에 다시 직할시로 분리되면서 바오딩시를 성도로 삼았으나 당시 문화대혁명의 영향으로 성도 기능을 할 수 없어 이듬해에 스자좡으로 다시 성정부를 이전하여 현재까지 스자좡을 성도로 삼고 있다.
6. 역대 영도인[편집]
7. 여담[편집]
허베이성 특산물로 위현의 배가 통째로 들어간 술 영불분리가 유명하다.
쇳물을 하늘로 올리는 따수화라는 공연이 볼거리다.
명나라의 장군 마귀의 4대손 마순상(麻舜裳)이 조선에 귀화하여 생긴 상곡 마씨(上谷 麻氏)의 본관이 허베이성에 있는 지명이다.
8. 출신인물[편집]
8.1. 실존인물[편집]
8.1.1. 고대[편집]
- 진시황 기주 한단 (현재의 한단시)
- 소정방 기주 무읍 (현재의 헝수이시 우이현)
- 위징 기주 거록무양군 (현재 싱타이시)
- 유비 유주 탁군 (현재의 바오딩시 줘저우시)
- 장비 유주 탁군
- 간옹 유주 탁군
- 장특 유주 탁군
- 조운 기주 상산군 (현재의 스자좡시 정딩현)
- 조광윤 (송태조) 유주 탁군
8.1.2. 현대[편집]
8.2. 가상인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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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국은 전 지역(홍콩, 마카오, 대만 포함)이 중국 표준시를 사용한다.[2] 실제로 허베이성 싼허시에 燕郊라는 지역이 있다.[3] 반대로 명나라의 첫 도읍인 난징 일대의 직할지를 가리키는 남직례(南直隷)도 있었는데 청나라 때 강남성(江南省)으로 이름을 바꿨다가 순치제 때 장쑤성과 안후이성으로 쪼개졌다.[4] 당장 베이징만 해도 5환지역 밖으로 넘어가면 그냥 농사짓고 사는 시골이다. 베이징 다싱 국제공항도 공항 건설 전에는 그냥 농촌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오히려 경제적과 문화적으로 경기도와 같은 위상을 가진 지역은 광둥성이다. 중국의 재벌이나 대기업의 본사는 베이징이나 허베이성에 위치하지 않고 광둥성에 위치해 있으며 회사들도 이곳에 집결하였는데 이는 정부가 제조업의 성장을 위해 작정하고 광동의 광저우시나 선전시, 둥관시 등지를 공업특구로 지정해 밀어주고 있기 때문이다.[5] 이는 1980년대 선전시, 1990년대 상하이 푸둥지구 이후 3번째 경제특구 개발이다.[6] 고사성어 한단지몽의 그 한단이 맞다. 중국어로도 한단(Hàndān)[7] 명의 초기 수도는 금릉(지금의 난징)이었으나 3대 황제 영락제가 북경으로 천도한 뒤 명의 수도가 되었다.[8] 구체적으로는 명 초기에 수도였던 난징 주변을 직례라고 하였다가 베이징으로 천도한 후 지금의 허베이성에 북직례를 설치하고 기존의 직례를 남직례라 하였다. 청나라가 들어선 후 북직례를 직례성으로 개편하고 남직례를 강남성으로 개편했다가 강남성을 장쑤성과 안후이성으로 나누었다.[9] 이들은 1928년에 국민정부의 행정구역 개편을 통해 차하얼성과 러허성으로 각각 개편된다. 이듬해에는 내몽골 서부에 닝샤성과 쑤이위안성이 신설되어 내몽골 지역의 행정구역이 새북 4성(요새(만리장성) 북쪽에 있는 4개 성을 의미)으로 완전히 정비되었다.[10] 다만 이 지역들은 베이징과 무관한 지역은 아니고 모두 청대 순천부 및 북양정부 시기 경조지방에 속해 있던 지역이다. 현재의 베이징시 영역은 순천부와 경조지방의 영역보다는 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