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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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성
許筬 | Heo Seong


출생
1548년(명종 3년)
조선 한성부 건천동 허엽 본가
(現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18길 19(인현동1가)[1])[2]
사망
1612년 8월 31일 (향년 64세)
(음력 광해군 4년 8월 6일)[3]
조선 경기도 광주부
(現 대한민국 경기도 광주시)
병사 (의문사)[4]
묘소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맹리 산61
학력
미암 유희춘의 문하
증광시 생원시 급제 (1568년)
문과 별시 병과 급제 (음력 1583년 8월 28일)
직업
관료, 외교관, 군인, 문장가
서명
파일:허성 수결.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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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양천(陽川)[1]
국적
파일:조선 어기.svg 조선
공훈
선무원종공신 1등 (宣武原從功臣 一等, 1605)
익사공신 1등 (翼社功臣 一等, 1613)[2]
위성원종공신 1등 (衛聖原從功臣 一等, 1614)[3]
최종
관등

지중추부사
(知中樞府事)

성(筬)

공언(功彦)

악록(岳麓), 산전(山前)
종교
유교 (성리학)
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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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인

[[동인(조선)|
동인
]] >
작품
《악록집(岳麓集)》
부모
부친 - 허엽(許曄, 1517 ~ 1580)
친모 - 한이정(韓二貞, 1515 ~ ?)[4][5]
계모 - 강릉 김씨 김광철(金光轍)의 딸
형제
자매

친누나 - 허묵석(許墨石, 1544 ~ ?)[6]
친누나 - 허대정(許大貞, 1546 ~ ?)[7][8]
이복 남동생 - 허봉(許篈, 1551 ~ 1588)
이복 여동생 -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 ~ 1589)
이복 남동생 - 허균(許筠, 1569 ~ 1618)
배우자
전처 - 전주 이씨 이헌국(李憲國)[9]의 딸
후처 - 의령 남씨 남언순(南彦純)의 딸
측실
?[10]
자녀
4남 4녀 [ 펼치기 · 접기 ]
[1]
[ 전주 이씨 소생 - 없음 ]
[ 의령 남씨 소생 - 3남 4녀 ]
장녀 - 허용업(許龍業, 1568 ~ ?)
차녀 - 허봉업(許鳯業, 1569 ~ ?)
장남 - 허실(許實, 1574 ~ ?)
3녀 - 허경업(許敬業, 1579 ~ ?)
차남 - 허부(許 宀+缶, 1585 ~ ?)
3남 - 허□(許 宀+?, 1592 ~ ?)
4녀 - 양천군부인 허예업(陽川郡夫人 許禮業, 1589 ~ ?)[2]
서자 - 허밀(許密)

<bgcolor=#d75342> 경력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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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d예문관 정자
사간원 정언
사헌부 헌납
성균관 전적
일본통신사 서장관
홍문관 교리
문례관
관상괌 교수
이조 좌랑
강원도 순무어사
사헌부 집의
홍문관 응교
세자시강원 보덕
의정부 사인
접반 부사
이조 참의
승정원 동부승지
승정원 우부승지
병조 참지
우승지
성균관 대사성
영흥부사
전라도 관찰사
중추부 동지사
홍문관 부제학
이조 참판
사간원 대사간
예조 참판
예조 판서
병조 판서
경연 지사
중추부 동지사
이조 판서
돈녕부 지사
지중추부사}}}}}} ||}}}}}}}}} ||


1. 개요
2. 가족
3. 생애
3.1. 생애 초기
3.3. 선조 사후
3.4. 최후
4. 평가
5. 작품
5.1. 수결
5.2. 시문집
6. 기타
7. 대중매체에서



1. 개요[편집]


조선 중기의 관료, 외교관, 군인, 문장가.

호는 악록, 산전, 본관은 양천. 한성부에서 태어났으며, 오랜 기간 관료 생활을 조정에서 했다. 일본통신사 서장관, 강원도 순무어사를 역임하는 등 임진왜란 전후 활발한 활동을 했다. 그러나 1610년 광해군의 생모 추숭을 반대한 것 때문에 한성부에서 쫓겨나서 경기도 광주부에서 은거하다 갑자기 사망했다.[11]


2. 가족[편집]


동인의 실세인 허엽의 아들로 아버지 허엽, 이복동생인 허봉, 허난설헌, 허균과 함께 허씨 5문장으로 불렸다.

이복동생들하고는 나이차가 있어서인지 이복 동생 허균이 동복 형 허봉을 형님#, 동복 누나 허난설헌을 자씨# 혹은 누님#이라고 부른 것과는 달리 허성을 형이라 부르는 대신 "사형"이라고 부르는 등 존칭으로 부른다.#

이복동생 허균에게 잘 해준 것으로 보인다. 1610년 허균이 허성의 삼남 허보와 허성의 삼녀의 남편 박홍도의 과거 답안지를 체점하면서 합격시켜준 일이 있었으며 #, 1611년 허성의 맏아들 허실이 허균에게 음식을 보내서 허균이 고마움을 표하며 답장을 했다.#


3. 생애[편집]



3.1. 생애 초기[편집]


부친 허엽의 친가가 있는 한성부 건천동에서 태어났다.

미암 유희춘의 문하에서 한문학과 성리학을 수학했으며, 1568년 증광시 생원시에 합격인원 100명 중 5위로 급제했다.#

1583년 음력 8월 28일 문과 별시 병과에 합격인원 33명 중 6위로 급제했다.#

이후 관료 생활을 하면서 조정에서 동인서인 사이의 대립이 심화되자 동인의 실세가 된 아버지 허엽을 따라서 동인의 일원이 되었다. 그러나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갈린 뒤 남인을 대표하는 인물로 성장했다.[출처]


3.2. 임진왜란, 정유재란 당시 행적[편집]


임진왜란 직전 일본통신사 서장관으로서 일본을 방문하고 난 후 일본이 침략할 것이라고 통신사 정사이자 서인 황윤길과 함께 주장했다. 선조의 말에 의하면 허성은 "왜적들이 쳐들어오지 않는다고 보장하기 어렵다"라고 조정에서 말했다. 그러나 동인이자 일본통신사 부사 김성일이 "그러한 정상은 발견하지 못하였는데 황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인심이 동요되게 하니 사의에 매우 어긋납니다."라고 주장해서 일본의 침략 여부를 두고 동인과 서인의 대립이 시작되었다.#

임진왜란이 터진 후 평안도로 피난가는 선조를 따라 간 후 선조에게 군사를 모집하여 왜적과 싸우겠다고 자청했다. 이후 강원도 순무어사로 임명되었으며, 그 공로로 1605년 4월 16일 이복 동생 허균과 함께 선무원종공신 1등(宣武原從功臣一等)에 녹훈되었는데 이 시기부터 허균과 함께 가문의 본거지 강원도에서 항일 활동을 한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경상도처럼 의병을 일으키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북도의 왜적은 그 수효가 많지 않은데도 한 사람도 기운을 내어 막지 않고 향도(向導)가 되어 영입하는 자가 많으니 지극히 통분합니다. 제도(諸道)에는 모두 소모장(召募將)이 있으나 북도는 현재 조처되지 않고 있습니다. 황찬(黃璨)이 현재 영흥(永興)에 있는데 이 사람이 바로 소모하는 소임에 합당하니, 당상(堂上) 가자를 제수하여 그로 하여금 제읍(諸邑)에 출입하면서 힘을 다하여 소모하게 하소서. 전일 좌랑(佐郞) 허성(許筬)이 강원도의 소모관(召募官)으로 나간 지 이미 여러 달이 지났는데도 조금도 한 일이 없고 우전(郵傳)의 비용만 허비하였으며 장계 또한 없으니, 극히 놀랍습니다. 먼저 파직시키소서."라고 말하면서 파직을 청해서 순무어사를 그만두고 조정에 복귀해서 홍문관 교리가 되었다.# #


3.3. 선조 사후[편집]


1608년 2월 선조가 죽기 전 가장 신임하는 중신 7명인 ‘유교 7신(遺敎七臣)’, 또는 ‘고명 7신(顧命七臣)’에 포함되었으며, 선조가 운명하기 직전 다른 6명의 신하들 유영경, 한응인(韓應寅), 신흠, 박동량(朴東亮), 서성(徐渻), 한준겸(韓浚謙)과 함께 선조의 유교 “죽고 사는 것은 천명이 있는 법이므로 성인도 모면하지 못하는 것이다. 다만 영창대군이 아직 나이가 어려서 미처 장성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는 것이 한스럽다. 바라건대, 제공(諸公)은 영창대군을 사랑하고 붙잡아 달라. 감히 이로써 부탁한다.”를 들었다.

1609년 임해군 옥사 사건 당시 국문한 위관(委官)과 그 옥사를 고변한 사람 등 48명이 공신이 되었는데 허성, 김이원(金履元), 류희분(柳希奮), 최유원(崔有源), 윤효전(尹孝全)이 익사공신 1등으로 녹훈되었다.#

1610년 허성이 돈녕부 지사로 일할 때 광해군이 생모 공빈 김씨를 추숭하려고 했다. 허성은 '예경(禮經)'을 근거로 삼아 광해군의 추숭을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1년후인 1611년 당시 이복동생 허균에게 음식을 보내는 등 도와준 것으로 보인다. 성수부부고에 의하면 1611년 허성의 맏아들 허실이 허균에게 음식을 보내서 허균이 "자네는 내가 양식 떨어질까 근심하는데, 나도 역시 자네가 위험을 무릅쓰고 무턱대고 행동하는 것을 걱정하네. 내가 자네를 근심하는 것은 자네가 내 걱정을 하는 것보다는 더할 터이니, 행동을 삼가서 다시는 어버이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도록 하게나."라고 조카 허실에게 편지를 보낸다.#


3.4. 최후[편집]


1612년 대간에서 탄핵을 받아서 관작을 삭탈당하고 문외로 출송되었다. 이때 광해군은 “추숭하는 예를 이루려는 때에 김륵(金玏)이 갑자기 사리에 어긋나는 의논을 제기하였으니, 그 정상이 가증스럽다. 그의 패악스러운 의논은 허성의 상소에서 시작된 것인데, 서로 화답하듯이 상소하여 사람들의 이목을 현란시키니, 그 죄가 크다. 김륵과 허성은 모두 관작을 삭탈하고 성문 밖으로 내쫓도록 하라.”라고 하교하였다. 이후 한성부 4대문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서울 근교 선영이 위치한 광주부에서 은거하면서 조정에 상소를 올리는 등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하다가 1612년 음력 8월 6일 임시 거처에서 병사했다.# 1612년 음력 8월 9일 갑자기 죽었다는 소식이 조정에서 전해졌으며, 광해군은 "허성은 훈명(勳名)도 받지 못하고 갑자기 죽었다. 관에서 갖추어 줄 장사 물품을 법전에 의거해서 시행하라."라고 말했다.#

허성은 허엽(許曄)의 아들이다. 그의 배다른 동생인 허봉(許篈)·허균(許筠)과 더불어 모두 이름이 났었는데, 허성은 이학(理學)으로 자칭하였다. 그러나 성질이 고집스럽고 꽉 막혔으며, 당론을 좋아하여 자기와 의견이 다른 자를 공격하였는데, 늙어서는 더욱 심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임해군을 고발하여 원훈이 되어 다시 임금의 은총을 받다가 얼마 뒤에 죽었다. 반정 후 관작을 삭탈당하였다.

ㅡ 《조선왕조실록》 허성의 졸기 #

이후 1613년 계축옥사영창대군이 죽었을 때 허성이 영창대군을 보호하는 역할을 맡은 '유교 7신'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광해군이 분노해서 유교 7신에 속한 인물들을 삭탈관직(削奪官職)하고 문외출송(門外出送)했지만 이미 허성은 죽었기 때문에 처벌받지 않았다. 그러나 살아남은 '유교 7신' 신흠이 앙심을 품고 인조반정을 계획하게 되었다.#


4. 평가[편집]


부친이 동인이라서 자연스럽게 동인에 속했지만 이복 동생 허봉허균과는 달리 동인에서 눈에 띄게 강경파 활동을 한 적이 없다. 허성의 묘갈명에 의하면 허성의 "천성이 충후(忠厚)하고 모습이 방정하며 행동이 예의 발랐다. 학문은 육경(六經)의 원리에 정통하였다. 일을 할 때에는 자신이 옳다고 판단되면 비록 천만 사람이 반대하더라도 움직이지 않았다."라고 서술하는데 허성이 속한 붕당 동인 내에서 비교적 온건파로 활동한 것은 이 성품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인지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진 이후 온건파 동인이 있는 남인의 대표적인 인물로 활동했다. 광해군일기에서 "성질이 고집스럽고 앞뒤가 막혔으며, 당론(黨論)을 고집하여 자기와 의견이 다른 자를 공격하였는데, 늙을수록 더욱 심하였다."라고 서술하긴 하지만 반대파 서인의 사관이 기록한 것이므로 틀린 사실이 있을 수 있다.#


5. 작품[편집]



5.1. 수결[편집]


파일:허성 수결.jpg

허성의 수결. 허성의 호인 산전(山前)이 있다.

양천 허씨 승지공파 강릉종중 32세손 사무국장 허세광의 <양천허씨 5문장가의 묵적>에서 나온 악록, 산전 허성의 수결이며, 수결은 허엽의 시 "별장(別章)"에 있다. #


5.2. 시문집[편집]


저서로는 <악록집(草堂集)>이 있다.


6. 기타[편집]


  • 이복 동생 허균처럼 미식가 기질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문집 악록집에서 "석이떡[石茸餅]은, 금강산 표훈사(表訓寺) 중이 구맥(瞿麥)을 곱게 찧어서 체로 여러 번 내린 뒤에 꿀물에 버무리고 석이버섯을 섞어서 구리로 만든 시루에 찌니, 그 맛이 매우 좋았다. 비록 맛좋은 경고(瓊糕)·시병(柹餠 곶감떡)이라도 이보다 못할 것이다.” 라고 말했다.#


7. 대중매체에서[편집]



  • 1993년과 1994년 사이 방영된 초롱이의 옛날여행 한국위인전 홍길동전과 허균에서 허성이 허봉과 함께 "당대의 명문장가로 벼슬을 했다"고 언급하면서 등장했다. #



  • 2015년 KBS 드라마 징비록에서는 배우 강철성이 연기했다.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선조실록에서 등장한다. 황윤길, 김성일과 함께 통신사의 일원으로 첫 등장한다. 이때 일본 측에선 허성을 겁을 집어먹었다며 그를 비루하게 여겼다고 한다. 이후 황진과 함께 일본이 쳐들어 올 것을 경고하면서 등장종료.

[1] 21대손이다.[2] 익사공신은 인조반정 이후 삭제되었다.[3] 위성원종공신은 인조반정 이후 삭제되었다.[4] 한숙창(韓叔昌)의 딸이자, 임영대군의 외증손녀.[5] 왕실 족보인 선원록에 이름이 나와 있다. 한이정[6] 왕실 족보인 선원록에 이름이 나와 있다. 허묵석[7] 왕실 족보인 선원록에 이름이 나와 있다. 허대정[8] 우성전의 처이다.[9] 좌의정을 역임했다.[10] 서자 허밀의 생모. 다만 허밀의 모친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현재 없다.[11] 다만 요절한 허균의 동복남매들 보다 오래 살았으며 장수했다. 허성의 동복 누이들은 생몰 기록이 없어 알수 없다.[출처] #




[1] 인현동1가 31-2번지.[2] 허균의 동복 형제가 강원도 애일당과 허엽 가옥에서 태어난 것과 달리 아버지 허엽의 친가가 있는 한성부에서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3] "허성 묘갈명" 참조[4]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1612년 음력 7월 26일까지는 광주에서 은거하면서 상소를 올리다가 음력 8월 9일 갑자기 죽었다는 소식이 조정에서 전해졌다. 하지만 허성 묘갈명에서는 8월 6일에 죽었다고 표기되어 있으므로 죽고 나서 시간이 지난 후에 조정에 보고가 된 것으로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