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명황후 하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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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북위의 헌명제 탁발식의 추존 황후. 태조 도무제 탁발규의 어머니. 하란부 대인(大人) 하란야간의 딸. 고조 효문제 시기 한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하란씨에서 하씨로 바뀌었다.
2. 생애[편집]
하씨는 어렸을 때 아름다운 용모를 갖추어, 동궁(東宮)에 입궁하여 대왕 탁발십익건의 왕세자 탁발식에게 시집갔다. 하지만 탁발식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장손근(長孫斤)의 난을 막던 중 부상을 입어 요절하니, 당시 하씨의 뱃속에 있던 탁발규는 유복자로 태어났다. 하씨는 탁발식 사후, 그 동생인 탁발한(拓跋翰)과 재혼하여 진민왕 탁발고(拓跋觚)를 낳았다.
건국 39년(376년) 12월, 전진의 맹장 이유(李柔)와 장자(張蚝)가 대군을 거느리고 대나라의 도읍이나 다름없는 운중(雲中)을 유린하였다. 부족민들이 모두 도망치면서 나라에 큰 혼란이 들이닥치자, 하씨는 아들 탁발규를 데리고 북쪽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도중에 고차국의 공격을 받아 위태로워지니, 하씨는 탁발규와 함께 다시 남쪽으로 도망치다가 길을 잃었다. 하씨는 두려운 마음에 하늘을 우러러 보고 기도하였다.
하씨는 수레를 몰고 100여 리를 더 달려간 끝에 칠개산(七介山) 남쪽에 이르러서야 겨우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후 부견이 대나라 유민을 2부로 나누어, 각각 독고부의 유고인과 철불부의 유위진에게 속하게 하자, 하씨와 탁발규도 독고부로 들어갔다."나라의 혈통이 어찌 여기서 멸절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신령님의 도움만 바랄 뿐입니다."
건원 21년(385년), 전진이 비수대전에서 패망하여 이민족들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고, 유고인이 번치(繁畤)에서 암살당하면서 유고인의 형제인 유두권(劉頭眷)이 무리를 이끌었다. 이때 유고인 아들 유현(劉顯)이 반발하여 숙부 유두권을 죽이고 내친 김에 탁발규까지 제거하려 하였다. 하지만 유현의 동생인 유항니(劉亢泥)의 처이자 탁발규의 고모인 탁발씨가 이를 하씨에게 일러바쳤다. 하씨는 같은 탁발부 출신의 목숭(穆崇), 해목(奚牧)의 도움을 받아 탁발규를 독고부에서 도망치게 할 계획을 꾸몄다.
하씨는 우선 밤에 유현을 초대하여 술자리를 열고 그를 취하게 만든 뒤, 그 틈에 아들 탁발규와 과거 대나라의 신하였던 장손건(長孫犍), 원타(元他), 나결(羅結) 등이 경무장한 상태로 도망치게 하였다. 그리고 새벽이 되자, 하씨는 일부로 마구간의 말을 놀래켜 그 울음소리에 유현이 깨어나게 하고, 유현 앞에서 통곡하며 말했다.
이에 유현은 하씨의 말을 믿고 곧바로 탁발규 등의 뒤를 쫓지 않았고, 덕분에 탁발규와 그 무리는 무사히 하란부로 피신할 수 있었다."내 아들들이 여기 있었는데 지금 모두 없어졌다. 너희들 중 죽인 자가 누구냐?"
하씨의 사촌동생 외조대인(外朝大人) 하란열(賀蘭悅)은 무리를 거느리고 예를 다해 탁발규를 받들었다. 이 소식을 들은 유현은 노하여 그제서야 하씨를 잡아 죽이려 하니, 하씨는 밤 중에 유항니의 집으로 달아나 신거(神車) 안에 3일간 숨었다. 이때 유항니가 자신의 집안을 걸고 하씨를 위해 변호해주어, 하씨는 겨우 사면받고 죽음을 면하였다.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나고 유현의 무리 내에 변란이 일어나자, 중부(中部) 대인 유화진(庾和辰)이 하씨를 모시고 탁발규에게로 도망쳤다.
당시 탁발규의 외숙부 하란염간이 탁발규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얻은 것을 시기하였는데, 이윽고 거병하여 행궁(行宮)을 포위하였다. 이에 하씨가 나와서 이르기를
라 하였다. 하란염간은 이를 듣고 부끄러워하며 물러났다."너희들은 지금 나를 어디에 두려고 내 아들을 죽이려 하는가!"
등국 5년(390년) 7월, 대왕 탁발규가 이부동생 탁발고를 보내 후연의 모용수를 알현하게 하였다. 모용수가 늙고 노쇠한 것을 이용하여 권세를 부리던 그 자제들은 멋대로 탁발고를 억류시키고, 탁발규에게 좋은 말을 보내라 협박하였다. 그러나 탁발규는 말을 보내길 거부하고 후연과의 절교를 선택하니, 하씨는 탁발고가 돌아오지 못하는 것에 무척 근심하여 병을 얻었다. 탁발고는 북위로 도주를 시도했지만 후연의 태자 모용보에게 붙잡혀 실패하였다.[1]
황시 원년(396년) 6월, 황태비 하씨가 세상을 떠나고 성락금릉(盛樂金陵)에 남편인 헌명제 탁발식과 합장되었다. 향년 46세. 도무제 탁발규는 어머니 하씨의 시호를 '헌명황후'라 하고, 태묘에 배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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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탁발고는 이후로 7년 동안 후연의 중산(中山)에서 포로 생활을 하다가 황제를 자칭한 개봉공 모용상(慕容詳)에게 살해당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