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종(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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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종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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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제14대 국왕
헌종 | 獻宗

출생
1084년 8월 1일
고려 개경 개성부 연화궁
(現 경기도 개성시)
즉위
1094년 10월 19일
고려 개경 개성부 정궁 중광전
(現 경기도 개성시 만월동)
사망
1097년 4월 4일 (향년 12세)
고려 개경 개성부 흥성궁
(現 경기도 개성시)
능묘
은릉(隱陵)
재위기간
고려 왕태자
1093년 3월 25일 ~ 1094년 6월 17일
고려 제14대 국왕
1094년 6월 17일 ~ 1095년 11월 6일
고려 태상왕
1095년 11월 6일 ~ 1097년 4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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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개성 왕씨

욱(昱)
부모
부왕 선종
모후 사숙왕후
형제자매
4남 3녀 중 장남 [ 펼치기 · 접기 ]
이복 남동생 - 한산후
이복 남동생 - 한산후의 동생
미상 남동생 - 조졸한 왕자
이복 여동생 - 경화왕후
동복 여동생 - 수안택주
동복 여동생 - 조졸한 공주

종교
불교
묘호
헌종(獻宗)
시호
회상대왕(懷殤大王)
→ 정비공상대왕(定比恭殤大王)[1]

1. 개요
2. 생애
3. 가족 관계
4. 평가
5. 관련 유물
6. 같이보기



1. 개요[편집]


고려의 제14대 대왕.

휘는 욱(昱). 시호는 처음 숙종(제15대) 대에는 '회상대왕'(懷殤大王)이었으나 예종(제16대) 대에 묘호를 '헌종'(獻宗)이라 하고, 시호를 '공상대왕'(恭殤大王)으로 고쳤다. 이후 고종(제23대) 대에 '정비'(定比)를 추가해 존호는 '헌종 정비공상대왕'(獻宗 定比恭殤大王)이 되었다.

어린 나이에 보위에 올랐으나 숙부의 찬탈로 일찍 태상왕으로 물러났으며, 만 12세라는 어린 나이에 붕어한 비운의 군주이다.


2. 생애[편집]


性聰慧 九歲好書畫 凡所見聞 未嘗遺忘。

성품이 총명해 9세 때부터 글과 그림을 좋아했으며, 한번 보고 들은 것은 잊어버리는 일이 없었다.

- 《고려사》<헌종 세가> -총서-


고려사》<헌종 세가> -총서-에 따르자면, 헌종은 무척 영특했지만 어린 소년에 병약한 것이 흠이었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지독한 소갈이라는 병에 걸린 상태였기 때문에 병석 생활이 잦았다. 나이상으로 보아 1형 당뇨병에 시달린 듯하다.

때문에 그가 건강하게 오래 살 것이라 기대하는 신하들이나 종친들은 별로 없었다. 고려에서 형제 상속은 일반적인 일이었기에 신하들이나 종친들 모두 선종이 병약하고 어린 그의 아들 왕욱 대신에 동생들 중 그의 바로 아래 동생이면서 왕재로서 두각을 나타낸 계림공 왕희후계자로 지명할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선종은 병약한 아들인 왕욱을 후계자로 삼았고, 결국 그가 11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는데 명군 소리를 듣는 선종이 이런 결정을 한 이유는 알 수 없다. 《고려사》에 따르면 유조를 받들어 헌종이 보위에 올랐다고 하며, 자신의 붕어 1년 전 그를 으로 불러들인 뒤 '태자첨사'를 붙여주며 왕위를 승계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이유가 어찌되었던 간에 선종은 이미 자신의 장남에게 보위를 물려주기 위해 사전 작업까지 하는 모습을 보였다.

보위를 이은 헌종은 나이가 너무 어렸던데다가 몸까지 병약한 탓에 모후인 사숙태후수렴청정을 하게 된다. 사숙태후는 중화전 전각을 받고, 영녕부 부서를 배치받았으며 군국정사는 모두 중화전에서 처리되었다. 하지만 헌종의 병세는 좋아지기는커녕 날로 악화되어만 갔고 명색이 한 나라의 군주라는 사람 몸 상태가 이 지경이니 나라가 조용할리가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신이자 외삼촌인 이자의가 자신의 누이동생이자 선종의 후궁원신궁주의 아들로 헌종의 이복동생이 되는 한산후 왕윤을 옹립하려는 계획을 추진했다. 이자의는 사숙태후의 사촌으로 당시 인주 이씨 가문의 수장 노릇을 하고 있었고, 중추원사에 황숙이라는 지위로 왕도 어쩌지 못할 권력을 가졌으며, 사병을 양성할 정도로 재력도 상당했다.

한편 그는 헌종이 병환으로 시름하고 있는 틈을 타 반란이 일어날 수 있으니 옥새는 한산후 왕윤이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나중에 숙종이 되는 선종의 아우이면서 헌종에게는 숙부가 되는 계림공 왕희의 야심을 대놓고 지목한 것이었다.

이는 맹인인 헌종의 누나 수안택주가 점을 쳐서 예지한 결과에 따른 것이었다. 수안택주는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했지만 대신 점술에 조예가 깊어서 점을 쳤는데 외숙부 이자의가 아닌 숙부 계림공 왕희를 경계해야 한다는 점괘를 보게 되었다. 그래서 결과를 어머니 사숙태후에게 얘기했지만 어머니는 계림공의 야심 자체를 모르고 노골적으로 활동하는 이자의의 동태에만 신경을 곤두 세웠다.

결국 조정의 흐름은 종친 대표인 계림공과 외척 대표인 이자의의 대립 구도로 돌아가기 시작했으며, 병석에 누운 11세의 어린 왕은 이제 안중에도 없었다. 그리고 계림공은 손쉽게 이자의 일파를 조정에서 몰아내버렸고, 이후 두려움에 떨던 헌종은 숙부에게 양위해야 했다.

1095년 이자의가 반란을 일으키자 계림공이 그를 죽이고 일파를 제거했다. 이자의가 선수를 쳤다는 부분에서는 의견이 엇갈리는데 계림공이 자신의 일파를 동원해 먼저 이자의 일파를 숙청하고, 헌종을 퇴위시켰다는 친위 쿠데타라고 보는 추측도 있다.

조정은 계림공 일파가 장악하게 되었고, 섭정하던 사숙태후와 헌종은 아무 실권도 가지지 못했다. 《고려사》의 기록을 보면 이자의가 제거된 후, 지속적으로 숙종의 세력이었던 소태보, 왕국모 등이 2~3번씩 특진을 받아 핵심 관직에 올랐고, 계림공 본인 역시 중서성의 우두머리인 중서령 지위에 오르는 등의 기록이 나타난다. 실권을 잡고 있던 계림공이 왕명을 빌미로 자신의 측근들을 요직으로 승진시켜 우대하는 한편 보위에 오르기 전 권력을 확고히 하기 위한 사전 작업을 진행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3개월 후 두려움에 떨던 헌종은 자신이 앓고 있던 병을 명분으로 계림공에게 양위하였고, 계림공이 고려의 제15대 임금으로 즉위하니 숙종이었다. 그 후 왕위에서 물러나 상왕이 된 헌종은 부왕 선종이 왕자 시절에 거처했던 흥성궁에서 살기 시작했다. 아래는 헌종의 양위 조서.

朕承 先考遺業 謬卽大位.

年當幼冲 體亦病羸,

不能 撫邦國之權 塞士民之望.

陰謀橫議 交起於權門,

逆賊亂臣 屢干于內寢.

斯皆凉德所致 常念爲君之難.

竊見大叔鷄林公 曆數在躬 神人假手.

咨! 爾有衆 奉纂丕圖.

朕當 退居後宮, 獲全殘命.

짐은 선고(先考) 유업(遺業)을 받들어 외람되게도 대위(大位)에 올랐다.

나이가 어리고 몸도 허약하니 방국(邦國)의 권한(權)을 옳게 통솔하지 못하였고 사민(士民)들의 기대에 보답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음모와 책동이 권문(權門)에서 걷잡을 수 없게 일어나며 역적난신(逆賊亂臣)들이 대궐을 자주 침범하였다.

이는 다 내가 덕이 없는 까닭이다. 임금 노릇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늘 생각하고 있었다.

내 생각에는 나의 숙부 계림공에게로 대세가 기울어져서 신인들이 모두 그를 돕고 있는 듯하다.

아! 너희들은 그를 받들어 국가의 위업을 맡게 하라. 짐은 뒷궁궐에 물러앉아 남은 생명이나 유지하겠다.

《고려사》 <헌종 세가>에 실린 양위 조서.


조서를 고치지도 않고 양위식에서 쓴 걸 보면 헌종은 껍데기 왕이었나보다.

肅宗 二年 閏二月 甲辰 薨于興盛宮 壽十四 在位一年。

숙종 2년 윤2월 갑진일에 흥성궁(興盛宮)에서 죽으니 향년 14세이고 1년 동안 재위했다.

《고려사》 <헌종 세가>


그는 상왕으로 물러난지 2년 후인 1097년에 만 12세의 어린 나이로 붕어했는데 소갈증으로 인한 소아당뇨 합병증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붕어하기 직전까지도 병석에 누워 있었다. 실권도 없었거니와 밀려난 왕이라 그런지 묘호도 없었으며, 숙종은 '회상대왕'이라는 시호만 올렸을 뿐이었다. 이후 사촌인 예종이 즉위하면서 원년(1105) 11월 '헌종'(獻宗)이라는 묘호를 올려 태묘에 제사지냈다.

묘호인 '헌'(獻)은 시법상으로는

'聰明叡哲 通知之聰 知質有聖 有所通而無蔽'

라 하여 '총명하며 성인의 자질이 있어 통하는 바가 있고 폐단이 없었던 왕'이라는 뜻긴 하다. 그러나 글자가 "바치다"라는 뜻을 지닌데다가 이 시호나 묘호를 받은 사람들이 대개 후한의 마지막 황제인 헌제서하가 몰락할 때의 황제인 헌종[1]처럼 재위 기간의 끝이 좋지 않은 이들 뿐이라 시호로는 많이 쓰이지도 않는 글자다.

동문선》 29권에는 고종(제23대)이 시호 '정비'(定比)를 추가하면서 올린 <책문>이 남아 있는데 마치 헌종이 원해서 양위한 것처럼 썼다.


3. 가족 관계[편집]


아버지는 선종 사효대왕, 어머니는 사숙왕후이다.

형제로는 남동생 한산후 왕윤과 이름이 실전된 두 명의 형제가 있다. 두 명은 선종의 후궁 원신궁주의 아들이고, 한 명은 모후가 누구인지 조차 알 수 없다. 자매로는 경화왕후와 수안택주와 이름이 실전된 공주가 있었다. 경화왕후는 선종의 제1비 정신현비의 딸이며, 수안택주와 이름이 실전된 공주와는 동복이다.

치세 기간이 짧은데다 병약했고, 어려서 붕어했기 때문에 《고려사》에 혼인에 대한 기록은 없다. 다만 《진주 소씨 족보》에 따르면 소계령(蘇繼笭)의 딸인 회순왕후 소씨(懷純王后 蘇氏)와 혼인했다고 하는데, 소씨 족보 외에는 어떠한 사서에도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당대에 소씨 성의 명문가가 다른 사서에서 발견되지도 않는데다, 조선시대의 다른 가문들이 그랬던 것처럼 가문의 명망을 높여볼 목적으로 소씨 문중이 족보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조작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헌종의 시호에 포함된 '상'()이라는 글자부터가 “일찍 죽었다”는 뜻이라 혼인 전에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14세에 승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4. 평가[편집]


여말선초 시기의 인물이자 한국 성리학의 대표적인 시조로 여겨지는 이제현은 헌종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이 내용은 본인의 저서에 적힌 내용이었는데 《고려사》에도 논평이 수록되었다.

우(禹)임금이 왕위를 아들에게 전한 것은 후세에 벌어질 일을 염려해서였다. 유복자를 왕으로 세워놓고 죽은 임금의 옷만 걸어두고서 조회를 받아도 천하가 안정을 유지한 것은 애초 장자에게 왕위를 세습한다는 원칙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현종(顯宗)의 세 아들은 형제가 서로 왕위를 전하여 순종(順宗)까지 이르렀으나 순종이 상을 치르면서 과도히 애통해하다가 일찍 세상을 뜨는 바람에 후사를 두지 못해 왕위는 선종(宣宗)에게 이어졌다. 선종이 별세하자 태자가 뒤를 이었는데 이 분이 헌종(獻宗)이었다. 형제끼리 왕위를 서로 전하는 것에 익숙해져 버린 나라사람들이, ‘선종은 동생이 다섯이나 있는데도 어린 아들을 왕으로 세운다.’고 하며 옳은 일을 잘못된 것으로 돌리니 어찌 이다지도 생각이 깊지 못했단 말인가?

만약 주공(周公) 같은 종친이나 국가의 중책을 맡길 만한 신하에게 나라 일을 맡겨 정치를 보좌케 하지 못한다면 나라의 운명이 위태롭고 어지러워질 것은 불을 보듯 빤한 일이다. 후세에 불행하게도 젖먹이 어린 아이에게 대권을 물려주는 이가 있다면 이 일로 경계를 삼아야 할 것이다.

고려사》 권10, <세가>10 -헌종- '이제현의 논평'


논평을 한 이제현은 고려 말 고려가 원나라 부마국 시대일 때 당대 최고의 유학자로 손꼽히던 사람이다. 당시 신진사대부를 비롯한 고려의 젊은 학자들에게 중국성리학이 전파되면서 지식인들 사이에 주자의 성리학을 숭상하는 분위기가 강해졌고, 이는 이후 유교 국가인 조선 건국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그런데 고려 중기에는 유교가 그리 절대시되지 않았는지, 당시에는 부자 상속이더라도 어린 임금의 제위 등극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성리학 이론에 충실했던 이제현은 당연히 이에 대해 비판적 의견을 보여주고 있다. '장자 계승의 원칙'은 하나라 시절부터 내려온 원칙임에도 당대 고려 사람들이 어린 헌종의 즉위를 달갑지 아니했고, 이는 생각이 깊지 못한 것이라고 적고 있다. 재밌는 점은 후대의 계유정난을 예상이라도 한듯, 후일 비슷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고 적은 것이다. '주공 같은 종친'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헌종-숙종의 뒤를 이어 비슷한 길을 걸었던 세조도 처음엔 이를 표방하긴 했으나, 결국 최후는 그러지 않았다.[2]

헌종의 선배백제 제7대 왕인 사반왕신라 제40대 왕 애장왕이 있다. 그래도 헌종은 애장왕보다는 나은데 애장왕은 쿠데타를 일으킨 숙부 김언승에 의해 왕궁에서 대놓고 시해당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애장왕은 헌종(폐위 기준 12세)과는 달리 성년(폐위 기준 22세)까지 왕위에 있었다는 것이다. 조선 단종에게는 선배가 되는데 살면서 겪은 사건도 단종과 80% 이상 같다. 사실상 고려시대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어 사람들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비운의 국왕이다. 신하들 중에서 헌종 편에 선 인물은 아무도 없었던 것을 보면 목숨을 바친 신하라도 있었던 단종보다도 몇 배는 더 불쌍한 왕이었다. 차이점은 알아서 죽어줬기 때문에 고려 숙종의 입장에서는 조선 세조의 사례처럼 직접 조카 단종의 목숨을 거두는 수고를 덜 수 있었던 셈이었다. 이미 숙종은 정통성과 지지 기반을 확보했고, 헌종 지지 세력도 없었기 때문에 굳이 헌종을 죽이는 무리수를 둘 필요도 없었다.[3]


5. 관련 유물[편집]




6. 같이보기[편집]



[1] 서하 말제 이전의 군주로 칭기즈 칸에게 처절하게 밟힌 군주.[2] 사실 주공도 하도 오래 전 인물이라 그가 진짜 《사기》의 기록대로 섭정하고, 순순히 정말 물러났는지도 확실치 않으며, 당시는 봉건제라 주공은 섭정에서 물러나도 자기 영지에서 따로 노릇을 할 수 있었다. 이는 세조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유교에서 말하는 '주공'을 본받겠다고 그리 외쳤건만 정작 지킨 이들이 적은 이유다.[3] 물론 일부에서는 숙종이 몰래 헌종을 사사했을 것이라는 주장도 하지만 일단 공식적인 사인은 병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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