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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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 노트의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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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미국의 국무장관 코델 헐(Cordell Hull)
문서 이름도 그의 성에서 유래했다.

1. 개요
2. 배경
3. 양국의 반응
4. 현대 일본 우익세력의 해석
5. 평가


1. 개요[편집]


영어: Hull Note/Outline of Proposed Basis for Agreement Between the United States and Japan
일본어: ハル・ノート

1941년 11월 26일, 미국 국무장관 코델 헐#(1871-1955)이 주미일본대사 노무라 기치사부로#(1877-1964)[1]와 미일교섭 특사 구루스 사부로#(1886-1954)에게 전달한 문서. 일본은 태평양 전쟁 발발 직전의 미-일 갈등 상황에서 이 문서를 사실상의 대일 최후통첩으로 판단했으나, 실상은 좀더 복잡하다.

문서는 머릿말, 일반적인 내용을 규정한 섹션 1, 그리고 좀더 구체적인 요구 사항이 규정된 섹션 2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섹션 2의 요구 사항은 다음과 같은 10개항이다.

1. 미일 두 나라는 영국, 중국, 일본, 네덜란드, 소련, 태국, 미국 간의 다자간 불가침 조약을 체결을 위해 노력할 것.
2. 두 나라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2]에 대해 프랑스의 영토 주권을 존중하고 인도차이나와의 무역이나 통상에서 있어서 차별적 대우를 하지 않을 것.
3. 중화민국인도차이나에서 일본군 및 경찰력의 전면 철수.
4. 두 나라는 장개석 정부 외에게는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 지원을 하지 않을 것.
5. 영국과 기타 열강들이 중국에서의 치외 법권을 포기하게끔 미일이 노력할 것. 치외 법권 외에도 1901년 베이징 조약에서 보장한 외국인 거주지와 관련 권익도 포함한다.
6. 최혜국 대우를 기초로 하는 통상 조약 재체결을 위한 협상 시작.
7. 미일 상호간의 자산 동결 해제.
8. -달러 환율 안정에 관한 협정 체결 및 통화 기금의 설립. 기금은 양국이 절반씩 부담.
9. 미일 두 나라가 제3국과 체결해 놓은 협정들이 이 합의의 참뜻과 태평양의 평화 유지를 침해하게 해석되지 않도록 미일 양국이 노력할 것.
10. 이 협약의 기본 원칙을 다른 나라들도 따르도록 미일 두 나라가 함께 영향력을 행사할 것.

2. 배경[편집]


1941년 11월 5일 쇼와 덴노는 제국회의에서 승인한 남방 작전을 실행하기 앞서 미국과 마지막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다. 주미 일본 대사 노무라는 미합중국 정부에 두 가지를 제안하였다.

첫 제안은 1941년 11월 6일에 발표되었는데 일본군의 제한적 철수와 중일전쟁의 종료였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일본 외교문의 암호 코드를 이미 파악하고 있었고 일본에서 이 제안이 수용되지 않을 경우 두 번째 제안을 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1941년 11월 20일 노무라 일본 대사는 두 번째 제안을 발표하는데 그 내용은 일본에 대한 석유 수출의 재개, 동남아시아에서의 군사 철수, 중국에서의 군 철수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미국은 일본의 이러한 태도가 외교적 수사에 불과하다고 판단하여 비판적 입지를 견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헐 장관을 필두로 하는 국무부는 일본의 두 번째 제안과 유사한 잠정 협정안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협상이 진행되는 중에서도 일본은 군사 행동 계획을 변경하거나 철수하는 움직임을 보인 적이 없어 미국이 일본의 태도가 외교적 수사에 불과하다는 판단을 굳히는 이유가 되었다.

이에 1941년 11월 26일 미국은 마지막으로 자국의 입장을 정리하고, 중국 및 영국, 특히 윈스턴 처칠의 입장을 수용한 헐 노트를 일본에 제시하게 된다.

3. 양국의 반응[편집]


미국은 일본 측의 일방적인 태도에서 비롯된 지속적인 실무협상 파기로 인해 협상 가능성이 없어지자 일본 제국과의 유사시 전쟁 준비를 결심하였고 이에 형식상으로만 미국의 기존 요구사항을 정리한 문서를 전달하기로 계획했다. 실제로 말레이 반도로 항해하는 일본군 수송선단이 발견되었다는 첩보가 국무장관에게 문서를 일본에게 전달하기로 한 당일에 통지되고 있었다.

타임지에 따르면, 미국의 육군장관이었던 헨리 스팀슨(Henry L. Stimson)은 그의 일기에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이미 일본군의 기습 공격 가능성에 대해 심각히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을 적어 놓고 있었다.

미국은 헐 노트에 공식적으로 만주를 기재하고 있지는 않았으나 일본은 문서에 언급한 China에 만주국이 해당한다고 해석하였고, 이에 일본 총리인 도조 히데키는 "This is an ultimatum(최후통첩)"이라 발언하여 일본은 헐 노트가 미국 측의 최후통첩이라는 인식을 분명히 하였다.

이러한 인식의 배경에는 헐 노트가 일본 측 제안이 있은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상당히 빠른 시간 내에 통보되었을 뿐 아니라 일본 측 요구 사항이 거의 받아들여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로 인하여 미국의 대일 정책은 이미 확고하여 협상의 여지가 없다고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그 당시 일본의 해석에 따르면 미국 측 제안을 해석하면 미국은 명시적으로 일본과 평화 협정을 체결하자는 의미도 보이지 않고 무역 협정도 교섭을 시작하자는 두루뭉실한 입장인 반면에 일본 측에게는 중국 및 인도차이나에서의 전면 철수와 해외 이권의 포기를 즉시 실행할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즉시"라는 표현은 일본 측의 오독이며 영어 원문에는 없었다는 것이다.

결국 일본의 외상(외교부장관)이었던 도고 시게노리는 외교적 협상의 여지가 없다고 오판했다. 당시 일본 측 최후통첩보다 온건한 제안이 미국 국무부 내에서 작성 중이라는 정보를 알고 있었던 도고에게는 이 헐 노트가 "수십 년 동안의 교섭이 헛수고가 되었다", "일본이 그동안 쌓아 올린 국제적 지위를 모두 포기하라는 것과 마찬가지"여서 자포자기적 심리 상태가 되었다고 한다. 이리하여 도고 시게노리는 외교적 해결을 단념하고 외교 교섭의 중지를 일본 대본영에 통고함으로써 평화적 해결 가능성은 사라지고 전쟁으로 치닫게 된다.

4. 현대 일본 우익세력의 해석[편집]


일본의 우익 세력들은 이 노트가 일본을 전쟁으로 끌어들이려고 만들어진 것이며 따라서 일본은 어쩔 수 없이 전쟁에 끌려들어간 피해국이라 주장한다. 정부 관료 중에서도 암암리에 팽배해 있는 주장인데 대표적인 예가 항공자위대막료장(참모총장)이었던 다모가미 도시오이다.[3]

5. 평가[편집]


헐 노트에는 "극비, 시안으로서 구속력 없음(Strictly Confidential, tentative and without commitment)"이라는 전제가 붙어 있었으나, 일본 측이 번역하는 과정에서 이유 없이 이 문구를 삭제하고 추밀원 및 천황에게 보냈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상업 문서나 외교 문서를 막론하고 이런 문구는 관례적으로 넣는다. 나중에 책임 소재 문제가 발생했을 때 발뺌할 수 있는 근거(disclaimer) 정도로 쓰기 위해서이다. 다만 개전이 임박한 상황이나 촉급을 다투는 외교 문서에서 이 문구를 관례로 생각하고 빼 버린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사실 이 담당자가 진정한 대한민국 독립유공자일지도 이 때문에 당시 외무대신이던 도고 시게노리는 협상의 여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포기해 버렸다는 이유로 당대의 거물급 외교관들이던 사토 나오다케(주 소련 일본대사) 및 요시다 시게루(주영 일본대사. 후의 일본 총리) 등에게 비판받기도 했는데, 요시다는 "문서를 받았을 때 절망감을 느꼈다면 바로 사직을 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군부도 약간은 정신을 차렸을지 모른다. 그게 남자의 도리다"라고 말했다고. 사토는 좌절 상태이던 도고에게 "실망하지 말고 교섭을 끈기 있게 추진하라. 아직 협상의 여지가 있다"고 설득했으나 교섭을 포기한 도고에게 실망하고 외무성 고문직을 사퇴했다고 한다.

FDR은 더 유화적인 제안을 원했으나 주요 각료들은 물론 해당 제안에 대한 영국, 중국 등 동맹국들의 반발로 훨씬 강경한 내용의 헐 노트를 제시했다. 헐 노트의 초안 작성을 주도한 것은 헐 장관의 국무부였다. 그러나 "협상 초반에 터무니없이 강경한 요구를 내어 상대방의 양보를 끌어내는 것은 미국적인 협상 문화"라고 말해 당시 미국과 일본의 문화적 차이를 고려하지 못한 면이 있었다는 회고담도 있다.

영국이라기보다 처칠은 미국이 일본에 유화적인 제안을 하는 것에 크게 반발하는 입장이었다. 일본의 팽창주의가 영국이 아시아에 갖고 있던 이권(홍콩, 말레이 반도)을 직접적으로 위협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미일전쟁의 개전이야말로 미국을 독일과의 유럽 전선에 끌어들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삼국 동맹 조약의 내용에 따르면 일본이 미국에 선전포고를 했다고 해서 나치 독일이탈리아 왕국도 미국에 선전포고해야 하는 의무는 없었다.

제1조: 일본은 독일과 이탈리아가 유럽의 새로운 질서 확립을 주도하는 것을 존중하고 이를 인정한다.
제2조: 독일과 이탈리아는 일본이 대동아 공영권 확립을 주도하는 것을 존중하고 이를 인정한다.
제3조: 일본, 독일, 이탈리아는 가능한 한 위에서 언급한 정책에 협력하는 것에 합의한다. 또한 만약 동맹국이 유럽에서의 전쟁 또는 일본과 중국 간의 분쟁에 참가하지 않은 국가[4]로부터 공격받을 경우, 동맹국은 모든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수단을 동원하여 지원해야 한다.
제4조: 일본, 독일, 이탈리아 정부는 이 조약을 관리하는 기구인 공동 기술 위원회를 설치한다.
제5조: 일본, 독일, 이탈리아는 이 조약이 동맹국과 소련 사이에 어떠한 영향을 주지 않는 것에 동의한다.
제6조: 이 조약의 유효 기간은 체결된 날로부터 10년으로 한다. 다만 이 조약의 유효 기간이 만료된 경우에는 동맹국 간의 협상을 통해 연장하기로 한다.

하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독일과 이탈리아가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여 스스로의 패망을 부추겼다. 아무튼 히틀러도조무솔리니고 다들 또라이도 보통 또라이들이 아니다

헐 노트는 선전포고가 아니었고, 엄밀한 의미에서 최후통첩도 아니었다. 물론 미국은 일본이 헐 노트를 수용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고, 협상 결렬이 전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협상 결렬을 사유로 선전포고 없이[5] 진주만을 공격한 것은 엄연한 국제법 위반이다. 물론 일본도 계획상으로는 선전포고하자마자 기습적인 선빵을 날리는 방식을 채택함으로서 적어도 국제법을 준수하려고 했지만 전달 시기도 늦은 데다 그 내용도 명확한 개전 의사 표시 등 국제법상 선전포고로 인정받을 수 있는 요소를 빼먹은 불완전한 것이었기 때문에 일본의 계획대로 공습 30분 전에 선전포고가 전달되었더라도 국제법상 불법이라는 성격에는 별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아울러 진주만과 말레이 반도 공격 부대가 헐 노트가 제시되기 전 이미 출항을 완료하여 협상 테이블 밑으로는 조직적이고 적극적으로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은 나치 독일의 동맹국이었으며 적어도 1941년 기준으로 나치 독일은 프랑스를 점령하고 소련의 유럽 영토 대부분을 석권하는 등 유럽에서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물론 19세기 후반부터 미국과 일본은 민간 차원에서나 군 차원에서나 많은 교류를 가져 왔고[6] 일본 내에서 미국의 잠재력을 두려워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7] 그러나 일본 지도층 주류는 독일이 최종 승리를 할 것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고,[8] 따라서 독일의 승리에 숟가락이라도 얹어야 한다는 견해[9]가 미국을 두려워하는 견해를 압도하고 있었으며, 청일전쟁러일전쟁의 승리로 인해 일본군은 '대국이라도 기습해서 단기간에 대타격을 주면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중국도 못 이긴 상황에서 대양 건너에 땅덩이만 중국만 한 미국을 이기겠다고 그것을 대미전에도 똑같이 적용하고자 했다. 실제로 태평양 전쟁 초기에는 그랬지만, 미국은 초기의 타격에도 불구하고 꿈쩍도 하지 않았고, 일본은 가용 자원의 한계를 이겨내지 못한 데다가 반자이 돌격가미카제 등 멍청한 전략전술을 전쟁 기간 내내 써먹었고 그 대가로 패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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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본 해군 대장 출신으로 제3함대 사령관을 역임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1932년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에서 한쪽 눈을 실명한 것으로 이름이 알려져 있다.[2] 여기서 말하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는 바로 비시 프랑스를 의미한다. 당시 미국은 자유 프랑스가 아닌 비시 프랑스를 정식 정부로 인정했으며, 이는 영국 등도 마찬가지였다. [3] 이 사람은 <일본은 침략국가였는가(日本は侵略国家であったのか )>라는 불쏘시개 논문을 출판해 큰 논란을 야기한 전력이 있다. 미국의 술수에 일본이 전쟁을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논리를 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을 참조할 것.[4] 당시 중립국이었던 미국을 명백히 겨냥한 문구로 평가받고 있다. 즉, 미국을 협박한 것.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왔나[5] 사실 일본은 근대 역사에서 전쟁 상태에 돌입할 때 선전포고를 제대로 한 적이 별로 없다. 청일전쟁에서는 선전포고 없이 청군 함대를 기습하였고, 러일전쟁에서는 선전포고를 하기 직전에 러시아 함대를 공격하였으며, 중일전쟁할힌골 전투에서도 선전포고 없이 무단으로 기습하였다.[6] 개항 과정이 강압적이긴 하였으나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까지 미일관계는 아주 양호했다. 이 밀월 관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있다.[7] 이러한 주장을 했던 이들 중 대표적인 인물들이 이른바 '해군 좌파 삼인방'으로 불렸던 야마모토 이소로쿠, 요나이 미쓰마사, 그리고 이노우에 시게요시이다. 당대에는 매국노와 비슷한 취급을 받았으나 전쟁이 일본의 패배로 이어지면서 이들이 현명했음이 밝혀졌다. 물론 야마모토는 하버드 대학교에서의 연수 경험이 있던 데다가 미국에서의 생활로 인해 미국의 잠재력을 두려워하였음에도 진주만 공습을 성공시키는 등 전쟁 노력에 박차를 가하지만 결국 미 해군 항공대의 습격에 사망하고 말았다.[8] 이는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 당시 영국 및 미국을 위시한 대부분의 국가에서도 똑같이 생각한 내용이었다.[9] 이 견해에서 실시된 군사 훈련이 바로 관동군의 '관동군특별대연습(關東軍特別大演習, 영어로는 Kwantung Army Special Exercise/Maneuvers)' 내지는' 관동군 특종 연습(關東軍特種演習)', 약칭 '관특연(関特演, Kantokuen)이었다. 러시아의 유럽 영토에서 개시된 바르바로사 작전에 호응하여 극동 영역에서도 소련 침공을 개시하려는 목적을 띤 채 실시된 관동군의 대규모 훈련(약 100만 명 정도가 동원됨)이었으나, 2년 전에 처참하게 박살난 전력 때문에 소련을 굉장히 두려워하고 있던 일본 육군이 대소전에 회의적인 입장을 보였고, 석유 및 고무 등 전쟁 수행에 필요한 자원이 풍부한 동남아시아를 침공하는 것을 더 중시한 대본영의 판단에 따라 결국 관동군의 소련 침공은 무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