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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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Herat002.jpg
시내 중심부의 시타델 (칼라 이크티야루딘)
파일:헤라트 4.jpg
헤라트 대사원 (금요 / 회중 모스크)

1. 개요
2. 역사
2.1. 고대
2.2. 사산 왕조 하의 번영
2.3. 중세
2.4. 호라산의 진주
2.5. 몽골의 침략과 재건
2.6. 제2의 번영기
2.7. 파슈툰 소국들
2.8. 현대


1. 개요[편집]


페르시아어/다리어, 파슈토어 هرات
영어 Herat

아프가니스탄 제3의 도시로, 인구는 약 60만명이다. 하리 강 북안과 힌두쿠시 산맥의 줄기인 사페드 코흐 남쪽 기슭 사이에 위치한다. 이란투르크메니스탄과의 국경에서 각각 동쪽으로 80km, 남쪽으로 70km 떨어져 있다. 아프가니스탄 서북부의 중심지로, 고대부터 인도와 이란 간의 교통로가 지나갔다. 중세 호라산의 주요 도시 중 하나로 실크로드 무역과 함께 번영하였고, 특히 15세기 티무르 제국의 수도가 되어 중시되었다.

다만 19세기 들어 두라니 왕조의 마지막 거점이던 헤라트에 대 카자르 왕조가 무려 4차례나 포위하는 등 전란을 겪으며 쇠퇴하였고, 현재는 기존의 페르시아 색채를 크게 잃고 아프가니스탄의 지방 도시로 남아있다. 주민들은 대다수인 85%가 타지크인이고, 파슈툰인도 10% 가량 거주한다. 시내에는 시타델과 중세 모스크 등 여러 유적과 헤라트 대학 및 갈립 의대가 있다. 남쪽 12km 지점 하리강 남안에 헤라트 국제공항 및 공단이 있다.

2. 역사[편집]


파일:헤라트 시타델.png
헤라트의 상징과도 같은 시타델

2.1. 고대[편집]


전통적으로 이란의 관문으로 여겨졌다. 아케메네스 제국 시절에는 하라이바 (𐏃𐎼𐎡𐎺)라 불렸고, 이것이 와전되어 현재의 헤라트가 되었다. 일대를 흐르는 하리강 역시 같은 어원이다. 중세 ~ 현대까지도 헤라트 출신 유명인은 알-하라위 (الهروي)라 불린다.

알렉산드로스 3세의 정복 이후에는 알렉산드리아 아리아나라고 개명되었다. 그리스어로는 Ἀλεξάνδρεια ἡ ἐν Ἀρίοις, 즉 Alexándreia hē en Aríois 라는 의미로 불렸다. 라틴어로는 Alexandria Ariorum) 이후로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를 받다가 BC 167년에 파르티아에게 지배권이 넘어갔고 BC 127년에는 쿠샨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2.2. 사산 왕조 하의 번영[편집]


서기 226년부터 시작된 사산 제국의 지배 하에서, 헤라트는 비단길의 주요 도시로 성장하였고, 박해를 피해온 네스토리우스 파 기독교가 번성, 주교구가 설치되기도 하였다.

사산 제국은 에프탈 등의 유목민족과의 전쟁에서 헤라트를 사령부로 삼고 요새화 하였다. 이때가 12세기 이전까지 헤라트가 가장 번성하던 시기이다. 제국의 동쪽 영토 중 헤라트는 발흐, 메르브와 함께 주요 거점이었다.

2.3. 중세[편집]


파일:헤라트 2.jpg
헤라트 구도심 전경

이후 652년에 정통 칼리파 군대에게 함락되며 이슬람화가 시작되었다. 다만 660년 경에는 당나라의 영향권에 들기도 하였다. 그러다 665년에 투르기쉬 부족이 헤라트를 지배하였다.

이후 702년에 우마이야 왕조의 칼리파 아브드 알 말리크의 군대가 헤라트를 점령하였다. 그 후 압바스 왕조의 지배를 거쳤으나 이슬람 화는 별 진전이 없었다. 870년에 도시를 점령한 사파르 왕조에 의해 본격적인 이슬람 화가 시작되었다.

2.4. 호라산의 진주[편집]


파일:헤라트 말란.jpg
12세기 중엽 셀주크 제국의 대술탄 아흐마드 산자르가 세운 말란교
파일:헤라트 대사원.jpg
구르 왕조의 술탄 기야스 웃딘이 세운 헤라트 대사원

10세기부터 사만 왕조, 가즈니 왕조 등 이란계 제국들의 지배를 받은 헤라트는 1042년에 셀주크 제국에게 지배권이 넘어갔다. 호라산 지역이 점점 안정을 찾아가고 중국과의 교역이 늘며 도시는 번성하였다. 1102년에 지진이 도시를 덮쳤지만 빠르게 재건되었다. 1175년에는 구르 왕조가 헤라트를 지배하게 되었다. 기야스 앗 딘 무함마드는 1201년에 헤라트 대모스크를 지었다.

12세기 말의 헤라트는 359개의 대학과 12,000개의 큰 상점, 6,000개의 목욕탕과 44만개의 집이 있는, 인구 백만이 넘는 대도시였다고 묘사된다. 헤라트는 당시 세계에서 콘스탄티노플, 니샤푸르, 임안 (항저우), 앙코르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국제적 대도시였다.

2.5. 몽골의 침략과 재건[편집]


번영하던 헤라트는 1214년에 호라즘 왕조로 지배권이 넘어갔는데, 1221년에 쳐들어온 몽골군에 의하여 대대적으로 파괴되었다. 이후 10년 이상 도시는 폐허로 남아있었다.

1236년에 도시 재건이 시작되었고, 1244년에는 일 칸국의 속국 카르트 왕조가 헤라트를 수도로 삼으며 부흥을 시작하였다. 1335년에 카르트 왕조는 완전 독립하였고, 티무르의 망명을 받아주기도 하였다.

2.6. 제2의 번영기[편집]


파일:헤라트5.jpg
14-15세기에 현재의 모습으로 증축된 헤라트 대사원 (금요 모스크)

1380년, 티무르 제국에게 도시는 평화적으로 함락되었고, 학자들은 사마르칸트로 보내져 티무르 르네상스의 기반이 되었다. 티무르 사후 15세기 동안 헤라트는 티무르 제국의 수도 역할을 하며 번영하였다. 샤 루흐, 아부 사이드 미르자, 후세인 바이카라의 치세에 헤라트는 여러 건물이 세워졌고 헤라트 마드라사는 이슬람 미술의 중심으로 각광받았다. 당시 헤라트는 '동방의 피렌체'로 묘사될 정도로 문화적인 발전을 이룩했다. 티무르 제국이 쇠퇴하며 1458년 흑양 왕조의 자한 샤가 도시를 점령하기도 했으나 이듬해 내부 반란으로 철수했다.

1507년 헤라트는 우즈벡 칸국에게 점령되었고 1510년, 사파비 왕조이스마일 1세가 점령하였다. 이스마일 1세의 사후 1524 - 28년간 우즈벡 족이 재차 점령했으나, 타흐마스프 1세가 회복하였다. 16세기 헤라트는 사파비 왕자들이 경험을 쌓는 거점 도시였다. 타흐마스프 1세는 아들 모하마드 호다반다를 헤라트 총독에 봉하였고, 1571년 후자의 아들 아바스 1세가 (비록 생후 2년 만에 쉬라즈로 가긴 했지만) 태어났다. 이란 굴지의 명군 아바스 1세는 이스파한은 어쩌고 헤라트를 '이란의 가장 위대한 도시' (아잠-이-빌라드-이-이란)로 치켜세웠다. 이때까지만 해도 헤라트는 호라산 혹은 이란 정체성이 강했지만, 18세기부터 파슈툰 족의 영향력 하에 놓이게 된다.

2.7. 파슈툰 소국들[편집]


파일:헤라트 성.png
19세기 초엽 헤라트 시타델 내부 전경

1709년 칸다하르에서 길자이 파슈툰 인들이 사파비 조에 대항하여 봉기하자, 본래 진압군 편에 섰던 압달리[1] 파슈툰 인들은 1716년 헤라트에서 자립하여 사도자이 술탄국을 세운다. 토르바테 잠파라흐 등 호라산 동남부를 통치하던 사도자이 술탄국은 1730년, 나디르 샤에 의해 이란에서 축출된 호타키 왕조의 사주를 받아 마슈하드케르만을 포위하였다. 막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마친 나디르 샤는 1731년 봄, 헤라트를 포위하였다. 1년여간 이어진 공방전 끝에 나디르 샤는 수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며 도시를 점령하였다.

항복 후 파슈툰 부대가 일시적으로 시타델을 점거하는 등 배신했는데도 나디르 샤는 (칸다하르와 달리) 헤라트를 약탈하거나 파괴하지 않았다. 1747년 나디르 샤가 사망하자 그의 파슈툰인 부관 아흐마드 샤 두라니가 자립하였고, 헤라트는 아프가니스탄의 전신인 두라니 왕조의 지배 하에 들어갔다. 19세기 들어 두라니 조가 내전으로 쇠락하자, 헤라트는 폐위된 마흐무드 샤에 의해 재차 독립하였다. (헤라트 에미르국) 그러나 이란의 카자르 왕조는 헤라트를 자주 공격하였고, 따라서 헤라트 토후국은 이란 혹은 영국에 복속하는 등 외세에 휘둘렸다.

2.7.1. VS 카자르 왕조[편집]


파일:안사리 헤라트.jpg
파일:헤라트 안사리.jpg
아랍계 페르시아인 한발리 & 수피 학자 아부 이스마일 압둘라 안사리 (카와자 압둘라 알 하라위) 영묘.[2] 도스트 모하마드 칸도 안장된다.

1816년에 이란이 일시적으로 도시를 점령했고 1818년에 재침했으나 카피르 칼라 전투에서 카불의 바라크자이 군대에게 패하였고, 두라니 왕조가 와해된 후인 1838년과 1856년 이란이 다시 침공하였으나 영국의 도움을 받은 아프간 군대가 이를 격퇴하였다. (그레이트 게임의 일환) 1842년 기존의 재상이던 야르 모하마드 칸이 찬탈하여 알라코자이 왕조가 들어섰다가, 1851년 그가 사망한 후 재차 내전을 겪으며 쇠퇴하였다.

그리고 1856년 마침내 카자르 왕조가 헤라트를 점령했으나 영국이 후제스탄 ~ 부셰르의 페르시아 만을 공격하는 등 강경한 자세로 나오자 (앵글로-페르시아 전쟁) 이듬해 이란군은 철수하였다. 그후 (당시 영국과 친했던) 바라크자이 가문 출신이나 이란에 볼모로 있던 술탄 아흐메드 칸이 옹립되었고, 그는 이란의 봉신으로 지내다가 1862년 파라흐[3]를 점령하며 바라크자이 왕조의 도스트 모하마드 칸과 전쟁에 돌입했다.

도스트 모하마드 칸은 대군을 이끌고 친정하여 단숨에 파라흐를 회복하고, 1862년 7월 헤라트를 포위하였다. 공방전 도중인 1863년 3월, 술탄 아흐메드 칸은 병사하였고 어린 아들이 계승하였다. 그러자 도스트 모하마드 칸은 총공세를 펼쳐 도시를 함락하였다. 이로써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은 바라크자이 왕조 하에 통합되었다. 하지만 도스트 모하마드 칸 역시 1863년 6월, 헤라트에서 70의 나이로 병사하여 카와자 압둘라 영묘에 안장되었다.

2.8. 현대[편집]


파일:헤라트 시내.png
헤라트 신도심 전경

헤라트는 근대 시기의 전쟁으로 쇠퇴하였고, 소련아프간 침공 시에 크게 파괴되었다. 이후 탈레반의 점거와 아프간 전쟁을 겪으며 현재에 이른다.

2021년 상반기 현재 도시 주변에서 탈레반과 정부군의 치열한 전투가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점차 탈레반은 정부군을 도시로 몰아넣으며 헤라트를 포위했다. 결국 2021년 8월 12일(현지시각), 탈레반이 헤라트를 함락시켰다. 사실상 이 헤라트 함락으로 미국이 세운 아프간 정부의 운명은 결정된 거나 마찬가지다.

이 헤라트 함락은 정말 정부군으로서는 결정타였다.방위 담당자가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부터 활약했던 무자헤딘 출신의 이스마일 칸이었는데, 이 사람이 정부군과의 사적인 감정은 잊고 일단 협조하기로 하였다. 이 사람이 원체 유능하고 명망도 높았던지라 정부군과 이스마일 칸의 군벌, 헤라트 민병대가 힘을 합쳐 7월 30일 하루 동안 선제 공격으로 무려 탈레반 455명을 사살하고 현장지휘관을 포함 56명을 체포하였다. 미국의 공습까지 더해져 10일 동안의 헤라트 공세에서 탈레반은 무려 7000명의 병력을 잃어버렸고, 정부군과 이스마일 군벌 측은 반격에 나서 구자라 지역의 교차로와 헤라트 주 공항을 탈환하기 위해 공세를 펼쳤다.

이 공세가 성공적으로 끝난다면 탈레반은 남부, 북부지역을 잇는 간선도로를 빼앗기는 꼴이라 완전히 분단될 위기에 처했다. 즉 8월 4일 정도 시점으로 1~2주 내에 탈레반이 가시적 성과를 내지 못하면 탈레반은 그 동안 대량 강제 징병으로 인한 부족들의 원한으로 인해 역전패를 당하고 전략적 패배를 당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헤라트 함락은 참으로 어이없이 벌어졌다. 헤라트의 정부군 수뇌부가 살마 댐을 시찰하러 갔는데, 내부에 잠입해 있던 탈레반에 포위를 당해 항복했고 그대로 탈레반으로 전향했다. 당연히 사령관이 전향했으니 정부군이 담당하는 헤라트 동부 전선이 붕괴되었고, 탈레반으로 전향한 207군단장이 헤라트 서부 전선에서 싸우고 있던 이스마일 칸을 반격작전을 해야 하니 동부 전선으로 부르는 기만책을 썼다. 헤라트 동부 전선으로 간 이스마일 칸 일행은 갑자기 탈레반에게 포위되었고, 같이 간 정부군은 그대로 탈레반에 뇌물을 받고 항복한다. 그 사이 헤라트 도심에 있던 시장은 탈레반이 살마 댐을 폭파시켜 헤라트를 수장시키는 수공 작전을 벌이겠다며 협박하자 어쩔 수 없이 항복해야 했다.

결국 이스마일 칸은 탈레반에게 포로로 붙잡혔다.(이후 그는 이란으로 탈출했다.)아프간 정부의 서부 전선은 완전히 붕괴되었고, 헤라트로 보낸 정부군은 가장 핵심적인 정예병력이었는데 그대로 탈레반으로 항복하거나 와해되었다. 반면 탈레반은 이제 서부 전선이 완전히 깔끔하게 정리되어 동부 전선에만 전력을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실제로 헤라트 함락 이후 주도들이 급속도로 탈레반에 함락되고 있다. 결국 정부군은 상황을 뒤집거나, 적어도 비등하게 만들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를 어이없이 날려버리고 말았다. '헤라트의 사자' 이스마일 칸

2023년 10월 아프가니스탄 지진 당시 2천명 이상 사망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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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름에서 들어나듯 에프탈의 후예이다[2] 1428년 샤 루흐가 건립, 시가지 서북쪽 외곽 위치[3] 1856년 이란의 헤라트 공격을 틈타 바라크자이 왕조가 점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