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키히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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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 제125대 천황
아키히토
明仁


파일:아키히토 천황 연미복.png

출생
1933년 12월 23일 (90세)
도쿄부 도쿄시 고지마치구 고쿄 산전(皇居産殿)
(現 도쿄도 치요다구 고쿄)
즉위
1990년 11월 12일
도쿄 고쿄 마쓰노마(松の間)
재위기간
제125대 천황
1989년 1월 7일 ~ 2019년 4월 30일
상황
2019년 5월 1일 ~ 현재
서명
파일:아키히토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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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あき(ひと(아키히토, 명인)
부모
부황 쇼와 덴노, 모후 고준 황후
형제자매
2남 5녀 중 다섯째 / 장남
배우자
미치코 상황후
자녀
2남 1녀
장남 나루히토
차남 황사 후미히토 친왕
구로다 사야코
학력
가쿠슈인대학 (정치학과 / 수료)[1]
신체
165cm, A형
어칭호
継宮(つぐのみや(쓰구노미야)
연호
(へい(せい(헤이세이, 평성)



파일:Emperor_Akihito_199011_1.jpg

즉위식 당시 천황의 전통 관복 '고로젠노고호(黄櫨染御袍)'를 입은 아키히토 천황

1. 개요
4. 한국 관련 발언
5. 평화주의자
6. 대중 매체에서
7. 여담



1. 개요[편집]


일본의 제125대 천황이자 현 상황(上皇). 그리고 고훈 시대 이후 연령이 정확하게 확인되는(고훈 시대 이전의 비정상적으로 생몰연대가 긴 천황 제외) 역대 천황 중 가장 장수한 천황이고, 이 기록은 현재도 경신 중이다.

연호는 헤이세이 平成(평성)이며, 1989년 1월 7일부터 2019년 4월 30일까지 30년간 재위하였으나 고령의 나이와 건강 상의 이유 등으로 2019년 4월 30일 자신의 맏아들 나루히토 황태자에게 양위하고 천황 자리에서 생전에 물러나 고카쿠 덴노 이후 202년 만에, 그리고 일본에서 근대적 헌법이 제정된 이후 처음으로 상황이 되었다.

1933년(쇼와 8년)생으로 쇼와 덴노고준 황후의 2남 5녀 중 다섯째 자녀이며, 아들 중에서는 첫째이다. 1989년 1월 7일 쇼와 덴노의 십이지장 하혈로 인한 사망으로 일본 제125대 천황에 즉위하였으며, 이듬해 11월 12일 도쿄도 고쿄에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쇼와 덴노까지는 교토고쇼(교토어소)에서 진행했다. 즉, 도쿄에서 즉위식을 거행한 사상 첫 천황인 셈이다.

아명의 일종인 '어칭호(御称号)'는 “쓰구노미야(継宮)”. 사후에는 헤이세이 덴노(平成天皇)로 불리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2]

아직 살아있는 아키히토와 나루히토를 헤이세이 덴노, 레이와 덴노라고 부르는것은 살아있는 사람을 '고 OOO씨'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참고로 , 의 황제를 연호로 지칭하는 것과 메이지 유신 이후 재위한 일본 천황을 연호로 지칭하는 것은 외형상으로는 비슷하게 보일지 몰라도 전혀 다른 용법인데, 전자의 경우는 공식적으로는 묘호나 시호로 지칭하되 연호+제 형식의 제호를 일종의 통칭으로 사용하는 것이고(때문에 살아있는 현재의 황제에게도 사용할 수 있다), 후자의 경우는 재위 기간에 사용한 연호를 사후에 추호로서 사용하는 것이다. 때문에 생존 중인 천황은 연호로 지칭하지 않는다.

현재 황위에서 퇴위하였으나 생존 중이므로 일본에서는 상황(上皇)으로 불린다. 외국에서는 휘를 그대로 따서 Akihito로 호칭된다. 현재 장남 나루히토와 더불어 세계에서 공식적으로 Emperor라고 불리는 단 둘뿐인 군주 중 한 명이다. 즉 공식적으로 영미권에서 황제로 분류되는 군주다. 여제는 empress로 불린다.

대표적인 평화주의자로 한국을 비롯한 해외에도 유명하다. 그 이유는 어린 시절 전쟁의 참상을 몸소 겪었기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인 히로히토가 자신은 신이 아니라고 한 건 물론 수도에 네이팜탄을 맞고 두 도시에 원자폭탄을 맞는 등 일본 제국의 패망을 눈앞에서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발언으로 꼽히는 대부분의 말이 평화를 지향하는 말들이다. 덕분에 식민지들을 비롯한 과거 일본 제국의 피해자들에게도 좋은 인상으로 남아 있고 일본 국내외에서 모두 지지를 받는 인물이다.

"전쟁의 기억이 희미해지려 하고 있는 오늘, 일본이 지나온 역사를 반복해 배워서 평화를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중요하다."
(2011년 12월 23일, 자신의 생일 기념 감상문을 통해서)
"戦争の記憶が薄れようとしている今日、日本が歩んできた歴史を繰り返し学び、平和を考えることは極めて重要だ。"
(平成23年12月23日、御自身の誕生日記念感想文を通じて..)

2016년 8월 8일 오후 3시, 공식적으로 생전 퇴위 발표를 하였다. 2017년 6월 9일 일본 국회에서 '천황의 퇴위 등에 관한 황실전범 특례법(天皇の退位等に関する皇室典範特例法)'이 만장일치로 정식 통과되어 2019년 4월 30일 정식으로 퇴위하였다.# 물러남으로써 황위는 장남 나루히토에게 승계되었고, 자신은 상황(上皇, 조코)가 되었다. 사무라이 무사들이 막부로 정권을 잡기 전에는 일본도 천황의 권력이 막강한 편이어서 황위 다툼이 심해, 일찍 양위하는 경우가 꽤 있었다. 일반적으로는 상황(上皇)이 되고, 불교에 귀의해 출가한 상태라면 법황(法皇)이라고 한다.

2021년 9월까지는 쇼와 덴노가 가장 장수한 천황(87년 253일)이었으나, 2021년 9월 2일부로 아버지인 쇼와 덴노의 장수 기록을 경신함으로써, 현재는 신화 속 천황을 제외한 역대 천황 중 가장 장수한 천황이 되었다.


2. 생애[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아키히토/생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 가족관계 및 후사[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아키히토/가족관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자녀
이름
출생
배우자/자녀
1남
나루히토
(德仁)
1960년 2월 23일
마사코 황후
슬하 1녀[3]
2남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친왕
(秋篠宮文仁親王)
1965년 11월 30일
후미히토 친왕비 키코
슬하 1남 2녀[4]
1녀
구로다 사야코
(黒田淸子)
1969년 4월 18일
구로다 요시키

4. 한국 관련 발언[편집]


아키히토는 식민지배전범 피해자에 대한 직접적인 사과 같은 평화주의적 언행 외에도 한국 관련한 친화적 발언을 꽤나 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일본이 저질렀던 만행들을 반성하고 크게 뉘우치고 있으며 총리 아베 신조에게 후손들을 위해서 바른 역사를 가르치라고 일침을 날리기도 했고 "미래를 위해서라도 과거의 전쟁을 반성해야 한다"고 할 정도면 바른 역사관을 가지고 있다.

이 때문에 아베 신조가 "그냥 기도나 하고 있으라"고 하는 등, 총리 아베 신조하고 사이는 그렇게 썩 좋진 않다. 일본의 간무 덴노(桓武天皇)의 생모가 백제무령왕의 자손이라고 했는데, 일본의 우익 세력들이나 혐한세력들은 당연히 이 발언을 듣고 당시 천황이였던 아키히토를 비난하고 싫어할 정도이다.[5]

역대 한국 대통령 중 아키히토와 회담한 인물은 2019년 기준으로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이렇게 5명이다. 1990년 5월, 일본을 공식 방문한 노태우 대통령과의 대화 때 ''저의 가계를 살펴보면 모계에 한국계 인물이 있는 것 같다"라고 발언한 바 있다.

1998년 10월 7일, 김대중 대통령의 일본 국빈 방문시 만찬에서 "한때 우리나라가 한반도의 여러분께 큰 고통을 안겨준 시대가 있었습니다"라고 발언했다.#

2001년 12월 23일, 68세의 생일을 맞아 열린 기자회견에선 직접 "나 자신으로서는 간무 덴노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에 기록돼 있어 한국과의 인연을 느끼고 있습니다"라고 발언했다 #. 그래서인지 일본에서는 아키히토의 발언 때문에 혐한 넷 우익들을 비꼬는 표현을 쓸 때 "한국 형님(…)"이라는 단어를 쓰기도 한다.#

일본과 한국 사람들 사이에는 옛날부터 깊은 교류가 있었다고 『일본서기』 등에 자세히 적혀 있습니다. 한국으로부터 이주해 온 사람들과 초빙되어 온 사람들에 의해 다양한 문화와 기술이 전해졌습니다. 궁내청(宮內廳) 악부(樂部)의 악사들 중에는 당시에 이주해온 사람의 자손으로 대대로 악사 일에 종사하며 지금도 때때로 아악을 연주하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러한 문화와 기술이 일본 사람들의 열의와 한국 사람들의 우호적 태도에 의해 일본으로 전해졌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후 일본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 자신으로서는 간무 천황(桓武天皇)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에 기록되어 있는 점에서 한국과의 인연을 느끼고 있습니다. 무령왕은 일본과 관계가 깊었고, 이때 이래로 일본에 오경박사가 대대로 초빙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또한 무령왕의 아들 성명왕은 일본에 불교를 전해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국과의 교류는 이러한 교류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점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

다만 아사히신문 등이 이 대목을 보도한 것과 달리, 주로 일본의 보수 성향 언론들은 이날 기자회견 내용을 보도하면서도 아키히토의 이 발언은 쏙 빼놓기도 했다. 2013년 나라현에서 열린 국제대회에서도 같은 발언을 했다.
“‘속일본기’에 의하면 간무일왕 생모는 백제 무령왕을 선조로 여기는 백제 도래인(渡來人)의 자손이다”

참고로 언급한 간무 덴노는 나라현에서 교토로 수도를 옮기고 헤이안 시대(794~1185년, 교토 시대)를 연 성군으로 알려져 있다. 좀 더 들여다보자면 간무가 편찬한 ‘속일본기’(789년)는 이렇게 전한다.

황태후의 성은 화(和·야마토)씨이고[6]

이름은 신립(新笠·니이카사)이다. (…) 황태후의 선조는 백제 무령왕의 아들인 순타태자다. 황후는 용모가 덕스럽고 정숙하여 일찍이 명성을 드러냈다. 고닌(光仁) 천황이 아직 즉위하지 않았을 때 혼인하여 맞아들였다. (…) 백제의 먼 조상인 도모왕(都慕王)이라는 사람은 하백(河伯)의 딸이 태양의 정기에 감응해서 태어난 사람인데[7] (…) 황태후는 곧 그 후손이다.출처

皇太后 姓; 和氏, 諱; 新笠. (…) 后先出自百濟武寧王之子純陀太子. 皇后容徳淑茂 夙著聲譽. 天宗高紹天皇龍潛之日 娉而納焉. (…) 其百濟遠祖都慕王者 河伯之女感日精而所生 皇太后卽其後也. 출처


간무 덴노의 아버지는 코닌 덴노(光仁天皇)로 할아버지 대에 '황위 쟁탈전'에서 패배하여 황위 계승이 어려웠던 인물이다. 그때, 만난 여인의 이름은 화신립(和新笠)으로 백제 무령왕의 10대손으로 멸망한 백제 왕실의 후손이었다고 한다. 61세에 천황이 된 코닌은 신립을 정실로 삼아 고야(高野: 타카노노)씨를 사성했기에 고야신립(高野新笠: 타카노노 니이가사)으로도 불리며 이들 사이에 난 아들 간무를 황태자로 삼는다.

789년 신립이 세상을 떠나자 간무 천황은 어머니를 태황태후로 추증하고 히라노 신사에 위패를 모시고 제사 지냈다. 간무는 즉위 동안 백제 왕족의 후손들을 찾아가 제사 지내고 이들에게 5위 이상의 관위를 내리거나 중앙과 지방의 주요 관직에 임용하였다.출처

이는 정략결혼을 한 아버지와 간무 자신이 백제 무령왕 혈통임을 내세워 황권을 강화시켰음을 알 수 있다. 코닌이 즉위할 때 정실은 이후 황후였고, 그 아들인 오사베가 황태자로 책봉되지만 이들은 불과 몇 달 후에 폐위되고 사망한다. 신립 소생이던 간무에게 밀려난 것으로 보인다. 코닌의 자식은 5남 7녀였는데, 후지와라 가문은 간무를 내세운다. 반대측이 적통성을 문제삼자 "내 어머니는 백제의 왕족"이란 말로 이를 잠재우고, 간무는 황태자에, 어머니는 황후에 책봉된다.

간무가 속일본기를 편찬하여 화신립에 대해 서술할 때 동명성왕의 출생까지 거론한 것은 무령왕은 온조왕의 후손이며 온조는 천제의 아들이자 하백의 외손자인 주몽의 아들이니 곧 간무 자신이 하늘의 혈통을 이어받았다는 왕권신수설을 나타낸다.

그동안 천황가가 백제계와 관련있다는 학설은 일부 학자들에게서만 나올 뿐이었다. 사학자 이시와타리 신이치로는 천황가의 시조가 백제계 도래인이라 하였고# 이노우에 미쓰사다 도쿄대 교수는 칠지도를 받은 오진천황은 백제왕족이며 천황가 자체가 조선으로부터 건너온 일본 이주자라고 하였다.#

아키히토의 이 발언으로 일본의 일부 우익들은 충격을 받았는지, 이후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인들이 차지한 한반도" 운운하며 "지금의 한반도는 백제와 무관한 나라"라는 망언을 일삼았다.

그런데 아키히토보다 한술 더 뜬 사람은 일본 황실이 조선반도에서 건너왔다는 에가미 나미오의 학설에 천황가의 풍습이 한반도와 비슷한 점을 소개하며 동의했던 아버지 쇼와 덴노다. 어머니를 "오모"라고 부른다는 점, 일본 특유의 정좌 자세가 아닌 양반다리를 한다는 점, 젓가락을 잘 쓰지 않고 숟가락을 사용한다는 점(일본은 밥도 젓가락으로 먹는 등 젓가락 문화가 더 보편적이다), 떡을 시루에 쪄서 먹는다는 점(시루는 한국의 고유의 찜기이다), 후식으로 차 대신 숭늉을 마신다는 점, 마늘이 요리에 자주 사용된다는(일본은 마늘을 식용으로 잘 사용하지 않는다) 점이다.

2005년 사이판 방문 당시엔 '태평양조선인평화탑'(太平洋朝鮮人平和塔)에 참배했다. 궁내청 관계자들은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고 했다.#

2017년 9월 20일엔 아키히토와 미치코 황후 부부가 사이타마현 히다카시에 있는 고마 신사[高麗神社]를 방문했다. 역대 천황 가운데 고마신사를 참배하는 것은 아키히토가 처음이라고 한다. 고마신사는 1300여년 전 고구려가 멸망하자 일본으로 건너온 고구려 보장왕의 아들이자 도래인인 약광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신사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아키히토 천황이 퇴위하기 전에 일본 내에서 고구려를 상징하는 의미가 있는 고마신사를 방문함으로써, 한국에게 반성과 화해의 메시지를 보내려는 의도를 내비쳤다"는 관측이 나오기도 했다.# 신사 관계자의 말에 의하면, 신사를 둘러보던 아키히토가 "고구려는 몇 년에 멸망했습니까?"라고 질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9년에 공개된 외교문서에 따르면 황태자 시절이던 1988년 9월 당시 일본 외무성의 무라타 료헤이(村田良平) 사무차관이 이원종 주일대사와의 비공식 협의에서 '아키히토 황태자의 조속한 한국 방문이 실현되길 기대한다'는 일본 입장을 전달했고, 이 대사가 이를 본부에 보고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전했다.

아베 신조 전 총리의 부친인 아베 신타로 외무대신이 1986년 3월 아키히토 황태자 부부의 방한을 검토하고 있다고 했으나, 그해 8월 미치코 황태자비의 건강 문제 등으로 방한 계획이 보류됐었다.#

다만, 황태자 시절에 방한했던 이력이 있는 듯하나 확인이 더 필요한 내용이다. 관련영상12분 22초의 이방자 여사 작품전에 방문했던 내용의 자료화면과 설명이 있다.

2020년 공개된 외교문서에서도 첫 해외방문을 한국으로 고려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과거사 청산 요구에 수반한 반대 여론이 높아지고, 일본은 보수 우경화 흐름이 강해지면서 결국 이뤄지지 않았다.


5. 평화주의자[편집]


역사관, 정치관은 밑에 쓰여있는 발언들에서 알 수 있듯이 호헌파, 반전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적어도 과거 침략을 부인하거나 미화하는 짓은 하지 않으며, 평화헌법의 가치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발언은 아래와 같다.

"우리 국민은 다시는 전쟁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는 깊은 반성평화국가가 되겠다는 굳은 결의를 했다." (1992년 10월, 중일 수교 20주년을 맞이하며 베이징 방문 때)


"한때 우리나라가 한반도 사람들에게 지대한 고통을 주었다는 깊은 슬픔이 항상 내 기억 속에 있다." (1998년 10월, 김대중 대통령 방일 만찬 때)아키히토 일본국왕 발언일본 국왕 김 대통령 초청 만찬서 한국 고통 사과


제국헌법 시대 천황의 지위와 비교하면, 현행 헌법 하의 천황의 지위가 오랜 역사에서 볼 때 전통적인 천황의 지위에 맞다고 본다.”(2009년 4월, 결혼 50주년 기념 기자회견에서) #


(일본에 장래에 대한 걱정이 있느냐는 질문에) "내가 오히려 걱정인 것은 차츰 과거 역사가 잊혀지는 것이다. 전쟁에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말도 못하는 고생과 희생 위에 지금의 일본이 세워진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전후 태어난 사람들에게 제대로 (역사를) 전달해 나가는 것이 국가 발전에 큰 도움이 된다." (2009년 11월, 즉위 20주년을 하루 앞두고.)


"전쟁의 기억이 희미해지려 하고 있는 오늘, 일본이 지나온 역사를 반복해 배워서 평화를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중요하다." (2011년 12월 23일, 생일 기념 감상문을 통해서)


"전후 연합군최고사령부, 연합군의 점령하에 있던 일본은 평화와 민주주의를 지켜야 할 소중한 것으로 삼아 일본국 헌법을 만들고 다양한 개혁을 실시해 오늘의 일본을 일궜다." (2013년 12월 23일, 팔순을 맞아 발표한 인사말 중에서)


"만주사변으로 시작한 전쟁의 역사를 충분히 배우고, 앞으로 일본의 존재 방식을 생각하는 것이 지금 무척 중요하다." (2015년 1월 1일, 궁내청을 통한 신년사에서)


"전쟁 후 오랜 세월 동안 이어진 평화로운 세월을 회상하고 이를 되돌아보며, 깊은 반성과 함께 앞으로 전쟁의 참화가 다시 일어나지 않기를 간곡히 기원하며…" (2018년 8월 15일 임기 마지막 전국 전몰자 추모식에서)


노태우 대통령의 방일 당시, "통석의 염(痛惜の念)을 금할 수 없다"란 말도 아키히토가 한 말이다.

그런데 이른바 "통일운동가"라는 정경모는 이것을 백제아신왕에게 광개토대왕이 쓴 표현이란 이유로 "내 땅인데 지금 못 되찾아서 아쉽다"라는 뉘앙스로 볼 수 있다는 주장을 했다.# 그런데 설령 이게 사실이라도 직역 자체는 "유감이다"로 해석되는 것으로 보아 아키히토가 영토 수복의 의미를 쓴 건 아닌 것 같다(정경모도 세지마 류조의 개입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애초에 아키히토의 평상시 발언만 봐도 "내 땅인데 지금 못 되찾아서 아쉽다"란 뉘앙스랑은 좀 안 맞는다. 이런 시각은 일본의 극우적인 사상과는 전혀 맞지 않다. 아신왕고구려와 전쟁을 한 결과 졌고, 패배자의 입장에서 승자에게 한 말로 일본은 한국과 싸움을 했다고 생각조차 안 한다.

통석의 념 발언은 제대로 된 사과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 때문에 '저것도 사과라고 하는거냐'며 비난을 받는 경향이 강하다. 이에 이원복 교수는 2000년 저서 <새 먼나라 이웃나라> 일본편 1탄에서도 해당 발언을 언급하며 일본인들의 체면을 고려한 우회적 표현을 몰라서 무작정 분개한 것이라고 봤다. 실제 일본에선 엘리베이터가 고장나도 '고장'이란 직설적 표현 대신 '준비중'으로 돌려서 쓴다.

실제로 아키히토는 즉위 이후 단 한 번도 야스쿠니 신사참배한 일이 없다. 극우 세력 일각에서는 꾸준히 참배를 권유하고 있지만, 아키히토는 이에 대해 일체 함구 중이다.

한국에서는 야스쿠니가 일본판 현충원으로 잘못 알려져있는데, 일본판 현충원은 치도리가후치 전몰자 묘원이고 야스쿠니는 그냥 사설 사원에 불과하다. 즉 한국으로 치면 국가 대표단이 현충일에 현충원이 아니라 뭔 사설 공동묘지에 참배를 가는 것과 같은 이치인 셈이다. 아키히토를 비롯한 일본 내 양심 인사들이 야스쿠니 참배를 거부하면서 내세우는 논리가 '국가 사원도 아닌 일개 사설 사원에 왜 우리가 참배를 가야 하는가?'이다.

일본어 위키피디아에서는 "황태자 시절 참배한 적이 5회 있다"고 썼지만 아키히토가 정식으로 황태자 자리에 오른 건 1952년이고, 야스쿠니 신사에서 공개적으로 A급 전범을 합사한 건 1978년 이후로, 1975년 이후 야스쿠니를 참배하지 않은 전임 히로히토와 마찬가지로 아키히토가 A급 전범 숭배에 동조한다는 근거는 일체 없다.

극우 세력에서 은근슬쩍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반달을 일삼는 일본어 위키피디아의 특성상 이 또한 극우 세력의 날조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참배는 안하는 대신에 야스쿠니 신사에서 제(祭)를 지낼때 보내는 공물을 매년 해마다 보내기 때문에 실제로 안간다고 해도 암묵적으로 A급 전범들을 추모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결국 위 발언들도 정치에 관여할 수 없는 지위를 의식해 표현을 다소 완곡하게 했을 뿐이지, 실제 아키히토의 성향은 반(反) 극우 성향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어린 시절 생생히 겪은 전쟁의 아픈 기억(지독하고도 처절한 전쟁의 참상과 비참함 그리고 죽음의 공포)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11살 때이던 1944년, 그 초등학생 나이에 몇 달 동안 연합군 작전으로 퍼부어진 전국 대공습, 어뢰작전으로 인한 사람들의 대규모 아사, 원자폭탄이 낳은 절대적인 파괴라는 '전쟁의 비참함'과 방공호에 몇 달 간 틀어박히며 전쟁이 끝나기를 숨죽여 기다려야만 했던 '압도적인 공포'까지, 전쟁이라는 것이 얼마나 파괴적이고 공포 그 자체로 두려운 것인지를 어린 나이에 생생히 아니 정말 처절하게 실감해야만 했다.

처음 도쿄 대공습이 일어난 직후 천황과 황족들이 지상에 모습을 드러내자 사람들이 천황에게 "현인신이라면서 왜 아무것도 하지 않냐"며 원망의 시선으로 쳐다보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어린 나이에 그러한 참상과 원망이 충격이 되었을 것은 당연지사다.

또 같은 해 방공호에서 피난생활을 할 당시에는 군대의 참모 부관에게서 카미카제에 대한 소식을 듣고서 "그럼 그저 병력을 소모하는 것 뿐 아닙니까?"라고 물어서 기고만장하던 일본군 부관의 입을 다물게 하는 등 사람 목숨을 버러지 취급하던 일본군의 잔혹함과 어리석음도 직접 보아온 것이다. 이러니 극우들의 주장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지는 전쟁세대로서 누구보다 잘 아는 셈이다.

2011년 3월 15일, 동일본 대지진과 관련한 영상 메시지를 발표했는데, "메시지가 방송되는 도중 긴급 뉴스가 발생하면 저를 생각하지 말고 메시지 방송을 중단하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당시 TV 도쿄는 천황 폐하의 담화든 뭐든 개의치 않고 정규방송을 돌렸는데 그 소식을 듣고도 "문제없다"며 넘어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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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왼쪽에 아베 신조 총리가 보인다.

2013년 4월 28일, 아베 신조 총리가 주도하여 '주권 회복의 날'(ご主権回復の日)을 일본 내각이 주관하는 정부 행사로 격상하였다. 이는 1952년 샌프란시스코 조약으로 미군정 체제를 벗어난 것을(주권 회복) 기념함과 동시에, 미군정 때 만들어진 현행 일본국 헌법도 개정해야 한다는 분위기 조성을 위한 것으로 보인다. 정부 행사인만큼 내각이 참석을 요청하면 천황으로서도 실권이 없어 어쩔 수 없이 따를 수밖에 없는데,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이 자리에 참석한 아키히토는 행사 내내 말 한 마디도 하지 않았으며, 행사 폐막 직후 퇴장하는 도중 참석자들이 '덴노 헤이카 반자이(天皇陛下万歳, 천황 폐하 만세)!'라고 외치자 사뭇 당혹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런 짓을 하면 할수록 일본 황실까지 덩달아 이미지가 안 좋아진다. 아키히토의 아버지 히로히토조차 1978년 야스쿠니 신사에 A급 전범이 천황의 동의 없이 멋대로 합사되자 매우 불쾌해하며 이후로는 참배는커녕 근처에도 안 갔다.

히로히토 본인이 전쟁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였는지를 논하기 이전에, 일단 전쟁의 진행 및 결과가 히로히토가 제위에서 물러날 뻔한(심하면 본인 목숨은 물론 왕실 전체가 날아갈 뻔한) 과거를 겪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런 반응이 정상적일 수밖에 없다. 참고로 A급 전범 합사 이전에는 8번 정도 참배했다.

야스쿠니 신사는 A급 전범이 합사되기 전까지는 한국의 현충원과 비슷한 역할을 했기 때문에, 황실의 일원으로서 참배가 당연했다. 하지만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그는 오히려 합사 이후의 야스쿠니 신사를 싫어했을 것이다. 강제든 타의든 국가를 위해 죽은 이들을 모시는 장소에 오히려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종국에는 패배로 이끈 이들을 같이 영웅으로 모시자고 강제로 합사한다니…

그러므로 내심 평화헌법을 유지하려는 아키히토 입장에서 이 날 모습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또한 '덴노 헤이카 반자이'도 얼핏 자신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자기를 내세워 본인들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는 간신배들의 속셈이 뻔한데 아키히토 입장에서 유쾌할 리가 없다.

간신이라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닌 게, 일부 각료들은 천황이 임명하므로 형식적으로는 신하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일본각료 대부분의 공식명칭이 내각총리대신, 총무대신, 외무대신, 재무대신, 법무대신, 문부대신, 후생대신, 방위대신, 경산대신, 농림대신, 환경대신 등 대신이란 호칭이 들어간다. 내각관방장관과 공안위원장은 대신 칭호는 안 쓰지만 국무대신에는 포함된다

그리고 이 문제는 일본 내의 매우 민감한 정치적인 문제와 결부된다. 현재 언론은 아베 신조의 개헌 중에서 자위대 관련된 부분만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지만, 한편으로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이라고만 되어 있을 뿐 국가원수로 명문화되지는 않은 천황을 개정 헌법에서 다시금 일본국의 국가원수로 명문화하려 하고 있다.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천황을 일본의 상징으로 삼아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이를 휘두르던 군국주의자들을 연상케 하는 모습이다. 이쪽 안은 불행 중 다행으로 자민당과 연립정부공명당의 결사 반대로 빠지긴 했다.

위와 같은 일련의 일들로 인하여, 아베 신조 총리와의 관계는 그다지 원만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컨대 천황은 신임 총리가 취임하면, 공무 외에도 개인적으로 고쿄에 초청해서 만찬을 베푸는 전통이 있는데, 아베는 아키히토 재위 기간 내내 한 번도 초대받지 못했다고 알려졌다. 이는 공적인 영역에서는 어쩔 수 없어도 사적으로는 아베와 교류하지 않겠다는 의사 표시로 보인다.

일본 내 극좌파들도 천황제 자체를 폐지해야 한다고 심심하면 주장하지만, 아키히토 개인의 인격(인성)에 대해선 비판을 하지 않는다. 심지어 쇼와 덴노를 전범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들이 말이다. 이들도 아키히토와 나루히토 부자의 인격은 칭송하기 때문에 천황제 폐지 주장도 즉각 폐지보다는 남성 황족들의 씨가 말라서 천황제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을 때까지 유보하자는 입장이 주류다.

2013년, 야마모토 타로가 초선 의원이던 시절 원자력 발전소 관련 문제 등으로 고쿄에서 열린 행사에서 편지를 건넨 적이 있는데, 야마모토의 안전을 위해서 읽지 않고 바로 시종장에게 넘겼다. 만약 읽었으면 야마모토가 위험할 수도 있었다. 일본의 상징이지만, 정치적인 권력은 극도로 제한된 일본 천황의 상황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다. 천황이 왜 편지를 즉석에서 보거나 자신이 갖지 않고 시종장에게 편지를 넘긴 게 현명한 판단이냐 하면 국내 정치에 개입하지 않는 것이 원칙인 덴노를 정치적인 논란에 끌어들이려는 의도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편지의 내용은 원자력 발전소 문제에 관심을 써달라고 하는 일반적인 내용만 들어 있었다고 한다.

거기에 더해 패전 70년을 맞이해 쇼와 덴노의 항복 선언 녹음(옥음방송) 원판 사진과 고음질 디지털 녹음본을 2015년 8월 1일에 전격 공개했다. #(일본어) mp3

천황 일가의 굴욕이라고도 볼 수 있는 항복 녹음(옥음방송종전조서)을 디지털로 세심하게 복원해 공개한 것은 아베 신조 정권의 우경화를 반대하는 아키히토의 의중이 반영되었다는 해석이다. 즉, "전쟁의 참상을 잊지 말고 돌아보면서 반성하자"는 것이다. 참고로 이 원본을 이용한 디지털 녹음본이 공개되기 이전의 항복 선언 녹음본은 음질이 매우 열악했다.(자세한 것은 옥음방송 문서를 참조)

하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이런 일본 내 속사정까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경우는 거의 없는지라, 일본에 대하여 안 좋은 감정을 갖고 있는 한국 입장에서는 그냥 '일본 높은 인물=나쁜놈'이란 미운털이 단단히 박혀 있기 때문에 아키히토까지도 욕을 먹는 경향이 강하다.

아키히토에 대하여 잘 모르는 한국인들은 '평화주의자는 개뿔!'이라는 말까지 내뱉을 정도로 아키히토 역시 그저 '전쟁 범죄 주범의 아들'이라고 취급받고 평판이 상당히 박한 편에 속한다.

게다가 여느 입헌군주제 국가들의 군주들이 그렇듯이 아키히토도 실권이 없는 인물이라서 언론이나 대중들 앞에 많이 나설 일이 없는 인물인지라, 한국에서 아키히토 관련 소식이 나오면 '아키히토는 웬 듣보잡임?'이라는 반응까지 나오기도 한다.

이는 한국 내의 정서적인 역할도 있으나, 미디어 언론사들에 의한 문제도 있다. 언론사에선 발행 부수 증가와 정치적 이득과 국민 정서와 조회수 유도를 위하여 일부러 자극적으로 기사를 내는 경우가 많은데, 아키히토의 선행이나 일본의 선행은 잘 알리지 않으나 자국 내의 혐한 단체는 아주 적극적으로 보여주는 행동들이 다음과 같은 사례다.

후술할 1992년 MBC 특별기획 <분노의 왕국>의 천황 암살 미수 장면 파문 외에도 한일 무역 분쟁 초기에는 아키히토를 무슨 1980년대 반공물에 나오는 김일성마냥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전단지까지 등장했을 정도다. 정작 아키히토는 한일 무역 분쟁의 진짜 주범인 아베 신조와는 정반대의 성향을 고수하는 평화주의자라는 점을 고려해 보면 단지 국가의 상징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다짜고짜 비난부터 가하는 것은 상당히 무례한 행동에 불과할 뿐이다.

그래도 1990년대 말부터는 일본 문화 개방과 인터넷의 대중화로 진면목이 꽤 알려졌는지 까방권 비슷한 것을 얻어, 그와 관련된 뉴스의 댓글 창에도 긍정적인 댓글이 많이 올라온다. 한국 포털사이트들의 뉴스 댓글들이 꽤나 과격하고 저질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이례적인 경우다. 국내에서의 천황의 이미지가 좋아지다 보니, 아베가 한국에서 까일만한 일을 했을 때 뉴스 댓글창에 '덴노 헤이카 반자이'로 도배되는 기이한 현상이 생기기도 한다.


6. 대중 매체에서[편집]


1992년 4월 6일, MBC 특별기획 <분노의 왕국> 1회 천황 암살미수 파트에서 아키히토 천황의 즉위식 때 퍼레이드 장면이 삽입된 적이 있다. 암살 미수장면은 서울 정동 야외 세트장에서 찍었다.

주인공 이하연(변영훈 분)이 재일교포 브로커(최불암 분)에게 몰래 권총을 구해 즉위식 날 구경꾼 속에 숨어서 아키히토에게 총을 쐈으나, 암살에 실패한 후 일본 경찰에 잡히는 식으로 나왔다. 문영남 작가의 원작 소설에선 순종황제의 아들 이호가 85세 된 시점에 천황 암살 시도를 하는 것으로 나온다.

방영 이후 가토 고이치 내각관방장관이 먼저 항의 의사를 밝힌 후 야나기 겐이치 주한일본대사가 노장희 한국 외무부차관에게 항의했고, 우익단체들도 주일한국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하거나 요코하마 주일한국총영사관까지 난입했다.

이에 MBC 측도 창작과 표현의 자유 침해라며 맞섰으나, 결국 방송위원회는 "가상의 사건을 사실로 오인할 우려가 있다"고 하여 '주의' 조치를 내렸다. (관련 기사, 에피소드 내용 정리)

미국 애니메이션 사우스 파크에서는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와 함께 미국 각지의 고래와 돌고래들의 무차별 학살을 주도한 악역으로 등장한다.

일본의 고래사냥이 스탠 마시가 이끄는 씨 셰퍼드에 의해 지속적으로 실패하자 카미카제 특수부대를 이끌고 씨 셰퍼드를 괴멸시켜 스탠 일행을 체포해 감옥에 넣은뒤 직접 면회를 와서 자신들이 왜 고래와 돌고래를 혐오하는지 직접 보여줬다. 그런데 혐오한다는 이유가 고작 고래와 돌고래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리는 조작된 사진 한장만 보고 그런것이었다. 그러자 스탠이 원자폭탄을 투하한건 이라고 조작한 사진을 보여주자 바보같이 거기에 또 속아넘어가서 이번에는 소와 닭을 학살할것을 주도한다.

미국 애니메이션 심슨 가족 시즌 10 23화에서 심슨 가족이 일본 여행을 갔을 때 스모 경기장에서 등장했다. 물론 성우는 아키히토 본인은 아니고 미국 성우인 댄 카스텔라네타의 성대모사로 나왔다. EBS판에서는 바로 옆 나라의 민감한 문제이기 때문인지 도쿄도지사로 바뀌어서 나왔다. 하지만 투니버스판에서는 그대로 천황으로 나왔다.

그런데 호머 심슨이 아키히토를 스모 선수로 착각해서 그를 마와시(샅바)를 담는 통에 집어던지는 바람에 그는 마와시 더미에 쳐박히는 굴욕을 당했다. 당연히 호머 심슨은 일본인 관객들에게 쓰레기 세례를 받았고, 일본 경찰에게 교육을 받다가 마지가 보석금을 내서 석방된다. 시즌 16에서는 영국에 가서 엘리자베스 2세의 마차를 차로 들이받아서 뒤엎어버렸다가 근위병들에게 구타당한 적도 있었다.

일설에 따르면 이 에피소드는 일본에서는 천황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방영금지 처분을 받았다고 하는데, 어디 심의기관에서 방영금지처분을 받은 게 아니라 그냥 논란을 피하기 위해 방송국에서 이 에피소드를 건너 뛰었다. 한국에서 왜색을 이유로 에피소드를 건너뛰는 상황과 같다고 보면 된다. 천황을 던지는 장면이 있어 방영하지 않았다고 공식적인 입장을 밝힌 게 아니라, 그냥 건너 뛰었기 때문에 천황 관련 장면 때문에 방영하지 않았다고 짐작할 뿐이다.

정발 DVD에도 이 에피소드는 빠져 있다. 그리고 이 에피소드 말고도 방영하지 않은 에피소드가 몇 개 더 있다.

소설 원작인 <높은 성의 사나이> 드라마판에서도 등장한다. 직접적인 이름 언급은 없고 그저 황태자, 전하(皇太子 殿下)라고만 언급이 된다. 배우는 츠지 다이스케, 쿠웨이트에서 태어나서 2살부터 일본에서 살게 된 배우로, 데뷔작은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이다.

일본에게 병합된 태평양 연안 미주 지방을 방문하게 된다. 황실은 이미 군부의 꼭두각시가 되고 독일과 벌어지는 격차를 걱정하며 평화를 주장하는 이미지로 나온다. 그러한 불편한 심기가 얼굴에 드러내자 아내가 위로하는 말에 "우리는 원양 어선을 띄우는데 독일은 로켓을 날린다"라고 불안해 한다.

위험을 무릅쓰고 태평양 연안의 자국민들에게 연설을 하다가 저격을 당하고 중태에 빠진다. 이후 수술은 무사히 마쳤지만, 중태에 빠졌다는 언급만 나온다.

7. 여담[편집]


아버지 쇼와 덴노처럼 어류학자로서 일본 어류학회 명예회원이기도 하고, 사이언스네이처 논문을 포함하여 논문 28편을 발표했다. 그런데 저 사이언스 논문은 과학 연구논문이라기보다는 일본 과학사에 관련된 에세이에 가깝고, 네이처 논문은 런던 린네 학회(분류학회) 연설을 글로 옮긴 것이다. 저자는 'His Majesty the Emperor of Japan'.

오히려 일본 어류 백과사전에 350페이지 가량을 투고한 것이 학문적인 기여에 가깝다. # 한편 천황이 되기 전에 했던 연구 중에 당시에는 논란이 되었던 망둑어 분류법을 제안하였는데, 현대에는 널리 사용되고 있다고 린네 탄생 300주년에 런던 린네 학회의 키노트에서 밝혔다. #

2008년에는 차남인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친왕과 사이좋게 1, 2저자를 먹으며 논문을 냈다. 저자 목록을 살펴보면, Akihito, Fumihito A et al. 이라고 되어 있는데, 일본 황실은 성(姓)이 없기 때문에, 저자 목록에 그의 '이름'만 올라가 있는 특이한 경우이다.

후미히토 친왕은 궁호(宮号)인 '아키시노노미야'를 '성'으로 등재. 참고로 저자 주소는 Imperial Residence. 첫째 누나 히가시쿠니 시게코생물학에 관심이 많았고, 딸 구로다 사야코도 조류 연구소에서 비상근 연구원으로 근무하며 물총새에 대해 연구한 바 있다. 일종의 집안 내력인 듯하다.

오랫동안 망둑어(망둑어 연구에서 넘버 원이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 연구를 한 것을 기려, 그의 이름이 들어간 망둑어 종이 2개, 속이 1개 있다. Platygobiopsis akihitoExyrias akihito 두 종과 바누아투와 월리스 푸투나 근방에 서식하는 Akihito속. 실험이 예상과 달리 잘 안 되어서 스트레스를 받았던 경험을 털어놓은 적도 있다. #

2019년 퇴위를 앞두고 천황으로서 마지막으로 망둑어 관련 논문을 발표하였는 데 그 자리에서 다른 논문도 검토 중이라고 하므로 퇴위 후에는 편하게 연구에 전념할 것으로 보인다. 황태자 시절 미국에서 블루길을 생포해 처음으로 일본에 들여왔다. 현재 일본에서 생태계 교란을 일으키는 블루길의 선조이기 때문에 이 점에 대해서는 좋은 소리는 듣지 못한다.

외국 방문이 3차례(미국, 영국, 네덜란드) 뿐이었던 히로히토와 달랐다.[8]

아키히토는 미국, 중국, 영국 등 다른 나라들의 해외순방이나 지방순례, 지진 등과 같은 자연재해 발생시 피난소 현장 방문도 상당히 흔해서 인기가 높은 편이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당시에는 7주 연속으로 전국 각지 피난소들을 돌면서 위문을 했을 정도. 이러한 모습 덕분에 일본 내에서 천황제에 대한 자발적인 호의도가 상당한 편이다. 2003년에 이르러 일본의 전체 도도부현을 모두 방문했다.

어린 시절 미국인 가정교사에게 교육을 받아 영어를 능숙하게 하는 편이라서 해외 순방시 따로 통역가 없이도 해외의 수상들과 무리없이 대화한다. 그 외에 짧지만 영어로 대화하는 장면이 포착 되기도 하였다. 상술한 바와 같이 아키히토는 젊은 시절 잠깐 영국에 유학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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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한일 월드컵 결승전 폐막식 당시 김대중 대통령에게 악수를 청했다 무시당한 적이 있었다고 오해한 사람들이 있지만, 사실은 아키히토가 더 들어가라고 손짓한 걸 김대중 대통령이 못 본 거다. 애초에 두 사람이 저기서 처음 만난 것도 아니고 밖에서 만난 후에 같이 들어온데다, 일반적으로 악수는 오른손으로 하는 것인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예절 교육을 받았을 아키히토가 악수를 왼손으로 청할 리는 당연히 없다.[9]


1998년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방일했을 때는 직접 영어를 쓰며 빌 클린턴을 환대하기도 했다.


훗날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은 2000년에 오키나와 방문시 오키나와 평화의 비 앞에서 뒷짐을 지고 참배를 하는 결례를 범하기도 했다.

2015년 태평양 전쟁의 격전지 순방을 검토하기도 했었다고 NHK를 통해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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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차로는 센추리 로얄 리무진 외 위 사진과 같이 일반 센추리로 목격되기도 한다. 뒤에 따라오는 검은 승용차는 LS의 형제차인 셀시오다.

천황이 차량을 탑승하면 천황의 위치는 운전석 바로 뒷자리이다. 천황의 옆은 황후의 자리며, 천황은 무조건 인도와 가까운 쪽 자리에 앉지 않는다. 그 이유는 거동수상자나 신변이 이상한 사람이 갑자기 인도에서 튀어나와 천황에게 테러를 가하거나 여러 물리적 피해를 입힐 수 있기 때문이다.


자가용으로는 1991년식 혼다 인테그라 4도어 세단 모델을 지금도 이용하고 있다. 부부가 테니스 치러 갈 때 직접 운전하는 편이다. 1991년부터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위의 영상은 사실 편집이 어느정도 된 영상으로, 실제 해당 차량은 저렇게 스포츠카의 배기음을 내지도 않을 뿐 더러, 그 역시 시내 도로에서 시속 30km 정도로 서행 운전한다고.[10]

황태자 시절에는 황색 비틀을 몰았다. 사실상 역대 천황 중에선 처음으로 보통 운전면허 정식 취득 및 자가용을 소유했다 볼 수 있다. 물론 자신이 직접 운전하는 기준이다.

생전, 퇴위 발표 이후에 천황의 생일과 신년에 궁중에서 하는 일반인의 축하 행사에 참가하는 관광상품이 인기를 끌었다.#

동일본 여객철도에서 관리하는 일본 황실 전용 특별열차(E655계 전동차로, 교직겸용차)가 있고, 이를 위한 천황 의전용 시설이 도쿄역하라주쿠역에 있는데 정작 본인은 별로 안 좋아한다고 한다. 이런 시설을 사용하려면 의전 같은 각종 준비를 해야 한다. 열차 준비, 직원 교육, 경찰 배치 등등. 이 과정에서 다이어가 망가져 국민들이 불편을 겪을까 염려해서라고 한다. 실제로 해당 열차는 6량 중 중간의 전용객차 1량을 빼고 5량 상태로 전세열차 등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왠만해서 황실 전용 특별열차보다는 신칸센을 타고 다니는 비중이 상당히 높다. 이는 생전 퇴위 후에도 마찬가지다.

일본의 역대 천황여성 천황과 요절한 천황들을 제외하면 처음으로 수염을 기르지 않은, 다시 말해 면도한 천황이기도 하다.

2018년 1월, 1989년 이전에 태어나 만 29세 이상인 사람이 아키히토 덴노가 퇴임하는 2019년 4월까지 결혼하지 못하는 일본 청년들이 자신들을 천황의 연호 ‘헤이세이(平成)’를 본떠 ‘헤이세이 점프(jump)’라며 자조하듯 불렀다고 한다. 이에 덩달아 SNS에서 “헤이세이점프!” (Hey! Say! JUMP와는 무관.)를 함께 거론하며 화젯거리가 되었다고.#

현행 일본국헌법 체제에서 천황은 '일본국과 일본국민의 상징인 존재'이되 국민의 권리와 의무 바깥의 존재이지만, 황실의 품위를 위해, 제125대 천황 즉위(即位礼正殿の儀/天皇ご即位) 당시 상속세 4억 2,800만 엔을 냈다. 주민세는 고쿄의 소재지인 도쿄도 치요다구로 납부한다고 한다.

퇴위 이후 2020년 7월 기준으로 황태자 시절에 하다가 천황이 된 뒤 하지 못한 망둑어 연구 활동을 하면서 노후를 즐기는 중이다. 최근 오키나와에서 신종 망둑어를 발견해 관련 연구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다. #
[1] 당장 메이지 덴노의 아버지인 고메이 덴노만 하더라도 코우카, 카에이, 안세이, 만엔, 분큐, 겐지의 6개의 연호를 썼지만 정작 오쿠리나는 고메이였다.[2] 관례상 헤이세이 덴노가 될 가능성이 거의 확실하지만, 어디까지나 가능성일 큰 것일 뿐 법으로 반드시 그렇게 불러야 한다고 정한 것은 아니다. 천황의 사후 추호(시호)를 반드시 생전에 쓰던 연호로 해야 한다는 법률이 있는 것이 아니며, 메이지나 다이쇼, 쇼와 덴노의 경우도 어디까지나 관례상 그렇게 정해진 것일 뿐이다. 게다가 그 관례라는 것도 어디까지나 메이지 시대부터 일세일원, 즉 한 군주의 치세 하에서 하나의 연호만 쓰게 되면서 메이지 덴노부터 시작된 관례이기 때문에 그 역사가 매우 짧다.[1] 또한 저 세 덴노는 어디까지나 일세일원의 조서(一世一元の詔)에 따라 한 치세에 한 개의 연호만 썼을 뿐 연호 자체는 덴노 본인들이 결정했지만, 헤이세이는 1979년(쇼와 54년) 제정된 연호법에 따라 내각이 정한 것이기에 과거 덴노 셋과는 케이스가 조금 다르다.[3] 도시노미야 아이코 내친왕[4] 코무로 마코, 아키시노노미야 카코 내친왕, 아키시노노미야 히사히토 친왕[5] 막상 이 간무 덴노의 친모 고야신립은 황실 내에서 서열이 낮았다.[6] 신찬성씨록 779번에 나오는 성씨가 백제계 화(和:야마토)다. 일본에서는 5품 이상의 성 뒤에 아손(朝臣)이라는 경칭을 붙여 야마토노아손이라고 부른다.[7] 백제 시조 온조왕의 아버지는 주몽이라는 입장을 취한 것이다.[高麗神社] 주변에는 세이부 철도코마역이 있으며, 역전에 장승이 있다.[8] 원래 히로히토중국도 방문하고자 희망했지만, 중국 내의 강한 반발에 부딪혀 결국 방중하지 못했다. 하지만 대만은 방문한 바 있다.[9] 저 장면은 일본 넷우익들이 퍼가서 외교적 결례랍시고 혐한으로 써먹고 있다.[10] 후방 방향표시등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깜빡이는 모습을 보면 영상이 편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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