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드릭 페르부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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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프리카 공화국 제6대 총리
헨드릭 프렌스 페르부르트
Hendrik Frensch Verwoerd


출생
1901년 9월 8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사망
1966년 9월 6일 (향년 64세)
남아프리카 공화국 케이프타운
국적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네덜란드 (1901~1903)
파일:남아프리카 연방 국기.svg 남아프리카 연방 (1903~1961)
파일:남아프리카 연방 국기.svg 남아프리카 공화국 (1961~1966)
임기
남아프리카 공화국 총리
1958년 9월 2일 ~ 1966년 9월 6일
직업
교수, 정치인, 기자
학력
스텔렌보스 대학교 (사회과학)
라이프치히 대학교 (심리학, 사회학)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 (심리학, 사회학)
함부르크 대학교 (심리학, 사회학)
소속 정당
약력
스텔렌보스 대학교 응용심리학장
남아프리카 연방 국회의원
남아프리카 연방 원주민부 장관
남아프리카 연방 총리
남아프리카 공화국 총리

1. 개요
2. 초기 생애
3. 정치 활동
4. 총리
5. 최후



1. 개요[편집]


파일:798093.jpg
젊은 시절.

남아프리카 연방남아프리카 공화국(이하 남아공)의 정치인, 전 총리, 독재자.

1994년까지 존재하던 인종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를 완성시켜 남아공의 국제적인 고립을 초래한 장본인인 것은 물론, 반공이라는 이름 하에 반대파들을 빨갱이, 검둥이 등으로 몰아 탄압했다.

요하네스버그 가이드라인도 실질적으로 이 사람이 초래한 괴담이다.


2. 초기 생애[편집]


1901년 9월 8일 안예 스트리크와 빌헬무스 페르부르트의 2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훗날 남아공에서 벌인 행적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그를 정통 남아공인으로 아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사실이 아니며 원래는 네덜란드 출신이다. 그것도 수도인 암스테르담 출신. 따라서 태생부터가 보어인이 아닌 네덜란드 본토인이었다.

원래 남아공에는 17세기부터 네덜란드 이주민의 후손인 보어인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나중에 영국에게 밀렸고, 19세기 중후반 들어 영국이 남아공 전역의 지배권을 노리면서 결국 보어 전쟁으로 이어졌고 이 전쟁에서 결국 보어인들이 패함에 따라 영국의 탄압을 받아야만 했다. 아버지가 이에 동정심을 갖고[1] 남아공으로 이주를 결정한 것이다.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네덜란드 개혁 교회를 신봉하는 사람이었는데, 어렸을 때는 로디지아(현 짐바브웨)의 불라와요에서 선교사 보조로 일했다. 이런 겸에 로디지아에서 학교까지 다녔으나 중간에 집안이 남아공으로 돌아가면서 학교를 그만둬야 했다. 대학 시절에는 신학을 전공했으나, 본인의 맘에 영 안 들었는지(?), 중간에 철학 및 심리학으로 전과한다. 후에는 장학금을 받고 영국, 독일 등으로 유학을 갔다.


3. 정치 활동[편집]


본디 남아공인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아공에 온 후 사실상 새로운 곳의 물이 들기 시작했고, 페르부르트 또한 남아공의 보어인과 별반 다르지 않은 사람으로 변모했다. 이미 아파르트헤이트는 남아공에서 실시되고 있었지만, 나중의 그것에 비하면 그저 양반일 뿐이었다. 하지만 네덜란드계[2] 보어인들의 인종주의가 워낙 심했는데 페르부르트 또한 이와 다르지 않았다. 거기다가 대공황까지 겹치면서 큰 타격을 입은 보어인들의 흑인에 대한 적대감은 더욱 커졌고, 이러던 와중에 1937년 인종주의 정당인 국민당에 입당해 당 재건에 집중했다.

1948년 총선에서 인종차별적인 공약을 내세우며 농촌 지역구를 싹쓸이하며 국민당은 극적으로 승리를 거두었고, 이후 아파르트헤이트는 매우 극악무도한 방향으로 개악되었다. 안 그래도 탄압받던 흑인들의 지위는 날이 갈수록 더더욱 악화되고 일상 생활까지 통제를 받기 시작했다. 국민당 정권은 반공까지 내세워 반대파들을(반대파 백인도 포함) 노골적으로 탄압했는데, 급기야 본인들의 아파르트헤이트를 정당화하고자 선거조작까지 벌였다.

1953년 총리였던 다니얼 프랑수아 말란은 총리직을 사퇴했다. 이후 요하네스 스트레이돔이 승계했으나 지병으로 5년 만에 숨을 거두었고, 차기 총리로 유력시되던 페르부르트는 이후 총리로 취임했다.


4. 총리[편집]


총리에 오른 페르부르트는 아파르트헤이트를 심화하는 데 있어서는 그야말로 일등공신이었다. 당연히 국제 사회의 비난을 피할 수는 없었고, 이를 무마하고자 아파르트헤이트를 "흑인과 백인 간의 좋은 이웃 관계를 형성하는 정책"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것은 흑인에 대한 최소한의 인간 대접까지 다 그만두겠다는 정책이었고, 이후 남아공은 급속도로 고립의 길을 걷게 되었다.

특히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이 바로 일명 "흑인자치정부촉진법"이었는데, 이 법을 시행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남아공의 인구 때문이었다. 비록 백인들이 실권을 쥐면서 흑인을 노골적으로 탄압했지만, 정작 백인들은 인구의 10%에 지나지 않았고 흑인은 오히려 80%나 되었기 때문에 아무리 흑인들을 격리시켜도 인구의 대부분이 흑인이라는 사실은 본인들에게 큰 눈엣가시였다. 이 법을 시행함으로서 대부분의 흑인들은 특정 지역으로 강제로 이주되었고, 그곳을 남아공에서 아예 독립[3]시켰는데 그 땅은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였다. 이 정책 덕에 백인은 남아공 인구의 다수가 되었고 남아공 국적을 박탈당한 대부분의 흑인들은 기껏 남아공에 와도 외노자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황무지에서 흑인들이 자립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이렇게 만들어진 나라들(일명 반투스탄) 또한 남아공이 제멋대로 영역을 조정하는 등 여전히 남아공의 입김은 강했다. 당연하지만 의도도 그렇거니와 국제 사회에서는 이러한 반투스탄을 정상적인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고 남아공의 괴뢰국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오히려 백인들에게조차 내부 분열을 조장했는데, 당시 남아공은 표면적으로 엄격한 개신교 국가를 표방했고 "도덕성"을 핑계로 '19금'이라고 불릴 만한 것들은 모조리 금지했다. 이에 불만을 품던 몇몇 백인들은 아예 반투스탄으로 이주하였고 여기다가 카지노 등을 차렸는데 당연히 19금을 즐기려는 백인들은 여기로 몰려들었고 심지어 흑인들과 섹스라도 해서 쾌락을 즐기려던 몇몇이 아예 여기서 그것을 실천에 옮겨 어마어마한 흑백 혼혈을 양산했다. 당시 남아공 정부는 자신들의 아파르트헤이트가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결국 생각보다 오래 못 간 채 끝나 버렸고 이후 이렇게 해서 생긴 흑백혼혈들은 현재 남아공의 대표적인 사회 문제로 남아 있다. 또한 페르부르트는 텔레비전을 매우 혐오해서 도입을 금지했으며, "텔레비전은 독가스, 핵폭탄과 같다"는 막말까지 남겼다. 그래서 남아공의 텔레비전 방송은 발타자르 포르스터르 총리 시기인 1975년에 시험 방송을 거친 뒤 1976년 1월 5일에야 남아공의 공영방송사인 SABC에 의해 본격적으로 개시되었다.[4][5] 1976년 당시는 흑백 TV에서 컬러 TV로 바뀌어 가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처음부터 컬러로 방송을 시작했다.

페르부르트 치하에서 남아공은 아예 고립당했다. 당시 남아공은 남아프리카 연방이라는 이름의 영국 자치령으로, 사실상 독립국가나 다름없었지만 명목상 대영제국의 자치 공동체로서 영국 국왕남아프리카 연방의 국가원수를 지내고 남아공인 중에서 임명되는 총독이 그의 대리인이며 현지 의회에서 총리를 선출해 그가 정부 수반이 되었는데, 그러다보니 영국은 비록 별 효력은 없어도 독립국가보다는 비교적 쉽게 남아공에 압력을 가할 수 있었다. 실제로 해럴드 맥밀런 영국 총리가 암묵적으로 남아공의 인종차별을 비판하는 취지의 연설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페르부르트는 영국의 인종차별 관련 간섭을 피하기 위해 자국을 독립 공화국(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전환하려고 했다. 페르부르트는 곧바로 이를 추진하기 시작했고, 영국마저 이렇게 극악무도하게 나아가는 남아공을 포기하기를 원했기에 공화국 전환은 매우 수월하게 추진되었다. 마침내 국민투표를 거쳐 1961년 남아공은 영연방에서 탈퇴한 후 공화국이 되었다. 허나 인종차별과 반공을 기치로 한 독재에는 큰 변함이 없었으며, 오히려 이 시점을 계기로 남아공은 올림픽을 비롯한 국제 스포츠 대회의 출전이 금지됨에 따라 더더욱 고립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장기독재가 이어지고 텔레비전도 도입을 거부하는 등 극도로 억압적인 정책을 펼치면서 백인들조차 그에게서 등을 돌리려는 조짐이 나타났다. 1960년 데이비드 프랫이라는 영국계 백인[6]이 페르부르트를 총으로 쏴죽이려다 불발로 그쳤다.[7]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는 아무렇지 않은 듯이 독재를 강행했으나...


5. 최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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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9월 6일, 그 날은 케이프타운의 의회에서 연설을 할 예정이었다. 예정대로 오후 2시 15분경 의사당에 나왔는데, 개회 종이 울리자 제복을 입은 연락원이 다가왔다. 연락원이 왜 왔는지 궁금했던 그는 연락원에게 사유를 물어보고자 자리에서 일어섰는데, 바로 그 때 연락원이 흉기를 휘두르며 페르부르트의 이곳저곳을 찔러 댔다. 갑작스러운 일에 모두가 깜짝 놀랐고, 사태가 심각해지자 곧바로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도중에 65번째 생일을 이틀 앞두고 사망했다. 향년 6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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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모두 같은 인물이다. 왼쪽은 증명사진, 오른쪽은 체포 직후 찍힌 사진.

사태 이후 연락원은 곧바로 체포되었는데 이름은 디미트리 차펜다스포르투갈인그리스인의 혼혈 백인이었다. 법적으로야 문제가 없던 백인이었지만 그의 집안에는 사실 흑인의 피가 있었고 이것은 외모에 그대로 나타났다. 이를 이유로 백인들은 그를 따돌렸고, 결국 이런 멸시와 천대에서 비롯된 뿌리깊은 분노가 인종차별 정책의 만악의 근원인 페르부르트에게 향한 것. 이 사람의 삶도 평범한 삶이 아니었는데 아버지부터가 아나키스트그리스 왕국에 반대해 왔고 미국, 그리스, 포르투갈, 모잠비크를 오가면서 바쁘게 살아 왔다. 미국에서 항만노동자로 일하면서 흑인들과 같이 공산당 활동도 하다가 미국에서 추방당하고 포르투갈에서 모잠비크 독립 세력을 돕기도 하고 그리스에서는 나치 독일군을 상대로 한 폭탄 테러를 돕는 등 결코 평범한 삶을 살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를 백인으로 여기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남아공에서 살면서 백인으로 표기된 신분 증명서에 자신은 백인이 아닌 컬러드, 유색인이라고 고쳐 달라는 소송을 냈다가 패소했다.

후에 "몸 속에 있는 거대한 벌레가 페르부르트를 죽이라고 지시했다"고 증언하면서 정신병이 확정되어 사형 선고를 받지 않고 정신병원에 수감되었다.[8] 차펜다스는 아파르트헤이트가 사라지던 때에도 살아 있었으나 세상에서 잊힌 채 계속 정신병원에서 살다가 1999년 81세로 세상을 떠났다. 사망 당시 차펜다스가 믿던 그리스 정교 장례식이 치러졌고 정교회 사제가 미사를 보았다. 죽을 당시 고작 10명 남짓한 사람들이 장례식에 참가했다고 한다.

하지만 차펜다스가 정말 정신병을 앓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암살 직후부터 논란이 거셌다. 일단 차펜다스 본인이 살아 온 인생을 봐도 그냥 미쳐서 벌였다고 보기에는 어려웠다. 미국, 그리스, 포르투갈에서 공산당 및 사회주의 입당, 권위주의나 독재에 저항하는 모임에 들어가 암살도 참여하고 차펜다스 본인은 사전에 페르부르트에 대하여 조사하고 모든 준비를 하여 암살했다. 그래서 차펜다스를 비하하기 위해 일부러 미쳤다고 조작한 거 아니냐는 것이다.[9] 차펜다스도 살아 있는 동안 "내가 미쳤다고? 벌레가 그 놈을 죽이라고 시켰다고? 웃기는 소리다." 라고 부정했으며 죽는 날까지 백인들은 멀쩡한 자신을 정신이상자로 왜곡했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차펜다스가 수감 중 무수한 고문을 당했다고 주장한 것도 논란이 되었다.

2018년에 남아공에서 그가 미쳐서 벌인 짓이라고 발표한 사건 당시 백인 조사원들이 서술한 보고서가 발표되었는데, 이 보고서는 '우리가 보기에는 미개한 검둥이 같은 그를 정밀 조사할 거 없다'는 식의 인종차별적 태도로 서술되어 있었다. 이 보고서가 발표된 뒤 남아공에서도 백인 정권이 그를 일부러 미쳤다고 비하하며 진짜 동기를 감췄다는 주장이 나오면서 재평가되었다.

페르부르트가 살해당하자 서방의 일부 국가들은 애도를 표하기는 했지만, 정작 그들도 페르부르트를 매우 싫어하기는 마찬가지였으며[10] 나이지리아를 위시한 아프리카의 몇몇 국가들에서는 그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그야말로 기뻐하며 환호성을 질러 댔다고 한다. 흑인들에게는 정말로 불구대천의 철천치원수가 따로 없었으니 이상할 것도 없다. 남아공 현지인의 의견을 볼 수 있는 글, 페르부르트의 암살과 각국의 반응

페르부르트 사후 남아공의 독재는 좀 완화되는 듯 싶었으나 발타자르 포르스터 정권 이후에도 독재와 인종차별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페르부르트의 이름은 각종 시설물에 붙으면서 우상화되었다. 당연하지만 1994년 넬슨 만델라가 집권하면서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이 사라지며 그의 우상화는 모두 다 철회되었고 지금은 소수 정당에 지나지 않는 백인우월주의 정당에서나 찬양할 뿐이다.

한편 차펜다스는 억울하게 정신이상자로 매도되었다고 재평가되면서 2000년대 와서 그를 기린 연극이나 그를 다룬 책도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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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 당시 네덜란드인들은 보어인을 같은 민족, 즉 동포로 여겼다.[2] 네덜란드 본토도 마찬가지였다. 2차대전 와중에 나치의 가공할 만행을 두 눈으로 체험하고, 무력으로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막으려다 패하고 독립시키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은 뒤에야 인종차별적 경향이 사그러들었으며 당연히 이때부터는 남아공과 모든 관계를 완전히 끊어 버리고 아파르트헤이트도 타 국가들 못지않게 비난했다.[3] 단 몇몇 지역은 홍콩처럼 고도의 자치권만 주고 독립은 안 시켰다.[4] 실제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페르부르트가 죽은 후에 있던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을 라이브로 볼 수 없는 극소수의 국가 중 하나였는데, 이에 언론의 비판이 거세자 남아공 정부는 굴복하며 달 착륙 장면의 녹화된 영상을 제한적으로 볼 수 있도록 허락했다고 한다. 물론 이 녹화를 중계한 뒤에는 다시 TV 방송을 금지시켰지만.[5] 이는 현 시점에서 세계 최빈국인 콩고민주공화국(1966), 중앙아프리카공화국(1974), 심지어 부룬디(1975) 같은 나라들보다도 늦은 것이다.[6] 사실 흑백갈등에 가려져서 그렇지, 보어전쟁의 영향 탓에 영국계 백인들과 독일계, 네덜란드계 백인들도 사이가 썩 좋지는 못했다. 가령 아파르트헤이트를 다룬 영화인 ‘파워 오브 원’에서는 주인공이 어렸을 적 사정으로 영국계 학교를 가지못하고 독일계 학교를 갔는데, 독일계 학생들에게 오줌통이라 불리며 왕따와 멸시를 당해 큰 충격을 받고 시골로 가게 되는 장면이 나온다.[7] 사업가이자 반 아파르트헤이트 운동가로 법원 청문회에서 아파르트헤이트는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8] 원래 정신병이 있으면 그 어떠한 경우라도 사형이 집행될 수 없다.[9] 데이비드 프랫의 암살 미수 때도 남아공 정부는 미친 사람의 범행이라 발표하면서 프랫을 정신이상자로 낙인찍었다.[10] 페르부르트 때부터 남아공에서 공안정국과 언론 검열 분위기가 본격적으로 강화되었고 백인들마저 숨막혀하는 사회 분위기가 자리잡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