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리 루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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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리 루카스
Henry Lee Lucas
파일:헨리 리 루커스.jpg
출생
1936년 8월 23일
버지니아주 몽고메리 카운티
사망
2001년 3월 13일 (향년 64세)
미국 플로리다주
사인
심정지
가족
부모님
형제자매 8명
죄목
살인, 존속살인
1. 개요
2. 생애
3. 경찰의 막장수사
4. 최후
5. 반전 아닌 반전
6. 미디어


1. 개요[편집]




미국 역사상 가장 유명해진 살인자. 17개 주에 걸쳐 360명 이상 살해했다고 자백해서 유명해졌지만, 사형선고를 받고 감옥에 간 뒤에는 자백을 번복했고, 체포 당시부터 그의 자백이 현실성이 없다는 회의론이 끊이지 않았다. 그가 죽였다는 물적 증거가 확실한 사람은 세 명 뿐이다. 그 중 하나는 어릴 때 자신을 학대하던 어머니를 죽인 사건이었기 때문에, "연쇄살인사건"이라고 부를 수 있는 킬카운트는 두 명에 불과하다.


2. 생애[편집]


버지니아주 블랙스버그에서 9명 형제의 막내로 어머니는 매춘부였고 아버지는 알코올 의존증 환자였다. 아버지 앤더슨 루카스는 1949년 12월 눈보라가 몰아치는 추운 겨울날에 만취하여 집 밖에서 자다가 저체온증으로 사망했다. 헨리는 정신질환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한 적도 많았다. 극심한 허언증을 앓고 있었으며 그 때문에 자백을 여러 번 번복하였으며 나중에는 실제로 살해한 것은 자기 어머니뿐이라는 증언하기도 했다.

처음으로 살해한 상대는 자신을 오랫동안 신체적, 성적으로 학대한 어머니 비올라 루카스였다. 비올라는 막장 엄마였는데, 루카스에게 '헨리에타'라는 이름을 붙이고 여자 옷을 강요했으며, '손님'과 함께 있는 모습을 강제로 보게 했다. 조금이라도 반항하면 밥을 굶기거나 매질과 칼질로 학대했다. 헨리는 이 와중은 한 번 어머니에게 머리를 세게 얻어맞고 죽을 뻔했는데, 어머니는 아들이 죽어가는데도 방치했고, 어머니의 '손님'인 남자가 병원에 데리고 간 덕분에 살 수 있었다.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다. 단순한 '손님'도 아니라 연인 수준으로 가까운 사이의 남성으로 헨리에게 거의 아버지 역할을 해준 듯하다. 그러나 이 어머니의 연인이 어린 헨리에게 딱히 악의없이 가르친 것이 도축수간이었다. 막장 너머에 더한 막장이 있다. 이런 환경도 헨리의 이상성격 형성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헨리는 초등학교 6학년 때 학교를 중퇴하고 버지니아주 일대를 떠돌며 생활하다 1951년 로라 번슬리라는 17세 소녀에게 성관계를 요구했다가 거부당하자 그녀를 목졸라 죽였다고 주장했으나 그가 한 대부분의 자백처럼 거짓임이 드러났다. 1954년 헨리는 12건의 절도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소년원에 보내졌는데, 1957년은 탈옥했다가 3일 만에 체포되어 결국 1959년에 만기 출소 하였다.

이후 헨리는 1959년 미시간주 테쿰셰에 살고 있던 이복누나인 오팔의 집에 얹혀 살았다. 마침 소년원 시절 펜팔로 알게 된 여성과 결혼을 약속했다. 이때 그의 어머니가 헨리가 살고 있던 오팔의 집에 들이닥쳤다. 어머니와 결혼 문제로 말다툼을 하다가 어머니가 빗자루로 자신의 머리를 세게 때리자 격분하여 어머니를 살해하였다.[1] 헨리는 어머니를 살해하고 도주했으나 체포되었고, 재판에서 2급 살인 혐의로 40년형을 선고받았다. 교도소 내에서 이미 정신병을 앓고 있어 환각, 환청으로 시달렸으며 본인이 임시 석방을 거부했으나 억지로 1970년에 임시로 석방되었다.[2] 이후 헨리는 다른 가족에게 얹혀살거나 잡다한 직업을 전전했지만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하고 떠돌이 삶을 살았다. 1971년은 3명의 여학생을 납치하려 한 혐의로 징역 5년형을 선고 받았고, 교도소에서 펜팔로 알게 된 미혼모와 출소 후 결혼하였지만 2년 후는 자신의 의붓딸을 성적으로 학대한 혐의로 이혼하게 되었다.

1979년 친구 오티스 툴(Ottis toole)을[3] 만나게 됐다. 그리고 플로리다주의 잭슨빌에 사는 툴의 부모집에 얹혀 살게 됐다. 이때 지적장애를 가져 매춘과 경범죄를 저질러 소년원에 보내졌다가 도망쳐온 툴의 조카인 베키 파월과 친해졌다. 잭슨빌에서의 생활은 나름 안정적으로 헨리는 지붕수리와 자동차수리, 고철수집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하지만 베키가 1982년 할머니와 어머니가 사망해 집으로 돌아갔다가 체포되면서 이런 생활은 깨지게 되었고, 헨리는 그녀를 탈출시킨 후 떠돌이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 캘리포니아주에서 그들을 고용한 사장이 그들을 좋게 봤는지 자신의 어머니인 82세의 케이트 리치의 집에서 그녀를 돌보는 조건으로 살게 해줬다. 하지만 헨리와 베키는 리치 몰래 그녀의 계좌에서 많은 돈을 훔쳐내 사용했다는 사실을 들켜 쫓겨났고, 얼마 후 리치는 행방불명이 됐다.

헨리와 베키는 텍사스주로 건너가 오순절 교회 공동체에서 살게 됐으나, 얼마 후 베키가 사라지고 말았다. 교회 목사가 헨리에게 베키의 행방을 묻자, 헨리는 그녀가 향수병 때문에 고향으로 갔다고 말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교회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감화된 베키가 자신이 저지른 죄를 회개하며 소년원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가 이때문에 헨리와 말다툼을 하였고 살해당했던 것이다.

1983년 6월 헨리는 총기 불법 소지 혐의로 텍사스 레인저 필 라이언에게 체포되었다. 헨리는 그에게 케이트 리치와 베키 파월을 살해한 사실을 자백했다.[4] 후에 여죄를 추궁하는 과정에서 600명이 넘는 사람을 살해했다고 주장해 미국 전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이미 몇 건의 살인에 대한 물증이나 심증이 굳어가던 상태였기에 결과적으로 미국 전역의 사법계가 난리가 났다. 35개 주의 경찰이 미제 살인사건 210건을 들고 와 헨리를 조사하려 했다. 이에 엄청난 혼란이 빚어졌고, 이를 정리하는 데에 대규모 경찰 회의가 벌어지는 판이었다. 심지어 회의에서는 그가 자백한 특정 사건이 자기 담당 지역에서 벌어진 일이라며 경관들끼리 서로 다투는 쓸모없는 일까지 벌어졌다.


3. 경찰의 막장수사[편집]


전설적인 범죄 심리분석관로버트 K. 레슬러조차 그가 1975년 이후 5명 정도를 살해했으며 나머지 자백은 "즐기기 위해서 그리고 경찰이 얼마나 멍청한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거짓말을 했다고 분석하고 있다. 로버트 레슬러는 자신의 책에서 헨리가 그렇게 수많은 범죄의 범인을 자처한 이유로 다른 주의 관할서에서 심문을 받기 위해 이송을 거듭하면서 바깥 공기도 쐬고, 식당 음식도 먹고 하는 걸 즐기다 보니 무작정 자백을 일삼았다고 봤다. 레슬러는 루카스를 떠보기 위해 당시 화제가 되었던 짐 존스의 인민사원 집단자살 사건을 두고 이것도 당신이 했느냐는 낚싯밥을 던졌고, 루카스는 가이아나가 어딘지도 모르는 주제에 물론 자기가 한 짓이라고 거짓으로 자백하면서 훌륭하게 떡밥을 물었다. 그리고 추가 조사 결과 그가 자백한 사건 및 인정한 사건의 대부분은 거짓말이었다.

헨리에게 수백명을 죽였다는 자백을 받은 수사 과정 자체가 아주 비정상적으로 이루어졌다. 텍사스 레인저 산하에 만들어진 태스크포스에서 헨리의 신병을 장악해두고, 미국 전국의 경찰들이 미제사건 파일을 들고 와서 불과 20~30분동안 헨리에게 자백을 받는 식이었다. 과학수사가 발달하지 않은 당시에는 범인의 자백이 아주 중요한 증거로 여겨졌고, 헨리의 자백은 지나칠 정도로 자세했기 때문에 경찰들은 헨리의 자백을 믿었다. 정확히는 믿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미국 전국에 걸쳐 200여건의 미제 살인사건이 헨리에게 떠넘겨졌다. 아이큐가 80대였던 헨리는 자신이 자백함으로 인해 경찰들의 자신에 대한 대우가 엄청나게 좋아지고[5][6] 언론의 관심도 받게 되자, "경찰이 원하는" 대답을 마구 쏟아냈다. 경찰은 경찰대로 헨리에게 원하는 대답을 얻어내기 위해 그의 심리를 조종하고 미리 현장 사진을 보여주는 등 대답을 유도했다. 경찰은 헨리가 "독살을 제외한 모든 수법으로" 사람들을 죽였으며, 어떠한 물적 증거도 남기지 않은 용의주도한 살인마라고 선전했다.[7] 1983년에는 경찰의 아들이 살인죄로 1심 유죄를 선고받자 살인범의 아버지인 경찰에게 청탁을 받고 헨리에게 거짓자백을 받아 아들을 2심 무죄로 빼낸 사건도 있었다.

가장 먼저 비상식적인 것을 눈치챈 것은 피해자 데비 윌리엄슨(Debbie Williamson)의 유가족이었다. 헨리가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와 피해자를 죽였다고 자백했는데, 당시 그 문은 장롱으로 막혀 있어서 사람이 드나들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찰은 유가족의 의혹 제기를 무시했다. 테드 번디를 인터뷰해서 유명해진 언론인 휴 에인스워스(Hugh Aynesworth)도 헨리의 행적을 직접 추적해서, 헨리가 사용한 수표, 경범죄 전과, 모텔 숙박부 등의 기록을 수집한 뒤, 그것을 텍사스 레인저에서 발표한 헨리의 범죄 타임라인과 비교했다. 텍사스 레인저는 헨리가 방랑자(Drifter) 타입의 살인자로, 간선도로를 타고 이동하면서 만나는 사람을 무차별적으로 죽였다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에인스워스는 자신이 추적한 헨리의 실제 행적과 텍사스 레인저가 발표한 행적이[8] 도저히 일치할 수 없음을 발견했다.

웨이코 지방검사 빅 피젤(Vic Feazell)은 제도권에서 헨리 사건에 대한 의문을 처음 제기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기 관할 지역의 경찰들이 가져온 헨리 사건들을 살펴보고, 헨리의 자백에 허점이 많은 것을 발견하여 기소를 거부했다. 에인스워스가 찾은 자료까지 알게 된 피젤은 보통 일이 아님을 알고 역으로 헨리의 위증죄를 심리하는 대배심을 요구했다. 이에 텍사스 레인저와 그 수장 제임스 애덤스는[9] 피젤을 도청하고 협박했으며, 그를 뇌물 혐의로 기소했다. 피젤은 뇌물 혐의 건을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정치생명이 끝장나 검사직에서 사퇴했고 가정도 파탄났다.[10] 한편, 경찰 안에서도 댈러스 경찰국 같은 경우에는 레인저의 자백 수사가 순 엉터리였음을 피젤과 비슷하게 간파했다. 댈러스 최초의 여자 강력반 형사였던 린다 어윈(Linda Erwin)은 엉터리 사건 파일을 만들어 그것을 헨리에게 보여주자, 헨리가 그 자리에서 자백하는 것을 보고 헨리의 자백에 신빙성이 없음을 깨달았다.

어쨌거나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연쇄살인범이라고 확신한 텍사스 경찰은 텍사스에서 그가 저질렀다고 자백한 11건의 살인 혐의로 기소했다. 다른 사건들은 유기징역과 종신형이 선고되었고, 소위 "주황색 양말 사건"으로 알려진 변사체 사건으로[11] 헨리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


4. 최후[편집]


1986년 5월 텍사스 검찰총장 짐 매톡스는 헨리가 자백한 각 사건에 시각에서 헨리가 실제로 어디에 있었는지, 그래서 실제로 그 사건들의 범인이 될 수 없으며, 경찰들에 의욕과잉으로 헨리에게 자백할 내용을 주입했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하지만 경찰은 텍사스 레인저는 잘못이 없다는 자체 내사를 발표했고, 이 보고서는 대중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묻혔다.

1998년 당시 텍사스 주지사 조지 W. 부시는 사형집행을 무기한 연기했다. 부시는 헨리가 유죄를 선고받은 다른 사건들에 대해서는 유죄임을 의심하지 않으나, 가장 중요한 사형을 선고받은 주황색 양말 사건에 대해서는 워낙 증거가 부족해서 집행을 유예한다고 발표했다. 사형 찬성론자이며 실제로도 주지사 시절에 흉악범을 사형에 처한 적이 많은 부시의 평소 언동을 생각하면 정말로 예외적인 경우였다. 비슷한 시기에 종신형으로 감형을 탄원한 살인범 칼라 페이 터커는 증거가 충분했으므로 바로 사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헨리 사건"의 유가족들은 분노해서 부시를 비난했고, 헨리의 사형집행을 요구하는 자조단체를 만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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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시피 한쪽 눈이 멀었다.[12] 교도소 내에서 종교에 귀의하였으며 재봉틀 재봉사로 오랫동안 일했다. 체포 당시 사진을 보면 삐쩍 마른 모습인데, 죽을 때쯤에는 강제적인 통제에 의해서나마 나름 안정을 찾았고, 더욱이 교도소도 꽤 살만했는지 윗 사진처럼 비만 체형이 되었다. 다만 말년에는 병으로 인해 한쪽 눈이 멀게 되었다.[13]

결국, 헨리는 사형당하지 않고 2001년에 교도소 독방에서 심장마비로 생을 마감했다. 그가 자연사했다는 사실에 유가족들은 분노했다.


5. 반전 아닌 반전[편집]


그런데 2019년, 피해자 리타 살라자르의 속옷에 남아 있던 정액에서 발견된 DNA로 진범 "베니 티헤리나"가 체포되었다. 리타 살라자르의 유가족은 헨리의 사형을 요구하는 유가족 상조 모임의 멤버였기 때문에, 이 일은 다른 유가족들에게 자신의 가족도 헨리에게 살해당하지 않았을 가능성, 헨리가 정말로 처음 체포된 자신의 어머니 살인사건 외에 다른 범행은 두 건밖에 저지르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충격을 주었다. 이후 지금까지 헨리의 소행으로 자백되었던 200건의 사건 중 20건이 이와 비슷하게 진범의 DNA를 통해 검거되었다. 헨리의 변호사들이나 에인스워스 기자, 윌리엄슨 가족, 피젤 검사, 어윈 형사 등은 80년대부터 이미 헨리가 진범이 아니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이런 결과는 딱히 반전도 아니었다. 유가족들만 두 배로 고통받았을 뿐이다.

이 모든 사태는 헨리의 박약한 정신상태와 허언증, 구시대적이었던 수사방식, 아직 미비했던 과학수사, 실수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찰의 권위주의가 만들어낸 촌극이었다. 3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르면서 증거들이 유실되어 진범을 잡지 못하게 된 유가족들에게는 비극이었고, 200명에 가까운 진짜 살인범들이 활보하게 해 놓고 희대의 연쇄살인범을 잡았다고 안심하던 사회의 입장에서는 참극이었다.


6. 미디어[편집]


"차를 타고 주 경계를 넘나들며 보이는 사람마다 무차별적으로 죽이는 살인자"라는 헨리의 이미지는, 비록 거짓이었지만 각종 미디어에는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가 두 편이나 제작되었다. 존 맥노튼 감독에 의하여 1986년 만들어진 헨리: 연쇄살인범의 초상(Henry: Portrait of a Serial Killer)과 척 파렐로가 감독한 속편(1996년작)이다. 전작은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1>에 실릴정도로 호평을 받았지만 속편은 정체불명의 영화로 감독과 주연이 완전히 갈렸다. 호러영화계에 흔히 있는 판권만 있지 전작과 긴밀히 이어져 있지 않은 흔한 속편. 덕분에 1편과 달리 묻혀졌다. 참고로 척 파렐로는 다음 영화인 에드 게인 In the Light of the Moon(2000)으로 역시 실존한 연쇄살인마 에드 게인을 그린 영화를 감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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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1편의 경우 그 당시 연쇄살인마 영화와 달리 살인마의 눈으로 진행되며 끝까지 인과응보 같은 게 일절 없기에 영화를 보면 엄청나게 불쾌하다. 영화는 각색이 많이 되었는데, 그야말로 사람을 이유도 없이 그냥 죽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식당에서 밥맛이 좋다고 웨이트리스와 식당주인을 찔러 죽이거나 그의 고장 난 차량을 도우려고 멈춘 운전자까지 그냥 죽인다. 86년작의 헨리 리 루카스 역 배우는 마이클 루커이며 이 영화가 루커의 데뷔작이다. 11만 달러 저예산으로 만들어져 북미에서 6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크리미널 마인드 시즌 2의 최종보스 격이었던 연쇄살인자 캐릭터 프랭크 브라잇코프는 딸기 밀크셰이크를 좋아한다는 점과 캠핑카를 고문실로 개조해 주경계를 넘나들며 170여명을 죽였다는 점에서 헨리 리 루카스의 거짓 이미지와 토이 박스 킬러로 알려진 데이비드 파커 레이 등 여러 연쇄 살인마를 참고해서 만들어진 캐릭터다. 작중 브라잇코프는 시즌 1-2의 주인공격이었던 제이슨 기디언에게 엄청난 고통을 주어 그를 리타이어시킨다.[14]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살인자의 고백이 헨리 리 루카스 사건을 경찰의 막장행각을 고발하는 시각으로 다루고 있다.

사타노파니의 주인공 아마기 치카에게 복사된 인격도 헨리 리 루카스라고 한다.

인터넷상에서는 아직도 루카스의 킬카운트가 수백 명에 달한다는 잘못된 정보가 수정되지 않고 퍼져 있다. 아무래도 살인자의 킬카운트가 많을수록 선정적인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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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헨리는 어머니를 칼로 찔러 살해했다고 주장했으나, 실제로는 아니었고, 경찰이 어머니의 시신을 살펴본 결과는 아들에게 맞아죽었다.[2] 사실 이렇게 문제가 많고 죄수 본인이 석방을 거부하는데도 강제로 석방한 것이 교도소가 포화된 것이 컸다. 현재도 미국에서는 교도소가 심각하게 포화되어 이를 조금이라도 해결하기 위해 죄수가 원하지 않아도 큰 문제만 일으키지 않으면 석방하려는 것이 흔하다.[3] 이쪽도 6명을 살해한 연쇄살인마다. 심지어 식인과 방화를 저질렀으며, 1996년 에이즈로 사망했다.[4] 케이트 리치는 헨리의 다른 거짓 자백들과 마찬가지로 거짓임이 밝혀졌다. 그녀의 사인은 단순 실족사였다.[5] 자백을 한 번 할 때마다 딸기맛 밀크셰이크를 사줬다고 한다.[6] 600명을 살해한 연쇄살인마로 알려져 교도소에서 아무도 그를 건들지 않았다. 또한 경찰 수사에 협조적이었으며 교도관들과 신뢰를 쌓아 교도소 밖으로 자유롭게 외출할 수 있었다. 보통 이런 경우 그대로 도망가 버릴 텐데 헨리는 꼬박꼬박 교도소로 복귀하였다. 심지어 교도소 밖으로 나온 그를 보고 사람들이 사인을 요구했고, 헨리는 기꺼이 해주었다.[7] 뒤에 밝혀진 일이지만, 아무 사건이나 다 뒤집어 씌었으니 모든 수법을 사용한 것이 되었고, 사실 범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증거도 나오지 않은 것이었다.[8] 10월 2일 워싱턴주에서 살인 → 3200 킬로미터를 달려 → 10월 4일 텍사스에서 납치미수 → 1000 킬로미터를 달려 → 10월 7일 아칸소에서 살인 → 1500 킬로미터를 달려 → 10월 16일 뉴멕시코에서 살인 → 1600 킬로미터를 달려 → 10월 27일 네바다에서 살인 → 2600 킬로미터를 달려 → 10월 29일 루이지애나에서 살인 → 3400 킬로미터를 가서 10월 31일 워싱턴에서 살인[9] FBI 차장 출신으로, 에드거 후버 밑에서 사찰업무에 종사했다.[10] 미국에서 검사는 선출직이다. 훗날 피젤은 자신을 공격한 방송사인 WFAA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했고 승소하여 엄청난 규모의 합의금을 받아내어 억울함을 풀게되었다. 이후 피젤은 개인 법률 사무소를 차린다.[11] 피해자 이름은 데브라 잭슨이었고, 이 시점에서는 신원도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2019년이 되어서야 유전자 기술 발전으로 신원이 밝혀졌다.[12] 형제가 휘두른 나이프에 의한 것이라는 말이 있다.[13] 이 때문에 미국 내에서는 교도소에서 세금이 썩고 있다는 비판도 나왔다. 사실 미국 교도소는 세금뿐 아니라 죄수들을 갱생시키기 위한 종교단체들의 지원도 엄청나다. 한국에서도 번역되어 나온 <나는 희망이다>라는 책자를 보면 기독교, 이슬람, 유대교 단체들이 먹을 걸 돈으로 지원해서 정기적으로 기름진 음식에서 달콤한 과자류와 까지 먹을 수 있다는 게 나온다. 참고로 <나는 희망이다>의 저자 제프 헨더슨은 마약밀매를 하다가 구속되어 19년형을 받은 사람으로 새로운 삶을 살고자 범죄생활을 청산하고 교도소에서 조리사가 되었고 모범수로 인정된 끝에 10년만에 가석방되어 미국의 유명 1류호텔 주방장까지 올랐다. 자신의 실화를 다룬 자서전이 바로 <나는 희망이다> 현재 제프 핸더슨은 주방장으로 일하면서 학교, 도서관, 교도소에도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강연도 하고 다닌다.[14] 실제 사유는 배우의 하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