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스튜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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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리 경
헨리 스튜어트
Henry Stuart, Lord Darnl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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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헨리 스튜어트
(Henry Stuart)
출생
1546년
잉글랜드 요크셔 템플 뉴삼
사망
1567년 2월 10일 (향년 20세 ~ 21세)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배우자
메리 여왕 (1565년 결혼)
자녀
제임스 6세 & 1세
아버지
제4대 레녹스 백작 매튜 스튜어트
어머니
레이디 마거릿 더글러스[1]
형제
찰스
종교
가톨릭
1. 소개
2. 생애
3. 창작물에서



1. 소개[편집]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의 두 번째 남편이자 제임스 1세의 아버지이다.

스코틀랜드 왕국의 귀족으로 당시 스튜어트 왕조의 분가였던 단리의 스튜어트 가문(Stewart of Darnley) 출신이라서 보통 단리 경(Lord Darnley)이라고 불린다.


2. 생애[편집]


1546년에 제4대 레녹스 백작 매튜 스튜어트와 레이디 마거릿 더글러스[2] 사이에서 태어났다.

첫 번째 남편인 프랑스 왕 프랑수아 2세와 사별하고 스코틀랜드로 돌아온 메리 여왕1565년에 결혼했다. 제임스 5세의 서자이자 메리 여왕의 이복 오빠였던 모레이 백작 제임스 스튜어트[3]는 헨리 스튜어트의 품행을 들어 결혼을 반대했는데 레스터 백작가가 가톨릭에 가까웠기 때문에 혼인이 결정되었다. 결국 모레이 백작의 반란을 진압하고, 그를 잉글랜드로 쫓아낸 메리 여왕은 헨리와 결혼했다. 참고로 메리 여왕과는 사촌간 혼인이었으며[4] 단리 경이 메리보다 네 살 어린 연하였다. 단리 경은 스코틀랜드 왕가인 스튜어트 가문의 후손인데다가 잉글랜드 왕위 계승권까지 가졌기 때문에[5], 신분에 따라 메리 여왕과 결혼하면서 스코틀랜드의 King consort[6] 칭호를 받게 되었다. 하지만 이에 만족하지 않고 아내에게 자신을 스코틀랜드의 공동 왕으로 임명해주길 요구했다. 하지만 메리 여왕이 거부하면서 사이가 나빠졌다. 더군다나 헨리가 난폭한 주정뱅이에다가 방탕한 생활로 매독까지 걸리자 부부 사이는 더 멀어졌다.

그렇게 부부간의 갈등이 계속되는 와중에 메리 여왕이 이탈리아 베네치아 공화국 출신의 음악가이자, 단리 경의 옛 친구였던 다비드 리치오를 총애하면서 그 두 사람이 연인 관계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리치오가 진짜 메리 여왕의 애인이었는지 여부는 현재까지도 알 수 없으나 단리 경 헨리는 소문을 듣고, 분노하여 메리 여왕과 리치오에게 불만을 가진 귀족들과 짜고서 리치오를 죽여버리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함께 결탁한 귀족들과 함께 어느날 메리 여왕의 저녁 식사 중에 난입한 단리 경은 식사하던 메리에게

"리치오를 내보내 달라"

고 요구했다. 메리 여왕은 무장한 그들을 보고 리치오의 목숨이 위태로운 걸 눈치챘으며, 이에 단리 경과 루스벤 경이 이끄는 귀족들과 실랑이를 벌이면서까지 리치오를 내보내길 거부했다.

일이 뜻대로 진행되지 않자 단리 경과 귀족들은 메리 여왕을 억지로 막아서고 곁에서 식사 시중을 들던 다비드 리치오를 끌어내 여왕의 면전에서 칼로 무려 57차례나 찔러 죽이고 말았다.(리치오 암살 사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리 경은 리치오 살해 음모와 관련이 없는 것처럼 시치미를 떼며, 충격으로 정신이 없었던 메리 여왕을 보호하고 안심시키는 척 했고, 불안에 떨고 있었던 메리와 함께 던바로 도망쳤다. 두 사람은 이곳에서 보스웰 백작 제임스 헵번을 만나게 되는데, 보스웰 백작의 도움으로 병력을 모아 다시 왕궁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훗날 저 보스웰 백작이 메리 여왕과 결탁해 자신을 살해할 줄은 꿈에도 모른 채.

어찌됐든 이 리치오 살인 사건으로 인해 메리 여왕과 단리 경의 관계는 완전히 파탄이 나고 말았다. 이후 1566년 6월 19일에 메리 여왕은 마침내 단리 경과의 사이에서 아들 제임스를 낳았다. 이때 메리는 출산한 아내와 갓 태어난 아들을 보기 위해 산실에 찾아온 단리 경에게 아들 제임스를 보여주며

"하느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아들을 선물해 주셨다."

라고 선언했고, 곁에 있었던 다른 귀족들에게

"나는 최후의 심판대 앞에 선 심정으로 고백한다. 나는 결백하니 이 아이가 왕위 계승권자라는 사실의 증인이 되어 달라."

고 말하며 누가 봐도 리치오 살인에 대한 앙금이 남아있음을 피력했다. 이에 당황한 단리 경은 냉담해진 아내를 피하기 시작했고 결국 별거하게 된다. 그 틈을 타 보스웰 백작 제임스 헵번이 메리 여왕과 급속도로 가까워지면서, 제임스 왕자의 세례식까지 주관하게 되었고, 거의 여왕의 남편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사실상 이때부터 메리 여왕과 보스웰 백작의 내연 관계가 시작되었다고 추측된다.

이렇게 별거가 계속 이어지던 와중 부친 레녹스 백작의 영지인 글래스고에 머무르면서 매독을 앓고 있었던 단리 경 헨리에게 1567년 봄 메리 여왕이 갑자기 화해하자고 설득하자 '커크 오 필드'로 가게 되었다. 거기서 단리 경은 오랜만에 아내와 함께 며칠 동안 단란한 시간을 보냈고 이후 메리 여왕은 외출을 나갔다. 그러나 불과 며칠 뒤 단리 경이 머무르고 있었던 저택에 큰 폭발이 일어났고, 집에 있었던 단리 경의 측근들은 모두 끔찍하게 폭사했으며 단리 경 역시 인근에서 교살당한 시체로 발견되었다.(단리 경 암살 사건) 이 끔찍한 사건의 진상은 자신이 총애하던 리치오를 살해한 단리 경 헨리에게 원한을 품은 메리 여왕과 그녀의 새로운 애인이 되어, 국서(King Consort)인 단리 경을 살해하고 여왕의 복수를 하며, 그 자리를 차지해 실권을 쥐고 싶어한 보스웰 백작 제임스 헵번의 합작이었다.

당연히 이런 소문이 스코틀랜드 내부는 물론 국외에까지 나돌게 되면서 메리 여왕은 대내외적으로 신뢰를 잃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스웰 백작 제임스 헵번은 군대를 이끌고 메리 여왕을 납치해서 사실상 동거에 들어갔고, 메리는 자신의 납치범이자 남편 살해 용의자인 보스웰 백작을 처벌하긴 커녕 기어코 그와의 결혼을 발표하면서 세간의 경악을 사고 말았다.[7] 가뜩이나 단리 경의 살인을 공모했다고 의심받고 있던 차에 남편을 살해한 가장 유력한 용의자와 결혼까지 한 메리 여왕에 대한 스코틀랜드의 여론은 크게 악화되었다. 결국 메리는 자신의 지지자인 가톨릭 교도들에게까지 해명을 요구받으며 버림받았고, 반란을 일으킨 신하들에게 붙잡혀 감금된 후 아들 제임스에게 강제로 양위한 뒤 폐위되었다. 이로 인해 당시 생후 13개월밖에 안된 단리 경 헨리 스튜어트의 아들 제임스가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로 왕위를 물려받았다.

한편 보스웰 백작 제임스 헵번은 단리 경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되어 사형당할 위험에 처하자 1567년스코틀랜드를 탈출해 노르웨이로 도주했지만, 거기에서도 체포되어 덴마크로 보내지게 되었고, 그곳의 감옥에 갇혀 10여 년 동안의 감금 생활 끝에 광증에 시달리다가 1578년 41세를 일기로 옥사했다. 보스웰 백작의 아내였던 메리 여왕 역시 폐위되어 감금 생활을 하다가 간신히 탈출하여 자신의 지지자들을 모아서 복위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전부 실패하고, 잉글랜드로 망명했지만 그곳에서도 엘리자베스 1세의 왕위를 빼앗으려는 음모를 꾸미다가 들통나면서 결국 1587년 2월 8일참수로 공개 처형당했다.

그러나 단리 경 헨리 스튜어트와 메리 여왕 둘 다 헨리 7세 튜더의 후손으로서 잉글랜드 왕위 계승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의 아들이었던 제임스 6세는 엘리자베스 1세의 사후 쉽게 잉글랜드의 왕 제임스 1세로 즉위할 수 있었다. 때문에 스튜어트 왕조 이후부터 하노버 왕조, 작센코부르크고타 왕조, 윈저 왕조까지 영국의 모든 왕조는 단리 경 헨리 스튜어트의 후손들이다.

3. 창작물에서[편집]


<메리, 퀸 오브 스코틀랜드>에서 잭 로던이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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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거릿 튜더와 두 번째 남편 앵거스 백작 아치볼드 더글러스의 딸.[2] 마거릿 튜더와 그녀의 두 번째 남편이었던 아치볼드 더글러스의 딸이었다. 이 마거릿 더글라스를 통한 혈통 덕분에 단리 경의 아들인 제임스 6세가 튜더 왕조가 단절된 후 잉글랜드 왕국의 왕위 계승권을 주장할 수 있었다.[3] 메리 여왕의 부왕인 제임스 5세가 정부인 레이디 마거릿 얼스킨에게서 낳은 아들로, 메리 여왕에게는 이복오빠가 되었다.[4] 단리 경 헨리의 어머니였던 마거릿 더글러스가 메리 여왕의 아버지인 제임스 5세의 이부 여동생이었다.[5] 당시 잉글랜드의 여왕이었던 엘리자베스 1세 튜더가 자녀없이 죽으면 잉글랜드의 다음 계승 순위는 메리 여왕이었고, 차순위는 단리 경 헨리 스튜어트였다.[6] 격이 높은 국서의 칭호이다. 격이 낮은 국서의 칭호는 'Prince consort'이다.[7] 더 웃긴 건 메리 여왕은 말할 것도 없고 보스웰 백작도 당시 유부남이었다는 것이다. 단리 경이 살해되고 메리 여왕과 결혼하기 20일 전 아내를 협박해서 강제로 이혼했다고 한다. 때문에 메리 여왕과 보스웰 백작의 결혼은 중혼이라는 의견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