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L. 스팀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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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67년 9월 21일
미국 뉴욕 주 뉴욕 시 맨해튼 섬
사망
1950년 10월 20일 (향년 83세)
미국 뉴욕 주 웨스트 힐
국적
[[미국|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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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재임기간
제45대 전쟁부 장관
1911년 5월 22일 ~ 1913년 3월 4일
재임기간
필리핀 군정장관
1927년 12월 27일 ~ 1929년 2월 23일
재임기간
제46대 국무장관
1929년 3월 28일 ~ 1933년 3월 4일
재임기간
제51대 전쟁장관
1940년 7월 10일 ~ 1945년 9월 21일
정당



1. 개요
2. 생애
3. 기타



1. 개요[편집]


미국의 법조인, 군인, 정치인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전쟁부(현재의 국방부) 장관으로서 미국의 승전에 기여한 핵심적 인물들 중 한명으로 평가받는다.

2. 생애[편집]


스팀슨의 생애에 관한 글

아버지는 외과의였으며 맨해튼 섬에서 태어나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고 예일 대학교 학사와 하버드 대학교 로스쿨을 거쳐 변호사가 되었다.

앞서 1911~1913년 전쟁부 장관을 역임했지만, 당시는 제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기 전이어서 별다른 공적은 없었다.

같은 공화당 소속인 캘빈 쿨리지의 대통령 재임 기간인 1927~1929년에 당시 미국 식민지였던 필리핀에서 군정 장관(사실상 총독), 후임인 허버트 후버 대통령 시절이었던 1929~1933년에는 국무장관 등의 요직을 차례로 지냈다. 그가 국무장관으로 재직하던 시기의 미국은 아직 고립주의 외교노선이 주류였지만, 스팀슨은 전쟁부 및 국무부의 장관을 차례로 역임하면서 미국이 고립주의를 벗어나서 보다 적극적인 대외 개입 정책을 펼쳐야 한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그후 민주당의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대통령이 되면서, 공화당 출신인 그는 한동안 공직을 떠나있었다. 그러다가 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 초반에 나치 독일이 승승장구하며 미국에서도 전쟁에 대한 위기의식이 높아졌고, 이를 배경으로 루즈벨트 대통령에 의해 20여년만에 다시 전쟁부 장관직을 맡게 되었다. 비록 정파는 서로 달랐지만, 고립주의 노선 탈피에 대한 입장이 서로 통했다는 점을 인정받은 결과였다.

전쟁부 장관으로 복귀한 이듬해인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도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고, 미국의 전쟁 수행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그리하여 1945년 종전까지 미국의 승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공로자의 일원이 되었다. 특히 2차대전 종식의 결정적인 계기가 된, 일본에 대한 원자폭탄 투하를 놓고 반대하는 과학자들을 설득하고, 해리 트루먼 대통령의 최종 결단을 이끌어내는 역할도 해냈다.

2차대전이 완전히 종전된 지 1개월만인 1945년 9월에 전쟁부 장관직을 떠났다. 그로부터 5년만인 1950년에 타계했다.

3. 기타[편집]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전, 미국이 맨해튼 계획을 통해 개발한 사상 최초의 원자폭탄을 투하할 일본의 도시를 결정하는 역할도 담당했다.

당초 미 군부가 제시한 1순위는 군수기지가 다수 위치한 교토였지만, 스팀슨 장관은 교토를 아예 배제했다. 일본의 오랜 수도였으며 여러 문화유산들이 있는 교토의 초토화가 종전 후 일본의 분노를 야기할 위험성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개인적으로도 교토는 과거 자신이 아내와 함께 방문하기도 했을 정도로 애착이 있었던 곳이었다.

미국의 유력 외교안보 부문 연구소들 가운데 하나인 스팀슨 센터도 그의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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