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유니콘스/연고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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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타임라인
3. 연고이전 옹호론
3.1. 인천의 빈약한 흥행 시장성
3.2. 인천시의 비협조
3.3. 빈약한 도시구조
3.4. 위성도시의 한계
4. 연고이전 비판론
4.1. 개선되고 있었던 도시환경
4.2. 오랜 암흑기
4.3. 현대그룹의 근시안
4.4. 수도권의 광역시라는 메리트
4.5. 연고지 이전 후 현실은?
5. 총평



1. 개요[편집]


2000년 현대그룹이 일방적으로 현대 유니콘스의 연고지를 인천광역시에서 서울특별시로 이전을 추진하면서 생긴 여러 사건을 정리한 문서. 현대그룹은 여러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하고 유니콘스의 연고 이전을 강행하였고, 이에 많은 인천, 경기지역 팬들이 실망감에 빠지고 분열되면서 크게 갈라져버려 안 그래도 없는 팬층이 더 줄어들었다. 삼미청보가 하위권에 머물러도 야구장을 떠나지 않던 인천 팬들이건만, 당시 많은 팬들이 그만큼 충격과 실망감이 얼마나 무척 컸는지 짐작케 하는 대목.

기존의 인천광역시 팬들은 새로 창단된 인천팀인 SK 와이번스를 응원하거나 현대의 연고이전 후 아예 야구에 관심을 끊어버린 경우도 있었고[1], 비인천권 팬들은 그대로 현대를 응원하며 구단 해체 후 재창단된 히어로즈를 응원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그나마도 적은 팬덤이 세갈래로 갈려버리고 말았다. 이들 사이는 같은 한 지붕에서 응원하고 같이 웃고 울던 관계였는데, 지금은 서로 증오하고 이를 갈고 싸우는 관계가 되었다.

현대의 연고 이전은 KBO 리그 역사상 단 두 번 있었던 연고 이전이다. 그나마도 또다른 사례인 OB 베어스의 연고 이전(충청→서울)의 경우 애초에 창단 때부터 충청도는 3년 간의 임시 연고지임을 못박고 시작했고[2] 뒤이어 들어온 빙그레 이글스가 빠르게 정착하여[3] 연고 이전으로 발생할 수 있었던 야구 팬덤의 분열이라는 악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 건과는 사정이 매우 달랐다. 사실상 야구계에서 연고지 이전으로 사달이 난 유일한 사례이며,[4] 사건이 벌어진지 24년이 지난 현재에도 이 사건이 미친 파급력은 야구판에 여전히 상당수 남아 있다.

2. 타임라인[편집]


연고 이전 직전인 1999년 시즌의 성적이 그다지 좋지는 못했지만, 기존의 삼청태 시절에 비하면 상당히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었다. 그러나 나날이 오르는 성적과는 별개로 관중은 매년 눈에 띄게 줄어드는 것 때문에 2000년 1월, 그룹 차원에서 돌연 현대 유니콘스의 연고지를 서울로 이전하겠다는 일방적인 선언을 한다. 원래 현대그룹의 계획은 광역 연고에 포함되어 있던 수원 야구장에서 대략 3~4시즌 정도를 치르고 그 사이에 서울에 전용구장을 확보해 최종적으로 서울로 이전한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목동 야구장의 증·개축을 시도하였으나, 그 비용이 200억 이상으로 추산되자 신축으로 가닥을 잡았고, 상암동에 25,000석 규모의 전용구장을 지어 이전하려 하였다. 기사.

이 과정에서 스포츠신문을 통해 현대의 연고지 이전 소식이 들려왔고, 이 소식을 접한 인천광역시의 현대팬들은 강하게 분노한다. 인천 구월동 현대해상 건물에 있던 구단 사무실에 연고지 이전에 항의하는 전화가 이어진 것은 물론 당시 운영되던 구단 공식 홈페이지의 자유게시판에도 연고지 이전을 반대하는 항의 글들이 쏟아졌다. 그러자 현대 구단은 이를 무마하기 위해 일간스포츠에 "제9구단을 추가로 창단해 기존의 유니콘스를 인천에 존치시키고 9구단을 서울 연고팀으로 키우겠다"는 거짓 해명 기사를 내면서 언론플레이를 했다.

새천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현대 유니콘스 프로야구단 홈페이지 관리자입니다.

연고지 문제와 관련한 구단의 공식 입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일부 언론에서 제기되었던 구단의 연고지역 이전에 대해 구단에서는 전혀 고려한 바가 없습니다.

현대가 태평양을 인수할 당시 인천·경기·강원 연고지 영입권으로 450억원을 주었습니다.

그러한 영입권을 포기하고 연고지를 이전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또 2002년 완공 예정인 문학구장에 대한 장기 임대 등 구장의 활용 방안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일부 언론에 보도된 내용은 구단에 확인 절차 없이 보도된 것입니다.

연고지는 쉽게 버리고 갈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드립니다.

저희 구단을 믿어주시고 계속 성원 부탁드립니다.

정상 새천년! 막강 현대! 최강 유니콘스!

현대 유니콘스 프로야구단 드림


그리고 이 와중에 현대 유니콘스 공식 홈페이지에 위와 같은 글이 올라온다. 세간의 소문과는 달리 현대 유니콘스 구단 프런트에선 연고 이전을 할 계획이 없었다고 한다. 문학 야구장의 설계에도 참여하는 등 계속 인천을 사용할 생각이었다고 한다.[5] 홈페이지에 굳이 저런 글을 올린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던 것. 당시의 연고 이전 강행에 대해 선수단 내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는데, 박재홍을 비롯한 몇몇 선수들이 눈물로 호소하면서까지 구단의 연고 이전을 반대했었던 반면 정민태박진만 등 몇몇 선수들은 연고 이전 소식에 반색하며 환영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와 팬들의 가슴을 찢어놓았다. 하지만 훗날 둘은 이에 관해 루머라 일축했으며, 오히려 이전에 반대하는 입장이였다고 밝힌 적이 있다.[6] 현대그룹은 프런트와 선수단의 격렬한 반대가 있었음에도 불도저식으로 프로젝트를 강행했고, 그렇게 현대는 선수단과 팬들의 동의를 일절 구하지 않고 그룹의 명예만을 쫓기 위해 인천을 뛰쳐 나갔다.

그러나 2000년 시즌 중반에 모기업 현대전자의 부도와 2001년 정주영 명예회장의 사후 그룹 내부에서 터진 왕자의 난으로 현대그룹이 분열될 위기에 처하자 자금난 문제가 심각해져서 서울 입성이 미뤄지게 되었다. 상술했듯 SK로부터 받은 인천 연고지 보상으로 받은 54억원을 서울 연고 구단들인 LG 트윈스두산 베어스에 주는 것이 원래의 계획이었으나, 하이닉스재정난이랍시고 이 돈을 가로채서 회사 운영비로 써먹었다[7]. 결국 현대는 당장 서울 연고도 얻지 못하고 수원에 발이 묶이게 되었는데, 현대가 연고이전을 할 때 수도권에 야구단을 창단하려고 했던 SK[8]에게 인천 연고만이 아닌 경기, 강원권 연고까지 세트로 팔았기 때문에 원래대로라면 수원구장을 연고지로 계속 쓸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9] 그러나 갈 곳이 없어진 현대가 수원구장을 약속된 시점 이후까지도 불법점거를 하고 있던 상황이라 SK 와이번스의 입장에서는 돈은 돈대로 주고 연고지는 연고지대로 침해받는 뚜껑 열릴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이후 모기업 하이닉스2001년부터 해체가 될 때까지 단 한 푼의 지원금도 주지 않았다. 하이닉스는 공식적으로 현대 유니콘스에 더 이상 지원금을 주지 않겠다며 빠져나갔고, 2001년 이후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과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등 범현대가의 지원금으로 근근히 버텨왔다. 이 어려운 상황을 겪자 현대자동차그룹2001년 인수를 추진했으나 하이닉스는 인수금액으로 900억을 제시했고, 여기에 정나미가 떨어진 정몽구 회장은 제안을 철회하고 비교적 저렴한 값을 부른 해태 타이거즈를 인수했다.[10]

그래도 끊임없이 지원을 해 주던 현대그룹 정몽헌 회장이 대북송금 특검 사건으로 조사를 받다가 2003년 8월, 자살했다. 정몽헌에 이어 현대그룹을 책임지게 된 아내 현정은[11]은 2005년을 마지막으로 매년 주던 40억의 지원을 끊었고, 이전까지 80억을 지원하던 현대자동차그룹과 40억을 지원하던 현대해상 측에서도 현대그룹이 손을 털자 지원에 항의하던 주주들을 납득시킬 명분이 없어져 유니콘스에게 보내던 모든 지원금을 끊었다.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은 이미 2001년해태 타이거즈를 인수한 상황이었다. 때문에 같은 리그에 2개 팀을 지원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발을 빼야만 했다. 결국 KBO가 직접 나서서 그동안 모인 야구 발전 기금까지 사용해가며 유니콘스를 위탁 운영했고, 어떻게든 인수자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이처럼 현대 유니콘스의 서울특별시 연고 이전은 대주주 하이닉스의 무책임한 행태로 인해 실패로 끝나게 되었고, 기존 팬들의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연고 이전을 추진했던 현대그룹 고위 간부들은 뒷날 2005년, 구단이 어렵게 되자 끝까지 책임을 지지 않고 대거 빠져나가 버렸다. 이러는 바람에 안 그래도 인기 구단이라고 보기 힘들었던 현대 유니콘스의 인기는 수원으로의 임시 연고 이전 이후 이런저런 사정이 겹치면서 인기도 성적도 모두 쌍으로 바닥까지 떨어져버렸다.서울특별시 입성 실패는 재정적인 문제 외에도 내내 여러 이유들로 유니콘스를 괴롭혔는데, 현대는 수원구장을 잠시 임차[12]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2002년에 시행된 2003년 신인드래프트부터 1차 지명권을 박탈당했다. 이로 인한 팀 뎁스의 약화는 히어로즈로 재창단한 지금도 현재진행형으로 극심한 전력 저하에 시달리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하위 라운드도 아니고 무려 6시즌동안 1차 지명을 뽑지 못했으니[13][14]... 히어로즈 약체화의 1차적인 원인은 폭풍 선수 매각이었지만, 사실 선수 매각은 주로 투수진 쪽에 집중되어 있었고, 야수진에서는 이택근[15]황재균이 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1년 넥센 히어로즈는 눈뜨고 못 봐줄 물빠따를 선보였다. 1차 지명 박탈 기간 6년 동안의 드래프트에서 뽑은 야수 중 1년이라도 규정 타석을 채운 야수가 강정호황재균 겨우 2명밖에 없다. 물론 규정 타석을 못 채웠어도 팀에 충분히 공헌했을 수 있다. 하지만 한 시즌이라도 WAR이 1을 넘긴 야수 역시 저 둘이 끝이다. 현금 트레이드가 아닌 이유로 이적해서라도 규정 타석을 채웠거나, 한 시즌이라도 WAR을 1을 넘긴 야수도 지석훈, 오재일 둘 뿐이다. 2012년부터 살아난 히어로즈 타선을 이끈 선수들은 대부분 히어로즈로 재창단된 이후 지명하였거나 타 팀에서 영입한 선수들이다.

하지만 그렇게 어려운 팀 사정에도 불구하고 성적은 항상 상위권을 유지하였고, 더 나아가 2003년 한국시리즈2004년 한국시리즈연속우승하는 저력을 보여주기도 했다.[16]

3. 연고이전 옹호론[편집]


옹호하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인천에 살면서, 유니콘스부터 지금의 키움에까지 쭉 응원하는 골수팬들이 많다.
이들이 보기에는 유니콘스가 인천을 포기하더라도, 자기들은 유니콘스를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는 "우리가 열심히 야구장 안가고 응원을 잘 안해서 구단에서 우리를 버렸구나"하고 자책하는 사람도 있었다.

3.1. 인천의 빈약한 흥행 시장성[편집]


그런데 유니콘스의 모기업이던 현대그룹이 서울로의 연고지 이전을 추진한 것에는 분명 이유가 있었다. 결정적인 계기는 1999년 개막전. 전년도 한국시리즈 우승까지 한 팀이었고 개막전 상대팀도 인천에서 상당한 티켓 파워를 자랑하던 해태 타이거즈였음에도 불구하고 개막전 관중석은 썰렁하기 그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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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제를 두고 일부에서는 1999 시즌 자체가 IMF의 여파로 야구인기가 사그라들었다는 주장을 하는데, 정작 위의 표와 그래프를 보면 99년은 95년 이래 처음으로 야구 관중 수가 상승세를 기록한 해였다. 실제로 1998~1999 사이 팀별 관중 보면 저 사이에 관중 수가 줄어든 구단은 오로지 현대와 쌍방울밖에 없다. 그렇다고 현대가 전년도 성적이 시망테크를 탄 것도 아니며 1998년은 현대가 인천야구 사상 처음으로 우승한 해였다. 1996년에도 현대는 한국시리즈 준우승[17]팀이었고 그 이전인 1994년에는 태평양으로 정규리그와 한국시리즈 준우승을 이룩했다. 이쯤 되면 맨날 져서 안 간다는 말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실제로 태평양 준우승 다음해인 1995년에는 여전히 40만 명대의 관중을 기록했고, 1996년에는 리그 전체 관중이 줄어드는 와중에도 현대 관중은 오히려 늘었다. 결국 1996년의 475,910명을 기점으로 현대그룹은 이미 인천에서 더 이상의 관중동원은 힘들다고 판단한 것. 1년에 많아야 12경기 정도였던 수원 홈 경기가 1999년에 21경기로 늘어난 것도 이런 점과 무관하지 않다. 5년 내 준우승 2회, 우승 1회 해도 암흑기면 왕조 구축 못하는 팀들은 죄다 흥행이 망한다는 소린데, 그럼 애초에 프로리그라는 게 돌아갈수가 없다. 성적이 무조건 탑클래스가 아니어도 연고의식을 기반으로 꾸준히 소비해줄것을 기대하고 지역연고제를 굴리는 게 아닌가?

인천의 낮은 관중 동원 능력은 도원구장의 열악한 시설과 교통 때문이며 이는 최신 문학야구장이 들어서면 해결되지 않겠느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막말로 우승을 해도 좁아터진 도원야구장조차 제대로 못 채우는 도시에서 거대한 문학야구장을 채울 만한 수요를 창출하리라 당시로서는 기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당장 동시기에 롯데 자이언츠는 그 거대한 사직야구장에 1997-1998년 연속 연간 고작 40만여 명밖에 동원하지 못하면서 텅 빈 큰 야구장의 공포를 실시간으로 보여주고 있었고[18] 광주, 대구 또한 열악한 야구장 상황에 불만만 많다가 연간 관중이 50만을 돌파한 이후에서야 본격적으로 신구장 건설을 밀고 나갈 수 있었다. 실제로 그 최신 문학구장조차 2006년까지도 도원구장과 비슷한 관중동원 능력을 보여준 것을 보면 단순히 야구장 문제가 아닌, 인천야구 차원에서 좀 더 근본적인 문제를 찾을 수밖에 없다. 더불어 도원구장 교통이 안 좋지도 않았다. 수도권 전철 1호선 도원역에서 내려서 걸어가면 5분 거리였다.[19]

1999년이 인천 경제를 떠받치던 대우그룹의 몰락과 그로 인한 지역 내 기업들의 연쇄 부도로 인천 지역 관중 동원능력이 급감할 수밖에 없었던 시기라고 하지만, 안 그래도 어려운 경제 상황에서 무리하게 출범한 프로야구의 흥행은 더더욱 바라기 힘들어진다. 어쨌거나 현대그룹은 현대 유니콘스의 성공을 위해 인수과정에서부터 470억이라는 거금을 쏟아부은 판이었고, 이후 투자까지 합치면 500억원을 아득히 넘는다. 특히 야구단 대주주였던 현대전자는 1998년 LG전자 반도체사업부 인수 이후 경영 상황이 꾸준히 악화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태평하게 몇 년을 두고 길게 투자할 것을 바라는 것도 무리다. 오히려 야구단을 냉큼 팔아넘기지 않고 연고지를 옮겨서라도 유지하고자 했던 것을 기특하게 생각해줘야 할 판이다. 더불어 서울은 현재 시점에서 프로야구팀 세 개 써도 잘 돌아간다. 다만, 서울은 수원 야구단 창단 이전까지 인천 및 경기 서부를 제외한 수도권 전역에서 야구팬들이 찾았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3.2. 인천시의 비협조[편집]


게다가 그 시절 인천광역시청(당시 인천광역시장최기선)의 한심한 프로구단 지원은 인천 스포츠팬들 사이에선 악명이 자자했기도 했다. 대우 제우스는 홈 경기장인 인천도원체육관의 낙후된 시설 수준을 견디기 어려워 대체 체육관을 요구했지만 인천시는 전혀 귀기울이지 않았고, 결국 삼산체육관이 완공된 2006년까지 부천실내체육관을 홈구장으로 쓰는 판이었다. 남자배구의 인천 대한항공 점보스도 도원체육관에서 어찌어찌 버티다가 계양체육관이 완공되자마자 옮겼고, 여자농구 금호생명 팰컨스는 도원체육관 시설을 견디지 못해 아예 소도시인 구리로 이전해버릴 정도였다. 2014년 신한은행 에스버드가 안산을 떠나 인천으로 오면서 도원체육관을 쓰고 있긴 하다.

명목상 연고지라 할지언정 인천에서 1983년 창단한 유공 코끼리는 1984년 서울로, 1984년 창단한 현대 호랑이 축구단은 1990년 울산으로 연고를 이전했다. 프로스포츠 팀에 대한 협조는커녕 조금의 관심조차 없었다는 반증이다. 이런 상황에서 아무리 신구장이 건설된다 한들 현대가 인천에서 과연 비전을 찾을 수 있었을까? 낙후된 숭의야구장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인천시가 협조했더라면 현대가 적어도 인천 연고를 포기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결국 이 때의 대참사를 경험한 인천시는 새로 인천에 입주하게 된 SK 와이번스에 지원을 아끼지 않는 쪽으로 태도를 바꾸게 된다. 인천에 새로 자리를 튼 SK 와이번스는 인천시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 문학야구장을 마음껏 리모델링을 하며 팬서비스를 다각화하고 있으며, 이러한 인천시의 태도 변화는 역설적이게도 당시 현대 유니콘스의 연고 이전으로 인천 민심이 한껏 격앙된 덕분이라는 분석이 있을 정도이다.


3.3. 빈약한 도시구조[편집]


더불어 데일리스포츠인 프로야구의 특성에 완벽하게 반하는 인천시의 도시구조로 인한 한계도 무시하기 어렵다. 당시 인천1호선 연선에 계양, 연수, 송도 등 아파트 단지들이 대거 계획중이었다고 하지만, 인천시의 고질적인 문제점 중 하나가 이들 화이트칼라 중산층을 수용할 업무지구나 청년층을 붙잡아둘 4년제 종합대학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아래 반론에 인천시 규모에 4년제 종합대학이 부족한 게 아니라는 헛소리가 있는데 인천보다 현저히 인구가 적은 대전이나 광주의 4년제 종합대학이 인천보다 많은 것만 봐도 간단히 박살나는 논리다.[20] 각종 단과대까지 합쳐서 비교해봐도 인천은 송도의 손바닥만한 해외대학 캠퍼스나 안양대 강화캠퍼스(...)까지 박박 긁어와야 간신히 비슷한 수준이다.

송도국제업무지구가 이 때에도 추진은 되고 있었지만, IMF로 인한 국책사업 축소의 광풍 속에서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실정이었다. 지방 광역시들은 인천보다도 인구가 적지 않냐는 반론이 있는데 인구가 아무리 많아봐야 그 인구가 - 심지어 청장년층을 가리지 않고 - 인천 내부에 머무르지 않고 야구장과 동선이 완전히 따로 노는 상황에서는 그저 허수에 불과하다. SK 와이번스가 왕조로 군림하던 2007~2010 시기에조차도 총관 100만명도 못 넘기고 무료표 살포의 대명사로 악명을 떨쳐야 했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근본적으로 평일 중산층 관중을 전혀 유치할 수 없는 도시구조 속에서 그나마 관중을 모으려면 남동인더스파크인천항 등지의 블루칼라들을 대상으로 무료표를 뿌리는 것 외에 딱히 답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출혈마케팅조차도 인천시의 극악한 인구유출비율을 보면 녹록한 일이 아니다. 2015년 기준으로 인천시의 전체 통근·통학인구 대비 타지역 통근·통학비율은 24.9%(!), 주간인구유출비율은 14.8%로 경기도보다도 높으며 이는 여타 지방 광역시에 비해 적어도 2배, 많게는 3배 가까운 수치다.[21] 더욱 문제는 2010년 그나마 21.2%였던 타지역 통근·통학비율과 12.3%였던 주간인구유출비율이 갈수록 높아져가고 있는 추세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2015년 기준 60분 이상 통근·통학 비율도 무려 26.9%[22]나 되며 120분 이상 통근·통학 비율은 3.9%로 0.4%인 광주광역시의 10배(!)에 달한다.[23] 인천광역시의 인구는 현대가 연고이전한 직후인 2000년에 247만명으로 집계되는데 이 때도 이미 타지역 통근통학비율 25.8%라는 무지막지한 비율을 자랑했다.

시외통근비중이 높아지고 있는 것은 타 지방 광역시들도 마찬가지지만, 이들 지방도시의 시외 통근은 일반적으로 교육이나 생활여건이 좋은 광역시 내에 거주하면서 사업체가 있는 시외로 오가는 것이기에 일과만 끝나면 대부분의 여가생활은 광역시 내에서 이루어진다. 반면에 인천의 시외통근처는 다른 곳이 아니라 서울이다. 지방 광역시들이 도시의 절대적인 규모 자체는 작아도 지역민들의 정주성이 높기 때문에 '내 지역 팀'이라는 애착이 강하고 광역시를 중심으로 하는 광역권 전역에서 팬덤을 형성하는 반면 인천은 전형적인 수도권 도시로 정주성이 낮고 지방 출신 이주민들의 비중이 높으며 인천을 중심지로 여기는 주변도시는 커녕 인천과 엮이기만 해도 손사래를 치기에 바쁜 도시들 뿐인 것이 현실이었다.[24] 바로 이웃한 서울이나 수원 경기에서 SK 원정팬들의 비중만 봐도 답이 나오지 않는가? 홈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얻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타지역에 원정팬덤이 강력한것도 아니며, 그 외에 어떤 특출한 시장성과 상업성을 가진 것도 아닌, 이도저도 아닌 연고지가 바로 인천이라는 도시의 당시 현실이었던 것이다. 여기에 남북으로 길쭉해 생활권이 조각난 인천시의 도시구조까지 감안하면 답이 안나온다.[25]


3.4. 위성도시의 한계[편집]


인천은 서울에 인접해 있어 위성도시 취급을 벗어나기에도 벅찼지 권역 중심으로서 인정받아본 역사가 없다. 당장 위에서 예시로 든 4년제 대학이나 통근수요를 보면 너무나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렇다고 이들 지역이 어느 한 팀의 팬덤이 꽉 잡고 있어서 원정팬이라도 많이 모이면 모를까. 아니나 다를까 결국 그 뒤에 들어온 SK는 KBO 역사상 유례없는 도시연고 강조를 통해 아예 인천 외부의 경인지역 팬덤은 사실상 포기하고 인천 내부에만 집중하는 극약처방을 내려야 했다. 전국구로 서비스망을 운영하던 거대기업 현대의 눈에 인천의 이같은 한계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리가 없다. 그렇다면 기업의 입장에서 기회가 있는데 어느 쪽을 택할지는 너무나 뻔한 이치다.


4. 연고이전 비판론[편집]



4.1. 개선되고 있었던 도시환경[편집]


물론 1999 시즌 당시 관중수가 감소한 것은 사실이지만, 1998 시즌에 가장 적은 관중 감소폭을 기록한 팀 또한 바로 현대 유니콘스였다. 게다가 예나 지금이나 외지인이 많은 인천 인구의 특성상, 이를 관중수 증감과 단순 대입하는 것이 크나큰 무리가 있다는 것 쯤은 인천 야구팬이 아니라 야구를 오래 본 팬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일 것이다. 무엇보다 당시 도원구장광주구장보다도 더 오래되고 낡은 구장이었으며 무엇보다 무허가 건축 시설이었다. 실제로 현대 구단은 원래 도원구장을 대대적으로 뜯어고치려 했으나 무허가 건축시설이라 불가능하다는 답변만 들었다. 도원역 역세권이라 교통이 좋아보일 것 같지만 과거는 현재와는 달리 환승제도도 없었으며 인천 도시철도 1, 2호선도 개통되지 않아 접근성이 떨어졌고[26] 20년 전보다 훨씬 교통이 발전한 지금에도 도원역은 그리 교통이 편리한 곳이 아니다. 게다가 과거의 인천 버스는 미개발지가 많아 지금보다 훨씬 노선의 굴곡이 심했고 배차간격도 길었고 경인선으로 직접 접근할 수 있는 지역은 매우 한정적이었다. 경인선 연선은 주로 상업지역, 공업지역이 발달하여 대체로 주거지구와 이격되어 있다.

특히 1999년 관중 감소의 직접적 영향 중 하나였던 인천 지역의 경기침체는 요소는 시간이 지나면 얼마든지 해결이 가능한 요소였다. 다른 지역에 비해서도 외환위기의 충격은 대우그룹의 주요 계열사들이 위치해 있던 인천이 타격을 다른 도시들에 훨씬 크게 받았었다. 비록 대우그룹은 부도를 맞았지만 그 중에서도 핵심인 자동차 부분은 매각이 될지언정 인천을 떠날 일은 없었고 이 부분이 정상화되면 인천 경제는 다시 살아날 수 있었다. 게다가 문학야구장과 연계되는 인천 도시철도 1호선 연선에는 계산지구나 연수지구 등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들어설 예정인데다가 이런 아파트단지 주민들은 어느정도 소득을 올리는 중산층들인 만큼 신규 수요를 창출할 여지도 많았다. 당장 연수구의 송도국제도시부터가 이 시기에 이미 한창 추진 중이었다. 또한 2016년에야 인천역까지 개통되었지만 당시에는 1990년대 말에 개통될 예정이었던 수도권 전철 수인선이 인근 원인재역에서 인천 도시철도 1호선과 환승 예정이었기 때문에 계양구, 부평구, 연수구 전역, 경기도 시흥시, 안산시 일대의 수요를 창출할 수 있었다는 예상은 충분히 할 수 있었다. 안산시 출신의 SK 프랜차이즈 스타인 김광현 덕분에 수인선이 개통하기 전부터 버스체계 개편 등의 영향으로 인천시민과 경기도 서남권 도민들이 꾸준히 SK 팬으로 유입되고 있었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웹툰 작가 이말년이다.[27]


4.2. 오랜 암흑기[편집]


게다가 인천 연고 프로야구 팀은 꼴찌를 밥먹듯이 했는데 갑작스레 우승 한 번 했다는 이유로 큰 폭의 관중 증가를 바라는 것도 무리이다. 야구의 열기가 가장 강하다고 하는 롯데 자이언츠조차 팀이 리그 최하위권을 맴돌 때는 관중이 적었다. 그리고 현대를 뺀 삼청태는 거대 재벌이 맡은 팀들도 아니었던데다, 잦은 후원 기업의 변경으로 결코 애착을 갖기에 쉬운 조건이 아니었다. 애초에 십 수년간 거의 최하위권과 하위권을 전전하는 팀의 경기에 직관을 갈 관객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렇게 된다면 부산, 경남의 유일한 팀이었던 롯데 자이언츠와 달리 바로 옆 서울에도 두 팀이나 있는데다 이주민들은 자신의 고향 팀을 응원하게 되지 않겠는가?

또한 겨우 우승 한 번 했다고 근본적인 관객 증가를 바라는 발상 자체가 비현실적이다. 이러한 논리를 가지고 연고지를 옮긴 팀이 프로농구에서는 고양 오리온 오리온스가 있으며, 연고지를 옮긴 후로도 지역밀착 마케팅 면에서 고양 다이노스와 그 뒤를 이은 고양 히어로즈에 비해 낮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 팀이 대구시민들로부터 어떠한 취급을 받는지 상기한다면 옹호하기 어렵다.


4.3. 현대그룹의 근시안[편집]


애초에 현대는 인천 연고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고 볼 수 밖에 없다. 현대 유니콘스의 인천 연고 기간은 고작 4년이다. 고작 4년을 선수 현질했다고 해서 관중수의 급격한 증가를 바라기는 어려우며, 지역팜 지원 및 구단 내부 운영시스템 구축이 같이 진행되어야 한다.[28] 또한 당시 레드오션인 서울에 기존 연고 2팀을 두고 경쟁해서 기존 인천 연고 시절보다 얼마나 관중을 끌어모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고, 무리한 3개의 수도연고팀이 어떤 경영상황에 있는지는 도쿄돔을 홈구장으로 썼던 시절의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가 2003년까지 잘 보여주고 있었다. 두 팀이 사용하는 잠실과는 달리 목동은 문학, 잠실보다 훨씬 배후 인구가 적으며 당시는 그나마도 지금보다 목동구장의 배후 인구가 더 적었다. 오히려 새 구장이 될 문학구장의 배후 인구는 송도국제도시, 청라국제도시, 배곧신도시 등 각종 택지지구 개발 및 연세대학교 등의 이전으로 급격히 증가하고 있었다. 잠실 구장도 아닌 목동 구장으로 이전을 추진하면서 관중수를 논한다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다. 심지어 목동은 인천과 그리 멀지 않아 팬덤도 겹치는 상황까지 예견되었을 것이다.

결정적으로 2002년 문학야구장의 개장 당시 SK는 시즌 6위라는 부진한 성적 속에서도 402,732명의 관중수를 기록하였고, 이는 2001 시즌의 178,645명보다 무려 2.3배나 증가한 관중수이다. 이는 열악한 도원구장의 상황 역시 관중수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데이터라고 볼 수 있다.[29] 또한 연고지 이전으로 상당수의 팬들이 이탈한 상황에서 이 정도만 해도 선방이다. 당시 인천의 야구팬들이 삼분되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는데 기존 수준을 유지한 것만으로도 수요가 없었다는 말은 할 수 없다. 무엇보다 신축하고 있던 문학야구장의 토대를 다진 건 다름아닌 현대 유니콘스였다. 그리고 이러한 SK 와이번스의 다양한 팬 유치 정책은 현대 유니콘스의 야반도주로 인한 야구 팬덤 이탈이 주요 원인이다.


4.4. 수도권의 광역시라는 메리트[편집]


또한, 인천이 블루칼라 노동자가 많다며 관중 동원에 불리하다는 주장은 쉽게 논파되는데 대구, 광주, 특히 창원 등은 인천보다도 업무지구가 현저히 적고 일자리의 질 면에서도 인천보다 좋다고 말할 수 없는 지역이다. 대구, 광주, 창원에서 일자리를 찾아 인천으로 오는 사례가 그 반대로 이동하는 경우보다 훨씬 많다는 현실을 생각해보자. 4년제 종합대학 역시 인천이 적은 편이나 서울 서남권, 고척 스카이돔 인근의 4년제 종합대학은 그나마 서울대학교, 중앙대학교가 있으나 각각 서울 2호선, 서울 9호선을 통해 잠실 야구장으로 바로 연결되어[30] 실질적으로 서울의 4년제 종합대학이 많은 것이 고척, 목동 연고 구단의 흥행에 별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이다.

인천에서 서울로 통근하는 인구가 많다는 것도 큰 의미가 없는 게 특히 1990년대만 하더라도 인천의 자족성은 오히려 지금보다도 높으면 높았지 낮지는 않았다. 대기업-중소기업 간 격차도 현재보다 압도적으로 적어 '무료표 뿌리기' 운운할 상황이 아니다. 소위 '서울에서 망하면 돈 없어서 인천 간다'는 희대의 개드립도 일부 사례 때문이지 인천도 대기업, 건실한 중견기업이 적지 않은데다 인천 자체의 인구만으로도 최소한의 업무지구는 당시에도 존재했다.수원 역시 kt wiz 창단에 전혀 문제가 없었다. 심지어 수원의 거대한 경제축인 삼성전자는 이미 삼성그룹에 삼성 라이온즈까지 있다. 창원 역시 롯데와 팬덤이 중복되면서 배후 인구도 인천에 비해 압도적으로 적고 창원시는 인천에 비해서도 블루칼라 비중이 압도적인 도시임에도 관중 동원에 문제가 없다. 차라리 대구를 연고로 하는 삼성 라이온즈조차 서울 연고 이전을 추진하기도 했던 것을 비추어 보면 인천의 도시 특성을 가지고 논하는 것의 의미를 퇴색시킨다.

인천은 서울과 같이 이주민으로 구성된 도시이나 시간이 갈수록 '서울 출신자'가 늘어나는 것처럼 '인천 출신자'가 늘어나는 것을 고려하면 시간이 흐를수록 관중 동원이 유리해지면 유리해졌지 불리해지진 않는다는 것 역시 알 수 있다.

애초에 단순히 연고가 '서울 구단'이라는 이유로 '서울부심'을 부리기 위해 응원하는 사람은 없다. 그 팀이 서울에 오래 머물면서 서울시민들에게 서울 팀으로 인정받아야 의미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서울을 대표하는 프로야구 팀은 LG두산으로 단순히 서울을 선망하거나 도시 이미지가 좋아서 응원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와 자녀가 대를 이어 지역 연고팀인 LG두산을 응원하는 것이다. 연고 의식은 옹호론에서 말하듯, 단순히 주관적인 도시 이미지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미국만 보더라도, 도시의 이미지에 비해 시민들의 애향심이 강한 시카고라는 좋은 사례가 있다.


4.5. 연고지 이전 후 현실은?[편집]


과거 현대 유니콘스가 짧게 수원종합운동장 야구장을 홈구장으로 사용하기도 했지만, 이는 임시였을 뿐 시민들의 응원을 얻기에는 진정성이 부족했다.

염태영 수원시장. 경기일보의 KT 위즈 유치 축하 기고문에서


연고지 이전은 대개 관중과 인기 증가를 위해 하는데, 현대의 연고지 이전 후 현실은 연고지 이전이 관중과 팬을 늘리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음을 나타내고 있으며, 오히려 빅마켓의 장점조차 제대로 활용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성적 및 구단 운영은 탬파베이 레이스, 오클랜드 어슬레틱스 등과 긍정적인 의미에서 비교되는데 지역연고의식은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와 부정적인 의미에서 비교되며[31], 인기는 구단합병 후 고전을 면치 못한 오릭스 버팔로즈와도 비교되고 있다.[32] 또한 임시연고지소홀히 했다는 점에선 치바 롯데 마린즈와 상당히 유사하다.[33]

현대 유니콘스가 인천에서 연고지 이전을 한 후 임시로 연고로 삼았던 곳은 수원이었다. 당연하게도 수원 야구팬들은 어차피 얼마 지나면 서울로 떠나버릴 현대 유니콘스를 응원해야 할 이유가 없었으며, 수원야구장의 시설도 쌍팔년도 야구장인고로 숭의보다 나은 수준이었을 뿐 상당히 안 좋기로 유명했다.[34] 이러한 환경 때문에, 현대 왕조를 이룩할 정도로 현대의 뛰어난 성적과는 별개로 관중석은 텅텅 비어 있었다. 즉, 현대의 팀 성적과 관계없이 흥행력이 떨어졌다는 이야기. 더군다나 당시 수원 시민은 연고지에 정착한 역사가 깊은 수원 삼성 블루윙즈에게 애정을 주었고, 당연히 수원은 야구보다는 축구에 더 열광하는 도시였다. 그리고, 2013년 kt wiz 창단 이후 수원시민들은 수원야구의 적통으로 경기도를 광역연고지로 하는 kt를 꼽지 현대를 꼽지는 않는다.

그렇게 모기업인 현대전자의 지원이 끊기면서 현대 유니콘스가 해체되고 그 선수단을 승계하면서 새롭게 서울 연고팀으로 창단한 히어로즈는 비인기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일단 서울 연고팀인 LG와 두산은 이미 서울 야구팬들을 양분하고 있었고, 해체된 현대의 선수층을 기반으로 태어난 히어로즈는 기존 팬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연고지 이전으로 야구사가 끊긴 인천을 연고로 한 SK보다 확연히 관중 수에서 밀리는 면을 보여주고 있다.[35] 이는 2019년 SK의 경기당 평균 관중이 13,652명으로 전체 구단 3위를 기록한 반면 히어로즈는 정규 시즌 3위, 돔구장, 서울이라는 메리트에도 불구하고 경기당 평균 관중이 6,304명으로 전체 구단 최하위를 기록했다. 수원 연고 신생팀이면서 창단 이래 하위권을 맴돌고있던 kt(7,455명)보다도 적고, 프로야구 연고도시 중 인구가 가장 적은 창원시에 연고를 삼고 인근 도시인 부산의 롯데 팬덤과도 겹치는 NC(9,865명)와 비교하면 그야말로 민망할 수준이다. 인구 1000만의 서울 팀이 인구 100만의 창원 팀에게 관중수로 밀릴 지경로 관객 동원이 심각하게 안 되는 것이다. 게다가 고척 스카이돔 내의 상가 세입자들도 임대차 분쟁 및 입지 문제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 2021년 SK 와이번스가 매각되고 SSG 랜더스가 출범했음에도 팬 층은 더욱 두터워져 2022년에는 10개 구단 중 평균 관중 수 13,633명으로 전체 구단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이는 인천 연고 야구팀 최초의 기록으로 키움의 경우 동년 평균 관중 4,858명으로 전체 최하위를 기록했다.

이런 결과는 너무나도 당연하다. 서울 공동화 정책을 펼친 K리그의 경우와 달리 프로야구 초창기부터 서울을 연고로 하는 LG, 두산이 있어 이 팀들을 비집고 들어가 팬층을 확보한다는 것부터가 이루기 힘든 목표였다. 지역밀착을 리그 발전계획의 골자로 내건 J리그에서도 도쿄 연고팀보다 사이타마현를 연고로 하는 우라와 레즈[36], 카나가와현을 연고로 하는 요코하마 F. 마리노스, 카와사키 프론탈레[37]가 훨씬 더 인기있고 잘나가는 팀이라는 점을 상기하면 연고지를 서울로 하기만 하면 인기가 늘어날 것이라는 발상은 안일한 기대일 뿐임을 증명한다. 현대 유니콘스의 연고지 이전을 정당화하기 위해 인천을 깎아내리려 애써봤자, 현대 유니콘스의 후신을 자처하는 히어로즈의 흥행 실적은 연고지 이전이 최소한 성공적이지 않았음을 나타낸다.

일단 현대 유니콘스가 서울 입성을 하더라도 접근성이 뛰어난 잠실 야구장이 아닌 목동 야구장을 홈 구장으로 삼아야 했을 것이고, 고척 스카이돔 개장으로 또 다시 고척으로 홈을 옮겨야만 했을 것이다. 문제는 목동 야구장은 고교야구 등 아마추어 야구용으로 설계되어 프로야구 팀의 홈 구장으로 쓰기에는 미흡한 부분이 많았고[38] 인천과 비교적 가까워 인천 연고팀이 재창단될 것이 당연한 것임을 고려하면 인천 연고 신생팀의 팬 베이스가 겹치거나 인천과 주변 지역을 주요 팬 베이스로 삼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히어로즈는 서울 서남권을 팬 베이스로 삼고 있지만, 이 지역은 전통적으로 호남권 이주민이 많기 때문에 KIA 타이거즈 팬덤이 큰 지역이다. 특히 금천구는 가산동은 2호선으로 잠실야구장, 독산동과 시흥동은 1호선으로 수원 kt 위즈 파크의 접근성 면에서 이점이 있다. 나머지 지역 역시 서울 야구팬들 역시 LG와 두산을 응원했다. # 인접한 인천, 부천, 시흥 그리고 김포는 말할 필요도 없이 SSG의 팬 베이스이다. 한 마디로 현대의 후신 격인 히어로즈는 본거지인 서울 서남권에서도 LG, 두산을 응원하던 기존 서울 야구팬들의 마음을 돌리지 못한 채 기존 인천 야구팬들을 떠나 보내는 결과를 낳았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히어로즈는 서울 정착을 위한 이렇다할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SK는 현대의 연고지 이전으로 상처받은 연고지역의 팬들의 환심을 다시 얻기위해 '최강'이나 '무적'이 아닌 "인천 SK"를 강조하는 동시에 퍼주기 수준의 출혈 마케팅을 오랫동안 감내해왔다. 연고지 마케팅에 공을 들이는 건 후신인 SSG에서도 변함 없어서, 아예 모기업이 자비를 들여 돔구장을 짓겠다고 공언할 정도다. 신생팀인 NC나 kt 역시 다른 연고의 팀을 응원할 수 밖에 없던 연고지역의 팬들을 위해 구장 안팎으로 연고 밀착 마케팅을 펼치고 있다. 이러한 연고 밀착 마케팅은 기존 구단들에게도 귀감이 되어 KBO 리그의 모든 팀들이 서로 벤치마킹하고 있는데, 히어로즈만은 그 예외였다. 어렵사리 서울로 가고서도 연고지역 정착을 위한 노력이 미미하다. 목동구장 시절에는 소음 관련 민원을 무마하는 목적의 초청권을 뿌리거나, 고척돔으로 구장을 옮긴 이후는 구로구민 현장할인 혜택을 제공하는 것이 고작이다. 모기업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는 히어로즈의 특수성을 고려하면 부득이한 일이기는 하나, 서울이라는 빅마켓을 품고도 이를 장점으로 살리려는 노력이 매우 부실하다. 안 그래도 히어로즈의 홈경기 티켓값이 타팀에 비해 비싸다는 것을 생각하면, 초보 야구팬에게 있어서 히어로즈라는 팀은 진입 장벽이 너무 높은 팀이다.

연고지 이전 이후 결과는 연고지 이전을 왜 했는가 알 수 없는 수준이다. 아무리 연고지 이전을 옹호하려 해도 연고가 서울이라는 소위 '서울부심'을 제외하고는 얻은 것이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이며, 무개념 팬들이 인천야구의 적통성 문제로 싸우면서 구단의 이미지를 깎아먹곤 한다. 물론 인재풀이 넓은 서울 팜을 쓸 수 있게 되긴 했으나[39] 구단 인기와는 별개의 문제이며, 오히려 지방구단들로부터 신인드래프트 제도 개선과정에서의 서울팜 3분할 주장이 나오는 등 문제가 산적해 있다.[40][41]


5. 총평[편집]


사실 이 문서나 현대 피닉스 문서 등을 보면 현대그룹이 축구를 제외한[42][43]여러 스포츠판에서 수차례 근시안적인 행동으로 물의를 빚은 바가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1982년 프로야구 출범 당시 야구판에 충분히 뛰어들 수 있었음에도 이를 외면하여[44] 삼미처럼 기반이 부실한 기업에게 드넓은 인천·경기·강원 연고를 내주면서 훗날 프랜차이즈의 족보가 복잡해지는 원인을 제공했고 이후 대통령이 되고 싶었던 왕회장정치 놀음으로 그룹이 한방에 날아날 위기에 처하자 부랴부랴 이미지메이킹을 위해 야구판에 뛰어들려다가 실패하자 현대 피닉스를 만들어 야구계의 시장 질서를 흐트려 놓는가 하면, 간신히 프로야구에 진입한 이후에도 엄청난 현질로 리그에 거품을 일으킨 주범이 바로 현대다. 현대가 분명 초기에 엄청난 자금을 야구단에 쏟아붓기는 했지만, 그 엄청난 돈을 아껴 눈앞의 성적 대신 긴 호흡으로 인천에서의 정착을 택한다는 선택지도 얼마든지 존재했으나 현대는 그 선택지를 외면했다.

따지고 보면 급작스런 연고지 이전의 이면에는 구단 대주주였던 현대전자의 경영 악화가 있었고, 그 현대전자의 경영 위기 역시 또한 현대그룹의 문어발식 확장과 정경유착으로 인한 것이었다.[45] 결국은 현대 특유의 근시안적인 조급증과 "최정상"에 집착하는 태도가 유니콘스, 그리고 그 역사에 조금씩 발을 걸치고 있는 후대의 3개 구단(히어로즈, SSG 랜더스, kt wiz) 팬들에게 큰 상처를 준 것일 뿐. 실제로 SK 와이번스의 인천 연고와 현대 유니콘스의 수원 이전 결정이 있은 다음 날에 현대그룹 분열의 시발점이 된 이른바 '왕자의 난'이 일어났으니...

만일 이 때 연고지 이전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한 팀을 응원하던 팬들이 분열되어 싸울 필요도 없었고 2002년에 새로 문을 연 야구장에 그야말로 구름 관중이 몰려들었을 것이며[46] 흥행참패동맹이라는 서글픈 이름도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1차 지명권을 잃은 후 인천/경기팜이 엄청나게 흥하였던 것도[47] 더 아쉽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이유 중 하나이다.[48]

훗날 방송에서 언급한 바에 따르면 현대의 연고지 이전 이후 춘천시 출신이자 현대 팬이었던 장지현 축구 해설위원은 상심해서 야구를 끊었는데 현대의 연고지 이전으로 인해 정이 떨어지는 바람에 축구로 완전히 전향하게 되었다고 한다.[49]

[1] 아쉽지만 이 케이스에 속한 팬들이 가장 많았다.[2] 원래 두산그룹은 가문 대대로 수도권에 살았고 두산의 뿌리인 '박승직 상점'은 서울 종로에서 사업을 시작했다. 이 때문에 OB 베어스 역시 서울 연고권을 강력히 주장했지만, 프로야구 창단을 직접 주도한 것에 더해 당시 정부 고위층과 거리가 가까웠던 MBC 청룡의 압박 때문에 울며 겨자먹는 심정으로 3년간 충청도에 내려갔다가 서울로 올라와야 했다.[3] 애초에 KBO가 충청 연고의 제7구단을 창단하고자 할 때 충청 출신 기업인이 이끄는 기업이거나 충청에 연고를 둔 기업으로 범위를 한정한 것도 영향이 있었다. 이때 창단 희망 의사를 밝힌 한국화약그룹동아건설 모두 충남 쪽과 연관이 있었는데 한국화약은 오너 일가천안시 출신이었고 동아건설은 대전에서 출발한 기업이었다.[4] 물론 실질적으로는 쌍방울→SK, 현대→히어로즈도 선수단 자체는 이어진 채로 연고지가 바뀌었지만, 명목상으로는 구단 인수가 아니라 신규 창단이므로 연고 이전 사례에는 포함되지 않는다.[5] 김용휘 전 사장이 훗날 2008년 스포츠 2.0에서 밝힌 사실이다.[6] 정민태와 박진만 둘 다 인천에서 초중고를 다 졸업한 인천 로컬 출신이고, 박재홍은 광주광역시 출신인데, 애초에 루머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 참고로 박재홍 해설위원의 현 거주지는 인천 송도동. 은퇴 후에도 인천을 떠나지 않고 지금까지도 쭉 인천에 살고 있다.[7] 하이닉스는 돌고돌아 SK에게 인수되었고, 인수 후 54억은 껌이라고 봐도 될 수준으로 조 단위의 엄청난 순수익을 벌어들였다.[8] 팀 창단시에 최초로 요구했던 연고지는 서울이었지만, 기존 참가 기업들도 서울 입성은 꾹 참고 있는데 신생팀이 멋대로 서울 입성을 할 수는 없다고 KBO와 타 구단 구단주들이 격렬히 반대하자 한 발 물러선 것. 마침 SK 창업주 일가의 고향이 수원이라 차선으로 경기도를 연고로 야구단을 창단하려고 했는데, KBO가 ‘경기도는 현대가 광역연고권을 행사하고 있으니 연고권리 침해 최소화를 위해 수원에만 도시연고권리를 행사하라’고 하자 SK는 ‘다른 구단들 다 광역연고인데 왜 우리만?’이라며 이에 반발한다. 그 때 기존 구단+경인강원 연고구단이었던 현대가 SK에게 연고권을 팔고 본인들이 서울로 연고이전을 하려고 한 것.[9] 현대는 01시즌 전반기까지 수원구장에서 경기를 치른 후 서울 상암동 신구장으로 이전할 계획이었다.[10] 해태그룹의 채권은행인 조흥은행은 해태 타이거즈의 인수금액으로 180억원을 제시했다. 마침 기아자동차 공장이 광주에 있기 때문에 연고지 조건에도 딱 맞았다.[11] 이 때문에 현정은과 현대그룹은 지금도 야빠들에게 가루가 되도록 까이고 있다. 야구단을 운영할 능력이 되지 않는다면 과감히 저렴한 가격에 구단을 매각하는 책임감이라도 보여줬어야 했지만 현대그룹은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영원히 욕을 먹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12] 당시 SK 와이번스는 인천 정착과 관중 몰이가 시급했고, 인천 SK를 외치는 동시에 경기도강원도에서 마케팅할 여력이 없었다는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현대 유니콘스가 해체되고 kt wiz가 창단하기 전까지 수원구장은 명목상 SK 와이번스의 제2구장이었을 뿐이고, 홈경기를 치를 수 없었다. 수원에서 홈경기를 하겠다며 인천 수원 SK를 외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며 SK에게 이미 배상금을 받은 상태로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기에 대놓고 지명권 요구는 할 수 없었다 [13] 기간은 6시즌이지만 2007 드래프트에서는 1차 지명이 2명이었기 때문에 실제로 날려먹은 인원은 7명이다. 사실상 한 시즌 드래프트를 통째로 스킵해버린 꼴이었다.[14] 무엇보다도 현대가 연고 이전 문제로 인해 1차 지명권을 박탈당한 때는 인천/경기 팜에서 수준급 선수들이 나오면서 한창 흥하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 인천/경기팜에서 배출한 선수는 송은범, 윤석민, 최정, 류현진, 이재원, 김광현. 이들은 전부 국가대표를 역임했다. 야구에 만약은 없다지만 이론상 윤석민-류현진-김광현으로 이어지는 베이징 올림픽에서나 봤을 법한 선발진을 구축하는 것도 가능했다는 이야기.[15] 그마저도 1차 지명 박탈 이전 드래프트에서 지명함.[16] 하지만 이 시기는 역설적으로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이후 K리그1 인기의 영향으로 한국프로야구의 암흑기이기도 했다.[17] 정규리그에서는 4위였다.[18] 이 시기 롯데는 문동환 - 차명주 - 손민한에게 인당 5억의 계약금을 투자했지만, 성적은 5-8-8이었다. 결국 시즌 중에 김용희 감독의 해임으로 이어진다.[19] 정식 명칭이 숭의구장이었음에도 도원역 역세권이어서 도원구장이란 별명이 있었다.[20] 인천 3곳(인천대, 인하대, 연세대), 대전 6곳(충남, 한밭, 배재, 우송, 목원, 한남), 광주 6곳(전남, 호남, 광주, 광주여대, 조선, 남부). 그나마 연세대 국제캠퍼스도 약대와 글로벌융합공학부 외에는 1학년 수업만 진행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온전히 대학 하나로 쳐주기가 어렵고 유니콘스가 있던 시절에는 송도국제도시 개발이 이뤄지기 전이어서 아예 없었다.[21] 타지역 통근통학비율: 부산 8.4%, 대구 12.3%, 광주 9.2%, 대전 10.2% / 주간인구유출비율: 부산 4.7%, 대구 7.1%, 광주 5.4%, 대전 6.0%[22] 부산 18.4%, 대구 13.7%, 광주 9.3%, 대전 11.4%[23] 부산 0.9%, 대구 1.0%, 인천 4.0%, 광주 0.4%, 대전 1.4%[24] 이부망천 같은 멸칭이 왜 생겼는지 생각해 보면 간단하다.[25] 하나의 도시가 생활권이 조각나는 경우는 제법 있다. 그러나 인천은 서울이라는 중심도시의 옆 도시면서 생활권이 조각난 상태로, 각기 다른 생활권이 각각 별도의 루트를 통해 서울에 연결되는 형상이다.[26] 인천 도시철도 1호선은 현대가 연고지를 이전하기 직전인 1999년 10월에야 개통했다.[27] 다만 여기서 이말년의 예를 들기에는 살짝 어려운 게, 이말년은 원래 쌍방울 레이더스의 팬이고, 그 영향으로 쌍방울 선수 대부분을 인계하여 창단된 SK 와이번스의 팬이 된 것이다. 경기 서남권에 살아서 SK 팬이 된 것만은 아니다.[28] 그리고, 인천 연고 막바지 현대에 있었던 박장희 선수는 두산 베어스의 운영1팀장으로 영전해 두산의 운영시스템 구축에 큰 역할을 한다.[29] 다만 어디까지나 '전년 대비 늘었다'는 수준이지, 신축 야구장과 인천 1호선 개통, 2003년 준우승과 2005년 3위라는 호성적으로도 여전히 도원야구장 시절처럼 30~40만 사이에서 널뛰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SK 와이번스가 마의 50만 벽을 돌파한 것은 문학야구장 입주 6년차인 2007년 '스포테인먼트'를 앞세워서야 가능했고, 그나마도 팬을 확보하기 위해 엄청난 무료표와 단체관람으로 출혈 마케팅을 감내해야 했다. 이런 오랜 기간 동안의 투자 덕분에 2018년 기준으로 객단가는 8천정도로 올랐고, 관중 동원력은 LG-두산 다음으로 꼽히는 팀이 되었다. 게다가, 구장 내 음식, MD상품 판매실적으로 인하여 객단가*인원수 해도 상위권.[30] 게다가, 중앙대의 경우 모기업 두산그룹이 재학생들에게 입장료 할인 혜택을 제공중이다.[31] 심지어, 2000년대에 사이타마를 붙이기 전까지 세이부는 도쿄 23구 서부, 교외지역과 세이부 철도의 연선주택지를 대표하는 이미지가 강했다. 게다가 연고지인 도코로자와시조차 철도가 도쿄로 직접 가기 때문에 사이타마보다 도쿄의 베드타운 이미지가 강하다.[32] 오릭스는 두산과 LG가 인기를 나눠먹는 서울과는 다르게, 간사이 전체의 인기를 한신 타이거스가 독점하고 있어서, 현대가 해체된 후 인적자원을 받아 창단한 키움 히어로즈 못지 않게 힘든 상황이다. 그나마 교통 접근성의 경우 한신난바선, 나가호리츠루미료쿠치선의 영향으로 키움보다 훨씬 편리한 편이고, 상업시설 및 유동인구의 경우 이온몰의 영향으로 고척스카이돔보다 더 붐빈다.[33] 게다가, 지바 롯데의 임시연고지였던 센다이는 문화적으로 소외받는 도호쿠 지방의 최대도시였는데 당시 아예 프로스포츠팀도 없는 동네여서 수원시보다 상황이 더 심각했고, 일본시리즈를 우승했어도 센다이를 푸대접하는 롯데 구단의 처사에 분노하여 2005년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가 들어오기 전까지 많은 센다이시민들이 야구에 대한 관심을 끊어버리거나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갈아타버렸다.[34] 심지어 장안구청이 야구장에 더부살이하고 있었다.[35] 현대가 연고지를 옮긴 첫 시즌인 2000년을 제외하고 현대나 히어로즈가 SK에 관중동원으로 우위인 적이 없다.[36] 무엇보다, 우라와는 도쿄 메트로 난보쿠선사이타마 고속철도 직통운행의 영향으로 선로용량에 문제가 있는 게이오 전철 토비타큐역 근처의 아지노모토 스타디움을 쓰는 FC 도쿄, 도쿄 베르디보다 훨씬 더 낫고 쾌적한 구장 접근성을 자랑하는데 이는 도쿄 도심인 23구(특히 북동부) 팬덤 확보에 중요한 여건이 된다. 그리고, 우라와의 홈구장인 사이타마 스타디움은 육상트랙이 아예 없다.[37] 특히, 카와사키는 베르디가 2000년 도쿄로 다시 연고이전한 뒤 카와사키시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38] 게다가, 히어로즈는 2015년까지 목동구장을 쓰던 시절 목동 아파트 주민들로부터 소음피해 민원에 시달렸다.[39] 하지만, 학교수가 팜의 질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40] 게다가, 히어로즈는 서울팜에서 넥센 시절 학교폭력 전과로 문제가 된 안우진을 뽑는 행각을 저질러 야구팬들에게 가루가 되도록 까였으며 서울팜에서 길민세, 송성문 등 입단 이후 구설수로 문제가 된 선수를 많이 뽑아서 팬들의 속을 썩이곤 한다. 또한 히어로즈는 서울팜에서 인재를 뽑아도 강진 시절로 대표되는 부실한 2군 육성시스템 및 인프라로 인해 타 구단에 비해 신인들의 1군 콜업시기가 지나치게 빠르다는 문제가 있었다.[41] 단, 서울팜 3분할의 경우 천차만별인 각 고교 팀들의 사정, 강팀들을 서로 끌어 안으려고 하는 힘겨루기 등 이해 관계가 많이 얽혀 있어서 현실적으로 시행이 어렵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42] 대한축구협회를 현대그룹에 드립성으로 포함시킬 정도로 축구계에서만큼은 공이 많다.[43] 그러나 이후 정몽규 협회장도 승부조작 사면, 위르겐 클린스만 인맥 선임 등으로 매우 강한 비판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44] 정확히는 당시 대한체육회 회장이었던 정주영1988 서울 올림픽 개최 준비에 몰입해야 한다는 이유로 프로야구 참여를 거부했다. 그런데 그가 거부했던 프로야구가 대박을 터뜨리자 엄청나게 원통한 마음이 들었고 결국 1983년 출범한 한국프로축구에 참여하게 된다. 그때 만든 팀이 바로 울산 현대.[45] 상위 문서인 현대 유니콘스 항목에도 짤막하게 서술되어 있듯이, 애초에 구단 인수 당시 다른 계열사 다 놔두고 현대전자를 유니콘스의 대주주로 정한 것이야말로 현대그룹의 가장 큰 삽질이라고 볼 수도 있다. 현대자동차, 현대건설, 현대백화점, 현대중공업 등 야구단을 운영하기 충분한 우량기업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기준으로도 전자업계에서 후발주자였던데다 누적 적자가 상당했던 현대전자를 굳이 구단 대주주로 선정한 것. 심지어 왕자의 난 직전이던 2000년에는 현대전자의 구단 영향력을 강화시키겠다고 현대그룹이 직접 개입해 기존에 현대자동차가 가지고 있던 구단 지분 일부를 현대전자 소유로 이전시키는 삽질을 한번 더 저질렀다.[46] 삼청태현SK-SSG의 역대 관중 현황을 보면 알겠지만 인천 연고팀이 평균 이상의 성적을 내던 해에는 숭의야구장의 평균 좌석 점유율이 60%를 넘었고 문학구장 개장 이후부터는 평균 관중이 1만명을 꾸준히 넘었다. 부산광역시처럼 인천광역시도 도시 자체가 야구를 좋아하는 문화가 퍼져 있어서 평균 이상의 성적만 내면 어느 정도 흥행을 보장하는 지역이다. 더구나 인천에서 나고 자란 로컬 보이들이 줄줄이 그라운드를 누비고 있기에 로컬 보이들을 잘 알고 있는 다양한 연령층의 팬들이 야구장에 두루 찾아왔을 것이다.[47] 정상호, 이현승, 송은범, 윤석민, 최정, 류현진, 김광현 등이 튀어나왔으니까. 그 뒤로 중3 이후의 유급생, 타 구단 연고지역 출신 전학생 1차 지명 불가 및 전면 드래프트 시행으로 SK는 2013년 1차 지명 부활 전까지 지역 팜에 거의 손을 놓다시피 했다.[48] 현대가 인천 연고를 유지하던 시절에는 희한하게 인천/경기/강원팜에서 뽑은 1차지명 선수가 다 실패했다. 최원호(인천고-단국대)-최영필(유신고-경희대)-고호봉(부천고-원광대)-박장희(부천고-영남대)-이상현(춘천고)-설의석(인천고)-조순권(유신고-한양대)이 현대가 뽑은 1차지명 선수들인데 4년 뛰고 LG로 트레이드된 최원호가 팀에 그나마 가장 많이 공헌했다. 대졸 출신임에도 40대 중반까지 현역에서 뛰었던 최영필은 현대를 떠난 뒤에야 야구 인생에 꽃을 피웠다. 물론 1차지명 선수 외에도 지역팜 출신 선수 중에 대박도 있었다. 1996년 고졸우선 지명으로 뽑은 박진만(인천고)과 1998년 고졸우선 지명으로 뽑은 김수경(인천고)이 여기에 속한다.[49] 의외라고 할수도 있지만 1999년까지 한국프로야구는 도시 연고제가 아닌 광역 연고제를 채택했는데 인천팀은 경기도강원도는 물론 무려 이북5도까지 아우르는 초광역 연고권을 자랑했다. 이 때문에 삼미 슈퍼스타즈, 청보 핀토스, 태평양 돌핀스는 1989년 수원 야구장 개장 이전까지 온의동 옛 춘천 야구장에서 제2 홈구장 경기를 치른 바 있다. 심지어 춘천은 인천팀의 서브 홈구장이면서도 인천팀 역사에 엄청난 흔적을 남겼는데 삼미의 프로야구 출범 후 첫 홈경기 장소가 춘천이었고 허구연이 청보 감독 시절 눈물의 첫 승을 신고한 곳도 춘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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