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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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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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108
진번군
낙랑군
임둔군

BC 82
남부도위
현도군
BC 75
동부도위
(흥경 이현)
AD 30
폐지
(동예 독립)

(무순 이현)
AD 204
대방군
AD 314
(낙랑군 313년, 대방군 314년, 현도군 315년 요서 이현)
현도군은 기원전 107년 설치되었음.
※둘러보기 : 틀:원삼국시대 한반도 세력




파일:한사군.jpg

1. 개요
2. 소속 현
3. 시기에 따른 이동
3.1. 제1차 현도군
3.2. 제2차 현도군
3.3. 제3차 현도군
3.4. 제4차 현도군
4. 위치 논란
5. 중국의 동북공정
6. 기타
7. 둘러보기



1. 개요[편집]


玄菟郡. 고조선(위만조선)이 기원전 108년에 멸망한 이후, 전한의 무제가 설치한 한사군 중의 하나이다. 중국 본토 방면으로 이동하다 고구려에 의해 완전히 쓰러졌다.

'菟'자가 '토'로도 발음될 수 있기 때문에 일부 언론이나 서적에선 현토군으로 쓰기도 한다.

2. 소속 현[편집]


관할 지역으로 고구려현, 서개마현, 부조현이 있었다.
이 세 곳은 각각 고구려, 개마국, 옥저 및 부여 한나라 사이의 조공무역 관련 업무를 수행했다.
예를 들어 부여의 왕이 죽으면, 한나라는 죽은 부여 왕의 시신에 쓸 옥갑을 현도군으로 보내 부여의 사절단이 받아가게 했다.
반면 고구려는 현도군으로 와서 한나라의 의복(옷)을 받아갔다.
  • 고구려(高句麗)현: 기원전 75년 고구려의 공격 이후 새로운 중심지가 되었다.
삼국사기》 -유리명왕조-를 참고하면 고구려 서쪽의 양맥이라는 집단을 사이에 두고 고구려와 마주보고 있었다.
  • 상은태(上殷台)현
  • 서개마(西蓋馬)현: 현토군의 직접적인 어원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는데, 일단 왕망신나라 시대에 현토정으로 개명되고 개마의 발음이 *kema~*kemu 정도로 현토군의 현(玄)과 상통하기 때문. 이수라는 강이 동쪽으로 흘러간다고 적혀있는데 개마고원 일대에서 이러한 지형을 가진 곳은 장진군(광복 당시 기준) 밖에 없다. 개마고원 서쪽이라는 입지와도 상통한다.
  • 부조(夫租)현: 현토군이 기원전 107년 처음 설치되었을때 치소가 있었지만, 기원전 75년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현도군의 치소가 고구려현으로 이동했고, 부조현은 낙랑군 동부도위 소속으로 변했다.


3. 시기에 따른 이동[편집]



3.1. 제1차 현도군[편집]


고조선이 멸망하고 기원전 108년에는 낙랑군, 진번군, 임둔군이 설치되었으며, 이듬해(기원전 107년) 현도군이 설치되었다. 기원전 82년 진번군, 임둔군이 폐지되었을 때 임둔군의 군현 일부를 흡수했다고 한다.


3.2. 제2차 현도군[편집]


기원전 75년, 토착민(고구려가 건국되던 지역의 원 고구려 세력)의 공격으로 현도군의 치소가 혼하(渾河) 상류의 흥경(興京) 일대로 옮겨졌다.
[1]
당시 오환족을 상대하고 있었던 한나라로서는 압록강 중, 상류의 지배를 강화할 수 없었고, 이때를 노려 한나라의 압박 지배가 완화되자 토착민들이 공격을 한 것으로 보인다. 동시에 기존 치소였던 옥저는 낙랑군 동부도위로 편입되었다.

지금의 신빈현(新賓縣) 영릉진(永陵鎭)으로 군치를 옮긴 현도군은 현도성을 수축하는 등 압록강 중, 상류의 이맥(夷貊, 토착민) 세력을 경계했다.

상은태현(上殷台縣), 고구려현(高句麗縣), 서개마현(西蓋馬縣)의 3현이 있었다.


3.3. 제3차 현도군[편집]


1세기 말, 후한은 갖가지 자연 재해와 특히 티베트계 민족의 공격을 받았다. 성장하고 있었던 고구려는 제2현도군과 요동군을 줄기차게 공격했다.

결국 현도군은 내지 쪽인 무순(撫順) 지방으로 옮겼고, 이때 원래 있던 고구려현, 상은태현, 서개마현에 더불어 본래 요동군의 현이던 고현(高顯)현·후성(侯城)현·요양(遼陽)현 3현이 더해져 6현이 되었다. 이 때 더해진 3개 현 중 요양현은 양맥과의 외교를 위해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후한 말에 동연의 지배를 받다가 조위, 서진을 거쳐 315년에는 고구려 제15대 미천왕의 침공을 받았다. 재미있는 것은 미천왕이 313년에는 낙랑군, 314년 대방군, 315년 현도군이란 식으로 연이어 공격했다는 것이다. 본격 한사군 레이드...

3.4. 제4차 현도군[편집]


고구려 제18대 고국양왕에게 털린 이후 요서 대릉하로 다시 이치하여 명색만 군현인 채로 모용선비가 세운 전연후연을 거치다가 404년 제19대 광개토대왕이 후연을 공략하던 즈음 그 교두보로써 편입된 듯 싶다. 멸망.


4. 위치 논란[편집]


  • 옥저(함경도)
정사 삼국지》 <위서(위지)> -동이전-의 '동옥저' 편에 있는 "옥저성으로 현도군을 삼았다"는 문장에 착안함.

  • 고구려(압록강 중상류)
한서》 <지리지>와 《수경주》에 보이는 고구려현과 서개마현이 근거이다. 고구려는 지금의 졸본 - 집안 일대에, 개마국은 함경북도 개마 고원으로 비정되므로 그들의 원류인 고구려현과 서개마현은 압록강 중상류일 것이다.

  • 옥저+고구려
청나라 말, 양수경의 《회명헌고》(晦明軒稿) 중에 수록한 《왕사탁한지석지박의》(汪士鐸漢地釋地駁議)에서 주장됨. 일본의 사학자 와다 키요시(和田淸) 또한 이 주장에 동의했다. 이병도는 기원전 128년에 설치되었던 창해군의 강역 또한 1차 현도군과 같았다고 주장했다. 창해군은 예군 남려의 귀부로 설치된 곳으로, 예군의 "예"를 옥저로 본 것이다.

  • 요서 대릉하

어찌 되었든 통구평야(通溝平野) 일대의 한대 토성지(土城址)들을 현도군이나 속현의 치소로 추정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현도군”과 “고구려”를 분리해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한데, 이는 한나라의 “내속” 개념을 이해하지 못해서 나오는 경향이다. 물론 한나라에 현도군 고구려현이 있었다고 고구려가 고구려현의 지배를 받은 것도 아니며, 고구려현의 정체는 현대식으로 볼 경우 주고구려 한나라 대사관 개념으로 보는 것이 옳다. 그러나 후술하듯 이러한 점을 악용하여 동북공정으로 왜곡할 여지가 있다는 부분 역시 유의해야 한다.


5. 중국의 동북공정[편집]


최근 꾸준히 중국 측에서 고구려현도군에서 건국되고 확장되었기 때문에 고구려사가 중국사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역사를 볼 때 세월이 지나 나중에는 고구려가 현도군을 몰아내고 그 세력권을 전부 복속시킨다. 고구려가 건국되고 성장한 지역이 과거 현도군이었다는 이유만으로 고구려사가 중국사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명백히 동북공정의 일환이다.

6. 기타[편집]


파일:goguryeo_seong.jpg
고구려 지도와 현도성의 위치
고구려는 현도군을 축출한 이후에도 성 하나의 이름을 현도로 삼았다.

遣沙飡須彌山, 封安勝爲高句麗王. 其冊曰: "維咸享元年歲次庚午秋八月一日辛丑 新羅王致命高句麗嗣子安勝 公太祖中牟王 積德北山 立功南海威風振於靑丘 仁敎被於玄菟 子孫相繼 本支不絶 開地千里 年將八百 至於建産兄弟 禍起蕭墻釁成骨肉 家國破亡 宗社湮滅 生人波蕩 無所託心 公避危難於山野 投單身於隣國 流離辛苦 迹同晉文 更興亡國 事等衛侯 夫百姓不可以無主皇天必有以眷命 先王正嗣 唯公而已 主於祭祀非公而誰 謹遣使一吉飡金須彌山等 就披策命公爲高句麗王 公宜撫集遺民 紹興舊緖 永爲隣國 事同昆弟, 敬哉敬哉. 兼送粳米二千石, 甲具馬一匹, 綾五匹, 絹細布各十匹, 綿十五稱. 王其領之."

사찬 수미산(須彌山)을 보내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봉하였다. 그 책문(冊文)은 다음과 같다.

“함형(咸亨) 원년 경오(670) 가을 8월 1일 신축에 신라왕은 고구려의 후계자 안승에게 책봉의 명을 내린다. 그대의 태조 중모왕(太祖 中牟王)[2]

은 북쪽 산에 덕을 쌓고 남쪽 바다에 공을 세워, 위풍이 청구(靑丘)[3]에 떨쳤고 어진 가르침이 현도(玄菟)[4]를 덮었다. 자손이 대대로 이어지고, 본류와 지류가 끊어지지 않았으며, 개척한 땅이 1,000리요, 역사가 800년이나 되었다. 남건(男建)과 남산(男産) 형제에 이르러 집안에서 화가 일어나고 골육간에 틈이 생겨 집안과 나라가 멸망하고 종묘사직이 사라졌으며, 백성들은 동요하여 마음을 둘 곳이 없게 되었다. 그대는 산과 들에서 위기와 곤란을 피해 다니다가 홀몸으로 이웃나라에 투신하였으니, 떠돌아다닐 때의 괴로움은 그 자취가 진문공(晉文公)과 같고 망한 나라를 다시 일으킴은 그 사적이 위후(衛侯)와 같다고 하겠다.

무릇 백성에게는 주인이 없으면 안 되며, 하늘은 반드시 운명을 돌보아 주시는 것이다. 선왕의 정당한 후계자로는 오직 그대가 있을 뿐이니, 제사를 주재할 사람이 공이 아니면 누구겠는가? 삼가 사신 일길찬 김수미산 등을 보내 책명을 전하여 그대를 고구려왕으로 삼으니, 그대는 마땅히 유민들을 어루만져 모아들이고 옛 왕업을 이어 일으켜, 영원토록 이웃나라로서 형제처럼 친하게 지내며 공경하고 공경할지어다. 아울러 멥쌀 2,000섬과 갑옷을 갖춘 말 한 필, 비단 5필과 명주와 가는 실로 짠 베 각 10필, 목화 15칭(稱)을 보내니 왕은 그것을 받으라.”


안승문무왕에게 고구려왕으로 봉해지면서 '현도'를 언급했다.

또한 연남생은 당나라로부터 '현도군공'(玄菟郡公)에 봉해졌다.

7. 둘러보기[편집]




[1] 우리가 아는 추모(주몽)의 고구려가 나타나기 이전 고구려계 맥족들의 체제로, 학계에서는 이때쯤 고구려계 맥족이 '고구려'라는 정치체제를 구성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2] 주몽을 의미[3] 고구려, 신라, 백제의 별칭.[4] 한군현의 현도군에서 유래한 별칭으로 역시 고구려, 신라, 백제를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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