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무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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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장의위원회 구성
4. 참고문헌




1. 개요[편집]


북한의 정치인, 공업 테크노크라트.

2. 생애[편집]


1916년 2월 20일, 함경남도 리원군의 노동자 가정에서 출생했다. 철도공사장, 철공소 등에서 노동을 하다가 징용에 끌려가 성진제강소에서 노동자로 일했다. 북한의 공식 설명에 따르면 해방 이후 적위대를 조직하여 공장 복구정비를 하였으며, 이러한 행적 덕분에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에 입당했다고 한다. 김덕홍 회고록에 따르면 원래 평양 평천리 일본군 병기수리소에서 일하던 기술자였으나 해방 후 일본군 밑에서 일했다고 체포될까봐 달아나던 중 소련군이 공장 설비를 뜯어간단 말에 공장 설비를 지키기 위해 공장에 돌아와 지키고 있다가 공장을 찾아온 김일성을 만나게 되었고, 이에 김일성이 그를 즉석에서 공장 책임자로 임명했다고 한다. 이후 남포 앞바다에 일본군이 버리고 간 부품을 건져내어 공장을 복구하고 북한의 군수공업 육성에 큰 공을 세웠다고 한다. 1946년 1월 제강소당위원회 위원장을 거쳐 1948년 1월, 평양시 평천리의 25호 공장장에 임명되어 기관단총을 생산하는 등 공업 테크노크라트로 성장하기 시작했으며 6.25 전쟁이 발발하자 군수공업 부문에 종사하였다. 이후 평천리 공장은 강계 26호 종합공장으로 개편되었다.

이후 흥남시 당위원장에 임명되었다가 1957년 9월, 몸이 아파서 소련 요양을 떠난 현정민의 뒤를 이어 함경남도 당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57년 10월 전원회의에서 연안계 출신으로 당 농업부장이었던 박훈일이 숙청되자 중앙위원회 농업부장을 겸임하게 되었다. 1958년 3월, 제1차 당대표자회가 열리자 농업부장 자리를 김만금에게 내주고 다시 함경남도 당위원장으로 복귀한 것으로 보인다. 1959년 4월 27일, 로동신문 기고를 통해 오기섭, 주녕하를 지방할거주의적 반당종파분자로 맹비난하면서 김일성의 대숙청에 적극 협조하였다. 하지만 1960년 8월, 함남일보 사업을 잘 처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현지지도를 온 김일성의 비판을 받았고 이를 제때 개선하여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1961년 5월, 강영창의 뒤를 이어 조선로동당 중공업부장에 임명되었다. 1961년 9월, 4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61년 11월, 조선로동당 4기 2중확대회의에서 정치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1962년, 함경북도 당위원장으로 이임하였다. 1962년 9월, 김경석 장의위원을 지냈다. 1962년 10월, 3기 최고인민회의에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963년 7월 30일, 기계공업성이 기계공업위원회로 개편됨에 따라 기계공업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64년 12월 4일, 기계공업위원회가 기계공업성으로 환원되면서 다시 기계공업상에 임명되었다.

1967년 12월, 4기 최고인민회의에서 대의원에 선출되는 한편 회의 주석단에 선출되었다. 이후 1990년 9기 최고인민회의까지 쭉 재선된다. 4기 최고인민회의에서 내각 제1 기계공업상에 유임되어 1968년 5월까지 오래 재임하였으며. 1969년에 비서국 비서에 임명되었으나 곧 해임되어 1969년 12월 내각 교통체신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69년 8월, 리주연 장의위원, 1970년 8월, 김원빈 장의위원을 지냈다. 1971년 5월까지 교통체신위원장으로 재임하다가 해임, 1972년 11월에 다시 비서국 비서에 임명, 1973년 3월까지 일했다.

1970년 11월, 5차 당대회에서 정치위원회 후보위원에 재선되었다. 1972년 12월, 사회주의 헌법이 채택되고 주석제가 실시된 5기 최고인민회의에서 회의 주석단에 포함되는 한편 중앙인민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또한 정무원 교통체신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73년 1월, 정준택 장의위원, 1974년 2월 장길부 장의위원을 지냈다. 그런데 중간에 한번 정치위원회 후보위원에서 해임되었는지 1973년 9월, 정치위원회 후보위원에 다시 선거되었으며, 북한 공식 약력에선 이전 정치위원회 경력을 언급하지 않고 있다.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후보위원에 유임되었다. 1982년 4월에 7기 최고인민회의에서 중앙인민위원회 위원에 재선출되는 한편, 다시 비서국 비서에 임명, 1984년 10월까지 일했다. 북한의 보도에 따르면 1984년 10월부터 1989년 6월 사이 '중앙인민위원회의 책임적 직위'에서 일했다고 한다. 서기장으로 보기에는 다른 사람이 하고 있었고 단순히 중앙인민위원으로 보기에는 시기가 맞지 않는다. 1982년 4월 2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1976년 3월, 남일 장의위원, 1976년 5월, 홍원길 장의위원, 1976년 9월, 최용건 장의위원, 1982년 4월, 최현 장의위원, 1983년 1월, 강량욱 장의위원, 1984년 3월, 김일 장의위원, 1984년 4월, 오백룡 장의위원을 지냈다. 1985년 10월 19일, 조선로동당, 중앙인민위원회 합동회의에서 정무원 산하 산업개발부서들이 통합 개편됨에 따라 신임 정무원 부총리 겸 건설건재공업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86년 12월, 8기 최고인민회의에서 부총리 및 건설건재공업상에서는 해임되었으나 중앙인민위원에 재선출, 중앙인민위원회 국가검열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87년 8월, 박영순 장의위원, 1988년 4월, 림춘추 장의위원을 지냈다.

이후 은퇴단계를 밟았는지 1989년 6월 8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리용무에게 중앙인민위원회 검열위원장 자리를 물려주고 해임되었으며 1989년 7월, 서철이 검열위원장에서 물러나자 1989년 8월에 후임 중앙위원회 검열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91년 5월, 허담 장의위원, 1991년 6월, 허정숙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2년 3월 28일 6시 20분에 오랜 병환으로 사망하였다. 당중앙위원회, 중앙인민위원회, 정무원은 공동 명의로 부고를 발표, 그를 유능한 중공업 테크노크라트, 지방당 책임자, 유일사상체계의 공헌자로 칭송하면서 "동지는 온 사회의 주체사상화위업이 전면에 제기된 시기 당과 국가의 책임적인 위치에서 사업하면서 당원들과 근로자들을 당과 수령의 두리에 튼튼히 묶어세워 수령, 당, 대중의 일심단결을 백방으로 강화하며 경제건설에 대한 당의 령도를 철저히 보장하기 위하여 적극 투쟁하였다. 현무광동지는 생애의 마지막순간까지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확고히 세우고 당과 수령에게 무한히 충실하였으며 당의 령도 밑에 조국의 부강발전과 인민의 행복을 위하여, 주체혁명위업의 승리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것을 다 바쳐 투쟁하였다."라고 좋게 말해주었다. 국장이 거행되었으며 이후 시신은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 2023년 7월 9일자 로동신문에 현무광 특집 기사가 게재되었다.

3. 장의위원회 구성[편집]



4. 참고문헌[편집]


  • 김광운, 북한 정치사 연구 1: 건당, 건국, 건군의 역사(서울: 선인, 2003).
  • 서동만, 북조선사회주의체제성립사 1945~1961(서울: 도서출판선인, 2005).
  • 조수룡, 자발과 강제 사이에서 - 1950년대 북한 농업협동화의 과정과 성격 -, 통일과 평화 13(2)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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