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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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현순(玄楯)
생몰
1880년 3월 28일 ~ 1968년 7월 11일
출생지
한성부
사망지
미국 로스앤젤레스
매장지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2. 생애
2.1. 초년기
2.2. 하와이에서의 경력
2.4. 대사관 파동
2.5. 이후의 행적
3. 흑역사



1. 개요[편집]


한국독립운동가, 감리회 목사.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2. 생애[편집]



2.1. 초년기[편집]


현순은 1880년 3월 28일 한성부에서 현제창(玄濟昶)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역관을 맡았으며, 부친 현제창은 독립협회에 가입해 <독립신문>의 발행에 참여했으며, 1898년 11월 4일에 고종황제의 명령으로 체포된 독립협회 간부 17명 중 한 사람이었다. 현순은 이러한 부친의 밑에서 외국어를 공부했으며, 일찍부터 개화에 대한 관심을 품었다.

이후 장성한 그는 관립영어학교와 군사학교를 다녔지만, 1898년 한성영어학교를 책임지고 있던 허치슨의 고압적인 교육방침에 크게 반발하여 그를 추방하고자 하였으나 좌절하고 학교를 떠났다. 한편 그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서재필의 지지자가 되었고 이승만 등과 친분을 다졌다.

1899년 독립협회가 정부의 탄압으로 해산된 뒤, 현순은 일본 유학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도쿄에서 ‘Jun Den KiuKo Sa'라는 학교에 입학해 세계사·지리·화학·물리·수학 등을 공부했다. 이 학교가 정확히 어느 곳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아마도 ‘순천(順天)’이라는 이름이 붙은 학교인 것으로 보인다. 이무렵 기독교를 접한 그는 1901년 선교사 피쉬(Fish)로부터 세례를 받음으로써 기독교인이 되었다.

1902년 학교를 졸업한 현순은 과학 공부를 계속하려 하였으나, 학비를 마련할 길이 없어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이후 별다른 일자리가 없어 하릴 없이 시간을 보내던 그는 동아개발회사(東亞開發會社)의 하와이 이민 모집 광고를 보고 하와이 이민을 결심했다. 그는 인천 용동감리교회의 목사 G.H. 존스로부터 감리회 신앙공부를 이수한 뒤 1903년 2월 8일 가족과 함께 제2차 이민단을 인솔하고 하와이로 떠나 3월 2일 하와이에 도착했다.

2.2. 하와이에서의 경력[편집]


한국인들은 각처의 사탕수수 농장에 취업하였다. 그러나 이민 초기 한국인들의 생활에는 어려움이 적지 않았다. 그들은 낯선 언어·풍습·기후에 시달렸고, 현지인들의 냉대, 열악한 노동 조건 및 조국에 대한 향수도 이들을 괴롭혔다. 그리하여 이들 중에는 이민 실무자들을 원망하며 방탕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속출해 교포사회의 큰 문제로 떠올랐다. 이같은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현순은 자치회(Self-Rule Association)를 조직하는 데 힘썼으며, 야간학교를 개설해 한인 자제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그러던 중 현순의 활동을 눈여겨 본 하와이 감리교 선교부에서는 그를 가와이(Kauai) 섬의 전도사로 임명하였다. 이후 그는 섬 곳곳을 돌아다니며 교포들을 돌보면서 전도하였고, 몇몇 농장주들의 재정적 후원을 받기도 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가와이섬에 감리교회를 설립했고, 이 교회는 하와이 각처에서 한인교회들이 설립되는 발판이 되었다.

2.3. 3.1 운동대한민국 임시정부[편집]


1907년 한국으로 귀국한 현순은 배재학당(培材學堂)의 영어교사 겸 학감을 맡았다. 이어 1908년 정동감리교회 부목사, 1909년 서울 서부 지역 전도 목사를 맡았으며, 1909년에는 협성신학교(協成神學校)[1]를 졸업하고 목사안수를 받았다. 이어서 1911년 정동감리교회 부목사, 1913년 전국주일학교 주임, 1914년 정동감리교회 목사, 1915년 전국주일학교 총무 등을 역임했다.

1919년 3.1 운동 계획이 한창이던 무렵, 현순은 상하이로 파견되어 열국에게 조선의 독립을 승인해줄 것을 청하는 문서를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주변인들에게 "강원도로 전도 여행을 떠난다"고 말한 뒤 2월 23일 상하이로 망명했다. 이때 현순에게 맡겨진 과업은 첫째, 한국을 즉시 빠져 나갈 것, 둘째, 만주봉천으로 갈 것, 셋째, 그곳의 독립운동가들을 만날 것 등이었다고 한다. 초라한 농부 모습으로 변장하여 일본 경찰의 감시를 뚫고 봉천에 닿은 그는 우여곡절 끝에 최창식(崔昌植)이라는 사람을 만나 함께 상하이로 떠났고, 3월 1일 상하이에 도착했다.

현순은 상하이에 도착하는 즉시 한국에서 입수된 독립선언서이광수와 함께 영문으로 번역, 3월 4일 3.1 운동의 발발을 현지 언론에 널리 알렸다. 그리고 3.1 운동의 진상을 파악해 3월 9일 미국에 전보를 보냈고, 이후 3.1 운동에 대한 기사가 미국 언론에 실림으로써 3.1 운동이 교포 사회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한편 그는 3·1 운동을 계기로 한국 독립에 대한 외국의 원조를 얻기 위하여 미국인 피취 (G. A. Fitch)의 주선을 받아 몇몇 미국인들과 접촉하였다. 또한 그는 쑨원과의 면담도 시도했지만 무산되었다.

이후 그는 최창식과 함께 베이징으로 건너가 반일적인 중국 혁명가들과 접촉하는 한편 영국인 저널리스트 심프슨 (L. B. Simpson)과도 면담, 그로 하여금 한국으로 들어가 한국인들의 투쟁을 취재하도록 설득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현순은 3.1 운동이 일어난 직후 외국의 협조를 구하는 데 힘쓰는 한편, 동지들과 함께 임시정부의 수립을 위한 준비를 하였다. 그는 3월 하순에 동지들과 함께 독립임시사무소를 설치하고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구체적인 작업에 착수했다.

현순은 총무로 선임되었고, 그를 중심으로 독립임시사무소에서는 각국 공관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국내의 독립운동상황을 현지 언론에 제공하면서 파리의 김규식 및 미주의 이승만과 연락을 취하였다. 이 독립임시사무소가 이후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초가 되었다. 또한 그는 김규식이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로 파견된 이후 북경주재 미국대사, 미국 목사 등과 함께 회합을 갖고 그 후속 조치에 관한 문제를 협의하기도 하였다. 이같은 활동으로 말미암아 현순은 일본 정보기관에 의하여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후, 그는 내무총장를 맡아 김규식과 함께 임시정부의 외교를 전담했다. 한편 이 무렵 각처에 난립한 여러 임시정부를 상해임시정부로 통합하여 보다 효과적인 독립운동을 벌이려는 계획이 추진되자, 그는 각지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을 상하이로 불러 모으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블라디보스토크로 파견되어 대한인국민의회의 지도자들을 설득, 그들을 상하이로 불러 모으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대한인국민의회를 임시정부로 흡수하는 데 성공한 현순은 그 과정에서 여러 문제를 겪었었다. 즉 그 교섭 과정에서 현순의 ‘설명 불충분’으로 서로간에 오해가 있었고, 약속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고 생각한 문창범이 교통국장 취임을 거부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간 것이다. 결국 그는 사태의 수습을 위하여 그 해 11월 14일 내무총장에서 물러났다.

2.4. 대사관 파동[편집]


1920년 6월 현순은 상하이를 떠나 8월 미국에 닿았고, 9월부터는 그곳에서 김규식의 뒤를 이어 구미위원회(歐美委員部)의 임시위원장을 맡았다. 그는 우선 임시정부의 재정난을 타개하고자 국민회와 신한민보사의 후원을 받아 미 서부 지역 곳곳을 돌아다니며 모금 운동을 벌였다. 그는 장기적으로 미국 전역은 물론 멕시코쿠바의 한국인들까지 찾아 다니려 했다.

그런데 1921년 4월 그는 갑자기 워싱턴 D.C.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주미대사관을 설치하고 그 대사를 자처하여 교포 사회에 일대 파문을 일으켰다. 그는 그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대사관 설립의 이유

아! 대한민족이 세계열강에 대하여 독립을 선언하고 임시정부를 설립하여 이에 三星霜이나 아직 한 번도 독립의 승인을 받을 수 없었는데 마침 미국 대통령 하딩씨가 취임 후 미일의 관계가 점점 험악하게 되어 그 형세는 드디어 干戈에 호소하려고 한다. 우리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미국 정부에 정식으로 독립의 승인을 요구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므로 대통령 이승만 각하에 대해 외교의 급박을 전보하였더니 대통령으로부터 이미 대사 叙任의 사령을 위원부로 송부하였으니 그곳에서 좋도록 조처하라는 뜻의 電訓이 있었다.

따라서 곧 대사임명장을 받고 또 대통령에 대해 공관 설립을 확인해 달라고 요청하였더니 4월 4일 대통령이 公電으로 이를 확인한다는 뜻의 회답이 왔다. (중략) 대사관 경비 유지를 위해 모든 財錢은 前 구미위원부로 보내지 말고 대사관으로 송금하기 바란다. 특별주의 서재필 씨는 미국 시민인 고로 대한국가와 민족을 대표하는 것은 법률이 허하지 않는 일임을 알기 바란다.

주미대사 구미위원장 현순


이에 따르면, 현순이 이승만에게 "미국 정부에 한국 독립의 승인을 요청하여야 한다"는 전문을 보냈더니, 그로부터 "이미 위임장이 위원부로 송부되었으니 편의대로 하라"는 회신이 왔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다시 이승만에게 "공관 설립을 확인하여 달라"고 요청하여 그로부터 "그것을 확인한다"는 전문을 4월 4일 받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를 강력히 부인했다. 그는 4월 18일 현순을 해임하면서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

당신의 委員 해임. 公使위임장도 勿施하니 사무와 재정을 서재필에게 전장하오. 위임장은 급할 때 쓰란 것이오. 公館이란 말 업섯소. 4월 4일 전보도 公電 기다리라 한 것이오. 4월 9일 정부에 보낸 電報도 대실수. 돌프께 위임장 도로 주오.


즉, 이승만은 그에게 위임장을 보내긴 했지만 "대사관을 설치하라"는 지시는 한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순은 4월 19일 이승만에게 전보를 보내 자신이 ‘33인의 대표자’임을 상기시키고, "서재필과 프레드 A. 돌프는 외국인이므로 외교를 맡길 수 없다"고 반박하며 해임을 거부하였다. 이어 그는 5월 4일 "정한경과 돌프를 구미위원부에서 파면한다"고 통보하였으며, 5월 6일 미국 국무성 비서장을 방문하여 양국간의 수교를 요청함으로써 주미대사로서의 대외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로 인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사관이 2개가 되어버리자, 뉴욕의 대한인공동회는 워싱턴 D.C.에 대표를 파견해 진상을 조사했다. 조사 결과가 5월 2일 발표되었는데, 그 내용은 현순에 대한 비난으로 가득했으며, 그의 실책을 6조목으로 열거했다. 더 나아가 대한인공동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결의를 하여, 향후 현순의 활동을 제약하고자 하였다.

1. 현순 씨에게 경고를 발할 것.

2. 이 사건을 미, 포, 묵과 원동 각처 동포들에게 포고할 것.

3. 위원들은 미, 묵, 포 동포들의 가장 신망 있는 사람으로 속히 선출하여 대통령께 헌의할 것.


이러한 조사에 이어 서재필은 5월 7일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하고 5가지 이유를 들어 현순을 비판했다.

玄氏의 이번 不祥事는 第一로 國家外交의 機密을 漏泄하고 第二로 免職 後 國書를 美國國務院에 보내어 國家외 體面을 辱되게 하였고 第三으로는 大統領과 政府의 命令에 背馳하였고 第四로는 委員部의 財政을 横領하고 또 重要文書를 事務所에 사람이 없는 틈을 타서 竊取하였고 第五로 郵便 通信 및 銀行의 往來를 弄濫하여 政府와 各地 通信機關과의 連絡을 끊고 金融의 길을 閉塞하였다.


즉, 그는 현순이 국가의 기밀을 누설하였고, 국가의 체면을 손상시켰으며, 대통령과 정부의 명령을 거역하였고, 구미위원부의 재정을 횡령하고 문서를 탈취하였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비난한 것이다. 이같은 공격에도 불구하고, 현순은 대사관을 계속 유지시켰다. 그리고 5월 11일에는 미국 국무장관 휴즈(C. E. Hughes)에게 ‘大韓民國臨時政府 駐美特派大使’라는 직함으로 공문을 보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미국 대통령 및 정부가 한국의 전면적이고 완전한 독립을 공식적으로 인정할 것

둘째, 그와 같은 취지의 선언문을 미국 대통령의 명의로 각국 정부에 보낼 것

셋째, 미국 정부는 1882년 체결된 양국간의 조약에 의거하여 한국과의 직접적인 외교적·상업적 관계를 즉시 재개할 것.


그리고 그는 여전히 ‘大朝鮮獨立團三十三賢’의 대표라 자처하면서, 미국 정부에 사과문을 보낸 이승만서재필은 독립운동을 방해하고 위임통치의 연장 선상에서 외교 활동을 하고 있다고 힐난했다. 그러나 현지 여론은 갈수록 현순에게 불리하게 돌아갔고, 임시정부 각료들이 서명한 그의 면임장이 5월 24일 도착함으로써 그의 입지는 더욱 어려워졌다. 게다가 서재필 측에서는 현순의 구미위원부 사무실을 폐쇄하고 그의 이름으로 되어 있던 구미위원부 예금 구좌를 서재필의 이름으로 옮기는 등 실력 행사에 들어갔다. 결국 그는 5월 말 미국을 떠나 하와이로 이동했다.

2.5. 이후의 행적[편집]


현순은 자신의 지지기반이 잘 갖춰진 하와이로 돌아간 뒤 이승만과 서재필, 구미위원부를 비난하는 글을 배포해 한인 교포사회에 파문을 일으켰다. 그는 ‘위임 통치’ 문제를 들어 그들을 공박했다. 그러나 하와이에 구축된 이승만 지지 세력의 압력이 갈수록 심해지자, 그는 어쩔 수 없이 상하이로 떠나야 했다.

상하이에 도착한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로부터 "모스크바로 가서 한국 독립에 대한 소련의 지원을 얻으라"는 의뢰를 받았다. 이에 그는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대회(極東人民代表大會)에 한국 대표로 참석했다. 그는 ‘목사 동무’ (Comrade Minister)라 불려지면서 레닌트로츠키 등 소련 지도자를 만나 한국 독립에 대한 원조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다시 상하이로 돌아온 현순은 1922년 7월 여운형을 중심으로 조직된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에 참석했지만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했고, 1923년에 이르러 재정적 궁핍에 빠지자 영국 제약회사에 판매원으로 취직해 각처를 돌아다녔다. 그러던 중 장춘에서 감리교회의 감독인 프라이 박사가 보낸 편지를 받은 그는 판매원을 그만두고 1923년 2월 하와이로 떠나 호놀룰루 교회 목사로 부임했다.

그는 호놀룰루 교회에서 1926년까지 담당했지만, 박용만 계열과 이승만 계열간의 대립이 심화되자 가와이섬으로 자리를 옮겨 오랫동안 그곳에서 목회 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그는 하와이 각처를 돌아다니며 교민들에게 임시정부의 새로운 대표자 김구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면서 모금 운동을 벌이는 한편 매달 임시정부로 송금하는 일을 거르지 않았다.

1935년, 현순은 임시정부로부터 ‘하와이군도 선포위원’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하와이 교민들로 하여금 임시정부를 지원하도록 설득하는 책임을 맡았다. 1940년 일선에서 은퇴한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생활하다가 1968년 7월 11일 로스앤젤레스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현순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그의 유해는 1975년 국내로 봉환되어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3. 흑역사[편집]


6.25 전쟁이 한창 전개되고 있던 1950년 무렵에 지은 시들을 통해 김일성을 찬양한 적이 있다. 가령 현순의 시집 중 하나인 시와 연극의 110~112p에서 김일성을 장군이라는 호칭까지 붙이면서 찬양하고 대한민국을 남침한 북한군의 승리를 원하는 성향을 드러내고 있는 반면 맥아더맥흉(麥凶)이라 칭하고 이승만은 국적(國賊)이라고 칭하고 있다. 다만 현순이 비록 일시적으로 좌파적 입장을 견지한 적이 있었긴 했지만 이후 평생을 미주에서 거주했고 공산주의 사상과는 거리가 먼 상태였음을 고려할 때 현순의 이러한 시는 1919~1920년말까지 전개되었던 이승만과의 첨예한 대립 및 갈등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