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지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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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자: 現地任官
  • 영어: battlefield commission

1. 개요
2. 설명
3. 기타



1. 개요[편집]


장교 임관 제도 중 하나. 간단하게 말해서 전시상황과 같은 비상시에 장교 자원이 부족해졌을 경우 실전경험이 많은 선임 병사부사관 등을 바로 초임장교로 임관시키는 제도이다.


2. 설명[편집]


"연대의 중소위급이 열흘간 20여 명이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자 상사 중에 30여명을 현지임관시켜 줄 것을 건의하여 일주일이 지난 후에 육군본부에서 임관명령이 내려왔을 때는 이미 건의된 소대장 요원들이 전사하고 난 뒤였다. 다급하여 중사를 또 임관 시켰으나 또 다시 이와 같은 전철을 밟아야 했다."

-1950년 9월 기계·안강 전투에 중대장으로 참전한 차규헌 증언(<전투> 136페이지)


기계·안강 지구에서 전투 중인 수도 사단과 제 3사단으로 보충되는 장교는 손톱과 머리카락 등 유품 봉투를 만들어 가지고 부임하게 했다고 한다. 고참 하사관 중에서 선발되어 임관된 현지 임관 장교들은 한결같이 소대장이 될것이 두려웠다고 술회하니 소대장의 소모가 얼마나 심하였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소모품 소대장'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18연대 11중대장 김종민(<대전쟁> 125페이지)


대한민국 국군에서는 6.25 전쟁 당시 운용된 제도였다. 아직 건군 초창기인 상황에서 갑자기 많은 장교가 필요해졌기 때문. 1950년 8월 29일에 발령된 '육군보충장교령'에 의해서 시행되었는데 부사관들을 대상으로 시행되었다. 이런 식으로 부사관에서 장교로 임관된 사람이 4935명이었는데, 이는 한국전쟁 3년간의 신임장교의 약 1/7에 해당하는 숫자였다. 참고자료 전사자는 484명으로 9.4%였으며, 전쟁기간 중 장교 전체 전사자 3672명의 13.2%에 달한다. 2016년 1월 현재 생존자가 60명 가량이라고 한다.

장교가 극심하게 소모된 1950년 하반기에만 2,836명이 현지임관 했고, 이후 1951년 1,119명, 1952년 156명, 1953년 824명으로 대폭 줄어들었다. 병과별로는 보병이 3,134명으로 대부분을 차지했으며, 헌병이 208명이고 나머지는 병참 196명 등 100명대 이하. 이들은 '전선의 불쏘시개', '소모품 장교', '수명은 1주일'이라고 불리며 전투간의 공방전에서 진두지휘하였다.

소위 같은 위관급 초급 장교의 경우 직접 병사들을 인솔하여 전선에 뛰어드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사망률이 높아서, 현지임관과 같은 제도가 없으면 초급 장교를 바로바로 보충하는 데 무리가 있었다. 또 최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중대소대언제 부임할지도 모르는 지휘관을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기 때문에 현지임관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1961년 제정된 군인사법 제11조 제1항 제5호(2011년 5월 24일 제11조 전문개정으로 인하여 '제6호'로 변경)에는 전시에 탁월한 통솔력을 발휘한 준사관(즉, 준위) 및 부사관으로서 장성급 지휘관(준장 이상)으로부터 현지임관(現地任官)의 추천을 받은 사람은 장교로 임관될 수 있다고 정하여,(군인사법 참조) 현지임관에 대한 법적 근거를 유지하였다. 물론 휴전 이후 국가가 안정되었으므로 이 때부터 지금까지 이 조항으로 임관된 장교는 없다.


3. 기타[편집]


1187년에 벌어진 예루살렘 공방전 당시 수성 측은 병력 6000명 중 기사는 오직 14명밖에 남지 않는 상황에 처했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이벨린의 발리앙은 병사와 시종 중 60명을 임의로 뽑아 그 자리에서 기사로 서임하였다. 현대의 기준으로는 일반 병사나 부관을 소위로 현지임관한 것과 유사한데, 엄격했던 신분제를 생각해보면 임시로나마 귀족과 동격으로 인정한다는 중대한 의미가 있다. 영화 킹덤 오브 헤븐에서는 주위의 병사와 시종을 전부 기사로 서임하는 것으로 각색되었다. 대주교가 세상을 바꿀 것이냐는 말을 하여 당시 신분제의 관점으로 생각하기 힘든 일임을 보여준다.

1955년 10월 육사 11기가 소위로 임관했을 때, 현지임관 출신 장교들은 대부분 소령, 중령으로서 대대장 직책을 수행하고 있었는데, 당시 정책상 육사 11기는 빠르게 승진 했고, 5.16 이후에는 육사 11기 출신 정치 군인들이 고속 승진 하였다. 이런 편중된 내 권력구도 때문에 20년 정도 지난 후인 1973년에 육사 11기가 먼저 장군으로 승진하는 일이 벌어져 현지임관 출신 장교들의 상실감이 없지 않았다고 한다. 1973년에 육사 11기에서 가장 먼저 별을 단 사람은 역시 전두환이었다. 실전을 겪은 사람들보다 더 빨리 별을 다는 아이러니...

현지임관된 사람들 중 가장 유명한 사람으로는 미군정기에 편성된 대한민국 국군의 전신인 남조선국방경비대에 이등병으로 입대하여 부사관을 거치고, 6.25 전쟁 당시 현지임관으로 장교가 되어 이등병 부터 일등상사를 거쳐 소장 계급 까지 전 계급을 거친 사람은 최갑석 소장과 정수암 소장이 있다.

현지임관 출신 장교의 최대 진급 한계가 소장이었다고 한다. 사병 출신 장성 가운데 현지임관으로 장성급 장교까지 진급한 인물은 14명이며 5명이 준장, 9명이 소장이었다.

소장으로는 김영동 20사단장, 김용근 헌병감, 한상권 국방부차관보, 김병주 보안사 참모장, 이명구 38사단장, 이규식 52사단장, 이영구 합참 정보국 차장, 최갑석 2군 부사령관, 정수임 수송감이 있다.

준장은 유기화 화학감, 황종우 부관감, 김일만 부관감, 서기원 모 부대 참모장, 안도열 주월사령부 부관참모[1]이다.

유기화 준장의 경우 육군특별지원병 출신으로 일본군에서 조장(상사)로 제대하여 1948년 10월 한국군 입대 일주일만에 특무조장(상사)로 진급하였다. 1953년 10월에 현지 임관후 1974년 육본 화학감 역임 후 준장으로 예편한다.

또한 베티고지 전투[2]를 승리로 이끌었던 김만술 소위도 원래는 특무상사에서 현지임관으로 소위가 되었고, 제1사단 제11연대 제6중대 제2소대장으로 임명된 날 작전에 투입되었다.

이들은 1만명에 가까운 장교 숫자로 보나 전공 내용으로 보나 장군 14명은 너무 적은데, 결정적으로 5.16과 12.12에 참가하지 않아 정치 군인들에게 밀린 여파가 크다.[3] 또한 각자 자기 부대에서 현지임관이 되다 보니 횡적 종적 연대감이 약해 밀어주고 끌어줄 사람이 없다는 점도 문제였다.

미군의 경우 10대 합참의장을 지낸 존 베시 대장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상사로 근무중에 현지임관해 소위가 되었다. 이 외에도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서도 나오는데 바스토뉴 전투 이후 이지중대에 장교의 부족으로 립튼 선임상사가 소위로 현지임관을 한 내용도 있다.

창작물의 경우, 대표적으로 기동전사 건담 시리즈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 예시로는 기동전사 건담 SEED키라 야마토 소위가 그 대표적인 예. 야마토 소위의 경우는 본래 오브 연합 수장국스페이스 콜로니, 헬리오폴리스의 일반 시민이었으나 지구연합 vs 자프트의 전투에 휘말려 얼떨결에 공장에서부터 스트라이크 건담에 탑승, 이후 같은 배에 탄 친구들을 지키기 위해 싸우다가 지구로 돌입한 뒤 현지 임관된 케이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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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준장 진급 후 얼마 지나지 않은 1969년 11월 베트남에서 헬리콥터 추락 사고로 전사했다.[2] 국군 1개 소대가 중공군 1개 연대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물리친 전투. 이 전투로 김만술 소위는 한국 태극무공훈장과 미국의 수훈십자상을 수여받은 최초의 한국인이 되었다.[3] 바꿔서 말하면 전쟁을 겪은 사람들이다 보니 원래 군대의 존재 목적대로 나라를 지키고 국민을 보호하면 된다는 정상적인 정신 상태를 가진 장교들이 매우 많았다. 그래서 정치군인 같은 게 될 여지가 매우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