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철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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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성 총고문
현철해
玄哲海 | Hyon Chol Hae


파일:현철해.png

출생
1934년 8월 13일
만주국 길림성 연길현
사망
2022년 5월 19일 (향년 87세)
북한 평양시
묘소
평양시 형제산구역 신미동 애국렬사릉
국적
[[북한|

북한
display: none; display: 북한"
행정구
]]

본관
연주 현씨[1]
직업
군인, 정치인
종교
무종교 (무신론)
병과
조선인민군 육군
최종 계급
조선인민군 원수
주요 서훈
로력영웅(1995)
김정일훈장(2012)
최종 당적

파일:조선로동당 한글.png


1. 개요
2. 생애
2.1. 김일성 시대
2.2. 김정일 시대
2.3. 김정은 시대
2.4. 사망
3. 장의위원회 구성
4. 여담




1. 개요[편집]


북한의 군인, 정치인이다.


2. 생애[편집]



2.1. 김일성 시대[편집]


1934년 8월 13일, 만주국 길림성 연길현에서 림춘추와 함께 빨치산 활동을 한 아버지 현용택(玄龍澤, 1912. 1 ~ 1938)과 어머니 강릉 최씨 최경순(崔京順, 1912. 2. 8 ~ 1987. 11) 사이의 두 아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연길시의 소학교를 졸업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광복 이후, 만경대혁명학원을 2기로 졸업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자기 나이를 2살이나 속여 소위로 임관하였다. 이걸 보고 김일성이 기특하게 여겨 김일성 중앙경위연대 친위중대원으로 소속시켜주었다고 한다. 신숙주와 세종 일화도 아니고 김일성이 근무 중이던 현철해에게 자기 외투까지 덮어주었다 카더라. 전쟁 이후 김책공업종합대학을 거쳐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유학하여 4년간 공부하였으며 1957년에 귀국하여 당중앙위원회 및 평안남도 당위원회에서 일했고, 1960년대 초에 다시 군문에 들어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에 배치되어 총정치국 지도원, 부부장을 거쳤다.

1968년 총정치국 조직부 국장에 임명, 조선인민군 소장으로 승진했다. 1969년 1월, 김창봉, 허봉학 숙청 사건에 휘말려 군 대좌로 강등당하는 등 잠시 좌절을 겪은걸로 알려져 있다. 북한은 이때 현철해가 김일성의 눈과 귀가 되어 김창봉, 허봉학의 온갖 압력에 맞서 절개를 지켰으며 허봉학, 김창봉 숙청에 큰 공을 세웠다고 주장하고 있다. 리종옥, 최광의 경우에는 실수로 숙청됐던 것도 솔직히 인정하는데 이 정도로 북한에서 반대로 얘기한다면 지금까지 알려진 것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 1970년 4군단 정치국장에 임명되면서 소장 계급을 되찾았고 1976년 6월, 후방군관학교 교장에 임명되었다.

1986년에 중장으로 진급, 인민무력부 후방총국장에 임명되었으며 1991년 12월, 6기 19중전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으로 보선되었고, 1992년 4월에 상장으로 진급, 1993년 12월, 김일성 시대에 마지막으로 열린 전원회의인 6기 21차 전원회의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승진했다. 1994년 7월, 김일성이 사망한 후 장의위원을 지냈다.

2.2. 김정일 시대[편집]


1995년 10월 8일, 최고사령관 명령 0065호에 따라 대장으로 진급, 조선인민군 총정치국 조직부국장을 맡았다. 1998년 10기 최고인민회의가 다시 선거되자 대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이후 11기, 12기 대의원으로 계속 선출되었다. 1994년 11월, 군사대표단 단장으로 캄보디아, 라오스, 베트남을 순방하였으며 1995년 9월에 중국에 군사대표단 단장으로 다녀오기도 했다. 1995년 10월 6일, 모범적 군인으로 선정되어 김정일로부터 표창을 받았다. 1995년 2월, 오진우 장의위원, 1995년 7월, 김봉률 장의위원, 1997년 2월, 최광김광진 장의위원을 지냈다.

공식 서열은 그리 높지 않은 편이었으나 김정일의 현지시찰, 해외순방, 정상회담에 빠짐없이 모습을 드러내는 핵심 측근 중 한 사람으로 선군정치를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사람이었다. 북한 선전에서도 김정일에게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라고 묘사된다. 2005년 10월, 연형묵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2009년 3월, 국방위원회 국장에 임명되었다. 사망 이후 김정은의 후계자 시절 스승이었다는 주장이 갑자기 유포되기 시작했으나 정작 그가 사망하기 이전까지 어디에도 찾을 수 없던 정보이며 마지막으로 공개석상에 나온 2021년 7월 7차 로병대회 때도 일언반구도 안되던 것이 그가 사망하면서 연합뉴스 보도를 시작으로 갑자기 확산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설령 사실이라고 쳐도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그 어떠한 증거가 나온 적은 없다. 북한 선전에 따르면 김정일에게 현철해가 김정은에게 군대를 맡겨야 한다고 직언하면서 김정은이 군권을 틀어쥐는 것을 도왔다고 한다. 김정은 본인의 주장에 따르면, 김정은이 군권을 김정일로부터 물려받자 다른 간부들이 축하한다고 아부를 하는데, 현철해 혼자서 김정은의 손을 붙잡으면서 "이젠 됐습니다. 이젠 됐습니다."라고 진심으로 감격스러워했다고 한다. 이걸 보면 김정은 후계구도를 제일 적극적으로 지지한 인물로 보인다.

이후 총정치국 행정부국장, 상무부국장을 거쳐 2010년 5월에 국방위원회 국장에 임명되었으며 2010년 9월에 김정은의 후계구도 구축을 위해 열린 제3차 당대표자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재선되었다. 김정은이 후계자로 추대되는 순간 김원홍과 함께 바로 김정은 옆에 착석하고 있었다. 2010년 11월, 조명록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2011년 12월, 김정일이 죽은 후 당연히 장의위원으로 위촉되었다.

파일:3차 당대표자회 김정은 추대.png

2.3. 김정은 시대[편집]


2012년 2월 9일, 김정일훈장의 1차 수훈자로 선정되었다. 김정은 시대에도 중용되어 전창복의 뒤를 이어 인민무력부 제1부부장 겸 후방총국장에 임명되었고 2012년 4월, 제4차 당대표자회의에서 정치국 위원,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는 한편 군 차수로 진급하였다. 김정은이 직접 밝힌 바에 따르면, 현철해에게 실질적인 업무를 맡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현철해의 건강이 걱정되어 그가 사무실에서만 일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에게 새로운 직무를 주었다고 한다. 2023년 5월 18일 현철해 서거 1돐 추모대회에서 리일환이 한 추도사에 따르면 이때 건강이 너무 안좋아져서 외국에 나가서 치료를 받기도 했다고 하며 이미 의사들은 2013년이면 그가 죽어도 이상할 것이 없다고 진단했다고 한다.

2013년 12월, 김국태 장의위원을 지냈는데 장의위원 서열이 이미 은퇴한 최영림과 동급인 것을 보아서 2013년 3월 전원회의에서 고령을 이유로 정치국 위원에서 소환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전창복이 다시 후임 인민무력부 제1부부장 겸 후방총국장으로 복귀하였다. 한동안 김정은의 현지시찰에도 대거 동행하고 각종 보고대회에 참석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보였으나 나이가 나이인지라 2013년에 접어들면서 활동이 뜸해지기 시작하더니 2014년 이후부터는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 시작했다. 2014년 9월, 인민무력성 총고문에 임명되었는데, 북한의 선전에 따르면 고령의 현철해를 위해 건강관리에 집중하라고 전에 없던 새로운 자리인 인민무력성 총고문[2] 자리를 아예 신설했다고 한다.

2015년 11월 리을설이 죽은 후 다시 장의위원이 되었고 2016년 4월, 김영춘과 함께 인민군 원수로 진급했다. 2016년 5월 조선로동당 7차 당대회가 개최되면서 다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2017년에 김정은이 현철해 건강관리[3]를 위한 특별계획서를 하달하기도 하였고 이후 인민무력성이 국방성으로 개편되면서 국방성 총고문으로 유임되었다.

하지만 이런저런 명예는 높아져도 공식석상에 나오질 않았기 때문에 통일부에서도 현철해의 생사 여부를 확인해야 한다고 할 정도로 생존 여부가 불투명한 상황이었으며 2021년 1월 8차 당대회에서도 중앙위원회에서 탈락하는 등 죽은 게 아니냐는 추측이 더해지고 있었는데[4] 2021년 7월, 제7차 로병대회에서 매우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근데 심한 질병을 앓은 모양인지 김정은조차 알아보지 못하거나, 알아보아도 반응이 불가능한 듯한 아주 맛이 간 모습을 보였다. 이 기사이 기사의 사진들을 보면 김정은이 살갑게 대해 주는데도 시선조차 마주치지 않고 멍때리고(...) 있다. 한때 '김정일의 남자' 소리를 들을 정도로 지도부 공식 수행을 가장 많이 한 군인이었는데 세월이 무상할 지경. 저 동네에서 숙청당하지 않는 게 어디겠냐만.[5]

다만 김정은을 옹립시키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인지라 김정은 시대 부터는 백두혈통에 준한 대우를 받게 되었다. 덤으로 형인 현철규의 아들이자 현철해의 조카인 현성일이 탈북했음에도 현철해가 김정은 옹립을 성공시킨 인물이라서 총살당하는 것을 모면했다.

2.4. 사망[편집]


2022년 5월 19일 9시, 다발성 장기 부전으로 인하여[6] 87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김정은이 임종을 지켰는데, 단순히 선전이 아니라 정말로 임종을 지켰음을 나중에 영상을 공개했다. 당중앙위원회, 당중앙군사위원회, 국무위원회,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공동명의로 부고를 발표,

주체혁명 위업계승의 중대한 역사적 전환기에 현철해 동지는 공화국 무력의 최고지도기관들에서 중대한 책무에 성실하면서, 경애하는 김정은 동지의 유일적 영군체계[7]

가 전군에 확고히 뿌리내리도록 하였으며, 인민군대가 수령의 혁명 위업의 충직한 계승자인 김정은 동지만을 알고 오직 김정은 동지의 영도만을 받는 군대로, 조선노동당의 충실한 혁명적 무장력으로 영예로운 위훈사를 빛내어 나가도록 하는 데 모든 지혜와 정력을 다 바치었다.

현철해 동지는 수령에 대한 절대적인 충실성과 투철한 혁명적 원칙성, 조국과 인민에 대한 헌신적 복무 정신과 결곡한[8]

품성으로 하여금 인민군 장병들과 당원들, 인민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생애의 마지막 순간까지 위대한 김일성-김정일주의 위업에 무한히 충실하고, 오직 한마음 당을 따라 혁명의 한 길을 곧바로 꿋꿋이 걸으며, 우리 당 건설과 혁명 무력의 강화 발전에 지울 수 없는 뚜렷한 공적을 세운 유능한 군사정치활동가인 현철해 동지의 서거는, 사회주의 건설의 전면적 발전과 조국의 자주적 통일을 위하여 힘차게 투쟁하고 있는 우리 당과 인민, 군대에 있어서 보상할수 없는 손실로 된다.[9]


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북한은 코로나 와중에도 국장 거행을 결정하였으며 현철해의 부고는 로동신문 1면에 게재되었다.

파일:PIC0068440.jpg
현철해 영결식에서의 김정은

5월 20일, 김정은이 정치국 상무위원들, 정치국 위원들, 정치국 후보위원들, 당중앙군사위원회 위원들, 국방성 관계자들 및 군종사령관, 군단장, 정치위원들을 거느리고 직접 조문하였다. 무척이나 침통한 표정으로 눈시울을 붉히고 유가족들을 만나 위로하는 등 현철해와 관계 역시 돈독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이 10대 소년이었을 때 현철해와 함께 찍은 사진이 있을 정도. 김정은으로의 후계 구도 확립에 상당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MBC 통일전망대 보도

5월 22일, 영결식이 거행됐고 김정은과 정치국 상무위원들이 직접 관을 메고, 김정은이 직접 맨손으로 흙을 떠서 무덤에 덮어주기까지 하는 파격적 대우를 해줬다. 박정천의 애도사[10] 이후 시신은 애국렬사릉[11]에 국방성 총고문, 조선인민군 원수 직함으로 김영춘 옆자리에 묻혔다.

이후 현철해의 생애를 기리는 영상인 <빛나는 삶의 품> 32편(#(북한 측 영상 주의))도 제작되어 배포되었다. 김정은은 현철해에 대해 "혁명의 한길만을 꿋꿋이 걸어온 전사, 참다운 총대전사, 충직한 혁명전우"라고 말했다.

2022년 8월 25일 자 조선중앙통신 기사 <우리 혁명무력의 핵심골간을 키운 위대한 동지애의 품>은 "위대한 사랑의 품속에서 우리 당의 가장 충직한 혁명전사였던 현철해동지의 삶이 영생의 최절정에 올라서게 되였다. 현철해동지는 친위중대의 전사로서 위대한 수령님을 결사옹위하기 위한 성스러운 투쟁에서 무비의 영웅성과 희생성을 남김없이 발휘하였으며 우리 혁명이 엄혹한 시련을 겪던 고난의 행군,강행군시기 우리 장군님의 그림자가 되여 혁명무력의 정치군사적위력을 백방으로 강화하고 인민군대가 대를 이어 수령의 위업에 가장 충실한 수령의 군대,당의 군대로 위용떨치게 하는데 이바지하였다. 경애하는 총비서동지께서는 한생 변할줄 모르는 총대와 같이 당과 수령을 충직하게 받들고 조국과 인민앞에 커다란 기여를 한 현철해동지를 충심으로 존경하고 더없이 아끼시였다. 그의 건강을 위해 항상 마음쓰신 총비서동지께서는 그토록 사랑하신 전사를 영영 돌아오지 못할 길로 보내야만 했던 비통한 그날에도 현철해동지의 침상곁에서 운명의 마지막시각을 지켜주시였으며 온 나라가 다 알고 후세토록 길이 전하도록 하시는 최상최대의 영생의 삶을 안겨주시였다."라고 그를 칭송했으며 김정은을 숭상했으며 기사에서 언급된 모든 장군들보다도 가장 많은 분량을 현철해에게 할애하는 등 김정은 정권에서 현철해가 공신으로 우대받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2023년 5월 19일, 현철해 사망 1주기 성묘를 온 김정은

2023년 5월 19일에 현철해 사망 1주기 추도대회가 아무런 예고도 없이 열렸고 당정 최고간부들이 대부분 참석했다. 이례적으로 행사 당일에 록화실황이 조선중앙텔레비죤을 통해 보도되었다. 김정은도 강순남을 거느리고 직접 현철해 무덤을 참배했다.


3. 장의위원회 구성[편집]



김정은의 극심한 비판을 받은 중앙검찰소장 우상철이 예상대로 빠졌는데 이후 건재한걸로 확인되었고 김재룡과 같이 분과별 지도회에 참가했다. 그리고, 국방상 리영길, 총정치국장 권영진도 빠졌다. 코로나 창궐로 인한 문책 혹은 와병이 의심된다. 이후 리영길은 건재한 것으로 확인되었으나 권영진은 총정치국장 및 정치국 위원에서 해임되었다.


4. 여담[편집]


  • 아버지 현용택(玄龍澤)은 김일성 부대의 빨치산으로 김정숙이 있던 중대의 정치지도원으로 활동하다가 1938년 임강현(臨江縣)[13]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 부인 최금련(崔今蓮)과의 사이에 외아들 현성준(玄成俊, 1965 ~ )을 낳았다. 현성준에게 딸 현효정이 있는데 강반석혁명학원을 61기로 졸업하고 2022년 10월, 만경대혁명학원 및 강반석혁명학원 창립 75주년 련환행사에 나와서 할아버지에 대한 썰을 풀었다.

  • 그 외의 가족으로 전 함경남도 책임비서 겸 인민위원장을 지낸 형 현철규(玄哲奎, 1932 ~ )가 있다. 현철규의 장남인 현성일(玄成日, 1959. 2. 2 ~ )은 김일성종합대학 영문학부를 졸업하고 주 잠비아 북한대사관의 3등 서기관으로 일하다가 1996년 탈북하여 대한민국에 정착하였다. 현성일은 이후 1999년 한국외국어대학교 정책과학대학원에서 북한학 전공으로 외교안보학 석사 학위[14]를 취득했으며, 2006년에 경남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외교학 박사 학위[15]를 취득하여 북한 연구자로 활동하였다. 이에 북한에 남아 있던 현철규는 아들 관리를 못한 죄로 경질되었다.

  • 2018년 8월, 김영춘 사망 이후로 조선인민군 유일의 조선인민군 원수 칭호 보유자 기록을 가졌으나 2020년 10월, 리병철과 박정천이 원수계급을 받으면서 기록이 깨졌다. 이후 두 사람이 원수계급을 박탈당하면서 다시 유일한 원수가 되었으나 2022년 부로 리병철, 박정천이 원수계급을 다시 받으면서 해당 타이틀을 잃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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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판윤공파 33세 철(哲) 항렬.[2] 사실 이 자리 자체는 김영춘도 역임했다. 김영춘은 7차 당대회 직전까지 정치국 위원을 유지하였으므로 먼저 은퇴한 현철해가 이 자리에 최초로 임명되고 7차 당대회에서 은퇴한 김영춘이 나중에 임명됐던 것으로 보인다.[3] 2022년 공개된 《태양의 가장 가까이에서》라는 기록영화에는 이 당시 '만성 허혈성 심장병'을 앓아 스텐트를 삽입했다는 진단서가 포착되었다. 파킨슨증후군(파킨슨병과 다른 병으로 보인다.), 시신경위축, 난청 등 노화에 동반되는 질환에 지방간, 고지혈증, 당뇨병 등을 앓기도 했다고 한다. 특히 지방간 등의 질병을 보면 생전에 술도 잘 마시고 기름진 음식도 잘 먹었던 것으로 보인다.[4] 하지만 북한에서 나중에 공개한 것에 따르면 8차 당대회에 당대표로 선출은 됐다. 하지만 심각한 건강악화로 인해서 출석은 못했다고 한다. 북한 선전에 따르면 김정은의 총비서 추대에 기뻐서 날뛰었다고 하는데 2017년 이미 파킨슨증후군과 난청 등으로 맛이 갔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사실일지는(...) 나중에 김정은이 8차 당대회 참석자 단체사진에 현철해를 합성해서 넣으라고 지시해서 자세히 보면 휠체어를 탄 현철해가 있다.[5] 농담이고, 사실 김정은 입장에서도 자신의 후계구도를 세운 일등공신이고, 김일성과 김정일부터 3대째 받들어 모신 충신이자 사적으로 상당히 관계가 돈독한 인물이었기에 숙청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또한 현철해의 자녀들은 정치와는 거리를 두며 북한의 고위직을 역임하기에 사후에도 대접을 받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애초에 자신의 조카가 탈북한 상황에서도 김정일이 인정한 인물이고, 몇번 좌천만 당했지 완전한 실각을 당한적은 단 한번도 없다. 김영남처럼 정치력이 상당한 케이스.[6] 그러나 외신들은 북한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대유행으로 인해 오미크론 변이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사망한 것으로 추정했다. # 하지만 이러한 보도는 근거가 빈약한 추정에 불과할 가능성이 크다. 2022년 5월 22일,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한 현철해의 추도문에서는 김정은이 임종을 지켰다고 기술된 것으로 보아 코로나-19 감염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애초에 코로나-19에 감염되어 사망했다면 김정은이 마스크도 쓰지 않고 영구를 직접 발인하지 않았을 것이다.[7] 김정은의 명령만을 수행하는 군 지도체계[8] 빈틈없이 깨끗한. 한국 표준어 사전에도 있는 단어로 격식을 위해 어려운 단어를 사용하였다.[9] 단어는 북한의 부고문과 완벽히 똑같고 한국 표준어식으로 맞춤법을 교정하였다.[10] 박정천이 애도사를 읽는 도중에 계속 흐느껴 울었기 때문에, 조선중앙TV 방송에서는 아나운서가 애도사를 대독했다.[11] 최근 북한의 국장 장례 의식만 보면 대성산혁명렬사릉에 안장된 이들과 마찬가지로 최상급으로 치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국렬사릉에 안장된 이유는, 본격적인 활동 시기가 한국전쟁 발발 이후부터이기 때문이다.[12]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지냈던 그 김영남인지는 불명. 현재 북한에서 그나마 고위직이라고 할 김영남은 량강도 농촌경리위원장 김영남 정도인데 량강도가 곡창지대도 아니고 다른 도 농촌경리위원장들이 위촉된 것도 아니니 그 김영남은 아닌 걸로 보이고 리명수처럼 은퇴한 김영남이 장의위원이 된 것일 수도 있겠다.[13]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바이산시(白山市) 린장시(臨江市).[14] 석사 학위 논문 : 北韓勞動黨의 組織構造와 社會統制體系에 關한 硏究(북한노동당의 조직구조와 사회통제체계에 관한 연구).[15] 박사 학위 논문 : 북한의 국가전략과 간부정책의 변화에 관한 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