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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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개요
1.2. 특징
3. 라이트노벨 <언젠가는 대마왕>에 나오는 비행항공모함


1. [편집]



1.1. 개요[편집]




중국의 위진남북조시대 초기인 위진시대에 발생하여 성행한 중국 철학의 한 갈래다. 현학은 노자, 장자, 주역을 중시했는데, 이 세 서적을 묶어 '삼현(三玄)'이라 했으므로 삼을 연구하는 문이라 현학이다.

참고로 중국 판타지소설 장르 명칭 중 하나인 '현환소설(玄幻小說)'의 '현(玄)'이 바로 이 '현학'을 의미한다.[1]

1.2. 특징[편집]


후한말 동탁이 황실을 틀어잡고 정권을 농단한 이후 황실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고 지방 군벌들이 날뛰며 안 그래도 웃기던 사회 분위기가 말도 아니게 흉흉해졌다. 곳곳에서 살육이 벌어지고, 전쟁이 범람하며, 전염병과 천재지병이 창궐하기도 했다. 식자층도 이러한 사회 분위기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 장각과 장로 등으로부터 촉발된 도교가 흥성하기 시작했다. 천자의 꼴이 말이 아니게 된 상황에서 하늘로부터 타고난 천명, 직분 등을 주장하는 유교의 권위 역시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권위가 무너진 유학자들의 대체품으로 저자에는 점차 도사들이 활개치기 시작했다. 삼국지에 나오는 우길, 좌자 등으로 대표되는 도사들은 혹세무민하는 헛소리를 지껄이기도 하고,[2]개인의 건강과 수명의 보존에 관심을 가져 연단술이나 장생법, 의술에 관심을 두기도 했다. 이들은 황노의 학에 그 준거를 두기도 했고, 주역 등 유가의 경전에서도 이론의 근거를 구했다.

중앙정부에서도 유학자들의 대접은 시원치 않았다. 동탁은 유학자들을 우습게 봤고, 조조는 그 정도가 더해 공융, 예형, 양수 등 맘에 들지 않은 선비들 모가지를 시원스럽게 쭉쭉 날렸다. 기세가 죽은 유학자들은 입을 닫고 세속에 관심을 끊고 은거하거나 훼절하여 당대 정권에 굴종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전대의 유교적 권위와 가치, 명분 등에 의구심이 생기게 되었다. 세태가 흉흉하기 그지없고 군벌들이 어지러이 난립했다 스러지는 와중에 천자는 하늘로부터 천명을 받은 숙명적 제왕이다, 천지만물과 인간사는 서로 감응하는 것이니 돌연한 자연적 징조가 인간사에 크게 작용한다는 천인감응설, 경전의 한 글자 한 글자를 따지는 번쇄한 훈고학 따위에 집중하는 마융이나 정현의 학설이 무슨 권위가 설 수 있겠는냐는 것이다.[3][4] 사상의 위기로서 동중서를 필두로 해서 마융 정현 등이 집대성한 융통성 없는 장구, 훈고의 양한경학(兩漢經學)은 쇠퇴하기 시작했고 폐단을 낳아 일상생활에서의 윤리학에서도 점점 왜소해지기 시작했다.

신진귀족 자제들인 하안왕필은 기존의 사상에 등을 돌리고 새로운 정신세계를 펼치게 되었다. 왕필이나 하안이 창조한 정시현학(正始玄學)은 사변색채가 농후한 의리학(義理之學)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황로지학에 관심을 기울여 이를 깊이 공부함과 동시에 이를 바탕으로 유교적 경전을 해석해 하안을 논어집해를, 왕필은 주역주를 집필했다. 이전까지의 유교 경전이 명분을 중요시한 데 반해 하안과 왕필은 명분 대신 자연스러운 무위의 도를 역설하여, 예컨대 공자의 말 중 공(空)이나 허(虛)를 논한 부분을 도가적으로 해석했다. 이들은 허황된 참위설을 배척하고, 명분에 집착해 억지로 사업을 꾀하는 것을 지양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한 사람의 지혜를 짜내 천하를 다스리려는 행위는 혼자 천 명의 지혜와 대적하는 것과 다름 없으니 허무할 뿐이며, 요순조차 쉽게 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 지도자는 고을고을마다 상이한 습속을 억지로 개변하기보다는 스스로의 인격을 수양하며 천하는 흘러가는 대로 자연스레 다스리는 것이 낫다 여겼다.

간단히 말하자면 무위지치를 지향한 전한의 재림이다. 전한의 경우는 비슷하면서도 다르게, 진시황의 폭정과 초한전쟁으로 천하가 난장판이 된 상황에서 뭐라도 했다가는 백성들이 반발할 판이니 차라리 아무것도 안 하고 흘러가는대로 놔두었다.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소하 사후에 상국이 된 조참으로 상국이 되자마자 조참은 변변찮은 이들만 중용하며 업무는 팽개치고 술만 퍼마시고 살았다. 그러나 이에 대한 혜제의 힐문과 조참의 대답에서 드러나듯 조참은 자기만의 생각이 있어서 농땡이를 피운 것이다. 현재에도 무능한데 열심히 일하는 상사가 제일 무서운 만큼 반대로 열심히 일하지 않는 것이 더 나을 수 있다. 적어도 열심히 일하지 않는다면 아랫사람들은 말도 안 되는 일을 지시받고 수행하며 고통받을 가능성은 적으니.

삼국이 안정되었으나 유학의 권위는 여전히 흔들렸고 위진 사회가 부패한 가운데 사치와 향락이 판치자 양생이나 연단 등 개인의 보신이나 영달에 힘을 쏟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 지식인들은 양생이나 자연, 미신 등에 관심을 두며 도교를 가까이 했는데, 죽림칠현이 이러한 선비들의 대표격으로 세속의 권위를 대단치 않게 여기며 자연과 청담을 논하고 술과 음악을 즐겼다. 이는 현학의 관점에서 본다면 당시 세태가 어지럽고 피바람이 부는 것은 사물과 사람의 가치를 재고 구별하던 작위에서 비롯했으므로 복잡스런 예법을 논하며 군자연하느니 술이나 마시고 흐리멍텅하게 살며 좀 멍청하고 둔하더라도 초연히 살아가는 쪽이 세상에 도움될 것이라는 도가적 세계관을 바탕을 둔 행태였다.

죽림칠현은 청담의 풍조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이들은 유가에서 강조하는 명교를 초월해 무위자연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세속적인 명예나 이익, 예의를 초월하여 활달한 행동을 일삼았으며 현대의 시각에서도 정도를 벗어난 행동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보이는 행동은 겉보기에는 자유분방하지만 속으로는 오히려 유가사상을 깊이 믿고 있었다. 완적이 정작 자신의 아들은 음주 행렬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거나 혜강이 가계(家誡)라는 책을 써서 자신의 아들에게 올바른 사람이 되기 위한 예절과 주의사항을 훈계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한편 하안, 왕필을 거쳐 죽림칠현을 지나 더욱 활발해진 도가 연구로 인해 도교 사상은 한층 더 발달했다. 도가 특유의 신비주의와 자연관이 한층 세련되게 변했으며, 도가적 무위에 대한 설명도 무조건적으로 행위를 지양하고 소박함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 본성을 자연스럽게 살리며 겉꾸밈을 지양하는 쪽으로 이동하게 되었으며, 도가적 지혜 및 이를 지닌 도가적 성인상도 이 시기에 한층 구체화되었다. 이런 도가적 연구를 유가 사상에 도입함으로써 현학의 연구자들은 기존 유학의 한계점을 돌파하려고 시도한 것이다. 이렇게 도가 유가는 서로 상호 보충 하면서 현학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새롭게 역사 무대에 나타났다.

비록 초창기 주요 연구자들인 하안이 사마의가 일으킨 고평릉 사변에서 참살당하고, 왕필이 젊은 나이에 병사했으나, 이른바 3현이라고 불리는 도덕경, 장자, 주역 연구와 해설을 중심으로 하는 현학(玄學)의 학풍은 위진시대에 크게 성행하였다. 하후현, 왕연, 완적, 혜강, 계강(稽康), 상수 등을 중심으로 형이상학적 주제를 둘러싼 고도의 철학적인 논변이 전개되었으며, 이를 통해 노장사상에 기초해 세속적 가치를 초월한 정신적 자유를 강조하고, 명분과 형식에만 집착하는 유학을 비판하며, 3현을 기초로 한 철학적이고 예술적인 논의를 중시하는 풍조가 나타났으며 이를 청담이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실제적으로도 후대 청담사상의 기초가 완성되었다고 본다.

이런 위진시대 현학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졌다.

  • 청의사상을 이어받아 백성들을 위로하고 스스로도 청렴, 결백하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유지했다. 특히 재산을 모으거나 권력을 탐하는 것을 비루하다고 생각하게 함으로써 사치와 탐욕에 빠지는 것을 경계했다.

  • 불의한 중앙정권에 대한 저항사상을 이어갔다. 저항의 방식으론 적극적 저항에서 소극적 저항, 그리고 세상에 미련을 끊어버리고 자연에 심취해 살면서 출사를 거부하는 식으로 표현했다. 역성혁명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 사상이 광범위하게 유행을 타면 인간 머리수를 기반으로 하는 생산, 경제 기반이 마비가 되어버리므로 당연히 위정자들은 이 가능성을 경계했다. 일종의 현대 투표거부운동 같은 의미.

  • 허례허식에 사로잡힌 당대의 유가사상에서 벗어나서 다양한 탐구를 함으로서 생각의 다양성을 발전시켰다. 그리고 유가사상을 버린 것도 아니라서 유가사상이 진정으로 추구했던 것을 허례허식을 버리면서 추구하기도 했다.[5]

이런 위나라 정시 연간에 성했던 현학 핵심 이론은 무(無)이며, "모든 유는 무에서 시작하며 무명으로 형상이 없을 때가 곧 만물의 시작이다"라고 여겼다. 이른바 귀무론(貴無論)은 직접적으로 우주 본질을 탐구하며 현실의 일상생활에선 적용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사변적 이론이 변화해서 최후에 허무주의를 탄생시켰는데 이것은 사회를 유지하는데 굉장히 불리했다.

귀무론에서 파생한 언불진의(言不盡意) 등 현학은 현학을 배척하고 일어선 서진 정권 인사들에게는 배척할만한 것이었다. 당장 사마소의 장인이자 하안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왕숙의 이론은 사마씨 정권의 비호를 받아 학계의 주도세력이 되었으며 현학과 유사한 형이상학을 전개했던 배위(裴危)나 구양건(歐陽建) 등의 서진 지식인사들은 현학을 비판하였다. 이들은 귀무론이 본(本)이 된다는 현학사조에 대한 비판성을 전개하게 되었다. 배위는 유교의 예를 보호 유지하려는 명사로 당시 현학은 이미 심각한 허무주의에 빠져 있다고 보았으며 숭유론(崇有論)를 지어서 유교 입장의 본체론 각도에서 사상을 전개하면서 귀무론에 대해 강력히 비판하였다. 배위는 유가 입장에서 숭유론(崇有論)을 지어서 왕필의 '무가 본이 된다'(以無本)는 명제로 나타난 물자생론(物自生論)을 겨냥, 왕필 사상체계를 무너뜨리고자 했다. 구양건은 인식론 각도에서 출발해서 곧, 언진의론(言盡意論)을 짓고 당시의 언의(言意) 변론의 핵심 이론에서 문제를 잡아서 정시현학이 '무(無)는 귀하고 유(有)는 천하다'(貴無賤有)는 관점을 배위와 함께 공격하였다.

숭유론 발표 후 현학계는 격렬한 무유지변(有無之辨) 논쟁을 유발 했으며 이 논쟁을 통해서 곽상이 독화론(獨化論)을 창조할 풍토가 만들어졌다. 곽상 독화론은 왕필 귀무론과 배위 숭유론을 절충한 결과물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서진이 멸망한 후 왕도, 사안 등으로 대표 되는 동진의 지배층 명사들은 청담을 숭상했으나, 다만 그 용의는 과거 위진시대 현학의 약간은 미치광이 같은 모습과 염세적인 풍조와는 같지 않았다. 그들은 정권의 유지와 사회 안정을 위해서 청정무위를 받아드리고 청담명사를 숭상하며 그들의 협조로 사회질서를 안정시켜 나아갈 목적으로 청담을 받아들었다. 또한 동진시대 청담 명제는 전통적인 삼현의 이론에만 국한하지 않았다. 이 시기 부터는 불교 이론도 토론의 자료가 되었는데 동진의 명승인 지도림(支道林)이 반야공관(般若空觀)으로 장자의 소요(逍遙) 뜻을 해석했으며, 이것은 당시 현학계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기도 했다. 유불선이 융합된 이런 후기 현학은 남북조시대가 끝날때까지 동아시아 사상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수당시대에는 다시 훈고학이 유행하였지만, 현학의 일부의 이론들은 후대 정주학, 양명학의 발전에도 일정정도 영향을 끼쳤다.

2. [편집]


학식 있음을 자랑하거나 그런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흔히 장황하고 어지러워서 뭔 소린지 모르겠으나 '좀 있어보이고 현란하긴 하네.'할 때 쓰는 말이다.


3. 라이트노벨 <언젠가는 대마왕>에 나오는 비행항공모함[편집]


파일:attachment/Genkaku.jpg

玄鶴. 전체 크기가 350M나 되는 제국군의 거대 비행항공모함(근데 외형은 전투순양함에 가깝다.)으로 1개 여단 2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움직이는 비행요새이다.

무장은 갑판 위에 위치해 있는 장거리포와 현학 내부에 대기해 있는 공중전부터 폭격까지 전부 실행할 수 있는 비행형 강화복을 입은 정예 낙하산 부대 2000명으로 그들 한 사람 한사람은 경우에 따라서는 포대로서도 기능한다.

스스로 에너지를 만들 수 있는 엔진을 가졌으며 그 동력과 마나를 내부에 함께 구비하고 있기 때문에 마나의 살포가 불가능한 지역에 출격할 수 있다.

5권 초중반부에서 마왕 사이 아쿠토와 그의 사역마 흑룡 피터하우젠을 막기 위하여 그들에게 공격을 가했지만 결국 오히려 그들에게 간단히 농락당한 후 5권 중후반부에 아쿠토에 의하여 파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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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흔히 말하는 동양판타지 외형을 가지고 있고 거의 같지만 정확하게 일치하지는 않는다. '현환'의 '현'이 의미하는 바를 모르고 '현환소설'이라는 용어만 알고있으면 장르의 정체성을 파악하기 어렵다.[2] 당시에는 유교조차 삼국지에서 알 수 있듯, 한은 화기를 타고 났으니 어쩌구, 다음 정권은 목기가 흥성한 어디 땅에서 날 것이다 등 미신적 요소가 다분했으며 이를 그럴싸한 명분으로 여겼다.[3] 물론 세상을 넓게 볼 줄 아는 식자층 입장에서의 얘기다. 난세인 만큼 평민들의 사회에는 혹세무민의 무리가 기승을 부렸고, 설화나 민담, 신화, 괴담, 뜬소문, 풍물상, 기이한 사건사례 등을 취합한 이른바 소설류(현대의 그것과는 의미가 다르다)도 발달했다.[4] 그래서인지 위진시대에는 하안으로 대표되는 현학이나 왕숙으로 대표되는 왕학이나 정현의 학설과는 대립하는 위치에 있었다. 물론 하안의 경우에는 정현의 주석을 다수 수용하여 본인이 주석을 단 만큼 무조건 아주 대립되는 위치라고는 볼 순 없다.[5] 죽림칠현의 일원 중 하나인 혜강을 아버지로 둔 혜소는 서진의 2대 황제 사마충을 지키다가 죽었다. 즉 충(忠)을 실현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