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순옹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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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종의 왕녀
혜순옹주 | 惠順翁主


혜순옹주와 광천위 김인경의 합장묘 전경
출생
1512년 2월 22일(음력 1월 25일)
사망
1584년 1월 16일
(음력 1583년 12월 4일) (향년 72세)
능묘
혜순옹주묘[1]
양근군 북평리(楊根郡 北坪里)
(現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신복리 산2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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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전주 이씨

철환(鐵環)
부왕
중종
생모
경빈 박씨
부군
광천위 김인경
(光川尉 金仁慶)
자녀
양자 - 김호수(金虎秀)[1]
봉호
혜순옹주(惠順翁主)

1. 개요
2. 생애
3. 가족 관계



1. 개요[편집]


조선 중종의 서장녀. 경빈 박씨의 소생으로 작서의 변으로 인하여 어머니와 오빠를 잃은 비운의 인물이다.

2. 생애[편집]


옹주가 태어났을 당시 어머니 경빈 박씨에 대한 중종의 총애는 절정을 달리고 있었다. 중종의 여자들 중 가장 먼저 아들을 안겨준 데다가 후궁 중 가장 빨리 품계가 올라 정1품 빈으로 책봉되었던 것이다.

중종 16년(1521) 옹주가 10세 되던 해에 3세 연하의 호조 참의 김헌윤의 아들 김인경을 부마로 맞이하여 가례를 올렸다. 그러나 혼인 6년 만인 중종 22년(1527) 궁중에서 작서의 변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경빈 박씨가 한 일로 의심받았는데, 명확한 근거가 있어서라기보다는 그나마 범인이 아닐까 의심해볼 만한 사람이 박씨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심문 과정에서 경빈 박씨가 부리던 궁녀 범덕의 발언이 꼬투리 잡혔고, 당시 왕대비였던 정현왕후가 박씨를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한 것 또한 박씨가 벌을 받은 한 가지 요소가 되었다. 이때 혜순옹주의 여종들도 추국했는데 제대로 자복하는 이는 없었다.

혜순옹주(惠順翁主)를 모시는 계집종 모이강(毛伊姜)·자귀(者歸)·귀인(貴仁), 경빈(敬嬪)의 방자(房子)와 비자(婢子)인 사비(四非)·춘월(春月)·덕복(德福) 등에게 인형(人形)을 만들어 참형을 시행한 일과 쥐를 지진 일에 대해 추문하면서 한 차례 형신(刑訊)을 가했으나 자복하지 않았다.

중종실록》 중종 22년(1527) 4월 15일


그로부터 다시 6년이 지나 중종 28년(1533)에 '가작인두의 변'이 일어났다. 이때부터 옹주의 고난이 시작되었다. 지난날 목숨만은 건졌는데, 이번에는 경상도 상주 지방으로 유배[2] 가 있던 어머니 경빈 박씨와 오빠 복성군이 사약을 받았고, 옹주 자신은 폐서인의 신분이 되어 남편 김인경과 함께 변방으로 귀양을 떠났다. 그나마 중종은 관에서 생활비를 대어주고 생활이 어렵지 않도록 도와주라고 하였다.[3]

중종 36년(1541) 세자가 복성군의 딸[4]과 작서의 변에 연루되어 벌을 받은 친족들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상소하였다. 이때 혜순옹주가 상언을 올렸었는데, 그 내용을 보면 중종의 배려와는 달리 실제 생활은 매우 어려웠던 것 같다.

계사년(1533) 5월에 폐해져서 서인(庶人)이 되고 그 해 8월에 밖으로 쫓겨났다가 정유년(1537) 10월 홍여(洪礪)의 일에 연좌되어[5]

속적(屬籍)에서 삭제되었으니, 이는 법률 밖의 일로서 여러 간흉들이 혹독한 법으로 얽어맨 것이므로 모든 사람들이 다같이 분통해 합니다. 근년 이래로 국가에 경사가 있어 여러 번 사면의 은혜를 내렸는데, 애매하게 폐서인이 된 이 딸만은 천은(天恩)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제 흉년이 들어 살아가기가 어려우니 애절하기 한이 없습니다. 선원(璿源)의 후예로 평민들과 같이 지낸 지가 이제 9년입니다. 특별히 은명(恩命)을 내리어 원통함을 풀어 주소서.

《중종실록》 중종 36년(1541) 11월 9일


중종은 옹주의 속적을 회복시켜 직첩을 돌려주고, 부마 김인경도 직첩을 주어 서용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미 어머니와 오빠를 잃은 뒤였다. 선조 16년(1583) 12월 4일 혜순옹주는 72세로 세상을 떠났다.


3. 가족 관계[편집]


  • 부왕 : 중종(中宗, 1488 ~ 1544)
  • 생모 : 경빈 박씨(敬嬪 朴氏, ? ~ 1533)
    • 오빠 : 복성군 이미(福城君 李嵋, 1509 ~ 1533)
    • 여동생 : 혜정옹주 이석환(惠靜翁主 李石環, 1514 ~ 1580)

  • 남편 : 광천위 김인경(光川尉 金仁慶, 1515 ~ 1583) - 경녕군의 외5대손[8]
    • 양자 : 김호수(金虎秀) - 시동생 김원경(金遠慶)의 아들
    • 며느리 : 이정숙(李正淑, 1550 ~ ?)[7]
      • 손녀 : 김기영(金奇迎, 1570 ~ ?)
      • 손녀 : 김귀영(金貴迎, 1574 ~ ?)[6]
      • 손자 : 김상복(金尙復, 1576 ~ ?)
      • 손자 : 김상일(金尙一, 1578 ~ ?)
      • 손자 : 김상중(金尙中, 1581 ~ ?)
      • 손자 : 김상양(金尙養, 1582 ~ ?)
      • 손자 : 김상렴(金尙濂, 1584 ~ ?)
      • 손자 : 김상명(金尙明, 1586 ~ ?)
      • 손녀 : 김복영(金福迎, 1588 ~ ?)
      • 손자 : 김상회(金尙晦, 1589 ~ ?)
      • 손녀 : 김녹영(金祿迎, 1590 ~ ?)
    • 며느리(측실) : 노비 대금(大今)
      • 서손자 : 김상범(金尙范, 161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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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양평군 향토유적 제38호[2] 경빈 박씨의 아버지 박수림이 상주 지방의 사족이었으므로 친정으로 내려가게 한 것이다.[3] 중종실록 중종 28년(1533) 7월 20일 6번째 기사# [4] 복성군이 군부인 파평 윤씨 사이에서 낳은 딸로 나중에 유학 최예수와 혼인했다.[5] 홍여가 옥사한 가작인두의 변은 중종 28년(1533 계사)에 일어났고 혜순옹주가 폐서인된 시기도 그때이다. 당연히 속적에도 그때 삭제되었을 것이다. 혜순옹주가 중종에게 올린 글에서 자신이 정유년(중종 32년 1537)에 홍여의 일에 연루되어 속적에서 삭제되었다 함은 착각이거나 오기인 듯하다.[6] 장렬왕후의 큰어머니.[7] 의천군(義泉君) 이인(李仁)의 딸로, 완원군의 증손녀.[8] 경녕군 → 영선도정 이리 → 박수견의 처 이씨 → 김극개의 처 박씨 → 김헌윤 → 김인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