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제(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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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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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제2대 황제
효혜황제 | 孝惠皇帝


파일:한혜제.jpg

출생
기원전 210년
패현 풍읍 중양리
(現 장쑤성 쉬저우시 페이현)
즉위
기원전 195년 6월 1일
전한 장안 미앙궁
(現 산시성 시안시)
사망
기원전 188년 9월 26일 (향년 23세)
전한 장안 미앙궁
(現 산시성 시안시)
능묘
안릉(安陵)
재위기간
전한의 황태자
기원전 202년 2월 24일
~ 기원전 195년 6월 1일
전한의 황제
기원전 195년 6월 1일
~ 기원전 188년 9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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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
유(劉)

영(盈)
부모
부황 태조 고황제
모후 고황후 여씨
형제자매
8남 1녀 중 차남
배우자
효혜황후
자녀
8남
시호
효혜황제(孝惠皇帝)

1. 개요
2. 생애
3. 미디어 믹스
4. 둘러보기



1. 개요[편집]


한(漢)나라의 제2대 황제. 휘는 영(盈). 고제 유방의 차남이자 적장자다.[1] 시호는 효혜황제(孝惠皇帝).


2. 생애[편집]


진시황 37년(기원전 210년)에 패현에서 태어났다. 유방이 한왕이 되었을때 혜제는 겨우 5살 정도. 어린 시절에는 항우에게 패해 도망가던 아버지에 의해 마차에서 집어던져진[2][3] 적도 있지만 하후영 덕택에 목숨을 구하기도 했다. 그래서 장성해서도 생명의 은인인 하후영을 극진히 대우했다고 한다.

유방이 만년에 혜제가 연약하니 폐하고, 대신 척부인의 아들 조왕 유여의를 태자로 봉하려는 뜻을 비치기도 했지만 전혀 명분이 없었고, 오히려 괴팍한 유방과 대비되는 다정한 성격의 혜제는 많은 사람들이 흠모했기 때문에[4] 대신들이 격렬히 반대하여[5] 무사히 황제에 오른다. 즉위 초에만 해도 약간 어수룩해서 숙손통에게 까이기는 했어도[6] 바지사장이라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문제는 얄궂게도 태자 시절의 정적이자 이복동생인 유여의의 처분에서 발생했다. 척부인에게 앙심을 품은 여후는 고제가 죽자 척부인을 가두고 유여의를 죽이려고 했는데, 혜제는 이걸 원치 않았기 때문.

일단 여후는 조왕으로 가 있던 유여의를 장안으로 소환했는데, 이런 어머니의 생각을 꿰고 있던 혜제는 유여의와 계속 한 자리에서 함께 먹고 자면서 보살폈기 때문에 여후는 독살이나 암살의 기회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기원전 195년 12월, 혜제가 아침 일찍 사냥나간 사이 잠들어 있던 유여의를 죽이고 그 어머니 척부인삭발하고 빨간 옷을 입힌 후에 방아를 돌리게 하다가 나중에는 을 뽑고 , , 을 모두 자르고 벙어리가 되는 약을 먹이고 뒷간에 던져서[7]이것을 '인간 돼지'라고 부르며. 무슨 생각이었는지 유여의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 혜제에게도 이 꼴을 보여주었다. 혜제는 처음에는 워낙 처참한 몰골이었기에 척부인임을 못 알아보다가 사람들로부터 그녀가 척부인이라는 것을 듣고는 대성통곡했고, 사람을 보내 여후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사람이 할 짓이 아닙니다. 태후마마의 아들인 저 또한 다시는 천하를 다스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 사기 여태후본기


충격을 받은 혜제는 1년 정도 병상에 누워있다가 병이 나은 뒤에도 상심하여 주색에 빠져 자연 몸이 상하고 말았다. 심지어 여후는 아들이 1년이 지나서 기껏 일어나자 이번엔 혜제의 눈앞에서 서형 제도혜왕 유비를 독살하려고 했다. 일부러였는지, 우연이었는지 혜제가 독주를 대신 마시려고 한 탓에 실패했지만 안 그래도 아끼는 이복 동생이 독살당한 마음의 상처가 큰 혜제에게 이게 나쁜 영향을 줬으면 줬지 좋은 영향은 못 줬을 것이다. 본격적인 칩거생활에 들어간 후 장안에 계속 성을 쌓았다가 말았다가 하느라 제위 원년에 건축을 시작한 성이 5년 만에 완성되었다. 기원전 188년 8월, 결국은 재위 7년 만에 23세의 나이로 장안 미앙궁에서 사망하고 9월에 안릉에 안장되었다. 반성이었는지는 몰라도 여후는 혜제가 생전에 품었던 뜻을 지키겠다면서 삼족죄와 요언령을 폐지했다. 그의 황후 장씨는 장이의 아들 장오와 노원공주의 딸인데 노원공주가 그의 친누나였으니 장씨는 그의 외조카가 된다. 철저히 여후에 의한 정략 결혼이었으며 혜제가 총애하지 않아서인지[8] 둘 사이에서는 소생이 없었다[9]. 후궁들과의 사이에서 일곱 아들이 있었다고 하지만 혜제의 친아들인지 불명확하며 그중 둘은 황제가 되었지만 요절한 둘을 제외하면 모든 아들들이 한문제 즉위 후 처형되었다. 만 22년밖에 못 산 사람이 아들을 일곱이나 낳았다고 하면, 수상하다고 볼 수도 있긴 한데 몸이 망가질 정도로 주색에 빠졌다면 또 모를 일이다. 애초에 척부인 모자 사건으로 쇼크를 받은 후로도 5년 가까이 더 살았다. 의외로 독신세를 추진하는 등[10] 유방보다 인구증가 정책에 더욱 적극적이었으니 솔선수범했을지도.

친아버지에게 홀대받으며[11] 지내다가 정작 자신을 지켜줬던 어머니로 의해 폐인이 되어 요절한 불행한 인물. 이제 막 창업된 새로운 제국 한나라의 기틀을 다져야 할 역할이 있었던 2대째의 황제로는 다소 적합하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상술되었듯 유방 역시 척부인을 총애한 것도 있지만, 일단 대외적으로 내세운 이유는 혜제가 성격이 여려서 믿음직스럽지 못한다는 것이었고, 행적을 보면 확실히 말 자체는 틀리지 않았던 듯하다. 사실 여후도 혜제의 성격이 약하다는 점에서는 동의했는데, 유방이 영포 토벌군 대장으로 혜제를 보내려고 하자 "이리같은 장수들이 양같은 그 아이의 말을 듣겠습니까? 차라리 황상께서 나가 마차에 누워계시는 편이 낫습니다." 같은 말을 했다. 심지어 이때 유방은 병치레 중이었다. 자기 자리를 위협할 요소가 컸던 유여의를 지켜주려고 했다거나 척부인의 처참한 몰골을 보고 대성통곡한 행적을 볼 때 난세를 지내서 인간적이지만 한편으론 비정한 면도 있었던 아버지 유방이나 역시 표독스러웠던 어머니 여후의 친자식임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여린 성격이었고, 인간됨은 정말 좋은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치를 해야 하는 집안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어쩌면 이렇게 불행한 삶을 살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니 애초에 이런 어진 성격으로 대신들의 지지도 받고 있던 황제였으니 모친이 본인에게 정치를 맡기고 뒤에서 지지만 해줬어도 이런 꼴은 안났을 것이다.

다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고, 모친의 폭주에 괴로워하면서도 그래도 명목상 실권은 있던 황제는 황제인지라 여후의 폭주를 막기 위해 나름대로는 고군분투했다. 혜제 재위기간 동안 여후가 본격적으로 움직인 것은 위에서 설명한 유여의와 유비 암살 사건인데 이 둘은 사실 핑계거리가 좋았고 여씨일족도 큰 활약을 보이진 못했다. 한 예로 여후가 총애했던 심이기가 여후와 불륜을 저질렀다는 말이 나오자 머리 끝까지 화가 난 혜제가 심이기를 죽여버리려고 한 적이 있는데 자신의 심복이 곤경에 처했음에도 여후도 차마 대놓고 거스르진 못했다.

실제 여후의 꼭두각시 아니었냐는 식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재위 상당기간 꾸준히 정무를 봤다. 심지어 인간돼지 사건의 트라우마로 앓다가 죽었다는 묘사와 상반되게 유여의가 죽은 지 1년 후에도 조참을 상국으로 삼고 국가 운영에 관심을 보였다는 언급이 있다. 한서 혜제기에서도 관례를 치르면서 대사면령을 내리거나, 협서율을 폐지하고 독신세를 추진하면서 유방보다 더욱 강경하게 인구증가를 노리는 등 행적이 적긴 하지만 분명 일은 한 것으로 보이기에 무한정 칩거한 것인지는 의문이 든다는 의견도 있다. 반대로 말하면 상심한 이후에도 성격이 성격인지라 황제의 의무를 완전히 저버리진 않았다고 볼 수도 있겠다.

후사를 두지 못했으므로[12] 그의 뒤는 여후가 데려온 소제가 잇게 되었고 명분상으로도 여후가 섭정을 하면서 실권을 잡게 된다.

3. 미디어 믹스[편집]



3.1. 고우영 십팔사략[편집]


후한시대의 시작을 여는 전권(專權)에 등장. 수염이 없는 청년의 모습으로 나오며 혜제가 등장하기 전 암탉은 크게 우는데 수탉은 기가 죽어있는 장면이 나오며 처음으로 언급된다. 어머니 여태후가 척부인를 '인간돼지'로 만든 걸 보여준 충격으로 인해 인간사에 환멸을 느꼈으며 이 때문에 정사에 진절머리가 나 매일매일 주색만 일삼는다.

여태후는 이런 혜제가 얼마 안되 죽을 것이라 보였는지 한나라를 여씨 천하로 만들기 위해 자신의 손녀와 혜제를 부부로 짝지어 두려고 했고 혜제는 누나 노원공주의 딸을 아내로 맞이한다. 하지만 그녀는 아이를 낳으려면 아직 한참 남은 소녀였기 때문에 여태후의 바람처럼 아이를 낳지 못했다. 아직 한참 임신하기에는 한참 남은 소녀였기에 여태후는 그 소녀의 배에 누비솜을 칭칭감았고 한 달뒤에는 더 도톰한 솜뭉치를 칭칭 감았다. 노원공주의 딸은 임신한 궁녀의 배와 거의 비슷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녀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궁녀가 아이를 낳았고 여태후는 그녀의 솜을 빼어 혜제의 아들 인 것 처럼 만들었고 아이를 낳은 궁녀는 살해되고 시신은 버려졌다.

이후 별 탈없이 태자가 즉위할 것 처럼 보였지만 궁녀들이 본래 친엄마는 무참하게 죽었다고 소문을 퍼트리자 태자는 여태후에게 복수를 다짐하며 혜제가 죽으면 여태후를 죽이겠다고 다짐한다. 하지만 이것을 눈치챈 여태후는 태자에게 찰떡을 먹여 독살했고 혜제는 이 소식을 듣고 술에 취해 울기만 하다 얼마안되 사망한다.

비록 주색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았지만 믿었던 여태후의 행동으로 인해 몸을 망치고 끝내 23세의 나이로 요절한 비운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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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정군
왕망




[1] 제왕 유비(전한)는 장남이었지만 서자였다.[2] 아이들이 있으면 자기가 타고 있던 마차가 무거워서 마차의 속도가 나지 않는다고 집어던진 것이다. 머나먼 후손그 아들을 투척한 일화와 비슷한 듯 하나 다른 일화. 후손이 한 행동은 훌륭한 장수의 죽음을 걱정했기 때문이나 이 아버지는 자기가 살기 위해서 한 짓이다. 유방이나 한나라 입장에서 볼 때 어쨌든 유방이 살아남는 게 중요했을 테니 이해는 할 수 있지만, 후대에서 윤리철학적 논쟁을 신나게 펼쳐 볼 수 있을 만한 이야기.[3] 유방이 혜제를 비롯한 자식들을 내버리고 도망치려고 한 건 사실인데 달리는 마차에서 강제로 떨어지면 사지가 멀쩡하기 힘든데 혜제는 몸 어디에 장애가 있다거나 마차에서 떨어진 후유증에 시달렸다는 말도 없다. 그래서 실제로는 처음에 자식들을 마차에 못 타게 하고 자기만 타고 가려다 하후영이 목숨 걸고 말리며 유방의 자식들도 태워 탈출한 것을 과장 및 와전한 게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4] 상산사호가 유방이 찾을 땐 도망만 치다가 여후가 부르니 나선 이유도 유방은 입이 하도 걸고 선비를 업신여기기로 소문이 자자해서 따라봤자 욕만 먹을 것 같았지만 혜제는 인자하고 효자라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5] 당시 태자태부이자 한나라의 예법을 만들었던 숙손통이 "굳이 태자를 폐하고 새로 세우시겠다면 이 몸을 죽여 그 목의 피로 이 바닥을 더럽혀달라"고 반대할 정도였다.[6] 여후에게 문안을 갈 때마다 백성들에게 민폐가 간다고 건물을 연결하는 복도를 깔았는데, 이 복도가 유방의 무덤터 위를 가로지르는 바람에 뭐하는 것이냐는 소리를 들었다.[7] 변소에 넣었다고 해서 옛날의 재래식 변소를 생각하면 안 된다. 당시 중국의 뒷간은 돼지 우리를 겸하고 있었다. 돼지 우리 옆에 약간 높게 용변을 볼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놓고 사람이 계단을 밟고 올라가 용변을 보면 그것을 아래 돼지 우리에 있던 돼지가 들어와서 먹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척부인을 여기의 돼지 우리 부분에 넣었다고 봐야지 재래식 변소 구덩이에 사람을 빠뜨렸다면 독소 때문에 사람은 몇 시간도 못 되어 죽어버린다. 물론 변소가 아니라고 해서 여후의 사악함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지만...[8] 혜제 성격에 조카를 차마 범할 수 없어서 총애하지 않았다는 말도 있다.[9] 이게 실책이었다. 여후가 혜제의 자식을 모조리 적자라고 하면서 정통성에 흠이 갔기 때문.[10] 30세 이상의 미혼녀가 있는 가정에는 인두세를 다섯 배로 거뒀다.[11] 사실 홀대받았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물론 팽성 전투에서 일이 있긴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특수한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었고 평소때도 그렇게 구박받았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후 제대로 태자로 책봉되어 그 역할을 수행했으며 이때 아버지인 고제가 반대했다는 말도 없다. 혜제를 폐할 논의를 했다고는 하지만 제대로 공론화된 것도 아니었고 혜제의 탓이라기보다는 그 어머니인 여후의 탓이 더 크다.[12] 여씨 피를 이은, 보다 구체적으로는 친누나 노원공주의 딸이자 여후의 외손녀가 되는 장황후 사이에서 적자를 생산하지 않았고 후궁들과의 사이에서 여러 아들을 보았다고는 하지만 서자라고 할지라도 황제의 씨인데 그들의 본말을 정확하게 알 수가 없고 또한 3대 전소제가 혜제와 후궁 사이의 아들이라는 추측이 있으면서 다시 그조차 의심스럽게 여겨지므로 이것 또한 정확히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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