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종(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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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제2대 국왕
혜종 | 惠宗

파일:혜종왕릉.jpg
순릉 전경
출생
912년 (수덕만세 11년)
태봉 나주 목포 장화왕후의 사저
(現 전라남도 목포시)
즉위
943년 7월 5일
고려 개경 개주 정궁
(現 경기도 개성시 만월동)
사망
945년 10월 23일 (향년 33세)
고려 개경 개주 정궁 중광전
(現 경기도 개성시 만월동)
능묘
순릉(順陵)
재위기간
고려의 정윤
922년 1월 10일 ~ 943년 7월 4일 (21년 6개월)
고려 제2대 국왕
943년 7월 5일 ~ 945년 10월 23일 (2년 3개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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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개성 왕씨

무(武)
부모
부왕 태조
모후 장화왕후
형제자매
25남 10녀 중 장남
왕후
의화왕후
자녀
2남 3녀
종교
불교

승건(承乾)
묘호
혜종(惠宗)
별호
태종(太宗)
시호
인덕명효선현의공대왕
(仁德明孝宣顯義恭大王)
경헌고평선현명효의공대왕
(景憲高平宣顯明孝義恭大王)[1]


1. 개요
2. 묘호와 시호
3. 생애
3.1. 탄생 설화
3.2. 즉위 전
3.3. 즉위 이후
3.4. 사망
4. 가족관계
5. 기타
6. 태묘 악장 및 추시문
7. 대중매체



1. 개요[편집]


우리 태종대왕(太宗大王)[1]

께서는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고 비바람을 맞아가며 전쟁터에서 성조(聖祖)[2]를 따라 백성들을 도탄에서 구하셨나이다.

《고려사》 권24 <세가> 권 제24 고종(高宗) 41년(1254년) 10월 19일 무자, 강도서 태묘 제사를 지낼 때 올린 <책문> 中에서


고려의 제2대 대왕. 묘호는 혜종(惠宗), 시호는 의공대왕(義恭大王). 휘는 무(武), 자는 승건(承乾). 후백제에서 태봉으로 전향한 나주인 장화왕후 오씨 소생으로, 태조장남이자 공인된 후계자였다.

'무'(武)라는 휘처럼 대단한 전투력을 가진 군인이자 장군이었다. 자신을 시해하려고 침소에 날카로운 검을 들고 난입한 자객들을 검을 쓰지 않고 맨주먹만으로 때려잡은 일화가 있을 정도. 10대, 20대 시절엔 왕건을 따라 여러 전쟁터를 누비며 후삼국 통일에 많은 무공을 세우기도 했다. 이는 군인이었던 조선 정종과 닮은 점이기도 하다. 그는 왕건의 고려 창업과 통일 대업에 전공을 세웠던 굳센 무장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짧았던 재위 기간과 미약한 권력으로 인해 현대에 와서 나약한 임금이었다는 오해를 자주 받곤 한다.

하지만 태조 왕건의 적통을 이어받아 제위에 오른 혜종의 위상은 남다른 바가 있었다. 먼 방계 후손인 예종공민왕이 제작한 <태묘악장>(太廟樂章)에서 혜종은 어느 제왕들보다 칭송을 받기도 했다. 세간의 평가와는 별개로 그의 성품은 전쟁영웅답게 호방하고 관대했으며 지적 능력도 갖췄다. 한편으로는 본인을 시해하려는 암살 시도들이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나자 이후 성격이 극도로 날카롭고 예민해지면서 조울증이 의심되는 증세도 보였다고 한다.


2. 묘호와 시호[편집]


공식 묘호는 혜종(惠宗)[3]이다. 혜종은 태조의 공인 후계자란 나름의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제6대 성종 대에 고려 왕실의 태묘(太廟)를 건설했는데, 이 때 왕조를 세운 태조는 기본적으로 불천위에 모셔졌고, 태조 이외에도 왕조의 멸망을 막거나 흥성(興盛)을 가져오는 등 왕조에 크나큰 공(功)과 덕(德)이 있는 임금들의 경우에는 종묘에서 옮기지 않고 계속 제사를 지내는 불천위에 올랐다. 성종이 5묘제를 시행하였지만 여러 변화를 거치며 기틀을 갖추기 시작한 건 세월이 흐른 후였다. 중국의 경우도 건국 초기에는 7묘를 채우지 못하였다.

제16대 예종 대에 이르러서도 '불천지주'(不遷之主)는 원래 모셔진 태조 한 분뿐으로, 혜종은 태조를 도와 고려를 세운 분이자 태조로부터 직접 왕위를 물려받은 후계자로서 실질적인 불천지주로 태묘에 모셔지고 있었는데, 제17대 인종이 자신의 아버지인 예종을 태묘에 모시기 위해 혜종을 태묘로부터 옮기는 일이 발생했다. 신하들은 혜종이 민(民)에 대한 공덕이 있으므로 백성들이 슬퍼할 것이라며 이는 예법에도 어긋난다고 반대했다. 인종이 굳이 반대를 무릅쓰고 아버지 예종을 위해서 혜종의 신위를 옮긴 이유는 다음과 같다.

5묘제는 '태조+2소+2목'이라는 복잡한 체계를 바탕으로 했다. 그런데 혜종을 천묘하지 않고, 인종의 직계가 아닌 덕종, 정종, 순종, 선종 등을 천묘하면 '3소+2목'이 되었다. 따라서 혜종을 천묘하여 2소+2목을 맞추려 했던 것이다. 즉 불천지주로 인식되던 혜종을 천묘한 것은 5묘 9실제를 고수하려 했기 때문이다.

다시 제18대 의종 대에 이르러 불천지주로서 혜종의 신주가 태묘에 부묘되니, 태조, 혜종, 현종을 불천지주(不遷之主)로 삼고, 문종, 순종, 선종, 숙종, 예종, 인종을 모셔 '7묘 9실제'로 개정했다. 의종이 개정한 7묘 9실제는 제21대 희종 대를 거쳐 제23대 고종 대까지 계속 유지되었다.

희종 대에도 혜종과 현종의 신위에 대하여 논의가 펼쳐졌다. 혜종은 태조의 정윤으로서, 현종은 중흥군주로서 모두 지위가 높았기 때문에 결국 희종은 혜종, 현종을 전한 태종, 전한 세종에 비유해 모두 불천위로 공인했다. 그래서 고종 41년 강도서 태묘 제사를 지낼 때 올린 <책문>엔 혜종을 '태종대왕'(太宗大王)이라 칭했다.

혜종대왕의 시호는:
  • 《고려사》 <혜종 세가> -총서-:
인덕명효선현의공대왕(仁德明孝宣顯義恭大王)

  • 《고려사》 <혜종 세가> 마지막 조:
경헌고평선현명효의공대왕(景憲高平宣顯明孝義恭大王)

혜종의 대표 시호는 동생 정종이 올린 '의공대왕'(義恭大王)이다.


3. 생애[편집]



3.1. 탄생 설화[편집]


조선 세종대왕 때에 저술된 《고려사》에 따르면 어머니 오씨는 <시냇가 빨래터 설화>의 시초가 된 인물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왕건이 나주를 점령한 뒤 한 시냇가를 지나게 되었는데 마침 오씨가 그 곳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뒤에는 무지개가 펼쳐져 있었다고 한다. 우연히 보게 된 오씨가 맘에 든 왕건은 그날 밤 그녀와 동침하였다. 그러나 미천한 신분의 오씨를 임신시키지 않기 위해 왕건은 깔고 누운 돗자리에 질외사정을 하였다. 하지만 왕건의 됨됨이를 살폈던 오씨는 그가 돗자리 위에 사정한 정액을 손으로 쓸어 모아 그것을 자신의 에 넣었다. 그렇게 해서 낳은 아들이 바로 혜종이었다고 전해진다.

이는 야사가 아닌, 물론 조선 사관의 기준이지만 그래도 비교적 객관성을 지향했음을 보이려는 정사 《고려사》에 엄연히 기록된 일화다. 하지만 과학적으로 이런 식으로 임신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가능성이 0%는 아니지만 이런식으로 임신되기는 매우 어렵다. 정상적으로 질 내부에 삽입하여 나름 높은 압력으로 사정을 해도 여성 질 내부의 보호 시스템 때문에 정자들이 난자가 있는 나팔관까지 살아 들어가는 확률은 매우 낮다. 실제로 남녀 모두 문제가 없음에도 쉬이 아기가 생기지 않는 부부를 보면 이런 과정에서 정자가 미리 다 죽어버리는 경우가 꽤 있다. 그런데 돗자리에 흘린 정액을 질안에 넣어서 임신을 하기란... 차라리 이쪽보다는 성관계 중 나온 쿠퍼액에 의한 임신이 좀 더 유력한데 이것도 이론상으로는 가능해도 실제 사례는 매우 적다. 이런 일을 왕건 본인이나 오씨 부인이 다른 사람에게 얘기했을 가능성도 지극히 낮기 때문에 혜종의 정통성을 깎아내리려는 목적으로 서술된 이야기로 강하게 추측되고 있다.

왕건과 오씨 부인을 제외한 그 누구도 그날 밤에 있었던 일을 알 리는 없을 텐데 이러한 일화가 조선 세종대왕 시대에 활동하던 학자들이 《고려사》를 편찬할 때 저본으로 삼았던 사료에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고려 시대에는 이러한 이야기가 입에서 입을 통해 주변에 널리 퍼져 있던 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혜종 사후 이복동생 정종이 즉위하자 일어난 '왕규의 난'이 《고려사》에서 볼 수 있는 승자에 의해 왜곡된 대표적인 사례들 중 하나로 언급되는 걸 보면 혜종의 정통성을 깎아내리는 목적에서 이뤄진 서술로 볼 개연성이 매우 높다.

당시 고려 왕실의 권력 다툼은 꽤 치열했다. 제4대 광종은 동복 형제 정종의 아들, 즉 자신의 친조카인 경춘원군을 처형시켰는데 이때 이복 형제인 혜종의 아들이었던 흥화궁군도 함께 처형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으로 미루어 봐도 결과론적으로 형제 상속이지만 원칙은 태조 왕건으로부터 시작된 장자 승계라는 걸 알 수 있으니 정종과 광종의 왕위 계승 정통성에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어쨌든 중요한 점은, 이러한 설화가 사실이었는지 아니었는지가 역사라기보다는 이러한 이야기가 회자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갖가지 배경을 포함한 역사라는 점이다. 이를 통해 살펴볼 수 있는 배경은,

  • 첫째, 아무도 혜종의 혈통을 의심하지는 않았다는 것. 저 설화가 만약 사실이라면 왕건은 출신이 천한 오씨와 자식을 만들 생각이 없었는데 오씨 혼자 몰래 수를 썼다는 얘기다. 그랬다면 훗날 오씨가 아이를 낳았어도 왕건은 확신이 없었을 것이고 쟁쟁한 호족들이 포진한 왕실은 "웬 듣보잡 계집이 임금을 우롱한다."고 우기고 그 아들을 무시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없었다. 왕건은 혜종을 어린 나이에 일찌감치 왕위계승자인 정윤으로 세우고 이후 승하할 때까지 단 한번도 이를 바꾸지 않았다. 또한 왕건의 29명의 아내 중 셋 밖에 없는 왕후에 오씨가 두 번째로 포함된다. 이것은 왕건이 정말로 오씨와 자식을 얻기 위해서 동침했고, 마땅히 오씨도 자기 아내, 그것도 격이 높은 부인으로 여겼어야 맞아떨어진다. 그러니 오씨의 아들을 당연히 자신의 정통성 있는 맏아들로 여기고 많은 아들이 더 있음에도 혜종을 태자에 앉힌 것이다.

  • 둘째, 아무도 혜종을 이런 이유로 욕하지 않았다. 실제로 저런 일이 있었다면 오씨의 행위는 수군거림의 대상으로는 충분하고, 그렇기에 아들인 혜종에 대해서도 "저런 엄마의 아들이 다르겠어?"라고 재위 전후 두고두고 욕을 먹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에는 이런 정황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즉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에 이에 대한 기록이 딱히 없다는 건 저 설화가 정종 혹은 광종 등 후대가 혜종의 정통성을 폄하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뒤늦게 만들어낸 동떨어진 이야기, 아마도 어머니의 세력이 상대적으로 약했을 뿐 정통성엔 아무런 문제 없는 왕위계승자였다는 방증으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다른 설화엔 태몽이 꿈이었기 때문에, 물을 좋아하는 용의 성격을 참조하여 수태기를 느낀 오씨 부인은 잠자리 곁에 한 바가지의 물을 떠 놓고 항상 손을 적신 채 잤다고도 전해진다. 반면 왕건이 돗자리에 사정한 정액을 오씨가 자신의 몸에 주워넣음으로써 그를 수태하였으므로, 혜종의 얼굴은 돗자리처럼 자글자글하게 주름살이 져서 '주름살 대왕' 혹은 '주름살 폐하'가 그의 별칭이었다고 한다. 돗자리 특히 화문석을 '왕골자리'라고도 부르는데 이로부터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용이라는 왕을 상징하는 태몽, 무력이 뛰어나다는 평가의 반면에도 감히 왕에 대한 용모 평가를 그렇게 자세하고 모욕적으로 퍼뜨리는 건 왕을 우습게 보는 세력이 작위적으로 개입했을 정황이 보인다.
세종대왕은 분영갱상(焚影坑像), 즉 전국 각지에 있었던 고려 역대 군주들의 어진과 조각상들을 불에 태우거나 땅에 묻으며 고려 왕조를 지워버리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했던 군주다. 그런 세종대왕이 《고려사》(高麗史)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고려 왕들의 일화들 중에 민망한 내용들이 너무 많자 비록 전 왕조이지만 왕조의 위신이 너무 깎인다고 여겨 민망한 내용들은 삭제를 명했다. 고려는 남녀 혼탕이 자연스러웠을 정도로 조선에 비해 성적으로 꽤나 개방적인 나라였다. 그래서 유교의 나라 조선에서는 민망하고 감추어야 할 만한 내용들이 버젓이 기록된 경우도 있다고 한다.
유독 혜종의 경우, 태조 왕건과 장화왕후 오씨의 민망한 내용을 남겨둔 것은 훗날 혜종이 불천지주에 오르며 고려 왕조의 왕통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것과 마치 '무(武)'가 고려 왕조의 전유물인 것처럼 이 글자를 피휘하는 왕이므로 훗날에도 어느 정도 폄훼하려 했기 때문으로 볼 수도 있다. 세종대왕은 '분영갱상'을 일으키면서 이안관 장득수(張得修)를 전라도 나주로 보내 사당에 모셔져 있던 혜종의 어진과 소상을 옥교자에 모시고 개경으로 가져가 땅에 묻었다. 즉 혜종은 저런 설이 나돌았음에도, 혹은 '나돌아야만' 했을 정도로 상당히 중요도 높은 왕이었다.

  • 셋째, 혜종의 탄생 설화가 이 지경이 된 데는 혜종의 후손이 결국 왕통을 잇지 못한 사실 외에도 외가인 나주 오씨, 그 외 혜종의 처가와 인척, 가까운 비호 세력들이 그 후로도 별 힘을 못 썼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나주 오씨 세력이 약해진 이유는 후삼국 시기에 이미 왕건 쪽에 섰다가 견훤의 금성 침략 때 상당한 손실을 입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는 역설적으로 지리상 가까웠던 견훤보다도 왕건을 변함없이 지지하고 전력을 다해 저항한 가문이었을 수 있으며 이 또한 왕건이 혜종을 정윤으로 삼는 데 기여했을 것이다. 나주 공략의 성공은 궁예 정권에서 왕건의 최대업적으로 꼽히며 그를 빠르게 출세시켜준 요인이고, 궁예가 폭정을 시작했을때도 중앙 정계를 떠나 나주로 피신을 가 위기를 피하기도 하는등 왕건에게 나주는 아주 각별한 곳일 수 밖에 없었다.
오씨 가문의 역할과 희생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정황상 왕건은 오씨 가문에게 매우 큰 빚을 졌을 가능성이 높기에, 혜종의 왕권이 불안정할 가능성을 감수하고서라도 혜종에게 승계를 해줄 이유 중 하나로 충분하다. 물론 제일 큰 이유는 혜종이 왕건의 "흠결 없는 적장자"란 것이다. 혜종이 출생 설화부터 모욕을 당했음에도 딱히 혜종 개인의 능력과 인품에 대한 음해 기록은 없는걸로 봐선 왕으로써의 자질이 준수한 수준은 넘어섰던 것으로 보인다. 거기에 오씨 가문이 왕건이 왕이 되는데에 기여한 역할도 크다면, 단지 다른 처가들의 힘이 더 강하다는 이유만으로 혜종을 폐태자 시키는건 왕건 입장에서 선택하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3.2. 즉위 전[편집]


혜종이 태어나 일곱 살이 되었을 때 태조가 그를 후계자로 세우고자 하였으나, 그의 어머니 오씨(吳氏)가 미약한 가문 출신이어서 옹립못할까 우려한 나머지(其母吳氏側微恐不得立), 오래된 상자에 자황포(柘黃袍)를 담아서 오씨에게 내려주었다. 오씨가 옷을 박술희에게 보이자 박술희가 태조의 의도를 짐작하고서 혜종을 세워 정윤(正胤)으로 삼기를 주청하였으니, 정윤은 바로 태자이다.

《고려사》 권92, <열전>5, -박술희-


惠宗仁德明孝宣顯義恭大王 諱武 字承乾 太祖長子 母曰莊和王后吳氏。後梁乾化二年壬申生 太祖四年 立爲正胤 從討百濟 奮勇先登 功爲第一 二十六年 五月 丙午 太祖薨 奉遺命卽位。

혜종 인덕명효선현의공대왕은 이름이 무(武)이고 자가 승건(承乾)이며 태조의 장남이다. 어머니는 장화왕후(莊和王后) 오씨(吳氏)이다. 후량(後梁) 건화(乾化) 2년 임신년(912년)에 탄생하여 태조 4년(921년) 정윤(正胤)으로 책봉되고 종군하여 후백제를 토벌할 때 용맹을 떨치며 선봉에 섰으므로 일등공신이 되었다. 태조 26년 5월 병오일에 태조가 죽자 유명을 받들어 즉위했다.

《고려사》 <혜종 세가> -총서-


왕무는 고려의 건국 군주인 태조 왕건의 장남으로 왕건이 아직 태봉궁예왕의 신하일 때 태어났다. 그가 만 6세일 때 아버지가 역성혁명을 일으켜 국가를 세우니 그는 왕자가 되었다. 왕무가 만 9세가 되던 해에 왕건은 그를 정윤(正胤)으로 책봉하려 했다 고려 개국 초에는 아직 왕실 법도가 명확하지 않아 왕건의 아들들 중 여럿이 스스로를 태자로 칭했으므로 왕위 계승자로는 별도로 '정윤'이라는 작위를 만들었다. 이때 어머니 오씨의 나주 오씨 가문이 미약한 것을 두고 후계자 자리를 노리는 호족들의 반발이 있을 것을 염려했다.

그래서 왕건은 한 가지 꾀를 내어 자황포(柘黃袍, 천자만이 입을 수 있는 곤룡포)를 담은 상자를 오씨에게 전달하도록 했고 오씨는 그것을 박술희에게 보여주었는데 본 뜻을 알게 된 박술희는 왕무가 정윤이 되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박술희의 이런 주장에 힘입어 왕건은 921년(태조 4년) 12월 신유일에 왕무를 정윤(正胤)으로 임명했다. 10세의 어린 고려 정윤은 후백제를 상대로 전쟁을 주도해야 했다. 932년(태조 15년) 만 20세가 됐을 때 아버지의 명령으로 서경을 비롯한 고려 북방 변경을 순시하고 돌아왔다. 935년(태조 18년) 만 23세일 때 1,000년 왕조 신라가 항복했고, 왕무는 태자로서 신라 국왕 김부를 직접 도성으로 안내했다. 같은 해에 후백제 왕 견훤도 항복해왔다. 936년(태조 19년) 일리천 대전를 개시하기 위해 만 24세의 젊은 정윤은 직접 보병 및 기병 10,000명을 이끌고 선봉대로 나아갔다. 943년(태조 26년) 5월 30일 아버지 왕건이 죽고 만 31세의 나이로 대왕의 자리에 오르니 그가 바로 혜종이다.

혜종은 후삼국 통일전쟁의 최후 전투인 일리천 대전에서 전공을 세울 정도로 전장을 누비며 통일에도 공헌을 했고 무엇보다 왕건의 장남이었기에 정통성 면에서는 건들 수 없는 왕재감이었다. 문제는 혜종의 외가인 나주 오씨가 아버지 왕건의 다른 처가들보다 세력이 미약한 탓에 혜종이 늘 정적들의 위협에 시달리며 지내야 했다는 것에 있었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고 혜종의 외가는 나주에서 꽤 떵떵거릴 수 있는 집안이기는 했다. 왕건의 나주 상륙 작전 때도 그 지역의 호족들을 대표해 내응할 정도였고 이미 사실상 왕건의 장인이었던 정주의 대호족 유천궁[4]이 내심 반발했을 텐데도 딸을 왕건의 도 아닌 둘째 정실 부인으로 당당히 밀어넣을 수 있을 정도의 권력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신라말 고려초 호족 연구》를 펴낸 정청주에 따르면 혜종의 즉위를 놓고 고려 조정에서는 패서 호족[5]들과 서남해 호족[6](및 그들을 지지하는 세력[7]) 사이의 알력이 있었다고 한다. 견훤의 나주 탈환 작전으로 인해 서남해 호족들이 가문의 기반을 몽땅 잃어버리고 왕건만 바라보고 산 처지가 되었다. 물론 나중에 후백제를 멸하고 나서 나름대로 복구했겠지만 후삼국 통일부터 혜종의 즉위까지 겨우 7년이었는데 완전히 회복이 되었을지 의문이다. 후삼국시대 초반 이후로는 후방이라 전란 피해를 거의 입지 않은 패서 같은 동네보다는 확실히 불리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후백제에 넘어간 나주의 탈환을 놓고도 나주 공략의 적임자로 홍유와 함께 서남해 호족인 박술희가 거론되었다가 강공훤이나 황보제궁 등 패서 호족들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유금필이 추천되는 등 패서 호족들이 우세를 보였다는 것이 그 근거라는 것이다. 동시에 유금필이 나주를 후백제로부터 수복하고 두 달 뒤에 후백제의 견훤이 금산사에서 고려로 귀부 의사를 밝혔는데 정청주는 이 때 견훤의 고려 귀부 이면에는 나주 호족들의 지하 공작이 있었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후백제에 나주가 넘어가면서 고려 조정에서 체면을 구기고 힘을 잃었던 서남해 호족들이 다시금 기를 펼 수 있게 된 것이 나주 수복이고 견훤의 고려 망명으로 구겼던 체면을 살리고 힘을 회복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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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색이 혜종을 지지하는 지방 세력인데, 대충 봐도 불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전화위복의 상황을 감안해도 왕건은 왕이 된 후에도 전국 최고의 호족들과 정략 결혼을 계속 하다보니 자연적으로 나주 오씨 가문은 다른 호족들의 가문과 비교가 되었다. 나주 오씨는 왕건이 일개 장군이던 시절에는 그럭저럭 괜찮은 상대 집안이었을지 몰라도 왕건의 지위는 날이 갈수록 높아지는데 나주 오씨는 그대로 멈춰 있으니 점점 상대적으로 격이 떨어지는 집안이 된 것이다.

왕건이 혼인한 29명의 부인들 가운데에는 신성왕후 김씨 같은 신라 왕족 등 얼마 전까지만 해도 최고의 혈통으로 치던 진골 귀족 출신도 있었다. 신라는 이미 실질적인 힘을 잃었다고 하지만 김씨가 가진 1,000년 왕조의 왕가로서의 상징성은 남아있었다. 왕건이 견훤처럼 무력으로 신라를 밀지 않고 수 년에 걸쳐 귀순을 간접적으로 유도하고 겹사돈을 맺는 등 특히 공을 들인 것도 그것 때문이었다. 게다가 비교 대상이 고려나 후백제 같은 큰 덩어리가 아니라 전국 각 군마다 있는 일개 호족 가문이라면 더더욱 급이 달랐다. 왕족은 어느 시대나 그 자체만으로도 혈통의 명예와 권위를 인정받았다. 금관가야 왕족도 멸망 후에 신라에서 최고급인 진골로 편입되었고 고구려 왕족이었던 안승 또한 진골로 편입되었다.

왕건은 경순왕에게 딸 낙랑공주를 시집보내면서 동시에 경순왕의 딸을 아내로 맞으려 했는데 당시 경순왕에게는 시집보낼 만한 딸이 없었다. 경순왕의 출생년도는 기록이 없지만 제5대 경종 시대까지 살아 있었던 걸 감안하면 최소 왕건의 아들뻘일 가능성이 크다. 때문에 경순왕의 큰아버지인 김억렴의 딸과 혼인했다. 혜종의 부인 의화왕후 임씨도 대광(大匡) 임희(林曦)의 딸이자 진주(晉州) 출신으로 나쁜 가문은 아니었지만 실세와는 거리가 멀었다.

결국 혜종의 권력은 태생적인 한계로 인하여 불안정할 수밖에 없었으며 한 마디로, 혜종 개인은 능력있는 인물이었지만 뒷배경이 약했던 사람이라 할 수 있겠다. 《고려사》 <열전>에 그의 모후인 장화왕후 오씨에 대해서 언급할 때 혜종을 "참으로 용의 아들"이라고 찬양하면서도 어머니 집안이 미약해서 다음 왕위에 오르지 못할까 염려했다고 한다. 이는 단적으로 혜종의 한계를 잘 보여준다.


3.3. 즉위 이후[편집]


다행히 재위 초기에는 왕건의 부탁을 받은 공신 박술희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었으나 박술희는 군사적인 기반은 지녔었지만 정치적으로 실세를 쥐고 있던 권력자는 아니었다. 결국 왕건의 후견인 선정이 완벽하지 못했던 셈으로 결국 박술희는 혜종의 적으로부터 왕을 지켜내지 못했고 왕규(혹은 정종)에 의해 피살당했다. 심지어 왕규는 태조가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혜종과의 관계를 맺게 해서 후견인으로 삼은 사람이다. 이미 왕규는 그의 딸을 2명이나 태조에게 들여 광주원군이라는 아들을 얻은 상황이었는데 여기서 또 다시 자신의 딸을 혜종에게 시집보냈다. 혜종으로써는 의붓 이모와 결혼한 셈.

어찌보면 혜종은 여러모로 아버지인 왕건의 실책으로 인해 큰 피해를 겪은 인물이기도 한 것이다. 호족 세력이 강했던 시기에서 혜종의 외가가 미약했음에도 불구하고 왕건은 그를 위해 적절한 후견인을 지정해주지 않았는데 혜종이 장자이기 때문인지 청주, 진천, 광주 일대 호족과 결혼시켰지만 아무래도 경순왕과 결혼한 낙랑공주의 영향력을 이기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왕건이 왕식렴으로 대표되는 서경 세력이나 개경 및 황주 등의 패서계 호족들 혹은 경주의 구 신라 왕가 세력이나 박영규로 대표되는 후백제 세력 등 마음만 먹으면 쟁쟁한 후견인을 얼마든지 설정해 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왕건은 박술희 한 명만 달랑 그에게 붙여줬을 뿐이었다.

한반도 역대 임금들을 통틀어서도 심한 왕건의 29번의 결혼도 혜종의 왕위 계승 가능성을 어떻게든 낮추는 꼴로 작용했다. 다만 왕건은 혜종 본인이 용맹한 무인이므로 제 앞가림은 충분히 할 것으로 믿었고 동생 왕요만 혜종에게 충성하면 왕권이 안정될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왕무와 왕요의 청주 출신 부인들은 서로 자매지간이다. 아무래도 둘의 싸움을 막기 위한 왕권의 비책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왕건이 혜종에게 아주 손 놓은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분명 등장한다, 왕건이 붕어 직전 당시 옆에 있던 재상이었던 왕규, 염상, 박수문에게 안팎의 중요한 일들 중 오랫동안 결정짓지 못한 것은 경들이 태자(혜종)와 함께 처결한 후 보고하도록 하라는 명을 내리는 기록이 있는데 만약 이들이 다른 이들의 입김이 아닌 왕건의 의도대로 재상에 임명된 것이고 이들이 박술희와 같은 고명대신이라면 당시로써는 나름 괜찮은 방법을 취했다고 볼 수 있다.

왕규는 혜종의 장인이자 왕씨 성을 받을 정도로 능력있는 문신이었고, 광주의 호족이었다. 염상은 축성 쪽으로 많은 활약을 한 무장 출신으로 당시 거의 대부분 사망한 개국 1등 공신들의 다음 서열인 2등 공신이었다. 박수문은 패서 호족인 평주의 호족이자 아버지 박지윤, 동생인 박수경[8]과 더불어 왕건의 장인으로서 외척이었으니 중앙의 패서 호족과 지방 호족은 물론 개국 공신, 외척, 문무 신료까지 모두를 어느 정도 적절하게 아우르는 나쁘지 않은 조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찍 죽은 것인지 아니면 왕규의 난에 같이 휩쓸린 것인지는 모르지만 위의 기록 이후로 행적을 알 수 없는 염상을 제외하더라도 왕규는 혜종, 박술희와 갈등을 벌이다가 빈틈을 보임으로써 결국 혜종이 몰락할 계기를 제공하였고, 자신 역시도 정종과 왕식렴에 의해 살해당했다. 박수문은 정종이 즉위한 후에도 동생인 박수경과 축성 작업을 참여했다는 기록이 남아있기 때문에 혜종 사후에도 생존해 있었음이 확인되었으니 혜종이 아닌 정종의 편으로 붙은 정황이 엿보인다. 혜종 혹은 왕규나 박술희 등에 대해 불만이 있어 반대편에 합류한 것인지 아니면 누이, 딸, 조카 등을 왕건의 부인으로 들일 수 있을 만큼 영향력이 있었던 데다 왕식렴과 친분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은 패서 호족 출신이어서 제거가 안 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결국 내부적이든 외부적이든 왕건의 계획은 실패로 끝난 것이 된 것이다.

秋九月 王疾篤 群臣不得入見 憸小常侍側。

가을 9월 왕의 병환이 위독했지만 신하들은 들어가 볼 수 없었고 간사한 아첨배들이 항상 곁에서 시중들고 있었다.

《고려사》 혜종 2년의 기사


즉위 후 혜종은 늘상 주름살을 펼 겨를이 없었던 듯한데, 결국 그는 왕위에 오른 지 단 2년 만에 붕어하는 비운을 맞았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조선 문종의 경우처럼 매우 병약했던 군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 그는 태조의 후삼국 통일에 공을 세웠던 만큼 강인한 무골이었다. 《동국통감》에는 혜종을 두고

"용력이 강해서 쇠도 구부릴 수 있다"

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는 자신을 암살하러 온 자객맨주먹으로 직접 때려잡은 적도 있었다.

이야기인 즉, 혜종의 장인인 왕규가 그를 시해하려고 몰래 자객을 보냈다. 정종과 왕식렴이 왕규에게 누명을 씌운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혜종의 침소에 잠입한 자객은 시위하고 있던 내시를 칼등으로 내리쳐 기절시키고 이불을 찔렀는데 그것은 지푸라기였다. 이러한 사태를 예상하였던 혜종은 이미 낌새를 채고 피해 있었는데, 목표가 제자리에 없자 당황하던 자객에게 "무엇을 찾느냐!"라고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정신을 차린 자객은 칼을 바로잡아들고 달려들었으나 혜종은 칼끝을 날렵하게 피하면서 자객의 얼굴에 맨주먹을 냅다 꽂아 나동그라뜨렸다. 왕을 시해하려는 자객이었던 만큼 무예가 특출했을 터인데 혜종은 무장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객을 맨손으로 제압한 것. 이후 달려온 내시들에게 자객은 체포되어 나갔다고 하나, 경우에 따라서는 침입의 기척을 느끼고 놀라서 깬 왕이 엉겁결에 내지른 주먹 한 방에 자객이 그 자리에서 즉사해 버렸다고 기록되기도 한다.[9]

그러나 혜종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를 하지 않은 채 덮어 두었는데, 이는 그의 왕권이 매우 미약하고 불안정했음을 방증하는 부분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왕이 암살당할 뻔한 중대한 사건을 그냥 넘기는 나라는 없을 것이다. 이는 조사를 시작하면 혜종의 시해를 주도한 호족들이 불안해져 반란을 일으킬 공산이 컸고, 혜종 역시 이 가능성을 잘 알고 있었지만 정말로 그런 사태가 일어날 경우 제압할 힘을 지니지 못했던 탓에 덮어둘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렇듯 그는 선왕의 창업에 전공을 세웠고 자신을 시해하려던 자객까지 맨손으로 잡을 정도로 강인한 무골이었지만 재위 기간이 짧았고 통치자에게 가장 중요한 실권이 약했기 때문에 후대에 들어 나약한 왕이었다는 오해를 사게 된다.

그 후에도 암살 미수 사건이 여러 차례 거듭되자 극히 불안해진 혜종은 조울증 증세까지 보였는데, 아무리 혜종 개인이 심신이 강건하다 한들 정치는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인 이상 잠을 자고 밥을 먹어야 하는데 이렇게 암살 시도가 끊이지 않고 누구 소행인지 캐는 것조차 불가능하면 버틸 수 없는 게 당연하다.

이와 더불어 그가 후백제와의 전투 중에 PTSD가 생겼고, 이로 인해 공황장애를 앓은 것이 아니냐는 분석도 있다. 또한 후백제에 나주가 함락되면서 그의 외가의 힘이 더욱 약화되었다는 점도 혜종이 심적으로 엄청난 불안감을 느꼈던 원인으로 추측된다. 나주 오씨 집안은 탈출하여 멸문지화를 피했다는 기록이 있고 실제로 나주 오씨 가문은 아직까지 존속되고 있다. 교과서에 나오다시피 왕건은 각지의 호족들과 정략결혼을 하였는데, 외가가 몰락한 혜종은 상대적으로 동생들에 비하여 외척 세력이 강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신체는 강건했지만 심성이 선했다고 한다 훗날 최승로가 선대 왕들의 본받을 점에 대하여 상소하며 “...어떤 사람이 정종(훗날)이 반역의 뜻을 가졌다고 참소하였습니다. 그러나 혜종께서는 듣고도 대답하지 않았으며 또한 물어보지도 않은 채, 은혜로 대함이 더욱 더하니 그를 처음과 같이 대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그 분의 큰 도량에 감복하였습니다.”라며 혜종에게서 형제간 우애하는 마음을 배워야 한다고 상소한 바 있다.

이처럼 심성이 선하고 유약하며 권력 기반이 약했던 탓에 쉽사리 정적들을 제거하지 못했다. 단적으로 정종은 즉위하자 왕규의 세력 300명을 숙청했고, 광종도 10년 가까이 세월이 필요했지만, 결국 대규모 숙청을 단행했다. 물론 이게 가능했던 제일 큰 것은 성격보다는 뒷배경임이 틀림없다. 특히 정종은 신하들이 결사적으로 반대하는 서경 천도를 죽을 때까지 추진했다는 점에서 혜종과의 권력 차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또 정종이 서경 천도를 죽을 때까지 추진했다는 게 맞는 말이긴 한데 재위 기간은 4년이 채 되지 않았다.

혜종은 또 공신이자 자신의 장인인 왕규의 음모에 휘둘렸고, 동생들의 권력 다툼을 외면하고 방치한 채 공포와 불안에 떨다가 붕어하고 말았다. 하지만 앞서 설명하였듯, 그는 여러 번에 걸쳐 암살될 뻔한 전력이 있었으며 또한 건강하였던 그가 아무런 징후 없이 갑작스레 붕어했기에 그의 이른 붕어를 호족들에 의한 시해로 보기도 한다.

시해의 배후로 가장 유력한 인물은 정종과 왕식렴. 혜종의 붕어 후 정종은 정상적인 방법이 아니라 반란을 일으킨 왕규를 진압했다는 이유로 여러 군신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더군다나 혜종에게는 어렸지만 흥화군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후계자가 버젓히 있는 상황에서 왕위에 올랐다는 것은, 결국 흥화군에게 갈 왕위를 빼앗았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다.

또한 왕식렴의 행적 역시 심상치 않은데, 마치 왕규가 난을 일으킬 것을 알았다는 듯 재빨리 움직여 진압해 버렸다. 이는 이미 왕규가 난을 일으키기 전 시점부터 정종과 왕식렴이 왕권 탈취를 위한 모종의 플랜을 가지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아니, 왕규 항목에도 있듯 왕규의 난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억지스러운 부분이 많기에 아예 정종과 왕식렴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친혜종 세력인 왕규 등을 제거한 후 왕규가 난을 일으켰다고 누명을 씌운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3.4. 사망[편집]


945년 10월 23일, 고려 본궐의 편전 중광전(重光殿)에서 사망했다.

《고려사》든 《고려사절요》든 혜종이 공인한 후계자를 언급하지 않고 있다. 혜종이 사망한 바로 그 날, 이복아우 왕요(王堯)가 군신(郡臣)의 추대를 받아 왕위를 잇게 된다.

혜종의 아들 흥화군[10]은 정종의 아들인 경춘원군과 함께 광종 연간에 벌어진 숙청에 휘말려 목숨을 잃었고 딸 경화궁부인은 광종의 아내가 되었다. 다른 자식들은 모두 요절했는지 뚜렷한 기록이 없고 경화궁부인은 광종과의 사이에서 후손을 두지 못했기에 혜종의 후대는 여기서 단절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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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릉

개성에 있는 혜종의 순릉(順陵). 2009년의 모습으로 봉분이 깎여있었을 뿐더러 석물까지 사라졌다고 한다. 《조선유물고적도보》를 보면 일제강점기까지는 묘지 난간이 있었다. 고종거란이 개경 인근까지 침입하였는데 이 때 순릉이 도굴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4. 가족관계[편집]


혜종은 1명의 왕후, 2명의 부인, 1명의 궁인을 아내로 두었다. 2명의 아들, 3명의 딸이 있었다.

* 제1비: 의화왕후 임씨 - 임희의 딸.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다.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 참조.
  • 흥화궁군(興化宮君): 혜종의 외아들. 고려사 최승호 열전에 따르면 정종의 아들 경춘원군과 함께 광종 재위시기 중 처형당했다.
  • 경화궁부인(慶華宮夫人) - 광종의 후궁
  • 정헌공주(貞憲公主)
* 후광주원부인 왕씨
작위
후광주원부인(後廣州院夫人)
관저
광주원(廣州院)
본관
왕씨(王氏)
생몰연도
? ~ ?
혜종을 지지했던 개국공신인 왕규의 딸이다. 왕규는 《고려사》 기록으로 딸 셋이 있는데 각각 광주원부인, 소광주원부인, 후광주원부인이다. 앞에 두 명은 태조에게 시집갔다. 왕규가 광주 출신 호족이기 때문에 세 딸의 관저를 광주원이라 한 것이다. 이는 청주원부인도 마찬가지다. 혜종은 자신의 지지자인 왕규와 결혼 동맹을 통해 관계를 긴밀히 하고자 했다. 정종 즉위 직후, 왕규가 실각됐을 때 같이 몰락했을 것으로 보인다.
* 청주원부인 김씨
작위
청주원부인(淸州院夫人)
관저
청주원(淸州院)
본관
청주 김씨(淸州金氏)
생몰연도
? ~ ?
청주 지방의 호족이었던 김긍률의 딸이다. 김긍률은 《고려사》 기록으로 딸이 둘 있는데 각각 청주원부인, 청주남원부인이다. 청주남원부인은 정종에게 시집갔다. 관저명은 자신의 본관(거점지)을 따왔다. 혜종은 약한 자신의 세를 불리기 위해 당시 충청도에서 큰 세력을 구축한 김긍률과 연합하고자 했다. 이는 정종 또한 마찬가지다. 광종 때 김긍률이 실각됐을 때 같이 몰락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 궁인 애이주 연씨
작위
궁인(宮人)
이름
애이주(哀伊主)
본관
연씨(連氏))
아들
왕제(王濟)

명혜부인(明惠夫人)
생몰연도
? ~ ?
옛 왕조의 수도인 경주 출신 궁인이다. 아버지는 대간(大干) 관직의 연예(連乂). 혜종이 나름 경주에 연을 만들려 한 모양이다. 하지만 관계를 만든 대간 연예나 궁인 애이주가 성씨가 없고 기록도 불분명한 걸로 봐선 크게 성공하진 못한 듯? 《고려사》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몇 안되는 여성이다. 자신보다 세력이 월등하게 큰 후광주원부인, 청주원부인에게도 없는 자식을 둘이나 가진 걸 보면 혜종과 사이는 나쁘지 않았던 듯 하다.

아들로 태자(太子) 왕제가 있었는데 《고려사》엔 그가 후손을 남기지 못했다고 한다. 본인이 후손을 남기지 못한 것인지 아버지 혜종의 죽음 후 숙부들이 후손을 남기지 못하게 만든 것인지는 불명. 고려 초기 당시 웬만한 왕자는 다 태자 작위를 가졌기 때문에 왕제의 태자 작위는 딱히 큰 의미가 없다. 당시 왕위 후계자의 작위는 아버지 혜종이 봉해졌던 정윤(正胤)이다. 훗날 경종도 아버지 광종에게 왕태자 - 정윤으로 봉해진다.
딸로 명혜부인(明惠夫人)이 있다. 작호 이외의 기록은 아무것도 없다. 명칭이 부인인 것을 보아 혼인한 것은 확실해 보이는데, 현종의 궁인 소생의 딸이 족외혼을 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녀 역시 비왕족과 혼인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5. 기타[편집]


  • 고려가 아닌 태봉국의 군주 궁예가 재위하고 있던 912년에 태어났다. 이 해는 궁예가 국호를 태봉으로 바꾼지 1년이 지난 해였고, 왕건은 정기대감직을 받아 전선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왕건은 통일신라 시대 송악에서 태어났으므로 혜종은 역대 고려 왕 중 유일하게 후삼국시대 태봉에서 태어난 왕이다. 추가로 고려에서 태어난 최초의 고려 왕은 923년에 태어난 정종이고, 통일 국가 고려에서 태어난 최초의 왕은 955년생인 경종이다.

고려 태묘 백세불천위
성종 ~ 인종
태조 신성대왕
의종 ~ 공양왕
태조 신성대왕
혜종 의공대왕
현종 원문대왕

  • 제6대 성종 대의 신하 최승로는 <시무 28조> 서두에서 고려 태조 이래 경종까지의 다섯 왕의 치적을 평가하면서 혜종을 종족을 보존한 공로가 있다고 평가했다. 재위 내내 불안한 왕위에 있었고, 사후 묘호로 썩 좋지 않은 '혜'를 받았던 혜종이지만 그의 사후 왕위 계승이 몇 차례에 거듭된 격변을 거치면서 처지가 달라지게 되었다. 후사를 보지 못한 정종[11]과 광종[12], 성종[13]의 후계가 모두 끊기게 되어 왕위가 현종(제8대)에게 양도되었으며, 그가 왕실의 중시조가 된 것이다.
왕의 아버지가 평범한 신분일 수는 없으니 현종의 친부 왕욱(王郁)은 안종 효의대왕으로 추존되지만 어디까지나 진짜 왕이 아닌 추존된 왕이므로 고려 왕실의 황통은 태조와 그의 후계자 혜종에서 현종으로 이어지게 된다.
왕통과는 별개로 추존 왕도 종묘에 오를 수 있다. 이미 성종 대에 대종의 신위가 종묘에 모셔지기도 하였다. 다만, 현종의 친아버지 왕욱(王郁)은 안종으로 추존되었지만 정식 결혼이 아닌 사통으로 현종을 낳았다는 문제와 더불어 역시 태조의 아들들인 혜종, 정종, 광종, 추존 왕인 대종과 형제 관계로 태조의 아들 서열이고 현종은 경종, 성종과 같은 태조의 손자 서열인데 현종 직전 왕 목종은 태조의 증손자로 '동세동반'(同世同班)을 적용할 수 없어서 서열이 맞지 않으니 종묘에 오르지 못한다.
혜종은 태조의 맏이이자 현종의 큰아버지가 되니 이는 현종이 제2차 여요전쟁 당시 혜종의 외가 나주까지 도망가면서 그 곳 호족들의 도움을 받았던 이유이기도 했다. 이리하여 혜종은 '불천지주'(不遷之主)(영원히 제향을 받을 수 있는 공업을 세운 군주)에 오르게 되어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꾸준히 존숭되었다.

  • 혜종의 인 '무'(武)는 고려시대 내내 피휘되었는데 모든 '武'라는 한자는 '범 호'(虎)로 대체되었다. 고려시대에 '무신'(武臣)은 '호신'(虎臣)이라고 불렸고 《삼국사기》에서도 문무왕(文武王)이 '문호왕'(文虎王)으로 개명당한 채 등장했다. 모든 관리를 지칭하는 단어인 '문무양반'(文武兩班)도 '문호양반'(文虎兩班), 무관직을 통칭하는 '무반'(武班)도 '호반'(虎班)으로 바뀌었다.
이 피휘는 조선 왕조가 들어서고 혜종의 신위를 불천지주에서 내림으로서 비로소 해제되었다. 무(武)로써 일어난 조선 왕조로서는 전조(前朝)인 고려 왕조의 무(武)를 상징하는 왕으로 여겨지며 무(武)라는 글자를 독점한 혜종의 존재가 불편했을 것이다. 비록 피휘는 해제되었지만 이러한 관습에 따라 '武'자가 계속 '호반 武'로 불리게 되었고 현대에도 '武'와 '虎'가 서로 비슷하게 통용되고 있다. 즉, 혜종은 살아 생전에는 누구도 감당하지 못할 불안에 가득 차 있었으나 정작 사후에는 태조의 첫 계승자로서의 대접을 제대로 받은 셈.
다만, 별무반의 경우에서 武자를 사용하였는데 武자는 虎로 대체되었다는 통설에 배치되는 내용이다. 별무반의 등장 자체가 기존 2군 6위의 위상 약화를 의미하고 특히 2군(응양군, 용호군)의 위상 약화는 왕실의 위상 약화로도 볼 수 있으며 이로 미루어 볼 때 고려 중후기로 갈수록 선대 왕들의 이름에 대한 피휘 규정이 느슨해졌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이는 무신정변과 관련이 있으며 실제로 《국역 고려사》에서 '무반(武班)'이라는 단어를 검색하면 총 50여 개의 기사가 검색되는데 해당 글자가 검색되는 첫 시작이 의종 때의 기사로 주로 고려 중후기에 많이 검색된다. 의종 때에 무신정변이 일어났고 이어지는 원나라의 침입 등 이로 인한 고려 왕실의 권위 하락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 조선의 2대 임금인 정종과 유사한 부분이 여럿 있다. 태조인 아버지의 (사실상) 적장자란 점, 본인도 무장 출신이며 아버지를 따라 전장에서 여럿 공을 세웠다는 점, 신체는 강건하나 성격이 유순하고 호방했다는 점, 야심이 강한 동생들에게 시달렸다는 점 등이 유사하다.

  • 등극한 고려 대왕 중 유일하게 남한 땅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6. 태묘 악장 및 추시문[편집]


고려 성종이 태묘를 만든 뒤, 태묘에 배향된 제왕들에게 바치는 <악장>, 즉 칭송의 노래가 만들어졌다. 예종 11년에 예종 기준 9묘(九廟)의 제왕에게 새로 바친 노래가 《고려사》 <악지>에 남아 있다.

예종 대 혜종 왕무의 찬가 제목은 <소성>(紹聖)이다. 네글자 운구이다.

그 선왕(先王)을 살피어 보니 당시에 매우 당당하셨습니다.

흉잔(兇殘)을 부수고 없애시니 삼한(三韓)이 안정되었습니다.

매우 높으시니 성덕(成德)을 크게 이루셨습니다.

그러니 자손이 제사를 지내 망극한 성덕을 보답하고자 합니다.

용기와 지혜가 걸출하시니 태조(祖)를 도와 공을 세웠습니다.

그리하여 위대한 깃발 아래 삼한이 통솔되었습니다.

그 상서로움이 오래 이어지니 열성(列聖)을 비추고 있습니다.

시기에 맞춰 엄숙히 제사지내는 것이 효손(孝孫)의 경사입니다.


공민왕 12년 새로 <악장>을 만들었다. 제목은 없다.

하늘이 우리나라를 만들었습니다. 누가 조천하지 않겠습니까?

태조를 좌우에서 보조하니 활과 살을 가지고 병영을 경영하셨습니다.

거대한 덕이 태묘에 잠들었으니 영령(英靈)이 그를 따릅니다.

당신께선 도우시고 진을 치시고 문을 열고 거대하셨으니 영원히 황명(皇明)[14]

을 바라보겠습니다.


인종 재위 18년(1140년) 4월, 묘청의 난을 제압한 인종은 혜종과 의화왕후, 덕종과 경성왕후, 정종[15]과 용신왕후에게 시호를 추가로 올렸다. 태묘에서 제사지내며 올린 축문이다.《동문선》 제28권에 기록되어 있다.

엎드려 100세 동안 끝없이 제사지내는 것은 성덕에 보답하는 것이며 3년상을 치루는 것은 제사의 상례를 다하는 것입니다. 점을 처 맹동(孟冬)에 기일을 정하여 청묘(淸廟)[16]

에 아룁니다. 때에 맞춰 물품을 바치는 것은 성의를 다하는 것이며 글을 남겨 기록하는 것은 공덕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공손히 생간컨데 혜종 의공대왕(惠宗 義恭大王)께선 불세출의 지략을 가지시고 늘 정도를 걸으셨습니다. 신성(神聖)[17]

께서 개국하셨을 때는 간악한 자가 맘대로 돌아다니던 나날이었습니다. 이에 사극(四克)을 정벌하시고 민구(民區)를 크게 구하셨습니다. 끝없이 보좌하시니 드디어 홍업(鴻業)을 이루어냈습니다.

후 말명(末命)[18]

에 따라 비도(丕圖)를 밝게 이으시니 호걸(豪傑)들을 부려 사방(四方)[19]을 수호하셨습니다. 무공(武功)이 저 멀리까지 이롭게 하니 만국(萬國)이 차를 끌고 와 문화의 대동(文化大同)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리하여 대왕의 업적을 받드는 것이 후손의 의식이 되었습니다.

의화왕후(義和王后) 임씨(林氏)께선 부드럽고 명철한 성격을 지녔습니다. 보좌의 마음을 가지시니 6궁과 3대를 뒤덮고 사해(四海)[20]

에 풍속을 가르치고 왕화(王化)를 2남에까지 덮게 하였습니다.

비록 진구(眞馭)는 이미 멀리 떠났지만, 부드러운 위엄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신(臣)[21]

은 작고 소심합니다. 경공히 위엄을 받들어 제사를 모시니 모든 경사가 모여듭니다. 두 글자로 된 시호를 바치니 천년동안 이어질 영광스런 칭호를 더합니다.

성실히 某 물품을 바치며 대왕존시(大王尊謚) 某와 왕후존시(王后尊謚) 某를 더해 올립니다. 부디 들어주시길 바라며 엎드려 뜻을 이어받길 기대합니다. 책문을 받으시고 우리 자손을 지켜주시옵소서.



7. 대중매체[편집]


  • 2000년작 KBS 드라마《태조 왕건》에서는 배우 안정훈이 맡았다. 제140회에 나오는 정윤 책봉시까지의 유년기 모습은 아역 배우 강민규가 맡았는데 공교롭게도 강민규는 <태조 왕건>에서 아버지로 나온 배우 최수종과 주말연속극 <첫사랑>에 외삼촌과 조카지간으로 함께 등장한 적이 있었다. 안정훈은 1969년생으로 극 중 아버지인 최수종보다 7살 어리고, 어머니인 염정아(1972년생)보다 3살이 많아 다소 어울리지 않는 캐스팅이었다는 평이 있었다. 한편으로는 나이 고증을 한다고 진짜 미성년자를 전쟁씬에 내보내는 것이 곤란한 면도 있기는 한데 금강은 어린 시절에는 아역 배우가 직접 전쟁씬에서 말타고 지휘하는 모습이 잠시 나와서 오묘하다.
이 드라마에서 혜종은 고려 건국에 공을 세울 정도로 활발하게 활동한 정력적인 무인 스타일의 태자로 묘사된다. 조물성 전투에서 처음 친정을 나가 후백제군의 태자 견용검에게 초전에서 패배해 왕건 시절부터 2대에 걸쳐 왕건 부자를 보좌한 장수장을 잃는 실책을 저지르기도 했지만 이후 실책을 만회하는 등 전반적인 능력치는 후백제의 신검 3형제를 합친 것 만큼이나 대등한 수준으로 그려지고 있다. 신검 3형제들이 여러 번 실책을 범했던 것과 대조적으로 첫 친정에서 처음 실수를 한 것 이외에는 크게 실책이 부각되지 않는다. 단, 이때 하필 왕건이 어릴 때부터 묵묵히 왕건을 섬기던 장수장이 전사한지라 강한 질책을 받기는 했다.
후계자 문제를 빨리 정하지 못해 내분이 일어났던 후백제와 달리 왕무는 왕건의 장남으로 태어나 일찌감치 정윤에 봉해져 후계 구도가 튼튼했다는 것도 대조적인 부분. 특히 왕무는 나이 터울이 얼마 되지 않았던 신검 3형제들과 달리 동생들과 나이 터울이 많았기에 동생들이 에서 한창 자랄 때 이미 전장에서 아버지를 보좌하면서 경험을 쌓음으로서 후계자로서의 입지를 다질 수 있었다. 향후 후백제에서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모친 장화왕후에게 이 일을 반면교사 삼아 아우들을 잘 보살피라는 충고를 듣기도 하였다. 하지만 왕건 사후 벌어지는 왕권 다툼을 생각해보면 묘하기만 하다.


파일:attachment/혜종/hyejong.jpg

드라마《제국의 아침》에서의 혜종

  • 2002년작 KBS 드라마《제국의 아침》에서는 배우 노영국이 맡았다. 태조 왕건에서 왕건 역 물망에 한때 거론되었으나 탁월한 연기력을 가졌음에도 많은 나이 때문에 캐스팅 목록에서 제외되었다. 노영국은 1948년생으로 극 중 잠시 나온 아버지인 이문수(1949년생)보다 1살이 많아 미스캐스팅이었으나 이문수가 노안인데다가 노영국이 동안이라 묻혔으며 노영국이 맡은 혜종은 이후 캐릭터가 확 바뀌어 버린 사례로 꼽힌다.
여기서 혜종은 통일이 되고 즉위한 몇 년 사이에 심신이 상하기라도 한건지 나약하고 정신병에 걸린 모습을 보인다. 이 이유로 후백제와의 마지막 전투인 일리천 전투에서 난전 도중 수많은 시체와 피로 인한 공포와 죄책감 때문에 몸과 마음이 피폐해진 것으로 묘사하였다.
이를 연기하는 노영국의 연기력은 실제인지 연기인지 헷갈릴 정도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하지만 동생들인 정종, 광종보다도 군주로서의 위엄을 보인다는 평가가 있는 것을 보면 나약하게만 묘사되지는 않은 듯하다. 배우빨도 큰 게 노영국이 이렇게 입지가 약한 군주를 연기하면서도 연기 자체가 카리스마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대왕 세종에서 조선 정종 역을 맡을 때도 그대로 재현되었으며 나약한 연기조차도 엄청난 프로 정신이 발휘된 예인데 정말로 병약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 녹화 전 을 굶고 매운 고추만을 먹으며 몸을 떨었다고 한다.#

  • 견신검을 욕심이 없는데 아우들 때문에 억지로 군주가 된 착한 놈으로 그리는 왜곡을 저지른 2005년부터 연재되고 있는 조선일보의 아동 만화 《맛있는 한자》시리즈에서는 혜종의 외가를 초가집에서 농사나 짓는 농사꾼 집안으로 그려놓았다. 혜종의 외가는 한가닥하는 가문이었다가 견훤에 의해 나주가 털리면서 주저앉았지만 엄연히 그의 외가는 귀족 가문이었으며 적어도 절대 일개 촌부의 집안은 아니었다. 하지만 작중에는 그런 언급없이 처음부터 한미한 가문이라고 나오고 실제 외가가 등장할 때는 농민 A 수준으로 그려놓았다. 작중에서는 나주가 점령된 뒤 견훤의 부하 하나가 공을 세울 목적으로 외가에 쳐들어오는데 집이 허름한 것을 보고 도무지 왕비의 외가라고 믿지 못할 정도였다. 때문에 역사적 사실을 아는 사람들의 뒷목을 잡게 만들었다.

  • 2015년작 MBC 드라마《빛나거나 미치거나》에서도 혜종이 등장하였다. 하지만 왕관을 쓰는 장면만 몇 초 나오고 이후로는 나오지 않았는데 드라마에서 중심이 되는 시대는 정종 시대라서 혜종은 태조에서 정종으로 넘어가는 중간 과정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혜종은 몇 초만 나온 엑스트라이기 때문에 등장인물 설명에도 안 나온다. 일단 혜종의 죽음이 베일에 감춰져 있는데다 왕소는 혜종의 사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를 표현하려면 원래 드라마의 이야기가 망가지는데 정종은 왕식렴에게 휘둘리지 않고 개경 일대를 피바다로 만든 사람이니 말이다.

  • 2016년작 SBS 드라마《달의 연인 - 보보경심 려》에서는 배우 김산호가 맡았다. 힘없고 한미한 외가 때문에 출신의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었고 아버지인 태조 왕건이 아들 중 그를 가장 사랑하였고 아꼈지만 군주가 되고 나서 불안정한 왕권과 대정으로 맡긴 동생 왕욱에게 그는 수은으로 점점 중독된 채 독이 퍼져 몸과 정신이 약해졌다. 광종이 되는 왕소에게 딸을 시집보내려 한다. 다른 태자들이 자신을 언제든 죽이리라 생각하고 불안에 떨면서 딸을 거란에 시집보내려 했으나 이를 우려한 광종이 조카를 아내로 들이겠다고 하면서 겨우 무마되었다. 그렇게 선위를 하고 의지해 자신과 가족들을 살리려는 계획을 하였지만 쿠데타가 일어나 정종이 되는 왕요에게 다미원에서 비참하게 피를 토하며 물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죽게 된다.


[1] 혜종을 말한다.[2] 태조 왕건을 말한다.[3] 이복 동생인 광종이 올림.[4] 고려 태조의 제1왕비였던 신혜왕후 유씨의 아버지. 태조 사후에 태조와 함께 합장된 인물이 신혜왕후였다.[5] 서경의 김행파(평양 김씨), 평주의 대광 박수경(평주 박씨), 신주의 강공훤(신천 강씨), 천안도호부사로 황주 출신인 대광 황보제공(황주 황보씨).[6] 혜종의 외가인 나주 오씨나 박술희의 집안인 혜성 박씨, 복지겸의 집안인 면천 복씨.[7] 태조와 혜종의 사돈가인 진천 임씨. 운주(홍성)의 홍씨, 천안 임씨.[8] 박수경은 여러 전투에서 승리를 한 명장으로서 왕건의 신임을 얻은 인물인데 전공을 세운 것으로 인해 관등이 오르게 되었을 때 형보다 높아질 수 없다고 아룀으로써 형인 박수문까지 같이 승진을 하게 만든 일화로 유명하다.[9] 이러다보니 넷상에서는 혜종에 대해서는 "진정한 의미의 권왕" 등 드립이 횡횡했다. 심지어 이름조차도 무(武)...[10] 의화왕후의 자식이며 흥화궁군, 혹 흥화낭군으로 불렸다.[11] 정종의 아들인 경춘원군은 혜종의 아들이었던 흥화군과 함께 광종에 의해 처형되었다.[12] 그나마 광종 → 경종 → 목종 3대가 이어졌건만 목종이 후사없이 젊은 나이에 시해당하며 후계가 결국 단절되었다.[13] 아들은 없었으며 애초 후계자를 광종계인 목종으로 공인해둔 상황이었다.[14] 황제의 빛, 밝음.[15] 고려 3대 정종(定宗)이 아닌 10대 정종(靖宗)[16] 태묘의 다른 말.[17] 태조 신성대왕의 시호.[18] 태조 신성왕의 마지막 명령.[19] 천하의 다른 말.[20] 천하의 다른 말.[21] 인종의 자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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