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나우지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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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나우지뉴의 수상 이력


2006 FIFA 올해의 선수
수상
파비오 칸나바로
2위
지네딘 지단
3위
호나우지뉴
2004 Ballond'or
수상
안드리 셰브첸코
2위
데쿠
3위
호나우지뉴
2002 Onze d'Or
Onze d'Or
Onze d'Argent
Onze de Bronze
호나우두
지네딘 지단
호나우지뉴
2004 Onze d'Or
Onze d'Or
Onze d'Argent
Onze de Bronze
디디에 드록바
티에리 앙리
호나우지뉴
2006 Onze d'Or
Onze d'Or
Onze d'Argent
Onze de Bronze
티에리 앙리
호나우지뉴
프랑크 리베리

FIFA 월드컵 우승 멤버



FC 바르셀로나 앰버서더
Futbol Club Barcelona Ambassador

파일:Ronaldinho_Legend_Match.jpg

이름
호나우지뉴
Ronaldinho
본명
호나우두 지아시스 모레이라[1][2]
Ronaldo de Assis Moreira
출생
1980년 3월 21일 (44세)
브라질 히우그란지두술주 포르투알레그리
국적
[[브라질|

브라질
display: none; display: 브라질"
행정구
]]
| [[스페인|

스페인
display: none; display: 스페인"
행정구
]]
[3]
신체
181cm / 체중 83kg[4], O형[5]
포지션
윙어, 공격형 미드필더
주발
오른발 (양발)
소속
선수
그레미우 (1998~2001)
파리 생제르맹 FC (2001~2003)
FC 바르셀로나 (2003~2008)
AC 밀란 (2008~2011)
CR 플라멩구 (2011~2012)
아틀레치쿠 미네이루 (2012~2014)
케레타로 FC (2014~2015)
플루미넨시 FC (2015)
포르치노스 FC[6] (2023~)
홍보
FC 바르셀로나 (2016~ / 앰버서더)
국가대표
파일: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97경기 33골[7] (브라질 / 1999~2013)
통산 득점
313골
SNS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 파일:트위터 아이콘.svg
가족관계
아들 주앙 멘지스


1. 개요
2. 유소년기
3. 선수 경력
3.2. 국가대표 경력
3.3. 은퇴
4. 플레이 스타일
5. 기록
5.1. 대회 기록
5.2. 개인 수상
5.3. 출전 기록
6. 호나우지뉴에 대한 언사
7. 사건사고 및 논란
7.1. 위조여권 사기논란
8. 여담
8.1. 메시와의 인연




1. 개요[편집]


파일:1134598.jpg

브라질의 前 축구선수.

2000년대 중반 축구계를 대표한 선수 중 한 명으로 축구 역사상 단 8개 국가뿐인 FIFA 월드컵 우승,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 리그 우승, 발롱도르 수상을 모두 달성한 선수이다.[8][9] 이런 실력에 특이한 외모, 웃는 모습까지 더해 외계인이라는 별명이 생겼을 정도로 인상적인 캐릭터성을 지닌 선수였다. 다만 반대로 말하면 자기관리 실패로 전성기가 오래 가지 못하였기에 아쉬움도 남는 선수. 그래서 축구를 논할 때 호나우지뉴의 전체 커리어는 언급되지 않는 편이지만 그의 최전성기는 자주 언급된다.


2. 유소년기[편집]


브라질포르투알레그리에서 태어났다. 8살 때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다고 한다. 여타 브라질의 축구선수들처럼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공을 찼겠구나 싶지만, 형 호베르투가 프로 팀인 그레미우와 계약한 덕에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그도 그럴듯이 그레미우는 브라질에서 최상위급 명문 클럽 중 하나다. 다만 형은 부상때문에 일찍 선수 생활을 접고 지금은 호나우지뉴의 에이전트로 활동 중.

대중에게 처음 알려진 것은 13세 때 지역 팀과의 경기에서 혼자 23골을 넣은 것이 언론에 보도된 것이었다. 이후 형이 있던 그레미우와 계약해서 어린 나이임에도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고, 1997년 U-17 월드컵에서 세계 축구계에 처음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3. 선수 경력[편집]



3.1. 클럽 경력[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호나우지뉴/클럽 경력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2. 국가대표 경력[편집]


1999년 코파 아메리카가 그의 첫 메이저 대회였다. 하지만 후보 신세였고 브라질은 히바우두-호나우두 투톱으로 승승장구하며 우승컵을 들어올린다.

그러나 호나우지뉴의 진면목은 2002년 한일 월드컵이었다. 2002 월드컵 전까지만 해도 브라질은 조직력 문제로 말이 많았다. 남미 예선도 힘겹게 올라온 상태였고 호나우두는 부상으로 신음을 앓다가 복귀한지 얼마 안된 상태였다. 하지만 본선에서 그들은 각성한다. 당시 공격의 삼각편대 3R은 막강한 모습을 보여줬고 32강 본선 조별리그에서는 32강 C조에 걸려 터키, 중국, 코스타리카를 모두 꺾고 3전 전승으로 16강에 올라간다. 16강에서는 벨기에히바우두호나우두의 각각 1골로 2-0 승리한다.


호나우지뉴의 프리킥 골
8강에서 잉글랜드를 상대로 호나우지뉴는 동점골 어시스트와 프리킥 골까지 만들어내지만 퇴장당한다. 어쨌든 그의 활약에 2-1승리를 거둔다. 4강호나우두의 결승골로 터키를 1-0으로 승리하며 결승에 오른다. 결승 상대는 독일이었다. 당시 독일은 올리버 칸이 버티고 있었지만 호나우두가 이를 뚫어내며 2골을 기록했고 월드컵 우승 트로피를 드는데 성공한다. 호나우지뉴는 히바우두-호나우두 투톱을 잘 보좌하며 활약했고 대회 올스타팀에 선정된다

다음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브라질은 디펜딩챔피언이자 피파랭킹 1위로서 더 기대되었다. 팀도 카카-아드리아누-호나우두-호나우지뉴로 이어지는 '판타스틱 4'를 구성했고 32강 본선 조별리그 역시 3전 전승, 16강에서 가나까지 3-0으로 꺾으나 8강에서 티에리 앙리에게 결승골을 허용하여, 프랑스에게 1-0으로 아쉽게 패배하여 8강 5등으로 멈춘다. 호나우지뉴는 감독의 지시에 따라 이타적 플레이에 집중하며 자신의 기량을 제대로 선보이지 못했고 브라질 국대 코치진들과의 불화까지 심화되며 결국 부진에 늪에 빠졌다. 2008 베이징 올림픽에 와일드카드로 뽑혀 출전했으나, 동메달에 그쳤다.


3.3. 은퇴[편집]


이미 2015년 이후 소속팀도 없었고 은퇴가 기정 사실화 된 상황이었다. 그러다 2017년 12월 7일 은퇴에 대한 공식적인 이야기가 나왔고 후년인 2018년 1월 16일 정식 은퇴를 선언했다. 메시 이전의 바르셀로나의 절대적 에이스이자 후배 네이마르보다 더 화려한 묘기를 보여준 레전드 선수는 비록 자기관리 실패로 인한 구설수를 남겼지만 그래도 2000년대를 풍미했던 선수로서 이제 역사가 되었다.

2018 러시아 월드컵 결승전 공연에 참여하였다.

2019년 1월, 브라질 비치사커 국가대표로 데뷔하게 되었다.기사


4. 플레이 스타일[편집]



주 포지션은 2선 공격자원, 그중에서도 주로 왼쪽에서 프리롤로 움직이는 플레이메이커 성향의 윙어였다. 전성기를 기준으로 호나우지뉴는 테크닉, 신체 능력, 축구 지능, 킥, 패스, 득점력, 이타성 등 공격형 미드필더 내지 플레이메이커 윙포워드한테 요구되는 거의 모든 덕목들을 최상위 레벨로 보유했던 완전체 선수였고 그중에서도 드리블과 볼 터치는 당대 최고를 넘어서 축구 역사상 최고수준이라고 얘기될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일반적으로 선수는 십수년 이상 훈련을 거듭하며 정형화된 패턴이나 습관이 생기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아르연 로번의 경우 우측면에서 중앙으로 꺾어들어와서 왼발 슈팅이 주특기이므로 수비 측은 그 기술을 특히 주의하면 된다.[10] 그러나 호나우지뉴는 축구선수가 구사 가능한 거의 모든 종류의 개인기를 자유자재로 구사하기에 돌파에 능한데, 킬패스도 자유자재로 뿌릴 수 있으니 예측이 다른 선수들보다 훨씬 어렵다. 남들은 연습경기나 훈련장에서 연습할만한 개인기를 실제 경기에서 자유자재로 사용했다고 하는데, 무언가 특기가 있고 약점이 있다기보다 그냥 발로 공을 다루는 행위 자체를 잘했다. 오죽하면 전성기의 호나우두는 알아도 못 막았지만, 호나우지뉴는 정말 뭘 할지를 몰라서 못 막았다는 말을 할 정도로 예측이 불가능하고 변화무쌍한 선수였다.

흔히 사람들은 호나우지뉴를 개인기는 화려하나 가볍고 이기적인 플레이를 하는 전형적인 기술 중심의 남미형 선수라 착각한다. 그러나 유튜브에 즐비한 스페셜 영상들만 봐도 이것이 잘못된 생각이란 걸 알 수 있다. 호나우지뉴는 기술만 화려한 것이 아니라 역습 과정에서 간결한 최소한의 터치로 수비수들을 벗겨내는 스피드, 수비수 서너 명이 달라붙어 밀쳐도 공을 지키면서 버텨내는 피지컬을 가진 선수였다. 공격수로는 크지 않은 180cm의 신장으로도 자신보다 훨씬 큰 180대 후반의 수비수 두세 명과 격렬하게 부대끼면서 밀리지 않았다. 라리가보다 훨씬 거친 몸싸움을 하는 EPL 소속 클럽인 첼시 FC의 수비진을 상대로도 힘과 기술 양면에서 압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오죽하면 쓰러진 선수가 발을 붙잡아야만 움직임을 멈출 수 있었을 정도다. 또한 힐패스와 노룩패스, 페이크 패스 등은 자신에게 달라붙는 수비수들의 태클을 피하면서도 필드 전체 상황을 읽고 있다는 엄청난 집중력과 축구 지능의 증거이다. 몸의 움직임을 최소화하면서 수비수를 피해 동료에게 볼을 배달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는 것이다. 즉, 이 시기의 호나우지뉴는 개인기와 드리블, 스피드[11], 피지컬, 패싱, 세트피스, 슈팅 등 공격에 필요한 모든 옵션을 보유하고 제공하며, 감독의 전술폭은 물론 동료들의 움직임까지 활성화시키던 먼치킨이었다.

볼을 다루는 능력과 돌파하는 드리블, 시야, 패스와 연계능력, 마무리 능력까지 완벽하게 갖춘 드리블러형 공격수였으며, 크랙이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선수로 볼 수 있다.[12] 압박 전술이 발달한 현대 축구에서는 측면이 압박을 덜 받는다는 점을 이용해 측면에서 플레이 메이킹을 하는 선수들이 생겼는데, 리오넬 메시프랑크 리베리 등과 더불어 호나우지뉴가 대표적이다.[13]

전성기 호나우지뉴의 상징은 단연 화려한 개인기다. 호나우지뉴의 상징과도 같은 기술인 플립 플랩을 비롯, 헛다리 짚기 · 라 크로케타 · 마르세유 턴 · 스쿱 턴 등 다양한 개인기를 최상급으로 구사했으며, 공을 공중으로 튕기면서 수비수들을 농락하는 플레이도 즐겨했다. 단순히 기술만 뛰어난 게 아니라 신체능력도 탁월했는데, 몸의 탄력과 유연성이 엄청난 덕분에 동작이 큰 개인기를 구사하고도 다음 동작으로 빠르고 부드럽게 넘어갈 수 있었고, 웬만한 수비수들을 압도하는 피지컬과 스피드도 가지고 있었다.

전성기에는 주로 수비벽을 허무는 돌파에 초점을 두고 빠른 드리블과 개인기를 사용해 적팀 수비수를 깨부순 뒤, 동료에게 마무리를 양보하는 식의 플레이를 많이 하였다. 골 욕심이 그리 많은 선수는 아니었고 주로 공격형 미드필더윙어로 뛰다보니 마무리보다는 공격의 중심을 잡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넓은 시야와 축구지능까지 굉장히 뛰어난 편이라, 볼을 어떻게 움직이고 누구에게 패스해야 공격이 쉬워지는지 잘 알고 있는 선수이다. 누구도 구사하지 못하는 탈지구급의 드리블에 킬패스까지 겸비했으니, 적팀 수비수들은 호나우지뉴를 막다가 패스 한 방에 골로 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호나우지뉴가 지닌 가장 무서운 장점이자 역사상 최고의 재능은 공을 감지하는 몸의 감각과 경이로운 볼 컨트롤이다. 발 뿐만이 아니라 등, 뒤꿈치, 어깨 등 다른 개인기가 좋은 선수들도 잘 쓰지 않는 신체부위를 가지고도 기가 막힌 패스를 해냈다. 게다가 그는 원터치로 전달하는 웬만한 패스에 시선을 잘 두지 않았다. 물론 공이 오는 각도와 튕겨나갈 방향을 잘 예측한 플레이긴 했지만, 이런 예측이 어렵고 신통방통한 움직임은 그가 외계인으로 불리는데 큰 일조를 했다. 또한 전성기엔 공을 위로 띄워 트래핑을 하든 드리블을 하든 속도가 줄지 않는 엄청난 능력을 선보였다. 거기다 상황 판단이 빠르고 탁월해 템포를 잡아먹지 않으면서 패싱력까지 갖춰 빠른 역습중에 킬패스까지 뿌릴 수 있는 선수였다.

킥력도 굉장히 뛰어났다. 외계인같은 드리블이나 패스에 묻혀서 그렇지, 기회가 날 때마다 골대를 가르는 매서운 중거리 슈팅과 키퍼가 손도 쓸 수 없는 절묘한 각도로 차는 섬세한 슈팅능력을 지녔으며 이런 식으로 골도 많이 넣었다. 특히 첼시전에서 보여준 씰룩씰룩 골은 지뉴의 감각과 슛팅능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면.[14] 실제로 프리킥 골 수가 커리어 통틀어 66골[15] 리오넬 메시(60골)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58골)[16]를 넘고 65골인 데이비드 베컴보다도 한골 앞선 수이다. 코너킥도 전담했으며, 화려하고 창의적인 플레이로 유명한 선수답게 아크로바틱한 골도 종종 넣었다.

지뉴의 또 다른 장점은 바로 볼에 대한 집념인데 잇몸을 드러내고 루즈볼을 차지하려는 열띤 모습이 거기서 비롯된다. 전성기에는 왕성한 활동량까지 붙어 말 그대로 축구공을 몸에 붙이고 다니며 그라운드를 누볐다. 그야말로 결점 자체가 없었던 화려한 선수였다.

하지만 2006-07 시즌부터 자기관리에 실패하며[17] 신체능력과 바디 밸런스가 붕괴하면서,[18] 예전같은 역동적인 드리블 돌파는 자주 할 수 없게 되었고 활동량도 크게 감소했다. 그러나 발기술과 피지컬로 제자리에서나 걸어다니면서 볼을 지켜낼 정도는 됐고 특유의 패싱 감각과 킥력은 여전히 남아있어서, AC 밀란에서는 돌파보다는 패스와 크로스로 플레이하는 미드필더에 가깝게 스타일이 변화했다. 그래도 활동량과 역동성의 하락은 호나우지뉴의 팬들에게나 AC 밀란의 팬들에게나 아쉬운 부분이었기 때문에 시즈모드라는 별명이 생기기도 했다.

요약하자면, 전성기 시절 호나우지뉴는 축구 센스, 패스, 슛, 세트피스, 드리블까지 모든 능력치에서 역대 최고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5. 기록[편집]



5.1. 대회 기록[편집]









  • 브라질 U-23 축구 국가대표팀



5.2. 개인 수상[편집]


  • 발롱도르: 2005
  • 발롱도르 드림팀 2군: 2020
  • FIFA 올해의 선수: 2004, 2005
  • FIFPro 올해의 선수: 2005, 2006
  • FIFA FIFPro 월드 XI: 2005, 2006, 2007
  • UEFA 올해의 클럽 축구 선수: 2005-06
  • UEFA 올해의 공격수: 2004-05
  • UEFA 올해의 팀: 2004, 2005, 2006
  • UEFA 올해의 궁극적인 팀: 2015[19]
  • FIFA 월드컵 올스타팀: 2002
  •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골든볼: 1999
  •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브론즈볼: 2005
  •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골든슈: 1999
  •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결승전 맨 오브 더 매치: 2005
  • FIFA 클럽 월드컵 브론즈볼: 2006
  • FIFA 클럽 월드컵 득점왕: 2013
  • UEFA 챔피언스 리그 도움왕: 2005-06
  • 리그 1 올해의 골: 2002-03
  • 라리가 최우수 외국인 선수[20]: 2003-04, 2005-06
  • 라리가 도움왕: 2005-06
  • 트로페오 EFE: 2003-04
  • 세리에 A 도움왕: 2009-10
  • 세리 A 팬 선정 올해의 선수: 2012
  • 세리 A 올해의 팀: 2011, 2012
  • 세리 A 도움왕: 2012
  •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도움왕: 2012, 2013
  • 캄페오나투 가우슈 득점왕: 1999
  • 월드 사커 올해의 선수: 2004, 2005
  • 옹즈도르: 2005
  • 옹즈 드 옹즈: 2002, 2004, 2005, 2006
  • ESM 올해의 팀: 2003-04, 2004-05, 2005-06
  • FIFA 100: 2004
  • 골든풋: 2009
  • 남아메리카 올해의 축구 선수: 2013
  • 남아메리카 올해의 팀: 1999
  • 볼라 지 오우루: 2012
  • 볼라 지 프라타: 2000, 2012, 2013
  • 골든풋: 2009
  •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10년의 팀[21]: 2009
  • 돈 발롱 2000년대 베스트 XI: 2010
  • 마르카 바르셀로나 역대 베스트 XI: 2017
  • 브라질 축구 명예의 전당: 2013
  • AC 밀란 명예의 전당: 2017
  • 글로브 사커 어워즈 플레이어 커리어 어워드: 2021
  • IFFHS 올타임 남아메리카 드림팀[22]: 2021


5.3. 출전 기록[편집]


시즌
클럽
소속리그
리그
FA컵
대륙대회
경기
득점
도움
경기
득점
도움
경기
득점
도움
1998
그레미우
세리 A
14
1
0
2
0
0
15
3
2
1999
그레미우
세리 A
17
6
0
3
0
0
4
2
0
2000
그레미우
세리 A
21
14
0
6
6
0
-
-
-
2001/02
파리 셍제르맹
리그 1
28
9
8
6
2
0
14
2
2
2002/03
파리 셍제르맹
리그 1
27
8
6
7
3
0
4
1
2
2003/04
FC 바르셀로나
라리가
32
15
6
6
3
2
7
4
3
2004/05
FC 바르셀로나
라리가
35
9
12
0
0
0
7
4
2
2005/06
FC 바르셀로나
라리가
29
17
15
2
1
1
12
7
4
2006/07
FC 바르셀로나
라리가
32
21
8
4
0
0
11
3
3
2007/08
FC 바르셀로나
라리가
17
8
1
1
0
0
8
1
2
2008/09
AC 밀란
세리에 A
29
8
5
1
0
1
6
2
1
2009/10
AC 밀란
세리에 A
36
12
14
0
0
0
7
3
1
2010/11
AC 밀란
세리에 A
11
0
3
0
0
0
5
1
1
2011
플라멩구
세리 A
31
14
7
5
1
1
3
2
0
2012
플라멩구
세리 A
2
1
0
0
0
0
8
2
6
2012
아틀레치쿠 미네이루
세리 A
31
9
15
0
0
0
-
-
-
2013
아틀레치쿠 미네이루
세리 A
14
8
2
2
0
2
14
6
7
2014
아틀레치쿠 미네이루
세리 A
2
0
0
0
0
0
7
1
2
2014/15
케레타로 FC
리가MX
25
8
4
4
0
0
-
-
-
2015
플루미넨시
세리 A
7
0
0
2
0
0
0
0
0


6. 호나우지뉴에 대한 언사[편집]


파일:50781356.jpg

호나우지뉴의 플레이는 예측할 수 없다. 그가 왼쪽으로 갈지 오른쪽으로 갈지 알아내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를 상대하는 수비수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호나우지뉴의 플레이를 예측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 뿐이다.

윌리엄 갈라스


호나우지뉴가 뛰어난 선수라는 점은 트릭을 사용할 때와 단순하게 경기를 풀어나갈 때를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기가 0:0일때 호나우지뉴는 오직 패스에 집중한다. 그가 트릭을 사용하는 것은 경기를 이기고 있을 때 뿐이다.

펠레


바르셀로나와 이후에 밀란에서, 그는 빅 스타였다. 드리블과 패스를 통해 수 많은 골을 만들어냈으며, 또한 놀라운 프리킥을 성공시키곤 했다.

마르코 반 바스텐


볼과 함께 있을 때 마스터다. 그를 보고 있으면 믿을 수가 없다.

히바우두


여태까지 같이 뛰어본 선수중 가장 뛰어난선수? 고르기 어렵지만 딱 한명만 뽑아야 한다면 호나우지뉴를 고르겠다.

카푸


저는 제가 바르사 역사상 최고의 선수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호나우지뉴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항상 저의 첫 골을 도와준 그를 기억합니다. 저는 단지 그의 유산을 이어받기 위해 지휘봉을 잡았습니다.

리오넬 메시


호나우지뉴는 포워드와 플레이메이커 두 분야에서 모두 최고였다.

세르히오 라모스


그가 했던 것들은 축구에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었다. 그는 내가 같이 뛰어본 최고의 선수다.

데쿠


호나우지뉴가 전성기일 당시 그와 함께 경기를 치렀다. 그는 누구도 할 수 없는 것들을 해냈다.라커룸에 들어갔을 때 호나우지뉴가 걱정하거나 압박에 시달리는 표정을 본 적이 없다. 호나우지뉴는 축구는 즐거워야 하기에, 우리 모두가 경기를 즐겨야 한다고 항상 말했고, 실제로도 그렇게 했다.

하비에르 사비올라


지네딘 지단보다 호나우지뉴가 더 좋다. 지뉴는 나의 우상이었으며 13~15살쯤에는 항상 그의 하이라이트를 보고 경기에 들어갔다. 언제나 나에게 최고의 선수다.

헤나투 산체스


호나우딩요는 대단한 선수다. 나는 호나우딩요야말로 의심의 여지가 없는 최고의 선수라고 생각한다.

디에고 마라도나


수비수들이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리플레이 버튼이 필요할 것이다.

프랑스 스포츠 전문지 레키프



7. 사건사고 및 논란[편집]



7.1. 위조여권 사기논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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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3월 5일(현지시간) 파라과이수도 아순시온주 호텔에서 위조 여권을 사용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브라질 여권이 아닌 아는 사업가가 선물한 파라과이 여권을 사용한 것. 이때 호나우지뉴는 자국 여권 자체를 몰수당한 상태였는데, 이유는 호나우지뉴가 브라질 내 보호구역에 불법으로 부두를 증축한 혐의로 체포되어 벌금이 청구되었는데 벌금+이자를 갚지 않자 여권을 몰수한 것. 결국 위조 여권을 사용한 혐의로 체포되어 교도소로 갔다.

본인은 선물받은 여권이라 당연히 쓸 수 있는 여권인줄 알았다며 문제가 될 줄 몰랐다고 주장했다. 변호사도 호나우지뉴가 바보(...)라 입국심사 자체를 의례적인 것으로 여겼다며 선처를 부탁했다. "호나우지뉴는 바보라서 몰랐다" 변호사의 '위조여권' 해명. 그런데 정작 브라질과 파라과이는 국경 간 협약을 맺어 입국할 때 여권이 필요없다고 한다. 바보 맞네 그래도 교도소에선 친선배 풋살 대회에 출전해 5골 6어시스트를 기록하는 등 감방 동료들과 잘 지냈다고 하며, 이때 축구화가 없어 출전하지 못할 뻔했는데 교도관이 축구화를 빌려주었다고 한다.

이후 2020년 4월 7일 보석금을 내고 출소했다. 교도소 동료들이 출소할때 아쉬워하며 출소 기념 깜짝 바베큐 파티도 열어주고 호나우지뉴도 다시 한번 오겠다는 농담을 남기며 훈훈하게(?) 마무리되었다고 한다.


8. 여담[편집]


  • 이름 Ronaldinho는 한국어로 풀이하자면 작은 호나우두. 본명은 호나우두 지아시스 모레이라(Ronaldo de Assis Moreira)로 호나우두다. 다만 국대 선배 중에 호나우두가 있기 때문에 작은 호나우두라는 의미의 호나우지뉴로 불리게 된 것.
  • 과거 국내에서는 Ronaldinho를 "호나우딩요"라고 많이 불렀지만[23], 해당 이름의 발음은 [ʁonawˈdʒĩɲu]이다. 즉, "-dinho"의 표기는 딩요보단 지뉴에 가깝다. 이에따라 각종 언론 매체에서 호나우지뉴라 부르기 시작하면서 이쪽이 정착되었다.[24] 다만 애칭(?) 비슷한 개념으로 "딩요"라고 부르는 사람이 많다. 간혹 호날두까지 껴서 헷갈려하는 사람도 있다.

  • 브라질 내에서는 호나우지뉴 가우슈(Ronaldinho Gaúcho)로 불린다. 이렇게 불리는 까닭은 호나우지뉴가 국가대표에 처음 불렸을 때(1999년) 대표팀의 중심 선수는 우리가 잘 아는 호나우두 루이스 나자리우 지 리마였는데, 호나우두 역시 1976년생이므로 나이가 20대 초반밖에 안되는 어린 선수였기 때문에 '작은 호나우두'라는 뜻으로 호나우지뉴라고 불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호나우두와 구분 짓기 위해 뒤에 가우슈를 붙인 것이다. 유럽 진출 이후로는 마케팅 차원에서 가우슈라는 부분을 뺐으나, 브라질 복귀 이후 자국민에게 친근한 별명인 가우슈를 다시 살렸다. 페이스북 및 트위터의 표기 역시 Ronaldinho Gaúcho를 사용 중이다.


  • 달려가면서 양손으로 하는 샤카(shaka sign)[25]와 코너에서 삼바춤을 추는 골 셀러브레이션을 자주 취하곤 했다.

  • 2002년 한일 월드컵 선정 가장 못생긴 축구선수 1위에 오르는 영광(?)을 누렸다. 참고로 2위는 이천수(...), 3위는 올리버 칸이었다. 2009년에는 4위를 하며 3위 자리를 이천수한테 내주고 만다.

  • 침대 위에서의 개인기 또한 어마어마하다고 한다(...). 2002 월드컵 당시 호나우지뉴와 잠자리를 했다는 영국 랩 댄서인 리사 콜린스는 인터뷰에서 "그는 마치 드릴 같았다.(like a pneumatic drill)"고 말하는 바람에 호나우드릴(...)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또 그의 전 애인이었던 알렉산드라 파레상은 침대 위에서의 호나우지뉴를 이렇게 표현했다.
'호나우지뉴는 축구 뿐만 아니라 침대위에서도 예술가다. 8번째 그가 힘을 주었을때는 마치 드릴로 몸을 파고 드는것 같았으며 그 순간 나는 기절했다. 처음에는 베컴을 원했지만 호나우지뉴와 사랑을 나누고 나서는 그런 맘이 사라졌다.
이로 인해 2006년 폭스스포츠에서 선정한 역대 플레이보이 축구인 7위에 오르기도. 이러니 축구 연습할 틈이 있긋나

  • 명품 옷과 신발을 곧잘 걸쳤는데, "그 얼굴에 왜 그리 명품에 집착하나요?"라는 기자의 질문에, "내가 이렇게 생겼는데, 옷이라도 잘 입어야죠."라 대답하기도 했다. 사실 뱃살 나오기 전만 해도 운동과 춤으로 다져진 몸이라 의외로 옷핏은 제법 나왔다.

  • 상기한 기자 질문에 속이 상했는지 어쨌는지, 2013년 치아미백과 잇몸 성형수술을 받았다고 한다.

  • 최초로 축구선수의 이름을 딴 R9[26] 브랜드를 만든 나이키는 호나우지뉴의 활약상을 보고 R10을 만들지만...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 호나우지뉴가 NASA의 협력업체를 방문한 사진이 올라오자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한 외계인" 등의 드립이 일부 커뮤니티에서 흥하기도 했다.

  • 아르헨티나 대표팀이 훈련을 마친 뒤 스타디움에서 빠져 나가는 데 이때 리오넬 메시에게 접근한 모 팬이 호나우지뉴와 꼭 닮아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심지어 호나우지뉴의 지인인 메시조차도 순간 착각했다가 빵 터졌을 정도.[27] 여기서 나온 드립이 '딩요 애미도 속겠다'.

  • 2018년 브라질 대선에서 보우소나루를 공개 지지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28] 본인은 "우리에게 행복을 돌려줄 후보를 뽑았다"라고 발언했는데, 이에 대해 당시 바르셀로나 대변인 조셉 바이브스는 "우리의 민주주의적 가치는 이 후보가 최근 한 발언과 일치하지 않는다"라며 팀 레전드이자 현직 팀 홍보 대사의 정치 행보에 우려섞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29] 때문에 아예 호나우지뉴가 브라질 정치판에 입문할 것이라는 루머가 돌기도 했으나 이후 잠잠한거 보면 아닌 모양.

  • 2016년, 2017년에 앨범을 발매해 가수로 활동했다. 2021년엔 브라질 힙합그룹 트로파 도 브루소(Tropa do Bruxo)와 함께 활동하며 뮤직비디오에도 출연하고 진지하게 음악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 2018년 11월 기준으로 현재 통장잔고가 6유로(7600원)에 만 25억원 정도라는 소식이 들려왔다.(...) 명품 그만 사 친형과 함께 구아이바 강에서 낚시배 부두를 지으려다 이게 하필이면 보호구역 내에서 짓는 바람에 불법건축 혐의로 벌금형 + 모기지 대출로 인한 높은 이자로 인해 채무를 지게 되었다고 한다. 심지어, 브라질 법원으로부터 계좌 압류에 여권까지 압수당했다. 이유는 많은 채무를 진 상태에서도 보란듯이 광고 촬영을 명목으로 일본이나 중국을 방문하고, 아프리카나 유럽에 가서 자신의 이름을 딴 나이키社 신발을 홍보하는 등, 명백한 수입을 얻을만한 증거들이 있다고 판단했기에 압수했다고 한다. 링크1 링크2 참고로 호나우지뉴가 홍보하는 신발은 지난 9월에 나이키에서 발매한 티엠포 레전드 7 10R이다.

  • 2020년 3월. 브라질 매체 '테라'는 5일(한국시각) "호나우지뉴가 형과 함께 위조 여권으로 파라과이에 입국했다가 호텔에서 체포됐다"(...)고 보도했다. 여권이 압류된 상태에서 자서전 발간 행사 등에 참여하려고 가짜 여권을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호나우지뉴 측은 어느 사업가로부터 선물받은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후 아순시온에 위치한 교도소에 수감되었는데, 교도소에서 열린 풋살대회에서 5골 6어시스트를 기록하며 11-2 대승을 이끌었다고 한다.# 이후 한달만에 보석을 허가받아 일단 교도소에서는 풀려났다.


  • 2005년생 아들 주앙 멘지스가 있는데 2018년 크루제이루 EC에 입단하여 축구선수로 성장하고 있다. 키가 2019년 기준으로 178cm, 이미 아버지만큼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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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로망스어게르만어권의 인명이나 지명의 관사는 발음의 변화를 반영하지 않은 채 뒤 요소와 붙여 적는다.[2] 자신의 선수명을 호나우지뉴라고 정한 이유는 자신의 본명과 같은 이름이면서, 당대 브라질 최고의 선수인 호나우두에 대한 존경심을 담아 작은 호나우두라는 뜻이기 때문이라고 한다.[3] 2007년 8월 24일 국적 취득.[4] 현역 시절에는 76~85kg대였다.[5] 통계적으로 가장 많은 혈액형은 A형이다. 묘한 건 스포츠 계 스타들 중에는 골프처럼 O형이 많다는 것. 축구가 그렇다. 대표적인 축구 스타 데이비드 베컴이나 웨인 루니는 당연히 O형일 터. 한때를 풍미했던 잉글랜드 출신 축구 스타 제라드, 램퍼드, 테리도 모두 O형이다. 뉴스기사[6] 스페인의 7인제 축구 리그인 킹스 리그 소속의 축구팀.[7]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최다 득점 공동 8위.[8] 나머지 7명은 시간 순으로 바비 찰튼, 프란츠 베켄바워, 게르트 뮐러, 파올로 로시, 지네딘 지단, 히바우두, 카카[9] 당시 호나우지뉴의 위상을 쉽게 설명하자면, 리오넬 메시 이전 바르셀로나의 에이스였다.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이후, 포텐이 터진 2004~2006년이 보통 최전성기로 언급되는 기간이다. 이 기간 그는 2005년 발롱도르, 2004 · 2005년 FIFA 올해의 선수, 2004 · 2005년 월드 사커 올해의 선수, 2006년 UEFA 올해의 클럽 축구 선수를 수상하며 개인상을 모두 싹슬이했다.[10] 11-12 시즌에는 실제로 이 패턴이 간파당해 다음시즌 전반기까지 상당히 고전하였다. 다만 후반기에 들어서 팀플레이에 눈을 뜨고 패턴이 다양화되면서 그 이후로는 슈퍼 크랙의 모습을 계속해서 보여주었다.[11] 특히 리오넬 메시처럼 순간 가속 능력이 뛰어났다.[12] 한국에서는 크랙을 스피드와 드리블로 돌파해서 직접 슛을 노리는 선수로 좁혀서 생각하지만 외국에서는 못 막으면 크랙이라고 한다. 한국식으로는 크랙이 아니라 플레이 메이커에 가깝겠지만. 크랙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크랙의 원래 정확한 정의는 '대치상태를 깨고 경기의 흐름을 뒤집을 수 있는 역량을 지닌 선수'이다. 그런 의미로 생각하면 전성기 호나우지뉴는 충분히 크랙이라 불릴 수 있는 선수다.[13] 물론 2000년대 이후에도 중앙에 배치된 일반적인 공격형 미드필더가 플레이메이킹을 하는 경우는 있다. 이스코 알라르콘, 히카르두 카카, 웨슬리 스네이더르, 메수트 외질 등. 스네이더르는 탈압박과 드리블 능력이 떨어지고 지공 상황에 약해서 한계가 있다. 외질은 수비적인 능력이 떨어지고 피지컬과 탈압박 능력이 떨어져 아스날 FC에서 점점 계륵화되었다.[14] 골 먹힌 이후 체흐의 얼빠진 표정이 레전드다.[15] 이 중 전성기였던 바르사에서의 5시즌 동안 프리킥 골 수가 (국가대표 경기를 제외하고도) 25골이나 된다.[16] 2022년 10월 기준.[17] 바르셀로나 말년에 팀 훈련에 단 한번도 참가하지 않고 클럽에서 술만 마시고 놀기에 바빴다.[18] 호리호리한 체형에서 배가 나온, 마치 조기축구회의 아저씨들 같은 모습으로 변했다.[19] 2군[20] 돈 발롱 어워드[21] 2000~2009[22] B팀[23] 그 외에도 주니뉴 파울리스타 역시 마찬가지로 '주닝요'라고 많이 불렀다.[24] 다만 어디까지나 이는 브라질 포어 표준에서 제시하는 발음이고 매우 많은 방언에서 비음 자음 m, n, nh 앞 모음에 비음을 첨가해서 발음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특히 nh(/ɲ/)의 경우 앞 모음에 비음을 첨가하고 자음은 반모음화(/ɲ/→/~j/)되는 경향이 강하다. 즉, 현지인의 발음을 실제로 들어보면 '호나우지뉴'(/ʁonawˈdʒiɲu/)보다는 '호나우징유'(/ʁonawˈdʒĩju/)처럼 들린다. 세징야(Cesinha)가 K리그에 등록할 때 '세지냐'가 아닌 '세징야'로 등록한 것도 이것 때문이다.[25] 엄지와 새끼손가락을 펴고 흔드는 것.[26] 브라질 호나우두 RONALDO의 R과 그의 상징적인 등번호 9를 합친 브랜드.[27] 정말 착각하긴 했는지 주변의 다른 팬들이 난입할 때는 심드렁하게 반응하던 메시가 이 짭딩요 팬은 등장할 때부터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다가오자 먼저 손을 내밀기까지 했다. 영상. 이후 착각한 걸 알고도 호나우지뉴와 너무 닮았다고 생각했는 지 완전 빵 터졌다. 팬도 머리 스타일 등 호나우지뉴를 따라한걸 보면 본인이 닮은걸 아는 모양.[28] 사실 당시 보우소나루는 호세프 대통령 탄핵 이후 유력 경쟁자 룰라 전 대통령의 대선 출마가 불가능해지면서 여론조사상 1위 후보긴 했다. 그래서인지 호나우지뉴 외에도 히바우두, 카푸, 카카 등 평소 정치 성향을 잘 드러내지 않는 편인 브라질 축구판에서 의외로 상당수 축구선수들이 보우소나루를 지지했었다. 덕분에 당시 브라질 전역의 축구팬 단체들이 팬심과 무관하게 보우소나루만은 안된다며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선언문을 내는 등 당시 브라질에서도 꽤나 논란이 됐다. 이런 흐름에 대해 브라질 민주화를 위해 싸운 전 축구선수 월터 카사그란데는 "80년대 소크라테스와 나는 민주주의와 축구선수들이 공개적으로 정치 발언을 할 권리를 위해 싸웠다. 현재 보우소나루를 지지하는 선수들이 그의 정책 방향에 대해 얼마나 아는지 의문이 든다"고 말하면서도 "당시는 군사 정부와 시민 사회 간의 정치적 대립이 명백했던 시절이다. 지금은 부패한 정치인과 싸우는 '정직한 사람들'이라는 프레임이 있다. 보우소나루가 이 프레임을 잘 활용한 사례"라고 말하기도 했다.[29] 참고로 바르셀로나는 스페인 군사정권 당시 탄압받은 대표적인 지역이라 지금도 민주 진영 강세 지역이다.


  • 골닷컴에서 시대별 최고의 선수, 최고의 미드필더 5인을 각각 선정했는데, 2000년대 최고의 선수와 미드필더 1위에 이름을 올렸다.


8.1. 메시와의 인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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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의 등번호 10번과 에이스 자리를 계승한 리오넬 메시와의 인연으로 유명하다. 클럽 내부에서는 메시파와 호나우지뉴파로 여론이 갈리어 정치적인 다툼이 발생했지만 정작 두 선수는 처음부터 끝까지 사이가 매우 좋았기 때문이다. 축구 경력이나 위상에서 넘사벽으로 차이가 나는데다 브라질 vs 아르헨티나라는 필연적인 라이벌리에도 불구하고, 호나우지뉴는 성격도 내성적이고 나이도 가장 어렸던 당시 메시의 1군 적응을 적극적으로 도와줬다고 한다. 사실 호나우지뉴 입장에서 보면 당시의 메시가 아무리 어렸다고는 해도 언젠가 자신의 자리를 빼앗을 만큼 위협적인 선수였는데도 경쟁심이나 질투는 커녕 오히려 메시가 빨리 데뷔하고 성공할 수 있도록 가장 열렬히 지원하고 지도해줬으며, 팀에서 방출된 이후로도 자신의 자리를 계승한 메시의 성공을 누구보다 축하해 주었다.

메시가 1군 훈련에 처음 합류했을 때 첫만남을 가졌는데, 당시 실빙요나 차비 에르난데스 등 1군 선수들이 메시의 재능에 깜짝 놀랐었고 특히 호나우지뉴는 메시는 자기보다도 더 뛰어난 선수가 될거라며 극찬을 퍼부었다고 한다. 중요한건 이 당시 메시의 나이가 16살, 말그대로 어린 시절이었다는 것. 덕분에 이 이야기를 들은 주변 선수들이 팔불출이 심하다며 웃었다고 한다. 훈련을 마치고 호나우지뉴 본인이 평소 잘 알던 기자에게도 방금 나를 뛰어넘을 만한 선수를 만나고 왔다고 이 이야기를 했는데 이 기자도 어이없어 했다고 한다. 그러나 본인은 진지했던 모양인지 자신의 절친인 코비 브라이언트를 만나는 자리에도 리오넬 메시를 대동하고 나가선 세계 최고의 선수가 될 녀석을 소개해주겠다고 당당하게 말해서 브라이언트도 속으로 어이없어 했다고 한다.[30]

호나우지뉴는 이때부터 메시를 눈여겨보고 거의 가족처럼 대해주었다고 하는데, 조국인 브라질과 불구대천의 라이벌인 아르헨티나 출신에, 성격도 전혀 달랐던 어린 유망주 메시와 당시 최고의 스타였던 호나우지뉴의 우정은 상당히 주목 받았었다. 단순히 립서비스 뿐이 아니었던 것이, 이당시 메시가 B팀으로 차출되며 더이상 1군 훈련에 합류하지 않게되자 1군 선수들과 호나우지뉴가 당시 감독 레이카르트를 찾아가서 B팀에 있을 재목이 아니라며 메시의 1군 승격을 강력히 요구했다고 한다.

물론 메시는 어릴때부터 바르셀로나 내부에서도 유명한 미래의 스타였지만 외국인인데다 허약한 피지컬이란 제약이 있었고 무엇보다 그렇게 어린 나이의 실전경험도 없는 선수를 성인팀에 넣는다는 것은 지금으로 봐도 대단한 도박이었다. 메시의 월반 속도는 그 실력을 감안하고 봐도 비정상적으로 빠른 구석이 있었는데 여기에는 메시의 재능을 일찌감치 알아봤던 클럽 내부 인물들과 호나우지뉴 등 1군 멤버들의 강력한 푸쉬도 한몫했다. 이후 호나우지뉴는 메시의 데뷔골까지 어시스트하며 그를 살뜰히 챙겨주었다. 호나우지뉴는 이 장면을 자신의 축구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으로 꼽고 메시라는 선수의 시작을 알린 장면이라며 평생동안 잊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이후 바르셀로나를 떠난 뒤에는 자신의 축구 인생에 있어 유일한 후회는 메시가 커가는 모습을 좀더 오래도록 지켜보지 못했단 것 하나 뿐이라는 말까지 했다. 그가 메시를 얼마나 아꼈는지 알 수 있는 일화. 메시 역시 호나우지뉴를 친형처럼 따랐기 때문인지 그의 이적을 극구 반대했었다. 호나우지뉴가 떠나고 본인이 원탑 에이스를 맡으면서 본격적인 성장을 꽃피웠음에도 당시 바르셀로나 회장이 이젠 메시가 새로운 리더라며 그의 집으로 찾아왔을 때 내 친형과 같던 사람을 떠나보냈다며 원망했다고 한다.

2015년 당시 카탈루냐 방송사에서 등번호 10번의 전임자이던 호나우지뉴에게 싸인한 져지를 선물하는 이벤트를 마련했는데 여기서 메시가 인터뷰 영상에서 당시 상황을 회고하며, 팀이 (호나우지뉴를) 그런 식으로 대접하면 안되는 거였고, 그의 명성에 걸맞는 대우가 아니었다고 오히려 바르셀로나의 처사를 비판했다. 이에 반해 호나우지뉴는 자신이 새로운 도전이 필요했던 거고 팀과 자신 사이에 갈등이 없었으며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은퇴 발표 직후에 메시 역시 다음의 글을 본인의 SNS에 올리면서, 선대 바르셀로나 에이스이자 조력자였던 그의 은퇴를 기념하였다.

"항상 말했듯이, 나는 형의 곁에서 많은 것을 배웠어. 내가 드레싱 룸에 처음 입성했을 때, 나에게 해준 모든 것들이 얼마나 편안하게 다가왔는지에 대해서도 항상 감사하게 생각할 거야. 형과 함께 많은 경험을 공유할 수 있던 건 행운이었지. 또, 형은 경기장에서는 엄청난 퍼포먼스를 보여준 천재(fenómeno)이기도 했지만, 인간적으로도 정말 좋은 친구였어. 아마 그게 가장 중요한 부분 아닐까? 형이 은퇴를 하더라도, 축구는 절대 형의 미소를 잊지 못할 거야. 항상 좋은 일만 가득하길, 로니."


[30] 아이러니하게도 메시가 정말 세계 최고의 선수가 되고 난 뒤, 둘은 나중에 터키 항공 광고를 같이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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