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 0)
분류
1. 개요[편집]
아르헨티나의 작가.
2. 생애[편집]
2.1. 어린 시절[편집]
호르헤 프란시스코 이시도로 루이스 보르헤스는 1899년 8월 24일에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났다(이하 편의상 ‘보르헤스’로 지칭한다.) 영국 출신인 친할머니의 영향 때문에 어려서부터 집안에서는 ‘호르헤’가 아니라 ‘조지’로 호칭되었으며, 영국인 가정교사에게 기초 교육을 받았다. 모국어인 에스파냐어보다 영어를 더 먼저 말하고 읽었던 유년기의 이중 언어 체험은 훗날 보르헤스의 영어권 문화에 대한 애착, 그리고 세계시민적인 사고방식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어린 시절부터 책을 가까이 했던 보르헤스는 9세 때에 오스카 와일드의 동화 “행복한 왕자”를 에스파냐어로 번역해서 신문에 투고했다. 이때 번역자의 이름이 ‘호르헤 보르헤스’라고만 실리자, 사람들은 이 신동의 아버지 ‘호르헤 기예르모 보르헤스’에게 찾아와 번역이 훌륭하다고 칭찬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보르헤스 부자에게는 이름과 문학적 소질 말고도 또 한 가지 불운한 공통점이 있었다. 대대로 이 집안의 남자들에게는 시력이 약화되어 결국 상실되는 유전적 질환이 있었던 것이다.
1914년에 보르헤스 일가는 시력의 약화로 변호사 업무를 그만둔 가장의 치료를 위해 유럽 여행을 떠난다. 보르헤스는 스위스와 이탈리아 등지에 몇 년씩 머물면서 프랑스어와 라틴어를 공부했고,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19년부터는 에스파냐에 살면서 모국어인 에스파냐어 구사 능력을 더욱 향상시켰다. 이 시기에 그는 당시 에스파냐에서 유행하던 아방가르드 문예 사조인 울트라이스모(극단주의)에 심취했으며, 그 방면의 문인들과 교제하며 습작을 시도했다.
1921년에 보르헤스 일가는 7년간의 유럽 여행을 마치고 아르헨티나로 돌아온다. 유럽 문화계의 최신 유행을 직접 체험하고 돌아온 보르헤스는 간결성과 압축성을 강조한 울트라이스모 운동을 아르헨티나 문단에 전파하는 한편, 첫 시집인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열기](1923)를 펴내서 좋은 평가를 얻는다. 1923년에 보르헤스 일가는 다시 한 번 유럽으로 떠난다. 역시나 부친의 치료를 위한 이번 체류 동안에 보르헤스는 다시 한 번 유럽 문화계를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경험하는 기회를 얻는다.
2.2. 작가 활동[편집]
1924년에 고향으로 돌아온 보르헤스는 자신의 경력에서 중요한 몇 사람을 만나게 된다. 우선 문화계의 큰 후원자였던 빅토리아 오캄포가 이후 권위 있는 문예지로 성장한 <수르(南)>를 창간하고 보르헤스를 공동 편집인으로 초빙한다. 빅토리아의 동생이며 역시 작가인 실비나 오캄포, 그리고 그녀의 남편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 역시 보르헤스와 절친한 사이가 되어서 여러 권의 공저를 펴냈다. 특히 카사레스와 보르헤스는 필명으로 추리 소설을 합작하는 실험을 벌이기도 했다.
보르헤스는 여러 신문과 잡지에서 편집자로 일하면서 칼럼을 기고했고, 그 과정에서 점차 소설 창작을 병행하면서 최초의 단편집 [불한당들의 세계사](1935)를 펴낸다. 1935년에 보르헤스는 한동안 극심한 불면증에 시달렸고, 여름의 더위까지 가세하자 더 이상 버티지 못한 나머지 권총 자살을 시도했다가 불발로 목숨을 건진다. 이미 30대 중반이었던 그는 문단에서 제법 명성을 얻었지만, 부친의 실명으로 가세가 기울면서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1937년에 보르헤스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소재 미겔 카네 시립도서관에 사서로 취직한다. 업무가 간단한 대신 월급도 많지는 않았으며, 문학에는 무지한 동료들로부터 냉대까지 감수해야 했지만, 그 대가로 그는 지하 서고에서 혼자 책을 읽으며 창작에 몰두할 시간을 얻을 수 있었다. 1938년에는 중요한 사건이 두 가지 벌어졌다. 하나는 부친이 결국 사망한 것이었고, 또 하나는 시력이 약한 보르헤스가 계단을 오르다 열어놓은 창문에 머리를 부딪친 후유증으로 한 달 가까이 병석에 누운 것이었다.
이때 그는 병석에 누운 상태에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야기를 종이에 옮겼고, 그 작품이 바로 <수르>에 발표된 단편소설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작가’(1939)였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창작된 ‘보르헤스적 단편소설’들은 1941년에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으로 엮여서 간행되었으며, 그 증보판이 1944년에 [픽션들]이라는 제목으로 간행됨으로써 보르헤스의 명성을 굳혀주었다. [픽션들]은 [알렙](1949)과 함께 보르헤스의 문학 세계를 대표하는 작품집으로 손꼽힌다.
1940년대의 아르헨티나는 정치적 격변을 연이어 맞이하고 있었다. 보르헤스와 동년배였던 군인 후안 페론이 1943년에 쿠데타를 일으켰고, 급기야 1946년에 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된다. 페론과 그의 아내(그 유명한 ‘에비타’)에 대해서는 예나 지금이나 찬반양론이 엇갈리지만, 대중에 영합하는 선심성 정책을 남발한 나머지 훗날 경제 파탄의 원인을 제공하고 자유를 억압한 독재자임은 분명했다. 무솔리니와 히틀러의 성공 사례를 주목한 페론은 아르헨티나에서도 일종의 국가사회주의를 주창했다. 보르헤스를 비롯한 아르헨티나의 지식인들은 페론에게 반대하는 시국 선언문을 발표했지만, 책이며 지식인에 대한 멸시를 공개적으로 드러내던 페론으로부터 도리어 거센 반격을 받게 되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시국 선언문에 참여한 지식인 중에서는 보르헤스가 일종의 본보기로 선정되어 특별히 모욕적인 대우를 받았다. 1946년에 도서관 사서였던 그에게 동물시장의 가축 검사관이라는 엉뚱한 직책으로 전보 발령이 내려왔던 것이다. 이에 승복할 수 없었던 보르헤스는 사직서를 내고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47세의 나이에 갑자기 실직자가 된 보르헤스는 생계를 위해 대중을 상대로 문학 강연을 시작한다. 처음에는 강연 원고를 쓰느라 잠을 못 이루는가 하면, 심지어 강연장에 들어서기 직전에 독한 술을 한 잔 마셔서 흥분된 마음을 진정시켜야만 했지만, 그는 점차 강연에 익숙해지게 되어서 대중에게 이름을 알림과 동시에 안정된 생활도 누리게 된다. 독신에다가 점차 눈이 나빠지는 상황에서, 보르헤스는 일상생활은 물론이고 독서와 집필 같은 업무에서도 연로한 어머니에게 점점 더 많이 의존하게 되었다.
강연과 기고로 명성이 점차 높아지면서, 보르헤스는 활발한 집필 활동에 돌입한다.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는 단편집 [알렙](1949)과 산문집 [또 다른 심문](1952), 그리고 1950년대부터 나온 여러 동료 작가들과의 공동 편저서가 있다. 페론은 1951년에 재선에 성공하지만 이듬해에 ‘에비타’가 사망하면서부터 급격히 인기를 잃기 시작했다. 급기야 1955년에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페론은 해외로 추방되었고, 이후 아르헨티나의 정치 및 경제 분야에서는 불안과 혼란이 그칠 줄 몰랐다.
2.3. 실명과 말년[편집]
보르헤스는 새로운 정권의 배려로 국립도서관장에 임명된다. 이 파격적인 조치는 그가 10년 전에 페론 정권의 입김으로 시립도서관 사서직을 그만둬야 했던 굴욕에 대한 보상인 셈이었다. 하지만 보르헤스는 이미 거의 시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1927년부터 무려 8회나 안과 수술을 받았지만, 결국 가계에 흐르는 실명의 저주를 피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무려 80만 권의 책을 관리하게 되었지만, 정작 단 한 권의 책도 읽을 수는 없었던 아이러니를 그는 ‘축복의 시’(1958)에서 이렇게 서술했다.[1]
누구도 눈물이나 비난쯤으로 깎아 내리지 말기를.
책과 밤을 동시에 주신
신의 경이로운 아이러니, 그 오묘함에 대한
나의 허심탄회한 심경을.
신은 빛을 여읜 눈을
이 장서 도시의 주인으로 만들었다.
여명마저 열정으로 굴복시키는 몰상식한 구절구절을
내 눈은 꿈속의 도서관에서 읽을 수 있을 뿐.
1961년에 보르헤스는 사무엘 베케트와 공동으로 제1회 국제 출판인협회 작가상을 수상한다. 이로써 뒤늦게나마 전 세계가 보르헤스에게 주목하게 된다. 미국을 비롯하여 세계 각지에서 수상과 강연 제의가 이어지자, 보르헤스는 어머니와 함께 지칠 줄 모르고 여행을 다녔다.
1967년에는 무려 68세의 나이로 10세 연하인 엘사 아스테테 미얀과 결혼한다. 두 사람은 30년 전에 처음 만났지만, 엘사는 이후 다른 남자와 결혼했다가 미망인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성격 차이로 인해 불과 3년 만에 이혼하고 말았다.
1973년에는 페론이 다시 권좌로 복귀하는 깜짝 놀랄 만한 사건이 있었다. 정치적 역풍 속에서도 보르헤스는 다행히 국립도서관장으로서의 임기를 다 채우고 퇴임한다. 이 즈음에 그는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공인’으로서의 삶에 지쳐 있었다. “이제 나이를 먹고 보니, 보르헤스이기를 그만 두어야 할 것 같다.” 심지어 ‘1983년 8월 25일’라는 단편에서는 그날 자살하겠다는 의향을 암시하기도 했다(물론 실제로는 자살하지 않았고, 그 이유에 관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겁쟁이라서”라고 웃으며 대답하곤 했지만.)
1975년에는 보르헤스의 어머니가 98세로 사망한다. 이후로 그는 38세 연하의 비서 마리아 코다마에게 크게 의지하며 살아간다. 1985년 말에 강연 차 유럽으로 온 보르헤스는 이듬해 1월 26일에 스위스 제네바의 한 병원에 입원했다. 4월 22일에는 코다마와 혼인신고를 올렸는데, 이 결혼은 사실상 자신의 작품에 대한 권리가 전 부인에게 넘어가는 일을 막으려는 조치였다는 해석이 일반적이다. 1986년 6월 14일, 보르헤스는 87세를 일기로 스위스 제네바에서 간암으로 사망하여 그곳의 한 묘지에 묻혔다.
3. 작품 세계[편집]
보르헤스는 20세기 지성사에서 가장 박학다식한 작가이자 라틴문학의 대표 작가로 꼽히고 있다. 그의 백과전서적인 관심은 신비주의 카발라, 기호학, 형이상학, 해체주의, 신화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있다. 그는 간결하고 건조한 문체로 작품을 써냄으로써 리얼리즘이 지닌 상상력의 한계를 뛰어넘어 남미 특유의 마술적 리얼리즘를 이루었으며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보르헤스 책에는 문학의 모든 요소가 다 들어 있다. 그는 인류의 신화와 종교·철학에 대한 기억을 담으면서 압축된 언어와 서술의 경제를 보여줬다.
보르헤스는 '인간이 제한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왜 문학을 하는가'라는 고전적 질문에 새 해석을 제시했다. 보르헤스 문학론을 요약하면 이렇다. "하늘 아래 새로운 문학은 없다. 모든 책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 '상호 텍스트'다. 작가와 독자는 텍스트를 매개로 해서 하나가 될 수 있다. 셰익스피어를 읊는 사람은 누구나 셰익스피어다. 인간은 허구의 창조자이기도 하지만 그 자신이 허구이기도 하다. 우리가 알고 있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허구다. 우리는 어둠을 견디기 위해 꿈을 꾼다. 우리는 꿈을 꾸지만 누군가의 꿈속의 인물이기도 하다. 위대한 작가는 후배 작가들의 글 속에서 희미하게 되살아나 영생을 누린다. 작가는 누구나 앞선 작가들의 영향을 받았기에 독창적인 그 누구도 아니지만, 오히려 아무도 아니기에 죽지 않는 사람이 된다."
그의 아버지는 작가 및 변호사로 활동했는데, 어머니(보르헤스에게는 할머니)가 영국 여성이었다. 이러한 집안 배경에 따라 가정에서 스페인어보다도 영어를 더 많이 접하게 되었고, 보르헤스 자신도 영어로 생각하고 스페인어로 말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정도로 여러 언어를 사용하는 것에 익숙했다. 가족들과 함께 유년기와 젊은 시절을 스위스, 스페인, 마요르카 등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보냈고 1919년 스페인에서 최후주의 운동을 주도하다가 1921년 고향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돌아와 문예지 <프리즘>을 창간하면서 본격적으로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1938년 머리를 심하게 다쳐 패혈증으로 거의 죽기 직전까지 갔는데 그 뒤 자신의 정신이 온전한지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되었고, 그 뒤부터 그것을 원동력으로 삼아 본격적으로 소설을 창작하기 시작한다.[2]
시인으로 시작해 기호학, 해체주의, 환상적 사실주의, 후기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등 20세기 문학사, 나아가 지성사의 키워드 대부분을 섭렵한 먼치킨. 굳이 이름붙이자면 환상소설에 가깝지만 보르헤스 소설의 기반은 어디까지나 환상적 사실주의. 20세기 모더니즘의 경직된 세계를 허물었다고 평가받는다.[3] 덕분에 인문학과 철학 쪽 문헌에서 자주 인용되는 편. 철학 교재로 써먹는 대학도 있다고 한다.
환상문학 전반에 관심이 있어서, 프란츠 카프카, 에드거 앨런 포,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와 같은 탈모더니즘적인 문학에 깊은 소양을 지니고 있었다. 실제로 포의 팬이라 10년이라는 긴 세월을 투자하여 포의 책을 스페인어로 번역했다.[4]
그의 단편소설은 다시 쓰기, 혹은 추리 소설의 면모를 보이고 있다. 보르헤스는 착상을 한 아이디어를 그대로 서술하지 않고, 그 착상을 서술한 책이 있거나 역사적 사실이 있다고 거짓말을 한 후 그 사실과 책, 인물에 대해 평을 하는 식으로 적는다. 그 사실과 인물, 책을 추적해 가는 과정은 추리 소설의 모습을 어느 정도 닮아 있다. 그리고 서술이 핵심에 닿을 때쯤이면 어김없이 문장을 끝내 문장과 서술, 상상의 갈증을 표현한다. 이에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보르헤스의 작품들을 처음 읽었을 때 마치 경이로운 현관에 서 있는 것 같았는데 둘러보니 집이 없었다"고 평했다.
또한 평생 동안 단편소설만을 선호했는데, 단편으로 끝낼 수 있는 내용을 굳이 장편으로 적어내는 것은 효율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종이 낭비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만의 철학이 담겨있는 이야기. 보르헤스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언어의 풍부함보단 빈곤함을 추종하라고 말해왔다. 본인의 말에 따르면 짧은 단편은 머릿속에서 퇴고할 수 있으니 편했다고.... 몰라 뭐야 그거 무서워... 그래서 기본적으로 보르헤스 책들은 200 페이지 이내로 얇은 편이다.
4. 평가와 영향력[편집]
보르헤스는 제임스 조이스·프란츠 카프카·마르셀 프루스트 등과 함께 20세기 문학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소설가로 평가된다. 게다가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들에 대한 보르헤스의 영향은 지대했다. 그는 20세기 중반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각자로 평가받는다. 자신만의 독특한 서사 형식으로 문학과 철학 등의 분야에서 세계적인 영향력을 남겼다. 보르헤스는 1960년대 이후 프랑스 철학과 미국 문학의 포스트 모더니즘에 영감을 불어넣는 '사상의 샘물' 역할을 했다. 그의 영향력은 문학에서 뿐만이 아니라 탈구조주의자들에게도 발견이 된다. 탈구조주의자들은 그들의 논리 전개를 위해 보르헤스의 텍스트들을 인용하기도 했다. 보르헤스의 텍스트는 주로 권력적인 이분법의 사고를 해체하는 논리나 경직된 의미해석을 반대하는 논리에 적용됐는데 대표적인 해체주의자 데리다와 푸코의 이론들이 그 예가 된다.
파블로 네루다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5] 같은 작가들과 미셸 푸코와 자크 데리다 등 온갖 쟁쟁한 철학자들의 찬사를 받은 20세기를 대표하는 대문호다.
라틴아메리카 문학은 보르헤스 전과 후로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최초의 라틴아메리카 작가인 보르헤스는 라틴아메리카의 '마술적 사실주의'를 꽃피웠으며, '제 2세대' 라틴아메리카 예술가들이 세계적으로 도약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보르헤스는 라틴아메리카를 벗어나 프랑스의 신소설가들을 비롯 존 바스, 존 허크스, 도널드 바셀미 등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반사실주의 세대 작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5. 논란[편집]
인종차별 발언을 곧잘 했다. 미국처럼 남미 자유주의 지식인 집단은 진보와 문명을 앞세워 원주민 학살에 앞장서 왔는데, 보르헤스도 그 맥락을 잇는건지 원주민 학살을 "문명화"라고 부르면서 옹호하였다.참고 페이지 평론가 호세 미겔 에르난데스는 "그의 문학은 존경받을 가치가 있지만 그의 원주민 문제발언은 나치가 하는 헛소리처럼 무시할 가치만 있다"라고 쓴 소릴 했는데, 에르난데스 같은 경우가 되려 당시, 아니 지금도 남미에서 소수라라고 할 수 있겠다.[6] 우루과이의 작가 에두아르도 갈레아노는 보르헤스를 세계의 불의는 이야기해도 자기 나라 불의는 이야기 안 하는 사람이라고 깠다.[7]
인종차별적 발언 뿐만 아니라 위의 피노체트 건만 해도 그렇고, 이 당시 스페인과 중남미 문학계가 전반적으로 스페인 내전의 참화를 겪고, 냉전 치하 미국의 지원을 받는 우익 군사 독재자들 아래에서 고생하던 시기라 문학계에서 좌파의 세가 강성했던 시절에 혼자 우파적 행보를 걸어서 정치적으로 욕을 많이 먹었다. 일단 본인 나름대로는 나치즘과 파시즘에 대한 반대를 분명히 했고, 위의 인종차별적 발언과는 별개로 독일의 영향을 받은 아르헨티나 내의 반유대주의도 강력하게 비판했다. 하지만 카탈루냐-아르헨티나 사회학자인 마르틴 사그레라가 지적하듯이 나치나 파시즘 같은 "남의 인종주의"를 비난한다고 해서 본인이 인종주의자가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반유대주의가 백인의 통합을 방해해서 다른 인종을 지배하는 데 지장을 준다고 그러는 경우도 많다. 처음에는 후안 페론을 군사 쿠데타로 축출한 군사 독재 정권도 옹호했으나, 조만간 권위주의적 정권이라고 지지를 철회한, 일종의 귀족적 성향과 뚜렷한 원칙을 가진 우파의 모두까기 인형이다.
그런데 이런 소위 말하는 귀족적 인생관 위에 형성 된 독고다이식 우파적 자유주의와, 여기서 비롯된 양비론적인 태도는 당장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의 처형, 미겔 에르난데스의 옥사를 보고 자라 파블로 네루다의 독살을 겪은[8] , 20세기 대서양 양쪽을 할퀴어 놓은 이념 대립의 용광로 복판에 있었던 스페인어권 문학계 내에서 옹호받을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9] 이런 정치관의 차이 때문에 평생 연인 관계였던 여성 번역가이자 문필가 에스텔라 칸토와의 관계도 결국 이어지지 못했다. 보르헤스는 마르크스주의의 철학적 토대를 깔고 있는 기계적 세계관이 인간의 자유와 의지가 아닌 국가의 통제를 숭상하는 공산주의의 폭압성을 낳는다고 주장하며 반공주의적인 태도를 평생 견지한 반면 칸토는 열성적인 공산주의자였기 때문.
6. 국내 번역[편집]
한국에서는 1999년 민음사에서 전집을 발매했다. (시집은 없고[10] 전부 소설집) 여기저기서 보르헤스 책을 번역했지만 정식 번역본으로 인정받는 것은 이쪽. 그런데 이 번역본이 상당히 읽기가 난해하다. 안 그래도 현학적인 문체로 영어권에서도 혀를 내두르는 사람이 수두룩한 작가인데, 하필 번역자가 문학평론가 출신인 황병하 교수였다. 이 사람의 현학적인 번역 탓에 읽다가 중도에 포기하는 사람도 생긴다고. 후에 <픽션들>과 <알레프>가 민음사 세계문학 전집의 일부로서 출간되었다. 번역자는 송병선 교수.[11] 비교적 일상적인 단어를 번역어로 선택했고 너무 긴 문장들을 적절히 끊어 글을 읽기 쉽게 만들었다. <픽션들> 두 번역본에 대한 비교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67168
민음사에서 보르헤스의 논픽션 전집도 번역하였는데, 보르헤스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려면 무조건 읽어야 하는 책들이다. |2021년 4월 7권째 번역이 출간되어 전집 번역이 마무리되었다. https://www.donga.com/news/Culture/article/all/20210420/106490368/1#
7. 작품목록[편집]
7.1. 시집[편집]
-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열기 Fervor de Buenos Aires (1923)
- 앞의 달 Luna de enfrente (1924)
- 산 마르틴 노트 Cauderno San Martin (1929)
- 창조자 El hacedor (1960)
- 타자, 그 자신 El otro, el mismo (1964)
- 여섯 개의 현을 위하여 Para las seis cuerdas (1965)
- 그림자 찬가 Elogio de la sombra (1969)
- 호랑이의 금 El oro de los tigres (1972)
- 심오한 장미 La rosa profunda (1975)
- 동전 La moneda de bierro (1976)
- 밤의 이야기 Historia de la noche (1977)
- 암호 La cifra (1981)
- 음모자들 Los conjurados (1985)
7.2. 단편 소설집[편집]
- 불한당들의 세계사 Historia universal de la infamia (1935)
-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 El jardin de senderos que se bifurcan (1941)[12]
- 이시드로 파로디를 위한 여섯가지 문제 Seis problems para don Isidro Parodi (1942) [13]
- 픽션들 Ficciones (1944)[14]
- 알레프 El Aleph (1949)
- 브로디의 보고 El informe de Brodie (1970)[15]
- 모래의 책 El libro de arena (1975)
- 셰익스피어의 기억 La memoria de Shakespeare (1983)
7.3. 수필집[편집]
- 심문들 Inquisiciones (1925)
- 내 희망의 크기 El tamano de mi esperanza (1926)
-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El idioma de los argentinos (1928)
- 에바리스토 카리에고 Evaristo Carriego (1930)
- 토론 Discusión (1932)
- 영원성의 역사 Historia de la eternidad (1936)
- 또 다른 심문들 Otras Inquisiciones (1952)
- 7일 밤 Siete Noches (1980)
- 단테에 관한 아홉 편의 에세이들 Nueve ensayos dantescos (1982)
- 아틀라스 Atlas (1985)
7.4. 기타[편집]
- 상상동물 이야기 El libro de los seres imaginarios (1967)
- 꿈 이야기 Libro de sueños (1976)
- 보르헤스의 불교 강의 Que es el budismo (1977)
- 말하는 보르헤스 Borges oral (1979)
8. 기타[편집]
- 존 밀턴과 함께 인류문학사의 대표적인 맹인 문인이다.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의 도서관에 틀어박혀 지냈고 거의 평생 동안 도서관 사서로 일하며 책에서 떨어지지 않았던 책벌레. 하도 책을 읽어댄 탓에 30대 후반부터 결국 그 때문에 시력을 서서히 잃기 시작해서[16] 말년에는 완벽하게 시력을 잃고 말았다. 시력을 잃은 뒤에도 어머니나 비서, 친구들에게 대필을 부탁하기까지 하면서 집필활동을 계속했다. 이 책덕심은 결국 시력을 잃은 지 오래인 55세에 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장 자리를 얻게 되면서 보답받게 된다. 1955년 대립각을 세웠던 좌파 페론 정권이 붕괴하자 그는 국립도서관장으로 임명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해에 그는 시력을 잃는다. 그 도서관엔 90만권의 장서가 있었지만, 그에겐 책 표지와 등을 판독할 정도의 시력밖에 남지 않았다. 이런 비극적인 상황에서 그는 ‘축복의 시'를 쓴다. “책과 밤을 동시에 주신/ 하느님의 훌륭한 아이러니”라고. “작가, 아니 모든 사람은 자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것이 유용한 수단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중략) 그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 심지어는 수치와 장애와 불행을 포함한 모든 것은 점토로서, 즉 예술의 재료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을 받아들여 이용해야 합니다.(중략) 실명은 하늘의 선물입니다.”
- 불교나 하이쿠 등 동양 문화에 깊이 심취해 본인이 <보르헤스의 불교 강의(Que es el budismo)>라는 불교 입문서를 직접 저술하기도 했다.[17] 실제로 보르헤스 작품을 보다 보면 특히 '시간'과 관련된 부분에서 불교와 관련된 키워드가 상당히 많이 튀어나온다.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의 정원」과 「알레프」의 경우에는 아예 불교의 업 사상과 화엄 사상을 깔고 있다는 해석이 존재한다.# 청년기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의 책을 읽으며 불교를 접했는데[18] 만년에 그의 고향에서 행한 강연에서 “불교는 인류의 숭고한 문화유산이며, 특히나 나에게는 구원의 길이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상상력'을 강조했던 환상문학의 대가답게 '역사적 부처'보다는 불전문학이나 불교예술 속에 숱하게 등장하는 '전설 속 부처'를 더 강조했으며 그러한 본생담류의 전설과 우화, 부처 자신의 설법 속에 함축된 '비유'나 '가르침'에 보다 주목했다고.# 장자를 최고의 책으로 꼽기도 했다.
- 정치 성향은 세계주의자이자 무정부주의자였다. 젊은 시절에는 열정적인 민족주의자이자 크리오요(남미 식민지 태생의 유럽인 또는 혼혈인)주의자였다.
- 크리스토퍼 놀란이 보르헤스의 애독자다.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보르헤스의 영향을 받았다. 영화의 주인공이 블랙홀에 떨어져 헤매는 공간이 수많은 책꽂이로 이뤄진 '바벨의 도서관'을 연상케 했다. 그는 "예술과 과학, 예술과 수학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연결 고리에 관심이 많았다"면서 "아르헨티나의 위대한 작가 보르헤스의 기막힌 단편소설에서 영감을 얻기도 했다"고 밝혔다. 특히 그의 영화 '인셉션'은 보르헤스 문학의 모티브를 구체적으로 활용한 사례로 꼽힌다. 꿈에서 꿈으로 이동하는 인물들의 활동을 통해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끝없이 갈라지는 이야기의 연속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 당연하겠지만 자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위인 중 하나다. 그는 아르헨티나 문화의 상징이다. 아르헨티나인들은 중학교 때부터 보르헤스 문학을 배운다.
- 탐정소설을 굉장히 긍정적으로 봤다. 탐정소설에 관한 강의에선, 작가를 유일무이한 창조자의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독자를 새로운 해석의 창조자로 세운 ‘저자의 죽음’ 이론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그는 탐정소설의 창시자 에드거 앨런 포를 가리켜 “현대 문학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두 사람 중 한 사람”이라며 이렇게 말한다. “문학 장르란, 작품 자체보다는 작품이 읽히는 방식에 의해 좌우될 거라고. (…) 책은 독자가 펼칠 때에 비로소 존재하기 시작합니다. (…) 탐정소설은 아주 특별한 유형의 독자를 탄생시켰습니다.” 만약 <돈키호테>를 탐정소설이라고 소개받은 사람이 있다면, 그는 매 구절 누가 범인인지 찾아내기 위한 의심을 품고 읽어내려갈 것이란 이야기다.
- 움베르토 에코는 "보르헤스가 없었다면 '장미의 이름'을 쓰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 등장하는 호르헤 수사가 바로 보르헤스를 모델로 했다. 이베리아(스페인어) 출신에 장님이며 도서관을 관리한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호르헤가 있는 도서관 역시 보르헤스의 소설 <바벨의 도서관>에 나오는 도서관을 모티브로 삼은 것이다. 추리소설의 형식을 하고 있다는 것도 보르헤스가 환상을 추리소설의 형식을 빌려 전개한 것에 대한 오마쥬. 호르헤 수사가 자기확신에 가득찬 광신도로 등장한 건 훌륭한 악역으로 설정하는 게 좋은 오마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친구인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와 함께 이시드로 파로디란 탐정을 창조하기도 했다.
- <이시드로 파로디의 여섯 가지 사건>은 당시 문학의 보수적인 문체를 비판하는 풍조를 취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 이처럼 세계적인 대문호로 꼽히지만, 정작 노벨 문학상 수상에는 실패했다.[19] 한림원 측이 칠레의 독재자 피노체트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우파적 성향을 문제시했기 때문이다.[20] 1983년 거의 마지막 기회처럼 여겨지던 노벨 문학상이 윌리엄 골딩(파리 대왕(소설)의 작가)에게 돌아가자[21] 분개한 위원들이 탈퇴하기도 했다. 이를 두고 "보르헤스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지 못한 것은 '보르헤스의 수치'가 아니라 '노벨 문학상의 수치'다." 라는 말도 있을 정도.
9. 관련 문서[편집]
10. 외부 링크[편집]
[1] 우석균 교수의 번역 중에서 인용함[2] 남부(El Sur)라는 단편이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듯 하다.[3] 환상적 사실주의의 한 예로 거의 모든 작품에 하나 둘씩은 꼭 들어가는 가짜 주석들.[4] 러브크래프트에게 헌정한 소설도 있다. 이 경우, 상당히 비슷한 방식으로 써내려가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이다. 하지만 이것은 보르헤스가 러브크래프트의 문체를 짜증스럽게 생각해서 비꼬려는 의도로 흉내 낸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5] 나보코프는 보르헤스를 '무한한 재능을 가진 남자'라고 평했다.[6] 중남미에서 "히스패닉" 분류를 완전히 제외하고 인구조사를 할 경우, 스스로를 백인 아니면 흑인으로 생각하는 이들로 가득하고 자신을 원주민으로 생각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이들 중 상당수가 실제로는 원주민 혈통을 짙게 가지고 있으나 이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경우는 드물다. 간혹 페루 같은 예외가 있기는 하나 이는 페루 공화국의 구성원들이 과거 잉카 제국의 지배계급이었기 때문이다. 볼리비아의 아이마라인들도 잉카 제국 영향력에 포섭당했을 뿐 (강제로 짓밟히기만 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 이전부터 독립된 왕국이 있었다.[7]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놀라운 섬세함과 날카로운 이지로 "수치의 세계 역사"를 말한다. 그러나 그의 나라의 수치에 대해서는 묻지조차 않는다.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불의 기억』. 박병규 역. 도서출판 따님, 2005. P.152-153>[8] 공식 사인은 암으로 인한 심정지이다. 그러나 독살 가능성이 인정된 바가 있다.[9] 얼마나 안 좋았냐면 심지어 스페인 본토에서 좌파적 경향과 거리를 둔 걸로 알려진 미겔 데 우나무노도 발언 잘못 했다가 (반 프랑코적인 내용이었다는 얘기도 있고, 필리핀 혁명가 호세 리잘 찬양이었다는 얘기도 있다. 호세 리잘 찬양이라고 해도 문제였던게 그와 말싸움을 벌인 프랑코 오른팔 호세 미얀-아스트라이는 필리핀 독립운동 진압자 (...)였다. 상대를 잘못 고른 셈.) 린치 당할 뻔하고 심장병으로 돌연사했을 정도였다. 지금도 스페인 예술계는 이에 대한 트라우마가 심한 편인데 보르헤스가 얼마나 고깝게 보였는지는 알 수 있을 것이다.[10] 대신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열기가 민음사 해외 시집선을 통해 발매되었다.[11] 보르헤스의 작품뿐만 아니라 현재 한국 서점에 알려진 유명한 라틴아메리카 문학 작품의 상당수가 송병선의 번역을 거친 것이다. 한국에서 라틴계 문학은 번역 전문가가 별로 없어서 송병선, 조구호 등 4~5명이 거의 모든 작품들의 번역을 맡았다.[12] 픽션들의 1부에 해당[13] 공저 Adolfo Bioy Casares[14] 바벨의 도서관이 여기에 수록되어 있다.[15] 국내에는 창조자에 수록된 소설들과 묶여 칼잡이들의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16] 독서가 시력 약화에 한몫한건 사실이지만 정확한 이유는 유전 때문이다. 부계 쪽 혈통이 문제. 보르헤스의 아버지는 보르헤스가 벽안(어머니가 벽안이다)인 것을 보고 뛸 듯이 기뻐했으나, 보르헤스가 성장하면서 벽안에서 갈색 눈으로 바뀌는 걸 보고 운명을 직감했다고. 이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가 어느 정도 사실인게, 보르헤스가 도서관에서 알바(?) 비슷한 걸 뛸 때 왕따를 당하는 걸 감수하고라도 지하 책창고에 숨어들어서 작은 불빛에 책을 읽으며 눈을 혹사했다. 이 시절 시력 감퇴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수준이 되었다.[17] 이 책은 1998년에 한국에도 번역되었다. 역자는 김홍근. 현재는 절판되어 시중에서 구하기 어렵다.[18] 쇼펜하우어 본인도 불교에 관심이 많았고 그의 사상과 철학을 정립하는데 불교의 영향도 있었다. 다만 쇼펜하우어의 불교 이해는 실제 불교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는 비판도 존재한다.[19] 스페인어 문화권에서 노벨상 격이라고 일컬어지는 세르반테스상을 수상한 적은 있다[20] 하지만 노벨문학상 수상자 목록에는 모택동, 스탈린, 카스트로 같은 사회주의 독재자들을 긍정적으로 평했던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어서 한림원이 좌파적으로 경도되어있다는 여론이 꾸준히 제기된다. 이에 대해 백년의 고독의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찬양을 빙자한 빈정거림이 분명했는데, 서구인들에게 잘못 받아들여진 것이라고 평했다. 마르케스가 쿠바의 독재자 피델 카스트로의 절친한 친구임에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던 것을 생각하면, 설득력이 있는 평.[21] 다만 골딩의 명예를 위해 말하자면 파리 대왕도 노벨상을 타기에 손색없는 걸작임은 분명하다.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4-08-09 12:43:10에 나무위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