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리우치 츠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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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호리우치 츠네오 (堀内 恒夫)
생년월일
1948년 1월 16일 (76세)
국적
[[일본|

일본
display: none; display: 일본"
행정구
]]

출신지
야마나시현 코후시
학력
코후시립 코후 상업 고등학교
투타
우투우타
포지션
투수
프로입단
1965년 드래프트 1위
소속팀
요미우리 자이언츠 (1966~1983)
지도자
요미우리 자이언츠 1군 투수코치 (1984~1985, 1993~1997)
요미우리 자이언츠 1군 수석코치 (1998)
요미우리 자이언츠 감독 (2004~2005)

일본시리즈 우승 반지
1966
1967
1968
1969
1970
1971
1972
1973
1981
1994

1966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리그 신인왕
없음

호리우치 츠네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다케가미 시로
(산케이 아톰스)

1966년 일본프로야구 사와무라상
무라야마 미노루
(한신 타이거즈)

무라야마 미노루
(한신 타이거스)

호리우치 츠네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오가와 겐타로[1]
(주니치 드래곤즈)


1972년 일본프로야구 사와무라상
없음

호리우치 츠네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다카하시 가즈미
(요미우리 자이언츠)

1972,73년 일본시리즈 MVP
스에츠구 다미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호리우치 츠네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히로타 스미오
(롯데 오리온즈)

[[요미우리 자이언츠|요미우리 자이언츠]] 역대 감독
하라 다쓰노리
(2002~2003)

호리우치 츠네오
(2004~2005)

하라 다쓰노리
(2006~2015)

1. 개요
2. 학창시절
3. 프로 시절
4. 현역 은퇴 이후
5. 에피소드


1. 개요[편집]


일본프로야구 선수 및 정치인. 현 야구 해설가 및 평론가, 사와무라상 선정위원회 위원장


2. 학창시절[편집]


야마나시현 코후시 출신으로, 초등학교 시절 우동 만드는 기계에 오른손 검지가 1cm 정도 잘리는 부상을 입었는데, 사고로 변형된 검지를 역으로 활용하여 현역 시절 엄청난 낙폭의 드롭커브를 개발하여 주무기로 활용했다.[2] 고후 상고 1학년 때인 1963년부터 에이스 자리를 꿰차고 그해 하계 코시엔 예선대회에서 우승하며 꿈에도 그리던 고시엔 구장의 흙을 밟아보는 꿈을 이루나 싶었는데, 하필 이 해 대회가 기념대회로 개최되어 각 현당 1개교로 출장권이 늘어나면서[3] 48개 학교가 참가하는 바람에 한신 고시엔 구장만으로는 경기 운영이 어려워 한큐 브레이브스의 홈구장이던 한큐 니시노미야 구장까지 포함하여 분산 개최되었다. 이때 호리우치가 소속된 코후 상고는 니시노미야 조에 편입되는 바람에 3차전까지 이겨 8강에 진출해야 고시엔 구장에 갈 수 있게 되었는데, 그 3차전에서 이해 우승팀 메이세이 고교에게 11대 0으로 대패하며 결국 한신 코시엔 구장 그라운드를 밟지 못한 채 고교생활을 마무리지어야 했다.

참고로 이 에피소드는 아래에 따로 설명하지만 거인의 별 에서 언급되기도 했다.


3. 프로 시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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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드래프트 1순위로 입단하여 그 해 16승 2패, 평균자책점 1.39의 성적으로 신인왕과 사와무라상을 동시에 석권하며 일약 3대 괴동[4]으로 도약하며 이후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일본시리즈 V9를 견인하기도 했다. 이 해에 데뷔 후 13연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는데 이 기록은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릭 밴덴헐크가 2016년 시즌 14연승으로 갱신할 때까지 타이기록도 용납치 않았던 기록이었다.

1972년에는 26승[5]을 기록하기도 했으며, 데뷔 이후 1978년까지 13년 연속 두자리 승수를 챙기며 18시즌 동안 개인통산 203승 139패 6세이브, 탈삼진 1865개, 평균자책 3.27을 기록했다.

실력은 좋지만 입이 너무 가벼워서 구설수에 자주 오르기도 했는데, 팀 선배인 오 사다하루나가시마 시게오에게 대든다거나, 데뷔 첫 등판에서 긴장감을 줄인답시고 연습 투구때 대 선배이자 명포수모리 마사아키를 앞에 두고 공을 일부러 백 네트에 던졌다는 등등의 얘깃거리가 수두룩 하지만, 그 중 대표적인 것은 프로도 별거 아니다라는 말. 기숙사 생활 시절, 폐문시간 파기의 상습범으로서 알려져 있고 사감의 눈을 피하기 위해 목욕탕 창문으로부터 들어갔다든가, 빠져나가기 위해 사다리를 구매했다던가, 기다리고 있던 팀 선배 오 사다하루에게 걸려 맞았다는 일화도 있다. 당시 팀에서는 폐문시간을 한 번 어기면 8만엔, 2번째는 16만엔으로 회를 거듭할 때 마다 벌금이 배가 되는 징벌을 내리고 있었는데, 호리우치의 매월 실수령액은 30만엔 전후였기 때문에, 한동안 급료 봉투에 마이너스 6만엔으로 쓴 종이가 들어가 있었다는 일화도 있다. 은퇴 기자회견에서는 본인은 노력없이 재능 만으로 선수 생활을 해왔다고 당당히 말할 정도였다.

다만 이게 빈말은 아닌게 실제로 호리우치의 성적을 보면 데뷔 초창기가 오히려 더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는 걸 알수있다. 커리어 중반기(20대 중반) 이후로는 사실 이름값에 비해 영 모자란 활약을 보여줬고 30줄 넘어가는 순간 급격하게 하락세가 와서 명구회 가입조건인 200승도 간신히 채웠다.[6] 연도별 성적 추이만 놓고 보자면 정말 특별한 노력 없이 신인시절 엄청난 성적을 거둔 재능만으로 선수생활을 유지했다는 말이 과언은 아닌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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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모자를 삐딱하게 쓰고 경기에 나오는 통에 당시 요미우리 수뇌진들과 OB들이 뭐 저딴놈이 다 있냐고 디스했지만 데뷔하자 마자 요미우리를 대표하는 간판투수로 자리 잡으며 유야무야 넘어갔다. 호리우치가 현역이던 시절의 요미우리는 더 엄격해서 복장부터 FM으로 철저히 지켜야 했는데[7] 그걸 대놓고 어긴 선수 1호가 바로 호리우치 였다.


4. 현역 은퇴 이후[편집]


1983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했으며, 그 이후 친정팀 코치와 야구 해설가로 오랫동안 활동하다가 2004년 하라 타츠노리 감독의 후임으로 요미우리 자이언츠 감독으로 부임했다.

2004년 키요하라 카즈히로, 터피 로즈, 에토 아키라, 아베 신노스케, 니오카 토모히로, 타카하시 요시노부, 로베르토 페타지니, 코쿠보 히로키등 리그를 지배하던 강타자들을 수집한 핵타선을 구축하며 그해 NPB 통산 최다인 259개의 팀 홈런을 기록했지만 정작 팀 성적은 전해 하라와 동일한 3위에 그쳤고, 다음해인 2005년엔 구단 역대 시즌 최다패인 80패를 적립하며 5위로 추락하는 등 최악의 성적만 남긴 채 2년만에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위에서도 언급됐듯 팀의 파괴력 자체만 놓고보면 역대 최강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만 실상을 살펴보면 공격력에 몰빵한 나머지 수비 구성 등의 다른 요소가 너무도 부족했다. 당장 역대 최고인 259홈런을 친 2004년엔 정반대로 역대 최저인 25도루에 그쳤고, 골든글러브를 수상할 만큼 준수한 1루수비를 보여주던 페타지니를 키요하라와 병용한답시고 1루나 좌익이 아닌 우익수로 기용하거나 타카하시 요시노부터피 로즈를 동시에 기용하기 위해 우익수로도 수비 잘 한다는 소리는 못 들었던 로즈를 어거지로 중견수에 놓는 등 다소 이해하기 힘든 수비 구성을 보여줬다.

이 외에도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2005년 시즌 유니폼, 검정색 유니폼 등으로 1975년 팀 창단 최초 꼴찌와 더불어 구단에 매우 치욕적인 흑역사를 만들어 낸 감독. 참고로 역대 요미우리 감독 중에서 유일하게 통산승률이 5할 미만인 감독이며(133승 144패) 양대리그 시대 이래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한 적이 없는 유일한 감독인 데다가 (타카하시 요시노부를 제외하면) 일본시리즈 우승은 커녕 센트럴리그 우승 경력도 없는 유일한 감독이다. 재임기간이 2년밖에 안 된 점과 클라이맥스 시리즈가 2007년부터 시작된 걸 감안해도 너무나 초라한 기록. 게다가 투수 출신이면서 재임기간 2년간 팀 방어율이 2004년 4.50, 2005년 4.80로 치솟는 등 투수진이 무너지는 것을 막지 못했다. 당시가 래빗볼 시대로 불리는 극악의 타고투저였음을 반영해도 전혀 좋지 않은 기록이다.

인기도 더럽게 없어서 안 그래도 하락하던 요미우리의 야구 중계의 시청률이 이 감독이 재임하는 동안 곤두박질을 쳐서 일본 프로야구 위기론까지 나오게 만들었다. 그야말로 감독시절 자체가 흑역사. 2003년 시즌 하라가 기대에 못미치는 성적을 거둔데다 호시노의 한신 타이거스가 시즌 개막 초부터 치고 나가면서 18년만의 우승에 대한 기대감으로 일본 스포츠 매체의 관심이 한신에 집중. 이 때문에 요미우리의 인기하락과 요미우리의 TV중계의 시청률이 기대에 한참 못미치는 결과를 가져오자, 그다지 나쁜 성적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일련의 부진의 책임을 전부 하라에게 뒤집어 씌워서 아무 생각없이 덮어놓고 자른 게 화근. 결국 뚜렷한 비전도 없이 일단 덮어놓고 부진의 책임을 감독에게 전가하여 잘라놓고 보니, 마땅히 준비된 후계 감독도 없고 급하게 생각해 낸 후보가 이 호리우치 선생 되시겠다. 감독으로서 전혀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호리우치[8]에게 일단 감독을 맡기고 본 순간부터 이 흑역사는 예고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결국 책임 회피를 위한 프런트의 삽질+구시대적 순혈주의를 고집한 악습이 불러온 참사라면 참사라고 하겠다.

이러한 준비되지 않은 팀 수뇌부의 상황으로 인해 팀내적으로도 문제가 많아서 당시 팀리더격이던 기요하라 카즈히로와의 불화는 말할 것도 없고 터피 로즈도 코칭스탭과의 불화로 불명예스럽게 팀에서 나오게 되는등 여러모로 개판오분전인 상황이었다. 로즈는 요미우리에서 퇴단하고 2년뒤 오릭스 버팔로즈에 다시 입단하여 코너 외야, 지명타자 자리에서 리그 최고의 홈런타자로서의 면모를 다시 되찾았다. 결국 호리우치가 해놓은 삽질은 2006년 하라 타츠노리가 재취임하여 겨우겨우 수습했다.[9] 그가 요미우리 감독하면서 한 업적이라고는 단지 우츠미 테츠야를 키운 거 밖에 없을 지경. 호리우치 시절 말미에는 가메이 요시유키 등의 신진 선수들의 활약도 어느 정도 있었지만 B클래스 추락은 막을 방법이 없었다.

계속 언급한 대로 그의 품성은 엉망이었지만, 그래도 실력은 뛰어났기 때문에 2008년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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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7월, 참의원 선거 유세중이던 호리우치.

이후 닛폰 테레비 해설가로 활동하던 중, 2010년 7월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자유민주당 비례대표로 출마하여 정계 진출을 노렸는데, 개표 결과 비례대표 13위로 아깝게 낙선했다.[10] 그러고는 TV에 출연하여 "나는 머리 따위는 숙이지 않는다" "모르는 사람에게 숙이는 머리는 가진 적 없다" 라고 나불대고 있었다.

그러나 2013년 7월 31일 자유민주당 비례대표 의원이던 나카무라 히로히코의 사망으로 의원직을 승계하면서 2013년 8월 6일 정계에 입문, 감격의 의원 취임 선서를 할 수 있었다. 잔여임기 승계이므로 2016년 7월 25일까지 임기 보장.

2016년 6월 22일, 참의원 재선 도전을 선언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꽤 큰 차이로 낙선했다. 이후엔 또다시 해설가/평론가로 활동 중.

그리고 9월 10일 요미우리 자이언츠-히로시마 도요 카프도쿄돔 2연전 1차전 때 해설로 참여해 팀이 6-4 역전패로 깨지면서 카프의 25년 만의 리그 우승을 헌납하는 걸 보았다.


5. 에피소드[편집]


  • 그가 선수시절 달았던 등번호 18번은 이후 일본에서 에이스 투수들이 선호하는 번호가 되었다. 한국에서도 선동열이 달았을 정도.

  • 거인의 별 에서는 휴마의 입단테스트 상대로 첫 등장. 자기는 못가봤던 고시엔에 나간 휴마에게 열폭하는 찌질한 모습을 보인다. 작중에서는 휴마와 함께 거인의 원투펀치로 활약하지만 작품의 특성상 그리 많이 묘사되지는 않는다. 거인의 별 후반부가 연재되던 시기에는 이미 전성기가 지났으며, 현실에서도 에이스의 자리를 에가와에게 물려준 상황이었던것도 영향이 있었다.

  • 은퇴 경기에서 홈런 투수로서도 대단한 업적을 쌓았지만 만약 타자를 했더라도 매년 30홈런 이상을 기대할정도로 타력 또한 대단했던 선수이다. 투수로써 한 경기 3홈런 기록까지 있을 정도다. 그 말라빠진 몸과 에로틱한 타격폼을 가지고 팔만 돌려서 홈런 뽑는 모습은 손목힘이 그만큼 대단했다는 증거다.
1967년 10월 10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의 홈 경기 때 선발 등판하여 경기 후반까지 무려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고 있었는데 정작 호리우치 본인은 덕아웃에서 "지금 노히트 노런 이라고 시끄러운데 그거 혹시 내 얘기인가?" 라고 묻자[11] 동료들이 어이 없다는 듯 "너야 너! 네가 지금 노히트 노런 중이라고!" 라고 핀잔을 줬다. 그러자 호리우치는 "아 나였구나. 사실 노히트 노런 말고 다른 것에 신경이 쓰여서..." 라고 했는데 그 날이 바로 호리우치가 3연타석 홈런을 기록한 날 이었다. 2, 4, 6회말에 전부 좌측 담장을 넘기는 홈런을 때린 호리우치는 당시까지 오 사다하루 이외엔 유래가 없는 한 경기 4연타석 홈런을 노리고[12] 7회말 네 번째 타석에 들어섰는데, 결과는 중견수 앞 안타. 투수임에도 4타수 4안타라는 말도 안되는 맹타를 기록했지만 4연타석 홈런에 실패한 호리우치는 실망을 감추지 않았고 결국 '에라 이렇게 된거 노히트 노런이나 해보자' 라는 심정으로 완투하여(이미 스코어도 11-0으로 크게 이기고 있었다) 결국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다고
1973년 난카이 호크스와의 일본시리즈에선 2차전 7회말 무사 만루에서 구원등판해 5이닝 무자책 승리투수가 됐는데 연장 11회초에 1사 2루에서 결승 적시타를 기록했으며 이틀 뒤 홈경기로 열린 3차전에선 선발로 나와 2실점 완투승에 3회말 솔로홈런, 6회말 투런홈런을 날렸다. 당연하지만(?) 일본시리즈에서 투수가 한 경기에 멀티홈런을 기록한 유일한 사례. 결국 3경기 등판 2승 무패 평균자책점 0.91에 타율도 0.429(7타수 3안타 2홈런) 4타점으로 2년 연속 일본시리즈 MVP를 획득했다.
1983년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는데 은퇴경기에서도 8회초에 3점 앞선 상황에서 등판해 8회말 타석에서 홈런을 치고 2이닝을 막아 세이브 기록.
호리우치의 현역 시절 타격 성적은 1010타석 174안타 21홈런 82타점 타율 .172로 투수임을 감안하면 매우 준수한 성적. 무엇보다 통산 20개의 홈런을 치려면 매년마다 최소 한두개 정도는 때려줘야 하는데 이는 투수 입장에서는 전혀 만만치 않다.

  • 현역시절 꼴통짓만 골라서 했던데다[13] 선배들에게 대든 적도 한두번이 아니었고 몰래 외박을 나가다 오 사다하루 에게 강펀치를 맞고 기절한 적도 있었다. 오 사다하루의 은퇴식때 배팅볼을 던졌는데 예의상 홈런을 맞아줘야 하는 타이밍에서 143km짜리 고속구와 드롭볼로 삼진을 시켜버리고 실실 웃었고 그다음에 서로 타석과 마운드를 바꿔서 오 사다하루가 피칭을 했는데 그걸 통타해서 홈런을 쳐버리고는 베이스를 돌면서 오 사다하루에게 썩소를 날리는 모습도 있다. 일본 토크프로에도 그 동영상이 개그요소로 쓰일정도다. 선수시절 쌓인 원한에 대한 일종의 복수였던듯...

  • 현역 시절 완벽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줬던 호리우치는 대부분의 우투들이 힘들어하는 3루 측으로 치우친 번트 또는 땅볼 수비에조차 강점이 있었다. 상당히 많은 투수들이 땅볼 또는 번트 수비에 약점을 보이는 것을 생각한다면 과연 야잘잘.[14] 하지만 그는 신인 시절 3루와 투수 사이로 느리게 흐르는 투수 앞 땅볼을 잡으러 갈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바로 팀 선배이자 레전드 3루수였던 나가시마 시게오가 "그 위치는 3루수가 자신의 진면목을 보여 줄 수 있는 타구다" 라며 공을 잡지 말라고 명령했기 때문. 타격 못지않게 뛰어난 3루 수비로 유명했고 거기에 자부심을 느낀 나가시마였기 때문에 그런 명령을 한 것인데, 어이가 없어진 호리우치는 "아니 그러면 선배가 못잡을 것 같으면 어떡합니까?"하고 항의했으나 시게오는 "그럴 땐 내가 잡아!라고 소리칠테니 그 때 너가 잡으면 된다"라고 요지부동이었다. 아무리 상또라이 기질이 다분한 츠네오였지만 연배가 한참 차이나는데다 상또라이 선배인 시게오를 거스를 수 없었던 츠네오는 충실히 선배의 말을 들을 수 밖에 없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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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름대로 시대를 풍미한 명투수였음에도 불구하고 성격이 이렇다보니 후배들에게 그다지 대접받지 못한다. 코치 시절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와 경기 도중 벤치 클리어링이 일어났는데 그 때 호리우치가 헬멧으로 상대선수를 가격하다가 오히려 상대팀 코치도 아니고 당시 선수였던 카나모리 에이지한테 입안을 쥐어뜯기는 일생일대의 굴욕을 겪었다[15] 감독 시절에는 팀의 간판 선수인 키요하라 카즈히로에게 대놓고 디스를 당하거나 하이파이브까지 씹히는 굴욕까지 맛보았다.

  • 날라리 이미지가 강하고 본인도 재능만으로 야구했다는 드립을 치기도 했지만, 실제로 야구에 관해서는 매우 성실했다고 한다. 등판 이후 자신의 투구 결과를 세세하게 분석해 노트에 작성했다고 하며, 선발 등판 전날임에도 잠들지 않을 정도로 진지하게 투구폼을 가다듬고 경기 전이나 캠프 회의에서 졸 정도로 열심히 공부했다고.

  • 트러블메이커 이미지와 달리 똥군기와는 담을 쌓은 인물이었다고 한다. 중학교 때는 야구부의 똥군기를 혐오해 축구부 활동을 했고, 고3때 야구부 주장에 취임한 뒤에는 상급생이 하급생을 이유없이 구타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일본 고교야구계(와 이 악습을 그대로 이어받아버린 한국 고교야구계)가 2000년대 전까지 똥군기, 폭력으로 악명높았던 걸 생각하면 이 점에 관해선 오히려 시대를 앞서 나간 개념인이었다. 또한 현대야구에서도 내야수 마스다 다이키[16]가 투수로 등판했을 때 이하라 하루키 등 다른 요미우리 선수, 코치 OB들은 극대노하며 꼰대스러운 의견을 내놓았지만 호리우치는 OB들의 입장을 이해하면서도 다르빗슈 유, 우에하라 코지 등 젊은 선수 및 야구팬들의 의견을 존중한다고 언급하여 열린 사고를 보여주기도 했다.

  • 자서전을 냈었다. 제목은 "나는 악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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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검은 안개 사건에 연루되어 영구제명되었다.[2] 다섯살 때 사고로 절단된 왼손 검지로 낙폭 큰 커브를 고안한 곤도 마사토시의 경우와 오버랩 된다. 미국의 모데카이 브라운과도 비슷한 경우. 당시 일본 TV방송을 알음알음 볼 수 있던 곳이 부산광역시 였는데 그 동네 출신의 불세출의 에이스가 호리우치의 커브를 배워서 주무기로 썼다고 한다.[3] 당시엔 도도부현별 1개교가 아닌 각 지역을 간토, 호쿠리쿠, 시코쿠 등의 지구로 구분하여 지구별 1개교로 출장권을 주었다. 이후 1978년부터 코시엔 출장권을 현재의 도도부현 예선대회 우승팀(도쿄/홋카이도는 지역을 나눠서 2개 부여)에게 주는 도도부현별 1개교 체제로 변경되었다.[4] 怪童, 일본프로야구에서 아주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는 신인에게 붙여주는 별명. 초대 괴동은 니시데츠의 강타자였던 나카니시 후토시 였고, 도에이의 강속구 투수였던 오자키 유키오가 2대 괴동이었다. 호리우치가 3대를 잇고 그 다음 4대가 마쓰자카 다이스케 였다.[5] 24선발승으로 그 해 유일하게 20선발승 이상 기록[6] 마지막 두 자릿 수 승리를 거둔 게 만 30세되던 1978년에 거둔 12승 이었다. 그 이후엔 엄청나게 추락해서 1983년 은퇴 때까지 5년간 9승밖에 못 거뒀다. 참고로 200승 달성 경기인 1980년 6월 2일의 VS 야쿠르트 스왈로즈 전 때는 강우콜드로 승리투수가 되었다.[7] 원정경기 이동 시 등 경기장 밖에서 단체로 행동할 때엔 무조건 정장 차림이 원칙이다. 한여름 삼복더위에도 정장차림을 고수한다.[8] 이게 왜 그런지는 요미우리 자이언츠 항목 참조. 전임 하라의 경우에는 나가시마의 퇴임 3년 전에 해설자로 활동하던 하라를 수석코치로 영입해 후계자 수업을 받게 했다. 그런데 이 하라와의 후계자 싸움에서 밀려 수석코치를 그만둔 게 호리우치. 결국 거인은 믿는 하라에게 발등이 찍히자 자기들이 함량미달 판정을 내린 호리우치를 재활용한 셈이다.[9] 복귀첫해에는 핵타선빨로 1위로 질주중이었으나 고쿠보 히로키타카하시 요시노부가 드르렁하는바람에 아베 신노스케의 최악의 부진속에 이승엽이 혼자서 견제받아가며 팀타선을 혼자서 이끄는 바람에 꼴찌할뻔 했다.[10] 12위 까지 당선권 이었다.[11] 야구의 암묵적인 룰을 보면 알겠지만 투수가 노히터 혹은 퍼펙트 게임을 하고 있으면 동료들은 그에 대한 언급을 자제하는 것이 보통이다. 심지어 경기에 집중 할 수 있도록 그 선수에게 접촉조차 하지 않는다. [12] 4연타석 홈런 자체는 3회 달성되었지만 한 경기 4연타석 홈런은 오 사다하루가 유일했다. 또한 투수의 3연타석 홈런 기록은 2019년 현재까지도 일본프로야구 사상 유일한 기록이다.[13] 위에서 언급했듯 모자를 삐딱하게 쓰고 등판 한다던가 진중한 분위기의 훈련때 엉덩이춤으로 몸을 푼다던가 심심하면 건방진 망언을 뱉는다던가 신인왕을 차지하고 나서 붓글씨로 나 20승 투수야 하고 자랑하는 문구를 썼다던가...[14] 맨손으로 캐칭해서 1루에 던지면 되지 않느냐 하지만 애초에 베어한드 캐치가 위험한데다 손을 보석같이 대해야 하는 투수에게 베어핸드 캐치를 하라고 하면 그건 그거대로 미친 것이고. [15] 참고로 사진엔 안 나오지만 저때 유니폼이 찢어지고 안경까지 벗겨지는 희대의 굴욕도 당했다. 안경은 다행히 신인 시절의 마쓰이 히데키가 주운 덕에 난리통에 무사했다는 후일담이 있다..라고 적혀있었으나 마쓰이가 주웠을 땐 이미 개발살난 후였다. 참고로 카나모리는 세이부-한신-야쿠르트를 거쳐가며 준주전급 외야수로 현역생활을 했으며 은퇴 후 세이부 등에서 타격 코치를 역임하여 와다 카즈히로, 알렉스 카브레라 등의 강타자들을 육성하는 등의 성과를 냈다.[16] 요미우리 내야수 출신으로 독립리그를 거처 입단했다. 현재는 대주자 요원으로 많이 나온다. 2020년 한신과 경기도중 초반부터 경기가 기울어져 중반부터 투수로 등판해 1이닝 1볼넷으로 투수 데뷔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