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유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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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胡惟庸
(? ~ 1380)
원말명초의 인물로 명나라의 관료, 정치가이다.
나름 수완 좋은 정치가로서 명나라 개국 초기에 권신이 되어 최고의 권력을 누리다가 결국 역모죄로 숙청되었다.
2. 생애[편집]
호주(濠洲) 정원현(定遠縣)[1] 출신으로 젊었을 적 행보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당시 주원장의 내정 참모였던 이선장과 동향이라 그런지 친분이 있어 이 인연으로 이선장의 추천을 받았다.
1355년(지정 15년) 주원장 원수부(元帥府)의 하급 관리인 주차(奏差), 전선사(轉宣使)가 되었다. 1357년(지정 17년) 영국현(寧國縣)[2] 의 주부(主簿)가 되었다가 곧바로 지현(知縣)이 되었다.
1363년(지정 23년) 당시 진우량과 전쟁 중이던 주원장에게 합류했다. 이 때 주원장은 수군 강화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는데 호유용은 전선 몇 척을 자비로 건조하여 주원장에게 진상하면서 합류했다고 한다. 주원장 역시 젊고 재주있는 호유용을 높이 평가하면서 이선장을 보좌하여 내정 업무를 맡겼다.
1364년(지정 24년) 길안부의 통판(通判), 1366년(지정 26년) 호광(湖廣)[3] 의 안찰첨사(按察僉事) 등 지방관을 역임하고 1367년(지정 27년) 태상소경(太常小卿)을 거쳐 곧바로 태상경(太常卿)이 되었다.
1368년(홍무 원년) 명나라 건국 이후 개국 초기 중서성(中書省)을 맡은 이선장을 돕다가 1370년(홍무 3년) 종2품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면서 처음 중서성에 들어갔고, 이선장, 서달 등 1세대 공신들이 중서성에서 하나둘 물러나고 유기 파벌에서 승승장구하던 양헌이 처형되자 1371년(홍무 4년) 정2품 좌승(左丞), 1373년(홍무 6년) 정1품 우승상(右丞相)을 거쳐 1377년(홍무 10년) 중서성에 들어간 지 7년만에 정1품 좌승상(左丞相)이 되었다.[4]
호유용은 이선장을 필두로 하여 당시 공신과 관료들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회서(淮西) 파벌에 속하였다. 본인의 빼어난 행정 능력과 정치 공작 덕분에 황제의 총애도 받았지만 특히 이선장의 가장 가까운 후배이자 그 동생 이존의(李存義)의 사돈이었으므로 연공서열에서 앞서는 다른 선배 및 공신들을 제치고 정권을 잡을 수 있었다. 이선장도 일선에서 물러나고도 호유용을 통해 간접적으로 영향력을 얼마간 행사할 수 있었다.
2.1. 호유용의 옥[편집]
그렇게 명나라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호유용은 한순간에 제거당했다. 1379년(홍무 12년) 점성국(占城國)[5] 사신의 입조(入朝) 미보고 문제로 예부(禮部)와 충돌을 겪은 일이 화근이었다. 이 문제가 드러나자 홍무제는 그동안 보여준 총애는 온데간데 없이 호유용을 혹독하게 추궁했고 호유용은 조정에서 공식적으로 사죄하는 굴욕을 겪어야 했다. 이때 호유용과 함께 추궁되고 사죄했던 우승상 왕광양(汪廣洋)이 얼마 되지 않아 죽고 첩 진씨(陣氏)가 곧 따라 죽자 그 사망 사건을 조사하던 중 지방관이었던 진씨의 아버지가 처벌되어 중서성에 재산과 처자를 몰수 당하는 과정에서 왕광양이 멋대로 진씨를 첩으로 삼았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에 총책임자인 호유용을 비롯하여 중서성과 육부 관리가 모두 죄목에 엮이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호유용의 아들이 도시 한복판에서 말을 타고 달리다 수레와 부딪혀 죽자 호유용이 그 수레 끄는 사람을 멋대로 죽인 것을 홍무제가 알게 되었는데 그 죗값을 치를 때 재물로 형벌을 대신하지 못하게 했다.
호유용의 추락이 계속되자 더 이상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호유용 파벌의 하나인 어사중승(御史中丞) 도절(涂節)이 1380년(홍무 13년) 호유용의 모반과 성의백(誠意伯) 유기 독살 혐의를 고변하면서 사건은 급진전되었다. 황제를 기만하고 국정을 농단한 혐의, 친인척이나 자기 파벌을 멋대로 벼슬에 앉히거나 공권력을 남용하는 등의 각종 인사 및 행정 비리, 문무관을 포섭하여 반란을 꾀한 혐의에 추가 증언들이 쏟아지면서 호유용과 그 일파는 선수를 쳐 고변한 도절을 포함하여[6] 대거 숙청되었다.[7]
호유용이 처형된지 4일 만에 홍무제는 승상직과 중서성을 혁파하고 독재 체제를 구축한다. 이 과정에서 육부 상서들의 관품(官品)을 정3품에서 정2품으로 올리고 황제의 업무를 도와줄 전각대학사(殿閣大學士)를 겸임시켰다. 영락제 시기에는 문연각에 여러명을 입직시키며 자문에 응하도록 하여 내각대학사 제도가 시작되었다. 이후 세월이 지나면서 내각대학사가 과거 상국이나 승상의 역할처럼 변질되고 내각의 역할이 이전의 성(省)들처럼 변질되는데 이 내각 제도는 청나라에도 이어졌고, 영어 단어 Cabinet의 번역어로 채택돼 현재까지 쓰이고 있다.
1386년(홍무 19년) 호유용이 왜국과 내통했다는 증거가 제시되었다.
1390년(홍무 23년) 북원 정벌 중 포로로 잡힌 북원 측 인사를 조사하던 중 호유용이 이선장을 포섭하려는 과정에서 자신이 왜국과 북원과 결탁했다고 큰 소리친 혐의[8] 와 관련자가 드러나, 10년 전에 겨우 목숨만은 건졌던 연루자들에게 다시 피바람이 불면서 이선장 등 주요 공신들도 마저 숙청당했다.
중국에서 호유용안(胡惟庸案)이라고 하는 이 사건으로 호유용 파벌은 그야말로 풍비박산이 났다. 파벌에 연루된 관료와 그 일족만 해도 이 사건으로만 12년 동안 무려 30,000여 명이 처형되었고 같이 처형된 고위 관료만 해도 20여 명이 넘을 지경이었다.
나라를 이끌어나가는 능력은 뛰어났으나 반골의 기질이 강했고 권력을 탐하고 황제에게 모반한 역사에 두 번 다시 있어서는 안 될 간신으로 기록됐다. 정사와 야사를 종합하면 호유용의 국정농단은 대체로 사실로 여겨진다. 호유용은 자신의 재능과 권력을 과신했고 정치적으로 무모한 행위를 자주 저질렀다. 몇몇 사람들이야 호유용이 겉으로는 튼튼해 보여도 황제의 총애를 잃는 순간 무너질 돌탑에 불과하다는 것은 알았겠지만 그 돌탑이 무너지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를 보게 될지는 누구도 예측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옹호론을 펼치는 입장에서는 신하들을 토사구팽하기 위해 이용당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에 따르면 독으로 독을 제압한 셈이다.
1392년(홍무 25년) 정녕후(靖寧侯) 섭승(葉昇)이 죽고 나서야 비로소 끝나는가 싶더니 다음해인 1393년(홍무 26년) 남옥(藍玉)의 옥이 새로 터지면서 숙청은 계속되었다. 호유용의 옥과 남옥의 옥을 아울러서 호람의 옥(胡藍-獄) 혹은 안(案)이라고 한다.
3. 야사[편집]
홍무제는 호유용의 뛰어난 능력을 좋아했어도 그가 자신의 능력을 믿고 황제의 총애를 등에 업고 교만한 행동을 하는 것은 싫어했다고 한다. 실제 호유용을 경계하게 된 계기는 명확하지 않지만 야사에 따르면 홍무제가 어떤 말을 했을 때 이를 전해 들은 호유용이 숨겨진 의미를 혼자 해석해서 멋대로 일을 꾸미면 홍무제는 일이 알아서 잘 풀린 것을 다행으로 여기면서도 자기 모르게 일을 처리한 것에 대해 못내 아니꼬워했다는 것이다. 즉, 삼국지연의의 양수의 계륵 일화와 비슷한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드라마《주원장》에서는 비슷한 거 같으면서도 다소 포인트가 다르게 묘사되었는데, 주원장을 포함하여 전국 의병 모두의 명목상의 주군이자 주원장의 칭제건원에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이 될 한림아를 수장시킨 것도 주원장과 단 둘이서 대화하면서 한림아의 존재가 부담스럽다고 넌지시 얘기하자 주원장의 뜻을 간파한 호유용이 주원장의 경호실장 격으로 나왔으며 실존인물은 아니고 가상인물인 대호(大虎)에게 넌지시 암시하는 걸로 나오며, 여기까지는 사실 주원장의 의지를 넘어서서 멋대로 일을 꾸몄다고까지는 할 수 없고, 직장 생활에서도 흔히 나오는, 부담스러운 일을 추진하는 것에 있어 상급자가 책임을 회피하려는 완곡어법 정도인데, 문제는 어쨌든 한림아는 주원장의 명목상의 주군이라 주원장 진영에서는 사건의 진상과는 상관 없이 일단 슬퍼하며 한림아의 상을 치러야 해서 일부러라도 무거운 분위기를 연출해야 하고, 또한 세간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호유용은 주원장 근처에 당분간 얼씬거리면 안 되는데도 불구하고, 그러기는커녕 호유용이 주원장에게 마치 공적을 자랑하며 인정을 바라는 듯이 미소를 머금고 말에 오르기를 청하면서 부축하려는데, 기대와 달리(?) 주원장이 호유용의 부축을 뿌리치고서 말에 올라가고, 기대 밖의(?) 냉대를 당하고 멍하게 있자 그 장면을 행렬 조금 뒤의 마차에 타고 있던 이선장이 보고 있다가 자기 마차에 태워주고서는, "자네는 큰 공을 세워놓고도 왜 눈치없는 짓을 해서 일을 끝까지 제대로 마무리를 하지 못하냐?"는 식으로 크게 질책하는 장면이 있다. 이로 인해 개국 후 한동안 근신(당)해 있다가, 주원장이 불러서는 독대하면서, 한림아를 수장시키고자 했던 것은 솔직히 본인의 의도가 맞았고 그 의도를 읽어서 잘 처리한(?) 공은 인정하지만, 대호를 죽이려는 의도는 없었는데 너는 대호까지 멋대로 죽였기 때문에 개국 후 일부러 벼슬을 안 주고 방치했다고 밝히며, 밀고 당기기를 하면서 단번에 정3품 벼슬을 주었으면서도 앞으로 내 뜻을 겉넘지 말라는 경고를 남겼다. 이 경고가 복선이 되어 나중에 호유용의 옥으로 이어진다.
개국공신인 서달을 몰락시키고자 그 밑에 있는 사람을 매수하여 거짓 고변을 시켰는데 오히려 그 사람이 호유용의 죄를 고변하는 바람에 궁지에 몰릴 뻔한 적도 있었지만 홍무제와 서달이 시큰둥한 태도로 나와서 무사히 넘어갔다고도 한다. 홍무제는 호유용이 개국공신을 공격하려 했다는 증거가 있어 이를 공론화시킬 수 있음에도 그냥 덮었다고 한다. 또한 유기의 죽음도 중국에서는 당시부터 호유용이 의도적으로 독살한 것이라는 견해가 있었다.
그러나 홍무제가 공신을 억제하기 위해 호유용의 전횡을 눈감아주고 있었다지만 호유용은 주요 공신인 이선장과 지연과 학연으로 얽혀 있어 사실상 공신 세력의 일파였고, 유기와는 파벌이 달라 그렇다 치더라도 서달과는 단순히 개인적으로 사이가 나빴을 뿐이었다. 실제로 건국 초기 공신 세력을 공격했던 양헌과는 대립을 겪기도 했다. 이는 드라마《주원장》에서도 고관대작들이 드잡이질까지 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4. 대중매체에서[편집]
2006년 드라마《주원장》에 등장한다. 주요 빌런 중 하나였으나 도절이 비리를 고발하며 주원장에게 숙청당한다. 특이한 사항으로는 극중에서는 피부병이 있는지 계속 온몸을 긁는 모습이 묘사되는데, 주원장은 호유용을 끝까지 조롱하며 맨몸으로 숲 속 나무에 묶어놓고 온몸이 벌레에게 쏘여 죽어가게 만든다. 호유용은 처음엔 의연하게 버텼으나, 가려움증을 도저히 이기지 못하고 정신줄을 놓고는 "내 비록 천하의 명재상은 아니었으나 가려워 죽기로는 처음이구나! 통쾌하다! 통쾌해!"(...) 하며 온몸이 시뻘겋게 부어오른 몰골로 사망한다.
2015년 드라마《주원장과 유백온》에 등장한다. 태상시 소경에 불과했던 호유용은 이선장에게 한혈마를 바치고 중서성 참지정사로 승진했다. 반대파인 유백온을 제거하려고 증거를 조작해 여러 번 탄핵했으나 유백온의 첩보 능력이 훨씬 높아서 계속 실패했다. 홍무제는 호유용의 충성심이 부족하다고 평가했고 또한 호유용의 머리로는 유백온을 절대 탄핵할 수 없으니 헛수고하지 말라고 언급했다. 사건을 조작해서 유백온의 외사촌동생을 처형했다.
2022년 드라마《산하월명》에 등장한다. 홍무제는 호유용의 능력을 높게 평가했지만 간신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비밀리에 자기 세력을 통해 다년간 대규모로 세금을 횡령했다. 영락제가 금의위로 대신들을 통제하는 것을 호유용은 불편해 했다. 독재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호유용 세력을 제거하려는 목적이 있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호유용 파벌이었으나 호유용의 권세가 끝났다고 생각한 도절이 비리 내용을 실토하면서 관리 1,700명이 처형되고, 10,000명 이상이 유배당하고 호유용은 자결했다.
게임《징기스칸 4》에서 시나리오 4에 등장하며 정치 77, 전투 58, 지모 64의 균형잡힌 능력치를 자랑하고 있으나 특기가 농업, 상업, 건설로 전투 특기가 없고 병과 적성도 보병 C, 궁병 C, 기병 C, 수군 E로 내정형에 가까운 장수이다.
[1] 오늘날의 안후이성 추저우시(滁州市) 딩위안 현(定远县)[2] 오늘날의 안후이성 쉬안청 시(宣城市) 관할 닝궈 시(宁国市)[3] 오늘날의 후베이성 및 후난성[4] 명실록에서는 1377년에 좌승상이 되었다고 하고 명사 호유용전에서는 1373년에 우승상을 거쳐 곧바로 좌승상이 되었다고 한다.[5] 옛날 베트남 중남부에 있었던 참파[6] 비록 모반에 참여했어도 처음 고변한 사람의 목숨은 살려주는 게 보통이지만, 주원장은 도절이 모반에 참여한 후, 실패가 확실시 된 뒤에야 고변했다는 명분을 들어 그를 죽였다.[7] 드라마《주원장》의 최후는 정말 끔찍한데, 호유용이 범죄 혐의로 인해 수감된 옥에서 이와 벼룩 때문에 간지럽다고 말하자 홍무제는 "그럼 간지러워서 죽는 형을 내리겠다."고 하여 상의 탈의 후 나무에 묶어 놓고선 모기들이 밤낮을 물게 하였다. 물론 모기 물린 것으로 죽는 것이 아니라 아사겠지만... 나중에 죽은 모습을 보면 상체가 벌겋게 되어 있을 정도. 얼마나 가려웠을지는 상상에 맡긴다. 홍무제의 독한 법 집행을 본보기로 만든 듯 하다.[8] 신성곤 & 윤혜영의《한국인을 위한 중국사》에서는 이 호유용의 옥에서 "모반을 위해 북원과 일본에 사신을 보냈다는 것은 입증되지 않은 사실이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반역 & 매국노라면 사실이 아니더라도 여론몰이 정도는 확실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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